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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프랑코/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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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군인 경력
2.2.1. 모로코의 전쟁영웅2.2.2. 제2공화국
2.3. 스페인 내전
2.3.1. 장군들의 반란2.3.2. 권력장악2.3.3. 내전의 승리
2.4. 제2차 세계 대전과 프랑코2.5. 프랑코의 정치
2.5.1. 무자비한 철권 통치 및 1인독재2.5.2. 학계와 문화계 탄압2.5.3. 경제정책2.5.4. 대외관계2.5.5. 심화된 지역 갈등과 분리주의2.5.6. 우생학2.5.7. 섭정 통치2.5.8. 사망
3. 프랑코 통치 이후

1. 개요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생애를 서술한 문서.

2. 생애

2.1. 유년기

1892년 12월 4일에 스페인 북부의 주요 해군 기지였던 갈리시아 주 페롤의 해군 가문에서 태어났다. 1살 위 형인 니콜라스와 동생 라몬, 그리고 2명의 누이가 더 있었는데, 이중 해군 장교였던 형 니콜라스는 프랑코의 집권에 큰 공헌을 했다. 동생인 라몬은 뛰어난 실력의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다.

프랑코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우했다. 걸핏하면 술꾼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 "아들이 계집애 같고 머리가 나쁘다"며 욕을 얻어먹었으며, 학교에선 여자 같은 목소리 때문에 친구들에게도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1] 프랑코의 권력욕이 이러한 어린 시절에 대한 PTSD라는 분석이 있다. #

2.2. 군인 경력

2.2.1. 모로코의 전쟁영웅

프랑코는 집안 내력에 따라 스페인 해군에 지원하려 했지만, 그 무렵 스페인이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의 식민지를 상실하고, 해군도 대폭 축소되어 해군사관학교가 1906년부터 1913년까지 문을 닫았기에 아버지의 말에 따라 1907년 톨레도에 있는 육군 보병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이 시기 프랑스에 있는 École Supérieure de Guerre(고등 전쟁 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았고, 필리프 페탱의 지도를 받았다.

1910년 사관학교를 졸업해 중위가 된 프랑코는 1912년에 모로코 전선에서 벌어지는 멜리야 전쟁에 참전했다. 리프 전쟁에서 프랑코는 지리멸렬한 지휘로 추태를 보이던 다수 스페인군 지휘관들과는 달리 모로코 현지인들로 구성된 외인부대 레굴라레스의 지휘관으로 맹활약해 일약 전쟁영웅으로 부상했다.[2] 그 공으로 1916년에는 스페인군 최연소 대위가 되어 전도유망한 장교로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 비우츠 전투에서 한쪽 낭심에 탄환을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부상 중에도 의사를 권총으로 협박해 수술을 집도시켜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외인부대원들로부터 알라의 축복(بركة)을 받은 기적의 사내라고 불리게 된다. 이후 프랑코는 별다른 무공훈장을 받지는 못했으나, 그 대신 1917년 소령으로 진급하여 스페인 역사상 최연소 영관 장교가 된다.

1920년 호세 미얀아스트라이 중령[3]프랑스 외인부대를 본떠 스페인 외인부대를 창설했을 때 스페인 외인부대의 초대 부사령관이 되었다. 1921년 안누알 전투에서 스페인군이 아브드 엘 크림의 리프 공화국군에게 궤멸적인 대패를 당하고 멜리야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프랑코의 외인부대는 3일에 걸친 강행군으로 리프 공화국군을 물리치고 멜리야를 구했다. 그 공로로 1923년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상관인 미얀아스트라이 중령의 뒤를 이어 외인부대 사령관이 되었다. 같은 해 결혼도 했는데, 스페인군의 전쟁 영웅이었기에 결혼식에서 대부 역할을 국왕 알폰소 13세가 맡아주었다.

1924년에는 셰프샤우엔에서 스페인군을 무사히 철수시킨 공으로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1925년에는 리프 공화국 와해를 위한 프랑스-스페인 합동공세의 알 호세이마 상륙작전에서 선봉으로 또다시 공을 세웠다. 리프 전쟁 당시 보여준 탁월한 지도력으로 1926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당시 유럽 최연소 장성이 되었고, 1928년에는 사라고사에 새로 설립된 육군사관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새로 설립된 육사는 기존의 보병, 기병, 포병 장교를 개별적으로 양성하던 관례를 깨고, 통합적인 장교양성과정을 도입하여 육군 내부의 결속력 강화를 목표로 하였다. 이때 신규 육사에서 교육을 받은 장교들 다수는 훗날 프랑코의 친위세력이 된다.

외인부대 사령관 시절 프랑코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너무나 부실한 급식을 참다 못한 병사들 사이에서 불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급기야 주동자쯤 되는 병사가 프랑코의 얼굴에 음식을 집어던졌는데, 프랑코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급양장교를 불러오게 해 그 병사가 보는 앞에서 "즉시 급식의 질을 개선하도록!"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 직후 "그리고 저 자(자신에게 음식을 던진 병사)를 즉시 끌어내 총살하도록!"이란 명령을 내렸다. 훗날 프랑코가 걷게 될 길을 암시하는 듯한 상당히 섬뜩한 일화다.

2.2.2. 제2공화국

1930년대 초에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경제불황과 정치적 실책을 극복하지 못한 보르본 왕가알폰소 13세가 해외로 망명하면서 왕정이 붕괴되고 제2공화정이 수립된다.

프랑코는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공화정부는 툭하면 쿠데타를 남발하던 다른 장군들보다 프랑코를 다루기 쉬운 인물로 여겼다. 1931년 무렵 호세 산후르호 장군의 쿠데타에도 참여하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오히려 그는 1931년 공화국 수립 이후로 '우리에겐 공화국을 도와 자유와 정의를 실현할 의무가 있다'며 생도들을 모아놓고 연설하는 등 공화국에 가장 협조적인 장군으로 보였고 공화국에서도 '이 사람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다.'라고 판단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평화기에만 그렇고 혼란기라면 봉기할 가능성이 높다는 조건이 붙었다. 하지만 당시 전쟁장관을 맡고 있던 마누엘 아사냐[4]가 사라고사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했을 당시 생도들에게 프랑코가 갖고 있던 카리스마적 영향력을 알게 된 것이 원인이 되어 사라고사 육군사관학교는 그대로 폐쇄되었고, 프랑코는 폐교 후 6개월 동안 보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1933년 2월에 프랑코는 발레아레스 제도로 파견된다. 1933년 10월에는 이른바 아스투리아스 혁명이라고 불리는 무정부주의 반란이 발발하자 당시 전쟁장관 디에고 이달고의 지원을 얻은 프랑코는 사단장 자격으로 반란 진압을 담당한다. 그리고 후에 스페인 내전의 용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훌리오 야구에 중령이 지휘하는 외인부대를 파견하여 오초아 장군의 응원군과 함께 반란군을 참혹하게 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오초아 장군은 모로코 출신의 용병들이 포로 및 양민 학살 등의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막고, 포로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했다. 그런데 그 이유로 전간기 파시즘으로 가득 찬 스페인 군부 내에서 왕따가 되는 통에 프랑코는 반란진압의 1등공신이 되고, 이로 인해 1935년에는 아프리카 파견군 총사령관을 맡고 다시 스페인군 참모총장이 된다.

2.3. 스페인 내전

2.3.1. 장군들의 반란

"정치로만 먹고사는 협잡꾼들이야말로 내가 하는 행동을 가장 두려워할 것이다."

공화정 수립 4년 만인 1936년에 다시 정부가 붕괴되고 이른바 인민 전선이라고 불리는 자유주의-좌파 연합세력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자 우파 세력의 불안감은 극에 달한다. 이미 스페인 좌우파의 대립은 유혈사태로 이어진 전례가 있었다.

게다가 공화국은 우파 세력의 주요 구성원이면서 왕정 시대 거의 절대적인 특권을 보장받던 가톨릭 교회를 적극 견제했다. 원래는 가톨릭 교회 전체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너무 부담스럽다 하여 예수회가 주 타겟이 되었다.[5] 앤서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에 따르면 가령 토지나 재산 등의 몰수, 특권 박탈 등의 주 타겟이 예수회였다. 이 때 몰수당한 재산이나 특권 등은 프랑코 시대에 정부에서 돌려준다.

그러나 정작 반동적 극우 사상이 팽배했던 당대 스페인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그나마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민중에 친화적인 성향을 보였던 파벌이 예수회였다. 당시 스페인 좌파 지식인들 상당수 본인들 또한 역사적으로 교육을 주특기로 강조했던 예수회 교육 과정이나 기관 출신이었고, 당시 스페인 진보 교육계를 지배한 조류였던 아나키스트 프란세스크 페레르 이 가르디아의 에스쿠엘라 모데르나(근대 학교) 운동 또한 예수회의 영심수련에 큰 영향을 받은 운동이었다. 스페인 가톨릭 교회 내에서 예수회의 존재감이 너무 강하다 보니 반대편에서도 단순히 우파의 주요 구성원인 가톨릭 교회의 상징적인 본보기로 겨냥한 것인데, 이런 사정 때문에 종교세력의 반발도 위험수위에 달해 있었다.

인민전선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위험 세력들을 제재하기 위해 군의 유력한 장군들을 외부로 떨어뜨려놓는 조치를 취한다. 이에 따라 프랑코도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어 카나리아 제도로 추방되었으나, 오히려 이 때문에 프랑코는 자신의 세력기반이던 아프리카 파견군과 더욱 긴밀히 접촉할 수 있었고 이 시점에서 정부에 대한 그의 의견도 확고해진다.

하지만 프랑코는 이 시점에서도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상황을 주시하는 길을 택했다. 심지어 정부에 밀서를 써서 군부 내의 불만을 지금 당장 잠재워야 한다면서 필요하다면 자기도 돕겠다는 식으로 쿠데타가 곧 일어날 거라는 암시를 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동료 장군들로부터 불신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훗날 권력을 간단히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해 7월 우파의 거물 정치인이자 왕당파의 거두였던 칼보 소텔로가 좌파 정부에 부역하던 경찰에 의해 살해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7월 말 장군들과 우파 세력들이 국민파(Bando Nacional)라는 이름으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내전의 막이 오른다.

2.3.2. 권력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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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민 진영의 유력한 장군들은 대부분 스페인 영내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프랑코는 아프리카 파견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스페인군은 사실상 아프리카 파견군을 제외하면 향토방위군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프랑코의 영향력은 반란 초기부터 가장 컸다. 게다가 그때까지 반공주의 외에는 다른 정치적 성향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태도 때문에 프랑코는 국민 진영을 구성하던 여러 파벌들에게 가장 적절한 지도자로 비춰졌고, 여기에 그의 형 니콜라스 프랑코의 로비 활동이 결실을 맺어 1936년 10월 1일에 프랑코는 국민 진영의 본거지인 부르고스에서 총통(3군 총사령관(Generalísimo) 겸 국가수반)이 된다.

물론 국민 진영 내에서 프랑코의 경쟁자가 될만한 인물들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본래 국민 진영의 우두머리가 될 예정이었던 호세 산후르호는 내전 발발 후 3일만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여기에 그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 있었던 에밀리오 몰라 장군이 1937년 악천후로 인한 비행기 사고로 급사한다. 몰라 장군의 급사로 프랑코의 권력기반은 더욱 탄탄해진다. 세비야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왕초 노릇하던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이 내전 내내 프랑코에게 걸리적거리긴 했지만, 내전이 끝난 뒤 실권을 빼앗기고 아무 힘도 쓸 수 없게 되었다. 군부 바깥의 정당 정치인으로 따져봐도 내전 이전 스페인 최대 우파 세력인 CEDA의 수장 호세 마히아 힐 로블레스는 총선 패배 이후 영향력이 거세되어 외국으로 망명했고, 왕당파 정당 스페인 혁신의 수장이자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던 호세 칼보 소텔로는 내전 직전 좌익 경찰대원에 의해 암살당했으며, 팔랑헤의 수장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공화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경쟁자가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거나 적인 공화진영측에서 알아서 죽여줬으니 자연히 권력이 프랑코 한 사람에게 몰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프랑코의 경쟁자 내지는 경쟁자 예비 후보들이 유독 비행기 사고로 많이 죽어 프랑코가 죽였다는 음모른이 돌기도 한다. 그러나 섣불리 프랑코 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스페인 내전 동안 국민군이 사고로 잃은 군용기는 공화군에게 격추당한 군용기보다 많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는 비행 기술 자체가 새로운 기술이라 여러 가지 기술적, 운용적인 측면에서 불안정했던 시대다.[6] 그리고 이렇게 군용 비행이 아직 기술적으로 불안정했던 시절 해군이 공화파 수병들에게 장악당했으니[7]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불안한 신기술의 개척자가 되어야 했던게 스페인 국민파 진영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 산후르호나 몰라 같은 스페인의 선구자들이 목숨으로 개척한 경험으로 독일이나 이탈리아 같은 프랑코의 원조 세력은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축적된 항공 수송 기술을 잘 써먹었다.

2.3.3. 내전의 승리

우리 정권은 선거 같은 위선적인 방법이 아닌, 총검과 피로써 쟁취한 것이다.

당초 160,000명 정도이던 스페인군은 내전 발발 당시 국민진영에 약 100,000명, 공화정부에 60,000명 정도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국민 진영에서 프랑코가 이끌던 4만에 이르는 아프리카 파견군, 그 중에서도 주로 모로코 현지인들로 구성된 용병부대 레굴라레스와 스페인 외인부대에 필적할 정예부대가 공화정부에는 없었다.

