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22:07:58

엔베르 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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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900><colcolor=#000>
알바니아 제22대 총리
엔베르 호자
Enver Hoxha
[1]
파일:attachment/enver_hoxha_poster_1968.jpg
출생 1908년 10월 16일
오스만 제국 야니아 빌라예트 에르기리
(現 알바니아 지로카스터르주 지로카스터르)
사망 1985년 4월 11일 (향년 76세)
알바니아 PSR 티라나
재임기간 초대 알바니아 노동당 제1서기
1941년 11월 8일 ~ 1985년 4월 11일
제22대 총리
1944년 10월 23일 ~ 1954년 7월 19일
서명
파일:엔베르 호자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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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900><colcolor=#000> 부모 아버지 할릴 호자
어머니 쥘리한 호자[2]
배우자 네지미예 호자[3]
자녀 3명
학력 몽펠리에 대학교 (식물학 / 중퇴)
브뤼셀 자유 대학교 (법학 / 학사)
종교 무종교 (무신론)
최종 당적
군사 경력
복무 국민해방운동
1941년 ~ 1945년
알바니아 인민군
1944년 ~ 1985년
최종 계급 대장 }}}}}}}}}

1. 개요2. 생애
2.1. 집권 전2.2. 집권 이후
2.2.1. 대외 관계2.2.2. 철권 통치
2.2.2.1. 우상화2.2.2.2. 선거
2.2.3. 쇄국 정책2.2.4. 무종교 정책2.2.5. 경제, 사회 정책2.2.6. 여성 정책
2.3. 사망
3. 평가4. 여담
4.1. 벙커 건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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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바니아 노동당의 초대 제1서기이자 독재자. 입헌군주제를 제외하면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독재자이다.

2. 생애

2.1. 집권 전

프랑스 유학파 출신이다. 알바니아 왕국 시절인 1930년 국비 장학금을 받고 프랑스의 몽펠리에 대학교로 유학간 촉망받던 생물학도였으나, 생물학을 그만두고 철학과 정치로 전공을 바꾸었다. 프랑스 생활 중 유창한 프랑스어를 익혔고,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도 구사하게 됐다. 이후 알바니아로 돌아와 1937년부터 39년까지 티라나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윤리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나 알바니아가 1939년 이탈리아 왕국군에게 침략을 받자 그는 알바니아 공산당파르티잔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당시 이탈리아군은 약체에 가까웠고, 이탈리아의 동맹국인 나치 독일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요시프 브로즈 티토에게 골치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호자는 어렵지 않게 파르티잔 운동으로 알바니아 독립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티토의 파르티잔 투쟁과 마찬가지로 1943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축출되자, 호자 또한 그 틈을 타 알바니아의 정국을 장악해나갔다. 이후에는 나치 독일군이 들어왔는데 대략 3개 사단 정도가 알바니아에 배치됐었다. 그러나 패색이 짙어지고, 파르티잔 활동도 거세지면서 1944년 말에서 1945년 초 쯤 철수했다. 처음에 호자는 티토와 협력관계였고, 티토의 지원을 받았던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을 포함한 그리스 공산당 측으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4] 하지만 티토는 알바니아인이 주류인 코소보를 자국 영토로 강하게 주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알바니아를 유고슬라비아의 한 연방국으로 삼킬 의도도 있었기 때문에 호자는 1945년부터 반 유고슬라비아 노선으로 돌아서고, 유고슬라비아와 사이가 나빴던 소련 쪽으로 기울어졌다.

2.2. 집권 이후

1946년 알바니아 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집권에 이르는 과정과 이후의 내부숙청, 그리고 권력 유지 과정 전반은 여러모로 김일성과 비슷한데, 항일운동의 경력을 내세운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침략군에 맞섰던 파르티잔 경력으로 엔베르 호자는 최고 자리에 올랐다. 여기에 알바니아 인민군의 총사령관을 겸임했고 여기에 각료회의 의장, 외무장관, 국방장관 등을 겸임했다.

호자의 이념은 반수정주의로 요약될 수 있는데, 정통 스탈린주의를 끝까지 고수하면서 조금이라도 유화적이거나 아니면 이단적인 이론을 설파하는 다른 나라 지도자들을 모두 수정주의자로 비난했다. 실제로 니키타 흐루쇼프, 요시프 브로즈 티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심지어 김일성까지 모두 수정주의자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으며, 이는 김일성의 주체사상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2.2.1. 대외 관계

파일:Ddpy40bVQAIUf1a.jpg
1956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만난 엔베르 호자
현대 수정주의자들과 반동세력들은 우릴 소위 스탈린주의자라 부른다. 마치 우릴 모욕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우리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장이다. 어떻게 보자면, 우릴 욕설로써 미화하는 셈이다. 스탈린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겐 영광스러운 일이며, 우리 스스로 그러한 입장을 유지함으로써 적들은 우리를 굴복시키거나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다.
스탈린이 살아 있을 때는 마오쩌둥이나 김일성이 그러한 것처럼 호자도 스탈린 앞에 쩔쩔맸으며 스탈린에게 100세까지 너끈히 사시길 기원한다고 말하기도 했으나,[5] 스탈린이 1953년에 사망한 후 그 뒤를 이은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추진하자 소련과도 교류가 드물어졌다. 그럼에도 호자는 소련과 결별한 1960년대 이후에도 스탈린 숭배만큼은 열렬히 계속하며 집무실에 스탈린 초상화를 걸어두기도 했다. 게다가 1968년에는 아예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하여 알바니아는 제2세계와도 교류하지 않는 철저한 쇄국으로 일관했고,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과의 국경을 폐쇄했다.

또한 이 당시 알바니아의 유일한 우방국은 문화대혁명 당시의 중국이었다. 마오쩌둥과 호자는 반수정주의를 모토로 다른 공산국가를 싸잡아 비난했다. 소련과의 결별 이후 소련의 군사적 지원이 끊기자 J-7 전투기를 비롯한 중국제 군사장비들을 여럿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미중관계가 개선되자 점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6] 엔베르 호자는 1972년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가 닉슨을 위해서 "닉슨의 재선을 위하여" 건배사를 외치는 장면을 쓸쓸게 하게 지켜봤고, 이후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만찬장의 오케스트라가 '미국은 아름다워'를 연주했다. 미국의 백만장자와 알부자들이 아름답다! 미국은 파시즘과 야만적 제국주의의 몸통이다!

호자는 76년 중국도 수정주의 국가로 비난하여 관계를 끊었다.[7] 사실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것은, 단순히 이념적 교조주의 때문이 아니라 과거 중국이 1세계와 2세계와 모두 척을 지게 되면서 제대로 된 우호국이 매우 드문 것을 이용하여 알바니아가 중국에서 막대한 양의 경제적 원조를 얻어먹을 수 있었는데, 데탕트로 인하여 중국 외교에서 알바니아의 입지가 수직낙하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비슷하게 유고슬라비아는 데탕트 이전에는 유일하게 말 통하는 사회주의 국가로 서방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으나 데탕트로 서구 자본이 소련과 동유럽, 개혁개방 후의 중국에도 유치되면서 80년대부터 심각한 경제난을 겪게 되고 밀로셰비치를 비롯한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의 준동으로 공중분해된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혁명도, 위대한 것도, 문화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특히 최소한의 프롤레타리아도 아니었다.

Enver Hoxha, Instituti i Studimeve Marksiste-Leniniste (1974)
소련과 중국 등 모든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공산 진영에서도 철저히 고립되었고, 정권유지를 위해 항상 외부의 침략을 강조하였다. 1960년대까지는 북한과도 우호적이었고 김일성종합대학에 알바니아인 유학생들이 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사이가 나빠졌고, 호자는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로 비판했다.

그래도 소련은 이후로도 알바니아와 적게나마나 교류를 이어가려고 노력했으나 알바니아측에서 일절 응해주지 않았고 심지어 엔베르 호자 사망 직후 소련이 조전을 보냈는데도 접수를 거부하고 되돌려보냈을 정도이다.#
김일성은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자다, 소심하고 과대망상적인 수정주의자다.

회고록 <중국의 반영>에서
소·중공 두 나라 모두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는 김일성의 태도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목적과 어긋나는 것이다. 중소는 오직 자기네 국가 이익만 추구하며 다른 인민의 이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타 공산권 국가와의 외교 관계 단절 이후 유고슬라비아, 소련, 중국과 가깝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은 처벌되었다.

1984년에 김일성이 동유럽을 방문할 때 알바니아만 제외한 이후로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대한민국-알바니아가 수교한 1992년에 북한은 대사관을 폐쇄하고 불가리아 주재 대사가 알바니아 대사를 겸임하였다. 올림픽 역시 1972년 1회를 제외하면 전부 불참했다.[8] 이웃국가이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1948년부터 1988년까지 올림픽에 항상 참석해온 것과 알바니아에 준하는 수준으로 폐쇄적인 북한도 1972년부터 지금까지 2회(1984, 1988)를 제외하면 항상 참석해오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이러한 호자의 극단적인 폐쇄 정책 때문에 알바니아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작동 메커니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후 1990년대에 체제 전환을 겪어야 했다.

이런 호자의 폐쇄 정치가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9]을 불러 일으켰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알바니아인들은 호자를 완전히 부정하고 집권한 우파 정권인 1997년 당시의 집권 민주당의 수권능력 부족 및 경제-금융 무능에 더 책임이 크다는 의견도 있다. 그리하여 1997년 금융사기에 재산을 잃은 알바니아인들은 봉기했고 이들과 알바니아 군경이 내전 일어나 2000여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펼쳐졌다. 유럽국가는 20세기 말에 유럽에서 불어진 내전에 놀라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여 더 이상의 유혈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막았다.

우파였던 민주당은 대혼란의 책임으로 정권퇴진에 이르렀고, 군주제 부활 국민투표 및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왕정복고는 부결되었지만, 공산정권 당시의 집권당인 노동당의 후신인 사회당은 총 151석중 100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둬 다시 집권했다. 이때 민주당 시절 감옥에 갔던 여러 공산정권의 관료들이 다시 석방되어 혼란을 수습했다.

