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0 21:34:58

민주집중제

국체 및 정체의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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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시작3. 실체
3.1. 레닌의 개입3.2. 스탈린의 개입3.3. 집단에서의 민주집중제3.4. 국가에서의 민주집중제
4. 문제점5. 오늘날 민주집중제에 대한 논의
5.1. 부정론5.2. 긍정론
6. 현재 채택 국가7. 여담8. 참고9. 관련 문서

1. 개요

민주집중제( / Democratic Centralism)는 민주주의중앙집권제를 합친 형태로, 보통 사회주의 국가, 공산당에서 인민들이 투표 대신에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여 의견을 개진하는 민주주의 방식으로 레닌의 경우에는 민주집중제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실상의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보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방식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면이 어느정도 있기는 하나 사민주의나 민주사회주의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물론 레닌식 민주집중제와는 다소 다르지만.

2. 시작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하여 제기되고 블라디미르 레닌이 체계화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이 혁명 투쟁보다 이익 투쟁하는 경향을 제기하여 대안으로 민주집중제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늘 그랬듯(...)[1] 의회 민주주의와는 다른 직접민주주의에 의거한 방식이라는 걸 제외하면 민주집중제가 뭔지 정확히 제시하지는 않았고, 이에 후학들이 민주집중제가 뭔지 대신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레닌은 조직론으로 ‘중앙집중제’를 당 조직 운영원리로 제시하여 소련소련 공산당의 기초로 삼았다. 레닌은 서유럽의 선거 제도와 의회 제도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부르주아들에게 이미 유리한 상황이기에 노동자들이 참정권을 행사해봐야 의미가 없고, 부르주아의 지배 질서가 유지될 뿐이기에 인민들이 투표를 행사하더라도 다시 노예로 회귀한다고 보았다.[2] 서유럽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뤄지는 인민의 참정권은 형식적인 권리에 불과하며 실질적으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선 민주집중제로 가야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독재로 발전할 가능성을 염려하여 중앙집중제(복종)에 민주(시민의 토론과 합의)를 더하여 ‘민주집중론’으로 정립한다. 투표 이후 정치권력에 의한 하향식 의견수렴방식이 아니라 인민대중으로부터 의견을 모아서 당원에게로 그리고 당 간부에게로 의견을 수렴하는 상향식 의사결정방법이 진정한 민주성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는 일단 제2차 세계 대전 전이었으므로 집단주의나 전체주의의 폐해가 아직 드러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개개인의 이성이 집단 단위로 모이고 그 길을 정치적 엘리트인 당 관료와 혁명 전위가 이끌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이 때는 아직 파시즘이 대두하기도 전이었고, 유럽 대부분의 국가왕정으로 유지되던 시대였다. 이때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등등의 세력들은 "왕의 폭정을 혁파하고 평등한 민주공화정으로 가자!"라는 모토 하에 함께 움직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 민중권력을 아직 쥐어보지도 못한 시대였기 때문에, 그리고 왕정이 아닌 당/공화국이 권력을 쥐어보지도 못한 시대였기 때문에 (미국 등 일부 국가 제외) 새 시대에 대한 희망이 살아있던 시기였다.

이 당시 민주집중제의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1. 혁명적 당의 최고지도기관은 상향선거로 구성원이 정해진다. 즉 간접선거의 원칙에 따른다.
2. 보고의무제 원칙에 따라 혁명적 당의 하부 기관은 상부 기관에게 국가 상황을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한다.
3. 다수결을 원칙으로 한다.
4. (민주적으로 결정된 사항에 대해) 하부 기관은 상부 기관에 복종한다.
5. 다수 인민의 뜻에 맞는 최고지도기관을 선출하기 위해 모든 인민은 선거·투표에 참여할 책임이 있다.
6. 지방 사무는 인민의 자치체가 자발적으로 관리할 의무가 있다.
7. 모든 지방의 인민 자치체는 중앙 기관을 비판하고 정책 수정을 요구 할 권리가 있다.
8. 모든 지방 및 중앙 위원회 구성원들은 노동 계급직접 선거로 선출된다.

