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5:59:19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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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CC0000> 개인 <colbgcolor=#fff,#2d2f34>생애 · 엘레나 차우셰스쿠 · 가족
행적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 · 루마니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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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상세4. 부작용5. 총평 및 결론6. 관련 작품7. 관련 문서

1. 개요

루마니아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집권 초반인 1967년부터 실각당한 1989년까지 시행한 인구 증가 정책.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이라고도 자주 불리며, 영어로는 'Decree 770(법령 제770호)'이라 불린다. 후속 대책 없는 강제적인 인구 정책의 부작용을 극한으로 보여줬기 때문에 후대의 많은 지탄을 받고 있다.

2. 배경

파일:루마니아의 인구.png
2020년 루마니아의 인구 피라미드. 53세(2020년 기준 1967년생)부터 인구가 갑자기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파일:루마니아의 출산율과 사망률.png
1950년부터 2008년까지 루마니아의 출생률과 사망률 그래프로 1967년에 매우 급격히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산율 증가 정책 자체는 당시에도 프랑스서독, 스웨덴, 덴마크 등 서구권은 물론이고 소련이나 동독, 불가리아, 알바니아, 헝가리 등 동구권에서도 널리 행해졌으며 현재도 많은 나라에서 출산 장려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만큼 시행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임대아파트와 보조금 의존도를 이용하는 영국 같은 경우도 있으니 더욱 그렇다. 임대아파트와 보조금이라고 해서 좋아 보일지 몰라도 영국의 주택은 임대아파트 비중이 높은 데다 임대아파트와 보조금은 출산이 이루어져야 받을 수 있다. 또한 영국에서는 거주 주택이 없을 경우 취업도 되지 않는다. 보호자도 없는데 출산할 수단까지 막히면 그냥 인생 종쳤다고 봐야 한다.[1] 출산하는 대로 지원해 주는 출산장려책을 강력히 편 국가들도 출산율이 크게 늘지 않았다는 점을 보아도 더욱 그렇다.

하지만 차우셰스쿠가 시행한 것은 출산을 장려하는게 아니라 출산의 의무화였고 당시 루마니아의 인구 상황이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기에 다른 나라들의 출산 정책과는 전혀 다르다. 특히 그 어느 나라도 차우셰스쿠 집권기의 루마니아처럼 맛이 간 수준으로 시행하지는 않았으며 현재도 하지 않고 있다. 산아정책을 강제적으로 다스린다는 점에서 중국의 계획생육정책을 떠올리게 함에도 이쪽을 훨씬 정상적으로 보이게 해 줄 정도니[2] 그 끔찍함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짓을 차우셰스쿠는 집권 직후인 1967년에 실시했다. 초창기의 차우셰스쿠는 집권 후기에 비해 그나마 이성적인 정치를 했다는 평을 받는데 그런 초창기 차우셰스쿠의 대표 정책조차 출산 강제 정책이었으니 얼마나 차우셰스쿠가 추잡한 지도자였는지 알 만하다.

동시기 서구권의 대다수 국가들에서는 아이를 많이 낳으면 출산 축하금을 주고 어느 정도 고용도 이뤄졌다.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후달린 동구권 국가들의 경우에는 육아용품이 다소 부족하긴 했지만 적어도 보육시설들(탁아소, 유치원, 학교)은 제때제때 확충하여 육아 부담을 덜어 준 데다 아이가 학교 과정을 전부 마치면 취업을 시켜 주었고 웬만큼 잘못이나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평생 직장은 보장해 준 데다가 결혼하면 아파트도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등의 노력은 했다.[3] 서구에서 출산율이 늘어난 국가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비혼 출산에 관대한 곳이라는 사실이다. 영국이건 프랑스건 미국이건 북유럽이건 복지는 천차만별이지만 비혼 출산을 국가 차원에서 권하거나 지원금을 주고 기본 양육만 알아서 하도록 하고 그 이상은 공교육에 의존하게 한 점은 똑같다. 반대로 독일이나 일본, 이탈리아는 국가 차원에서 비혼 출산보다는 부부 출산을 권장했고 가정과 부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차우셰스쿠는 이런 온건한 대책을 내놓아서 출산율을 증가시키지 않고 무식하게 단순히 일정 수 이상의 아이를 낳도록 강제하면 출산율이 쉽게 늘어날 것이라는 식으로 정책을 추진하여 심한 폐단을 가져온 점에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4] 사실 이 당시 루마니아가 외채 때문에 온건한 대책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강경책 자체가 비난받을지언정 온건한 대책을 내놓지 않은 걸 비난할 수는 없다. 물론 출산율이라는 게 정말 양육에 적합한 조건이 형성되더라도 개인들의 인식에 따라 낮아지는 경우가 매우 흔하지만, 서구 선진국이 이걸 몰라서 지원책에 집중하겠는가?

