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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음악 | 친근하신 챠우쉐스꾸 동지의 노래 | ||
관련 인물 |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 요시프 브로즈 티토 · 엘리자베스 2세 · 김일성 | }}}}}}}}} |
1. 집권 이전
만 15세 때 공산주의 활동으로 투옥되어 감옥에서 찍힌 머그샷.
차우셰스쿠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1월 26일에 루마니아 왕국 남부 스코르니체슈티(Scornicești)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안드루처 차우셰스쿠(Andruță Ceaușescu, 1886–1969)와 어머니 알렉산드리나 차우셰스쿠(Alexandrina Ceaușescu, 1888–1977)[1]의 아들로 태어났다. '니콜라에'라는 이름은 안드루처 차우셰스쿠가 아들의 출생 신고를 하러 등기소에 갔을 때 만취 상태라 생각나는 이름이 '니콜라에'밖에 없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었다. 차우셰스쿠에게는 9명이나 되는 남매들이 있었으며[2] 그의 아버지 안드루처는 빈농이었던지라 3헥타르의 경작지와 양 몇 마리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부모는 농사 이외에도 마름질을 하면서 돈을 벌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인 알렉산드리나는 순종적이고 성실했으며 독실한 정교회 신도였던 반면에[3] 아버지 안드루처는 집안일에 관심이 없어서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하며, 툭하면 고장에서 사고를 저질러대는 등 가족들의 골치를 썩히던 불량가장이었다.[4]
마을의 한 신부는 차우셰스쿠의 아버지에 대해 "그는 자기 자식들에게 관심이 없었어요. 도둑질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싸워서 다치기 일쑤였죠."라고 말했다. 차우셰스쿠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은 10명의 형제와 부모가 살기에는 매우 부족했다. 방은 겨우 2칸이었으며 우리나라의 옥수수떡과 비슷한 루마니아의 전통음식인 머멀리거(mămăligă)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일상 다반사였다. 그는 마을에 있는 한 학교를 다녔는데 그 학교 역시 루마니아 시골의 어려운 삶처럼 별로 좋지 못했다. 그 학교의 선생님은 한 교실에서 동시에 여러 반의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차우셰스쿠는 책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학교에는 거의 맨발로 다녔을 정도였다. 10명이나 되는 형제들 중에 셋째로 태어났고 자식들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그리고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이었는지 차우셰스쿠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없었으며 성격 또한 거칠었고 이상한 행동을 자주 했다고 그의 어린 시절을 지켜본 사람들은 증언한다.
그러다가 차우셰스쿠는 11살에 부쿠레슈티로 간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이 가난 때문에 그곳에서 도망쳤다고 주장하지만 알코올 중독자로 가족을 학대하는 아버지가 싫어서 그랬던 것이 가장 유력한 이유이다. 그곳에서 숙모인 니쿨리나 루세스쿠(Niculina Rusescu)와 함께 살다가 제화 수습공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루마니아 공산당(Partidul Comunist Român·PCR)의 당원이었던 알렉산드루 선둘레스쿠(Alexandru Săndulescu)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그러자 선둘레스쿠는 차우셰스쿠를 비밀 임무를 띈 수습생으로 취직시켜 주었고, 1932년 차우셰스쿠는 마침내 루마니아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루마니아 공산당은 루마니아에서 불법 단체로 찍혔던 데다가 아직 십대였던 차우셰스쿠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잡일들만 맡겨질 뿐이었고 대부분의 임무는 불법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던 중 차우셰스쿠는 1933년 11월 23일에 처음으로 체포되었다. 일련의 파업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했기 때문에 체포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고성방가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차우셰스쿠의 화려하기 짝이 없는 감옥 생활이 시작된다. 이듬해인 1934년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수감된 철도 노동자들을 위한 석방 탄원서에 시민들의 서명을 받다가 체포되었는데 그 뒤에 이런 활동을 2번이나 더 했다고 한다.
그는 1930년대 중반까지 수도 부쿠레슈티 이외에도 크라이오바, 큼풀룽그(Câmpulung), 름니쿠블체아(Râmnicu Vâlcea) 등 루마니아의 여러 도시에 파견되어 공산당 관련 임무를 수행했으며 수 차례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런 활동과 잦은 수감생활로 루마니아 정부 당국은 차우셰스쿠를 "공산주의 프로파간다와 반파시스트의 활동적인 보급책"으로 간주하여 그를 "위험한 공산주의 선동가"로 낙인찍는다.[5]
체포되었을 당시의 차우셰스쿠.
차우셰스쿠는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 공산당 지하활동을 위해 잠시 자취를 감추었지만, 1936년 6월 6일 브라쇼브의 법원에게서 징역 2년형을 받고 도프타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받은 혐의는 후원자였던 폴란드계 블라디미르 타르노브스키(Vladimir Tarnovschi)[6]의 집에서 발견된 루마니아 정부에 대한 반란과 봉기를 선동한 전단지에 맞춰졌다. 차우셰스쿠를 기소했던 검사의 기소장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피의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사실상 유죄. 1936년 1월 15일, 고의적이며 사기성이 짙은 의도를 가지고 자극적이고 비밀스런 책자를 소지했으며 그것들을 대중들에게 전파하려 하였고 시민들에게 사회 투쟁을 유발하려 한 점에서 고의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래 구두 수선공의 수습생이었다가 당시 파도처럼 유행을 타기 시작한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반정부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감옥을 제집처럼 들락날락할 정도로 수감생활이 화려했다. 감옥에서 그는 스탈린주의에 더욱 심취하였고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한 차우셰스쿠는 스탈린주의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던 중 같은 노동자 출신인 엘레나와 만나 결혼했다. 출세길이 열리려는지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의 심복이 되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루마니아 공산독재 정권 수립 후인 1948년 5월 13일에 차우셰스쿠는 농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었고, 1950년 3월 18일에는 국방부 차관이자 육군 고등정치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54년에는 루마니아 공산당 정치국의 정회원이 되었다.
차우셰스쿠는 집권 전부터 잔혹성을 어김없이 보여줬는데, 육군 정치국장 겸 육군부 장관 겸 육군 중장으로 승진한 차우셰스쿠는 1957년 12월 4일에 바두로슈카(Vadu Roșca)라는 몰도바 국경 인근에 있는 마을에서 공산당의 토지 몰수와 집단 농장 설치에 반대하는 농민들이 시위를 벌이자 두 대의 탱크 옆에 서서 직접 발포를 명령했고, 이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10분 동안 시위대에게 기관총을 발포했으며, 그 결과 14살 소년 1명을 포함한 9명이 죽고 48명이 다쳤으며, 18명이 구금되어 15~25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2. 집권 전반기
초대 서기장이었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말년에 심각한 의심병으로 차우셰스쿠만 믿게 되자 차우셰스쿠는 서열 2위에까지 오르게 되었고, 1965년 게오르기우데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서기장이 되었다. 그리고 1974년 3월 28일에는 헌법에 없던 대통령이 되어 기존 서기장보다 더 많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대통령 취임식에서는 대통령에게 지팡이를 증정하는 의식이 거행되었고,[7] 이를 본 살바도르 달리는 '나는 대통령 지팡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 여러분의 역사적인 행위에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비꼬았다. 물론 루마니아에서는 이 표현이 진심으로 축하하는 것인 줄 알고 이 말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젊었을 때는 나름대로 기득권에 대항하던 투사였고 공산당 활동을 하면서 당시 추축국에 놀아나던 권력자들에 맞서는 모습을 보였다. 비록 집권과정에서 정적들과 당원들을 감옥에 보내거나 처형시키는 등 억압적인 일을 저질렀고, 집권 직후에 출산강요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여 젊은 여성층들에게 불만을 사기도 했지만, 소련의 내정간섭에 반발하면서 미국 등 자본주의 진영과 화해하는 제스쳐를 보여줄 정도로 유연한 외교노선을 견지하였다. 이때 영국 여왕에게 명예 기사 작위를 받을 정도였다. 1968년 8월 21일에 소련이 군대를 투입해서 프라하의 봄을 유혈로 진압하자 이에 반대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진보파 알렉산데르 둡체크를 지지하였으며, 이 연설을 통해 차우셰스쿠는 단순한 최고지도자에서 영웅급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고, 서유럽과 미국으로부터 투자자금을 얻는 계기가 되었으며, 루마니아인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얻어 10여년간은 차우셰스쿠의 지지기반은 탄탄했었다. 이 당시에 반공인사들도 이 연설에 감동하여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후일담이 있을 정도였다.
[8]
게다가 1960~70년대에 중국과 북한을 방문하면서, 문화대혁명으로 권력 재장악에 성공하여 자신에 대한 맹목적 추종만이 허용되는 독재 체제로 만든 마오쩌둥과 6.25 전쟁 이후 8월 종파사건을 비롯해 정적에 대한 가차없는 대규모 숙청을 벌여 개인 독재 체제 구축에 성공한 김일성을 만나본 뒤에 저 두 인물을 존경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집권 당시 40대 후반의 젊고 유능한 인재로 보였던 차우셰스쿠에게 국민들은 많은 기대를 걸었고, 특히 프라하의 봄이 일어난 1968년부터 막장 우상화 정치로 경제가 추락하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기까지 정말 인기가 좋았다. 우상화가 비웃음을 사기는 했는데 이건 공산권에서는 흔한데다가[9] 대놓고 저항할 만큼의 악정을 펼치지는 않았고[10] 반소성향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기까지 했던 것도 있어 대충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이는 루마니아가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이어진 경제성장으로 차우셰스쿠 집권기에 국민들이 경제성장의 혜택을 보았을 시점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들어서는 자가용이 점차 보급되기 시작되어 소련보다 보급률이 훨씬 높았고, 자영업이 활성화 되었으며, 텔레비전과 전화기를 비롯한 가전제품이 이 시기에 보급되어 '이대로라면 1980년대 즈음에 서구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장미빛 전망이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영아사망률은 이전의 1000명당 139명에서 35명으로 급감했다.
게다가 공산권의 일원으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가맹국임에도 서방과 적극적인 화해협력을 추구하는 나름 줄타기 외교를 펼쳤다. 이 때문에 서방국가와의 무역도 활발하여 경제에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소련을 일방적으로 추종하지 않는 모습이 몰도바를 소련에 내준 뼈아픈 기억이 있던 국민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실제로 1960년대 중후반에 루마니아에서 이미 콜라를 생산했었는데 그것도 고유브랜드가 아니라 미국 회사인 펩시에서 직접 면허를 받아서 생산했다. 링크 게다가 자국 자동차 회사인 다치아[11]와 올트시트(Oltcit)[12]를 설립할 때 소련의 라다[13]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스코다가 아닌 프랑스 르노와 시트로엥의 기술을 공여받아서 자동차를 생산했다.
또한 1970년대 당시 루마니아 텔레비전 방송은 유고슬라비아 못지 않게 미국이나 영국 등 서구권에서 프로그램을 많이 수입해서 방영할 정도로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1970년대 루마니아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TV 프로그램이 미국 CBS의 드라마 〈댈러스(Dallas)〉였고, 그 이외에도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BBC 다큐멘터리를 수입해서 방영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해외여행도 2년에 한번씩 갈 수 있어 상당수 루마니아인들이 해외여행 경험이 있을 정도였다. 단순히 동구권을 오가는 수준이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처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서독을 비롯한 서구권 국가로 여행가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1977년 부쿠레슈티에 대지진이 터지면서[14] 얘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에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루마니아의 외채가 급속히 불어나기 시작했는데 부쿠레슈티 대지진으로 루마니아는 또다시 막대한 외채를 빌려야 했고 각종 사업이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나마 1980년대 극초반까지는 어찌저찌 버텨낼 수 있었지만 고금리로 경제가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결국 1981년을 기점으로 긴축기조로 돌아서게 되며 풍요로웠던 시절이 끝나고 배급제가 도입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차우셰스쿠는 인민궁전을 짓는 등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이지 않았고, 오랜 침체 끝에 외채는 다 갚았지만 기초생필품에 해당하는 품목들까지 팔아치우는 밀어내기식 수출정책을 편 결과로 인민들의 삶이 급속히 어려워져 지지도가 낮아진다.
3. 집권 후반기 - 동유럽 최악의 독재정치
차우셰스쿠 독재정치의 가장 괴이한 면은 그 잔학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박함에 있었다.
에드워드 베르[15], '차우셰스쿠 악마의 손에 키스를' 364쪽 중
에드워드 베르[15], '차우셰스쿠 악마의 손에 키스를' 364쪽 중
"한 미치광이의 공상 속에 2천만명의 사람들이 사는 나라"
알렉산드루 이바시우크[16]
알렉산드루 이바시우크[16]
위의 두 인용문처럼 차우셰스쿠의 독재는 전세계적으로도 악명이 자자하며 괴상한 정책으로 유명하다.
또한 1989년 12월 혁명이 끝난 후 루마니아 지식인들은 그와 전임 게오르기우데지의 공산 독재 정권을 이렇게 평가했다.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야만적인 수단을 더 많이 동원했지만 지능적인 차원에서는 차우셰스쿠가 한 수 위였다."
그러나 차우셰스쿠 본인은 지능적이기는 커녕 간단한 전치사도 헷갈릴 정도로 무식하고 멍청한 인물이었다.