또한 실전경험이 있는 지휘관 대부분이 이른바 아프리카당(Africanista), 즉 아프리카 주둔군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화정부는 정예병사도, 신뢰할 지휘관도 없었다. 그나마 공업지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1차 세계대전 당시의 경제호황으로 인해 축적해두었던 상당량의 금괴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해군의 상당수가 공화정부를 지지했다는 점 정도[8]가 공화정부가 믿을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태생부터 허약한 연립정권이었던 인민 전선 정부는 이런 이점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갈팡질팡해야 했다.[9]

이미 세계대전을 치른 당시 유럽 기준에서 볼 때 프랑코를 비롯해 국민 진영의 주요 지휘관들은 용감한 군인이긴 해도 전략가로서의 재능은 부족했다. 1936년 7월의 반란도 실상 굉장히 조악한 것이어서, 정부가 단호하게 대처하기만 했어도 조기진압의 가능성은 높았다. 하지만 공화정부와 좌파 진영간 관계 때문에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반면 프랑코가 이끌던 국민 진영에는, 왕당파인 카를로스파와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당 등의 내부 계파가 있었긴 했지만, 아프리카군을 중심으로 한 군대의 힘을 가진 프랑코의 힘이 이들을 억제하기 충분했기에 통합된 세력을 이끌 수 있었다. 이런 내부 파벌들도 내전 승리를 눈앞에 둔 프랑코가 팔랑헤 당을 중심으로 파시스트, 보수주의자, 왕당파에다가 노동조합주의자들까지[10][11] 모조리 통합하는 친위 쿠데타를 감행, 이른바 "통합 팔랑헤당"을 만든다.[12]

이런 프랑코 정권의 복합적인 성격 때문에 현재 학자들은 프랑코의 정치성향을 파시즘인지, 단순한 우파 권위주의+내셔널리즘으로 보는지 의견을 달리 한다. 프랑코 정권을 우파 권위주의 내셔널리즘 정권으로 보는 경우 저러한 프랑코 정권의 복합적인 태생적인 성격과 그 내에서 주도하기보다는 조절자 역할을 했던 프랑코의 역할을 강조하는 반면, 파시즘 정권으로 보는 경우 가톨릭 보수주의를 근반으로 한 강제적인 국민적 사상 교육, 이에 따른 전쟁 이후로도 지속 되었던 전시 체제, 그리고 역시 가톨릭 교회를 매개로 한 국가 이데올로기의 일상의 침투 등에 주목하며 프랑코 정권을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등과 함께 걷는 전체주의 정권으로 간주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민 전선 정부에 치명타를 날린 것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 독일 정부와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끌던 이탈리아 왕국이였다. 히틀러는 스페인의 풍부한 광산과 대서양 연안에 있는 잠재적인 해군기지를 노렸고, 무솔리니는 장차 영국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다툴 때 영국의 지중해 주요 거점인 지브롤터를 견제할 수 있는 동맹국을 확보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당시 급속도로 재무장하고 있던 독일로서는 새로운 장비와 전술을 실전으로 시험한다는 점도 무시 못할 매력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은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도이칠란트'와 '아드미랄 셰어'를 파견하여 공화정부의 해군을 견제하고, 콘도르 군단으로 유명한 지원 병력을 파견했다. 이탈리아도 자국의 최신 전투기와 L3 탱켓을 비롯해서 파시스트 의용군 5만명을 파견한다.

또한 공화정부 집권과 함께 좌파의 보복을 우려하여 해외로 도피했던 스페인 자본가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로비 활동을 펼쳐 공화 정부에 대한 지원을 차단함과 동시에 프랑코에 대하여 미국이 석유를 계속 수출하게 만든다. 때문에 국민 진영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의 폭격기와 이탈리아의 대포, 미국의 석유와 신용대부와 차량 덕분"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결국 1939년에 프랑코 군대는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를 사실상 함락했다. 정확히는 마드리드가 함락된 것은 아니고 평화협정이 맺어지기 전까지 시내에서 전진과 후퇴가 반복되는 시가전만 벌어지고 있었지만, 공화파의 주요 거점 도시들이었던 바르셀로나 등이 함락되으니 이미 대세는 결정난 것이었다. 제2공화국 주요 인사들은 파리로 달아나 망명정부를 세웠고, 프랑코는 전 스페인의 카우디요(지도자)가 된다.

2.4. 제2차 세계 대전과 프랑코

"그 음흉한 돼지와 협상을 벌이느라 또 다시 9시간을 소모하느니 차라리 이빨 서너개 뽑히는 편이 낫겠소."
-아돌프 히틀러, 1940년 10월 23일 프랑코와의 엔다예 협정에 대해 무솔리니에게 말한 소감.

프랑코는 내전 기간 중 독일과 이탈리아, 두 파시즘 국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프랑코 자신도 유사 파시스트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두 나라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프랑코는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행동을 유대-볼셰비즘에 대항하는 문명의 수호자라며 칭송하고, 당시 스페인에 살고 있던 6,000명 가량의 유대인들의 명단을 만들어 하인리히 힘러에게 넘겨 주는 등 나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언행과는 대조적으로 프랑코는 히틀러가 한 것과 같은 유대인 박해 정책을 딱히 펴지는 않았다. 물론 15세기의 유명한 유대인 탄압이 있은 뒤 400여년 동안 다시 스페인에 들어온 유대인들이 있었고 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13] 위의 명단도 당시 스페인 국적자도 아니고, 그냥 스페인에 살고 있으며 유대인으로 확인된 사람들만 6,000명이라 한 것이다. 주로 대부분 다른 유럽에서 도망치는 도중 스페인에 체류 중이었던 유대인들이었다. 더불어 주 헝가리 스페인 대사로 있었던 앙헬 산스 브리스 대사 같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외교관 신분을 사용하여 많은 유대인들의 탈출을 도운 바도 있으며, 정권이 이런 개인적 차원의 인도주의를 제재하진 않았다. 제2차대전 도중 20,000 ~ 35,000명 가량의 유대인들이 스페인을 통해 탈출한 것으로 추산된다.

일부 프랑코 옹호자들은 프랑코의 이런 행적을 프랑코 정권의 인도주의적 면모라 주장한다. 그러나 프랑코 정권은 정권 차원에서 홀로코스트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직접 저질렀다. 그 대상이 이미 스페인에 있지도 않았던 유대인들이 아니었을 뿐이며, 범위를 정치범까지 확장한다면 스페인도 홀로코스트 가담 국가다. 오늘날 홀로코스트 학계는 유대인, 폴란드인, 소련인, 집시 같은 인종적 분류 뿐만 아니라 프리메이슨, 여호와의 증인을 포함한 정치범들도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에 포함한다. 2차 대전 개전 당시 프랑스로 망명해 있다가 프랑스 침공과 함께 나치에 사로 잡힌 공화파 스페인인 1만명 정도가 "스페인인들의 수용소"란 별명까지 붙었던 마트하우젠 수용소를 비롯한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갔고, 스페인 정부는 어차피 자국으로 송환되었어도 총살했을 자들이니 나치가 이들을 절멸수용소에서 확실하게 끝장내도록 종용했다. 나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9,300명 가량의 스페인인 중 50%를 훌쩍 넘는 5,000명 가량이 마트하우젠, 다카우, 부헨발트 등에서 그 어떤 나라도 돌보아 주거나 구하려는 노력 없는 무국적자로 죽었다.

반면 이 생지옥의 와중에서도 수용소의 스페인인들은 일단 정치범들이니 신념에 따라 정신력이 강한 사람들이 많았고, 와중에는 보르본 왕조 말기→제2공화국→나치 치하 유럽에서 좌파 혁명가, 레지스탕스 투사로 잔뼈가 굵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보니 그 뒤에 들어온 폴란드인, 소련인 수감자들에게 노하우를 가르쳐 주는 등 수용소 내 저항 조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14] 부헨발트 수용소의 경우 미군이 진주하기 겨우 며칠 전 나치가 수용소를 텅텅 비우려는 당국의 의도를 알아챈 스페인인, 폴란드인 카포 주도로 수용소 봉기가 터져서 미군이 들어오기 전 자체적으로 캠프가 해방되었다.[15] 종전 후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전범 재판에 핵심적인 증거 자료가 된 수용소의 사진들을 남긴 친위대 산하 수용소 사진사였던 프란시스코 보시[16] 또한 스페인 공화파 수감자였다.

또한 2차대전 당시 스페인은 내전에서의 복구가 똑바로 안되었으며, 특히 프랑스와의 국경은 제대로 통제가 안되는 상황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피신 루트로 사용했던 저 피레네 산맥 프랑스-스페인 국경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쯤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통합되어 나치 상대로는 물론이고, 종종 월경하여 프랑코군도 습격하곤 했던 공화파/좌익 잔당 게릴라도 쉽게 통과했고, 종전 직후에는 전범 재판을 피해 도망치려는 나치 인사들도 잘만 술술 통과했다. 정권의 의도와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국경을 비롯한 인구의 호구와 이동에 대한 통제가 똑바로 안되었다는 반증이다.

히틀러와 처음으로 대면했던 엔다예(엥다예) 협정에서 프랑코는 개판이었던 당시 스페인의 철도 사정 때문에 계속 열차가 연착되어 히틀러를 무척이나 오래 기다리게 했고 히틀러와 대면해선 계속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히틀러를 상대했는데, 내전 기간 중 독일의 도움과 히틀러의 행동에 대해 찬사하며 스페인과 독일은 정신적으로 동맹한 상태라고 치켜세워주었다. 그러나 정작 히틀러가 영국에 맞설 것을 요구하자 스페인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들먹이며 이를 거절했고 히틀러의 말을 끊고 자기 얘기만 줄창 떠들어 히틀러를 몹시나 빡치게 했다. 특히 모로코 시절과 내전기를 비롯하여 자기 자랑만 3시간을 떠들었다. 히틀러가 만난 사람 중에서 히틀러가 말을 못하게 자기 말만 떠들었던 건 프랑코(와 만네르헤임)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이 협정에서 프랑코는 프랑스령 모로코와 오랑을 요구했고 히틀러는 이를 거의 일격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히틀러도 프랑코에게 카나리아 제도, 모로코의 해군 기지들, 포르투갈령 아조레스 제도카보베르데 제도까지 고압적으로 요구하여 프랑코를 무척이나 당황하게 했다. 또한 히틀러는 지원의 대가로 스페인 북부의 광산들을 차지했고 헤르만 괴링 장군이 공화 정부에도 무기를 파는 등의 행각을 벌였으니 강한 민족주의자이기도 한 프랑코로서는 감정이 나빴다. 일단 공식적으로는 동맹 조건으로 무기 지원과 지브롤터 해협,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할양을 거는 무리한 협상으로 히틀러와의 협상을 끝낸 것 같다.

그리고 프랑코는 독일이 잘 나가던 194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 내전 전후 복구만 도와주면 당장이라도 참전해서 도와드림"이란 식으로 살랑이를 떨었으나, 이 내전 복구와 스페인군을 다시 전력이 될 만한 단계로 재건하는 것만으로도 천문학적인 투자를 필요를 해서 히틀러가 거절하였다. 다만 이는 핑계로 볼 수도 있다. 애초에 추축국치고 계획대로 전쟁 준비를 마치고 개전한 나라가 없다.

어찌되었든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도움을 받기는 했으니 독일의 전쟁 수행에 이런저런 협력을 했다. 지브롤터 해협의 중요성으로 인해 스페인의 주요 항구였던 카디스는 대전 기간 동안 크릭스마리네(독일 해군)의 기지가 되었고, 스페인은 '청색사단(División Azul)'과 '청색 비행중대(Escuadrilla Azul)'이라는 이름으로 1개 보병사단과 비행중대를 독소전선에 파병하기도 한다. 이 청색 사단은 구성원 중 적지 않은 수가 친지, 친구 등이 내전 당시 공화파로 싸우다가 감옥에 갇혀 있어 연좌제를 피하는 겸 그들의 형기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고 참전했다는 비극적인 여담이 있다. 이 때 한가지 해프닝이 터졌는데 독일에서 청색사단과 파일럿들을 환영한답시고 군악대로 국가를 연주한게 하필이면 '공화파'의 국가를 연주한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파견된 청색사단과 청색 비행중대는 프랑코의 강력한 요청으로 인해 소련과의 전투에만 투입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영국과 미국[17][18][19] 에 대한 자신들의 경제적 의존 및 연합군의 보복을 우려하여 참전하지는 않았다. 당시 히틀러는 프랑코에게 연합군이 곧 카나리아 제도를 공격할 것이니 빨리 독일 편에서 참전하여 나라를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지키라고 위협했으나 영국과 미국은 프랑코에게 카나리아 제도를 비롯한 스페인의 영토를 침범하거나 스페인 주권을 침해할 의도가 없음을 보장했고 이에 추축국 편으로 참전할 이유가 없음을 확신한 프랑코는 외무장관을 골수 친독 인사였던 처남 라몬 세라노 수녜르에서 실리파 호르다나 장군으로 바꾸고 연합군에게 우호적인 태도로 돌아갔으며 안톤 작전에 이르러선 오히려 독일을 경계하였다.