특히 '아이를 가질지 말지 결정할 자유'를 박탈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심각한 인권침해이기 때문에 강압적 정책을 실시하지 않는다. 2400여 년 전 월나라에서 구천이 인구를 늘려 오나라에 맞서려고 오늘날로 치면 출산 장려 정책을 폈는데 여자가 17세, 남자가 20세가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으면 부모를 처벌했다. 반면 아기를 낳으면 여자아이면 술 두 병에 돼지고기, 남자아이면 술 두 병에 개고기, 쌍둥이면 유모를 붙여 주고 세 쌍둥이면 식량을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법으로 일정 나이가 되면 결혼시키도록 했으며 실제로 국가에서(주로 사또가 나서서) 노총각·노처녀를 찾아내 결혼시키기도 했다.[5] 또한 '수령칠사'라고 하는 수령이 해야 할 7가지 임무 중 하나가 호구를 늘릴 것(=인구를 늘릴 것)이었다.

이처럼 2400년 전 중국에서도 강경책과 동시에 온건책을 썼고 조선시대에조차 백성들에게 닦달하긴 했지만 동시에 수령에게도 책임을 지웠다. 하다못해 혼란기였던 중국 삼국시대에도 위나라세병제라 하여 토지를 주고 군인 신분도 부여 및 세습하여 가정을 유지할 경제력을 가지게 하였다. 이와 비교해 보면 현대에 살았던 차우셰스쿠의 정책은 이들보다도 못한 셈이 된다. 물론 차우셰스쿠도 보상을 주긴 했는데 후술하겠지만 4명을 낳아야 주는 게 어디 제대로 주는 건가? 더군다나 고대 국가에서는 국가가 까라고 하면 백성은 까야하는 수준이었다.

동유럽 혁명 이후 구 공산권 국가들이 이러한 탁아소를 단순히 공산주의 체제의 유산으로 여기는 바람에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서 출산율 하락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이 많다. 출산율이 급감하자 뒤늦게 탁아소 시설 확충에 신경을 쓰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출산율이 다소 회복되었지만 1980년대 당시의 출산율 회복은 요원한 일이다. 러시아의 경우 1990년대 말에 출산율이 1명대 초반으로 떨어졌다가 푸틴 때 들어서 다시 상승세를 타서 2014년 기준으로 1.7명대를 기록했다. 불가리아나 체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도 마찬가지의 상황이긴 한데, 2010년대 들어서 경기침체의 여파로 주춤해졌다.

3. 상세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는 루마니아는 전쟁 전에 비하면 출산율이 적었기는 했지만, 어쨌든 출산율이 인구대체수준을 훨씬 웃돌았기 때문에 인구는 안정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55년을 기점으로 출산율이 저하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마니아 당국은 인구증가가 계속될것이라고 여겨서 1957년에 낙태를 합법화했는데, 1962년에는 합계 출산율 2.1명대가 붕괴되어, 이 당시 기준으로는 심각한 저출산 사회가 되었고, 1964년에 출산율 2명대도 붕괴되어있었다. 당시 루마니아에서는 전체 임신의 무려 4/5가 낙태로 이어질 정도로 낙태율이 높았다. 이 정도면 인구 증가 이전에 여성 건강 보호 측면에서도 무분별한 낙태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긴 했다. 링크 참조

이러한 출산율 저하현상이 장기화되어가자 루마니아 당국자들은 이러한 저출산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루마니아 당국자들은 루마니아의 출산율이 저하된것이 1957년 낙태합법화 정책이라고 생각하면서 낙태를 다시 불법화하는 방안을 추진하였고, 1965년에 집권한 차우셰스쿠도 이러한 피임불법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1966년 10월 1일자로 낙태와 피임약을 불법으로 지정하였다.