루마니아 혁명 무렵 루마니아의 실태에 대한 보도(1989년 12월 25일 중앙일보 보도)
3.1. 우상화 정책
그의 우상화를 추구한 그림들. 화풍에서 볼 수 있듯 실제로 차우셰스쿠는 북한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
1986년 8월 23일에 부쿠레슈티의 '8월 23일 경기장'에서 열린 매스게임의 모습.[17] 북한의 아리랑 공연과 매우 비슷하다.[18] 당시 영상 |
차우셰스쿠의 통치의 가장 큰 특징은 최고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와 우상화 정책이었다. 이는 국가 스탈린주의를 고수한 북한, 알바니아 등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으로 다른 동구 공산권이나 쿠바 등에서는 보기 힘든 지도자와 그의 가족에 대한 신적인 추종과 우상화 작업이 이루었졌고 당연히 차우셰스쿠는 살아있는 신처럼 신봉되었다.
우상화를 더욱 완벽하게 해나가기 위해 차우셰스쿠는 선전 선동부를 통해 우상화의 모든 세부 사항을 직접 승인했다. 실제로 차우셰스쿠 부부는 하루에 방송에서 그들의 이름이 몇 번 언급되어야 하는지 등 우상화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직접 결정했다. 그리고 본인과 부인 엘레나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고 관공서, 공장, 군대, 국경 검문소, 학교 교실마다 차우셰스쿠 부부의 초상화가 붙었으며, 심지어 글을 쓰는 중 문단이 넘어갈 때 대문자로 써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엘레나 차우셰스쿠'라는 이름이 분리되는 것도 금지되었다. 당연히 그의 생일인 1월 26일은 루마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었으며, 이 날 루마니아의 국민들은 비참한 모습을 보이면 사실상 죽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에 모두가 억지로 웃으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 지도자와 당의 정책에 대한 비방 역시 법으로 금지되었다.
그리고 엔베르 호자, 김일성 등이 민족적 정통성을 이어받은 지도자처럼 행세한 것처럼 차우셰스쿠도 자신이 로마인의 현명함과 다키아인의 용맹함을 물려받은 루마니아 민족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계승자라고 선전했는데, 차우셰스쿠는 다키아 왕국의 초대 군주 부레비스타의 직계 후손으로 포장되었다. 게다가 차우셰스쿠는 스스로를 외적에 대항하는 루마니아의 왕으로 생각해 기병들을 동행하고 성지순례를 하거나 의도적으로 애국주의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차우셰스쿠가 환갑이던 1978년에 대통령궁에서 근무했던 두미트루 포페스쿠(Dumitru Popescu)의 주도 아래 여러 문인들이 비밀리에 써서 차우셰스쿠의 생일 선물로 헌정한 664쪽 분량의 호화판 장식용 책 '경의를 표합니다(Omagiu)'는 건강한 사회나 정상적인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웃음거리에 불과한 유치하기 그지없는 '상투적인' 찬사들로 범벅된 책이었다. 이 책은 그가 직접 방문했던 40개의 행정 구역을 주무대로 삼으며 차우셰스쿠를 다정다감한 가장, 영도력 있는 지도자, 창조적인 사상가로 묘사하며 추켜세웠고 그가 살았던 집 또한 성역처럼 그려졌다. 이 책에서는 차우셰스쿠를 찬사의 의미로 이디 아민,[19] 김일성, 엔베르 호자, 마오쩌둥과 같은 지도자들과 동렬로 세웠다.[20] 참고로 차우셰스쿠의 환갑 생일 축하 행사는 무려 3주나 계속된 데다가 이 행사에 쓰인 물품에 그의 이름이 적힐 때에는 항상 대문자로 써야 했다고 한다.
같은 해에는 '루마니아의 반신반인'이라는 책이 그리스에서도 출판되었으며, 차우셰스쿠 시대는 '루마니아의 천 년 역사 중 가장 많은 성과와 대대적인 성공을 이루어낸 가장 생산적인 시기'로 홍보되었다. 그 외에도 차우셰스쿠는 '세계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도 막대한 명성과 깊은 존경, 경의를 받고 있으며 그의 이름은 불타는 애국심과 국제주의의 상징이자 자립과 국가 주권을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루마니아 국민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참된 민족 영웅' '속세의 신' '당과 국가의 심장'으로도 불리며 율리우스 카이사르, 알렉산더 대왕, 페리클레스, 올리버 크롬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표트르 대제, 에이브러햄 링컨 등의 세계적인 위인이나 부레비스타, 데케발루스, 미르체아 1세, 슈테판 3세, 미하이 2세,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 니콜라에 발체스쿠,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를 비롯한 루마니아의 역사적인 위인들에 비유되었다.
'카르파티아 산맥이 배출한 천재' '우리들의 빛의 원천' '다뉴브 강과 같이 풍부한 사고를 가진 인물' '루마니아 천년 역사에 우뚝 선 위인' '신기원의 창시자' '지혜의 보고이자 카리스마의 화신' '횃불이자 기수' '1월의 별' '루마니아에서 가장 키가 큰 전나무' '태양도 거스르는 빛' '시대의 천재' '지구의 구원자' '현명한 조타수' '현명한 전략가' '지칠 줄 모르는 영웅' '지구에서 으뜸가는 사상가' '용감한 기수' '꿈의 떡갈나무, 진보의 떡갈나무, 인류의 떡갈나무' '숲을 움직이는 바람' '조국의 아들이자 선구자' '공산 정권의 등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언한 열정적인 인도주의자' '루마니아라고 불리는 이 축복받은 나라에서 모든 생명체와 사물의 척도' '그리스도처럼 육화된 국민의 화신, 즉 국민의 몸으로 자신의 몸을 이루고 국민의 영혼으로 자신의 영혼을 이룬 존재' 등등 이렇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데다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 모두 차우셰스쿠 한 사람만을 위한 호칭이었다.[21] 실제로 이런 말들을 만들기 위해 루마니아의 많은 지식인들은 사전까지 뒤적이면서 불필요한 고생을 해야만 했다.
차우셰스쿠가 65세가 되던 1983년에는 '경의를 표합니다'가 영어판으로 출판되었다. 이 영어판에서는 외국의 지도자들이 차우셰스쿠에 대해 단순히 외교적 수사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발언을 진지한 찬사처럼 묘사해 놓았다. 그리고 차우셰스쿠의 얼굴은 이 책에서도 '영원한 젊음'을 자랑했다.[22]
차우셰스쿠의 우상화는 집권 20주년을 맞이한 1985년에 절정을 맞이했는데, 이때의 루마니아에서는 온갖 축제가 열렸고, 사람들은 차우셰스쿠를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찬미했으며, 차우셰스쿠의 초상화는 법에 따라 모든 교과서의 첫 장에 나오게 되었다. 심지어 차우셰스쿠는 직접 모든 초등학교 교과서에 본인 부부의 컬러 사진을 반드시 실어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는 '위대한 현대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부활시켰을 뿐만 아니라 더욱 발전시킨 천재적인 공산주의 이론가' '행동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자[23] 모든 국가적 성취의 원천이 '사상'인 정치 지도자로 묘사되었고, 그가 썼다는 책들 수십 권은 정기적으로 재간행되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작가, 학자, 공산주의 활동가들은 그의 저서들을 주요 참고문헌으로 채택하도록 강요받았다. 물론 출판할 책들은 중앙위원회가 미리 내용을 사전 심사한 후 차우셰스쿠의 어록이 일정량 포함되어야 출판을 허가했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차우셰스쿠의 몰락 직후에는 '1989년 12월 25일까지 차우셰스쿠의 어록이 포함되지 않은 책의 출판을 허락받는 것은 1989년 12월 25일 이후 차우셰스쿠의 어록이 포함된 책의 출판을 허가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물론 루마니아 지식인들이 차우셰스쿠에 대해 아부하는 내용이 담긴 책도 매년 차우셰스쿠의 생일날마다 새로 출판되었으며, 차우셰스쿠 정권은 자기들의 시대를 '황금시대'라고 불렀다. 차우셰스쿠의 유년기는 '너무 가난해서 책도 못 가진 채 맨발로 학교에 다녔지만, 항상 반에서 1등을 차지하던 아이'에[24]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노력과 용기와 순전한 재능으로 역경을 극복하고 사회주의 지도자가 된 시골 소년'으로 포장되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조차 학교에서 '당, 수령, 민족'을 찬미하는 시와 노래를 배워야 했다.
차우셰스쿠는 자기가 썼다는 책들을 전국 각지의 매장에서 판매시켰고, 공산당원, 공장,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할당하여 의무적으로 사게 하였다. 그렇게 차우셰스쿠의 자서전은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판매고가 계속해서 상승했다.[25]
또한 모든 서점은 법에 따라 그의 연설집을 진열해야 했으며, 모든 신문의 1면은 항상 차우셰스쿠의 '업적'들이 보도되었고, 차우셰스쿠가 나오는 텔레비전이나 영화는 차우셰스쿠를 가능한 한 '최상의 빛'으로 묘사하게 하기 위해 비밀경찰이 철저하게 사전검열을 했다. 좋은 영상만 비추도록 비밀경찰의 구미에 맞을 때까지 몇 시간씩 편집작업을 해야 했으며 그가 하던 어색한 자세, 머뭇거리는 태도, 말을 더듬거나 찡그린 표정의 필름 찌꺼기들은 모두 비밀경찰이 수거해 폐기처분했다. 실제로 차우셰스쿠의 잦은 눈 깜빡임과 말더듬을 방송한 프로듀서는 3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다. 이런 일을 피하기 위해 당시 루마니아의 언론은 차우셰스쿠 부부를 멀리서 촬영하거나[26] '유리한' 각도에서 촬영하며 그들의 얼굴을 명확하게 식별할 수 없게 하거나 아예 조심스럽게 수정한 사진을 써야 했음에도 그들의 모든 이미지를 '광범위한 청중이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세심히 검사 받아야만 공개될 수 있었다. 엘레나 차우셰스쿠의 사진들은 그녀의 '미모'와 '젊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사진 속 주름을 없애고 코의 크기를 줄이는 등 보정 작업을 해야만 했으며, 당시 루마니아에서는 사진 속 차우셰스쿠가 50세 정도로 보여야 했다면 엘레나는 35~45세 사이로 보이게 해야 했다고 한다.
또한 화면에 나오는 그 누구도 차우셰스쿠의 키(165cm)보다 커서는 안됐으며 갖가지 방법으로 키 차이를 줄이는 작업을 해야 했다. 어떤 방법으로도 도저히 포장이 불가능할 정도의 장신인 샤를 드골(196cm)이나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스 대통령(189cm) 같은 사람들은 차우셰스쿠와 함께 찍힌 사진을 모조리 날려버리는 식으로 회피했다. 차우셰스쿠의 키가 작아보일까봐 차우셰스쿠의 사진 기사들의 키는 반드시 차우셰스쿠보다 작아야 했다.[27] 그리고 차우셰스쿠의 공식 사진들은 집권 초반이었던 40대 후반 정도의 비교적 젊은 모습으로만 나올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 학원'이 '차우셰스쿠는 세계의 저명한 지도자이자 훌륭한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라고 극찬한 것이 루마니아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이 '시라쿠사 학원'은 사실 나폴리의 어느 중산층 아파트 단지에서 나이든 여인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네 학원 정도에 불과한 곳이었다. 심지어 이 발언은 루마니아 외교관이 그 할머니에게 약간의 돈을 주면서 요구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내인 엘레나에 대한 우상화도 가관이었는데, 실제로 엘레나는 물의 화학기호가 H,2,O라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무식했으나 다른 학자들이 대필해준 논문과 해외를 순방하며 문자 그대로 구걸해가며 얻은 명예박사 학위들로 저명한 화학자 행세를 했다. 참고로 이 외에도 그녀가 저지른 만행이 워낙 극심했던 나머지 당시 루마니아 사람들은 그녀를 남편 이상으로 증오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아내의 명예박사 갈취가 너무 유명해서 그렇지, 차우셰스쿠도 루마니아의 유수 대학에서 '학문적 성취'를 인정받고 기념받기 위해 경제학 박사, 정치학 박사 등 명예박사 학위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우상화 정책은 결과적으로 차우셰스쿠의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본래 이 우상화 정책 방법은 북한과 동일하게 자신을 따르게 하는 선전 운동이었는데, 역효과를 낸 이유는 루마니아인들이 차우셰스쿠 집권 이전 잘 살던 시절의 추억이 있었음에도 공개적인 긴축정책으로 민생을 파탄냈기 때문이었다. 또한 권력을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대한 안목이 김일성에 비해 뒤떨어졌다.
일단 본인을 억지로라도 우상화시키려면 전임자를 우상화하여 그 후광에 기대는 것도 모자랄 판에[28] 오히려 전임자를 격하하였다.[29] 이것도 북한을 따라 했을 가능성도 있는데,[30] 평양 안에 김일성이 아닌 소련군이 나라를 해방시켰다는 내용이 적힌 해방탑을 가지고 있으면서[31] 김일성이 조국을 해방시켰다고 할 정도로 상당히 뻔뻔한 역사왜곡을 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들의 역할을 오히려 인정하였다. # 지금도 북한은 내부에서 쓰는 교과서에는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이 조국을 해방시켰다고 쓰지만, 해방탑에는 김정은 명의의 화환을 보낸다. 즉, 자신의 힘으로 격하나 왜곡할 수 없던 전임자의 업적 같은 것은 인정하면서 왜곡할 수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왜곡하여 힘을 키워야 하는데 차우셰스쿠는 이것이 부족했다.