연합국의 경우 스페인이 추축국에 가입해서 영국령 지브롤터에 위협을 행사할 가능성에 대해 상당히 우려했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영국과 스페인은 지브롤터 때문에 티격태격하는 사이기도 했고 당시에도 이를 두고 스페인에서 영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전쟁 중 한동안 국제적으로 중립지역으로 간주된 탕헤르를 잠시 점령하는 일도 벌였다.[20] 이에 더해 오늘날 기록에 따르면 MI6 소속 영국 정보원들이 스페인 장성과 관료들을 매수하는 등 영향력을 확보하는 식으로 어떻게 스페인이 참전하는 것은 막았다고 한다.#

당시 처칠의 프랑코에 대한 평가는 꽤 이중적이었다. 일단 프랑코가 조금이라도 추축국쪽으로 기울 것 같으면 비판적으로 대하다가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니 프랑코를 중립정책도 잘 유지하는 상당히 훌륭한 반공지도자로 포장하는 멘트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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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작전에 대한 스페인의 신문 기사.

1940년 11월에 히틀러는 '총통 지령 제 18호'로 지브롤터 공격 계획인 펠릭스(Felix) 작전을 수립한다. 루트비히 퀴블러(Ludwig Kübler)를 사령관으로 1개 군단이 스페인을 통과해 스페인 공군의 지원과 함께 지브롤터를 침공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프랑코는 지브롤터를 스페인에게 주겠다는 히틀러의 말에도 작전에 협조하는 것을 거부했고, 독일으로서도 소련 침공을 위한 준비가 필요해 지중해 봉쇄는 이탈리아 해군과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의 수에즈 공격에 맡기기로 한다. 프랑코가 무기뿐만 아니라 식량, 석유에 비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식민지(모로코 전체, 알제리의 일부, 사하라 사막 등)까지 요구해대니, 아무리 지브롤터 공략이 매력적이라도 히틀러가 선뜻 들어줄 수 있을 리 없었다.

1941년에 히틀러는 또 다시 지브롤터를, 이번에는 스페인 전부를 공격할 이사벨라(Isabella) 작전을 구상한다. 프랑코가 계속 중립을 지키자, 프랑코가 연합군에 가담하거나 연합군이 나폴레옹 전쟁 때처럼 스페인을 통과해 서유럽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한 것이지만, 계획에 그친다. 이러다가 전황이 슬슬 나빠지기 시작하는 1942년부터 역으로 히틀러가 참전 좀 하라고 살랑이를 떨다가, 그 이후 독일의 패색이 확실히 짙어지자 완전히 쌩깠다. 그리고 무솔리니 또한 내심 지중해에서 다른 경쟁자가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아 등 뒤에서 히틀러에게 스페인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압력을 넣었다.

전쟁 말기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프랑코는 재빨리 청색사단을 국내로 소환하고 독일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1944년 말에 프랑코가 연합국과의 협상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들은 히틀러는 "프랑코 개새끼"라고 내뱉었다고 한다.

다른 얘기로는 연합국에서 프랑코에게 중립국인 척 하면서 계속 독일을 지원하면 스페인을 추축국으로 인정하고 공격하겠다고 했고 프랑코는 히틀러에게 그대로 하소연하면서 청색사단을 빼돌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히틀러도 만약에 스페인이 공격당하면 스페인을 지켜줄 상황도 아니고 스페인 방향에서 연합군이 밀고 올라오면 곤란해지니 차라리 친독일성향의 중립국으로 놔두는게 낫다고 판단해서 프랑코가 발을 빼는걸 허용했다는 얘기도 있다. 소련에 밀리던 상황에서 "스페인 사단만 빼갈게요" 한다고 히틀러가 곱게 들어줄 리도 없었다.

히틀러와는 다르게 무솔리니는 그 특유의 허세 때문인지 프랑코에게 그리 많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스페인에 필요 이상의 지원을 퍼부었다. 결국 이 때문에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그나마 잘하고 있던 경제분야를 고대로 말아먹어 2차 세계대전 그 숱한 병크를 터뜨리는 또 하나의 원인을 초래하고 만다.

이렇게 독일 등의 추축국 세력과 거리를 둔 덕에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권력이 무너지는 건 면할 수 있었다.

한편 이런 독일과의 관계 때문에 같은 추축국인 일본 제국과도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군이 필리핀 마닐라를 공격하자, 이에 대한 보복성으로 터진 마닐라 대학살 와중 마닐라 주재 스페인 영사관을 일본군이 공격해서 영사관에 방화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접하자 프랑코는 당연히 격노했고, 1945년 4월 11일에 스페인은 일본과 단교해 버렸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스페인 정부에선 '사건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지만, 그래도 일본과의 관계는 유지해야 하지 않은가'라는 논란이 있었다. 그만큼 당시 스페인은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이 강했다. 이런 엄청난 외교적, 국제적 무례를 당하고 국교 단절을 하기는 했으나[21] "이런 행위는 지금까지 있었던 스페인과 일본 제국의 우호적 관계에 타격을 줄 수 밖에 없다"라고 상당히 소극적으로 항의하고, 학살 보도도 "가톨릭 신앙과 스페인 제국의 유산을 지키겠다며 그 난리를 쳐놓고 이런 일도 못 막나?"라는 식의 반정부 여론이 형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건의 스페인 국내 보도도 사건 발발 이후 몇주 뒤에야 허용하는 등 심각하게 비굴한 모습을 보였으며, 이 뒤에는 "추축국들이 끝나면 우리 차례일지도 모른다"라며 두려워하던 정권의 공포와 취약함이 있었다.[22] 다만, 다른 나라와 달리 일본과의 관계는 훨씬 복잡했다. 프랑코는 친추축국적 중립국이면서 동시에 영미권과도 여전히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한 나라였기 때문에 막상 영미권 대사 등을 접견할 경우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같은 백인들이 어쩌구...' 하면서 일본을 헐뜯었다. 그와 동시에 자국민들에게 해외 상황을 왜곡 선전할 때, '전 세계적으로 큰 전쟁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소련에 대한 전쟁이고 하나는 일본에 대한 전쟁이라더라'고 했다. 아무리 일본이 추축국이기로서니 따지고보면 이역만리에 있는 이제는 자국하고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나라에 불과한 반면 여전히 영미권은 스페인과 중요한 관계에 놓였으니 이런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다.

청색사단 문제를 따지면 스페인을 교전 상대인 적국으로 분류할 만할 명분도 있고, 일단 국제 공산권의 거두이며 실제로도 엔리케 리스테르를 비롯한 적지 않은 공화파 망명객들이 붉은 군대에 지원했던 스탈린의 경우 아예 스페인도 추축국으로 분류하여 조지려고 하였으나, 포츠담 회담에서 더 이상 전쟁을 키우기도 싫고, 좌파 공화파를 도와주기도 싫었던 처칠과 트루먼이 "스페인을 국제연합에 가입시켜주지 않을 것이고, 추축국급으로 경제 제재를 시행할것이니 자중해달라" 설득하여 겨우 스탈린을 달랠 수 있었다.

스페인이 비록 직접적으로 2차대전 자체는 비껴나갔지만 연합국, 특히 소련을 비롯한 공산 세계 또한 내전 당시의 만행을 잊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2차대전 직후와 냉전 체제가 본격화된 1950년대 사이에는 동서방을 가리지 않고 파시즘에 대한 혐오 분위기가 세계적으로 대세였다. 때문에 2차대전에 휘말려드는건 피했을망정 외교적으로 스페인은 포르투갈, 남아프리카 공화국, 로디지아와 함께 여전히 국제적 천민 취급을 받으며 고립되었고, 위의 처칠과 트루먼이 약속한 경제제재로 인해 극도의 고통을 받았다. 이 내전 이후 2차대전이 끝나고도 10년 가까이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스페인이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정권의 폭력성도 극에 달했던 1939~1955년 사이의 시절을 스페인인들은 "기아의 세월(años del hambre)"이라 부르며 스페인 현대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세월로 기억한다. 이 시기 프랑코는 자신의 정권이 파시즘과 무관하단 인상을 해외에 심어주기 위해 발광했고, 실제로 내전 직후 자행되었던, 힘러, 치아노 백작이 회고한 "매일마다 마드리드에서 100명, 세비야에서 50명..." 규모의 학살과 사법 살인, 정치적 '실종'은 크게 줄어들었다. 물론 이 이후로도 주기적으로 정권이 본보기로 삼을만하다 싶은 경우엔 정치적 사형을 하긴 했고, 이때마다 스페인을 반공 서방 진영에 포함시키려는 미국은 한숨 쉬고, 나머지 유럽에선 히틀러, 무솔리니의 동지 프랑코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대규모 시위와 압박이 종종 터지곤 했으나 적어도 '파시즘' 운운할 만큼 폭력의 일상화정치적 폭력에 의존한 국가 이데올로기[23]는 학계에선 주로 1944년을 기점으로 끝났다고 본다. 이 때까지 스페인은 내전이 끝난 이후에도 2차 세계대전에 엮일 가능성을 대비해 경제사회적으로 전시체제를 당분간 유지했다.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이 되자 공화파에 대한 박해 수위도 낮추고 전시체제를 풀게 된다.

그리고 1947년 프랑코는 이미 대가 끊긴 것이나 다름없던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복권을 선언하면서 왕위를 이을 적합한 인물이 나타날 때까지는 내가 섭정이라고 선언, 종신 집권을 합법화한다.

2.5. 프랑코의 정치

프랑코는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공공연한 도움을 받아 스페인 내전에서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했기 때문에 파시스트라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 프랑코는 1936 ~ 1939년의 대규모 유혈 사태 이후로는 질서와 안정을 원했다. 파시즘 특유의 열광은 그의 내성적인 성격에 맞지 않았다. ......
프랑코 정권에서 팔랑헤당이 유일당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동형 기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의 자치적 권력도 없었다. 독일이 승전을 거듭하던 1941 - 1942년에 팔랑헤당은 팔랑헤당은 당원수가 백만명 가까이로 늘었으며 전당대회를 여는 등 독재정권에 큰 지지가 되어주었지만 카우디요는 당에 입법권이나 행정권을 주지 않았다. ...... 스페인 내전 초기에 카리스마 넘치는 팔랑헤 지도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24]를 제거한 일은 프랑코가 기존 엘리트층과 표준 국가를 장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프랑코는 여러 개로 나뉜 극우 정당들과 데 리베라의 뒤를 이어 팔랑헤의 지도자가 된 마누엘 에디야의 경험 부족을 이용해 파시즘의 영향력을 더욱 줄여나갔다. 그는 교묘한 수를 써 팔랑헤당을 파시스트들과 전통적 왕당파를 모두 포함하는, 특성이 전혀 없는 우산조직 '팔랑헤 에스파뇰라 트라디시오날리스타 이 데 훈타스 데 오펜시바 나시오날 신디칼리스타'(Falange Española Tradicionalista y de las Juntas de Ofensiva Nacional Sindicalista)로 끌어넣었다. 조직의 수장은 '프랑코 주변의 장식품이나 다름없는 무능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1937년 4월 에디야가 당의 독립성을 되찾으려 들자 프랑코는 에디야를 체포했다. 팔랑헤를 길들이고 나자 파시즘 특유의 열광을 최소화하면서ㅡ프랑코에게는 특히 이 조치가 만족스러웠다ㅡ자신의 독재 체제를 한층 전통적인 모습으로 만들어내기도 쉬웠졌다. 프랑코 정권은 1942년 이후로는 확실히 기존 권위주의 성격을 띠었지만 1942년 이전에도 그런 모습을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팔랑헤는 1945년 이후 단순히 운동(the Movimineto)이라고 일컬어지는 색깔 없는 시민 연합이 되었으며, 1970년에는 그 이름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로버트 O. 팩스턴.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손명희, 최희영 번역. 339-340쪽

흔히들 우파 권위주의 독재 정권이면 그냥 파시스트라 욕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프랑코 역시도 파시즘과 묶이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이견의 여지가 있으며 서구 학계에서는 프랑코 정권을 전통적인 파시즘으로 보지 않는다. 프랑코는 파시즘 세력인 팔랑헤를 이용하였으나 그는 팔랑헤에게 권력을 주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팔랑헤를 뒤통수쳤다는 것이다.

현대 학계에서 프랑코 정권의 성격 논쟁, 프랑코주의란 이념의 실존 여부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논쟁이다.[25]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등에 비교해도 프랑코 정권은 일단 존속 기간이 사십년 가깝게 압도적으로 길었고, 2차대전과 함께 사라졌거나 대전 이후 새로 생긴 독재 정권들과 달리 대전 이전과 이후의 세계를 모두 겪었다.

그러나 내전 기간 도중과 나머지 유럽은 대전 중이었던 전시 직후 체제까지 프랑코 정권이 자행한 자국민의 정치적 '청소'에 가까운 대량 학살과 사상적 색출, 탄압,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정치적 반대파를 아예 마치 다른 인종인 마냥 타자화 하기 위해 동원했던 안토니오 바예호-나헤라의 유사 우생학적 이론과 그 사회적 여파까지 고려하면 정권 초기에는 소위 '오리지널' 파시스트인 무솔리니보다 확실하게 억압적이고 폭력성으론 오히려 나치 독일이나 헝가리의 화살십자당, 루마니아의 철위대에 비교하는게 가깝다.

이런 자국민 학살 규모의 폭력적 탄압이 사그라들고, 정치범도 그나마 '재판' 비슷한걸 거치면서 사형보다 투옥을 하며 이후로 점차적으로 급진적 파시즘 성향이 누그러지기 시작한 기점은 보통 연합군의 승리가 명백했던 1944년으로 보며,[26] 이런 (나머지 유럽과 세계 정세 변화에 맞물린) 프랑코 정권의 성격 변화는 파시즘 자체의 정의 문제와는 별개로 파시스트라 부를만큼 폭력적 대중동원, 사상적 과격화를 했냐 안했냐를 판단함에 있어 의미 있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프랑코는 구 팔랑헤의 진보주의, 사회주의보다는 전통주의, 교권주의에 더 가까운 파시스트였다.