다만 호자가 나라 문을 항상 걸어잠갔던 것만은 아닌데, 1970년대 초부터 프랑스, 이탈리아, 당대의 신흥 독립국들과 무역 협상을 하기도 했으며 1971년에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를 원상 복귀했고,[10] 1970년대 말부터 서서히 서유럽 및 개발도상국과의 외교 관계를 확대하며 외부 세계에 신중하게 문을 열려고 했다. 알바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만큼은 비교적 꾸준히 해외에서 활동해왔으며, 1974년부터 (1978년[11]을 제외하면) 꾸준히 월드컵 예선에 참가해왔지만 모두 패하며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다. 또한 70년대에 중국민항이 베이징-테헤란-부쿠레슈티-티라나 노선을 운항하기도 했으며, 호자 사후인 80년대 후반에는 6개의 항공사가 도합 주 9회 티라나 왕복 노선을 운항했다. 1989년에는 10만 명의 외국인이 알바니아를 방문했다. #

2.2.2. 철권 통치

국가안전보장은 내외의 적들로부터 인민의 이익과 사회주의국가를 수호하는 우리 당의 예리하고 사랑받는 무기입니다.
엔베르 호자

동유럽 공산국가는 대체로 느슨한 통치를 펼쳤지만, 알바니아는 오히려 루마니아처럼 북한식의 철권통치를 펼쳤다.[12] 후술할 내용들을 보면 알겠지만, 북한과 가장 근접한 수준의 독재국가로 21세기에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에리트레아세르다르 베르디무하메도프투르크메니스탄을 꼽을 수 있다면, 20세기에는 바로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를 꼽을 수 있었을 정도로 호자의 학정은 아주 가혹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일단 당시 알바니아에서 시구리미(Sigurimi)[13]라고 불리던 국가보안국(Drejtoria e Sigurimit të Shtetit)은 KGB슈타지와 비슷한 수법을 사용하여 1998년 알바니아 의회 조사에 따르면 전체 알바니아인의 33%가 어느 형태로든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14] 실제로 1946년부터 그가 죽은 뒤인 1992년까지 공산정권 치하의 알바니아에서는 5,577명의 남성과 450명의 여성이 처형됐고[15] 2만 6천여 명이 투옥됐으며, 3만 2천여 명이 강제 이주를 당했고, 최소 5만 9천여 명이 강제노동에 동원되어 이들 중 7천여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16] 그리고 시구리미의 내부 조사로 처형된 공산당 정치국원이나 중앙위원회 위원만 해도 최소 17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러던 상황에서 국민들이 시구리미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시구리미의 직원 수는 정치위원 2500명을 포함해 장교 1만 명 정도였음에도 국민들 사이에서는 '국민 1/3이 시구리미 정보원'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호자의 정적들은 재판도 없이 초법적으로 총살되는 경우가 흔했으며, 그렇게 처형된 정적들의 가족은 연좌제가 적용되어 인민의 적으로 분류되고는 그들이 살던 집에서 쫓겨나 외딴 마을로 보내졌다. 이들은 일하는 시간 외에는 지역 주민과 접촉할 수 없었고, 특별 허가를 받아야만 지정된 거주지[17]를 벗어날 수 있었으며, 그곳에서 태어난 정치범의 자식들도 고등교육을 받는 것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 것은 물론 마을을 떠나는 것도 거의 허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반정부 단체를 조직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조차 감시를 당했으며, 심지어 본인은 아무 잘못도 없음에도 부모, 조부모가 과거에 부동산이나 생산 자산을 소유했거나 어떤 식으로든 왕정이나 이탈리아 점령군에 협조했거나 지주였다는 이유만으로 연좌제가 적용되어 처벌받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가족 중 일부가 외국으로 탈출하면 외국으로 탈출한 적이 없는 가족들도 연좌제가 적용되어 추방되거나 투옥되었으며, 추방된 사람들은 풀려나도 집과 재산을 몰수당했다. 게다가 수감된 사람들의 연령대는 1살 정도밖에 안 된 아기부터[18] 96세나 되는 노인[19]까지 그야말로 모든 연령대에 걸쳐 있었다.

그가 사형 선고에 서명한 사람 중에는 친척과 어릴 적 친구도 있었다. 바흐리 오마리(Bahri Omari, 1889–1945)는 나치 독일이 알바니아를 점령했을 적에 외무부 장관으로 일했다는 이유로 1945년 4월 13일에 특별재판소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바로 다음 날에 총살형되었는데, 오마리는 호자의 매형이었다. 즉 누나의 남편이었던 데다가 호자는 젊었을 적에 그의 집에 자주 머무르며 경제적 도움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호자와는 동향 출신이자 어릴 적 친구였던[20] 파흐레딘 앙고니(Fahredin Angoni, 1908–1945)는 반공 민족주의 조직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45년 6월 5일에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이후에도 호자의 동창은 3명이 더 처형되었다고 한다.

1952년 9월에 의회는 국가에 대한 음모, 국가 재산 피해 또는 경제적 파괴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은 11세 이상의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형법을 통과시켰으며, 범죄 행위로 기소된 개인은 법전상으로만 변호사 선임이 가능했지 실제 재판에서는 변호사 선임이 불가능했던 데다가 법정에서도 증인에게 질문하는 것도 금지되고 사건의 특정 측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까지 제한되었다. 이렇게 형을 선고받은 정치범들은 호자 시기에 존재했던 도합 29개[21]의 수용소 중 하나에 수감되었고, 호자가 사망한 1985년 기준으로 약 3만 2천명이 이런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22]

그리고 호자 정권에서는 총 33개의 노동 수용소가 있었는데,[23] 이러한 수용소에 구금된 사람들은 난방도 되지 않는 한 감방에 여럿이 감금되어 눕거나 움직일 공간도 가질 수 없었고,[24] 식사는 구더기가 가득한 얕은 죽만 하루에 2번씩 제공받았으며, 수용소 근처에 광산이 있으면 매일매일 광산에서 할당량만큼의 광석을 캐도록 강요받았고, 할당량을 지키지 않으면 다음 날의 할당량은 더 늘었다. 그러면서 호자는 이와 동시에 수감자들에게 할당량을 초과하면 형기를 하루씩 줄이거나 함께 수감한 사람 중 한 명을 밀고하면 형량을 줄이는 당근도 던져줬다.

호자에게 반대한다고 지목된 사람들은 수감되어 무자비한 구타나 채찍질, 귀에 전기고문하기, 알몸 아니면 젖은 옷과 함께 추위에 노출시키기, 중국식 물고문, 거꾸로 매달기, 잠도 안 재우며 서 있게 하기, 몇 달 동안 씻는 것과 옷 갈아입는 것을 금지시키기, 14일 동안 물도 주지 않은 채 굶기기 등의 고문을 당했으며, 여성들은 강간과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수준의 성고문을 당했으며, 심지어 수용소에서 임신한 수감자들은 강제로 낙태당했다. 그러나 이들 중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은 '조끼'라고 불리는 고문으로, 조끼를 입고 손과 발 사이에 나무 조각을 낀 채 의자 두 개에 걸쳐 거북처럼 만들고는 이 고통스러운 자세와 함께 고문을 가해 고문의 효과를 높였다고 한다. 실제로 알바니아의 공산주의의 범죄와 결과 연구소에서 후에 호자 시기 고문에 대해 피해자들의 증언과 기록 문서를 바탕으로 정리해 둔 글이 인터넷에 많이 있는데, 매우 잔혹한 내용이 많으니 가능하면 읽지 않을 것을 권한다. 열람주의 게다가 처형된 정적들의 시체는 하수구에 버려졌으며, 차량에 정치범들의 팔다리를 묶은 후 서로 반대 방향으로 질주해 찢어 죽이기도 했고, 정치범 가족들의 가축을 빼앗아 가족들이 굶어죽게 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무자비한 조치에 수용소 수감자들이 폭동들을 여러 번 일으키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사업장과 호텔 방들, 전화는 도청되었고, 모든 편지들은 사전에 검열 차원으로 강제로 읽혀야만 했으며, 언론도 당연히 검열되었고, 식량 작물이나 가축을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서 기르거나 더 나쁘게는 장사하려던 자들도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시구리미는 거의 모든 반호자 인사들에게 '외국 비밀 기관에 대한 간첩 혐의와 반 알바니아 선동 혐의'를 적용해 처벌했으며, 이 혐의가 적용된 사람들은 최소 20년형을 선고받았는데도 옥중에서 형이 연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2.2.2.1. 우상화
엔베르 호자 찬양가 "엔베르 호자 만세!(Enver Hoxha Tungjatjeta!)"[25]
원곡

그리고 후술할 무종교 정책과는 정반대로 호자는 개인 우상화에 있어서는 스탈린의 그것과 똑같이 열을 올렸는데, 1956년 4월 14~19일에 있던 공산당 회의에서 호자의 우상화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호자의 우상화는 집권 초기부터 행해진 것으로 보이나,[26] 본격적으로 우상화가 확장된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호자는 자신을 '알바니아 공산주의의 창시자', '최고의 동지', '유일한 힘', '위대한 스승' 등의 호칭으로 부르게 하며 '문화에서 경제, 군사 문제에 이르기까지 삶의 거의 모든 측면에 대해 논평하는 천재'로 널리 묘사하게 했고, 모든 집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게 했으며, 모든 학생들은 호자가 쓴 책[27]을 읽어야 했고, 심지어 알바니아의 모든 교과서에는 공부하는 주제에 대한 호자의 인용문이 1개 이상 들어가 있어야만 했다고 한다. 더욱이 1969년에는 알바니아 중남부의 해발 1,198m 높이의 슈피라그(Shpirag) 산에 단 15일 만에 '엔베르(ENVER)'라는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 1995년 중반에 촬영된 사진.[28]

그런데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1979년에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서는 "평양에서는 스스로를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나라는커녕 과거나 현재 어느 곳에서도 유례가 없는 수준에 이른 지도자 숭배의 부분에 티토[29]마저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까 싶다."라고 티토김일성을 둘 다 싸잡아서 깠다.