처음에는 낙태불법화는 엄청난 출산율 상승 효과를 가져왔다. 1967년 루마니아 출산율은 3.66명을 기록하여 1966년의 1.90명의 두배에 가까운 수치를 기록하여, 전쟁전인 1939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였으며, 베이비붐은 1969년경까지 유지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가치관은 달라져서 생긴 일은 아니었던데다가, 도시에 주거하던 사람들은 많은 자녀를 낳게 되는것에 경제적인 부담을 지녔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우회적으로 피임약을 구입하는 등 피임법을 찾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1970년에 다시 출산율은 3명 이하로 떨어졌다. 이렇게 다시금 출산율이 감소되자, 차우셰스쿠는 부부간의 정상적인 성관계 횟수를 일주일에 3~4회로 규정하고는 40세 이하의 모든 여성은 무조건 '최소한' 자녀 넷을 의무로 두라강요를 했다. 거기다가 후에는 이를 자녀 다섯 의무로 늘리기까지 했다. 물론 반발이 커서 이것이 지켜질 리 없었고 이에 차우세스쿠는 '금욕세'라는 항목을 신설해 자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세금을 추가로 부과해 버렸다. 여기에 일부러 임신을 회피하는지 감시하고자 월경 경찰을 운용해 감시했다. 이때 월경 경찰은 직장을 돌아다니며 여성들의 임신을 독려하고 임신한 여성에게는 표창을, 임신하지 않은 여성에게는 강요와 세금까지 물리며 압박을 하였다. 그리고 루마니아의 여성들은 3개월마다 한 번씩 임신했는지 검사를 받아야 했고 만약 그 여성들이 임신을 한 게 밝혀졌음에도 출산을 안 했다면 기소를 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강제로 정기적인 신체검진을 하여 임신 여부를 확인하였는데, 문제는 이 신체검진이 여성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벌거벗고 산부인과로 들어가 한번에 진찰받는 방식이었다. 즉, 사람을 가축과 같이 취급한 것이다. 그야말로 여성 인권 유린에다 독재 정권의 앞잡이 정책이었다. 그냥 밑의 세금만 했어도 루마니아 국민들의 불만은 이 정도까지 폭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아예 40세 이하의 여성에게 아이를 적어도 4명 이상을 강제로 낳도록 했으며 1977년부터는 만약 할당된 아이 수를 채우지 못하면 매월마다 무거운 세금을 물렸다. 기가 막힌 사실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장애인, 불임인 여자, 심지어 성불구자에게까지도 세금을 물렸다는 것이다.[6]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아이를 입양한다고 빼주는 것도 없었다. 거기에 적발되면 무려 연봉의 20~30% 정도의 돈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한마디로 이 정책은 애초부터 인권 따위는 완전히 무시하는 데다 닥치고 출산만을 강요하지 그에 필요한 사회적 지원도 전무했고 효과도 전혀 없는 누가 봐도 망할 게 뻔히 보이는 엉터리 정책이었다.

그러면서도 고위 간부의 부인들은 강제 출산과 징세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실제로 차우셰스쿠 부부도 자식이 셋밖에 없었다.

다만 강간과 근친상간으로 인해 임신한 아이는 예외적으로 낙태가 허용되었다.

4. 부작용

먼저 법이 시행되면서 루마니아는 첫 4년 동안 여성 1인당 출산율은 두 배나 증가했다. 그러나 증가는 일시적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데 충분한 경제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의사에게 뇌물을 건네 낙태 수술이 가능한 거짓 진단명을 받아냈다. 그리고 의사의 도움 없이 유산하기 위해 위험한 방법들을 택하기도 했다. 독극물을 복용하거나, 산파가 소독되지 않은 도구로 시술하거나, 부푼 배에 충격을 가하는 등 태아는 물론이거니와 산모의 목숨조차 보장받지 못할 방법들이 횡행했다. 결국 출산율은 1985년에 법이 시행되기 전으로 복귀했다.

또 경제적으로 궁핍한 여성들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낳은 아기들을 방치하거나 시설에 맡기는 아동 유기가 급증했다. 열악한 시설에서 아이들은 영양 결핍에 시달리게 됐고, 이는 영유아사망률 증가로 이어졌다.
심지어 유아사망률뿐 아니라 산모의 사망률[7]도 급증했다. 의사로부터 안전한 수술을 받을 수 없었던 임산부들은 불법 시술을 택했고 이로 인해 여러 합병증을 앓으며 매년 500여 명이 출혈과 감염으로 사망했다. 특히 낙태금지법이 시행되기 이전인 1966년에 비해 1983년 루마니아 산모의 사망률은 7배 높아졌다. 1989년 12월 혁명으로 낙태금지법이 철폐되자 1990년 루마니아 산모의 사망률은 이전의 절반으로 감소했다.

