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 Partito Comunista Italiano (PCI) | |
영문 명칭 | Italian Communist Party |
한글 명칭 | 이탈리아 공산당 |
창당일 | 1921년 1월 21일 |
해산일 | 1991년 2월 3일 |
당사 주소 | 이탈리아 로마 Via delle Botteghe Oscure 4 |
회원수 | 2,252,446명 (1947년) 989,708명 (1991년) |
청년조직 | 이탈리아 공산주의 청년동맹 |
기관지 | l'Unità |
서기장 | 아마데오 보르디가 안토니오 그람시 루제로 그리에코 팔미로 톨리아티 루이지 롱고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알레산드로 나타 아킬레 오케토 |
당 색 | 적색 (#FF0000, Red) |
스펙트럼 | 극좌 (1970년대 이전) 좌익 (1970년대 이후) |
이념 |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1970년대 이전) 수정주의 민주사회주의 유럽공산주의 (1970년대부터) |
당기 | |
분당 이전 | 이탈리아 사회당 |
승계 정당 | 좌파민주당(다수파) 공산주의 재건당(소수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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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0년대의 이탈리아 공산당 선거 광고[1][2]
1921년부터 1991년까지 있었던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정당. 프랑스 공산당과 더불어 NATO 가입 국가의 공산당 중에서는 가장 성공한 공산당이었다. 냉전은 물론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도 서유럽에서 가장 큰 공산당 중 하나이자 반파시즘 레지스탕스의 주역이었으며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틀어 가장 오래됐고 성공적인 지하 투쟁 활동 경력을 자랑해 코민테른에서도 입지가 큰 세력이었다.
2. 역사
2.1. 창당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이탈리아 사회당 내부 계파갈등이 극에 달했던 1921년, 안토니오 그람시, 팔미로 톨리아티[3], 아마데오 보르디가, 안젤로 타스카, 니콜라 봄바치[4] 등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리보르노에서 열린 사회당 17차 전당대회 중 탈당을 선언하고 창당했다.[5] 같은 해 5월에 치러진 이탈리아 왕국 총선에서 16명을 당선시키면서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국 1당제 원칙에 의거해 사회당과의 재결합을 종용한 소련과 알력을 빚고 로마 진군으로 내각을 장악한 베니토 무솔리니[6]의 국가 파시스트당에 맞서 강경 투쟁 노선을 걷다가 1926년에 불법화되는 등 오랜 암흑기를 겪게 되었다.[7] 이후 팔미로 톨리아티가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안티파 지하활동으로 명맥을 유지했다.2.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당 해산까지
1943년 무솔리니가 연합국에 체포되고 국가 파시스트당이 몰락하면서 재합법화되었고 1946년 연립정부에서 톨리아티 서기장이 법무부 장관으로 입각하여 국가 파시스트당 부역자들 및 나치 독일의 괴뢰 정권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을 주도하고 1946년 국민투표를 통해 당론인 왕정 폐지와 공화제를 관철시키면서 지지율을 급속도로 높이면서 원내3당으로 약진했고 이탈리아의 토지개혁에도 공산당의 입김이 거세게 들어가 우익들은 마피아와 연합하여 공산당을 견제했는데 그 와중에 많은 폭력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1947년에는 미국의 압력에 의해 사회당과 함께 거국내각에서 축출되었으나 1948년 총선에서 사회당을 제치고 원내2당으로 약진하여 이탈리아 좌파 진영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해산될 때까지 기독교민주당 다음 가는 원내2당+제1야당 위치를 고수했다. 지역적으로는 볼로냐를 중심으로 에밀리아로마냐와 토스카나, 움브리아 등의 중부 이탈리아, 북부의 일부 공업 도시들을 지지기반으로 했다. 하지만 공산당의 집권을 두려워한 이탈리아의 기성정당들과 미국의 보이지 않는 견제로 인해 공화국 수립 이후 연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8]
이 뜨뜻미지근한 형편을 극복하기 위해 토지개혁, 종교의 자유 인정을 통해 보수적 농민 계급을 포용하자는 '이탈리아의 사회주의로의 길' 강령을 채택하기도 하고(1956년) 프라하의 봄 이후 당권을 잡은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서기장, 조르조 아멘돌라 정책위원장 휘하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폐기하고 유럽공산주의를 강령으로 채택하는 국민정당으로의 변신을 선언하는 등[9]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정권교체의 호기라는 평이 많았던 1976년 총선에서 간발의 차로 2위에 머무르면서 끝내 좌절되었다.
3. 이후
1996년 좌파민주당이 과거 앙숙이었던 구 기민당 좌파 및 사회당 정치인들과 함께 '올리브 나무'를 결성해 같은 해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둬 공산당 시절 이루지 못했던 수권정당의 꿈을 이뤘고 1998년 9월 공산당 출신의 마시모 달레마[12]가 로마노 프로디의 후임으로 총리에 취임했으며 전년도에 실시된 프랑스 총선에서 사회당-공산당 연대가 승리해 좌우동거내각을 형성한 데 이어 전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2006년 공산당 원내대표였던 조르조 나폴리타노가 상하원 합동투표에서 이탈리아 대통령 직에 올라 2015년까지 재임했다.
