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고토쿠 슈스이 [ruby(幸徳秋水, ruby=こうとく しゅうすい)] | Kōtoku Shūsui | |
본명 | 고토쿠 덴지로 幸徳傳次郞 | こうとくでんじろう |
출생 | 1871년 11월 5일 |
일본 제국 고치현 나카무라시 | |
사망 | 1911년 1월 24일 (향년 39세) |
일본 제국 도쿄시 | |
직업 | 언론인 |
성향 | 아나키즘, 공산주의, 고전적 급진주의, 초급진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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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사상가, 사회운동가.고치현 시만토시 출신으로,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을 수용하여 20세기 초 일본 국내의 공산주의 운동을 이끈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본명은 고토쿠 덴지로(幸徳傳次郞)이지만 1888년 11월부터 오사카에 있는 나카에 조민(中江兆民)의 집에 얹혀 살면서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고, 그가 지어준 아호 '슈스이(秋水)'를 이름처럼 사용하며 굳어졌다.
2. 생애
10대 시절부터 자유 민권 사상에 관심을 가져 나카에 조민의 제자가 되었고, 만조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중 러일전쟁 비전론을 주장하며 퇴사한 뒤 동료들과 주간 『평민신문』(平民新聞)을 창간했다.[1] 일본 최초로 공산당 선언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동아시아에 보급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프롤레타리아를 노동자로 번역한 것이 바로 이 사람이다.그의 정치 사상의 시작은 일본 사회민주당[2]이었고 실제로도 아나키스트라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자에 더 가까웠다.
유럽과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의 저작물 번역에 참여하여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저서를 일본어로 번역하였다.[3][4] 크로포트킨의 사상적 영향과 반 년간의 미국 생활로 인해 아나키스트로 변모했으며[5] 직접 행동론을 주장하기에 이르게 되었다.[6]
1910년 일본 경찰은 고토쿠를 포함한 26명이 메이지 천황을 암살하려고 했다며 그를 체포했다. 이 중 24명이 사형을 선고받고[7] 고토쿠는 애인 간노 스가코(管野須賀子、管野スガ)를 포함한 다른 11명의[8] 사회주의자와 함께 1911년 처형당했다. 이 사건을 흔히 고토쿠 사건(幸徳事件) 혹은 대역사건(大逆事件)[9]이라고 하며 덕분에 그는 종종 순교당한 아나키스트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고토쿠가 메이지 천황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경찰의 주장은 당시부터 증거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관련 자료를 다시 조사한 결과 체포된 26명 중 고작 4명만이 암살 계획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었음이 밝혀져 이를 토대로 재심이 청구되었으나 1967년에 최고재판소는 고토쿠에 대한 처벌 근거인 대역죄가 이미 폐지되었고 현재의 법 제도와 대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면소 결정을 내렸다.
고토쿠 슈스이가 처형당한 뒤 약 5년을 "겨울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의 일본에는 사회주의 운동 자체가 일시 정지되었기 때문이다.
3. 여담
안중근을 존경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 도련님의 시대 4권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안중근의 휘호가 담긴 부채를 유품으로 남기는 모습이 등장한다.4. 연관 기록물
-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
- 장광설
- 대한민국에는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임경화가 번역한 고토쿠 슈스이 선집 나는 사회주의자다가 출간되었다.
[1] 그가 아나키스트가 되고 나서도 계속해서 즐겨 썼던 신문이다. 이후 사회민주당 강제해산 당시 평민신문도 폐간당했다.[2] 현 일본 사민당과는 다르다. 1901년 카타야마 센 (片山潛)과 함께 창당한 당이다.[3] 엄밀히는 저널리스트이자 평론가인 쿠츠미 켓손(久津見蕨村)의 저작물을 번역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얼마 안 가서 빵의 쟁취의 번역을 시작으로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4]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 교류와 연대[5] 특히 그는 IWW에서 영향을 받았고 그의 노동자 직접행동론과 국가,정부의 부정은 여기서 크게 창안되었다.[6] 특히 그가 귀국한 후 사회민주당에서 슈스이 쪽에 직접행동파와 편산잠의 의회주의파가 맞붙었다가 직접행동파가 다수를 점했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 노동자 직접행동적 아나키즘의 세력이 꽤나 됐다는 것도 볼 수 있다. 물론 사회민주당은 정부에 의해서 해체됐다.[7] 당시 일본에서 천황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는 대역죄로써 사형만이 선고될 수 있었고 재판도 대심원(한국의 대법원 격)에서 1심으로 끝났다.[8] 이 중에는 우치야마 구도(内山愚童)란 이름의 불교 승려도 있었다. 사건과 연루되어 승적이 박탈되었다가 84년만인 1993년에 복권되었다.[9] 근대 일본에서는 천황과 황족에 위해를 가한 사건은 그냥 대역사건이라고 퉁쳐 불렀다. 박열의 다이쇼 천황 암살 기도나 난바 다이스케의 토라노몬 사건[10], 이봉창의 쇼와 천황 암살 기도 역시 일본에서는 대역사건이라고 칭해진다. 다만 현대 일본에서 대역사건이라고 하면 1910년의 고토쿠 사건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