특히 부모가 키운다 해도 원하지 않는 임신이나 사이 나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학대와 무관심에 방치되어 비참한 삶을 살았고 후에 이 아이들은 부모가 원하지도 않는데 태어나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지게 되어 사회적 문제로 성장하였다. 무엇보다 보육 시설과 육아 시설, 소아과 의사가 부족한 상황에 애만 낳다 보니 영아 사망률이 145%나 증가하여 실질적인 인구증가율은 희생에 비해 높지 않았다.

이에 차우셰스쿠는 실질적인 보건 환경을 개선시켜 전반적인 상황의 호전을 유도하지 않고 단순히 눈에 보이는 수치만을 낮추는 무식하고 일차원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바로 생후 한 달이 지난(=죽지 않고 살아남은) 아이들에게만 출생신고를 받아주는 것이다. 정작 사망하는 아이들의 수는 똑같은데 살아남은 아이들만 출생신고를 받아주니 금방 죽는 아이들은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인정되지 않아 사망신고도 되지 않았고, 사망자들의 사망신고는 안 되면서 살아남은 아이들의 출생신고만 받아주니 문서상의 사망율 숫자는 줄어든다는 쓰레기만도 못한 역발상을 정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또한 부모 입장에서는 출생 신고가 안 된 만큼 더 낳아야 하므로 그 부담이 더욱 더 악화되었고 어쩔 수 없이 수를 채우기 위해 아기를 낳느라 실제 인구 수는 더 증가했다.

이렇게 보건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루마니아는 국민의 특정 연령층 전체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게 되었다. 장애아로 태어났다거나 부모가 키울 상황이나 능력이 안되는 등의 이유로 시설로 버려지는 아이들도 늘게 되었고 보호시설에 보내진 아이들은 방치되어 쇠약해지거나 죽었다.[8] 게다가 차우셰스쿠는 쇠약해진 아이들에게 체력을 강화하겠단 목적으로 일괄적 수혈을 지시하였는데 문제는 검사를 제대로 안 해서 이 아이들에게 대규모로 에이즈를 감염시키는 등 악순환만 계속 이어졌다.

세월이 흘러 태어난 많은 아이가 어느덧 성인이 되었지만 대부분 성장 상태가 건전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많은 경우에 탈선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이들이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1980년대 루마니아는 외채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긴축정책에 돌입하면서, 생활수준이 하락하였으며, 결국 이들은 사회에 진입하면서 저복지와 저임금에 시달리게 되었다. 당연히 이들은 차우셰스쿠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지니게 되었고, 이 세대의 주도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며 그 시위가 차우셰스쿠 정권을 무너트렸다. 결국에는 무리한 인구정책이 자기를 몰아낼 시위대를 직접 키운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그래서 1967~1969년도의 베이비붐 세대들이 혁명을 주도했다는 평이 나온다. 다만 비슷하게 1970년대에 베이비붐이 분 체코슬로바키아는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단행했던데다가,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북부지역은 1970년대에도 출산율이 2명대 안팍 수준에 머물렀는데도 아예 내전으로 나라가 분리되었기 때문에, 딱히 베이비붐이 없었더라도 긴축의 장기화로 사람들이 위낙 화나있는 상태였고, 차우셰스쿠가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혁명은 결국 일어났을것이라는 평가가 있기는 하다.