공산당 기관지 "우니타(L'Unità)"는 후신인 좌파민주당→이탈리아 민주당의 기관지로 2017년까지 발행되었다가 폐간되었다.
4. 출신 인물
4.1. 역대 서기장
- 초대: 아마데오 보르디가 (1921년~1923년)
- 2대: 안토니오 그람시 (1924년~1926년)
- 대행: 팔미로 톨리아티 (1926년~1934년)
- 3대: 루제로 그리에코 (1934년~1938년)
- 4대: 팔미로 톨리아티 (1938년~1964년)
- 5대: 루이지 롱고 (1964년~1972년)
- 6대: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1972년~1984년)
- 7대: 알레산드로 나타 (1984년~1988년)
- 8대: 아킬레 오케토 (1988년~1991년)
4.2. 기타
5. 역대 선거 결과
5.1. 이탈리아 왕국 하원
1921년 15/535 4.6%1924년 19/535 3.7%
5.2. 이탈리아 제헌의회
1946년 104/556 18.9%[17]5.3. 이탈리아 의회
1948년 상원 50/237 30.8% 하원 130/574 31.0%[18]1953년 상원 56/237 22.6% 하원 143/590 22.6%
1958년 상원 60/246 22.2% 하원 140/596 22.7%
1963년 상원 84/315 25.2% 하원 166/630 25.3%
1968년 상원 101/315 30.0% 하원 177/630 26.9%
1972년 상원 94/315 28.1% 하원 179/630 27.1%
1976년 상원 116/315 33.8% 하원 228/630 34.4%[19]
1979년 상원 109/315 31.5% 하원 201/630 30.4%
1983년 상원 107/315 30.8% 하원 198/630 29.9%
1987년 상원 101/315 28.3% 하원 177/630 26.6%
5.4. 유럽의회 선거
1979년 24/81 29.6%1984년 27/81 33.3%
1989년 22/81 27.6%
6. 관련 문서
- 공산당
- 이탈리아/정치
-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 이탈리아 사회당(1892년)
- 안토니오 그람시
- 유럽공산주의
-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 좌파민주당(1991년)
- 공산주의 재건당
- 민주당(이탈리아)
- 이탈리아 좌파
- 페포네 - 설정상 이 당 당원이다.
[1] 공산당 로고에 X표를 긋는 게 의아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상당수 유럽 국가들에서는 투표용지에 X표를 치는 것이 기표 방법이기 때문이다.[2]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깐 기민당과 공산당의 후신들인 이탈리아 인민당, 라 마르게리타, 1991년 좌파민주당, 1998년 좌파민주당은 훗날 한솥밥을 먹게 된다.[3] 나중에 소련이 피아트와의 제휴로 볼가 강 유역에 VAZ 자동차 공장을 짓자 도시 이름을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톨리야티로 지었다.[4] 이후 파시스트로 전향.[5] 전당대회를 하는 중 집단탈당을 선언한 후 같은 건물의 바로 옆방에서 창당식을 가졌다.[6] 참고로 무솔리니도 전직 사회당 동지였으며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와 접선한 적이 있다.[7] 안토니오 그람시가 구속, 수감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8] 이때 이탈리아 사회당, 이탈리아 민주사회당 같은 사민주의 정당들도 공산당을 견제했다. 사실 원래 사민주의 정당과 공산당은 사이가 안좋다. 사민주의 정당은 대체로 반소, 반공, 수정주의 노선을 타고 공산당은 그런 사민주의 정당을 ‘사회파시즘’이라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예외가 있다면 일본의 사례인데 일본사회당 안에 공산당이 온건해 보일 정도로 반제국주의,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타는 분파가 있어 타국의 사민주의-공산당 관계와 조금 다른 형태를 띄었다.[9] 이때 베를링구에르 서기장이 자신은 가톨릭 신자라고 커밍아웃하고 집권 시 NATO 탈퇴 당론을 폐기하는 등 공산주의와 상당히 거리를 뒀다.[10] 그러나 역대 최대득표에 최다의석이자 단독 개헌저지선인 228석을 확보했다. 기민당 좌파(기민당 내부의 친사회주의적 중도~중도좌파 파벌) 수장이었던 알도 모로 이탈리아 총리가 언론 인터뷰를 통해 공산당과의 거국내각 결성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집권 후 첫 수권정당이 될 가능성이 있었으나 붉은 여단에 의해 모로 총리가 암살당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11] 이 시절 이탈리아 공산당의 위기는 난니 모레티의 1989년 자전적인 코미디 빨간 비둘기에서 어느 정도 다뤄진다. 소련은 하향세고 딱히 대안이라고 할 게 없어서 방송 토론회 같은 데 나가서 얘기할 때마다 암울했다고.[12] 좌파민주당 소속[13] 창당 멤버[14] 베를링구에르 서기장과 함께 유럽공산주의로의 노선 전환을 주도한 인물[15] 공산당 해산 이후 좌파민주당 소속으로 총리를 지냈다.[16] 공산당 해산 이후 좌파민주당 소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 상징적 국가원수로서 중립을 지키기 위해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17] 기독교민주당, 사회당에 이은 원내3당으로 약진[18] 사회당과 합동으로 선거를 치렀고 사상 최초로 사회당을 제치는 데 성공하여 원내2당으로 약진했다.[19] 역대 최고 득표율, 최다 의석 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