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30 01:27:22

카를 카우츠키

<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카를 카우츠키
Karl Kautsky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rl_Kautsky_01.jpg
본명 카를 요한 카우츠키
Karl Johann Kautsky
출생 1854년 10월 16일
오스트리아 제국 프라하
사망 1938년 10월 17일 (향년 84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적
[[오스트리아 제국|]][[틀:국기|]][[틀:국기|]]→
[[독일 제국|]][[틀:국기|]][[틀:국기|]]→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바이마르 공화국
가족 가족관계
학력 빈 대학교 인문학부 (역사 / 경제학 / 재학 여부)
직업 철학자, 언론인
종교 무종교,(무신론),
정당

서명
파일:Karl_Kautsky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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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독일[1]마르크스주의자이자 언론인. 20세기 초반 마르크스주의에 관하여 최고의 권위자로 대우받았고, 별명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교황(Papst des Marxismus)이었다.

2. 생애

185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라하체코계 오스트리아인 중산층 예술가 가정에서 출생했다. 이후 으로 이주하여 빈 대학교에서 역사와 경제학을 전공하였으며, 이 시기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한편 공산주의의 대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도 교류한다. 엥겔스와 교류 과정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유작이었던 《잉여 가치론》(Theorien über den Mehrwert)을 편집하며 카우츠키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1891년에는 아우구스트 베벨,[2]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함께 사민당에어푸르트 강령을 작성하면서 당내 최고의 이론가로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지위는 1895년 엥겔스가 사망하면서 더욱 확고부동하게 됐으며, 1890년대 후반에는 스승이었던 베른슈타인이 민족주의 성향이 가미된 이른바 수정주의를 제창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중심 혁명 이론에 비판을 가하자 이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3]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이를 '전제 봉건적 차르에 대한 성전'으로 규정하고 찬성 입장을 보였으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반전적 성향으로 돌아섰고, 1917년에는 아예 사민당에서 탈당한다. 독일 혁명 이후 다시 사민당에 복당한 카우츠키는 1920년대 러시아 혁명의 본질을 놓고 레닌, 트로츠키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는 등 고령의 나이에도 활발히 집필 활동을 해나간다.[4] 하지만 1938년 나치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망명을 떠나야만 했고 그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난다. 카우츠키 본인은 나치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의 가족들은 그러지 못해서 아들이었던 베네딕트 카우츠키는 나치의 수용소에서 7년 동안 수감됐으며 아내 루이제는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하고 만다.

3. 여담

그의 저작 계급투쟁[5]은 어느 중국인 유학생에게 큰 영향을 미쳐 그가 공산당에 가입하게 만들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저우언라이다. 시대를 풍미한 이론가답게 저우언라이 말고도 이런 식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이 많다.

[1] 출생지는 오스트리아였지만 주로 활동한 것은 독일이었다.[2] 독일 사민당의 창당자.[3] 즉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계급도 계급이지만 독일 민족도 중요하다!'라고 할 수 있다.[4] 카우츠키는 폭력이 가미된 러시아 혁명에 별로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았으며, 또한 혁명 이후 소수의 볼셰비키가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물론 레닌도 그를 혁명을 이룰 생각이 없는 계급배반자라며 신랄하게 깠다.[5] 우리나라에서 흔히 에어푸르트 강령, 에르푸르트 강령으로 번역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