아이러니한 점은 차우셰스쿠에게 가장 충성했던 세쿠리타테 역시 이 세대에서 차출된 아이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세쿠리타테에 입대한 고아들도 정규군보다 더 혹독한 훈련을 견뎌내야 했다. 게다가 민주화 직후에는 '차우셰스쿠의 충견들'이란 이유로 시민들 혹은 정규군들에게 린치당하거나 변화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범죄자가 되던지, 아니면 자살하는 등 대다수는 말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일부 운 좋은 소수만이 민주화 이후에 정상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어느 쪽에 속하던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으로 태어난 고아들은 대부분 인생이 순탄치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차우셰스쿠 정권 붕괴 이후로 루마니아의 경제는 순탄치 않았고, 인플레이션과 구조조정에 시달려야했기 때문에, 이들 세대는 청년실업으로 고통받아야했으며, 많은 이들은 고임금 일자리를 찾아서 서유럽으로 이주하곤 했다. 또한 이들 중 일부는 더 큰 돈을 벌기 위한 성매매와 마약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이 사회주도층이었던 시대는 루마니아의 출산율이 가장 낮았던 시대였다. 이 때문에 늙어서는 루마니아의 연금을 낭비하는 세대라는 조롱을 윗세대와 아랫세대들로부터 받고있기도 하는 등 루마니아에서는 낀 세대로 악명이 있다.

다만 루마니아의 출산율은 2002년에 1.23명으로 최저치를 기록한 이래로 반등하는데 성공하였고, 2018~2021년 동안은 출산율이 1.8명대까지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1990년과 비슷한 수준을 기록하였다. 물론 루마니아도 2022년부터 인플레이션의 여파를 세게 맞이하면서 2023년에 출산율이 1.5명대 수준으로 다시 떨어졌다.

거기에 이 정책의 여파로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 일부는 무려 아프가니스탄소말리아까지 수출되어 강제적으로 소년병이 되어 어린 나이에 전쟁의 참상 속으로 던져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대책 없는 무의미한 출산 정책이 불러온 참극이었다.

5. 총평 및 결론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은 어린이들을 인격을 가진 인격체가 아닌 공장에서 나오는 생산품처럼 바라본 것과도 같은 인명경시의 극한을 보여준 정책이었다. 당시 루마니아가 이런 정책을 반드시 수용해야 할 정도로 대안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루마니아 내에서도 서유럽식 출산 장려 정책이나 이민을 받아주는 등 여러 방법이 논의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우셰스쿠는 편하게만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출산을 강요하는 가장 극단적인 길을 택했고 무엇보다 출생아들에 대한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은 장기적으로 루마니아의 인구를 증가시키기는커녕 되려 폭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실제로 차우셰스쿠가 집권하기 직전보다 이후의 루마니아 인구가 더 적다.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이집트, 나이지리아처럼 인구의 질도 나쁘고 부양도 불가능한데 머릿수만 많으면 차라리 저출산만 못하다.[9] 다만, 이 인구의 질은 국가 입장에서나 나쁜 것이지 부모 입장에서는 노동력 확충이기 때문에 좋으면 좋았지 절대 나쁘지 않다. 급작스러운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노동 인구가 늘어나는 효과로 경제성장을 거둔 국가가 출산 기피에 따른 인구 감소로 평균 수명 증가와 맞물려 급격히 고령화사회가 되고 국가 역량이 크게 약화된 사례도 많다. 당장 현대의 한국이 그런 예다. 차우셰스쿠가 출산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장려하는 정책, 즉 자녀를 두 명 선에서 유지하고 적극으로 지원하거나 저소득층 가정은 두 명 이하라도 돕는 등 현실에 부합한 인구 증가 방책을 수립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우셰스쿠는 식량의 과도한 수출로 외화는 많이 벌면서도 되려 이것을 산업 발전이나 복지 증진에 쓰기는커녕 본인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인민궁전 건설, 친위대 운영에 낭비했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문서 참조. 심지어 성인이 된 베이비붐 세대를 제대로 된 노동 인력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국가 경제를 증진시키는 허울 좋은 목적마저 달성하지 못하게 되었다. 강제로 출산을 시키는 것도 매우 반인륜적인 행위이지만 인구를 만들어 놓고도 제 스스로 버려서 노동 인구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더욱이 부모의 자녀 양육 지원도 소홀했다. 당시 루마니아의 서민층 부모들이 감당 가능한 자녀는 아무리 많아 봤자 둘에서 셋 정도였는데 자녀를 낳기 전에는 더 낳아 봐야 혜택이 없어서 양육 부담을 감당할 수 없어 버려지는 아이나 불법 낙태가 많았다. 특히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은 국민에게 자녀를 많이 낳게 유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권을 완전히 무시하는 방법으로 시행되었기에 비난받아 마땅하다. 최소한 출산 관리 과정 등 일부만큼은 어떻게든 지원이 필요했음에도 그조차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절대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최근 선진국이나 상위권 개발도상국, 중진국에서 이뤄지는 저출산은 부모들이 개인을 포기한다는 전제를 깔면 단순한 양육 자체를 위한 경제력은 있지만 포기하는 경우가 다수다. 이는 부모 세대와 다른 현실을 수용하지 않는 사회적 인식이 근본 문제인지라 결국 세대가 교체되어야 해결 가능하다. 실제로 선진국들 중 출산율이 그나마 높은 영국은 이미 인식이 한 번 바뀌었고 독일, 이탈리아처럼 아직 변화가 진행 중인 국가는 하나같이 출산율이 낮다.

