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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발터 에른스트 파울 울브리히트 Walter Ernst Paul Ulbricht | |
출생 | 1893년 6월 30일 | |
독일 제국 작센 라이프치히 | ||
사망 | 1973년 8월 1일 (향년 80세) | |
동독 프랑크푸르트 구 그로스돌린 | ||
국적 | 독일 제국 (1893 ~ 1918) 바이마르 공화국 (1918 ~ 1933) 나치 독일 (1933 ~ 1945)[1] 연합군 점령하 독일 (1945 ~ 1949) 동독 (1949 ~ 1973) | |
재임기간 | 제2대 국가평의회 의장 | |
1960년 9월 12일 ~ 1973년 8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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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독의 2대 서기장 겸 국가평의회 의장(Vorsitzender des Staatsrats).2. 생애
1893년 6월 30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1910년 독일 목공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이후 노동운동을 하였다. 1912년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였다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하여 육군 병으로 징집[2]되어 동부전선에서 종군하다가 1918년 탈영했다. 탈영 직후인 1919년 에른스트 텔만과 함께 독일 공산당(KPD)을 조직하고 중부독일지구[3] 지도부의 요원이 되었다. 1928∼1933년 연방의회 하원의원으로 있었으나 나치 독일 정권이 수립됨에 따라 소련으로 망명하였는데 망명 중 모스크바에서 독일인민전선 설립위원회의 발기인이 되었고 독일사회민주당과의 통일전선을 꾀하였다.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울브리히트는 라디오 모스크바(Radio Moscow) 방송국을 통해 독일어 라디오방송을 기획해 내보내고, 소비에트 연방이 수용소에 잡아 둔 독일 포로들을 재교육하는 일을 했다. 또한, 울브리히트는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목숨의 위협을 무릎쓰고 최전선까지 대형 확성기를 끌고가 반파시즘 선전을 하기도 했다. 전선에 있었다는 얘기.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귀국했고 1946년 오토 그로테볼과 함께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을 통합하여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을 결성하고 그 부위원장이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사회민주당 ·공산당의 합동공작, 대외적으로는 친소 정책에 의하여 전후 동독 부흥의 길을 열었지만 의도치 않게 소련의 심기를 여러 번 건드렸는데 라브렌티 베리야는 그의 경질을 주장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베리야가 처형되면서 이는 유야무야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에도 서방에 대한 강경 노선을 외치는 통에 나토를 유화책으로 분열시키고자 했던 소련 지도부를 불쾌하게 했다.
1949년 동독 정권 수립과 함께 부수상이 되었고 1950년 7월 SED 3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개인숭배를 비판함에 따라 소련의 신노선을 수용하여 1953년 SED 4차 당대회에서 서기장직을 폐지하고 제1서기가 되었다. 1960년 빌헬름 피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국가원수 자리를 승계했으나 대통령직은 폐지하고 1960년부터 1971년까지 국가평의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투철한 스탈린주의자로, 흐루쇼프의 신노선에 공개적인 반기를 들면서 이를 따르기 거부했으며 이 때문에 동독 내부에서도 개혁파의 반발을 사서 몇차례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1955년에는 SED 정치국에서 그를 퇴진시키려는 음모가 조성되었으나 1956년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혁명이 터지면서 당황한 SED 지도부는 혼란기에 지도자를 교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소련도 말은 안 듣지만 적어도 반혁명은 확실히 아닌 그를 지지함으로써 한 차례 기사회생했다.
하지만 수백만명의 피난민들이 날마다 서독으로 몰려가고 있었고 동독 지도부는 체제 유지를 위해서 더욱 강경한 통제정책을 요구했다. 반면 소련은 동독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온건 개혁정책을 제시했고 서베를린과 오히려 교류를 강화하여 서베를린을 자연스럽게 공산화하자고 주장했으며 서방이 언젠가는 동독을 승인해 줄 것이니 느긋하게 기다리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모스크바를 방문한 그에게 흐루쇼프는 소련은 건국 이후 미국의 승인을 얻는 데 16년이나 걸렸는데 동독은 그 정도 기다릴 것도 없고 한 10년이면 되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발언했지만 그는 이에 대해서 격렬히 반발하면서 당장 서베를린을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소련이 동독의 산업설비를 약탈해가서 동독이 못사는 거니 당장 이를 상쇄할 경제원조를 해내라고 흐루쇼프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 그가 급기야 중소분쟁에서 중국을 지원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까지 막나가자 흐루쇼프는 경악하여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을 승인하면서 그의 강경책에 휘둘렸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국내외적으로 그의 몰락은 시작되고 있었는데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바로 1961년 베를린 장벽의 건설을 지시한 것이었다. 1949년 동독 수립 이후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 당시의 상황에서 서방측으로 탈출한 이가 100만을 훨씬 넘겼으며 이 탈출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고학력 인텔리였기 때문에 울브리히트 본인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장벽 건설을 지시했지만 이는 서방측에서나 동구권측에서나 신나게 까이는 여지를 제공할 뿐이었다. 서방 측에서야 당연히 인권탄압, 독재정권의 억압 등으로 베를린 장벽을 비판했고 동구권측에서는 '저딴 장벽 세워봤자 우리가 체제 경쟁에서 지고 있다는 걸 만천하에 드러내는거 밖에 더됨? 