3. 실체

3.1. 레닌의 개입

민주집중제는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의 선의와 합리성을 가정한 제도이다. 그러나 적백내전의 혼란 속에서 위와 같은 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히 소련이 처한 고립된 국제환경 속에서 다른 이견을 허용하는 것은 국가의 체제에 혼란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제10차 전체인민대표자회의에서 최종적인 결정이 이루어지면 그 이후 어떠한 이견도 허용하지 않는 결정을 내린다. 이 결정은 소련 사회를 경직시킨 원인으로 비판받지만, 이 결정이 있었기에 소련이 생존할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3.2. 스탈린의 개입

레닌 시절만 해도 민주집중제는 인민 대중 및 하부구조에서 상부구조로 향하는 의견이 수렴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민주집중제가 정착하지 못한 채 레닌이 죽고 난 뒤 등장한 스탈린에 의하여 민주집중제는 변질되고 만다. 민주집중제에서 민주는 사라지고 집중만 남게 되어버린 것이다. 레닌이 가장 경계하고 염려하던 부분이 발생하고 말았다. 의견개진 부분은 사라지고 상부구조에서 내리는 지시를 하부구조는 따를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아가 스탈린은 종래의 레닌의 민주집중제와 같이 하부구조에서 상부구조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면 오히려 숙청해버려서 완벽하게 독재의 도구로 만들고 만다.

스탈린이 수정한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교육기관과 선거 기관은 혁명적 당명령을 따라야 한다.
2. 당의 규율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하부 기관과 자치체는 최고지도기관의 방침을 전달해야 한다.
3. 당 규율을 엄격하게 유지하고 국론 통일을 위해 소수 의견은 반영되지 않는다.
4. 공산당 내 하부 기관은 상부 기관의 명령에 무조건으로 복종해야 한다.
이것을 풍자한 것이 바로 조지 오웰이 쓴 동물농장의 동물 7계명이다.

3.3. 집단에서의 민주집중제

집단에서 민주집중제란, 토론과 결정, 행동을 분리하는 것을 뜻한다. 토론 과정과 표결 과정에서는 민주주의적으로 하되, 일단 결정이 난 행동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기하는 것을 금지하고 권위적·중앙집중적·독재적으로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지도부가 책임있는 결정을 내린다는 전제가 있다.

사실 대다수의 사회 집단에서는 민주집중제와 유사한 원칙이 명문상, 혹은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군사화[3]의 성향이 강한 대한민국 사회는 특히 그러한 성향이 강하다. 민주주의조차 아닌 직장이나 회사는 제쳐놓더라도, 각종 정당, 동호회, 비영리단체, 조합, 대책위원회에서는 민주집중제적인 원리가 당연하게 여겨지곤 하며, 총회에서 결정된 것에 대해 나중에 반발한다면, 무책임한 행위라고 비난을 당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4. 국가에서의 민주집중제

국가 운영에서 민주집중제는 다음과 같다.

소수의 인민들로 구성된 세포 조직(한국으로 이를 테면 '반상회')을 구성한다. 이 세포 조직에서는 자신들의 현안에 대해서 토론하고 결정된 사항을 당 조직(북한에서는 노동당 조직이라는 '전도대')을 통하여 최하단에서 순차적으로 최상단까지 보낸다. 이 사항은 당 지도부(북한에서는 '수령', 중국에서는 집단 지도부)에 전달된다. 지도부는 모든 사항을 결정하고, 이 결정은 거꾸로 하부기관에 전달되어 모든 당원들을 구속하게 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다수결'로 나타난 결론에는 '복종'하게 된다. "결론이 도출된 이후에는 자유로운 비판이나 개인 의견을 개진할 수"가 없고, "소수 의견은 다수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원칙인 것이다. 이는 결론 도출 이후 불필요한 동력 소모를 막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복잡한 구조 때문에 실제로는 일반 인민들의 개인 의사는 거의 아무 것도 반영되지 않는다. 인민들의 의사는 세세하게 쪼개진 세포 조직으로 되어 있으며, 공산당에서 벗어난 횡적 연대가 불가능[4]하고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무조건 극소수의 의견으로 전락한다. 실질적으로는 오직 강력한 선동 기구와 선전 기구를 가진 중앙 지도부의 의사만이 다수 의견으로 될 수 있기 때문에 지도부가 당원과 인민에게 일방적인 복종만을 강요하는 체계가 되어버린다.

요약하자면 민주적인 의결 과정을 통해 방침이나 정책을 결정하되 일단 결정된 것에 대해서는 반대나 이론 없이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민주집중제의 대원칙이다.

비합법 운동 시기에는 조직의 노출과 공권력의 탄압으로 인한 조직 붕괴를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소련을 비롯한 현실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한 뒤에는 단시간 내에 자본주의 열강과 대결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갖추기 위한다는 근거로 정당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민주집중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자원과 시공간적 한계에 의해 다수 의견이 사회를 주도하는 것이 현대 민주주의의 한계고, 의결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가 집행되었다면 그 결과에도 책임을 지고 따르는 것이 옳다고 설명한다.