이렇게 관리가 안 되다 보니 루마니아에선 이 시기에 태어나 버려진 많은 아이들이 아기 때부터 고아원에서 자랐는데, 실제로 루마니아에서는 차우셰스쿠 정권 후반기에는 무려 15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독신세 때문에 4명 이상 아이를 낳은 집은 세금이 반대로 줄어들어 복지가 발달된 영국, 스웨덴에 비해 예산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수용된 아기들보다 고아원 직원 수가 현저하게 적을 수밖에 없어서 당시 루마니아의 고아원들은 음식, 담요, 옷은 물론이고 필수적인 의약품도 거의 없다시피했을 정도였으며 이런 비위생적 환경 속에서 제대로 옷도 못 입으며 지낸 아이들은 온갖 질병에 시달렸고 심지어 당시 루마니아의 고아원들은 아기 침대에 끈으로 우유병만 매달아 두는 등 아기들을 방임 수준으로 놔뒀다고 한다. 당시 루마니아 고아원의 실태와 관련한 참고자료

이런 상황이니 고아원의 아이들이 제대로 보살핌과 사랑을 받으며 자랄 리가 없었는데 이 때문에 당시 루마니아에는 두세 살이 될 때까지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이들이 수천 명이나 있었다. 게다가 루마니아의 의사들은 아이들의 영양실조를 조금이라도 낫게 하려고 수혈을 했지만 하필이면 이 수혈에 쓴 혈액이 사전에 검사를 안 한 혈액이어서 수천 명의 아이들이 에이즈에 감염되었다. 이렇게 차우셰스쿠가 집권한 24년 동안 루마니아의 고아원에서 사망한 어린이들은 무려 1만 5천~2만 명으로 추산된다.

참고로 아기에겐 보호자의 작은 관심조차 후에 큰 결과로 나타나는데 그 일례로 아기가 정상적으로 크려면 보호자와 어떤 형태건 신체적인 접촉을 하면서 가까이 지내야 정신적 안정을 유지한다는 것이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의 공통된 의견이며 아기가 일정 시간 이상 울게 방치하면 신경계에 손상이 올 수 있다.[10] 이는 루마니아에서 큰 아이들은 물론 타국에 입양된 아이들까지 똑같이 겪었으며 나중에야 밝혀진 이 사실은 루마니아 국내와 서방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 사건은 소아 정신 보건 연구와 대학 기초 정신 보건 수업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될 정도다. 차우셰스쿠의 이름은 빠져도 이 내용은 꼭 언급된다.

정작 차우셰스쿠는 이런 정책을 실시했음에도 루마니아의 인구는 목표만큼(?) 제대로 늘리지도 못했다. 실제로 차우셰스쿠가 집권한 1965년 기준으로 루마니아의 인구가 1,912만 명이었는데 차우셰스쿠가 몰락한 1989년 기준으로 루마니아의 인구는 2,316만 명으로, 이는 이 정책을 실시하던 24년 동안 루마니아의 평균 인구증가율이 0.8%였다는 뜻이다. 결국 이 정책은 이렇게 양산한 아이들의 인생도 망치고 '인구 증가'라는 목표(?)도 제대로 못 이룬 백해무익하기 이를 데 없는 정책이었던 셈이다.

루마니아의 형제국가인 몰도바에서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훨씬 온건한 방식으로 출산장려정책을 펼쳤고, 농촌인구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몰도바의 인구증가율은 루마니아와 비슷한 수준이었고, 1980년대 들어서는 불경기에 직면한 루마니아보다 출산율이 크게 높았으며, 소련 서부에서 가장 출산율이 높은 SSR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물론 사회적인 부작용까지 감안한다면 몰도바가 루마니아보다 훨씬 건전한 방식으로 인구증가에 성공한 셈이다. 다만 몰도바도 1990년대에 경제가 파탄상태에 직면하면서 심각한 인구감소와 저출산 문제에 시달리고 있으며, 인구유출은 지금까지도 몰도바의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남아있다.