실제로 프랑코는 경제가 복구되고 국가가 재건되면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물론 이리 저리 지원해 달라고 들이민 비용이 천문학적인 비용[27]이라 히틀러가 거부하였다. 그마저도 추축국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끝까지(표면적으로는) 중립국으로 남게 되었다. 만약 스페인이 참전했다면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은 더욱 애를 먹었을 것이다. 정작 복구가 끝난 후에는 과거와는 달리 스페인을 제외한 모든 파시즘 국가들이 망해서 사상적 과격화나 대중동원이고 뭐고 일단 정권 유지가 우선이었지만.[28] 그러나 설령 참전하여 사상적 과격화, 대중동원을 했어도 프랑코 본인이 전통주의적, 교권주의, 보수주의적 인물인 이상 구 팔랑헤의 반자본주의적, 국민생디칼리슴[29], 사회주의적 요소는 복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2.5.1. 무자비한 철권 통치 및 1인독재

스페인의 철권통치자가 된 프랑코는 군 총사령관, 유일한 합법정당인 팔랑헤당 당수, 국가원수(카우디요), 내각수반(총리)을 모두 겸임하며 헌법도 국민 기본권도 인정하지 않는 폭압적 체제의 수장으로 39년간 군림했다. 그의 권력에는 어떠한 제도적 한계도 없었고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 권력을 행사했다.

프랑코는 공산주의자와 무신론자들로부터 스페인의 가톨릭적 정체성을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철저한 반공주의, 중앙집권, 스페인 단일국가주의를 국시로 옛 공화주의 세력, 카탈루냐/바스크 등 지역 분리주의 세력을 뿌리뽑다시피 탄압했다. 또한 이웃 포르투갈의 살라자르와 함께 중남미 우파 독재정권 국가들의 콘도르 작전(더러운 전쟁의 일부)을 지원했으며 우파 성향의 중남미 독재국가 폭정 아래 신음하다 망명온 중남미 사람들을 잡아서 중남미 본국으로 송환했다. 프랑코의 학정은 세습만 없었을 뿐 가히 유럽의 북한, 우파 성향 북한[30]으로 불릴 정도로 가혹했다. 연좌제는 기본이었고 스페인 국민들의 탈출을 법적으로 허용하지 않았으며 탈출하다 발각되면 엄한 처벌을 가했다.

때문에 내전 중 전사자를 빼고 지금까지 집계된 프랑코 정권하에서의 사망자는 처형, 강제노동, 강제수용소, 기아까지 다 합해 100,000 ~ 200,000명에 육박하며, 이것도 극히 일부라는 말이 나온다. 프랑코 정권이 정권 말기 조직적으로 대대적인 기록 말살을 저질러 정확한 숫자가 파악될 날은 멀지만, 근 몇년간 암매장된 집단 무덤이 대거 발굴되면서 희생자의 추정 숫자는 갈수록 늘고 있다. 같은 전간기~2차대전~대전 후 유럽에서 스탈린히틀러를 제외하면 이 정도 숫자의 자국민 학살을 저지른 독재자는 없다. 당연히 반공권 독재자 중에서는 한 손에 꼽을 수준의 학살자로 꼽힌다.[31]

히틀러만 해도 당장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나치의 학살 행위는 일단 전쟁 발발 이후 점차적으로 심화된 것이다.[32] 프랑코는 아침식사를 한 뒤 커피를 마시면서 사형수 명부를 갖다놓고 이름 옆에 사형, 연기, 사형 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할 것 등을 직접 기입했으며, 사망 몇 달 전까지 모든 사형 영장에 손수 서명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의 세력은 죄다 외부로 망명하거나 사형당해서 스페인 내부의 진보, 좌파 진영이 아예 절멸당했다. 이를 두고 영국의 근현대 스페인사 전공 역사학자인 폴 프레스턴은 '스페인의 홀로코스트'라고 표현했다. 1940년 한 해에 수감된 스페인의 죄수가 270,000명이었으며,[33] 1939 ~ 1945년 처형된 사람은 최소 28,000명에 달했다. #

반대파였던 스페인 공화국이 양성평등, 문화적 세속화, 자유연애 등 페미니즘과 사회적 진보 담론에 적극적이었던만큼 프랑코 정권의 탄압은 반대로 극단적인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의 강화로 연결됐다. 프랑코는 여성의 역할은 '가족 돌봄과 모성'에 있다고 보며 '부모와 형제에게 사랑스러운 딸과 누이가 되고, 남편에게 충실한 아내가 되며, 가족과 함께 살라'는 식으로 선전했는데, 이 과정에서 성차별 정책이 실시되었다.

여성의 간통죄는 부활하고 적극 처벌되었던 반면, 남성의 경우 남자가 간통한 여성과 동거하는 경우에만 간통죄로 인정되었고, 여성의 독립적인 재산권, 정치적, 법적 권리를 심하게 제한되었다. 내전 직후 남녀 평등을 목표로 공화국이 통과시킨 대부분의 진보적 법률은 무효화되었으며, 여성은 판사가 될 수도 없고 재판에서 증언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여성들의 일과 경제 생활은 아버지와 남편이 관리해야 했으며, 심지어 1970년대까지 여성은 아버지나 남편의 공동 서명 없이는 은행 계좌를 개설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34] 특히 반대편인 공화파 여성에 대한 탄압은 한층 더 폭력적이었다.
우리의 용맹한 군단원들과 식민지병들은 저 비겁한 빨갱이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여자들에게도 진짜 남자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애초에 저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여자들이 '자유 연애' 따위를 설파한 시점부터 이런 행동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이제 적어도 저 빨갱이 여자들은 어디 말라깽이 민병대 나부랭이가 아니라 진짜 남자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고, 울부짖고 발버둥쳐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내전 당시 국민전선 남부군 사령관 케이도 데 야노의 주기적인 선동 라디오 채널 담화 중에서[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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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 + 삭발 당한 이후 이마에 십자가 무늬가 강제로 낙인 찍힌후 수용소에 수감된 공화파 여성들

내전기 내내 수만명의 공화파 쪽 여성이 국가군 병사들에게 전시강간당했고, 국가군 지도부는 이를 자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위 케이포 데 야노의 사례처럼 심리전의 일환으로서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특히 포로로 잡은 여성 민병대원이나 점령한 지역 일대의 여성운동가, 노조 활동원 같은 정치적으로 빨갱이로 분류당한 여성의 말로는 비참했다. 사회와 정치참여 등 남자의 일감히 참여한 공화파 여성들은 여성성을 보호받을 자격이 없다는 명분 아래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하던 짓 그대로 피마자유를 강제로 먹이고[36] 발가벗긴 이후 동네에서 강제로 조리돌림하며 대중 앞에서 강제 분변하게 만들며 강간 후 탈진, 탈수로 죽이는 게 일반적이었다. 살해당하지 않는 공화파 여성도 포로수용소 역할을 했던 수녀원에서 이런 탈선한 빨갱이 여성을 어찌 생각할지 뻔한 수녀, 사제들에게 집중적으로 학대, 강간당했으며, 훗날 정치범수용소에서 풀려나와도 정권의 여성 경제권 제한+전직 공화파들의 경제활동 제한이란 이중 제약 아래 자연스럽게 매춘으로 빠질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 뒤 이를 오히려 좌파의 도덕적 타락의 증거라며 선전자료로 썼다. 그리고 프랑코 시절 법조계는 이런 전시 강간 정책에서 비롯된 조직적 남성우월주의를 돕기라도 하는 양 부부강간 불인정은 기본이고, 강간의 의미를 무조건 여성이 심신미약 상태여야 하며, 항문이나 구강성교는 쳐주지도 않는 등 의도적으로 강간의 법적의미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만들고, 웬만한 성적 학대는 단순 학대(Abuso Deshonesto)로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주었다. 이런 프랑코 정권의 성범죄의 전시, 통치 도구화라는 역사적 배경 때문에 스페인 민주화 진영에서는 반작용으로 페미니즘 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고, 이에 대한 유산으로 현대 스페인 페미니즘권은 성향도 강성이고 영향력도 강한 편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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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기간과 프랑코 정권 초기까지 생겨난 공동묘지와 매장지.[37] 색깔 별로 부분적으로 발굴(적색), 발굴 후 전몰자의 계곡으로 이장(황색), 유실(흰색)로 구분했다. 이 지도는 스페인 법무부가 작성한 곳이다. 녹색은 아직까지도 발굴이 안 된 곳이다.

가벼운 정치범들은 수용소에 가둬놓고 노동력을 착취했다. 프랑코 정권 치하에 이루어진 과달키비르 강 운하부터 철도선, 자기 영묘인 전몰자의 계곡까지, 그의 국가 기반사업이나 공업 육성 정책들 뒤에는 연평균 수십만명에 달하는 전직 공화파 출신 강제 노역자들이 있었다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스페인 내전 도중과 이후 프랑코 정권은 참혹한 환경의 강제 노동 수용소[38]를 170개 이상 운영했다.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미란다 델 에브로의 수용소에서는 65,000명의 공화파 정치범들이 왔다가며 이중에서 수백, 수천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코 정권이 2차대전이란 고비를 넘기고 어느 정도 프랑코 체제라 부를 만한 것이 자리 잡은 50년대 중후반 쯤에 약간의 변화가 생긴다. 대학생, 근대 자유주의 성향의 정권 내 반독재 인사들, 망명 2세대, 바스크와 카탈루냐 민족주의 세력이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프랑코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 2기가 나타나게 된다.

스페인 우익과 반공주의자들은 프랑코의 숙청을 일종의 정당방위로 옹호하기도 한다. 1936년 여름 쿠데타와 프랑코 정권의 백색 테러가 좌파가 먼저 공격한 것에 대한 정당방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민전선의 세력이 적었던 곳에서도 학살은 전국 평균만큼 이루어졌다. 레온, 나바라 같은 지방은 쿠데타 발발과 동시에 거의 무저항으로 국민군에게 넘어가면서 좌파와 인민전선에 뭐 반격이고 보복이고 할 짬도 없이 집어 먹힌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도 정치적 폭력의 정도는 전국 평균에서 뒤쳐지지 않는다. 지도상 학살의 밀도는 으스스하게도 거의 스페인 전국의 인구 밀도, 도시화율과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프랑코 정권의 폭력성과 탄압은 정치인들이 역사적 기억 가지고 정치질하는 것이 늘 그렇듯이 현대 지역주의, 분리주의와도 연관이 있는데, 적어도 당장 통계적인 평균 수준으로 보면 프랑코 정권은 카탈루냐, 바스크, 카스티야, 안달루시아, 갈리시아 가리지 않고 소위 '빨갱이' 딱지 붙기만 하면 공평하게 때려 죽였다.

물론 카탈루냐, 바스크 지방 같은 경우 당장 사람들도 죽아나가면서 각 민족들의 유서깊은 고유언어, 고유문화까지 근본도 없는 파쇼 독재정에게 공격당하며 분명 스페인의 문화적 중심부 지방들보다도 더 원한이 서리긴 했지만 직접적인 폭력의 밀도 자체는 지역별로 그리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 스페인 현지에서도 카스티야가 보수적이고 프랑코 정권이 표방한 스페인 국가주의의 핵심 지방이라 덜 두들겨 맞았다는 주장이 가끔 돌고는 하는데, 유럽에서도 꼽아주는 국제 대도시인 마드리드와 대조적으로 완전 인구, 경제 기반 다 털리고 정치적으론 우경화, 사회경제적으론 깡촌화되면서 정체성 자체도 아예 갈라진 현대 카스티야, 마드리드의 차이를 1930, 40년대 상황에 오독해서 적용한 시각이다. 50-60년대 프랑코 정권의 부분적 통제 완화와 스페인 경제기적으로 인해 스페인 전역에서 엄청난 숫자의 국내 이민자들이 몰려오고 카스티야 정체성이 희석되기 전까진 마드리드는 온전히 아무런 이견도 없는 신카스티야의 일부였다. 이런 시대적 차이를 고려하면 카스티야나 특정 지방에 대해 프랑코 정권이 관대했다는 소리는 적어도 현대 스페인 최대 단위 행정구역인 자치공동체 단위로는 통계적으로 들어맞지 않는 소리이다. 그나마 자치공동체 내부 주 개별 주 단위로 들어가면 지역간 유의미한 차이가 생기기 시작하지만[39] 카스티야, 카탈루냐, 바스크, 안달루시아 같은 스페인 국내 거대 지방, 민족 단위에서는 프랑코 정권은 그냥 공평하게 살벌하고, 폭력적이었다.

2.5.2. 학계와 문화계 탄압

프랑코는 문화, 예술, 학문 방면에서 지식인 계층을 탄압하였고, 그 결과로 스페인의 문화·예술계는 말 그대로 작살이 났다.