다만, 1. 설령 자신이 참여한 의결 절차에 책임을 져야 하더라도, 반대 의견에 대한 원칙적 봉쇄까지 그 책임의 일부로 볼 수 있는가, 2. 그리고 소수의견 제기 자체가 금지된 상황에서 민주적 의결 자체가 가능한가 라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상세하게 후술되어 있다.

4. 문제점

레닌주의자들은 그들의 당이 “민주집중제”로 운영되는 중앙집중적 조직이라 주장한다. 이것은 그들이 사회주의를 중앙집중화 된 국가가 경영하는 중앙집중화된 경제로 이해하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이것을 달성하고, 달성한 후 중앙집중화 되고 국가화된 경제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중앙집중화 된 당이 필요하다. 이론적으로 국가와 당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지만, 경제는 전세계적으로 중앙집중화 된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참으로 관료주의적 악몽이 아닐 수 없다. 중앙집중화는 협동도, 단일화도, 협력도 아니다. (“민주적”이건 아니건) 중앙집중화라고 함은 모든 것의 원영이 중앙으로부터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소수가 모든 것을 이끄는 것이다. 폴 굿맨이 말하였듯, “중앙집중화된 조직에서 권위는 하향식이다. 정보는 아래로부터 모아져서 위에 있는 자들이 사용하도록 준비된다. 본부에서 모든 결정이 만들어진다. 정책, 일정, 표준 절차 등은 지휘체계에 따라 아래로 전달된다. 이러한 체계는 군기를 잡기 위해, 기록을 남기고, 세금을 모으고, 관료제를 기능하게 하고, 대량 생산을 하기 위하여 설계되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모델이고, 레닌주의 당은 이 모델을 지속한다. 결국 이러한 국가는, 특히 노동자-자본가 관계에 있어 자본주의 국가의 맹아라 할 수 있다.
레닌주의 전위가 아닌 아나키스트 조직을

민주집중제는 인간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인본주의적 원칙을 기본 전제로 삼고 있었다. 쉽게 말해 "그래도 모두가 계속해서 토론하고 의견을 개진하면서, 의 영도를 받으면 합리적인 결론이 도출되겠지"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 혁명까지의 이야기고, 소련이 확립된 이후 당 관료들은 경직되기 시작했고 국가 체계는 관료주의화되기 시작했다. 민주집중제도 일종의 의도는 좋았다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5]

이러한 경향의 영향은 강령에서도 나타나는데, 소련의 강령을 보면 처음에는 '하부 조직의 의견'에 대해서 중시하다가, 점점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부가 상부에 복종, 소수가 다수에 복종이라는 문구를 넣은 것 자체가 토론과 합의를 가로막고 일방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으로 작용한 것이다.

사실 이같은 변질이 일어나게 된 것은 레닌의 민주집중제가 실행되고 뿌리를 내리기 전에 레닌이 혁명 이후 암살기도로 인해 부상을 입고 심각한 건강이상을 앓았다가 사망해버린 탓이 컸다. 이후 집권한 스탈린1925년부터 53년까지 정권을 잡으면서 완전히 경직화 내지 변질되어 버린 것이었다.

사실 민주집중제의 한계로 지적되는 것들의 상당수는 그냥 민주주의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반적인 민주주의가 공화주의, 자유주의, 천부인권 등 다른 요소로 보완되지 않으면 실질적으로 민주집중제와의 큰 차이가 없게 되며 이는 실제로 역사적으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는 대의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 모두에 해당되는 한계들이다.[6] 아나키즘의 시각에서는 국가 권력과 위계질서 자체의 한계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윤리학적으로 보았을 때 민주집중제는 어떤 것에 대해 집단 합의하고 약속을 했을 경우, 그것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명제와 연관이 있다. 이는 약속한 것이라도 해도 정의나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어길 수 있다는 관점과 상반된다. '가혹한 조건에 돈을 빌렸더라도 계약서를 썼으면 무조건 계약서대로 갚아야 한다'는 명제가 전자의 예이다.