다만 호자의 흉상, 동상, 기념관들이 세워진 것은 호자 사후의 일인데,[30] 호자의 사후에는 알바니아의 주요 도시의 기관의 정문과 도시마다 호자의 동상이 합해서 수십 개씩 세워졌으며, 모든 관청을 넘어 몇몇 집들에까지 호자의 흉상들이 설치되었고, 호자의 고향인 지로카스터르(Gjirokastër)는 사적지처럼 꾸며지며 호자의 생가는 민족 해방 전쟁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31] 물론 호자를 찬양하는 구호들과 호자의 초상화는 호자의 생전에도 거리에 전시되었다. #
2.2.2.2.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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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베르 호자(좌)와 영부인 네지미예 호자(우)[32]
공산정권 시기 알바니아에서는 4년에 1번씩 의회 선거가 열렸는데, 이 선거는 북한을 넘어 거의 프랑수아 뒤발리에 시기 아이티에 준하는 수준으로 가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알바니아 의회 선거에서 알바니아 노동당은 유의미한 반대표와 무효표도, 구색정당과 무소속 의원도 없이 문자 그대로 100%의 투표율과 100%의 찬성율로 모든 의석을 독차지했기 때문이다.[33]

1945년 12월 2일에 열린 제헌의회 선거에서 알바니아 노동당이 100%의 찬성율로 의석 82석 전체를 얻었은 것을 시작으로 1950/1958년 선거에서는 1%대의 나름 유의미한 반대표가 나온 적도 있었으나,[34] 1962/1966년 선거에서는 반대표가 고작 40/43표 정도였고,[35] 1970/1974/1978/1982/1987년 선거에서는 유권자는 100만 명을 거끈히 넘겼는데 반대표는 각각 1/2/3/9/1표가 전부였다.

참고로 1950년 이후부터 알바니아의 투표율은 99%를 넘겼고, 1962/1966년 선거에서는 단 7명/4명만이 선거에 불참하여 정점을 찍는 듯했다. 그럼에도 호자는 1970년 선거부터는 투표를 할 수 있는 알바니아 국민들은 단 1명도 빠짐없이 모두 결과가 이미 정해진 투표에 참석해야만 하도록 했다. 그러나 1978년 선거에서는 1명이 선거에 불참했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불명.[36]

2.2.3. 쇄국 정책

우리 요새의 성벽은 흔들리지 않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하십시오.
Të gjithë ta kenë të qartë mirë: muret e kështjellës sonë janë të patundura, janë prej graniti.
엔베르 호자 #[37]

엔베르 호자의 가장 유명한 정책으로, 호자는 집권하면서 민주 캄푸치아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집권기의 적도 기니 외에는 어느 나라도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극단적인 쇄국 정책을 자행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과장 한 마디도 안 보태고 오늘날의 북한[38]도 개방적인 국가로 만드는 수준을 넘어 거의 육지의 갈라파고스 수준이었다.

1968년 이후에는 공무원들을 제외한 모든 국민들의 해외 여행이 금지되었고,[39] 불법 출국은 반사회주의 선동 및 선전처럼 징역 25년에 해당하는 중범죄가 되었으며, 해외에 출국한 공무원이 알바니아에 돌아오지 않으면 운이 좋아야 징역 10년, 최대 사형을 선고받았다. 게다가 해외인들에게도 알바니아 여행 및 비자를 제한하여 호자 치하의 알바니아는 방문하거나 여행하기 가장 어려운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어렵게 알바니아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에스코트 없이는 전국을 돌아다니는 것이 불가능했고, 일반 알바니아 국민들도 당국의 허가 없이는 외국인들과 대화나 교류를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40] 다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알바니아에는 국영 항공사 Albtransport가 존재하긴 했으나, 그 항공사마저 정규 비행은 커녕 자체적인 항공기조차 없이 알바니아 공군으로부터 임대받은 Il-14 3대만 가지고 국내선과 동구권 노선 극소수만 산발적으로 운항했다.[41]

그리고 호자는 국민들의 외국 탈출을 막기 위해 치밀하게 공을 들여 국경에서 600m~1km 정도 떨어진 곳에다가 전류가 흐르는 금속 울타리를 설치하고는, 울타리를 따라 약 1km 간격으로 경비원을 배치하고 울타리와 국경 사이에 와이어 코일과 같은 부비 트랩, 밟으면 소리가 나는 장치, 조명탄을 설치했다. 그럼에도 호자의 학정을 피해 외세로 도피하려던 사람들은 사회주의 건설을 원하지 않는 '반역자'들로 간주되어 무려 6천 명이 국경에서 사살당했다고 한다. 이렇듯 호자가 얼마나 나라를 폐쇄적으로 운영했는지 알바니아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로 꼽히던 1980년대에도 알바니아 국민 대다수는 알바니아를 '유럽에서 가장 번창한 국가'로 생각하고 자신들이 '자비로운 지도자의 영도력 밑에서 아름다운 낙원에 살고 있다'고 믿을 정도였다고 한다.[42] #

심지어 당시 알바니아 내부에서는 국내 여행도 사치였는데, 실제로 알바니아의 농민들은 인근 지역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특별 통행증이 필요했으며,[43] 1990년까지도 알바니아 정부는 자동차의 개인 소유를 금지했다.[44] 물론 허용되지 않은 모든 서유럽 문화와 자료는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시구리미 방첩부는 해외 언론에 알바니아가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이 달성할 수 없는 것을 달성한 노동자의 낙원'이라고 선전하며 해외 여론을 조작하려고 했다.

문화적으로도 극히 폐쇄적이라 피카소를 좋아하는 화가들, 셰익스피어사르트르를 읽은 작가들, 모차르트비틀즈를 연주한 음악가들을 재교육 수용소로 추방했다고 한다.[45] 당연히 코카콜라는 '타락한 음료'로 분류되었으며, 색소폰도 '사악한' 악기로 간주되었다. # 하지만 70년대 초반 알바니아를 방문한 사람이 야외 극장에서 앨프리드 히치콕의 <레베카>를 봤다는 증언도 있다. #

당연히 해외에서 방문한 관광객들에게도 의상 검열을 가해 장발과 '예외적인' 구레나룻을 가진 남성은 ‘퇴행적 수입품’을 가진 사람으로 간주되어 출입국 관리소에서 강제로 머리가 깎였고, 여성이 미니스커트와 맥시 스커트를 입는 것도 불가능했다. #

1988년 7월 10일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당시 한국에서는 오세아니아미니국가속령들과도 전화, 텔렉스, 전보가 가능했으나 북한과 함께 알바니아에 전화[46], 텔렉스[47]를 보내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다만 전보는 북한 빼고는 다 가능했다고... # 이후 냉전이 끝날 때까지 알바니아와의 전화 연결은 하지 못했다.

2.2.4. 무종교 정책

"샤리아의 규범과 교회는 여성을 상품으로, 남성이 사고파는 물건으로 취급했다...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를 프롤레타리아트로 만든 것처럼 샤리아, 교회, 봉건제, 야만적인 고대 규범은 여성을 남성의 프롤레타리아트로 환원시켰다."
"알바니아인들의 유일한 신앙은 알바니아주의다."
호자가 자주 인용한 알바니아 작가인 파슈코 바사(Pashko Vasa)의 글

전임 알바니아 왕정의 조구 1세가 종교탄압은 자제하고 세속주의 정책을 펼쳤던 것과는 달리, 호자는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무종교 국가를 선언하면서 종교를 탄압했다. 알바니아인 가계의 테레사 수녀가 1971년 모친의 장례를 위해 알바니아를 방문하려 했으나, 호자가 종교를 버려야 입국을 허가해 주겠다고 이를 막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호자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므로 우리는 이 진실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도록 해야 하며, 이미 중독된 사람들도 그것을 알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치료해야만 한다.", "종교는 모든 악의 불을 피우는 연료이다."고 주장하면서 알바니아에서 조직된 모든 종교를 궁극적으로 파괴하는 대대적인 종교 탄압을 실시했다. 특히 문화대혁명이 발생한 1966년 이후에는 이에 영향을 받아 종교 탄압이 더욱 가중되었고, 1976년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헌법은 37조에서 국가는 어떠한 종교도 인정하지 않으며 물질주의적 과학적 세계관을 주입할 목적으로 무신론적 선전을 지원한다고 규정하고 55조는 모든 유형의 종교 형성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며 알바니아를 세계 유일의 무신론 국가라고 표방했다. 이렇게 알바니아는 세계 최초의 '무신론 국가'가 되었다.[48]

엔베르 호자의 국가 무신론 정책을 이해하려면 주변 국가들의 종교 상황이나 근현대사 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를 지배하면서 기독교도이던 주민들 상당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아니면 기독교도를 고수하되 이슬람 교리를 상당부분 수용하는 이중신앙을 갖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에 도로 등의 인프라를 개발하는데 관심이 적었고, 이 때문에 알바니아 산간 농촌 주민들은 성경이나 쿠란 관련한 기초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다소 토속신앙화된 기독교-이슬람 혼합종교를 믿고 있었는데, 이는 발칸 반도의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등등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루마니아의 경우 19세기 독립 이후 자국 문화에서 이슬람 및 오스만 튀르크 문화를 일소하고 자국 문화를 정교회와 민족어에 뿌리를 두는 방향으로 사실상 재창조하는 방향으로[49] 국민 문화를 사실상 포맷하고 재설치하는 작업을 설치했다면, 알바니아의 경우 알바니아 왕국 시절 아직 미비한 도로망 등의 이유로 통합된 국민 문화를 만드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종교 역시 기독교 정교회와 가톨릭, 이슬람 순니파 및 벡타시파 등등이 난립한 상황이었다. 이 말은 다른 한편으로 특정 종교 집단이 발언권이 세지는 않다는 말이 되는데 즉 알바니아에서는 중동 같은 지역과 다르게 종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더라도 이에 대한 반발이 비교적 적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엔베르 호자는 종교단체에 대한 통제와 간섭은 기본이고 일반민중의 종교적 믿음을 약화시키기 위해 무신론 운동을 언론, 교육, 모든 공공단체를 통해 실시했으며 종교적 내용을 담은 서적의 출판을 모두 금지시켰다. 1967년부터는 아예 헌법으로 개인적인 종교활동을 비롯해서 공인된 종교 역시 금지시키고 무신론·무종교 운동을 강행했다.