애당초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본인이 건국한 것도 아닌 그의 전임이었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등 루마니아 공산당의 1세대 지도부들이 건국한 나라였고, 차우셰스쿠가 집권한 것도 본인이 공산당 정권 수립에 큰 공을 세워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게오르기우데지의 눈에 들었을 뿐, 그게 다였다.[32] 이는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의 탄압으로 다 죽어가던 중국공산당을 재결집시키고,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한 마오쩌둥과는 달랐다. 김일성에게는 항일운동 당시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최용건, 독자적 지지세력을 거느린 투철한 공산주의자인 박헌영 같은 라이벌이 있었으나 바지사장 내세우기, 정적에게 누명 씌우기 같은 치밀한 공작,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소련군의 해방에 대한 역할을 인정하다 축소하는 등 권력에 비례하여 단계적으로 업적을 왜곡하여 궁극적으로는 일본군을 자신의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물리친, 이순신과 이성계를 합친 업적을 갖도록 왜곡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스탈린은 대숙청, 히틀러는 장검의 밤, 김일성은 8월 종파사건으로 일치감치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여 방해하는 요소가 없어서 우상화에 성공했다. 특히 김일성 가문은 외척도 두지 않으며,[33] 북한 주민이 외우는 <10대 원칙>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간부조차 존경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권력자에 대한 견제가 철저하다. 그러나 차우셰스쿠는 정적 숙청을 하지 않아서 우상화에 방해요소가 많았고, 나아가 정권 장악에도 뭔가 불안정한 요소를 떠안고 가며 후일 몰락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에 북한을 보면 자신을 지켜줄 특권계층에 가장 자신을 지켜줄 계층을 중심으로 혜택을 단계적으로 몰아주고 숙청할 사람은 숙청하여 충성을 유도해야 하지만, 루마니아는 세쿠리타테에 몰아주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정작 루마니아 정규군의 불만 세력을 제어하는 데 실패해 이후 정규군이 차우셰스쿠를 축출하는 데 일조하게 되었다.
이렇게 건국자도 공로자도 아닌 차우셰스쿠가 본인 우상화를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명분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본인이 무언가 국가를 위한 원대한 계획이 있고, 국가에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어필해야 한다. 당장 아돌프 히틀러도 일단 나의 투쟁 같은 불쏘시개를 내세워 국가 비전을 일단 내놓기는 했고, 김일성 역시 주체사상을 통해 나름대로의 국가 비전과 우상화의 기초를 다졌다. 물론 차우셰스쿠 역시 다키아 민족주의 등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념은 내세우긴 했지만 우둔한 그로서는 이를 체계화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거기에 생활고로 인한 민심파탄에 대한 대비를 전혀 못했는데, 루마니아의 빵 배급제는 1970년대에 자동차를 보유하고 해외여행도 대중화되었을 당시의 호황기를 기억하던 루마니아 인민들에게는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알려주는 징표였다. 거기에 북한 마냥 외채를 갚지 못해 디폴트를 선언하고 이를 비밀로 한 거와 달리, 루마니아는 과도하게 정직하게(...) 무리하게 외채를 갚아 국민들의 불만을 초래했다. 우상화를 시행하려 해도 일단 빵은 먹여 주거나 아예 정보를 통제해야 함에도 고기와 통조림같은 식료품을 수출하는데 바빠서 식품과 생필품의 수요는 자꾸 늘어만 가는데 공급은 이 수요를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턱없이 부족해 상점 선반이 텅텅 비어서 암시장 가서 몇배 이상의 웃돈을 지불하게 만들고 그렇다고 정보를 왜곡·통제하는 데에도 실패했으니, 우상화가 먹히기는 커녕 반감이 거세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무력으로 국민들을 복종시키는 길을 택하게 됐다.
그래서인지 차우셰스쿠도 차마 자신의 동상을 세우는 것을 할 수 없다 판단해서, 고향에 커다란 흉상을 세운 것 외에는 자신의 모습을 본뜬 조형물을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3.2. 비밀경찰을 동원한 억압적인 통치
세계 어느 곳에서도, 심지어 소련 내부에서조차 차우셰스쿠 시대의 루마니아처럼 강압체제가 횡행했던 곳은 없다.
에드워드 베르, '차우셰스쿠 악마의 손에 키스를' 318쪽 중
에드워드 베르, '차우셰스쿠 악마의 손에 키스를' 318쪽 중
차우셰스쿠는 권력의 독점과 강화를 위해 문자 그대로 전국민을 도청했다. 당시 루마니아의 인구 2,100만 명을 감시하기 위해서 10개의 전국 도청 본부, 248개의 지역 도청 본부, 1천 개 이상의 이동 도청 센터가 설치되었고, 루마니아 전역에 도청기만 300만 개가 있었으며, 커튼 뒤와 액자 뒤는 물론(?) 카페트 밑, 전화기, 벽, 심지어는 부부 침실의 매트리스 속에도 도청기가 숨겨져 있었고, 수도의 모든 거리는 물론이고, 시골에도 대략 15km 간격으로 정규 검문소에서 자동 소총을 소지한 비밀경찰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사방팔방에 도청기를 다 뿌려놓으며 국민들 대부분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밀착 감시했다는 말이다. #
게다가 차우셰스쿠는 '5인 책임제'를 도입해 국민 5명 중 한 명을 비밀경찰 연락책으로 하여 나머지 4명을 감시하고 그들의 언행을 상부에 보고하게 했으며, 비밀경찰 5명 중 1명을 책임자로 하여 나머지 비밀경찰 4명의 행동과 발언을 상부에 다시 보고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초등학교에서도 어린이들에게 부모를 밀고할 것을 강요했고, 어린이들은 아빠가 술김에 집에서 한 소리는 물론(?) 엄마가 아빠에게 귓속말하는 소리까지 선생님에게 밀고했으며, 이렇게 밀고된 부모들은 '실종'되었다.
그리고 당시 루마니아에서는 집과 공공 시설에 갑자기 침입한 세쿠리타테가 마이크를 설치하면서 시민들의 대화를 도청했고, 모든 국내와 국외의 팩스 사용, 해외에서 들어오거나 나가는 모든 전화와 전신은 차단되었으며, 심지어 전화 대화까지 항상 도청당했고 한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 국민들은 집안에서조차 자유롭게 말할 수 없어서 당시 루마니아에 온 외국인 중 어느 누구도 루마니아 국민들의 '진정한 고통'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한다.[34] 이렇게 루마니아 사회는 '남편이 아내를 믿지 못하고 부모는 자식을 믿지 못하는' 침묵에 빠져들었는데, 이렇게 교묘하면서 치밀한(?) 감시와 밀고 조직을 만들어낸 차우셰스쿠는 자신을 '뭐든지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검지손가락'이라고 자화자찬했다.
관광업무를 담당하는 모든 일자리는 비밀경찰의 끄나풀이었으며, 잠재적인 경쟁자와 동료들에 대한 첩보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도 이러고도 비판을 할까 봐 비밀경찰들을 풀어서 사찰을 하거나 몇 사람만 모이면 잡아버리는 짓까지 했다. 이렇게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국민들이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비밀경찰이 '국가의 적'이나 외국의 스파이로 의심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체포하고는 재판 없이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해왔으며, 당연히 이 비밀경찰들과 그 일가붙이가 감행한 수탈과 부정부패는 말할 것도 없다.
이때 루마니아의 비밀경찰과 그 끄나풀이나 정보원들을 다 합쳤을 때 그 숫자는 루마니아 인구의 약 1/4 정도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이는 과장된 것이고 실제로는 국민 45명당 1명이 비밀경찰 소속이었다고 한다.[35][36]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밀경찰이었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기 몇 년 전부터는 권력 장악력이 떨어진 차우셰스쿠의 빈자리를 비밀경찰이 채웠다. 문제는 이러한 비밀경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는데, 이때에 들어간 돈은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가끔 차우셰스쿠도 돈의 사용처에 대해 놀랐다고 한다.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의 부하였던 실비우 브루칸이라는 공산당 간부가 직접 계산을 해본 결과 나와 나의 집을 감시하는데 필요한 직원, 자동차, 시간 외 수당 등을 감안하였을 때 한달에 약 20만 레이(Lei)가 들어갔다. 당시 루마니아인의 한달 월급이 2,000 레이 정도였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매우 과장되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차우셰스쿠 집권 시기 비밀경찰의 증언에 의하면, 사람들을 도청하는 일보다 오히려 도청기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역정보를 흘리는 것을 더 중점적으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치 도청된 것처럼 몇몇 사람을 불순한 말을 했다고 잡아버리거나 모든 대화가 도청되는 것처럼 꾸몄다는 증언이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에 전 국가를 도청한 것이 아니라 그냥 도청하는 것처럼 꾸며서 공포심을 주려는 의도였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제기 되고 있다. 왜냐하면 직접 도청을 하는 것보다 도청된다는 소문만으로도 굉장한 심리적 압박과 자기검열을 하는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도청기 숫자가 꽤나 적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인구 1/4가 비밀경찰'도 셰루티타테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퍼뜨린 것이었다고 한다. 물론 군부나 공산당 고위간부들처럼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 특히 차우셰스쿠의 정적들은 반드시 도청했으며, 호텔의 모든 층이나 대통령궁 같은 루마니아 내에서 중요한 장소들은 24시간 내내 도청을 실시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인이 직업과 주소지를 변경하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려면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가능하도록 했으며,[37] 1980년대 초반에 긴축정책을 펴는 김에 외화낭비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당의 고위 간부와 정권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해외여행을 사실상 금지시켰고, 여행객이 귀국하면 반드시 여행 브리핑을 세쿠리타테에 보고해야만 했으며, 만약 일반인이 여권을 신청한다면 직장에서 해고하거나 감시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세쿠리타테는 외국인과 만나면 무조건 24시간 내에 세쿠리타테에 보고할 것을 강요했으며, 판사나 검사에까지 영향을 미쳐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반차우셰스쿠 인사가 단 한 명도 없게 했다. 물론 당시 루마니아인들은 세쿠리타테와 국가의 허락을 받은 기관들을 빼면 외국 신문 읽기가 금지되었으며 허용된 관광지 빼고는 외국인과의 대화도 금지되었고, 당연히 모든 외국 방송 청취도 금지되었으며, 루마니아에서 오고가는 모든 편지는 당국의 검열을 받았다. 심지어 당시 루마니아 전체 인구 2,200만여 명 중 무려 400만 명, 즉 국민 5.5명 중 1명 가량 루마니아 공산당원으로 있었다고 하며, 물론 이들은 차우셰스쿠를 잘 섬긴 덕에 정권의 혜택을 받으며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다.
심지어 티미쇼아라 지역은 '불순분자가 많다'고 판단되어 세쿠리타테의 집중 감시 지역이 되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산책을 가려면 혼자서 산책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이 동행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 이유는 혼자서 산책하면 외국의 첩자와 반차우셰스쿠 인사와 비밀리에 만나러 가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티미쇼아라 지역은 지금은 루마니아인이 다수이지만 20세기에 트리아농 조약으로 트란실바니아와 바나트 지방이 루마니아에 양도되기 전까지 헝가리 땅이었고, 그에 따른 양국에서의 차별이 심했다.
물론 차우셰스쿠에게 반대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들은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을 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가 다음과 같은 비인간적인 대우를 당해야만 했다. 당시 수감자들은 벌거벗은 채 축축하고 어두우며 굶주린 쥐들이 가득찬 감방에 갇힌 채 물 없이 과도한 염분에 절여진 음식을 먹어야 했으며, 끝없는 심문을 받으면서 무자비한 구타와 전기고문을 당한 것은 기본이었고, 그 외에도 두 팔을 벌리고 벽에 고정된 풀무에 묶은 뒤 발이 바닥에 닿지 않게 하거나, 문에 손가락이 짓눌리거나, 알몸으로 추위에 놓여지거나, 고통스러운 자세를 취하거나, 손가락을 단단히 묶고는 그 사이에 막대기를 넣어 손가락을 비틀거나, 권총으로 총살 위협에 처해지거나, 손톱을 뽑는 등의 고문도 당했다. 게다가 고문기술자들은 고문당하는 사람의 동료나 아내가 고문당하는 소리를 녹음해 최대 볼륨으로 들려주거나 망치로 머리를 가격하거나 발바닥을 가스용접으로 지지기도 했으며, 심지어 수감자의 셔츠 밑에 고양이를 풀어넣은 뒤, 고양이를 때려서 이에 놀란 고양이가 발톱으로 피해자를 할퀴게 하는 극악무도한 고문까지 당했다.