또한 대표 의사를 하나로 통일하여 거기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국가주의적 사고방식과도 연결된다. 이를테면 '국가간에 이미 인권 침해 행위에 대한 배상 협상이 끝났으면, 피해자가 그 배상금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같은 명제도 하나의 예이다.
  • 민주집중제에서는 다수결이 강조된다.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볼때는 상당히 좋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렇게 좋은 제도는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다수결의 원칙은 항시 존재했고, 항시 병크를 보여주었다. 한 예로 아테네에서는 아르기누사이 해전영웅장군들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사형시켰다.[7]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다수가 동의하기만 한다면 명백히 어리석은 결정도 그대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의견이 맞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히틀러 같은 사례를 본다면 다수결이라는 것이 항시 좋은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또한 다수결의 원칙은 집단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앞에서 언급한 아테네의 사례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다수결의 원칙을 견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나[8] 민주집중제는 그러한 것을 원천 봉쇄했다. 하지만 반대로 민주집중제는 의견 결집 후에는 다수결 대신 엘리트 지도부의 권위를 강조했기에, 이른바 중우정치와는 반대되는 면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특성상 일당 독재로 흐르기 쉽다. 민주집중제는 '국민 다수의 의견에 따라 군림하는 권력'을 견제하는 세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련에서 민주집중제의 성립 초기에는 멘셰비키와 같은 야권 세력도 있고 사회혁명당과 같은 연립여당 등이 정부에 참여해 다당제로 굴러갔지만, 두 세력 다 사멸하고 레닌의 분파금지 명령으로 공산당 내 당내 민주주의마저 파멸한 뒤에는 권력의 분립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9] 그런데 민주집중제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입법부행정부가 동일하다. 입법부가 행정부를 사법부의 판단(탄핵) 없이 언제든 과반투표로 해임하고 새로 선출할 수 있고, 행정부의 모든 결정을 취소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입법부가 사실상 모든 권력을 쥐고 흔들게 된다. 이런 입법부의 과반을 특정 정당이 장악한다면 일당 독재와 다를 바 없어진다.
다당제가 제대로 작동해도 이렇게 되는데 사회주의 민주집중제 국가에서는 입법부 의원 선거에 이런저런 제약을 두어 사실상 입법부를 공산당이 장악하므로 쉽게 일당 독재로 흐르게 되었다. 더군다나 당이나 집권단체가 하나만 있는 공개투표에서 민주집중제의 원칙인 상향식 의견수렴이 가능할리가 없다.
그렇다고 직선제로 입법부를 뽑으면 민주집중제라고 볼 수도 없다. 트로츠키스탈린1936년 헌법개정을 비판하며 민주집중제와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저버렸다고 한 게 이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 최고회의가 직선제가 된 건 즈다노프가 소련 관료제가 인민대중과 유리된 채 비민주적으로 운용되고 있다고 해서 보통 평등 비밀 선거를 포함해 직접 선거로 선출되는 직선제 입법부를 출범시킨 것이다. 물론 뒤이은 대숙청의 영향으로 다자후보 선거가 도입되지 않아 별반 차이가 없어져버려 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의 영향력 하에 건국된 사회주의 민주집중제 국가들은 직선제 입법부를 가지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직 사회주의 국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댄 다음 인민민주주의라는 명목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은 공산당과 합쳐 겉보기로만 대중정당인 조선노동당을 만들어 버리고, 야당(조선사회민주당, 천도교청우당)들을 관제야당으로 만들어 버린 다음 민주당파,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과 같이 공산주의 정당의 주도적 위치를 명시한 원내교섭단체가 권력을 쥐게 함으로써 그냥 일당제 국가로 굴러갔다. 이런 국가들은 소련 체제를 그대로 따랐기에 민주집중제의 단점을 고스란히 가져왔으며, 루마니아 인민공화국베트남 민주공화국은 인민민주주의에서 한 단계 발전해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며 국명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꾸고 야당을 전부 해산해버리기도 했다.
  • 충분한 토론을 하면 옳은 결과가 나온다는 생각에는 모든 인간은 충분한 교육을 통해 적절한 지성을 보유한다는 전제가 숨어있다. 하지만 한국처럼 진학률이 매우 높은[10] 나라도 인터넷에서 온갖 인격모독과 비난이 난무하고 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삼권분립 등으로 국가기관이 서로를 견제하게 만든 것은 제도적인 견제 장치가 없이 지도자들의 도덕성에만 의존하려 하면 필연적으로 독재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11] 그런데 민주집중제에서는 '지도자들의 책임감과 그들에 대한 신뢰'를 이유로 '상부가 알아서 잘 책임감있게 판단할 것'으로 전제하고 견제는커녕 오히려 상부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제도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민주집중제는 혁명을 위한 작은 조직이라면 몰라도 국가 운영 원리로서는 민주주의보다는 전체주의에 가깝다. 반대로 제도적 장치 없이 인민대중의 의견에만 철저하게 따르게 한다면 파시즘으로 흐를 가능성도 있고...이런 식의 문제점 때문에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여러 대안을 내세우기는 했다.
  • 1950년대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내세웠던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구호는, 이러한 경직화된 국가 체제를 타파하고 민주집중제의 기본원리를 되살리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었고 문화대혁명에서는 민주집중제의 원리를 되살리고자 지방에서는 민중의 코뮌과 토론을, 당에서도 민중의 의견을 통한 당내부 토론을 장려하였다, 근데 64년에는 이런 지방 토론, 코뮌을 탄압하고 67년에는 아예 당에 대한 모든 의문을 금지시켜버리면서... 그 과정에서 고생 좀 하셨던 덩샤오핑도 처음에는 마오쩌둥과 거리를 두며 열린 자세를 보여주는 듯 했으나... 시장개혁에 따른 부작용에 반대한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다시 되돌려 권위주의, 관료주의, 수정주의를 타파하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재건하자고 하자 바로탄압크리.[13]
  • 레닌과 동시대에 독일 등지에서 논의되던 소비에트 민주주의(평의회 공산주의)는 그나마 한 단계 더 발전해 입법부가 행정부를 언제는 해임할 수 있는 것처럼 각 계층의 소비에트가 상향선거로 상위 소비에트를 뽑는 대신 상위 소비에트의 의원을 언제든 해임할 수 있게 한다는 제반조건을 걸었다. 물론 일개 유권자가 훨씬 상위기관의 정치인에 대해 직접적으로 해임투표를 할 수는 없으므로 단점은 그대로이다. 더군다나 이 주장은 소련에 의해 반려되었고, 스탈린흐루쇼프는 노동자 자주관리 정책을 시행한 티토를 비난할때 이러한 평의회(소비에트)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라면서 비난을 퍼부어대었다.