너님 미침?' 정도의 반응이었다. 사실 울브리히트 본인도 장벽 건설을 지시해 놓고는 '이건 우리가 체제경쟁에서 밀린 걸 자인하는 꼴밖에 안되는데'라고 우울해했다고 한다. 여기에 그가 실시한 신경제시스템(NOSPL)을 비롯한 경제정책이 죄다 실패작으로 판명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서독과의 경제 격차가 벌어지면서 그는 당내에서조차 고립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브레즈네프가 집권한 후 동독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 각종 문제로 충돌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신통치도 않았던 그의 신경제시스템 자체가 소련 경제 시스템이 느릿느릿하다는 식의 디스로 해석되었고 그가 사회주의는 독립적 주기로 진행된다는 이론을 내세우면서 소련의 사회주의 위성국들의 독립적 정치활동을 부추김에 따라 크렘린은 열받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시기 서독은 빌리 브란트 정권의 소위 동방정책 하에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와 외교 관계를 활발히 개선해나가고 있었는데 이것이 심히 못마땅했던 그가 사사건건 태클을 걸면서 크렘린의 높으신 분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했다. 거기다 그는 동독 지도자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편이어서 소련에게 반항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는데 하필 시점이 프라하의 봄 직후였던지라 소련의 인내심이 별로 강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에리히 호네커였다. 호네커는 1970년 브레즈네프를 만나 울브리히트를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브레즈네프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온건한 변화를 제안하여 호네커가 서기장으로, 울브리히트가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있는 수준으로 그쳤다. 하지만 브레즈네프는 동독이 '소련의 어린애'라는 관점을 주장하며 동독의 '불손함'을 고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분명히 했다. 결국 1971년 말 호네커의 격려 하에 울브리히트의 권위주의적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13명의 정치국원들이 울브리히트를 비난하는 편지를 브레즈네프에게 보냈다.
"...자신의 무오류성에 대한 감정에서 영향을 받는 당원 발터 울브리히트가 사회주의 우방공동체 내 다른 정당이 제시하지 못하는 미래의 10년에 대한 정치적으로 다른 예측들을 2000년까지 내놓겠다는 견해가 점점 더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많은 소견들과 적지 않은 행동들을 보면 당원 발터 울브리히트가 자신을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과 동등시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결국 소련은 그를 버리기로 하였다. 1971년 5월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는 호네커를 새로운 제1서기로 추대함으로 호네커를 사실상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했다. 울브리히트는 아주 잠시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유지했으나 순식간에 건강상의 이유로 명예의장으로 퇴출당했다. 의장직은 국방장관이던 육군대장 빌리 슈토프 장군[4]이 잠시 승계받았다가 곧 호네커에게 넘어갔다. 이후 자신이 실각되었음을 견디지 못하고 1973년 뇌졸중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시신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안장된 동베를린 프리드리히스펠데 공동묘지의 사회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장의식에 북한 대표단장으로 정치위원회 위원 겸 당중앙검열위원장인 빨치산 서철이 참석하였다.
비록 말년에 심하게 구질구질하긴 했지만 울브리히트 체제는 국내의 정치통제와 친소 정책을 바탕으로 기술관료들을 양성하여 1950년대 동독이 제2차 세계 대전의 폐허를 딛고 경제수준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서로는 《독일노동운동사》(1953~1958)가 있다.
3. 여담
- 정치적 성향은 공산주의 계열 가운데서도 레닌주의자이자 스탈린주의자였는데 그것도 단순히 지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골수까지 레닌-스탈린주의자여서 이 노선에 어긋나는 다른 정치적 견해는 철저히 배격했다. 뭐 그 덕에 스탈린의 총애를 받아 동독의 지도자 자리에 오를 수 있기는 했지만 반대급부로 동독 내부에서조차 교조적인 면모에 대해 비판받으면서 대중적인 인기는 별로 없었다고 한다.
- 사생활에 대해 그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절대권력자답게 여러 정부(情婦)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소련 고위층들은 미국과 회담에서 동독 사람들이 매년 수십만명씩 서독으로 탈출하는 통에 이러다간 동독에는 울브리히트와 그의 정부들 밖에 남지 않을 것이라는 농담을 공공연히 했다.
- 동독의 얼굴과 같은 인물이었 던만큼 각종 훈장들을 꽤 많이 받았는데 그 중에는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훈장과 같이 대단히 유명한 것들도 많다. 한편 1956년에는 스페인 공화국 망명정부로부터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의용군들을 위한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는데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지도 않았던 터라 실제 의용군 출신들로부터 대차게 까이기도 했다.
- 스탈린, 김일성 등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동독 가정에도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스파이 브릿지에서 포겔 변호사의 집에 걸려있는 그의 초상화를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놓칠 수 있는 부분인데 후임자인 호네커보다 훨씬 한국인들에게 덜 알려진 인물이라 한국에선 더더욱 그렇다.
- 2020년 그의 일생을 다룬 Walter Ulbricht: Mein Urgroßvater가 독일에서 출간되어 주목을 받았다.
4. 참고문헌
- 실패한 제국 1권, 블라디슬라프 주보크, 아카넷.
- 동독 멸망 보고서, 프랭크 지렌, 귄터 샤보프스키, 하늘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