참고로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과 비슷한 정책을 실시한 독재자는 차우셰스쿠 외에도 폴 포트도 있었는데, 실제로 폴 포트도 "15년 안에 캄보디아 인구를 8백만 명에서 2천만 명으로 늘려야 한다.", "여성은 아기를 낳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므로 국가를 위해 아이를 낳는 것이 여성의 임무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며 인구를 늘려야 한다는 명목으로 여성의 배란기에 강제적으로 남편과의 동침을 강요하며 한 여성이 최소 3~5명의 자식들을 낳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1] 이는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은 비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위정자들 내지 지배 계층이 피지배층들에게만 적용시켜 실시하는 정책이란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참고로 이 정책을 실제로 입안한 사람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의 영부인이던 엘레나 차우셰스쿠[12]였다. 사실 차우셰스쿠의 정책들은 엘레나가 입안한 것을 니콜라에가 집행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고 한다.

6. 관련 작품

일본 만화마스터 키튼블랙 라군에도 관련 내용이 나온다. 블랙 라군의 헨젤과 그레텔이 그 예이다.

이 정책의 폐해와 당시 상황은 크리스티안 문주가 감독한 루마니아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2007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이 잘 다룬다. 임신한 여자와 그 여자의 친구가 불법으로 낙태하고자 고생하는 이야기인데 이 시대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잘 폭로한다. 크리스티안 문주가 2012년에 감독한 작품으로서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 <신의 소녀들>이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의 현재를 그리는데 아동포르노, 고아원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신체·정신·성폭력의 폭력 삼종 세트, 독일·프랑스·체코를 위시해 선진국으로 노동 수출, 사회의 방치를 현실주의에 입각해 탁월히 표현한다. 이 주제를 더 알고 싶으면 추천하는 작품.