5. 오늘날 민주집중제에 대한 논의

5.1. 부정론

부정론에서는 민주집중제는 시대나 나라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중앙의 결정에 대한 복종과 규율을 강조하는 것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정당에 맞지 않으며, 이러한 점에서 탈피한 것은 더이상 민주집중제로 불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 정치체제가 곧 정당 내부가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당위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정부정당은 그 기능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당은 가입과 탈퇴가 언제든 가능하고 결정이 정당 외부를 구속하지는 않는다. 이념이나 정강을 토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정당의 입장에서는 민주집중제가 더 합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포함한 다수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 8조 2항은 정당은 그 목적·조직과 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함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결국 개헌을 하지 않는 이상은 민주집중제 운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설령 개헌이 이루어진다 해도 해당 내용을 개정하여 민주집중제 운영을 적용하려 할 경우 엄청난 저항과 반발에 부딪히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지도자 원리 같은 것을 추종하는 나치당이나, 이슬람 극단주의를 추종하는 무슬림 형제단 같은 집단이 민주주의에 따라서 집권하고 오히려 민주주의를 말살해버리는 모순을 막아낼 방법이 없다. 1987년 6공화국 헌법 개정이 되어서도 삼김시대 시절의 정당들이 총재라고 하는 개인의 사유물처럼 운영되었지만 현재에는 당 대표라는 자리를 민주적 절차로 선출하고 원내대표의 발언력이 강화되어 대표의 권한을 분산시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당이념이나 정강을 토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발상이다. 정당은 당원과 국민의 뜻을 반영할 수 있는 조직인 것이 바람직하지[15] 지도부의 명령에 토를 달지 않고 그대로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한 단체가 아니다. 조직의 내부가 비민주적이라도 지도부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잘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국민의 뜻을 잘 실행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정당뿐만 아니라 의회정부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즉 이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의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에 불과하다. 정당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부정하고 나서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또한 긍정론에서는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 진보정당들 내에서 통하는 '민주집중제'는 오히려 일반적인 의회민주주의의 기준보다 더 엄격하고 직접민주주의적 요소가 강한 민주주의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하지만 2000년대 이후 진보정당에서도 민주집중제의 의미는 '(민주적으로 결정되었다면) 입다물고 따른다'라는 인식이 무척 강한 것이 현실이다.