다만 후술할 온갖 기행들을 저지르며 국민들을 탄압한 차우셰스쿠는 정작 아이러니하게도 24년간 철권통치를 휘두를 동안 후술할 폭동적 시위진압 외에는 대규모 인명살상과 무자비한 형량과는 거리가 먼 지도자였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이 게오르기우데지 정권보다 '인도주의적'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 사형 대상도 살인범들과 '국가 재산'을 대규모로 횡령한 사람들 정도로 한정했고,[38] 덤으로 차우셰스쿠는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을 징역 20~25년형으로 감형하면서 자신을 '국가의 엄격하지만 친절한 아버지'로 내세우려고 했다. 이처럼 차우셰스쿠의 독재는 투르크메니스탄의 독재자들처럼 대규모 인명 살상보다는 우상화를 위시한 온갖 기행과 억압성에 기인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39][40]
3.3. 루마니아 정교회와의 유착
또한 차우셰스쿠는 공식적으로는 무신론을 내세우며 반체제 사제들을 탄압하긴 했으나, 어머니가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던 것의 영향으로 엔베르 호자, 김일성, 폴 포트 같은 '무신론 국가'를 만든 공산정권 지도자들과는 정반대로 종교에 어느 정도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게오르기우데지 시절보다는 종교 탄압을 대폭 완화한 것은 물론 오히려 종교 지도자들과 친밀하게 지내기도 했다.차우셰스쿠는 1978년에 이전까지 금지되었던, 부쿠레슈티와 몰다비아 밖에서 루마니아어와 헝가리어, 그리고 독일어로 가톨릭 미사를 드리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고, 루마니아 정교회를 믿는 공산주의 관리들이 정교회 세례, 결혼식, 장례식을 하는 것도 눈감아줬다. 또 차우셰스쿠는 모든 교회에 막대한 재정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성직자와 신학생의 군 복무를 면제했고, 교회가 거대한 주일 학교 네트워크를 운영하는 것과 300개의 교회를 신축하는 것도 허용했다. 물론 차우셰스쿠는 1977년에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던 어머니가 사망하자 고향에 교회를 세우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차우셰스쿠가 이렇듯 종교를 이용한 것은 루마니아와 소련을 분리하려는 민족주의적 노력을 위한 것이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게다가 루마니아 정교회 성직자들은 소수를 제외하면 차우셰스쿠 정권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며 차우셰스쿠를 옹호했는데,[41] 어느 정도였냐면 80년대에 차우셰스쿠가 부쿠레슈티의 유서 깊은 성당 건물들은 철거하는 것에도 함구하는 것을 넘어 '도시화와 현대화에 필요하다'며 옹호하기도 했으며, 차우셰스쿠의 루마니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국제 사회에 알리는 것을 거부했고, 차우셰스쿠에 반대하는 설교를 한 사제들을 교파에서 쫓아내기도 한 데다가 심지어 루마니아 정교회 사제 중 80~90%가 세쿠리타테 정보원이었다는 보고서도 있다. 다만 후술하듯 테옥티스트 아러파슈(Teoctist Arăpașu, 1915–2007)[42] 대주교처럼 정권의 강압으로 억지 찬양을 한 사람도 있었다.
3.4. 엽기적 행각과 정책들
밑은 그 시절 차우셰스쿠 및 루마니아에서 일어난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실화 모음이다.- 차우셰스쿠가 보는 서류는 보통 글씨에 비해 3배나 크게 쓰여졌는데, 그 이유는 차우셰스쿠가 지독한 원시였음에도 공석은 물론(?) 사석에서도 안경을 쓰는 것을 싫어해서인데 덕분에 종이와 잉크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것은 아래의 다른 사안들에 비하면[43] 그나마 새발의 피였다.
- 국가의 모든 결정은 거리 이름 변경 허가 여부와 같은 사소한 것조차 전부 차우셰스쿠 부부의 직접적인 승인을 거쳐야 했으며, 차우셰스쿠는 백화점의 진열장부터 부쿠레슈티 국립 극장의 실내 장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제와 관련하여 최고의 권위자로 묘사되었다.
- 지독한 결벽증 환자로, 세균 및 암살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는데, 실제로 차우셰스쿠는 1977년에 부쿠레슈티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부상자들로 가득 찬 병원에 갔을 때 병이 전염될 것 같아서 부상자들과 악수하지도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1978년 6월 13 ~ 16일 사이에 영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악수한 직후 그 자리에서 바로 손을 알코올로 소독했다. 친한 친구나 가족, 친척, 지인 사이에서도 이랬다가는 단칼에 사이가 틀어져도 할말없을 정도의 무례를 신뢰가 중요한 외교적 현장에서, 그것도 그 나라와 나라의 국민을 대표하는 국가 원수에게 대놓고 이랬다는 것은 한 마디로 "나 당신 도저히 못 믿겠어.", "당신 더러워서 손 대기 싫어."라고 면전에서 모욕을 줘버린 것이다.[44] 물론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를 보고 일단 앞에서는 일부러 함구했지만, 차우셰스쿠가 돌아가자마자 크게 분노하며 켈러헌 총리와 오언 외무장관을 호출한 뒤 "어떻게 초대해도 저따위 인간을 초대할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라며 매우 강하게 극대노하며 질책했다고 한다. 영국의 여왕이자 즉위했을 때부터 평생동안 총리와 내각의 정책에 대해 언급을 사양하며 정치적 행보와 대중들 앞에 나서기를 최소화했던 엘리자베스 2세가 이처럼 총리에게 불같이 화낸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고 한다.
- 부쿠레슈티에 지하철을 건설하던 1978년에 차우셰스쿠는 대학교의 신입생들에게 할 환영 연설을 할 때 더 나은 배경을 얻기 위해 지하철 입구로 쓰기 위해 파낸 1만 2천 입방미터 정도의 구멍을 12시간 이내에 채우라고 요청했다. 이를 위해 밤새도록 수백 명의 노동자와 기계가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동원되었고, 도시의 다른 지역에서 나무를 뿌리뽑고 풀을 뽑아와 새로 심었다. 이렇게 전날 오후 7시에 멀쩡하게 있던 구멍이 단 11시간 만인 오전 6시에 완전히 메워진 후 벤치까지 갖춘 어엿한 공원이 탄생했다.[45]
- 1978년에 영국에 방문했을 때 자유당 지도자였던 데이비드 스틸(David Steel, 1938~)이 선물해준 검은색 래브라도 개 '코르부(Corbu)'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밤에는 항상 코르부와 같이 자고 셰로나라는 래브라도 암캐를 짝으로 지어주었다. 여기로 끝나면 전혀 기행이라고 볼 수 없지만, 차우셰스쿠는 거기서 더 나아가 코르부한테 침대, 텔레비전과 전화기, 고급 가구까지 딸린 전용 침실을 주었고, 이 개에게 최고급 고기를 먹였으며,[46] 그것도 모자라 코르부를 보호하기 위해 개의 음식을 먹어보게 하는 전속의사까지 두었다. 게다가 런던 주재 루마니아 대사는 매주 새인즈버리즈(Sainsbury's)라는 슈퍼마켓에 가서 영국산 개 비스킷을 사다가 외교 가방에 넣어 돌려 보내라는 공식 명령을 받았으며, 심지어 코르부는 전용 리무진 행렬까지 가졌던 데다가 1989년 말에는 무려 루마니아군의 대령으로 추대되었다.(...)[47][48] 게다가 차우셰스쿠가 방문한, 부쿠레슈티 구시가지에 있는 어느 큰 병원 지하에서 코르부가 쥐를 잡기 위해 의사들이 기르던 고양이와 싸우다 코르부가 다치자 차우셰스쿠는 분노하여 그 병원을 통째로 없애버렸다.
- 1981년에 세계교회 개혁동맹이 루마니아에 2만 권의 성경을 배부했으나, 차우셰스쿠는 이 중 200권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조리 몰도바의 브러일라의 공장으로 보내 문자 그대로 화장지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파쇄가 제대로 되지 않아 화장지에서 성경 구절이 보이기도 했다. 요즈음 시대에 이런 짓을 했다가는 나라 망신과 평판 하락은 따 놓은 당상이고,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에도 악영향이 되는 건 물론 국내에서도 종교계의 거센 반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차우셰스쿠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방세계로부터 큰돈을 빌려와서 무리하게 공업화 정책을 펼쳤다가 외채와 국가 재정 적자가 말도 안되게 굉장히 심각해졌다. 1971년에 12억 달러 정도였던 루마니아의 외채가 1982년에는 무려 130억 달러로, 불과 11년 만에 외채가 무려 11배나 뛰어오른 것. 이걸 타파한답시고 1980년대 중반부터 수입은 일절 하지 않고 수출에만 올인하는 심히 엽기적인 경제정책을 밀어버렸다. 아이러니한 것은 오히려 저 정책 덕분에 1989년 3월에 뜬금없이 계획 기간보다 이른 기간에 부채를 거의 다 갚았다는 것이다. 이게 왜 문제냐면, 당시 공산국가들은 동물농장에서 알 수 있듯이, 중공업을 주력 정책으로 삼는 것을 넘어서 중공업에 대한 집착이 심했으며, 계획경제에 유리한 중공업에 과도한 투자를 쏟아부었고, 시장경제 위주로 돌아가는 경공업 분야에는 소홀했다. 그 결과 생필품이 모자란 상황이 생각보다 흔해서 그런 물품은 상당 부분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49] 덤으로 이 '수입은 안 하고 수출만 하는~'이 단순이 외국제 생산품 수입을 막고 무조건적인 자국산 생산품 수출로만 끝났다면 말 그대로 수입만 안 하는 것이니 그나마 괜찮겠는데, 단순한 수입 중단이 아닌 사들일 수 있는 건 다 안 사고 팔 수 있는 건 무조건 다 팔아버리는, 그러니까 식량이고 자원이고 필요해도 수입해야 한다면 안 사고, 길 가는 아이가 먹고 있는 사탕이나 과자, 아이스크림, 음료수조차도 수입하겠다는 국가가 있다면 동의도 없이 다짜고짜 뺏어서 다 팔아버리기만 하는 정신나간 정책이라서 문제.[50] 심지어 이 정책으로 루마니아 국민들에게 필요한 농산물들은 거의 다 수출당해 루마니아 국민들은 식량난에 허덕이게 되었으며, 이는 과거 일제강점기의 산미증식계획을 뛰어넘는 수치였다. 공업에 필요한 원료나 기계 부속품들까지 수입이 금지당했다. 이렇게 정책이 폐업 직전의 재고처리와 비슷하니 멀쩡하던 나라라도 안 망할 수가 없다. 그런 와중에도 '특별 허가'를 받은 극소수의 물건들, 즉 엘레나를 위한 고급 밍크코트와 차우셰스쿠 일가의 사치품만큼은 특별히 수입이 허용되었다.
- 차우셰스쿠의 가족과 친척들 중 40여 명을 정부의 요직에 앉혔다. 그 일례로 영부인 엘레나는 말할 것도 없는 정부의 2인자였으며, 그보다 8살 어린 남동생 일리에는 육군 장관이자 국방부 차관이었고, 또다른 남동생 니콜라에 안드루거는 내무부 차관 겸 경찰총장이었으며, 이보다도 어린 남동생이었던 이온도 농업과학아카데미를 이끌며 국가 경제 계획을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엘레나와 함께 차우셰스쿠 사후에 권력을 세습받을 후보자로 예측되었던 차남 니쿠는 청년동맹 비서를 거쳐 트란실바니아 지역 남부의 시비우 주의 당서기였으며, 엘레나의 남동생도 노동조합을 총괄했다. 루마니아 사람들은 이를 '가족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 헝가리인에 대한 탄압 정책을 실시하여 헝가리인의 토지 80%를 몰수해 루마니아인에게 재분배했고, 헝가리어 교육과 대화를 범죄로 간주한 후 헝가리인들에게 헝가리를 비난하는 내용의 교과서를 배우게 했으며, 심지어 '산업화 단지 조성'을 명분으로 헝가리인 마을들을 불도저로 대량으로 파괴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는 서구의 요청으로 1984년 5월 26일에 완공한 다뉴브강과 흑해를 연결하는 59.2km의 운하를 건설할 때 도브루자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헝가리인[51] 수십만 명을 동원했다. 얼마나 노동이 가혹했는지 수용자들 대부분이 운하 건설 도중 사망한 것은 물론, 이 운하의 별명이 아예 '죽음의 운하'였을 정도였지만, 차우셰스쿠는 이 사업을 '달갑지 않은 소수 집단'을 루마니아에서 몰아낼 기회라 여겼고, 완공 당시에는 이를 자신의 최고의 업적으로 포장했다. 운하 건설 비용은 당대 가치로 20억 달러(2022년 가치로 57억 달러)로 추산되었다.
- 차우셰스쿠의 하인이 기르던 앵무새 한 마리가 훈련받은 대로 "니쿠 바보"를 연발했는데, 앵무새는 그 자리에서 포획되어 루마니아 비밀 경찰에게 끌려가 심문받은 뒤 경찰들에게 목이 비틀어져 비참하게 죽었다.
- 인민들은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도 평양시의 주석궁을 보고 혹한 나머지 차우셰스쿠 자신의 치적을 기념한답시고 부쿠레슈티 시가지의 1/4를 파괴하고는 인민궁전(Casa Poporului, 혹은 Casa Republicii)[52]을 세웠다. 모든 건축 자재는 루마니아산이었다고 한다.
이 건물 하나를 세우기 위해 부쿠레슈티에 있는 유서깊은 석조 건축물들을 대거 철거했고, 근처에 있던 교회 하나는 통째로 35m 옮겨졌다. 이게 어느 정도 면적이냐면 부쿠레슈티 시가지 전체의 약 1/3에 달한다. 내부 장식도 '서양의 어느 바람둥이가 지은 것 같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호화로웠으나, 차우셰스쿠 본인은 5년 만에 죽어서 별로 오래 살아보지도 못했다. 이 건물은 2022년 기준으로도 단일 건물 중에선 세계에서 미국의 펜타곤, 태국의 신 국회의사당 다음으로 거대한, 세계 3위 규모의 거대한 건물이다.[53] 그러나 이 건물은 크기만 컸지 기능적인 면에서는 쓰레기 그 자체라는 혹평을 받았다. 그리고 이 건물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심미안이라고는 전혀 없고 건축학 같은 것을 전공하지도 않었던 차우셰스쿠가 그저 기분에 따라 그때마다 설계도면과 디자인을 싹 다 바꿔버리는 일을 일삼은 탓에 설계 도면보다 건축 규모가 더 커져 균형미 같은 것은 찾아볼 수조차 없으며, 나중엔 재정난 때문에 대리석으로 반쯤 꾸며진 방을 시멘트로 덮어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심지어 있던 계단을 철거하고 다시 만드는 일까지 있었다. 그가 세운 철기둥은 그가 사형되자마자 미관상의 이유로 철거되었다. 이 건물은 공산 정권이 무너진 뒤엔 루마니아 국회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인민궁전 항목 참조.