이 당시 알바니아에 존재했던 도합 2,169개의 모스크와 성당들은 1967년 5월자로 모두 폐쇄된 후 철거되거나 운동경기장이나 창고, 작업장, 체육관, 젊은층들을 위한 문화 센터 등으로 개조되고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초상화가 걸리게 되었다. 당연히 종교 신자들은 체포되어서 각종 고문과 처형을 당하거나 온갖 불이익을 받았으며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으며, 성경, 성화 또는 기타 종교적인 물건을 소지하다 적발된 사람은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종교적인 도시 이름과 인명은 모두 금지되고 세속적으로 변환되었다. 물론 성직자들은 공개적으로 비방과 굴욕을 당했고 그들의 의복은 빼앗기고 더럽혀졌으며, 슈코더르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회랑이 불에 타 4명의 나이든 수도자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1967년 한 해에만 1,600여 명의 종교 지도자들이 인민의 마음을 오염시키고 정권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처형됐다. 어떤 신부는 무슬림과 가톨릭 신자들을 모아놓고 종교행사를 진행했다는 이유로 26년 간 강제수감을 당해야 했고, 어느 사제는 한술 더 떠 비밀리에 아이에게 세례를 줬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그리고 형법에 따라 누구든지 자기 집 안에서라도 십자 성호를 긋거나 무릎을 꿇고 기도 하는 사람은 10년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물론 호자는 무슬림들의 신앙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슬람에서 금지한 돼지고기와 술, 조개, 새우 등을 대거 배급했으며,[50] 사순절이나 라마단 기간에 강제로 유제품 등의 음식을 보급하기도 했다. 이 음식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다.

호자가 알바니아에서 종교를 탄압하면서 박해받던 종교인들이 서로를 숨겨주고 도와준 일화도 많다. 이러한 연유에서 오늘날에도 알바니아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서로 갈등없이 공존하는 편이다. 다만 순니파 이슬람이나 가톨릭, 정교회 등은 엔베르 호자 정권이 끝난 이후 외국 종교단체들의 지원에 힘입어 어느정도 복구에 성공하였으나, 벡타시파의 경우는 외국에서 이렇다할 지원을 받지 못하여 교세가 많이 무너진 상태라고 한다.[51] 엔베르 호자의 탄압이 없었다면 벡타시파의 중심지는 튀르키예가 아니라 알바니아였을 거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다. 호자 지지 세력이나 알바니아 좌파 정당 측에서는 '알바니아가 엔베르 호자 덕분에 세속화되었다'라는 소리도 하나 정확히는 본래 알바니아는 다수의 무슬림과 소수의 기독교가 공존하며 북부는 알바니아 로마 가톨릭교회, 중부는 이슬람교, 남부는 알바니아 정교회가 공존하는 형태로 기독교와 이슬람교 교리를 동시에 믿는 이중신앙이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2.2.5. 경제, 사회 정책

그리고 호자는 알바니아 전 인민들에게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추진해 인민들의 교육 수준도 향상되었고[52] 평균 수명도 서유럽 선진국에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늘어났으나 정통 스탈린주의를 고수하며 주변 공산권 국가들을 전부 적으로 돌려버리는 바람에 공산권 국가들의 무역과 원조도 끊기면서 알바니아의 경제도 전체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히게 될 정도로 악화되었다.[53]

그러나 적어도 호자 때문에 유럽 최빈국으로 전락했다는 말은 호자에게 있어서는 다소 억울한 감이 크다. 애초에 알바니아는 공산체제 이전부터도 유럽 최빈국이었던 나라였고, 때문에 호자는 자력갱생 정책을 추진하며 자국의 모든 경제와 소비를 전부 국산화하려 했지만 국토가 작아[54] 자원이 부족하고 인구도 적어 알바니아의 경제기반은 필연적으로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에 둘러싸여 있는 알바니아의 지리적 여건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결국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다만 비슷하게 자력갱생을 추구한 북한이 체급에 맞지도 않는 객기를 부리면서 무모하게 모험적인 시도들을 강행하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된 것에 반해, 호자는 알바니아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최대한 해보는 식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 결과 호자의 통치 하에서 알바니아는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졌고, 이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산업이 1980년대에는 국민 총생산의 50% 이상을 차지하게 될 정도로 성장했으며, 알바니아 최초의 철도를 건설하고, 모든 농촌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는 것과 전염병을 통제하는 것도 성공하는 등 경제적 성과는 어느 정도 거두기는 했다.

여담으로 호자 치하에서 알바니아의 전화보급률은 유럽 최저인 주민 100명당 1.4대였고,[55] 1987년 기준으로 인구가 308.4만 명인 알바니아에서 TV 수는 25.5만 대에 보급률은 100명당 8.3대에 불과했던 데다가 라디오 보유자 수도 51.4만 명, 보급률은 100명당 16.7대에 불과했다.[56] 덤으로 알바니아의 컬러방송도 '외화 낭비 방지'라는 명목으로 미뤄오다가 대한민국보다도 1년 늦은 데다가 루마니아[57]를 제외하면 유럽에서 가장 늦은 1981년에야 시작되었다.[58]

다만 당시의 알바니아에서는 흑백 TV도 그리 대중적이지 않았던 터에 컬러 방송이 시작되었다해도 컬러 TV는 사치품 취급이었고, 컬러TV가 보편화된것은 1990년대에 외제 TV가 널리 들어온 뒤의 일이었다. 알바니아의 TV 방송 자체는 1960년 4월 29일에 시작했지만[59] 정기적 방송은 1971년에야 시작되었고[60] 1980년대 들어와서도 하루에 몇 시간씩 TV방송을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평일 아침방송을 시작하지 않았던 1970년대 중후반의 한국보다도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셈이다. 그래서 당시 TV를 보유한 가정에서는 몰래몰래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TV 방송을 보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사실 한국도 1980년부터 컬러TV 방송이 시작되었으니 지나치게 늦게 푼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겠다.[61]

국내에서의 사정이 열악했던 것와 달리 알바니아의 라디오 방송은 광범위한 외부 단파 및 중파 시스템을 제공하였는데, 알바니아의 외부 방송 서비스는 세계 최대급으로 여겨졌을 정도였다. 실제로 당시 알바니아의 방송 프로그램은 알바니아어 외에도 8개 외국어로 방송되었으며 유럽, 아프리카, 중동, 심지어는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도달했다. 다만 방송내용은 대부분이 알바니아 공산당이 주장하는 내용을 그대로 방송하는것이었기 때문에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평을 들었다.

호자는 알바니아에서 타자기와 수염, 컬러TV를 금지시켰는데, 수염의 경우 이슬람 율법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슬람 근본주의를 차단하려는 의도이자 세속주의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것. 컬러TV 금지령은 당시 알바니아가 컬러방송을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화 낭비 방지라는 명목상의 이유로 그런 것이고, 상술했듯 집권 말기인 1981년에 컬러방송을 실시하면서 풀어주기는 했다.

덤으로 알바니아에서는 1962년부터 연말마다 경음악 중심의 대중음악 대회 Festivali i Këngës를 개최하여 국영 TV 방송국 RTSH에서 중계하기도 했는데,[62] 호자는 1972년 대회를 보고는 대회 조직자들이 비도덕적 면모를 보이는 노래와 퍼포먼스로 나라를 위험에 빠트린다고 주장하며 1973년 이후 대회에는 출연자들이 입는 옷과 움직임까지 제한하고 곡의 대부분이 선전적 내용을 담도록 검열을 가했으나, 호자가 죽기 직전인 1984년 대회에서 1등상을 탄 노래의 제목이 <사랑은 새싹처럼 피어납니다>였을 정도로 세속적인 노래가 아예 못 나오게 하지는 않았다. 물론 알바니아에서 탱고, 폭스트롯, 재즈, 로큰롤은 전면 금지되었다.

2.2.6. 여성 정책

전체 당과 국가는 여성인권수호에 관한 당의 성스러운 칙령을 감히 짓밟는 자의 목을 부러뜨려 불에 던져야 합니다.
호자가 1967년에 남긴 말

엔베르 호자는 1946년부터 낙태 합법화, 국영탁아소 건설 정책, 가사노동 분담을 위한 대대적인 문화혁명으로 여권을 신장시켰고, 이후에는 여성 50% 할당을 목표로 국영기업체 할당제, 최고인민회의 할당제, 상급당 할당제 등을 적용하여 노동당 및 관직·기업에서 특정 성별이 성별 헤게모니를 쥐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985년에는 이미 주요 기관에서 여성의 비율이 40%에 달할 정도로 유럽 최고 수준의 할당 상태였다. 여성교육도 증진시켜 2차대전 이전에 90%에 달했던 알바니아의 여성 문맹률은 대폭 낮아졌고 1978년의 여성 고졸 이상 학력 보유자 수는 1958년에 비해 101.9배로 높아졌다.