7. 관련 문서


[1] 그래도 영국은 NHS를 통해 산모와 아이의 의료는 무료로 제공한다. 물론 위에 써져있듯이 난임 같은 경우에는 이런 제공도 바랄 수 없다.[2] 사실 정책의 시행 동기로 보면 인구 증가도 나름대로의 합리성이 있긴 했다. 그러나 국민에게 가는 부작용을 생각했을 때, 출산 제한보다 출산 강제가 더 심한 건 자명한 사실이다. 국민에게 있어서 강제에 의해서 아이를 적게 낳거나 하는 건 주로 정신적 욕구가 불충족되는 측면이 크고 실질적, 직접적 피해는 적지만 아이를 억지로 많이 양육하는 건 경제적 부담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3] 사실 이는 공산주의 체제였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체제의 특성을 이용해 나름대로의 대책을 내놓은 점은 잘한 일이다.[4] 물론 실제로 출산율이 일시적으로 대폭 늘어난 것은 맞다.[5] 정월이 되면 사또가 고을의 19세 미혼 양반 자녀 명단을 만들어서 부모를 부르거나 찾아다니며 약혼 여부를 확인했다. 파혼(혼인 약속 다 잡아 놨는데 약혼자가 사고나 질병으로 사망했다거나…의외로 흔했다.) 등 사유로 약혼이 안 되어있으면 고을 내에서 최대한 짝을 찾아주려 사또가 중매를 서기도 하고 총각이나 처녀 한쪽만 많을 경우 옆 고을 사또랑 협의해서 중매를 서서 혼인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양반 집안임에도 혼인시키기에 가난하다고 하면 혼수비용으로 공금을 일부 지원해 주는 경우까지 있었다. 20살은 그야말로 재앙으로, 약관의 나이에 결혼을 안 한 상태(상술된 파혼이나 질병·가난 등 사유)는 지금으로 치면 50대 노총각·노처녀보다 더 심각한 비상사태로 쳐서 최우선적으로 사또고 예방·호방이고 다 나서서 혼인시키려고 생난리를 쳤다. 부모를 탈세범 취급하듯이 쪼아대고 부모가 무능하다면 수령 측에서 그 고을이건 옆 고을이건 어느 집 딸이건 아들이건 중매시켜 잡으려고 찾아가 무슨 짓을 하건 다하며 설득했다. 19살과 20살은 1살 차이지만 매우 다르게 대했다. 양반이 아닌 경우도 20세 전이 기본이긴 했으나 전쟁이나 민란급 사태 아니면 예외가 거의 없던 양반가와 달리 20대 노총각·노처녀는 적극적으로 잡지는 않아서 어느 정도는 있었다. 이렇게 했던 이유는 가장 크게 2가지로 당시의 평균수명 수준으로 볼 때 이때 결혼하지 못하면 출산을 못하고 죽을 위험이 상대적으로 컸다는 점과 벼농사 문화권은 특히나 농업에 많은 인원을 동원했기 때문에 무조건 많이 낳아서 농사에 투입해야 생산량을 유지하고 굶어죽는 일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관가에서 일하는 공노비들이 아이를 낳으면 100일 간의 휴가를 주고 관노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남편한테도 30일 간의 휴가를 주었다(1430년 10월 19일자 세종실록, 1434년 4월 26일자 세종실록). 또 노비가 한꺼번에 세 아이를 낳으면 최대 쌀과 콩 10석을 상으로 주었다(1406년 7월 11일자 태종실록).[6] 이런 사람들에게 세금을 물린다는 것은 이 나라에서 그냥 죽으라는 것과 같은 격이다. 이들 중 고자들은 그나마 상황이 나았던 게 부인이 불륜을 저질러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는 것으로 어떻게든 이 세금을 피할 수는 있었다. 정책 자체는 물론 매우 잘못된 것이 맞지만 국가에 기여를 못 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세금을 부여하는 것이 잘못인지는 토론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장애인, 불임, 고자가 그들도 과연 장애인, 불임, 고자가 되고 싶어서 되었는지는 판단했는지나 의문이다. 아니, 애초부터 아무리 루마니아가 당시엔 독재국가였고 출산율을 높이는 것도 필요했다지만 정책 자체가 고대의 정책이 더 합리적으로 보일 정도로 워낙 주먹구구식이었다. 아무리 독재국가에서는 까라면 까야 한다지만 그것도 적당히 해먹어야 하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장애인, 불임, 고자가 애 못 낳는다고 국가에 기여를 못한다는 발상도 어리석은 발상이다. 애를 못 낳는 대신 애를 키울 수는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국가에 기여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7] 출생아 10만 명당 아이를 낳다 죽은 산모의 수[8] 보호시설에 보내진 대부분의 아이들은 출생 당시의 건강상태에 관계없이, 정서적으로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해 자폐아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 해당 아동들의 뇌영상 자료에 변연계 등 대뇌 부분에 위축이 관찰되었다.[9] 다만 정말 나라가 막장 테크인데다가 발전의 여지도 없는 급이 아닌이상 어지간하면 인구가 많은 것이 낫다. 현재는 가난한 개발도상국이어도 경제발전이 이뤄진다면 저질 인구라도 노동력이 넘쳐나는 나라가 더 낫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는 20세기에는 저질 인구만 많은 나라라고 혹평할 수 있지만, 수하르토 이후로 계속 경제발전을 하고 있어서 이 많은 인구가 잠재력으로 연결되고 있다. 또한 가난한 나라가 소국이기까지 하면 인재를 구하기도 더 어려워져서 답이 없다. 조세피난처로 먹고 사는 카리브해 소국들이나 호주 등 다른 나라의 속국 취급이나 당하는 오세아니아 소국들을 생각하면 편하다.[10] 대한민국이 나름 하드한 복지환경이나 육아환경에도 불구하고 영아들의 정신건강 안정도가 유의미하게 높다는 평가를 받는데, 한국 육아방식인 포대기를 이용해 24시간 아기가 산모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밀착육아의 순기능이라는 연구가 있다. 이로 말미암아 이 차우셰스쿠의 아이들 세대에서 지식·신체·정신적으로 발달장애를 겪는 아이들이 상당히 많았고 사이코패스 진단률도 전세계 어떤 세대들보다 유의미하게 높았다. #[11] 물론 이쪽은 오히려 인구 수 10%나 줄였다.[12]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남편을 긍정 평가하던 사람들조차 대놓고 욕할 정도로 지독한 성격파탄자에, 무식함도 그 멍청했다는 남편보다 더한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