내전 발발 이전 스페인의 문화적, 예술적 사조를 주도하던 27 세대(Generación del 27)라고 불렸던 문학인, 예술인들이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전쟁 초기 야외에서 재판도 없이 처형됐고, 미겔 에르난데스는 옥사했고, 페드로 살리나스, 후안 라몬 히메네스는 망명지에서 객사했다.[40]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내전 발발 직후 아르헨티나로 겨우 튀었고, 안토니오 마차도는 프랑스로 도망가면서도 "Dos Españas(두 개의 스페인)"이란 걸출한 시를 썼다. 처음에는 좌파의 모험주의, 진보주의적 광신성을 혐오하며 정치적 우익으로서 쿠데타를 좋게 생각했던 철학자 겸 작가이자 문화비평가인 미겔 데 우나무노는 겨우 며칠 만에 학살, 폭력, 반지성주의로 무장한 쿠데타군의 본질을 알아채고, 근무하던 살라망카 대학의 공식 석상에서 이를 비난하다 그 자리에서 스페인 외인부대원들에게 몰매 맞아 죽을 뻔한 걸 현장에 있었던 프랑코 부인의 개입으로 살아 남아 가택연금, 한 달쯤 이후 집에서 돌연사했다.[41]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공화파 인사들에게 관대했던 멕시코부터 시작해 중남미/유럽/북미 국가로 도망쳤는데, 대표적으로 루이스 부뉴엘이 있다. 부뉴엘은 전후 멕시코에서 다시 활동을 재개했고[42] 비리디아나를 만들면서 겨우 유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43] 전후 스페인 영화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돼서 루이스 가르시아 베를란가와 후안 안토니오 바르뎀이 처음부터 그 인프라를 다시 다져야만 했다. 심지어 베를란가와 바르뎀도 엄청나게 탄압받으면서 활동했다.[44]

학계에서도 당시 대부분 공화국,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을 지지했던 스페인의 진보적 지식인들, 대표적으로 클라우디오 산체스 알보르노, 라몬 피달,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아메리코 카스트로 등 당시의 거물 역사학자, 철학자, 비평가 등이 대거 중남미, 북미, 프랑스 등지로 몰래 망명하기도 했다.[45]

내전 이전만 해도 상당히 발전해있었던 스페인의 역사학계와 문화비평학은 대거 작살나서 오히려 70년대, 80년대를 들어 미국, 멕시코, 아르헨티나, 프랑스 등을 통해 역수입되었다. 서구권 지식인 사회 전반에서 히스패닉 역사, 문화, 예술 등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대폭 늘었던 시기가 바로 이 망명인사들이 전 세계로 흩어진 40년대, 50년대의 일이다. 과장이 아니라 20세기 초중반은 스페인에게 있어서 16-17세기 스페인 제국 시절 이후 문화적으로는 국제적 아웃풋이 최고로 끝물을 달리던 황금기였고, 이런 문화적 황금기를 프랑코 정권은 알아서 작살내주었다.

대중적 차원에서도 유명한 사례가 있다면 현대 프리메라 리가레알 마드리드FC 바르셀로나 사이 라이벌리에서 마드리드가 정권의 비호를 받았니 안 받았니, 바르셀로나가 핍박을 받았니, 받았으면 다른 팀들에 비해 얼마나 받았니 끊임없이 이어지는 논쟁일 것이다. 역사적 민감성과 양 팀이 주도하는 스페인축구판 전반에 걸린 돈과 여론의 무게를 고려하면 제대로 된 공론이란 걸 형성할 만한 연구는 요원해 보인다. 제대로 된 공론을 형성하려면 결국 그 당시 스페인 축구판에 대한 고밀도 역사학적 연구가 필요한데, 바르샤나 레알이 잘도 외부 연구자들에게 공문서들 보여주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같은 양반들의 녹취록을 보여주겠다.

다만 확실한 점은 프랑코 정권이 정권 홍보의 수단으로 축구에 큰 집중을 한 건 사실이고, 이게 당시 안그래도 살기 팍팍했으며, 역사적으로 16 ~ 17세기 리즈 시절 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어엌 피레네 이남 아프리카ㅋㅋㅋ' 같은 유럽 내 오리엔탈리즘이라 부를 만한 낮은 국민적 자존감이 정점에 달했던 후기 프랑코 정권 시절[46] 스페인 축구의 부상이 정치적, 민족적 분열을 초월하여 스페인 국민 전반에게 큰 자부심을 주었던 것과 맞물려 떨어졌다.

논란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영입 같은 사례가 대표적으로 이 와중에서 프랑코 정권이 정치적 의도로 레알 마드리드를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대변했던 바르샤 상대로 푸시했다는 것인데 확실한 사실은 당시 스페인 사회에서 전체주의 정권의 영향력은 비단 바르샤, 마드리드뿐만 아니라 스페인 축구판 전반에서 넘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건 영향력을 고려하면 국민에 대한 테러에 거리낌 없었던 정권이 굳이 치졸하면서도 번거로운 방법을 썼을까 일각에서 회의적인 시선도 있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논란과는 별개로 당시 축구팀들의 업적이 전적으로는커녕 일부 유의미한 수준에서나마 정치적인 푸시로 이루어진 가짜 업적이라면 그리 돈이 많이 걸려 있는 유럽 축구판에서 진작 레알의 가치는 훨씬 저평가 받았을 것이다.

참조해보기 좋은 글

2.5.3. 경제정책

크게 초기의 국민생디칼리슴 원리에 따른 자급자족(autarky)적 경제 체제와 후기의 시장 개방을 통한 성장으로 나눌 수 있다. 프랑코 체제는 1939~1950년대까지 고립주의 하에서 자급자족을 지향했지만 한계가 뚜렷했고 50년대에 들어 점진적 개혁에 나서고 그 개혁이 59년에 들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1960년대 들어 자본주의적 발전으로 축을 돌렸고 뒤늦게나마 성장을 하긴 했다. 그래서 프랑코 지지자들은 후반기의 경제 성과를 업적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1940년대와 1950년대 스페인의 경제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진 막대한 부채를 갚는 것과 동시에, 프랑코의 이른바 '자급주의', '군수공업우선주의'[47]로 인해 거의 파탄 직전까지 갔다는 비판도 있지만, 당시 스페인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48] 외국과의 교역을 활발하게 하려고 해도 그럴 상황이 못 되었다. 스페인이 고립된 것은 45년 이전에는 2차대전, 그 이후부터 50년까지는 프랑코 정권에 대한 혐오에 따른 국제연합의 제재 때문인데, 2차대전 끝날 무렵에는 스탈린의 소련과 공산당, 사회당이 주축인 자유 프랑스 측, 스페인 내전 때 부터 스페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합법적인 신정부로 재탄생하고 있었던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측을 비롯하여 프랑코 정권을 실질적인 추축국으로 분류하여 조지려는 세력은 연합군 내에 충만했다. 그나마 영국과 미국 측에서 적극적으로 이들을 뜯어 말렸으며, 뜯어 말리면서 직접 조지진 않아도 국제 왕따로 만들어서 벌은 주겠다고 설득을 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경제제재 정도가 아니라 2차대전의 참화 자체가 스페인에 직접 쏟아져도 신기하지 않을 만큼 전후 세계 여론은 프랑코 체제를 차갑게 봤다. 다만, 그 와중에도 스페인의 1인당 GDP는 50년대초 들어 전쟁 직전인 35년 수준을 회복했다. 스페인 내전이 2차대전보다 몇 년 더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회복기가 상대적으로 긴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다른 2차대전에 참전한 주요 국가들도 50년대 초에 들어 회복했다.[49][50]

프랑코 옹호자들은 프랑코 정권의 스페인이 서유럽에 비해 좋지 못한 경제 성과를 보인 것에 대해 마셜 플랜의 지원을 못 받아서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은 마셜 플랜 지원 대상국으로 넣지만 않았지 추후 스페인에는 그에 준하는 다른 프로그램을 통해 지원했다.

일각에선 바스크나 카탈루냐의 사례를 들어 스페인이 이미 경제를 성장시킬 기반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한다.[51] 물론 해당 지역이 꽤 발전한 지역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지나친 비약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래도 스페인은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가난한 국가였던 그리스나 포르투갈, 불가리아, 루마니아, 아일랜드 같은 나라들에 비하면 나름 중공업 기반이 튼튼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스페인은 20세기만 해도 영국, 스웨덴과 함께 유럽 조선업의 선두주자였고, 자동차의 경우 1900년대부터 자체적인 자동차 개발 기업이 있었으며, 과거에는 이스파노-수이자, 현재는 세아트라는 자국산 자동차 브랜드도 있다. 고속철도 AVE도 프랑스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아서 자체 개발할 정도다. 유럽의 다국적 기업 에어버스에도 지분이 있고 스페인 국내에 공장도 있다.

스페인에서는 레저, 관광산업이 스페인 경제성장의 한 축을 담당했다. 여가산업은 보르본 왕정부터 리베라 정권, 스페인 제2공화국까지 계속 중점적으로 역점을 두던 분야였고, 지중해 연락선, 내륙철도 개통, 20 ~ 30년대 파라도르(Parador)같은 국영 숙박업소체인 정비를 통해 경쟁력을 유지했다. 1차대전 중립국 특수를 누리기도 했고.. 여하간 내전 전까지 스페인은 연 인원 500,000명 가까이 지중해의 따뜻한 기후를 찾는 부유한 여행객들의 목적지가 되어왔다. 도리어 프랑코 정권 초기, 정권에 비 협조적인 관광사업자에 대한 제재, 경찰들이 관광객들의 특정지역 출입을 금지하거나, 방문객 행로에 밀착하여 해변이나 마을 주변까지 감시하고, 프랑코 정권의 고립된 국제정세와 좌익 게릴라 (Spanish Maquis)소탕 목적으로 국경을 봉쇄하는 등 양적으로는 성장했을지 몰라도 여러모로 산업 잠재력을 깎아먹는 정책을 펴왔다. 물론 포텐셜은 어디 안가서 50년대 말 서방세계에 편입되고 국경을 개방하면서 스페인의 여가, 관광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말이다.[52][53]

또 이시기 스페인의 상대적 경제 미비가 꼭 프랑코 정권만의 탓이라고 보긴 뭐한게, 스페인이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 후진적이었던 것은 물론 내전[54]의 여파나 우호적이지 못한 외교 환경 등도 원인이 될 수 있지만 늦게 잡더라도 18세기부터 남북유럽 격차[55]가 커진 것 역시 큰 원인이었다. 즉, 스페인의 경제적 성취가 전적으로 프랑코 덕이라고 하는건 어불성설이지만 마찬가지 논리로 볼 때 프랑코 집권 전의 스페인이 경제적으로 후진 지역이었던 것 역시 마냥 프랑코 탓은 아니라는 것.[56][57][58]

결과적으로 60년대 이후의 스페인의 경제성장 자체는 상당히 괄목할만 했다. 이를 스페인의 기적(Spanish Miracle)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50년대 이후에는 성장이 궤도에 오르면서 서유럽을 어느 정도 따라잡았고 이에 따라 국민소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긴 했다. 프랑코가 죽는 1977년 스페인의 GDP는 세계 10위권 수준이었다. 1962년에야 겨우 세계 평균을 넘길 정도로 낮았던 스페인의 1인당 GDP도 11년 만인 1973년 세계 평균의 2배를 돌파하여 사실상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 물론, 이런 경제성장은 각종 공항에서 대도시 식수 공급용 저수지, 고속도로까지 핵심 인프라 사업을 죄다 정치범 노예노동으로 이룬 그늘과 더불어 프랑코가 죽기 전후에 잠시 주춤했지만 왕정복고와 민주화 후에도 못해도 8~90년대까지는 지속되었다.

또 프랑코 시기의 경제 발전은 작위적이고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져 그 결과를 현대의 스페인인들이 유로존 경제 위기로 톡톡히 치르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예를 들어 프랑코 정권 당시에는 경기나 회사 상황이 나빠져도 노동자를 함부로 못 자르게 하는 법률을 제정했는데 실업자가 늘어나면 정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물론 노동자를 지킨다는 취지에선 평가할만도 하지만 문젠 이게 1970년대 오일 쇼크로 경제 불황이 오면서 기업들에게 부담이 가중되었다는 것. 이래저래 기존의 노동자들은 철밥통으로 남아 있는 탓에 기업들의 신규 고용은 상당수가 비정규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스페인은 일자리가 불안정해져 한땐 실업률이 20%를 넘나드는 막장 상태가 되기도 했다. 유로존 위기로 2013년 27%라는 신기록을 달성해서 그렇지, 스페인은 1970년대 이후 실업률이 선진국 중에서는 최고 수준으로, 2007년 버블 당시 정점에서도 8%에 달했다.[59] 다만 이것 역시 스페인 경제 성장이 프랑코 정권의 업적만도 아니듯, 실업률 문제도 그럼 민주 정부는 뭘 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엄밀히 따지고 들어가면 오늘날 스페인 경제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죄다 특정 정권의 전유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스페인의 실업문제를 역사적으로 본다면 오일쇼크의 후유증이 198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어서 물가안정을 위한 고금리 정책에다가 중공업 구조조정까지 겹쳐 실업률이 20%대까지 치솟았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1992년까지 유럽 공동체 가입으로 서유럽 각국가에서 투자자금이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일시적으로 진정되었는데[60],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후부터 1994년도까지 침체기가 닥쳐왔기 때문에 이때 실업률이 20%를 넘은적이 있었다. 다만 이때의 실업문제가 2008~2015년 금융위기때와는 다른점이라면 이 당시에는 자산시장 자체는 많이 건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업수당을 올리는 식으로 어느 정도 대처에 성공했었는데, 2008~2015년도에는 부동산 거품이 주 원인이었는데, 부동산 가격이 소득수준에 비해 크게 비싼 상황에서 타격이 심하게 오자, 은행구제에 대량의 재정을 투입하는 바람에 국가채무는 폭증하면서, 실업자들을 구제해줄 여유는 커녕 있던 지원도 깍아버렸고 이 때문에 경제적으로 후유증이 심하게 온것이다.

