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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阮文靈(완문령, Nguyễn Văn Linh 1915년 2월 9일-1998년 4월 27일)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에서 활동하였다.
14세 때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으며, 이후 반프랑스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베트남 전쟁 중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하며 비밀 게릴라 지도자로 활약하였다가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공식적인 정치 지도자로 나섰다.
공산당 총비서 재임 중, 응우옌반린은 베트남 경제의 시장 경제화를 목표로 한 경제 정책 "도이머이"(변경한다)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그리하여 응우옌반린은 종종 페레스트로이카를 시작한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에 빗대어 "베트남의 고르바초프"[1]라고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1915년 7월 1일 하노이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응우옌반쿡(阮文菊, 완문국, Nguyen Van Cuc)이었고, 나중에 응우옌반린으로 고쳤다. 어릴 때부터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지하 공산주의 운동의 청소년 조직에 참여했으며 곧 베트남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오랫동안 반(反)프랑스 투쟁을 재개하다가 1941년 투옥되었다가 45년 일본의 패전 후 풀려났다.당 서열에서 승진을 계속한 그는 1954년 프랑스군이 철수한 뒤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 되자 남베트남에서 지하운동을 이끌었다. 1960년에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이 되었고, 베트남 전쟁 중, 그는 남베트남의 베트콩 지도자로써 오랫동안 숱한 가명을 사용하며 비밀 게릴라 지도자로 활약하며 지하 혁명활동을 지도한다.[2]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공식적인 정치 지도자로 나섰는데, 1975년 남베트남 정부가 붕괴되고 베트남이 통일되면서 그는 사이공 시당 비서가 되었다.(사이공 시장) 1976년 그는 당 정치국원이 되는 등 계속 승승장구 하였고, 1982년 정치국원에서 물러났다가 1985년에 재 복귀한 그는 1986년 12월 마침내 베트남 공산당 총비서가 되어 91년까지 집권했다. 총비서로 집권하면서 그는 경제구조 변경책인 도이머이와[3] 자유시장 개혁 시스템의 도입을 적극 주장하고 외자 유치를 활발하게 성공시킴으로써 베트남을 경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1989년에 뇌졸중으로 잠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1991년 공직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1991년 12월부터 1997년까지 당 중앙집행반의 고문이었다. 그는 지난날과는 다르게 훗날 자신의 개혁 조치가 부패와 착취를 가져왔다면서 유감의 뜻을 표명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베트남 국내의 각 언론에 편지를 써서 외국 자본의 침투와 자본주의 정책의 폐기를 주장하기도 했다. 1998년 4월 27일에 호치민 시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