당장 대표적인 진보정치인인 노회찬 의원도 2015년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수의 우위를 중심으로 한 민주집중제도 이제는 안 된다. 저는 이제 민주집중제를 버려야 한다고 본다.'라고 했고# 2021년 민플러스의 기사에서도 민주집중제에 대해 '즉 자파의 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당내 역량을 하나로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이를 위한 조직적 보장으로서 최소한 ‘당3역’을 자파가 장악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라고 서술하는 등 결국 '일단 민주적으로 결정되었으면 복종한다'라는 인식이 민주노동당 시절에도 여전했음을 보여준다.#[16]

더 나아가 민주당 계열의 정당을 지지하는 중도 내지는 중도좌파 성향의 국민들 입장에서는 민주집중제 운운이 위와 같은 인식 때문에 더더욱 기피감이 들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정당이 '한국식 민주주의'를 주장하면 그걸 '우리나라에 맞는 민주주의'라기 보다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독재를 연상케하는 사람이 많듯 오히려 진보진영에 관심이 있거나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에 발을 담궈본 사람일 수록 민주집중제의 특유의 '중앙의 결정에 대한 복종'에 대해 학을 뗄 수 밖에 없다.

5.2. 긍정론

긍정론에서는 위에서 인급한 신좌파의 전통을 흡수한 민주집중제를 이야기하는 것일 뿐 스탈린 시대의 민주집중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한국의 진보 정당 내부에서는 '과도한 평당원 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적 강박이 당을 말아먹는다'라는 비판이 흔히 나오고 있다. 이러한 반발이 카리스마리더십에 환상을 지닌 민주집중제 지지론자들의 의견일 뿐이 아니느냐는 의심스러운 시선도 있지만, 저런 식으로 민주주의보다 리더십을 강조한 것은 전통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아니라 사민주의자들이었다.

원래 의미의 '민주집중제'가 어떤지를 떠나서,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 진보정당들 내에서 통하는 '민주집중제'는 오히려 일반적인 의회민주주의의 기준보다 더 엄격하고 직접민주주의적 요소가 강한 민주주의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굳이 '민주집중제'라는 표현에 왜 집착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자본주의 국가 내의 의회민주주의, 부정적인 표현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의도적으로 구별을 두기 위해서라고 보면 된다. 이는 근로자 대신 노동자를 의식적으로 선호하고, 국민 대신 인민을 선호하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2010년대 현재 전세계 어디를 가도 좌익 정치세력은 이렇게 자체적인 좌익 문화와 이에 수반한 고유 명사, 민중가요, 구호 같은게 줄줄이 따라온다. 저런 자기들이 좋아하는 고유 명사에 좀 집착한다고 해서 헌정 질서를 직접적, 불법적으로 파괴하려고 하는게 아닌 한 딱히 제재할 근거는 없다.[17]

그리고 오늘날 진보정당에서도 주류가 되어가는 사회자유주의자 내지 사민주의자들은 의회주의 원칙에 충실한, 리더십 있는 정치인관을 더 선호한다. 물론 진보정당 내부에서 패권주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게 제도 자체가 비민주적이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정당 내 주요인사들에게 좌지우지되고, 평당원의 힘이 거의 없는 여야 정당들을 보자면, 부정적인 의미의 '민주집중제'는 진보정당보다 주요 정당들이 더 철저하게 실현하고 있다(...).

60%의 찬성으로 통과한 법을 나머지 40%의 국회의원을 지지한 사람들도 따라야 하는 것은 일반적인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이며 민주집중제에 한정된 비판점이 아니다. 게다가 사후통제 제도가 미비한 것은 모든 대의민주주의가 오래 전부터[18] 비판받아 온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소비에트 시절의 민주집중제로 표현되는 것은 분권보다 중앙집권을 강조하는 강조점의 차원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고대 로마에서 위기사태를 대처하기 위한 독재관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결국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추구하는 것은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서 국가군대가 소멸되는 이상향에 도착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권위주의, 전체주의, 독재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이는 현실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추구하는 국가들이 하나같이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 경험이 전혀 없거나 미약한 사회를 바탕으로 들어섰기 때문이긴 하지만, 그 때문에 현대 한국사회에서는 극소수 스탈린주의 광신도들 말고는 아무도 스탈린식 '민주집중제'를 옹호하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국가군대 대신 자치 공동체를 강조하는 아나키즘과의 접목도 그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되고 있다.