2.5.4. 대외관계

프랑코 정권은 정치적인 기반도 불안하고, 국제적으로는 왕따고, 경제 사정은 또 개판이니 결국 50년대를 기점으로 외교 정책에 대대적인 수술을 가했다. 프랑코는 냉전 시기 서방의 편집증적 좌익공포증에 편승하여 갑작스럽게 자신을 반공 투사 1세대로 국제 무대에서 포장하기 시작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코는 한국에 스페인 지원병을 파병할 용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6.25 전에 참전을 해서라도 UN과 서방 국가들의 인정을 받겠다는 뜻이었다.[61] 결국 스페인의 한국 파병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국제 교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2.5.5. 심화된 지역 갈등과 분리주의

프랑코는 현재의 지역분리에도 책임이 있다. 폭탄테러 등으로 스페인을 괴롭힌 바스크 지방의 ETA를 필두로 한 테러리즘, 그리고 독립 선언을 한다 만다 하는 카탈루냐의 분리주의 운동은 역사적으로 프랑코 이전에는 전례가 없었다. 분리주의라 해도 스페인 내에서 자치권의 확대와 보장을 요구하는 훨씬 더 온건한, 중앙에서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소수의 지식인들과 산업가들 중심의 지역주의 운동 수준에 가까웠다.

원래 역사적으로 스페인이란 나라는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에 맞선 여러 가톨릭 왕국들의 동군연합에 뿌리를 둔 나라다. 때문에 이웃 프랑스와는 대조적으로 지방 자치 전통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으며, 중앙 또한 이를 대체적으로 존중하고 합리적으로 교섭을 하는 게 전통이었다. 스페인 각 지방들의 사법적, 정치적 통합은 카탈루냐의 경우 18세기 중반, 바스크 지방은 19세기 후반에야 이루어졌다. 당연히 통합 이후에도 자국어 사용같은 시시콜콜하면서도 민감한 문제로 지방을 건드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렇다 보니 지방의 민족주의, 독립 분리주의 운동들도 지식인, 중산층 사회 밖으로는 파급력이 제한되어 21세기 현재 스페인 자체의 통합에 위협이 될 만큼 힘이 강했던적은 드물었다. 바스크, 나바라 기반이었던 수구주의 카를리스타 운동도 기반이 그쪽 지방과 지방 자치 수호였다는거지 훗날 ETA의 테러가 대표한 본격 분리 독립이 아니었고, 1934년 헌정 위기 사태 중 카탈루냐 공화국을 선언했던 자치정부(Generalitat) 수반 유이스 콤파니스는 그 뒤 "스페인 연방 내"라는 조항을 덛붙였었다. 그리고 세간에서 종종 카탈루냐 민족주의 운동으로 착각하기도 하나, 내전 당시 그 지역을 휩쓴 아나키스트 혁명과 자치공동체들은 카를리스타와 마찬가지로 지리적 기반이 카탈루냐, 아라곤이다 보니 그 지역 사람들이 중심이 된 운동이었지, 원칙적으론 이베리아 반도 전역의 해방을[62] 주장했던 탈민족주의적 국제주의 좌파였다. 카탈루냐 아나키즘의 경우 오히려 인구 기반이 상당수 카스티야, 안달루시아에서 흘러온 국내 이민 노동자들이었고[63], 사상적으로도 민족주의와 확고하게 반대되다 보니 카탈루냐 민족주의 성향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 정치인들과 치열하게 대립하며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부르주아들의 처량한 애국놀이'[64], '사자(스페인 중앙정부)가 없는 자리를 대신 꿰차려는게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동네 폭군을 꿈꾸는 여우' 라 부르며 격렬하게 대립하는 관계였다.[65]

그런데 프랑코는 정권을 잡은 이후 오직 카스티야어만 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고는 현지에서 일상 언어로 수백 년간 사용된 카탈루냐어, 바스크어, 갈리시아어를 제한도 아니고 금지했다.[66] 그리고 공권력을 동원해 스페인 역사상 유례 없는 탄압을 가하며 중앙에 대한 복속을 강요했다. 카탈루냐나 바스크 지방은 제국의 먼 식민지도 아니었고 현대 스페인의 중심인 카스티야와는 독립적인 정치적, 사회적 집단으로 존속해온 땅으로 자국 땅에서 뿌리 없는 강제동화정책의 대상이 될 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 시절의 기억은 현재도 빌바오바르셀로나의 중장년층 사이에 남아있다. 젊은 시절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모어인 바스크어나 카탈루냐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헌병대에 끌려가 뺨때귀 맞은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

자기네 땅에서 이런 유례없는 탄압과 강제동화정책을 40년 가까이 겪으며 산 이 지방들은 프랑코 정권 말기 독재자가 죽을 기미가 보이자 아예 스페인이란 나라 자체에 질색을 하게된다. 그리고 폭탄이나 로비, 여론을 통해서 노골적인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급진적 방향으로 선회한다.

2.5.6. 우생학

프랑코는 나치식 인종주의를 어설프게나마 받아들여서 빨갱이가 되는 것은 열등한 유전적 요인이 있으니 그 형질을 물려 받은 빨갱이 자식들은 사회에서 정화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공화파 여성 포로를 강간해서 임신, 출산시키고 그 자식들을 납치해 부모로부터 격리시킨 적도 있다. 이 정책을 주로 밀어 붙인 당시 국가군 군의관단의 간부였던 안토니오 바예호-나헤라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초기 독일에서 유학하며 에른스트 크레치머 아래 공부하며 우생학을 전공했다. 내전 당시 그는 프랑코 정권의 허가를 받아 심리전 연구부(Gabinete de Investigaciones Psicológicas)라는 독자 부서를 세우고 포로로 잡은 공화파, 국제여단원들 상대로 전형적인 나치 정권의 그것스러운 '신체검사'를 한 이후 스페인의 민족성(hispanidad)은 유전적인 성질이 있고, 좌파, 자유주의자, 세속주의자들은 이런 열등한 민족적 유전성을 가지고 났다며 아래 대량 아동 납치, 격리 프로그램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67]

1934년 아스투리아스 혁명 진압과 내전 당시 프랑코가 모로코 식민지병을 끌고 와 공포 정책을 편 적이 있다. 이때 좌익에서 "왜 당신네들 우익은 천날만날 레콩키스타 얘기를 하면서 스페인 정화 운운하는 주제에 그 스페인 노동자들 죽일 때는 왜 바로 그 무어인들을 끌고오냐?"라고 따지자 우익 쪽에서 변명이라고 꺼낸 게 좌익은 생물학적으로 스페인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격리 당시 스페인은 고아원에라도 보낼 능력조차 없었던 나라였기 때문에 부모에게서 강제로 떨어져 사회의 암지에서 버림받아 자라게 된 아이들이 30만 명이다.[68] 그리고 자국민 상대로 열등인종 운운하는 걸 전문으로 파며 이런 국가적 아동 유괴 프로그램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던 상술한 바예호-나헤라는 전후 콤플루텐세 대학 심리학과 교수직으로 정권에게 보상 받았고, 그와 동명의 아들은 지금까지도 스페인 심리학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영향력 있는 학계의 대부격 인물들이다.

2.5.7. 섭정 통치

파일:RETRATO_DEL_GRAL._FRANCISCO_FRANCO_BAHAMONDE_(adjusted_levels).jpg 파일:external/cdn.dipity.com/633e0e63b9b6542cb6d5772d7afe78be_1M.jpg
1964년[69] 1975년 1월

프랑코는 집권 이후 자신을 스페인 왕국의 섭정임을 자처하며 왕정을 복고하고, 귀족 제도를 부활하는 등 왕국을 재건했지만 정작 자기 살아 생전에는 왕을 세우지 않았다. 헝가리의 호르티처럼 왕이 없는 왕국의 섭정 노릇을 한 것이었다.

프랑코는 1961년 과거 스페인을 지배한 적이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에게 스페인의 국왕 자리를 제안하였다. 하지만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거부한다. 하지만 프랑코가 오토 대공에게 스페인 왕위를 제안한 것 자체는 진지한 제안이 아니라 자신과 대립하는 알폰소 13세의 3남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을 자극하려는 술책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스페인 내전 시절부터 복벽을 위해 열성적으로 활동해온 후안 백작은 처음에는 프랑코를 지지했으나 스페인 입국 과정에서 프랑스로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게된다. 이후 히틀러에게 프랑코 축출을 요청하는 로비를 했고, 연합국이 승리한 후에는 자유주의자로 돌변하여 미국과 영국에 복벽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프랑코와도 협상의 길을 열기 위해 볼모로서 아들 후안 카를로스를 스페인으로 보냈다.

후안 카를로스는 아버지와 달리 프랑코에게 매우 순종적이었다.[70] 프랑코는 카를리스타나 보르본 왕조의 다른 유력 왕족들과 저울질하면서 계속 후안 카를로스를 조련하기도 했다. 그래서 프랑코는 자신에게 복종할 생각이 없는 후안 백작 대신에 순종적인 후안 카를로스를 새 국왕으로 결정하고 1969년 행정법을 통해 그를 '스페인의 왕', 동시에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한다.[71] 사실 프랑코는 외동딸 카르멘만 있었고 아들이 없어서 권력을 세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프랑코 정권 말기에 이르면 서방과의 관계가 계속 긴밀해지면서 이전처럼 나라 문을 닫고 살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에 아마 아들이 있었다고 해도 북한의 김씨 일가나 시리아 아사드 일가처럼 권력 세습을 하지 않았을 공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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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총통과 원래 후계자였던 블랑코 제독 1969년 후안 카를로스와 악수하는 프랑코. 두 사람의 관계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꽤 괜찮은 편이였다고 한다.

원래 후안 카를로스는 단순한 얼굴마담으로, 실제 프랑코가 후계자로 삼았던 것은 스페인 내전 이후 함께 해 온 그의 측근이었던 해군원수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Luis Carrero Blanco) 제독이었다. 프랑코는 그를 1973년 수상에 임명하며 후계자 과정을 거치고 있었고 스페인 군부는 후안 카를로스를 애송이(ese niño)라고 공공연하게 비웃었다. 그런데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에 블랑코 제독이 암살당하면서[72] 프랑코 체제는 후계자를 잃었고 상당히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프랑코는 단순한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려 했던 후안 카를로스를 프랑코 체제의 후계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군부도 후안 카를로스에게 2대 카우디요가 되길 바라고 있었다.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어릴 때부터 그를 신경써서 교육했다. 후안 카를로스는 육해공군 사관학교 세 곳을 모두 졸업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프랑코는 장래의 임금님에게 스페인 전군의 장교단에 골고루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맥을 만들어 준 것. 이는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왕위에 오른 뒤 군의 움직임에 민활하게 대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 왕자에게 정치를 가르쳐주진 않았는데,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프랑코에게 내각 회의에 참여시켜달라고 하자 "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통치하실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방식은 아무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한 바 있다.[73] 이 에피소드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자신이 직접 들은 얘기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과 떨어져 자란 국왕 본인은 프랑코에게서 일종의 부성애를, 아들 없이 산 프랑코 본인은 국왕을 일종의 아들처럼 아끼며 자랐다고 한다. 후안 카를로스는 공적인 자리에서 프랑코 옹호 발언을 하지는 않았으나 사석에서 다른 사람이 프랑코를 비판하는 건 용납 안할 정도로 프랑코에 대한 친밀감이 컸다고 한다. 한편 사형과 수감을 비롯한 탄압은 말년이라고 특별히 더 누그러지고 그딴 거 없었기에 후안 카를로스가 정치적인 이유로 프랑코를 두둔하는듯한 발언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미 프랑코 살아 생전인 1970년대부터 프랑코 정권에 대한 저항이 멈추지 않았고 프랑코의 사망이 목전에 다가오자 저항 운동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프랑코 체제는 생존을 위해 '통제된 민주주의'란 명목으로 민주주의와 일부 협상을 시도했으나 걷잡을 수 없는 개혁 요구에 놀란 아리아스 나바로 수상은 바스크 분리주의자, 카탈루냐 분리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을 닥치는대로 처형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프랑코 말엽의 스페인은 다시 유럽 정가의 천민으로 추락했다.

프랑코는 군부에게 후안 카를로스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주문하는 등[74] 후안 카를로스의 권위를 세워주는 행보를 밟았지만 민주화 세력과의 일부 협상 시도 외에는 큰 틀에선 자신의 카우디요 독재 체제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프랑코를 절대적으로 따르던 벙커파들은 프랑코의 뒤를 이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독재를 하길 원했고, 체제 내부에서도 개방파나 기술 관료 세력들이 있었지만 이들도 후일 후안 카를로스 1세의 급격한 개혁 수준까진 요구하지 않고 있었다.

2.5.8. 사망

파일:Franco-1975.jpg 파일:프랑코의 마지막 모습.jpg
1975년 10월 1일에 생애
마지막 대중연설이었던 동방광장[75]에서의
연설에 참석한 프랑코.[76][77]
1975년 10월 23일[78]에 촬영된 프랑코.[79]
이 사진이 프랑코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사진이다.
모든 정적들에게 용서를 빌며 나 또한 정적들을 진심으로 용서한다.[80]

1975년 9월 27일, 프랑코 정권은 정권 최후의 사형 집행으로 기록 될 ETA, 좌파 반체제 무장 단체 반파시스트 애국 혁명 전선(Frente Revolucionario Antifascista y Patriota) 소속의 정치범들과 아나키스트 살바도르 푸이그의 처형을 집행했다. 같은 해 5월 대통령 제럴드 포드의 스페인 방문까지 있었던 미국측은 크게 당혹스러워했고, 15개 유럽 국가에서 이에 대한 항의로 주 스페인 대사들을 소환하며 유럽과 중남미 각지의 스페인 대사관 앞에 항의 시위가 들끓거나, 국제 여단과 2차대전 당시 빨치산, 레지스탕스 투쟁의 역사 때문에 반프랑코 정서가 강했던 이탈리아, 프랑스 같은 주요 이웃 강대국에선 심지어 대사관들이 공격당하기까지 했다.