- 평양에 방문했을 때 도시의 모습을 본 뒤, '체계화 프로젝트'라는 계획을 세워 전국을 직선 배치로 개조하려고 1974년부터 수천 개의 마을들을 강제로 철거한 후 그 주민들을 엘리베이터와 부엌, 상하수도, 화장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아파트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특히 인구가 1천 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들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집중적으로 파괴당했다. 이는 1979년부터 시작된 에너지 파동으로 중단될 뻔했지만, 1988년에 7천 ~ 8천 개의 마을을 파괴하려는 방식으로 재개하려고 했다. 차우셰스쿠의 고향 마을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었으나, 차우셰스쿠의 생가만큼은 허물어지지 않고 보존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차우셰스쿠는 '농업 혁명'을 명분으로 부쿠레슈티 부근 농민들이 살던 7천채 가량의 주택을 강제로 철거하고는 손쉬운 감시와 통제를 위해 '인민 센터'라는 아파트에 강제로 입주시켰다. 게다가 그 아파트 자체도 돼지우리와 비견될 정도로 조악했다.
- 새로운 도시계획을 명목으로 부쿠레슈티에서만 16세기 초에 세워진 유서깊은 교회를 포함한 총 23개의 교회를 철거했다. 이렇게 부쿠레슈티에서 1983년부터 1988년 말까지 3.8km²의 영역이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1977년에 일어난 대지진 당시 파괴된 영역 넓이가 이 철거로 파괴된 지역 넓이의 18%에 불과했기에 이는 역사상 평화시에 일어난 가장 큰 도시 파괴라고 한다. 차우셰스쿠가 얼마나 철거를 좋아했는지 당시 루마니아 사람들은 차우셰스쿠의 부쿠레슈티 파괴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빗대어 차우시마(Ceaușima)라는 말을 즐겨썼을 정도였다. 참고로 '차우시마'로 간주된 5km² 중 절반이 부쿠레슈티 역사지구의 약 20~25%를 차지하는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이었다.
- 대중 집회의 앞줄에서 노동자를 가장한 비밀경찰들을 세워놓고 차우셰스쿠를 찬양하게 했으며,[54] 음량이 부족한 환호는 미리 녹음한 환호성을 확성기로 재생하는 방식으로 만회하며 국민들에게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꾸몄다. 실제로 그의 집권 당시 마지막으로 있었던 거리 행진에서도 국민들이 소극적인 반항으로 아무도 함성을 지르지 않자 영상에서 소리를 합성해 넣었다.
- 김일성의 부자 세습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그것까지 벤치마킹 해 자기 자식에게 권력을 물려주려고 시도했다. 그 후계자로 낙점된 사람이 바로 막내아들 니쿠 차우셰스쿠.
- 집권 말기인 1989년에는 상점에 고기, 계란, 우유가 없다시피 했는데도 '루마니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차우셰스쿠 동지의 지도력 하에 루마니아 인민들은 '높은 생활 수준'을 가지게 되었다'고 선전하며 그 '증거'로 선반들이 식료품으로 가득 찬 상점을 차우셰스쿠가 방문하는 모습을 국영방송으로 송출했는데, 당연히 이 상점은 촬영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연극 무대'였다. 당시 송출된 영상
- 자신을 '애민 정신이 강한 지도자'로 선전하며 자신의 실책들을 모두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겼고, 따라서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국민들은 '차우셰스쿠가 상황을 알기만 한다면 쇠빗자루를 들고 가게 주인들을 공격할 텐데'라고 믿게 되었지만,[55] 실제 차우셰스쿠는 휴일마다 하술할 초호화 저택에서 호화로운 잔치를 열었다.
- 차우셰스쿠를 비방하는 내용의 전단이나 대자보가 루마니아 전역에서 유포되기 시작했는데, 차우셰스쿠는 이들이 타자기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자 1983년 3월 경에 루마니아 전국에 타자기 대여를 금지시키고 사용하더라도 경찰의 증명서를 받아야 가능하게 했다.
- 깉은 해 크리스마스에 '크리스마스가 정상 근무일이라는 것이 이상하다'는 설교를 한 헝가리계 가톨릭 신부 팔피 게저(Pálfi Géza, 1941–1984)를 바로 그 날에 연행해 무자비하게 구타했고, 결국 그 사제는 구타 후유증으로 3달도 못 버티고 죽었다.
- 말년의 10년 동안 당뇨병을 앓았음에도 수년 동안 치료를 안 받았는데, 그 이유는 차우셰스쿠가 선술했듯이 주치의조차도 믿지 못했을 정도로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내 엘레나가 차우셰스쿠에게 인슐린 주사를 주기적으로 투여해 줘야 했다.
- 1989년 3월에 원로 공산당원 6명이 차우셰스쿠의 정책들을 비판하는 편지를 보내자, 차우셰스쿠는 이들을 반역자로 몰아간 후 강제로 체포하고 심문한 후 4명을 가택에 연금시키고 2명을 구금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중에는 루마니아 공산당의 창설자 중 한 명이었던 데다가 무려 94세의 노인이던 콘스탄틴 프르불레스쿠(Constantin Pîrvulescu, 1895–1992)도 있었다.[56]
물론 근거가 없거나 과장된 야사들이 사실인 듯 퍼져나간 것들도 일부 존재한다.
- 자국인들이 구두 1켤레를 구하기 위해 여러 곳의 가게를 다녀야 할 만큼 경제 사정이 어려웠음에도 차우셰스쿠가 낭비를 일삼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매일 새 와이셔츠나 양복을 입고 나서 버렸고 그 옷을 곤룡포처럼 불태웠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차우셰스쿠가 몰락한 직후인 1990년에 차우셰스쿠의 양복 재단사가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했다.[57]
- 차우셰스쿠의 실제 별명 가운데 하나는 '루마니아의 흡혈귀'였는데, 그 이유는 생전에 주기적으로 건강한 어린아이들의 피를 수혈받았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차우셰스쿠의 양복 재단사가 차우셰스쿠의 사후 흡혈귀 전설을 연상시키기 위해 지어낸 거짓으로 판명났다.
- 1977년 3월 4일에 수도 부쿠레슈티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차우셰스쿠가 '구조작업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물자 수송을 원활히 하기 위해 건물의 잔해를 치워야 한다'며 매몰자가 1천명 가량 생존해 있던 상황에서도 구조 작업을 중단하고 잔해를 그냥 불도저로 싹 밀어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말이 있으나, 실제로는 나이지리아를 국빈 방문했다가 지진 소식을 듣고는 루마니아로 황급히 귀국하여 지진 현장에서 생존 한계로 간주되는 기간을 넘어서도 희생자들을 계속 구출하라는 지극히 정상적인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 팩트이다. 이는 차우셰스쿠가 이 지진 이후 '공산주의 이전의 부쿠레슈티를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운 부쿠레슈티를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을 실현할 기회로 삼으며 자기 취향에 맞는 건축물을 짓기 위해 수천 채의 집을 불도저로 파괴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58]
- 차남 니쿠가 형 발렌틴, 누나 조이아와 달리 노는 것을 좋아해서 각국의 외교관들이 모여 만찬이 진행 중인 탁자 위로 올라가 소변을 갈겨댔다는[59] 설이 퍼져 그가 아주 개념 없는 인간이라고 여겨질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차우셰스쿠 사후 1년 뒤인 1990년, 니쿠는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차우셰스쿠의 자식들 가운데 아들 니쿠가 차우셰스쿠의 부부에 대한 불만 표출이 가장 적었고 그도 물론 비밀경찰의 감시 아래에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이들의 만행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민들은 니쿠가 차우셰스쿠에 협조했고 온갖 문란하고 난잡한 생활을 일삼았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재판에서 니쿠의 모습은 정상적인 수준을 넘어서 개념찬 사람이라는 증언과 사실이 많이 발견되었다. 1989년 12월 혁명이 있기 몇 년 전 니쿠가 시비우 지역 당 1서기로 있을 때 식량배급량을 늘리는 등 여러가지 책임감 있는 조치를 취했다고 하며 재판에 나온 많은 증인들은 니쿠가 시비우 주민들의 식량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고 증언했으며, 니쿠가 발렌틴과 조이아 수준은 아니더라도 재평가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심지어 세계올림픽에서 여자 체조 부문의 스타로 떠올랐던 나디아 코마네치에게 구애를 했다가 거절당하자 그녀의 손톱을 뽑아버렸다는 이야기 등 나디아 코마네치와 관련된 모든 루머들은 전부 거짓으로 확인되었다. 니쿠가 학창시절부터 워낙 놀기를 좋아했는데다 술버릇이 고약했고, 여자관계가 방탕했던 것들까지은 전부 사실이나, 강간을 일삼고 난잡한 성관계를 예사로이 한 것에 학대 행위를 즐겼다는 소문은 어디까지나 당시 루마니아의 영 좋지 않은 경제 상황과 사기가 급전직하하자 흉흉한 민심 속에 터져 나온 루머일 뿐이다.
3.5. 인구 증가 정책
여성에게 가장 고귀한 명예는 바로 출산과 양육이다. 여성에게는 어머니가 되는 것 말고 다른 인생의 목표가 있을 수 없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이쪽도 방법이 너무나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인구를 증가시키려면 불어난 인구를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인프라를 만들어 두거나 인구증가에 맞춰 늘리는 게 필요한데,[60] 차우셰스쿠처럼 덮어놓고 무작정 인구만 늘리면 헬게이트만 열릴 뿐 좋을 일이 없다. 차우셰스쿠 치하의 루마니아처럼 인프라조차 안되는 나라가 무작정 인구만 늘리면 나중에 따로 방출을 하지 않는 한 고령화로 인한 부양인구 증가 + 생산인구 감소 콤보를 맞게 된다. 보통 2명 정도의 인구 유지를 조건으로 증가를 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차우셰스쿠는 인구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을 하고는 온갖 수단을 전부 동원해서 인구를 늘리려 했다. 처음에는 낙태와 피임, 이혼을 금지했다. 그러자 서로가 싫었던 부부들이 서로 별거를 시작하자 차우셰스쿠는 경찰까지 동원하여 여자의 배란기 때에 부부가 같이 있었는지를 직접 조사하여 만일 같이 있지 않으면 똑같이 세금을 물렸다. 거기에 나중에는 부부간의 정상적인 성관계 횟수를 일주일에 3~4회로 규정하고는 아예 40세 이하의 여성에게 아이를 최소 4명이나 낳도록 했으며 아예 낳지 않으면 역시 무거운 세금을 물렸다. 이때 내야 할 세금 액수가 상상을 초월할 수준인데 한번 걸리면 연봉의 20~30% 정도의 돈을 세금으로 내야했다. 웃긴 사실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장애인이나 심지어 불임인 여자나 고자에게까지도 세금을 물렸다는 사실이다.[61]
더 심한것은 정작 간부 부인들은 악랄한 세금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물론 차우셰스쿠 부부는 나중에는 40세 이하의 여성들에게 강제로 자식을 5명이나 낳으라고 강요한 주제에 정작 본인들은 자식이 3명밖에 없었다. 다만 강간과 근친상간으로 임신한 아이를 낙태하는 것은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다. 아무튼 이러한 출산강제정책은 처음에는 인구를 늘리는데 큰 효과를 보았지만 나중에는 사람들이 피임을 할 방법을 찾게되면서 그 효과는 떨어져서 1970년대에 출산율이 2명대 중후반으로 진입한 이래로[62] 1989년 혁명직전까지도 3명을 넘기지 않은 채로 지속되었다. 또한 나중에 루마니아 혁명을 기점으로 낙태금지가 풀리면서 출산율이 급감한데다가, 실업문제까지 겹쳐 해외로 인구가 급속히 빠져나가 90년대 후반~2010년대의 루마니아는 인구감소로 골머리를 앓았고, 2010년대가 되어서야 출산율이 1.8명대로 회복되었지만 베이비붐 세대들이 아이를 낳을 시기를 놓친질라 소잃고 외양간을 고친다는 평을 받을 때가 많다.
참고로 루마니아의 형제국가인 몰도바는 차우셰스쿠처럼 낙태를 금지하는 정책을 펴지 않았는데도 농촌지역에서 다산으로 1970년대에는 출산율이 루마니아보다 살짝 낮은 수준이었고, 1980년대에는 루마니아보다 훨씬 출산율이 높아졌다. 물론 차우셰스쿠의 무식한 방식이 초래한 사회문제점까지 감안하면 당시 몰도바가 훨씬 더 건전한 방식으로 출산장려정책을 펴면서도 비중앙아시아권 소련SSR 가운데서 높은 수준의 출산율을 기록했으니 여러모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정책이라 할수있었다.