또한 과거나 현재 권위주의적 정권 하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은 비밀결사의 성격을 띄기 때문에 민주집중제적인 성향을 띄는 것이 불가피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을 현재에도 적용하려고 하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다함께 등의 단체는 여전히 패권주의나 지도부의 권위주의, 내지 엘리트주의적 관점에서 민주집중제를 교조주의적으로 적용하려 하기 때문에 여러 비판을 받고 있다. 맨날 하는 말이 비슷해

한국정당으로 따지자면 옛 진보신당이나 사회당이 이러한 이론을 지지하는 정당이었다. 즉 레닌까지의 이상론을 의미하는 것이지 스탈린 이후의 독재의 정당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당장 그러한 이들 내에서도 온갖 논란과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레닌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 시절에 이미 독재체제로의 씨앗이 뿌려져있었던 만큼, 정당지도자들이 이상한 마음을 먹기 시작하면 큰일날 일을 주장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저런 신좌파적 이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다함께통합진보당 사태로 대표되는 권위주의적 좌파들을 '겉으로만 아닌 척할 뿐, 실제로는 스탈린주의자들'이라고 인식한다.

6. 현재 채택 국가

7. 여담

중국어 [ruby(民, ruby=mín)][ruby(主, ruby=zhǔ)][ruby(集, ruby=jí)][ruby(中, ruby=zhōng)][ruby(制, ruby=zhì)]
일본어 [ruby(民, ruby=みん)][ruby(主, ruby=しゅ)][ruby(集, ruby=しゅう)][ruby(中, ruby=ちゅう)][ruby(制, ruby=せい)]
영어 democratic centralism
러시아어 демократический централизм
프랑스어 centralisme démocratique
  • 공산주의 정당 중에서도 민주집중제를 채택한 사례가 있다. 팔레비 왕조 시절 이란의 부활당이 대표적이며, 중국국민당에서도 쑨커에 의해 민주집중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이 시스템이 독재에 악용된 것도 공산주의 국가와 같았다. 이 때 채택된 민주집중제는 각각 이란 혁명리덩후이의 국민당 외성인 원로 숙청 시까지 지속되었다.
  • 한국에서도 열린우리당이나 기타 진보정당에서 정당을 민주집중제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으며[21], 심상정민주노동당 당원이었던 시절 인터뷰에서 진보정당은 민주집중제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를 '진보정당은 지도부의 권위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결정이 투표로 이루어지면 토론이나 책임있는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이러한 민주집중제의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제도를 염두에 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 러시아인들에게는 그들의 역사적 경험상 서방식 민주주의보다는 민주집중제가 더 친숙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도 있다. 가혹하기 짝이 없는 날씨 때문에 혼자 살면 얼어죽을 수 있으니 항상 집단이 뭉쳐서 살고, 이런 환경 때문에 소수 의견을 존중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베체'(вече)라 불리는 전통적인 마을 회의에서도 다수결로 의사가 결정되면 불만이 있더라도 이견을 제기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내쳐지면 얼어죽는거다(...). 이는 서방식 민주주의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의 민회와는 상이한 전통이라 할 수 있다.[22]