이 와중에 결장암과 동맥경화, 파킨슨병 등의 합병증으로 골골대던 프랑코는[81] 1975년 10월 1일 대중연설에서 40년 내내 했던 그대로 이 모든 항의 시위는 프리메이슨과 국제 볼셰비키들이 국내 테러리스트를 앞세운 사회 전복 시도라 주장했다. 이 연설을 마지막으로 프랑코는 더 이상 대중 앞에 서지 못했고[82] 이후 스페인어 위키피디아의 표현대로라면 '느리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정확히 2주일 후인 10월 15일에 심장마비를 겪은 것을 시작으로 10월 30일부터는 끝내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10월 31일에는 위출혈로 위의 2/3을 제거하는 대수술을 해야 했던 데다가 그 과정에서 투석을 받아야 하는 요독증까지 발견되었고, 수술 과정에서 천공을 한 결과 다발성 장기 부전을 일으키는 급성 복막염에까지 걸리며 그해 11월 20일, 83번째 생일을 2주 정도 앞두고 패혈성 쇼크로 향년 8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후안 카를로스를 비롯한 정부 주요 인사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 보았으며,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30일간의 국가애도기간이 선포되었다. 참고로 프랑코 또한 포르투갈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와 마찬가지로 측근들이 마치 그가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했으며, 그 결과 이미 죽은 사람이 스페인령 사하라를 모로코에 양도하는 협정에 서명하게 되었다.

프랑코가 죽은 뒤 그의 권한을 물려받은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민주화를 추진했으며, 1981년 2월 23일 민주화에 반대해 의회가 점령당하는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비교적 문제없이 진압함으로써 스페인의 민주주의 체제는 강고해질 수 있었다.

허나 민주화 이후에도 프랑코 정권의 후유증이 너무 컸는지, 당대 스페인 국민들은 암묵적으로 망각 협정을 맺어 이 당시의 일을 입 밖에 내는 것을 금기시했다. 그러나 점점 프랑코 정권의 망각 협정도 그 이름에 걸맞게 잊혀져가며, 후대 스페인인들은 프랑코 정권 당시의 과거사 청산 노력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3. 프랑코 통치 이후

프랑코가 죽은 후에도 프랑코의 하나뿐인 딸 마리아 프랑코의 후손들은 프랑코 사후 귀족 작위를 받으며 잘 살고 있지만, 프랑코의 업적만큼이나 프랑코의 과오도 상당해서 최대한 조용히 살고 있다.