다만 시골지역에는 여성차별이 남아있었고 도시 지역에서도 이런 성향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명예남성 제도 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성과는 분명 고무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호자 치하의 알바니아는 인구가 주변국에 비해 훨씬 적었기 때문에 평균 이상의 자녀를 낳은 여성은 보상과 함께 모성영웅(Nënë Heroinë)이라는 칭호을 받았으며, 낙태는 완전히 불법화되지는 않았으나 여성 생명에 위험을 초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제한되었다. 물론 이런 정책의 부작용은 동시대의 루마니아보다는 훨씬 적었다, 알바니아가 농업국가였기 때문에 다산을 하는것이 인민들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고, 알바니아의 도시인구 비율이 타 유럽국가들에 비해 낮아 주택과 교통을 비롯한 도심인프라의 과부하가 덜했기 때문이었다.[63][64] 그 결과 인구는 1944년 116만 명에서 1985년 약 297만 명으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알바니아 공산당정권이 붕괴 이후 여성에 대한 명예살인같은 풍습이 부활하자 페미니즘 세력에선 호자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2.3.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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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베르 호자의 장례식. 1985년 4월 15일
1970년대 후반부터 심혈관계 질환이 발병하면서 후임자였던 라미즈 알리아(Ramiz Alia, 1925–2011)[65]에게 실무를 넘기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무엇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늘그막에 주치의들을 의심하다가 제대로 된 치료를 빨리 받지 못해 뇌출혈로 사망했던 사례를 상기하여 믿을만한 의사를 주변에 두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도 의사들을 철저히 사전점검했다. 이후 1983년에 뇌졸중을 앓고는 휠체어에 의지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1985년 4월 11일에 향년 76세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호자가 죽었을 때 알바니아 주민들은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죽었을 때의 북한 주민들과 판박이로 슬픔에 겨워 공개적으로 울부짖고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집단적으로 애도했다고 한다.[66] #

사후 티라나 교외에 2차 대전 당시 싸우던 파르티잔 대원들이 안장된 국립열사묘지에 안장되었다. 국립열사묘지에 있는 어머니 알바니아 상 아래에 안장되었으나, 공산정권 붕괴 후 호자의 무덤은 파괴되고 시내의 공동묘지에 이장되었다. 이장된 무덤은 상당히 초라한 무덤이었으나, 최근에는 관광객을 맞아 고급 석재로 다시 무덤을 단장하고 30레크씩 참배료를 받는다.

1942년에 결혼한 네지미예 호자와 죽을 때까지 결혼을 유지했다. 그나마 자식들에게 정권을 세습하지는 않았지만, 후에 공산정부 몰락 후, 우파 민주당이 집권 했을 당시 영부인이었던 네지미예 호자와 큰아들 일리르 호자는 1992년 과거청산의 일환으로 감옥에 가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대체로 공산국가의 영부인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지만, 네지미예는 정권에서 고위직을 맡았기 때문에, 공산정권 몰락후 우파정권이 출범하자 직권남용 혐의로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었다. 네지미예는 70대에 6년간 복역살이를 하다가 민주당이 몰락하고 호자의 노동당의 후신인 사회당이 재집권하자 사면으로 1997년에야 석방되었지만 그후로도 장수하다가 99세의 나이인 2020년에야 사망했다. 아슬아슬하게 100세가 되기 2주 전이였다. 일리르는 별다른 죄가 없어서 1년후인 1993년 석방되었고 2022년 현재 아버지의 이념 계승을 내건 알바니아 노동당이라는 군소정당을 이끌고 있다. 나머지 두 자녀는 일반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의 사후, 가족 일부가 고초를 치르기는 했지만, 동구권의 민주화를 이끈 동유럽 혁명이 1989년부터 시작됐고 이로 인해 그와 비슷한 위치의 정치인, 예를 들면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의 지도자였던 토도르 지프코프와 같은 이들이 이 시점에 몰락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호자는 죽을 시기를 잘 맞이한 셈이다.

3. 평가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알바니아를 철권통치하며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우상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과 같이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로, 공산주의 독재자들 중 나라를 성공적으로 경영하였다는 호평과 북한을 아득히 초월하는 극단적인 고립주의와 심각한 중앙집권체제, 개인숭배를 자행한 독재자라는 혹평을 모두 받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독재자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철저히 실패한 데 반해 그의 생전에는 나름대로 국가 자체는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즉 알바니아는 당시에도 동유럽 최빈국의 하나였지만, 북한이나 기타 공산국가와는 달리 그의 생전에 국민이 기아로 굶어죽는다거나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또한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1960년대에 너도나도 서방에서 외채를 빌려서 반짝 호경기를 맞았다가 1970년대부터 대서방 외채에 의한 고이자부담에 국민생활이 악화되지만,[67] 호자는 자급자족 경제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외채도 빌리지 않았고 외부경기에 휘둘리지 않았기 때문에 1980년대 동구권과 중남미 외채위기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받았고, 적어도 동구권 붕괴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그나마 건실했던 나라가 알바니아였다. 역설적이게도 저개발 상태에 외채도 없었기 때문이다.[68] 실제로 호자는 상술한 것처럼 집권 기간 동안 무신론 국가 선포와 극단적인 쇄국으로 대표되는 학정을 자행하며 개인숭배를 강요했으나, 카눈의 전면 금지 등과 같은 그에 못지 않는 굵직한 업적도 여럿 있다.
2021년, 코로나-19 봉쇄 반대 시위에 참여해 엔베르 호자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노인

2016년 기준 호자의 긍정적 평가는 45% 부정적 평가는 42%로 긍정적 평가가 부정적 평가를 3% 정도 앞서는 수준으로 다소 호불호가 있는 편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조금 높기는 하지만, 호자에게 직접 탄압을 받았던 종교적이거나 리버럴한 알바니아인들에게는 물론 불구대천의 원수이므로, 호자에 대한 평가는 알바니아에서는 상당히 민감한 이야기이며, 외국인은 알바니아인 앞에서 호자에 대한 평가는 삼가는게 좋다.

특히 알바니아의 젊은 세대는 대체로 호자에 대해 부정적으로 여기며 젊은층이 이용하는 알바니아 레딧(r/albania)역시 정당한 이유 없이 엔베르 호자 언급을 금기시 하며 이를 어기고 올릴 경우 게시글이 비추테러를 당하며 영구 차단 당할 정도이다. 호자를 까는 글 역시 마찬가지. 반면 중년층 이상은 호자에 대해 긍정적인데, 실제로 유튜브에 엔베르 호자를 검색해보면 호자 시기를 그리워하면서 호자를 찬양하는 알바니아인들의 댓글을 많이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호자가 창당한 알바니아 노동당은 1990년에 사회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면서 마르크스-레닌 주의와 일당독재를 폐기하고 사회민주주의로 노선을 바꾸었다. 1991년에 자유총선도 치러지고 이듬해인 92년 총선에서 우파인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알바니아에 세워졌던 대부분의 동상이 부서지는 수모를 당했지만,[69] 1997년 집권 민주당이 커다란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으로 금융사고를 치는 바람에 다시 정권을 되찾았다. 이후에 2005년 선거에 패해 다시 야당이 되지만 민주당의 부패에 염증을 느낀 알바니아 국민들에 의해 2013년 다시 집권에 성공했다. 그리하여 알바니아 사회당은 다른 동유럽국가의 집권 공산당이 후신 정당들인 독일 좌파당이나 헝가리 사회민주당처럼 달리 군소정당으로 전락하지 않고 2022년 현재도 집권당이다. 이런 현상은 호자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도 관련이 있다. 일단 알바니아의 풍토병이었던 말라리아를 추방했고,[70] 전국민의 90%가 넘던 문맹도 퇴치되었는데다가,[71] 또한 여성 억압을 금지시켜 여성의 사회진출도 이전보다는 나아지고,[72] 카눈 운운하며 사적제재를 가하는 인간들을 잡아 가둔 면에서는 노년층들의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집권 알바니아 사회당 대표가 호자를 옹호하기도 했다.# 현재 알바니아 사회당은 호자의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자가 저지른 인권탄압이나 철권통치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정당은 친서방-친나토-친EU LBGT옹호적 입장으로 여러모로 유럽의 주류 사민주의정당과 비슷한 포지션이다. 이런 정강정책에 반대하는 일부 당원들이 알바니아 공산당 및 알바니아 노동당으로 떨어져나갔지만 이들은 동유럽의 다른 공산주의 정당들처럼 군소정당 신세이다.

국제적으로 소수지만 호자의 사상을 따르는 공산주의 단체들도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 및 조직의 국제 회의인 단결 및 투쟁이라는 국제기구도 존재한다. 주체사상보다는 많긴 하나(...)[73] 마오주의에 비하면 수적으로는 많이 적은 편이다.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상당수인 코소보 지역에서 일부 주민들에게 긍정평가를 받기도 한다. 가령 알바니아계 몬테네그로인 출신으로 코소보에 거주했던 유명 문학평론가인 레제프 초시아(Rexhep Qosja)는 엔베르 호자를 제르지 카스트리오티에 비견되는 알바니아인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호평하기도 했다. #
엔베르 호자와 제르지 카스트리오티는 알바니아 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정치인, 통치자 및 애국자입니다. … 엔베르 호자는 알바니아를 바티칸, 아테네 및 이스탄불과 같은 종교 중심지의 이데올로기적 점령에서 단번에 해방시켜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4. 여담