8. 참고

9. 관련 문서


[1]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비판에만 너무 열중한 나머지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공산주의 사회 등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본인이 제시한 것들에 대해선 거의 설명하지 않았고, 그 부담은 후학들이 오로지 짊어졌다.[2]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인데 마르크스와 레닌이 살던 시대에는 투표권을 가진 사람이 제한적이었고, 여성은 투표권을 부여받지조차 못했다.[3] 군국주의와는 구별되는 군사주의를 의미한다.[4] 자의적인 횡적 연대는 종파주의라고 비난받는다.[5] 이런식의 화기애애하고 훈훈한 민주집중제는 어느 공산주의 집단이든 초기에는 아름답게 유지, 존속된다. 티토의 게릴라 부대도 이런식의 민주주의적인 모습을 보였고, 마오쩌둥대장정 시기에 보여준 놀라운 인간미는 전 세계의 공산주의 게릴라 전사들의 귀감이 되었다. 카스트로 또한 게릴라 시절에는 상당히 합리적이었다.[6] 다만 중우정치 같은 것은 (직접)민주주의의 한계이지만 민주집중제에서는 최소화될 수 있는 요소라고 볼수도 있기 때문에, 그 정치학적 포지션이 일치하지만은 않는다.[7] 해전이 일어난 날에 태풍이 불어서 많은 병사들이 바다로 떨어졌는데, 당시 장군들은 적함과 전투 중이라 이들에 대한 구조를 진행할 수 없었다. 이후 익사자의 유가족들이 장군들이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고소했고, 결국 500인 평의회에서 재판이 열렸고, 결국 인정과 감정에 호소한 유가족들의 승리로 장군들을 모두 처형해 버렸다.[8] 미국은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고안하려고 노력하였다.[9]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금지한 건 바로 레닌 본인이다. 오히려 소비에트 러시아 행정부는 레닌에 맞서 사회혁명당 수뇌부의 사형을 형집행정지 시켜버릴 정도였다. 혁명의 주인공이 민주집중제의 파멸을 재촉한 셈.[10] 한국 역시 말만 대학이지 실제로는 고등학교 이하의 교육제공하는 곳이 적잖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최소한 문맹 같은 극단적으로 못 배운 사례는 매우 적다.[11] 삼권분립 자체 역시도 로마의 삼두정치를 보고 권력을 세 명이 쪼개어 먹었는데도 왜 결국 일인독재로 흘렀을까에 대한 고찰 끝에 나왔다. 즉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삼권분립이다 뭐다 하는 것은 그냥 맘에 든다고 막 만든 제도는 아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삼권분립을 부르주아들의 갈라치기 전술이라 여겼고, 삼권분립 자체를 거부했다.[12] 사실, 소련에서 민주집중제라는 개념을 처음 주장한 것은 상기한 바대로 레닌이고, 그것을 체계화한 것은 트로츠키이며, 스탈린은 오히려 트로츠키를 공격하기 위해 민주집중제가 반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특히, 노동조합의 독립성 문제에서) 물론, 문제는 정작 트로츠키와 민주집중제의 독재적 성격을 먼저 깐 노동자 반대파 역시 스탈린에게 숙청당했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모든 악덕을 물려받아서, 더욱 심화시킨 인간이라는 점이지만... 다만 실제로 스탈린은 민주집중제를 혁파해 버리고 직선제 국회를 만들긴 한다.[13] 심지어 이때는 베이징 시경인 민중들과 같이 시위를 가기도 했고, 민중들도 시경과 경찰에 최대한 협조해서 마오쩌둥 초상화를 낙서하는 이를 스스로 잡아다가 시경에 넘기는가 하면 무장한 이들의 무장을 풀게 하여 무장을 반납하거나 공산당 없인 신중국 없다를 부르면서 공산당의 체제 자체를 옹호하기도 하였다.[14] 다만 러시아 대통령은 이미 전에도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국가원수로 존재했었다.[15] 정당국민보다는 당원의 의견을 잘 반영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에 부합한다. 국민경선제 등의 모순이 이런 부분이다. 정당이 추구하는 이념을 평당원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몇몇 유력자들이 국민 여론을 내세워 전횡을 일삼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런 여론은 그나마 지지동력이라도 있지 민주집중제식 운영은 여론마저도 못 얻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6] 참고로 두 신문 모두 한경오 이상인 대놓고 좌파계열 신문이다.[17] 전 세계적으로 좌파 정치 세력들은 직간접적으로 소련 시절과 그 이전 국제 혁명 운동, 단체와의 역사적 계승을 크게 중시한다. 90년대 탈냉전 시대 이후 국제 좌파 세력이 몰락을 겪는 와중에서도 명맥을 어찌 유지하여 2000년대 후반 세계적 경제 위기 후 여전히 활동하는 사회주의권은 미국식 주류 중도좌파 자유주의, 대중적 진보 정치와의 선을 확실하게 긋기 위해 저런 20세기 초중반 국제 사회주의 혁명 시절의 상징에 더 집착하는 면이 있고, 민주집중제나 노동자 정당 같은 용어를 강조하는 건 이런 정체성 확인의 일면이다.[18] 루소부터가 그랬다.[19] 3) 모든 당조직은 당의 로선과 정책을 무조건 옹호관철하며 하급당조직은 상급당조직의 결정을 의무적으로 집행한다. 4) 상급당조직은 하급당조직의 사업을 계통적으로 지도검열하며 하급당조직은 자기의 사업정형을 상급당조직에 정상적으로 보고한다.[20] ④ 당의 상급 조직은 일상적으로 하급 조직과 당원대중의 의견을 청취하여야 하며 그들이 제기한 문제를 제때에 해결하여야 한다. (중략) 당의 상급 조직과 하급 조직은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 지지하고 서로 감독하여야 한다. (후략)[21] 대표적으로 이목희 前 열린우리당 제5정책·조정위원장이 있다.[22] 기연수, 《러시아인의 의식구조와 政治文化》,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