이 정책이 루마니아 사회에 안긴 가장 큰 재앙은 다름아닌 성병이었다. 왜냐면 루마니아인들은 차우셰스쿠의 핍박으로 강제로 아이를 가져야만 했고 만약 그러지 않으면 굶어죽게 되었기에 배우자가 성병이 있더라도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것이다. 물론 성병을 확인하고 치료를 하면 되겠지만, 차우셰스쿠에게 그런 데 신경쓸 머리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욕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당시 배우자 이외에 대리모 대리부 지식을 가지고 있던 루마니아인도 없었고. 결국 온갖 성병이 창궐하게 되었다. 추가로 성행위를 통한 에이즈 환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덤으로 차우셰스쿠는 신생아 건강을 이유로 모든 영아들에게 수혈을 하도록 했는데, 문제는 혈액 검사도 제대로 안 한 채 수혈을 해서 신생아 수백 명이 에이즈 환자가 되고 말았다.
이딴 짓거리를 하다보니,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인접국인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나 헝가리 인민공화국 등으로 탈출을 강행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인구가 줄어든다며 열받은 차우셰스쿠는 도망치는 사람들을 모조리 총살하라고 명령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월경(越境)을 시도하다가 군인들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런 막장스러운 정책을 시행한 결과 차우셰스쿠의 바람대로 많은 수의 아이들이 태어났지만 문제는 억지로 인구를 늘리려고 했기 때문에 그 부작용이 심각했다. 아이들을 양육할 사회 기반이 없었고 자식을 많이 낳은 사람에 대해 경제적인 지원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버려진 아이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해외에 있는 차우셰스쿠의 추종자들은 차우셰스쿠가 '국방 예산을 절감해 아동복지를 강화시켰다'고 추앙했으나 이미 루마니아의 아동복지는 유럽에서 알바니아 버금가는 수준으로 최악이었다.
게다가 차우셰스쿠는 아이를 살려서 버리는 것을 처벌하지도 않았다. 더 큰 문제는 태어난 아이들이 어른이 되자 일자리가 없어서 실업자가 되고 말았단 거다. 1980년대 후반의 루마니아는 불황기로 국가예산의 상당수를 외채상환에 썼던지라 일자리를 대규모로 창출할 여력이 없었기때문이었다. 자세한 건 항목을 참조할 것.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사실은 차우셰스쿠를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던 세력은 바로 이 정책으로 태어난 세대의 아이들이었으며 반대로 차우셰스쿠에게 가장 철저하게 충성하던 세쿠리라테 역시 이 정책으로 태어난 세대의 아이들이었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차우셰스쿠 아이들
3.6. 에너지 절약 정책
무리한 산업화로 루마니아가 부채 문제에 시달리게 되고 개인적으로 돈을 펑펑 쓴 탓도 있는지라 차우셰스쿠는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에너지 절약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 정책은 어느 면에서는 그 인구 정책이나 우상화, 수출 올인 정책보다도 변태적이고 참혹하기 그지없었다.전기는 주로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 공업용과 수출용으로 우선 공급하고, 가정용 전기의 공급은 극도로 축소하였다. 수도에서도 전기 공급을 극히 제한하고, 온수는 아파트 위층에는 아예 공급조차 되지 않은 데다가 공급되는 곳에서도 일주일에 단 하루만, 그것도 하루에 2시간만 공급하다가 점차 제한시간이 줄었으며, 수도에서도 전력 공급을 극히 제한한 데다가 사람들에게 사전 통보도 하지 않은 채 느닷없이 정전되는 일이 하루에 몇 번이나 계속된 데다가 하루에 최소 1시간 정전되는 일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파트에도 한 겨울에만 조금씩 난방을 넣어 줬기 때문에[63] 루마니아의 아파트는 겨울에 실내 온도가 5~12도가 되었고, 냉장고와 진공청소기, 세탁기의 사용금지는 물론 전구도 40와트짜리 1개만 사용하도록 강요하였고 1집 1등 켜기, 가로등 세 개 중 한 개만 켜기 규정을 지켜지는지를 철저히 감시했다. 물론 일요일에는 모든 대중 교통의 운행이 금지되었으며, 정기적으로 자가용 운전 금지령이 내려졌고, 연료를 절약하기 위해 농부들에게 '기계'인 트럭과 트랙터 대신 '육체 노동'에 쓰이는 수레와 말을 쓰는 것을 권장하기도 했고, 하루에 4시간 이상 난방을 켜는 사람도 구속되었다. 그리고 석유 배급은 한 달에 30리터로 제한되었으며, 가구당 월 최대 허용 소비량이 20kWh로 지정되어 이 한도를 초과하면 막대한 세금이 불과되었다.[64] 물론 루마니아에 있는 모든 레스토랑과 영화관, 공공 시설은 오후 9시만 되면 문을 닫아야만 했다. 이런판이니 돈 좀 있다 싶은 가정에서 자동차 배터리와 가스 램프를 따로 구입해서 갖추는것은 필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전기가 들어오지 않다보니 루마니아에서는 매우 황당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갑자기 정전이 되면 탄광에서 일하던 광부들은 긴 사다리를 타고 막장을 벗어나야 했고, 환자가 70세가 넘으면 구급차를 보내지 못했으며, 수술을 하던 의사는 어두운 수술실에서 환자를 끝까지 살피지 못하고 수술을 그만두어야 했으며, 어린 환자에게 씌워 놓았던 산소 호흡기가 정전으로 갑자기 멈추거나, 환자의 인공장기가 움직임을 멈춰서 사망하는 일이 생겼다. 거기에 인구 증가를 위해 공장 노동자들의 낙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에너지 절약을 이유로 초음파 검사기를 쓰지 않고 수치스러운 방법까지 동원하여 임신 여부를 확인하려 했다. 게다가 주사바늘을 재활용하기까지 하여 이 영향으로 기껏 낮춰놓은 유아사망률도 대폭 올라 루마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유아사망률이 높은 곳으로 꼽히게 되었다. 1983년 겨울에는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 있던 수십 명의 아기가 갑작스런 인큐베이터의 정전으로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차우셰스쿠가 자신의 '성공적인 경제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사회주의 승리의 거리' 등의 거리에는 전력이 끊임없이 공급되었다.
또한 1970년대까지만 해도 루마니아의 텔레비전 방송은 동구권에서도 꽤 재미있는 방송을 내보냈고, 이웃 몰도바에서도 루마니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1985년 1월 20일에 에너지 절약 정책이랍시고 모든 지역 라디오 방송국들과 당시 유이한 방송국이던 국영방송 TVR1과 TVR2 중 TVR2를 강제로 폐국하고는[65] 유일하게 남은 방송국의 TVR1의 방송시간도 평일 오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2시간 정도로 줄인 데다가[66] 당시 루마니아의 방송은 오후 8시에 시작하여 20분간 뉴스를 송출한 후 전체 방송시간의 1/3이나 되는 40분 가량은 항상 전당 대회 녹화나 차우셰스쿠를 우상화, 찬양하는 방송 프로그램들만 내보냈고, 후반부는 연극, 오페라, 영화를 50분 정도 송출하고는 짧게 뉴스를 송출하는 것으로 방송을 끝마쳤다.[67] 이러다보니 부쿠레슈티 지역의 주민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불가리아어로 나오는 불가리아 TV방송을 보거나 TV 방송 시청을 포기하는 대신 영화를 감상하거나 책을 읽을 지경이었고, 이외에도 북부지역 주민들과 서부지역 주민들은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 구소련의 TV 방송을 수신하려고 애썼다.[68] 덤으로 TV방송 시간 축소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외국 TV드라마와 영화의 방송횟수가 크게 줄어들자 VHS를 갖출정도로 부유한 가정에서 불법비디오를 입수하기 시작했고, 루마니아의 불법 비디오 시장도 이때부터 활성화되었다.[69] 1980년대를 보낸 이웃 몰도바 주민들도 1980년대 초반까지는 루마니아 TV채널이 흑백이기는 했어도 서방 TV드라마와 애니메이션도 종종 틀어서 재미있게 봤었는데, 갑자기 방송시간을 줄이면서 재미없는 방송이나 내보내서 시청을 안하게 되더라라는 추억담을 종종 꺼내기도 한다.
3.7. 무리한 산업화 정책과 긴축정책
이 역시 위에서 언급한 인구 정책과 비슷한 사례. 공업화로 해외에서 빌린 채무가 130억 달러에 이르자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정부가 다른 나라에게 채무를 지고 있다는 것은 국치다."라는 발언을 했고, 그 국치를 씻기 위해 루마니아 정부는 모든 복지예산을 긴축하고 세율을 올려서 불과 9년만에 100억 달러의 채무를 다 갚았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1950년 ~ 1975년 사이에 루마니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국가 중 하나였는데, 이것은 외채를 끌어와 실시한 중공업 투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그렇지만 중공업 투자에만 너무 몰빵한 나라들이 결과적인 말로가 안 좋아졌듯[70] 루마니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50년대 ~ 1970년대에 루마니아는 루마니아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양의 농작물을 바탕으로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수준을 넘어 해외로 수출할 정도로 발달되어있었기 때문에 식료품 부족사태는 1960년대와 70년대 루마니아에서는 소련 지방도시나 중국에서나 벌어지던 일이라면서 비웃던 수준이었고, 경공업, 중공업도 상당히 발달되어있어서 석유가공으로 큰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는 서방과의 관계 개선으로 서방자본이 대거 루마니아로 흘러들어와있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 루마니아는 자가용의 보급이 시작되고, 텔레비전과 세탁기 등의 가전제품이 대중화되었을 정도로 국민 생활 수준도 향상되고 있었다.
하지만 2차 오일 쇼크가 터진 이후로부터 상황은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다. 1차 오일쇼크 당시에는 루마니아는 제법 이익을 봤었고, 추가로 원유정제공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대규모로 외채를 도입했는데, 막상 완공되었을 때는 2차 오일쇼크가 끝났을때라 원유정제로 큰 이익을 보지 못했고, 결국 막대한 빚으로 남게 되었다. 특히 1977년에 대지진이 벌어지면서 복구자금을 외국은행들로부터 대규모로 융자받아야 했던데다가, 1980년에 폴 볼커가 단행한 금리 인상으로 루마니아도 외채를 갚을 길이 막막해지자 차우셰스쿠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긴축정책을 실시했다. 여기에 긴축정책의 대강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IMF가 권고한 것이었다. 차우셰스쿠는 IMF가 권고한 목표를 맞추기 위해서 복지와 생필풍 공급을 축소하였다. 하지만 차우셰스쿠는 외채 채무 조정을 하기보다는 외국인 투자자들한테 꼭 갚을것이라고 큰 소리 치면서 자국민한테 빡빡하게 군것이 문제점이었다. 1983년도에 미국 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도 루마니아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는것을 감안하여서[71] 차우셰스쿠한테 채무 조정을 권했지만, 차우셰스쿠는 이를 거부하고 빚을 끝까지 다 갚았다.
1981년 가을부로 1954년에 폐지된 배급제가 다시 부활했다. 이에 따라 루마니아 국민들은 수출하고 남은 돼지 비계를 정제하여 하얗게 굳힌 라드, 소시지, 동물 내장, 닭발같은 잡부위만 먹을 수 있었을 정도로 어렵게 살았고, 이마저도 몇 시간씩 줄서서 기다려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도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소련에 수출되는 루마니아산 고기의 양은 이전의 3배로 늘었고, 옥수수와 과일, 채소, 와인 등도 모두 수출되었다. 물론 외국 채권자들은 돈 잘 갚아주니까 굉장히 좋아했지만...
차우셰스쿠 정권 말기에 루마니아 국민들은 하루에 빵 300g을 배급받았고, 한 달 동안 돼지고기 500g, 치즈 200g, 식용유 반 리터, 설탕 1kg, 버터 100g, 달걀 5개만 배급받는 것으로 규정되었는데, 참고로 돼지고기 500g은 고작 두 끼 분량이었으며, 그 배급량도 명목상의 수치였지 이 수치만큼 제대로 배급받은 국민들은 없었다.[72] 비록 농업의 기계화 및 화학화 조치 덕분에 1950년에 인구 1인당 300kg 이상의 곡물이 수확되던 게 1982년까지 이 양은 1인당 1톤으로 증가하고 육류 생산량도 29.5kg에서 100kg으로 증가하였지만, 늘어난 물량들은 수출용으로 배정되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에게 이 수치는 그림의 떡이었다. 이것이 상술한 에너지 절약 정책까지 겹치며 루마니아인들은 알바니아[73]를 제외하고는 유럽에서 가장 낮은 생활 수준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1989년 기준으로 루마니아의 1인당 GDP는 1818달러[74]로 세계 평균(3882달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개발도상국 신세였다.[75]
게다가 당시 루마니아에서는 배급으로 받은 것 이외에 불법으로(...?) 얻은 고기를 먹으면 감옥에 갈 수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도시민들은 풍족하게 먹을려면 농촌에서 떨이로 파는 농축산물을 가져오던지 아니면 몇배의 웃돈을 주고 암시장에 가야만 했다. 그래서 이 당시 루마니아에서는 자동차 부품공장이나 식료품 공장에서 물건을 빼돌려서 웃돈에 팔아치우는 것이 재테크 수단이 되어왔다.