  • 각료회의 의장, 외무장관, 국방장관, 인민군 통수권자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데 이 직함들을 자기 자신이 그 자리에서 자신을 임명하여 얻었다.
  • 1982년에 암살 미수 사건을 겪은 후 시구리미를 보내 시골에 살고 있는 자신과 닮은 치과의사를 납치해서 자신과 더 흡사하게 성형수술을 시킨 후 1983년부터 자신이 죽은 1985년까지 대역으로 세웠다는 설이 있다. 이 사건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페타르 샤팔로(Petar Shapallo)는 공식 일정이 예정된 시간 외에는 가택연금을 당했고, 납치 직후에 '새로운 역할에 대한 비밀 유지'를 명목으로 온 가족이 처형당했으며, '배우처럼' 연기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엔베르가 자신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74]
  • 지로카스터르에 있는 그의 생가는 현재 민족학 박물관(Muzeu Etnografik)이 되어 있다. 튀르키예풍의 꽤 큰 집으로 내부도 카페트와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어 튀르키예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굉장히 익숙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호자가 태어날 때에도 알바니아는 오스만 제국령이었다.
  • 호자의 말년에 호자의 전속 요리사로 일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병중이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식생활이 매우 소박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당뇨병과 심장마비에 대한 우려로 하루에 1,500칼로리 이상을 먹을 수 없었으며,[75] 호자를 달래기 위해[76] 호자의 주치의와 상의한 후 설탕을 소량 첨가한 디저트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 요리사는 후에 "그 당시 호자는 달콤한 음식이 필요했습니다. 그가 달콤한 것을 대접받는다면 우리 모두와 나라 전체를 위해 더 좋을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했는지 누가 압니까?"라고 회고했다. 참고로 호자는 그 요리사의 고향인 지로카스터르의 음식을 좋아했으며, 독살을 두려워했는지 농부들이 우유를 짜는 동안 두 명의 경비원이 동행하여 우유에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았는지 확인하게 했고, 덤으로 그 요리사는 호자의 요리사로 일하면서 언젠가는 호자가 기분이 좋지 않아 자신을 수용소로 보내거나 목숨을 빼앗을까 봐 지속적으로 두려움에 떨었다고 하며, 호자의 사후에는 레스토랑이 있는 작은 호텔을 경영한다는 그는 인터뷰를 할 때에도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 #1#2#3
  • 상술한 전속 요리사의 증언에 따르면 아내와 비슷하게 '인색'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호자는 국가 자금을 지출하기 전에도 잔돈 하나까지 세어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77] 허나 1991년 알바니아 사회당에서는 호자의 검소함은 다 거짓이고 실제로는 이탈리아 살라미 소시지, 프랑스 와인, 서양 담배, 프랑스 의사들의 서비스를 즐겼으며, 여러 호화저택에 냉장고 25대, 컬러 TV 28대, 개인 전화선 19대를 설치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 #2
  •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인간 엔베르 호자는 다정한 사람이었고, 아내에겐 공손했으며 자식, 손주들에게는 자상한 어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호자의 취미는 독서와 클래식 음악[78] 감상이었다고 한다.#
  • 우파정당인 민주당이 집권한 이후 과거청산 차원에서 1990년대 초에 호자 정권의 고위 관리들이 체포되었고, 이들에 대한 재판이 열리기도 했다. 1993년부터 1994년까지 호자의 미망인 네지미예 호자와 호자의 후임인 라미즈 알리아[79]를 포함한 10명의 전직 노동당 고위 관리들이 부패 및 공적 자금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3년에서 9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항소 법원은 형량을 줄여서 5년 이상 감옥에 있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게 했고,[80] 1996년부터 1997년에는 알리아가 대량 학살 혐의를 포함하여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재판을 받고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렇게 고위공무원들을 대거 감옥에 보낸 것은 큰 화를 불렀는데, 그나마 국가를 경영해 봤던 인재들을 배제하고 경험없는 민주당이 국가를 경영하다가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이 발생하여 알바니아는 대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바로 정권을 잃고 호자가 만든 노동당의 후신인 사회당이 재집권하여 대혼란을 수습했으며, 사회당은 민주당에 의해 감방에 갔던 전직 공산관료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더구나 시구리미 요원들 중 고문이나 가혹행위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이들이 공직에 오르는 것이 금지됨에 따라 악행의 대가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치르긴 했다.
  • 시구리미가 존재하던 동안 3천만 페이지에 달하는 212,000개의 파일과 250,000개의 오디오 문서가 생성되었다고 하나, 이들의 상당 부분은 공산권이 몰락할 즈음과 1997년 알바니아 내전 무렵에 불에 타 소실되었고, 이런 혼란상 때문에 알바니아 사람들은 스페인에서의 '망각 협정'마냥 공산정권 시절 과거에 대한 진상규명을 나중에 해도 될 일로 여겨 한동안 공산정권의 범죄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꺼려왔다. 그러나 2015년 4월 30일, 알바니아 의회는 비밀 기관의 파일을 알바니아의 모든 시민에게 공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2016년에는 "이전 국가 보안 문서 정보 기관"(Albanian Autoritetit për Informimin mbi Dosjet e Sigurimit të Shtetit)이 설립되어 현존하는 시구리미 파일을 디지털화하고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시구리미 파일에 대한 접근 권한을 제공했다.
  • 상술한 것처럼 호자의 사후인 1988년 10월 14일에 호자를 기리는 피라미드 모양의 기념관이 티라나에 건립되었는데, 이 건물의 설계에는 호자의 딸 부부가 참여했으며, 2년 동안 350만 달러를 들여 건축했고,[81] 총 300명의 근로자가 건설에 참여했다. 공산정권 시기에 이 건물은 호자 시기 유산에 대한 박물관 역할을 했다고 한다. 1991년에 알바니아가 민주화된 후에는 컨벤션 센터, 전시장으로 용도가 바뀌었고, 코소보 전쟁 시기에는 NATO와 인도주의 단체의 기지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이름도 엔베르 호자 박물관에서 티라나의 피라미드로 개명되었다. 게임 Workers & Resources: Soviet Republic에서 건설할 수 있다.
  • Quora에 호자 시기 알바니아의 학정과 열악한 생활을 증언한 알바니아인들의 글들이 많이 올라와 있다. #
  • 양성애자라는 의혹이 있는데, 호자의 수행 비서였던 일리르 불카는 73년 이탈리아로 망명해서 <일 메사제로> 지에서 호자가 프랑스 유학시절 남성 연인을 두었다고 주장했다.
  • 2017년에는 그의 손자가 마약 밀수, 제조에 연루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
  • 엔베르 호자의 며느리인 릴리아나(Liliana Hoxha)에 따르면 시아버지 호자는 은근히 알바니아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있었고, 호자의 아내이자 시어머니인 네지미예는 강경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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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싸움을 즐기는 엔베르 호자와 배우자인 네지미예 호자
공포정치를 행한 엔베르 호자이지만 아내인 네지미예 호자와는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믿기지 않겠지만 아내에게 애교도 부렸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 항상 아내를 옆에 데리고 다닐 정도로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금슬이 좋았다고 알려진 독재자인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부부와 비슷한 부분.

4.1. 벙커 건설

파일:odCU5ZK.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bania_bunker_line.jpg
호자 시기의 알바니아에 건설된 토치카