[1] 특히 왜소한 체구 때문에 '성냥개비'란 별명으로 불렸다.[2] 당시 프랑코는 체격이 작아 꼬마 프랑코, 계집애 파카(프란시스코의 여성형인 프란시스카의 애칭) 등으로 불리며 동료 장교들에게 무시당했다.[3] 이 사람 역시 프랑코와 마찬가지로 전쟁 영웅이었는데 현지 게릴라와의 전투에서 한 팔과 한 눈을 잃었다. 프랑코가 모로코에서 복무하던 시절 이 사람 밑에서 일하면서 프랑코와 인연을 쌓았고 나중에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국민 전선에 가담하여 프랑코에게 힘을 실어준다.[4] 나중에 스페인 제2공화국 대통령이 되어 내전에서 프랑코와 대립하게 된다.[5] 예수회를 설립한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스페인 사람이었고, 역사상으로 예수회는 스페인 출신의 영향이 강했다.[6] 이 당시 비행기 기술이 얼마나 불안정했던지, 동시대의 또다른 독재자 스탈린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딱 한 번. 그것도 테헤란 회담에 갈 때만 탔다고 한다.[7] 지휘관들인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수병들이 사살해 진압했다. 프랑코가 확보할 수 있었던 함선은 제한되었고, 위와 같은 이유로 반란군 장병들만으로 어찌저찌 항해해야 했으니, 정부군이 장교가 없고 제공권을 장악당해 못 쓰는 동안 반란군 역시 함선 장악에 실패하고 인원도 모자라 못 쓰는 처지였다.[8] 하지만 상술한 것처럼 장교들이 이미 다 죽거나 도망간 상태라서 그냥 무늬만 해군인 상태였다. 함선에 간부가 없다면 전투는커녕 항해조차 못한다. 영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정도로 강력했던 프랑스 왕국 시절의 프랑스 해군이 혁명 이후로는 완전히 몰락해서 이후 제대로 회복도 못하고 처참하게 패배를 거듭했던 것도 귀족 장교들이 모두 죽거나 도피했기 때문이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육군보다 해군은 전문성이 훨씬 요구되는 직역이기 때문.[9] 대표적인 사례가 무기고를 개방해 무기를 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버티고 있다가 제4의 도시인 세비야를 케이포 데 야노에게 허무하게 내어준 것인데 세비야는 신속하게 반란군을 제압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같은 다른 대도시들과 달리 반란군이 쿠데타 직후에 유일하게 함락시킨 대도시였다. 세비야의 함락이 공화 정부에게 더 치명적이었던 점은 당시 "붉은 세비야"라고 불릴 정도로 좌익 세력이 막강했던 세비야와 안달루시아를 공화 정부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던 수만 명의 노동자와 소작농의 목숨과 함께 반란군에게 내어준 데다가 세비야를 장악한 반란군이 신속하게 모로코를 장악한 정예 아프리카 군단과 협공해 스페인 제1의 군항이었던 카디스를 함락시키고 스페인 중북부를 장악한 반란군과 합류하면서 내전이 장기전으로 흘러가게 된 것이었다.[10] 좌파 노동조합이 아니라 파시즘의 원류가 되는 국가노동조합주의자들이다.[11] 물론 좌파 노동조합가도 있었다. JONS의 좌파 팔랑헤주의자 레데스마 라모스가 그 대표적인 예시이며 노동조합과 지방자치의 산업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를 통한 전체주의적 노동조합국을 꿈꿨다. 다만 내전 이전에 팔랑헤가 부르주아 냄새가 난다며 탈당했고 JONS에 남은 좌파 팔랑헤들도 쿠데타 당시 숙청당했을 뿐이다.[12] 특히 이러한 쿠데타작업 중에 숙청된 좌파 팔랑헤 세력이 꽤나 있으며 카를리스타 역시 프랑코의 짓거리가 역겹다고 따로 근왕사회주의 정당인 좌파 카를리스타를 만들기도 하였다.[13] 리베라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은 없었고 '유대인 그거 그냥 가톨릭으로 개종 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 정도의 생각만 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착하게 군 것도 아니라 정치활동의 일환으로 유대인 상점에 대한 공격을 지시한 적도 있었다.[14] 대전 후에는 일찍부터 나치에게 점령 당해 국가가 유린 당한 폴란드인들이 비슷하게 살아 남은 자들은 수용소 고참이 되어 그 중 지조와 양심을 지킨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적극적으로 다른 수감자를 도우며 수용소 내 저항에 핵심적인 역할을 종종 맡았는데, 폴란드는 전쟁 이전에는 군사정권 아래 반공 우익 정권이었기 때문에 이 폴란드인 수감자 중에는 폴란드 국내군을 비롯해 이데올로기적으로 따지면 스페인 공화파와 반대인 우익 가톨릭 민족주의 성향의 인사들이 많았다. 폴 프레스턴이나 스타니스와프 도보시에비츠 같은 스페인과 폴란드의 홀로코스트 전문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와중 실재로 마트하우젠, 부헨발트, 다하우 같은 곳에서는 스페인 공산당원/아나키스트와 폴란드 가톨릭 사제의 협력 같은 좌우합작도 종종 있었던 모양이다.[15] 이런 신념적 정치범들이 수용소 내 저항 조직을 만드는 걸 막기 위해 일반적으로 카포는 민간 사회에서도 삐뚤어진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던 그냥 범죄자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특히 아직 전시 체제가 본격화되지 않고 홀로코스트가 정치적 박해 수준으로 머물렀던 30년대 말을 비롯하여 이따금 대규모 소탕 작전 이후 한번에 대규모로 독일이나 각 점령지의 정치범들이 대거 입소하여 이들이 카포 층을 이루었던 경우가 있었다. 게다가 정치사상적 수감자들은 일단 고학력자들이 많고 어디 조직 활동을 해 본 경험이 많았으니 중간 관리자로서 딱이라서 해당 수용소의 사정이나 수용소장 성향에 따라 오히려 카포로 더 잘 쓰였던 경우도 있었다. 부헨발트의 경우도 그렇고 수용소 문학에서 가끔 가다 나오는 양심을 지키고,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며 중간관리자로서 다른 수감자들을 더 박해한게 아니라 오히려 감싸주고 지키려고 했던 예외적인 카포들은 다수가 이런 경우이다.[16] Francisco Boix(1920~1951). 이름에서 보이듯이 카탈루냐인이었다.[17] 영국과 겉으로는 중립이지만 국제여단을 제외하면 속으로는 은근 슬쩍 국민진영과 거래를 하거나 이런 저런 편의를 봐줬다. 오히려 이 덕분에 프랑코에 대한 직간접적인 영미측 인맥과 경제적 의존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프랑코가 추축국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39년 당시 가진 의구심과 달리 중립으로 남을 수 있도록 기여하기도 했다. 가장 특기할만한 건 역사가이면서 주 스페인 미국 대사인 J. H. 하예스의 사례다. 이 사람은 42년, 45년 당시 주스페인 미국 대사로 파견나갔는데 독실한 가톨릭이라는 점 덕분에 스페인으로부터 충분히 존중받았고 자신의 지위를 활용해 스페인이 추축국에 넘어가지 않도록 했으며 덤으로 히틀러로부터 도망친 몇 만에 유대인을 포함한 정치적 난민들을 구출하는 일도 맡았다. 이 외에도 처칠의 영국은 스페인 관료들에게 뇌물을 푸는 외교 공작을 벌이기도 했고.[18] 대표적인 스페인 내 친영파 거물로 왕정시기 외무장관이자 프랑코 정권의 초대 영국 대사 제17대 알바 공을 들 수 있다. 영국에도 영지가 있는 그냥 반쯤 영국인이었던 사람인지라 내전 기간 내내 줄곧 영국 상류 귀족층을 상대로 국민진영에 유리하게 여론공작을 했고 그 덕에 프랑코 정권에서도 잘 나갔다.[19] 2차세계대전 당시 스페인의 정치구도를 보면 세라노 수녜르같은 파시스트가 사실상 2인자로서 각종 분야에서 프랑코에게 조언하면서 실세 노릇을 했고 가톨릭, 군부, 왕당파는 그 주변에서 화를 참아가며 지켜보고 있었다. 청색사단 아이디어도 세라노 수녜르가 떠올린 것이다. 영국은 특히 왕당파와 가톨릭을 중심으로 반독 공작을 했다. 그리고 2차대전이 끝나면서 세라노 수녜르같은 친독 파시스트는 당연히 영향력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친영적인 왕당파와 가톨릭 교회가 차지한다.[20] 이 때 탕헤르에 주둔한 외교관들은 전부 추방한다. 독일 외교관도[21] 내부적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스페인 입장에서 필리핀은 당장 프랑코와 같은 세대들이 초년 장교나 어린 아이였던 시절 상실했던, 아시아 유일의 스페인어권으로 이때만 하더라도 필리핀의 엘리트들은 아직 영어 못지않게 스페인어도 많이 사용한데다 가톨릭 국가였다는 점만으로 과거 스페인 제국에 대한 향수에 의존한 프랑코 정권의 자기 인식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나라였다.[22] Wayne Bowen, Spain During World War 2, 2006년 작 출처[23] 당시 스페인의 경우를 들자면 "건강한 스페인 민족 남아는 나약한 빨갱이를 죽이며 새로 태어나고..." 운운하던 식의 대중 동원이다. 정치적으론 고참 당원들이 숙청당하며 쩌리가 된 정당 팔랑헤였지만 이런 선동과 심리전 쪽에선 계속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24] 발췌자 주석: 팔랑헤 에스파뇰라의 창시자. 1936년 11월 공화국 군대의 발포로 죽었다.[25] 이하 문단은 발렌시아 대학 사학 교수 이스마엘 캄포스의 2003년 저서, 'España contra españa: los nacionalismos franquistas(스페인과 맞선 스페인: 프랑코주의적 민족주의'들')'에서 주로 참조한 내용들이다.[26]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스페인은 전시상태를 해제한다. 동시에 정치범에 대한 사면 조치도 내린다.[27] 복구해야 한다고 해서 못한다는 건 정말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완곡한 거부를 위한 핑계로 볼 수도 있다. 당장 이탈리아나 일본이 전쟁 준비를 충분히 하고 개전한 건 아니다. 심지어 그 독일조차도 폴란드를 침공할 때 영국, 프랑스가 전쟁에 나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28] 그것 때문인지 지구상 마지막 파시즘 국가 혹은 파시즘 최후의 보루로도 불렸다.[29] 다만 초기에 국민생디칼리슴적 자급자족을 한것으로 보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30] 이건 뒤발리에 부자가 지배하던 아이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프랑코는 말년에는 뒤발리에 부자나 김일성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수준으로 국가를 발전시켰지만 그 이전의 죄악이 너무 커서 그 공적조차 제대로 거론되지 못하고 있다.[31] 다만 프랑코는 2차 대전 후에 학살을 저지른 반공권 독재자들인 이승만수하르토보다는 학살한 인명 수가 적긴 하다.[32] 스탈린은 30년대만 해도 여타 정치인들의 견제를 받아왔다. 히틀러도 30년대만 해도 군부는 말할 것도 없고, 기성 보수 우익의 협조를 얻어 정권을 유지해야 했다. 반면, 프랑코 정권 하에서는 내전을 겪어 출범했다는 특성 때문에 거의 줄곧 군부가 부동의 최고 실세였다. 즉, 정권 획득 과정에서 폭력성을 겪었기 때문에 그만큼 폭력이 초기부터 매서웠다는 것이 차이다.[33] 당시 스페인 인구가 겨우 26,000,000명 남짓이었다. 당시 인구의 1.04%를 감옥에 가둔 셈이다. 어느 정도로 어마어마한 비율이냐면, 오늘날 북한에서 인구의 0.8% 내외가 수감되어 프랑코 집권 초반 스페인보다 낮았다. 다만 엔베르 호자 시기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에서는 인구의 1.1%가, 바트주의 시리아 시기(정확히는 시리아 내전 중)에는 인구의 1.3%가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 프랑코 이상 비율을 보여주었다.[34] 다만 1960년대부터 이런 정책은 다소 완화되었다고 한다.[35] 원문: Nuestros valientes legionarios y regulares han demostrado a los rojos cobardes lo que significa ser hombres de verdad y de paso también a sus mujeres. Esto está totalmente justificado porque estas comunistas y anarquistas predican el amor libre. Ahora por lo menos sabrán lo que son hombres de verdad y no milicianos maricones. No se van a librar por mucho que berreen y pataleen[36] 피마자유를 먹으면 설사가 나왔기 때문에 독을 먹은 사람들에게 먹여 배출하게 하는 등 설사약으로 사용됐다.[37] 다만 이 지도는 국민파와 공화파를 가리지 않고 순수히 매장지만을 표시했다. 동부 지역의 발굴 및 이장 완료 매장지와 미발굴 매장지의 대다수는 공화파에 의한 학살 매장지들이다.[38] 게다가 자칭 가톨릭 신앙을 위해 성전을 치렀다는 자가 전후 포로, '전범'수용소로 산티아고 기사단의 총본산인 톨레도 주 우클레스 수도원이나 발렌시아의 산 미겔 데 로스 레예스, 레온 주의 산 마르코스 수도원 같은 현대와선 유네스코 문화유산급의 유서 깊은 교회, 수도원들을 개조해 썼다.[39] 단적인 예를 들자면 같은 바스크 지방 내에서도 비스카야, 기푸스코아는 집중 학살 대상이 되어버렸지만 옛날부터 바스크 문화 못지 않게 부분적으로 카스티야 문화권에도 걸쳐 있었고, 지역 정치 지형은 차라리 옆동네 나바라에 가까워 보수성향이 강했던 알라바는 확실히 탄압을 덜 당한 편이다. 친프랑코 성향이 가장 강하다는 구카스티야 내에서도 지역 사회의 자체적인 지식인 사회, 마드리드 수도권과의 인접성 때문에 나름 지역 좌파, 자유주의자 세력이 있었던 세고비아, 해당 지방 내에서 최대도시로서 당연히 정치지형도 더 다양했던 바야돌리드 등은 '카스티야는 덜 당했다'란 말이 나오는거 자체가 무색했던 반면, 아예 지역 좌파, 자유주의 세력 자체가 생길 수가 없을 만큼 깡촌 영농사회가 오래 유지됐던 아빌라, 사모라 같은 지방에선 때려 죽일 좌익 자체가 별로 없긴 해서 눈에 보이는 통계는 덜 당한 걸로 보인다.[40] 후안 라몬 히메네스는 195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41] 비슷한 시기에 마침 로르카가 살해당해 국민 진영이 전세계적인 비난을 받았는데 그로 인한 부담을 우려했다는 설명이 있다.[42] 이와 연계되어 멕시코 영화 감독 중에서는 스페인 내전에 관심을 보이는 감독들이 존재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대표적.[43] 하지만 비리디아나는 대놓고 가톨릭을 까는 내용 때문에 영화를 본 프랑코 정권이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심지어 부뉴엘은 사전 검열로 결말을 바꿔야하자 오히려 돌려말하는 식으로 강도를 높이는 짓까지 저지르기도 했다.[44] 후안 안토니오 바르뎀은 하비에르 바르뎀의 삼촌인데, 하비에르 회고에 따르면 삼촌을 포함해 가족 자체가 좌파였기에 정권에 찍혀서 힘들게 살아야 했다고 한다. 후안 안토니오 역시 감옥에 자주 갔다 왔다고. 그 여파로 하비에르는 상당히 강경한 좌파적인 소신을 가지고 있다.[45] 프랑코가 타국에 정보원들을 보냈기에 물론 망명지에서 체포돼 조국으로 송환되어 엄벌받은 사람들도 없잖아 있으며 식구들을 조국에 둔 경우는 그 식구들이 대신 처벌받았다.[46] 다른 유럽 지역, 특히 프랑스에선 영광의 30년이라 부르던 전후 복지국가와 자유민주주의의 제도적 정착을 한껏 누리던 시절이다.[47] 사실 이것은 2차대전 당시 국제정치적 환경의 냉엄함으로 인해 강제된 것도 있다.[48] 게다가 타 유럽 국가들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제 코가 석자라 스페인을 지원할 환경도 되지 못했다.[49] 50~60년대는 사실 전세계적인 호황기였다. 이 때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소련이고 중국이고 공산권이고 전쟁으로 박살난 서유럽이고 다 성장을 하던 시기였다. 그나마 예외가 별로 피해를 입지 않았고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물주노릇을 한 미국이다.[50] http://www.ehes.org/EHES_163.pdf 5페이지 figure 1에 따르면 50~58년대의 1인당 gdp성장률만 하더라도 5%가 넘는 수준으로 그 이후 제도 개혁이 이루어진 스페인의 기적이라 불리던 시기 다음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여왔다. 7페이지 figure 2에 따르면 영국, 미국 대비 1인당 gdp는 43~47년 수준에서 최저점에 있다가 그 후에는 어쨌건 회복 추세를 보여왔음을 알 수 있다. 독일에 본국이 털린 프랑스는 물론 평소에는 스페인보다 훨씬 잘 살았지만 예외적으로 40년대에는 한때나마 스페인보다 경제상황이 열악했다.[51]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지역은 분리주의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탄압받던 지역이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마드리드와 더불어 성장의 수혜를 누렸다. 반대로 안달루시아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52] <Exploring the History of Leisure and Tourism in Spain> M. barke 참조.[53] 실제로 스페인은 1970년 세계 6번째(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스페인)로 보잉 747을 도입했다.[54] 스페인 내전이 아니라도 3차례에 걸쳐 일어난 카를로스파 전쟁 등 포함[55] 남유럽 국가 중 가장 산업적으로 발달한 이탈리아의 철강 생산량은 1925년 기준으로 1,600,000t을 넘는 수준이었다. 스페인은 700,000t도 안 되었다. 동시기 미국, 독일은 46,000,000t, 15,000,000t을 넘겼고, 프랑스는 9,500,000t, 영국은 8,700,000t, 소련과 벨기에가 대략 3,500,000t 정도, 룩셈부르크는 2,300,000t 정도였다. 일본은 이탈리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1929년을 기준으로 스페인의 1인당 GDP는 당시 선진국으로 여겨지는 17개국 중 일본, 핀란드 빼고 가장 낮았다. 한 때 자기들이 지배했던 일부 남미 국가 칠레,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보다도 떨어졌던 것이다.[56] # 이에 따르면 스페인은 내전 이전에도 일반적인 서유럽에 비해 확실히 경제수준이 떨어지는 상황인 것을 볼 수 있다.[57] # 서유럽 중 영국, 프랑스, 경우에 따라서는 이탈리아와 비교할 수 있는 자료이다.[58] 그나마 스페인 내전 전 스페인의 1인당 소득 수준은 일본보다 높긴 했지만, 당시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 중 가장 경제적으로 낙후된 국가였다.[59] 이는 실업률의 국가간 집계방식의 차이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단적으로 한국이나 일본은 실업률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당히 낮게 나오지만 그렇다고 한국 노동시장이 두드러지게 상태가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론, 실업의 이력현상의 근거로 스페인의 사례를 드는 경우도 있다.[60] 다만 이때에도 중공업 구조조정의 여파가 남은지라 실업자들이 많이 양산된지라, 실업률이 10% 이하로 떨어진것까지는 아니었다.[61] 유사한 사례로 이탈리아가 있다.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는 스페인처럼 UN에 가입하지 못하는 등 국제적으로 고립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6.25 전쟁 때 의료 지원단을 파견하였다.[62] 괜히 CNT의 이데올로기적 보조 조직인 FAI가 Federacion Anarquista Iberica가 아니다[63] 당장 아나키즘이 주도했던 1910-30년대 스페인 노동운동의 성장은 안달루시아-바르셀로나 공업지대 사이 국내 인구 유출의 역사와 지역적, 시기적으로 상당부분 일치한다. 즉, 평소에는 바르셀로나 아파트에서 생활하던 안달루시아 출신 노동자들이 농번기 되면 고향에 돌아가 주로 소작농 출신 가족 일 도우면서 사상 전파도 하고, 이런식으로 안달루시아 라티푼디움 농촌과 카탈루냐 공업지대 양 지방이 당시 스페인 급진 좌익 운동의 본거지로 성장했던 것이다[64] patrioteria, 스페인어로 '바보짓'이란 단어인 tonteria의 말장난으로 CNT 당지인 '노동자 연대 (Solidaridad Obrera)' 등에서 종종 사용했던 표현이다[65] 레닌 시절부터 민족주의 담론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하고 전략적으로 연대하려고 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자들과 달리 아나키즘 진영은 적어도 유럽과 북미 같은 눈앞에 대적한 실존적 정치적 문제가 식민지 현실이 아니었던 곳에서는 민족주의 조류 일체에 대해서 상당이 일관적으로 비타협적 모습을 보였던 편이다. 소위 '방어적 민족주의', '피압제민족의 민족주의'도 결국 본질적으론 위험하고 폭압적인 사상으로 보고 배격하는 조류는 애초에 스페인내전 20년전 네스토르 마흐노 시절부터 일찍 자리잡았고, CNT 또한 프랑스로 망명온 마흐노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이런 입장을 건지하며, 21세기 작금까지도 카탈루냐 독립운동에 관하여 '폭압적인 방법으로 대응하는 프랑코 정권의 후계자' 중앙 정부도 욕하지만 카탈루냐 민족주의 세력도 여전히 동네왕초를 꿈꾸는 또다른 악에 불과하다는 양비론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66] 정작 프랑코 본인도 갈리시아 출신이었는데, 프랑코 가문은 카스티야어를 쓰는 안달루시아계 가문이긴 했다.[67] 이 점 또한 다른 전간기에서 냉전기까지 과도기적 이념 대립의 역사와 비슷하게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남미 국가들의 군부 독재 정권에서도 벤치마킹해서 써 먹은 적이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레오폴도 갈티에리 등이 벌인 일명 더러운 전쟁이다.[68] Capnuano & Carli, 2012, "Antonio Vallejo Nagera (1889-1960) and Eugenics in Franco's Spain. When science was the argument for offspring's ownership"[69] 당시 프랑코의 나이는 72세였다.[70] 펠리페 6세가 태어났을때 프랑코에게 제일 먼저 찾아가 아들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읍소할 정도였다.[71] 프랑코와의 협상 카드로 스페인에 간 아들이 자신을 밀어내고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안 백작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반발했다. 이후 후안 카를로스 1세 치하에서 스페인이 민주화되면서 왕위계승권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72] 차에 탄채로 폭탄이 터져서 폭사당한다. 이때 폭발 충격으로 차가 공중으로 이십미터 가량이나 솟아오르는데 그때문에 지금까지도 스페인 인터넷에서 '스페인 최초의 우주비행사'#라며 조리돌림당한다.[73] 출처: 전 주 스페인 미국 대사 David Brightly와 John Holroyd-Doveton의 대화.[74] 나에게 바친 충성을 국왕에 바치라는 것이 군부에 대한 프랑코의 유언이었다.[75] Plaza de Oriente[76] 갈 날을 암시하듯 매우 야윈 모습이다.[77] 당시 영상 영어 자막[78] 사망 약 1개월 전이다.[79] 프랑코 왼쪽에 있는 인물은 당시 총리이던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Carlos Arias Navarro, 1908 ~ 1989)인데, 나바로는 스페인 내전 때부터 프랑코 편의 정치인이었으며, 1973년 12월부터 1976년 1월까지 스페인 총리를 역임했다가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 이후 민주화를 추진하면서 해임되었다.[80] 프랑코의 유언장에 적힌 문구다. 이 외에도 그의 생전 행적들과 비교해 자아도취, 적반하장 식의 내용들이 많다. 프랑코 유언의 주요 내용 참고.[81] 상기한 사진들에서 볼 수 있듯 말년의 프랑코는 나이에 비해서는 동안이던 10년 전과 비교하지 않아도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초췌해졌을 정도였다.[82] 사실 이 날 바람이 많이 불어 프랑코의 폐와 심장을 악화시켰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해당 연설에서의 프랑코의 목소리는 평상시 대비 매우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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