차우셰스쿠는 그럼에도 국민들을 잘 먹이려는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루마니아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으니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는 말만 끊임없이 되풀이했으며, 이런 상황을 보다못한 차우셰스쿠의 딸 조이아가 부모에게 식료품을 사려고 하루종일 슈퍼마켓 앞에서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고충을 부모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차우셰스쿠 부부는 딸의 충고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고, 그나마 후계자인 니쿠가 시비우 책임비서로 재직되었을 당시에 조이아가 봤던 모습과 같은 광경을 본 뒤 충격을 받고 식량공급 요청을 했는데, 이를 못마땅해하면서도 식량공급을 개선해주기는 했지만 일부 지방에 그쳤을 뿐이다.참고로 당시에 라틴 아메리카는 고이율과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빚을 제때 갚지 못하게 되면서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나라들이 부지기수였고, 설사 빚을 갚아낸다 해도 위낙 이자가 비싸서(1980년대 기준으로 10%대) '수입은 안 하고 수출만 하기' 식의 경제 정책을 펴고 국민들을 쥐어짜서 매년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해도 빚을 줄이기 힘든 판이라 채무 탕감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폴란드나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등의 다른 동구권 국가들 또한 1960년대 - 70년대 당시에 서구권에서 대거 차관을 들였는데, 오일 쇼크와 이자율 상승 2연파를 맞은 상황이라 경제구조적으로 빚을 갚아내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빚을 탕감해 달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하던 상황이었고, 유고슬라비아는 몇 차례씩 외채를 탕감받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마니아는 고이율에 대해 몇번 말을 꺼낸 것을 빼면 별 다른 군소리하지 않고[76] 꼬박꼬박 돈을 갚았으니 채권자들 입장에선 차우셰스쿠가 안 이쁠래야 안 이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때문에 루마니아 국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했지만... 사실 외채를 갚기 위한 국민적 긴축정책은 상당히 많은 나라에서 실시되는 것이고, 한국의 1990년대 말의 IMF 사태나 현재 그리스의 초긴축 정책도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과정의 하나였다.
문제는 외채가 차우셰스쿠의 사치에 의한 부분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산업투자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긴축정책은 모라토리엄이나 디폴트까지 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특히 모라토리엄이 발생하면 국가신용도가 바닥이 되어 미래를 도모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긴축정책을 무리하게 실시해서 국민의 생활 수준을 아예 바닥으로 떨어뜨렸다는 것 자체로, 이 점은 빼도 박도 못할 악행이 맞다.
외환위기 당시의 대한민국도 대량의 실업자와 노숙자를 양산시킬 정도로 어렵긴 했지만, 적어도 모든 국민들이 음식 찌꺼기 따위나 먹을 수준으로 퇴보하지는 않았으며, 다른 중남미 국가들에서도 부유층들이 호의호식을 했다거나 하는 얘기가 있긴 했지만, 차우셰스쿠는 한 나라의 지도자였음에도 국민들이 고통을 겪는 긴축정책 와중에서도 모범을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사치나 부려대고, 국민들에게 밥은 못 주면서 출산이나 강요하는 일을 해댄 탓에 그에 대한 국민들의 증오가 커져서 나중에는 결국 몰락했다. 결과적으로는 제 무덤을 판 일인데, 그나마 국가적 신용도를 유지시킨 것이 긍정적인 요소다.
이것은 비단 루마니아만의 상황만이 아닌 구 공산권 전반에 만연했던 것이다.[77] 국가동원체제를 십분 이용해서 대량의 인재와 노동력, 자본을 축적한 것은 좋았지만, 문제가 그것 대부분을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거대 중공업단지를 만드는 데에만 투자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적 대중 동원을 통한 노동력 집약과 자본 일대투입은 공업화 시기(1945년 ~ 1973년)까지는 효과가 상당히 좋았지만, 첨단산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78]인 70년대부터는 비효율을 감당하지 못하고 죄다 망했다. 결국 남은 것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뒤덮인 흉물스럽고 낡은 잉여 공업단지 뿐이다. 물론 딱히 공산권에서만 벌어졌던 일은 아니고, 브라질이나 멕시코, 이집트, 페루, 알제리 등 많은 제 3세계 국가들이 비슷한 꼴을 겪기는 했다.
3.8. 외교정책
히로히토와 차우셰스쿠 |
지미 카터와 차우셰스쿠 |
집권 초반기인 1965년, 중국의 덩샤오핑[79],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초청해 회담을 가진 모습.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되자 차우셰스쿠는 두 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펼치며 최대한 중립을 지켰다. |
1978년 5월 20일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난 차우셰스쿠[80] |
차우셰스쿠가 풍기는 분위기는 공산국가의 지도자라기보다는 남미의 군사 독재자 같았다.
1987년 10월에 차우셰스쿠가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차우셰스쿠를 관찰한 미 국무부의 중견 관리의 증언
1987년 10월에 차우셰스쿠가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차우셰스쿠를 관찰한 미 국무부의 중견 관리의 증언
막장이나 다름없는 국내 정책에도 냉전기 서방 세계로부터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된 냉전 시기, 차우셰스쿠는 탈소련화 정책을 추진해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이나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난하며 공산권의 맹주였던 소련의 간섭에 저항하였고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함께 중립주의를 표방하며 서방에 화해 제스처를 적극적으로 어필(공산권 국가 최초로 서독과 수교, GATT 가맹, EC 무역협정 조인)하는 공산권 지도자였다. 그외에도 자본주의 국가도 종종 방문했는데 일본이나 미국을 방문해서 그곳에서 히로히토와 지미 카터를 만나기도 했다. 그래서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서방으로부터 대량의 자금이 유입되면서 루마니아는 경제적으로 (물론 짧은 기간이지만) 황금기(Epoca de aur)를 누렸다.[81] 물론 훗날엔 족쇄가 되었지만.
심지어 차우셰스쿠는 80년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반군들을 비공식적으로 지지하기까지 했으며, 이스라엘과 PLO를 동시에 인정하고 수교하였다.
심지어 공산권 국가들이 단체로 보이콧했던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에 유고, 중국과 함께 루마니아를 대회에 참가시키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차우셰스쿠의 대외정책은 서방권에서 비교적 환영받았다. 아무리 국내적으로 막장이라고 해도 자기들 정책을 지지하고 빌린 돈도 잘 갚는데 안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차우셰스쿠의 이러한 탈소련화 정책은 우방국이었던 소련을 격분하게 했고 그 결과 소련은 다른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에게도 판매하였던 Mi-24 공격헬기나 Su-22 지상공격기 같은 무기들을 당시 루마니아에게 판매하지 않았다.[82]
그러나 외교에서도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괴팍한 성격을 드러냈다. 상술했듯 암살을 우려한답시고 악수한 손을 면전에서 대놓고 소독하는 짓거리를 하고, 간단한 대화를 구사할 능력조차 없어서 공식 행사 자리에서도 굳은 자세로 일관했으며, 그 외에도 각종 해괴망측한 짓을 했기 때문에[83], 언제나 당사국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당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겼다.
"대부분의 국가 원수들에게 차우셰스쿠의 방문은 피할 수 없는 재난과도 같았다."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은 그런 지긋지긋한 일을 두 번 경험했다. 1978년 차우셰스쿠가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였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국빈 방문 업무를 책임지고 있던 프랑스 관리들은 차우셰스쿠 일행이 떠난 뒤 해괴한 장면을 목격했는데 차우셰스쿠가 머물렀던 영빈관 내의 모든 전깃줄과 전화선이 까뒤집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차우셰스쿠의 경호원들이 도청장치가 있는지 확인했던 것이다.
여기까지면 그나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그들은 영빈관에서 간단히 가져갈 수 있는 시계, 재떨이, 공예품들을 모조리 훔쳐갔다. 외교를 하러 국빈방문해서 도둑질을 하는 지도자는 아마도 차우셰스쿠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어이가 없어진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은 이후 루마니아 사절단의 방문 일정이 잡혀있던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에게 차우셰스쿠 일행의 도벽에 대해 귀띔해 주었다. 당시 엘리자베스 2세는 차우셰스쿠가 '좋은 공산주의자'라는 내각의 주장에 따라 차우셰스쿠를 버킹엄 궁전으로 초대한 상태였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버킹엄 궁전의 관리인들에게 루마니아 사람들의 행동을 잘 감시하라는 주의를 주어 좀도둑질의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여왕은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이 차우셰스쿠가 버킹엄 궁에도 도청장치가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할 것이라는 이야기에 아연실색했다. 사석에서 그를 '저 끔찍한 난쟁이(that frightful little man)'라고 불렀던 여왕은 차우셰스쿠가 도청장치를 두려워하여 버킹엄 궁 안의 잔디밭에서 아침 일찍 수행원들과 회의를 하는 모습을 보고는 황당해했다고 한다. 위의 엽기적인 행동 항목에 나오듯이 여왕과 악수한 뒤 그 자리에서 손을 소독하는 무례를 저지르기도 했다. 차우셰스쿠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했던 여왕은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맞은편에서 휘적휘적 걸어오는 차우셰스쿠를 보고 의례적인 아침 인사조차 건네기도 싫어서 덤불 밑에 숨어서 차우셰스쿠가 지나가길 기다릴 정도였다.
또한 당시 차우셰스쿠는 헝가리를 강하게 비난하며 영국 귀족원에 속한 헝가리 귀족을 쫒아내라는 주장까지 했다. 문제는, 이게 내정간섭인 것은 둘째치고 엘리자베스 2세 본인을 건드린 셈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본인에게도 멀게나마 헝가리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의 친할머니인 메리 왕대비는 조상 중에 헝가리 귀족[84]이 있었고, 엘리자베스도 자신이 헝가리와 연관이 있다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차우셰스쿠가 이런 식으로 나왔으니 기분이 크게 나빠진 건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개인적으로도 여왕과 차우셰스쿠는 악연이 있었는데 여왕은 루마니아 공산당이 엘리자베스 2세의 친척인 미하이 1세를 축출한 것은 물론, 그가 엘리자베스 2세와 에든버러 공의 결혼식에 참석한 틈을 타서 퇴위와 왕당파 숙청을 자행했다는 사실에 혐오감을 감추지 못했다.
덕분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차우셰스쿠가 영국에 있는 동안은 마지못해서 "귀하의 세계적인 명망과 경륜은 물론 영향력까지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라고 외교적인 수사로 칭찬하며 바스 훈장(Order of the Bath)을 수여했지만 차우셰스쿠가 귀국하자마자 수상 제임스 캘러헌과 외무장관 오언을 호출하여 어떻게 초대해도 저 따위 인간을 초대할 생각을 할 수 있었냐고 매우 강하게 질책했다.
이는 2022년 9월에 엘리자베스 2세가 사망할 때까지 그녀에게 있어서는 전무후무할 정도의 분노 표출이자 수상과 장관 문책이었는데, 즉위 직후부터 가급적이면 총리와 내각의 정책에 대해 언급을 사양하며 선대의 실책 상쇄를 목적으로[85] 정치적 행보를 최소화했던 엘리자베스 2세가 이처럼 총리에게 화낸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고 한다.
물론 1989년 차우셰스쿠가 몰락하자 영국 왕실은 차우셰스쿠에게 수여했던 바스 훈장을 박탈했는데, 이때 영국의 의원들은 '차우셰스쿠와 같은 인간에게 훈장을 줘서 영국의 왕실과 작위 제도가 불신을 받게 되었다'며 그런 자에게는 학살 훈장을 수여해야 한다고 비꼬았다고 한다. 참고로 2023년 현재까지도 영국 왕실이 훈장을 박탈해버린 사례는 차우셰스쿠를 제외하곤 로버트 무가베(2008)가 유일하다. 어쨌든 줬다 뺐는 모양새도 웃겼기 때문에 영국 왕실은 이때 상당히 체면을 구겼다. 풍자잡지 프라이빗 아이(Private Eye) 1990년 1월호는 차우셰스쿠의 영국 방문을 풍자한 합성짤을 내놓았는데, 에든버러 공이 엘레나 차우셰스쿠에게 "대통령님의 취미는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묻자, 엘레나는 자랑스럽게 "대량학살이요."라고 대답했고, 옆에서 엘리자베스 2세가 "오, 흥미롭네요."라고 대답한다.(...)
여담으로 위의 헝가리 문제에 대해 영국 왕실에서는 환영 만찬 자리에 '클라우디아'[86]라는 이름의 음식을 올려서 복수했으나,[87] 정작 차우셰스쿠는 무식한 탓에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는 일화가 있다.
결국 친서방 외교는 차우셰스쿠에게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왔는데 오일쇼크 이후 서방에 진 부채로 고생한 것은 물론이고, 서방에서 루마니아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방이 달러 내주는 돼지저금통이 아니라 자기를 엿먹일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차우셰스쿠는 80년대부터 친소련으로 전환하여 1981년 폴란드 무력개입을 주장하는 등 강성 바르샤바 조약기구 지지자로 돌아섰고, 1989년에도 소련의 지원을 얻어서 생존하려고 발악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이때부터 루마니아는 대소련 수출입이 급격히 늘어나 소련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 심각해진다.
3.9. 사치
3.9.1. 호화 저택
차우셰스쿠가 주로 살던 '봄의 궁전'의 외관.
차우셰스쿠가 평생을 흠모해 오던 김일성 일가처럼, 차우셰스쿠는 집권을 시작한 1965년부터 처형당한 1989년까지 아내인 엘레나, 세 자녀와 함께 '봄의 궁전(Palatul Primăverii)'이라고 불리던 호화 저택에서 살았다.
이 저택은 원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딸들을 위해 지었던 별장이었으나, 게오르기우데지의 사후에야 별장이 완공되어서 게오르기우데지는 이 건물을 사용하지 못했다. 버킹엄 궁전과 베르사유 궁전에서 영감을 얻어 지어졌다고 하며, 1970~1972년에 원래 지어졌던 것의 2배 규모로 증축되었다.