참고자료

호자 치하의 알바니아는 엄청난 벙커 설치로도 유명한데, 실제로 호자는 전국민에게 명령해 본인이 사망하는 1985년까지 경기도와 강원도를 합친 크기의 알바니아 전국 여기저기에 정확히 무려 173,371개의 1인용 콘크리트 토치카를 도배했다. 이는 호자가 프라하의 봄 때처럼 바르샤바 조약 동맹군이 알바니아를 침공해서 자신을 축출·제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82] 이렇게 토치카가 알바니아 국토를 뒤덮고도 남을 정도가 되자, 당시 알바니아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사람 사는 주택보다 벙커가 많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군용 비행장도 갱도화되어 소련의 핵공격에 대비했을 정도로 유별난 요새화를 단행했다. 유럽에서 이 정도로 요새화를 한 국가는 중립국이던 스위스와 스웨덴 정도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량 양산된 토치카들은 지금도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어 숙박이나 관광용으로 리모델링한 일부를 제외하고 흉물스럽게 녹슬고 무너져가는 중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엔베르 호자가 알바니아 전국에 깔아놓은 토치카와 벙커는 알바니아의 관광상품이 되었다. 알바니아 어디를 가든 알바니아의 특산품인 오닉스석과 대리석을 깎아 만든 벙커모양의 재떨이가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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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ɛnˈvɛɾ ˈhɔd͡ʒa\][2] 혼전성은 '추치(Çuçi)'.[3] 혼전성은 '주글리니(Xhuglini)'. 여담으로 배우자인 네지미예 호자는 엔베르 호자 사후 35년을 더 살다가 2020년에 99세의 나이로 아슬아슬하게 100세가 되기 2주전에 사망하였다.[4] 당시 그리스 공산당 또한 티토의 지원을 받았다.[5] 물론 이때 스탈린은 그의 고향 조지아에서는 145세까지 사는 노인들이 많다면서 그것도 부족하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6] 엔베르 호자가 리처드 닉슨의 중국 방문 당시 남긴 기록. "미제가 베트남뿐만 아닌 전 인도차이나에서 살육과 폭격을 일삼을 때 중국은 미제와 비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수치스럽고 반맑스주의적이고 비동맹적인 협상은 우리 쪽은 물론이고 베트남인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었다. 이것은 스캔들이었다. 이것은 베트남, 그들의 전쟁, 우리, 그들의 동맹, 그리고 다른 모든 진보적인 인민에 대한 중국의 배신이었다. 역겹다."[7] 1976년 전 1억 달러를 넘었던 교역량은 겨우 165달러로 떨어졌는데, 이는 2022년 환율로 환산해도 865달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8] 1964년 예선에는 참가하긴 했지만, 불가리아에게 패하며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다.[9] 이 내전에서 풀린 무기들은 이후 구 유고 연방이었던 코소보로 흘러들어가 코소보 전쟁을 야기한다.[10] 물론 이는 경제적 개방에 불과했는데, 실제로 1975년 7월에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유럽안보협력기구의 설립을 선언한 헬싱키 협정에 참가를 거부한 유일한 나라가 알바니아였다.[11] 당시 월드컵이 열렸던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반공권 독재자 중 최악으로 평가받는 남미의 악마 호르헤 비델라였다.[12] 사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시기 루마니아마저 나라가 그럭저럭 돌아가던 1970년대에는 서방 문화에 개방적이라 TV에서 헐리우드 영화와 미국 드라마들을 방영해주는 것은 기본에, 심지어 2년에 한번씩은 서구권 해외여행을 허가해주기까지 했다. 물론 1977년에 부쿠레슈티에서 일어난 대지진과 이로 인한 경제난과 긴축정책으로 경제가 악화되면서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지만.[13] 호자의 사후에도 다소 완화된 형태로 운영되다가 민주화 후인 1991년 7월에 국가정보원(SHIK)으로, 1999년 11월에 국가정보국(SHISH)으로 개편되었다.[14] 심문을 당하거나 수감, 처형, 고문을 당한 사람도 많지만, 절대다수는 정부의 감시에 시달린 케이스로 추정된다.[15] 다만 비공식적으로는 호자 시기에 2만 5천여명이 처형당했다는 주장도 있으며, 미국의 정치학자 루돌프 럼멜(Rudolph Rummel, 1932–2014)은 알바니아 공산정권에서 10만 명이 사망했다고 보고 있다. 다만 럼멜은 공산주의 정권 치하의 희생자 수를 과도하게 부풀려 제시한다는 비판이 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16] 국가 보안국이 설치된 1945년 한 해에만 해도 5021명이 체포되었고, 시구리미가 존재하던 동안 재판 없이 사형된 사람은 무려 958명에 달했다고 한다. #[17] 살던 집을 벗어나지 말라는 건지 살고 있는 지역을 벗어나지 말라는 건지는 불명.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18] 그 주인공은 시몬 미라카이(Simon Mirakaj, 1945~)로, 아버지가 반공주의자에 큰아버지가 비브 미라카이(Bib Mirakaj, 1899~1968,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점령했을 때 알바니아 파시스트당의 장관 겸 비서,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고, 내무부 장관 퇴임 후에는 파시스트 민병대 사령관으로써 이탈리아 점령군에 저항하는 알바니아 독립군(참고로 이를 주도한 사람이 엔베르 호자였다) 토벌을 주도한 악질 매국노였다. 알바니아 해방 직전 알바니아를 떠난 후 뉴욕으로 망명을 가 1968년 사망했다.)라는 이유만으로 가족이 노동 수용소에 수감된 상황에서 노동 수용소에서 태어났으며, 아주 어릴 때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의무교육을 받을 때가 된 후에는 노동을 그만두고 고등학교까지 마쳤다가 운하 건설 등에 동원되어 길게는 하루 14시간 동안 일하며 총 25년간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민주화 후에는 2002년부터 2013년까지 11년간 공산주의 정권 하 정치 박해를 연구하는 정치 박해자 연구소(AIDSSH) 소장으로 일했다. # 참고로 그의 아버지는 공산정권 치하에서 형과 동생이 살해당했고, 1951년까지 산에서 반공 무장투쟁을 벌이다가 1960년 미국으로 망명을 갔고, 1966년 가족과의 서신이 끊겼다고 한다.[19] 호자의 먼 친척이자 그와 친하게 지냈던 거짐 페슈커피아(Gëzim Peshkëpia, 1940–)는 지식인이었던 아버지가 1951년에 22명의 다른 지식인과 함께 총살당하자 4년간 복역하고는 석방되었으나, 1975년에 정권에 대한 선동과 선전 혐의로 노동 수용소에 다시 구금되었을 때 96세 노인이 수감된 것을 봤다고 한다. 이후 페슈커피아는 8년간 강제노동을 하다가 풀려났다.[20] 호자가 어릴 때 별다른 두각을 보이지 못했던 것과 달리 앙고니는 6개국어에 능통했던 천재였다.[21] 정치범용 6+비정치범용 9+혼용 14[22] 참고로 1985년 기준으로 알바니아 인구가 296만 5천명이었다. 즉 호자는 전국민의 약 1.1%를 정치범수용소에 가둔 셈. 참고로 2022년 기준으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사람이 전체 인구의 0.9%에 달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호자의 공포정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23] 참고자료[24] 실제로 알바니아에 있던 수용소 중 가장 악명이 높던 부렐 감옥(Burgu i Burrelit, Burrel Prison)에는 12피트*24피트(3.6m*7.2m), 즉 7.8평의 감방에 30명이 수감되는 경우도 있었다. 참고로 부렐 감옥은 조구 1세 시기인 1939년에 완공되었으며, 이 수용소에 수감된 정치범들 상당수가 호자 정권에서 고위직을 역임했던 사람들이었고, 이 수용소에서 3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바니아의 민주화 후인 1992년에 폐쇄되었으나 1997년에 다시 문을 열었고, 물론 오늘날에는 일반 범죄자들을 수감하는 곳으로 변경되었다.[25] 알바니아 표준어(토스크(Tosk)방언)으론 '엔베르 호자 툰쟈띠예타'라 발음하나, 이 영상이 아닌 다른 영상에 나온 곡의 가수는 게그(Gheg)방언 화자라 '툰얏예타'라 발음된다. 곡 자체는 호자의 65세를 기념하기 위해 1974년~75년 사이에 만들어졌으나, 영상 속 공연은 호자의 사후에 녹화된 것으로 보인다. 곡조는 알바니아 전통 민요의 곡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작사/작곡가는 현재도 미상이나 Kristo Kono나 Tefta Tashko Koço가 작곡/작사했다는 설이 있다.[26] 불행 중 다행히도(?) 호자는 휴가에 가서 회의에 오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회의 후 알바니아 독재의 억압성은 더욱 강화되었다고 하는데, 어찌 보면 비슷한 시기에 있던 북한의 8월 종파사건과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27] 참고로 호자가 생전에 쓴 책은 총 71권이었고, 이들 중 13권은 자서전이었다고 한다.[28] 정일봉처럼 아예 산에다가 글을 파낸 것은 아니고, 미리 글자 본을 떠놓은 것 위에 천연 점판석을 새긴 것이라고 한다. 1994년에 산에 박힌 돌을 파괴하려고 알바니아군이 네이팜탄까지 동원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히도 북한과는 달리 알바니아에서 산에 지도자 이름을 새긴 것은 이것 하나뿐이었다.[29] 티토도 유고슬라비아에서 찬양하는 노래들이 불려졌으며, 자신을 '농민 족장, 보호자, 전설적인 영웅'으로 묘사하게 하는 등의 우상화 정책을 실시한 바가 있다.[30] 대표적으로 호자의 고향 지로카스터르 입구에 있는 거대한 호자 기념비와 수도 티라나에 있는 12m 높이의 호자 동상, 피라미드 모습의 기념관(자세한 것은 후술)이 있다.[31] 참고로 호자의 생가는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 이후인 1997년 12월 16일에 미상의 공격자들에게 손상을 입었으나 이후 복원되었다. 물론 호자의 동상들과 전술한 고향의 기념비는 1991년에 알바니아가 민주화된 후 분노한 국민들의 손으로 모두 철거되었고, 후술하듯 피라미드 모습의 기념관 정도만 용도를 바꾼 채 그대로 남아 있다.[32] Nexhmije Hoxha (1921–2020).[33] 참고로 1982년 기준으로 알바니아의 의석은 250석에 달했다.[34] 참고로 1954년 선거에서는 약 70만 2천 명의 유권자 중 반대표가 정확히 959명(0.14%)였다.[35] 참고로 이 선거에서 총 유권자는 90만/98만 명이었다.[36] 정황상 강제수용소에 끌려갔거나 비밀리에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무사히 넘어갔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37] 1982년 발간한 그의 저서 《티토도당》(Titistët) 580페이지에 나오는 문장이다.[38] 물론 오늘날의 북한은 일반인의 인터넷 사용을 금지하고 에리트레아와 함께 국내 여행을 하기 위해 따로 허가를 받아야 하는 유이한 국가로 남는 등 시대상을 고려하면 오히려 옛 알바니아보다 더 폐쇄적인 면도 있다. 근데 어차피 호자 시기에 인터넷이 상용화되었다면 호자도 인터넷을 금지했을 가능성이 100% 이므로 딱히 의미 있는 비교는 아니다.(...)[39] 물론 북한과 마찬가지로 알바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를 위시한 스포츠 선수와 유학생(당장 민주화된 알바니아의 사실상 첫 대통령이던 살리 베리샤가 국비 장학금을 받고 파리로 유학갔다)은 예외였다. 참고로 알바니아는 북한과 달리 외국에 노동자를 보내지는 않았으며, 후술하듯 항공사 직원이라 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40] 여담으로 호자는 외국인들이 '자신의 작은 낙원'을 몰락시키기 위해 '서양 질병'을 가져올 것이라는 편집증적 망상에 시달린 나머지 알바니아에 도착한 모든 외국인들에게 살균제 샤워를 받게 했다.[41] 이는 북한의 고려항공김일성 시기에는 공산권 국가는 물론이고 일본, 말레이시아, 태국, 쿠웨이트, 심지어는 스위스까지 취항한 적이 있었다는 것과 대조되는데, 실제로 김정은은 스위스 유학생 출신이기도 했다. 다만 사실 다른 공산권 국가들의 항공사들은 서구에 개방적이라 서부, 중부 유럽과 중동 노선은 사실상 기본적으로 탑재했던 데다가 미국 노선과 미국산 제트기를 운항한 항공사도 그리 드물지는 않았고,(심지어 루마니아타롬항공도 1974년 보잉 707을 도입하며 뉴욕 노선을 운항했다) 알바니아 못지않게 폐쇄적이었던 마시아스 응게마 시기의 적도 기니마저 정식적인(?) 국영 항공사는 있었다. 오히려 알바니아와 민주 캄푸치아가 특이한 사례인 셈.[42] 비슷하게 1980년대 후반까지도 북한 사람들은 북한이 세계에서 제일 잘사는 나라인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북한의 경우 사정이 좀 다른게, 잘산다는 건 경제가 아니라 행복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70~80년대에도 영화나 선전자료에서 외국의 번화한 모습이 그대로 나왔고, 북한 당국도 "세상에 부럼없어라" 같은 구호를 내세워 물질적인 면에서는 자신들이 제일 뛰어나지 않아도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영광 속에 산다는 어투로 주민들을 세뇌했다. 아마 당시 북한 사람들은 외국의 번화한 모습을 봐도 후대 남한 사람들이 김정은 시기의 평양을 보는 것과 비슷하게 "수도의 기득권층들만 잘 살고 나머진 쫄쫄 굶겠지"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43] 그나마 북한처럼 대놓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특별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게 하지는 않았는데, 1984년에 국제앰네스티가 알바니아 인권에 대해 쓴 보고서에서 해외 여행을 가혹하게 통제한다는 것은 확실히 언급되지만 국내 여행을 통제한다는 것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북한식 려행증보다는 소련식 국내 여권에 더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김일성 시기 북한에서는 바로 옆 군으로 이동하는 것까지 허가를 받아야 했다고 하며, 려행증 발급이 지독하게 어려워 사실상 '특별 허가'를 받아야 려행증을 발급받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44] 다만 당시 유럽의 최빈국이던 알바니아의 경제사정을 보면 자동차 소유를 허용했더라도 동구권에서 중고차를 사서 쓰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1980년경에 알바니아의 자동차 수는 겨우 3천 대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당시 알바니아 인구가 267.2만 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자동차 보급률이 1000명 중 1대 수준이었던 셈.[45] 다만 베토벤은 많이 밀어줘서 국영방송에서도 상당히 많이 틀어줬다.[46] 사실상 북한, 알바니아 두 나라를 뺀 모든 나라로의 전화가 가능했다.[47] 다만 이쪽은 몽골, 적도 기니,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에도 보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우연히도 적도 기니, 캄보디아는 과거 호자 정권 뺨치는 쇄국정책 속의 학정으로 악명이 자자한 나라다.[48] 이후 1978년 3월에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치하의 적도 기니가 호자의 알바니아에 뒤이어 공식적인 무신론 국가를 선포하며 아프리카 최초의 무신론 국가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는 민주 캄푸치아도 "캄보디아에 더 이상 종교는 없으며, 모든 승려들은 절을 떠났다"며 사실상의 무신론 국가를 선포했다.[49] 이를테면 루마니아의 경우 루마니아어에서 튀르크어나 슬라브어 단어를 최대한 제거한 이후 같은 로망스어군 언어이자 당대 유럽의 문화 선진국이었던 프랑스어 그리고 자국의 역사적 기원으로 여기는 다키아 속주 시절 로마 제국의 고전 라틴어 등등에서 어휘를 가져와 대체했다.[50] 돼지고기와 술은 이슬람 순니파 율법에서도 하람으로 규정시되어 있는 대표적인 금기식품이다. 갑각류, 어패류의 경우 벡타시파에서 금지한다.[51] 참고로 알바니아에서는 유대교도 번성하였으나 2차대전 전후하여 유대인 인구가 거의 다 다른 나라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이미 호자의 종교 탄압 정책 이전 교세가 붕괴된 상황이었다.[52] 특히 호자 치하에서 문맹률은 1946년의 85%에서 1950년의 31%로 급격히 떨어졌고, 호자가 죽을 때쯤이면 알바니아의 문해율은 90% 이상이 되었다.[53] 호자가 사망한 1985년 기준으로 알바니아의 1인당 GDP는 640달러, 2022년 기준으로 1,773달러도 되지 않았다. 당시 세계 평균 1인당 GDP가 2685달러였다는 것과 비교하면 당시 기준으로는 개도국 중하위권 수준이었던 셈. 그리고 공산정권이 완전히 붕괴한 1992년 알바니아는 이보다 더 심해 1인당 GDP가 201달러 미만으로 명색이 유럽 국가인데도 무려 부룬디(!!!)랑 동급이었던 극빈국 중의 극빈국이었으며, 흑백 TV(?!)를 얻기 위해 갓난아기를 이탈리아인 부부에게 헐값에 넘긴 여성까지 나올 정도로(#) 완전히 파탄국가가 되고 말았다.[54] 알바니아의 면적은 경상도보다도 좁다.[55] 참고로 당시 알바니아의 전화 시스템은 대부분 저품질의 동유럽 모델에 일부는 1940년대에 구축된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했을 정도로 구식이었다.[56] 출산율을 고려하면 가구당 보급률도 100집당 31대(TV)/100집당 64대(라디오)였다고 볼 수 있다.[57] 이쪽은 1983년에야 컬러 방송을 시작했다. 다만 원래는 1970년대 후반에 시작하려고 했지만, 오일쇼크와 1977년에 부쿠레슈티에서 일어난 대지진의 여파로 늦어진 것이다.[58] 여담으로 1986년경 다른 국가(이탈리아나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중 하나로 추정된다) 녹화된 알바니아의 TV 방송 자료가 유튜브에 여럿 올라와 있는데,(1986년 알바니아 TV 화면조정시간, 방송 개시, 뉴스) 컬러로 방송된 것과 달리 녹화는 죄다 흑백으로 되었다.(...)(다만 영상의 2:46, 12:52, 13:28에서 스쳐가듯 컬러로 송출된 모습이 보인다.) 사실 이는 이웃 국가들의 컬러 방송이 SECAM 방식을 쓴 것과 달리 알바니아의 컬러 방송은 PAL 방식을 써서 호환이 되지 않아 흑백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알바니아의 폐쇄성을 생각하면 묘하게 적절한 분위기가 난다.[59] 한국이 1956년에, 서유럽 국가 중에서는 가난한 편이었던 아일랜드가 1961년에(물론 유럽 최빈국이던 알바니아보다는 경제 사정이 훨씬 좋았다), 북한이 1963년에 TV 방송을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TV 방송 자체는 그렇게 늦게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60] 그 이전에는 1주일에 3번, 1시간 정도만 시범적으로 방송하는 정도에 그쳤다.[61] 다만 당시 한국도 세계적으로 보면 컬러TV 방송을 늦게 시작한 편에 속했다. 실제로 한국은 중국, 북한, 베트남, 에티오피아 같은 공산독재 국가들보다 컬러TV 방송을 늦게 시작한 마당이었으니...[62] 참고로 이 대회는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63] 반대로 동시기 루마니아는 도시화에 따라 도시여성들을 중심으로 자녀를 덜 낳게 되었는데, 차우셰스쿠는 출산율이 떨어진다는 하나에만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진 채로, 도심지역의 교육과 보육인프라 확충은 뒤로 밀어놓아서 악법이라는 오명을 받게 된 것이다.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 항목 참조.[64] 물론 알바니아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출산율이 점차적으로 떨어지는 추세를 보였다. 그래도 알바니아의 출산율은 1990년대까지 유럽에서 수위권을 달리는 수준이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친 인구유출로 인구증가효과를 못본것이 문제일뿐이다.[65] 기존의 유력한 후임자 후보였던 메흐메트 셰후(Mehmet Shehu, 1913–1981)는 1981년 12월 18일 의문사했다. 공식 발표는 권총 자살이었지만 지금도 알바니아 내에서는 셰후의 죽음이 미제 의심 사건이라고 한다.[66] 사실 당대 알바니아의 지식인들이 호자를 싫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농민들은 호자를 지지하는 경향이 강하긴 했다.[67] 그래서 1980년대 결국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허무하게 몰락한다. 대표적으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치하의 루마니아가 있다. 다만 이 당시는 너무나 이자율이 높았기 때문에 부도를 내는 나라들이 많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볼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등의 남미국가들이 연쇄적으로 부도를 내어 경제가 폭망한때가 바로 이때고, 영국조차도 부도를 냈다. 한국에서도 외채망국론이 퍼져있었다. 외채망국론은 1980년대에는 넘어갔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로 결국 실현되고 만다.[68] 하지만 1990년대 초반에 체제전환 과정에서 타격을 극심하게 입어서 1992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201달러, 2023년 환율로는 431달러로 추락하여 그야말로 빈국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제난국을 빠르게 회복하게 해준 것은 해외송금과 피라미드였는데, 피라미드 사업이 확장되면서 국민들에게 소정이나마 불로소득이 생기면서 그 돈으로 경제난을 극복시키고, 소비시장도 활성화된것이었다. 물론 1997년에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으로 피라미드 회사들이 줄줄히 망하면서 알바니아 경제는 다시금 타격을 입었고, 나라가 사실상 내전에 빠져들었으나 이것도 빠르게 이전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69] 실제로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의 스컨데르베우 광장(Sheshi Skënderbej)에는 원래 제르지 카스트리오티(스컨데르베우)의 동상이 아니라 엔베르 호자의 동상이 있었는데 호자 사망 후 부숴버리고 그 자리에 제르지 카스트리오티의 동상으로 바꾼 것이었다고 한다.[70] 그러나 이 과정에서 습지를 모조리 메우는 바람에 환경을 훼손하기도 하였다.[71] 후일 알바니아의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하면서 상당수의 알바니아인들이 이탈리아 등으로 이주노동자로 가게 되는데, 당시 알바니아의 공교육이 최소한 기본적인 수준은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민 정착에 유럽 난민 사태 수준의 심각한 갈등은 없었다. 오늘날 이집트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등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난민들의 경우 글도 못 읽는 경우가 많아서 서구 사회에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72] 알바니아의 여성 인권 문제는 이슬람교 관련보다는 카눈 등으로 대표되는 산악 지방 농촌 문화에서 기인한 바가 컸다. 이 점은 알바니아 내 정교회나 가톨릭권 지역 및 벡타시파 역시 마찬가지.[73] 애초에 이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주체사상은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막대한 사상'이라는 북한 선전에 쓰이는 게 전부다.[74] 하지만 이 치과의사 이야기는 와전되었거나 완전한 허구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뉴질랜드의 소설가인 로이드 존스(Lloyd Jones, 1955–)가 1993년 쓴 책 '약력: 알바니아 퀘스트(Biografi: An Albanian Quest)'에서만 나온 내용이고, 존스 역시 자신의 저작이 허구와 사실의 결합이라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냥 호자 통치 시기가 얼마나 억압적인지 설명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 보는 게 옳을 듯 하다. #[75] 당시 식단은 아침으로 잼이 든 치즈 한 조각, 점심으로 야채 수프, 작은 양고기나 생선, 후식으로 신 자두, 저녁으로 요구르트였다고 한다.[76] 그 요리사는 호자가 죽으면 자신이 비난을 받고 처형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77] 이와 비슷하게 호자처럼 북한에 가장 근접한 수준의 독재로 악명이 높은 후배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도 권력에만 관심을 가졌지 실생활은 매우 검소하다고 한다.[78] 슈트라우스, 베토벤, 차이코프스키를 좋아했다고 한다. 다만 그 슈트라우스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인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둘의 대중적 인지도 차이와 호자가 보다 '고전적인' 음악을 즐기던 취향이었다는 것을 보면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79] 호자의 병세가 악화되던 1982년부터 알바니아의 사실상의 실권자가 되었고, 1985년에 호자가 죽은 후부터 1991년까지 알바니아 노동당 제1서기를 역임했다.[80] 실제로 네지미예 호자는 1997년 1월, 라미즈 알리아는 '9년→5년→2년'으로 형량이 줄어들며 1995년 7월에 석방되었다.[81] 건설 당시 이 피라미드는 알바니아에서 건설된 가장 비싼 개별 구조물이었다고 한다.[82] 이 점 역시 북한과 유사하다. 또한 김일성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어마무시한 화력에 트라우마가 있어 60년대부터 4대 군사노선에 따라 북한 전체를 요새화했는데, 특히 갱도진지 구축을 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