이 저택은 5천 제곱미터 정도의 넓이에 무려 17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집이 어느 정도로 컸는지 각각의 가족들을 위해 침실과 거실을 따로 갖춘 '아파트'들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 '아파트'들은 살고 있는 가족들의 취향에 따라 각기 다른 분위기로 꾸며졌다고 한다. 그런데 관리인들은 차우셰스쿠의 자식들이 이 궁에 들어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집 내부에는 금박과 이탈리아산 모자이크로 장식된 호화로운 욕실, 색채적인 모자이크로 꾸며진 개인 수영장, 자쿠지, 차우셰스쿠가 좋아하던 동물인 공작 11마리와 엘레나가 좋아하던 동물인 백조를 키우던 1.5헥타르 정도의 정원, 와인 저장고, 마사지실과 다양한 테라피들, 차우셰스쿠를 위한 수압 마사지 기계나 사우나 및 이발소가 완비된 스파 살롱, 영부인을 위한 전용 미용실과 태닝 살롱,[88] 금박을 두른 백조 모양의 수도꼭지, 금박을 입힌 나무로 만든 캐노피가 있는 침대가 있었고, 심지어는 서방권 영화를 상영하던 전용 영화관과 실내에 휴식과 접대를 목적으로 지중해 등에서 공수해온 다양한 이국적인 식물들을 배치하고 개폐식 천장까지 갖춘 미니어처 정글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차우셰스쿠는 닉슨 대통령이 선물한 뷰익 엘렉트라와 어러 대의 메르세데스-벤츠 등의 외제차는 물론이고, 2대의 호화 요트와 여러 척의 고속 보트를 보유했으며, 입지도 않은 맞춤 양복과 사냥용 복장들을 잔뜩 가지고 있었고, 엘레나는 한술 더 떠 아예 따로 방을 마련해야 했을 정도로 많은 모피 코트는 물론, 수백 벌의 드레스와 그보다 더 많은 신발을 보유했다고 한다.
더욱 가관인 것은 차우셰스쿠는 이곳만큼은 아니더라도 호화로운 별장들을 무려 40채 이상이나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북한의 김정일이 가진 별장이 30여 개 정도였단 것을 감안하면, 차우셰스쿠의 사치벽이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차우셰스쿠의 몰락 이후 사람들이 집에 들어가 사치품들을 훔쳐갔지만 기적적일 정도로 멀쩡히 보존되었던 이 저택은 이후 루마니아 당국에게 보호받았고, 한동안 공식 사절을 맞이하는 의전용 장소로 쓰이다가 2016년부터 약 50개의 방이 개방되어 관광지로 운영되고 있다. 차우셰스쿠 저택의 내부 사진
다만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그런지 호화로운 식사는 즐겨먹지 않았고[89], 그 대신 염소 치즈, 사워 크림에 계란을 얹은 채식 라자냐, 젤리에 넣은 루마니아식 잉어, 간단한 토마토, 양파, 페타 샐러드를 곁들인 스테이크, 특히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넣어 요리한 스튜 등 상당히 서민적인 식사를 즐겨 먹었다. 물론 당시 루마니아 서민층의 밥상에 동물 사료로 만든 빵이 등장하고 평범한 와인조차 최고급 음식점에서야 먹던 것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상당히 호화로운 식사를 먹었던 셈이긴 하지만[90], 김정일처럼 샥스핀 등 해외에서 직수입한 최고급 재료들로 만든 요리를 먹은 건 아니었다.
3.9.2. 여행과 사냥
차우셰스쿠는 여행과 사냥, 사격을 좋아했다. 이때 차우셰스쿠는 아내와 같이 다니기를 좋아했는데 차우셰스쿠 부부가 여행을 할 때마다, 언제나 제 각각의 수행원들이 동행했다. 차우셰스쿠의 수행원, 요리사, 경호원들은 하루도 쉬지 못했고, 경호원 중에는 영화 필름을 전문으로 만지는 기사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다. 수석 수행원의 회고에 따르면 차우셰스쿠 부부는 코작(Kojak) 시리즈를 특히 좋아했고, 프랑스 혁명 전 한 아름다운 여성의 모험담을 그린 미셸 메르시에 주연의 저속한 영화 '니울 숲의 속삭임(La Marquise des Anges)'도 즐겨 봤으며 그 외 '다락방', '위대한 개츠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등도 좋아했다. 수행원들은 영사실에서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차우셰스쿠 부부는 가벼운 포르노 영화도 싫어하지는 않았다고 한다.요시프 브로즈 티토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같은 공산주의 지도자들도 과거 황제들의 흉내를 내 호화판 사냥을 즐겼지만 역시나 차우셰스쿠는 한 술 더 떴다. 루마니아 공산당 지방당 간부들의 주 관심사는 차우셰스쿠 부부가 지방을 여행할 때 농민들의 환영식이 끝난 뒤 차우셰스쿠에게 좋은 사낭터를 제공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 루마니아 내의 대규모의 땅들이 차우셰스쿠 개인 전용이었다. 루마니아 전국에 걸쳐서 약 23개의 사냥터와 봄의 궁전 흉내를 낸 15개의 별장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별장 내부는 트로피와 짐승의 박제로 가득 차 있었다.
티미쇼아라 지역에서만 250만 헥타르가 그런 용토로 쓰였는데, 1 헥타르가 10,000m2이므로 약 2만 5천 km2. 쉽게 말해 문자 그대로 대한민국 영토의 약 4분의 1 정도의 넓은 땅이 오직 차우셰스쿠 한 사람만을 위한 사냥터로 쓰였다.[91] 그리고 시나이아와 브라쇼브 사이의 아주가 지역에서만 세 개의 사냥터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차우셰스쿠 부부가 좋아했던 스위스식 커다란 통나무 오두막집에는 비밀경찰들의 감시가 삼엄하여 차우셰스쿠 부부와 초청받은 손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내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경비가 얼마나 삼엄했냐면 차우셰스쿠의 딸 조이아마저 주변을 구경하고 난 다음 물을 마시려고 그 통나무집으로 갔다가 문 앞에서 거절당했을 정도였다.
당연하지만 차우셰스쿠 부부의 사냥과 사격에 들어가는 비용은 엄청났다. 왜냐하면 샤냥 대상이 되는 야생동물들을 부분적으로는 해외에서 수입하기도 하고, 또 일부분은 고기와 사료를 먹여 사육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러다 부족한 사료를 야생 멧돼지와 곰에게 줘 버리자 수많은 양들이 영양실조로 떼죽음을 당한 일도 있었다.
게다가 차우셰스쿠 별장에 전속으로 배치되었던 전문 사냥꾼들은 차우셰스쿠에게 재미있는 샤냥놀이를 끝없이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산양은 오스트리아에서, 곰은 알래스카에서 수입했고, 수의사는 야생동물들을 수시로 살피고 인민들은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 치즈, 생선, 고기, 당근, 사과 등을 주었으며, 연구기관에서는 차우셰스쿠가 북극곰을 사냥하기 위해 북극곰이 루마니아 산악지대에서도 살 수 있는지 조사하기[92] 위하여 5개년 계획에 착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풀어놓은 곰들은 모두 차우셰스쿠의 사냥으로 죽어버렸다.
거기에 사냥에는 옛날 왕들이 사냥한 것처럼 수많은 몰이꾼과 전문사냥꾼들이 동원되어야 했다. 1983년 차우셰스쿠와 그가 초청한 손님들을 위해 샤냥에 비행기 2대, 헬리콥터 4대, 산악용 지프차 6대가 동원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동원된 사람들은 차우셰스쿠를 명사수로 만들기 위하여 사냥감이 언제나 목표지점을 배회하도록 만들었는데, 대표적인 방법으로 차우셰스쿠가 좋아했던 사냥감인 곰을 동물원에서 굶긴 다음에 샤낭터로 몰면 좋은 과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각본 아래에서 사냥꾼으로써의 솜씨는 매우 좋은 것처럼 포장되었다.
이렇게 차우셰스쿠가 사냥에 미쳐 헤어나오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때문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죽어 있는 야생동물들을 자기 주변에 둘러싸고 있는 걸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그의 사냥이 굉장히 힘들었다고 한결같이 증언한다.
실제로 1980년 이후 차우셰스쿠의 전용 회전익기 조종사였던 바실레 말루찬[93] 공군 대령은 차우셰스쿠의 사냥 여행 당시는 악몽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차우셰스쿠가 몇 시간이고 사냥에 열중하면 밥조차 먹을 수가 없었고 또 그가 사냥터에서 밤을 지새면 조종사들은 헬리콥터 안에서 추위에 떨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충복들에게도 인색했던 차우셰스쿠 부부는 해외여행에 수행한 언론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방문에 수행했던 언론인들에게 식비로 지급했던 금액은 고작 하루에 8달러였다.
그리고 차우셰스쿠의 사냥터 관리인은 훗날 에드워드 베르와의 인터뷰에서 "차우셰스쿠는 포악한 사냥꾼이었습니다. 영국 귀족들이 좋아하는 네덜란드제 엽총[94]으로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동물들을 죽였습니다."라고 증언했으며, 차우셰스쿠의 별장 관리인은 차우셰스쿠가 희귀종이며 보호동물인 검은 산양 66마리를 죽였으며 시니이아 근처에서는 고지대의 야생동물을 잡기 위해 스키 리프트를 탔다고 증언했다.
차우셰스쿠는 동물 박제도 좋아해서 사냥해서 잡은 야생동물들을 박제로 만드는 데 열을 올렸다. 이렇게 수많은 동물들을 잡아 박제로 만들다 보니 1989년 12월에는 무려 244마리의 사슴 박제, 385마리의 곰 박제를 모았다. 사냥할 때마다 동행했던 사람은 차우셰스쿠가 매년 수천 마리의 야생동물들을 죽였다고 말했다. 차우셰스쿠는 언제나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선물한 망원경이 장착된 장총을 즐겨 사용했는데,[95] 그 장총은 차우셰스쿠의 전성기를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했다고 한다.
이 사냥총에 대한 웃긴 일화도 있다. 루마니아 주영 대사가 '차우셰스쿠는 사냥을 좋아하니 좋은 총을 선물하면 좋을 것'이란 조언을 했다. 이를 따라서 영국에서는 이 고급 엽총을 준비하고 총의 케이스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니셜과 차우셰스쿠의 이름을 총에 새겼다. 그런데, 차우셰스쿠가 정식으로 총을 받기 전에 먼저 살펴본 루마니아 대사는 '니콜라에(Nicolae)가 아니라 니콜라이(Nicolai)입니다. 이건 러시아식 이름이 아닙니까?"라며 하얗게 질렸단다. 다행히(?) 이건 영국 측에서 기술자를 수소문해서 하룻밤 사이에 글씨를 고쳤고, 차우셰스쿠는 아무 것도 모른 채 희희낙락하며 총을 받았다고.
4. 몰락
4.1. 루마니아 혁명
차우셰스쿠 공산독재의 종식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루마니아 국민들의 모습. 솔리다르노시치 깃발도 보인다.
부쿠레슈티의 루마니아 공산당 중앙 위원회 앞 '궁정 광장'[96]에서 차우셰스쿠 공산독재 치하에서의 루마니아 국장을 제거한 루마니아 국기를 든 시위대.
냉전 시기 동유럽에서 벌어진 자본주의화의 바람은 루마니아에도 불었는데, 루마니아는 동구권에서 연달아 공산당 정권이 붕괴하고 자본주의 체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무력을 사용하여 유혈사태가 일어난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97]
사실 루마니아 혁명의 조짐은 그 이전부터 2차례의 대규모 노동자 봉기에서부터 보였다. 1977년 8월 1~3일에는 루마니아 정부가 광부의 장애 연금 지급을 중단하고 퇴직 연령을 50세에서 55세로 늘릴 것을 발표하자 기존부터 열악한 노동 환경에 시달리던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지우 밸리(Jiu Valley)[98]의 광부들 9만 명 중 3만 5천 명이 항의의 의미로 대규모 파업을 하자 차우셰스쿠는 광부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듯했으나[99] 이들 중 600명을 심문한 후 50명을 정신병원에 가두고 15명에게는 2~5년의 노동교화형(징역형)을 선고했으며, '위험하다'고 판단된 300명 이상은 고향에서 쫓겨났고, 2천~4천여 명의 광부들은 해고당했다. 루마니아의 공산정권 지도자들은 1978년 1월 1일까지 지우 밸리를 출입제한 구역으로 선포하며 이 사건의 전파를 막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사건을 '공산당과 노동계급 사이의 단결의 신화를 깨뜨릴 수 있다'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방 선거가 열리던 1987년 11월 15일에는 루마니아 최대 공업 도시 중 하나인 브라쇼브에서 트럭 공장 노동자 2만 명이 급여 삭감과 도시에서 15,000개의 일자리 제거 소식에 반발하여 밀린 임금을 요구하며 "차우셰스쿠 타도!", "공산주의 타도!" "루마니아인들이여, 일어나라!"를 외치면서 공산당 본부 건물과 시청을 약탈하면서 차우셰스쿠의 초상화와 잘 채워진 식당의 음식들[100]을 던지고는 당 문서들과 선전물들을 도시 광장에서 불태웠는데, 시위대들은 식량난이 극심한 시기에 지방선거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축제처럼 준비된 관청 건물과 풍족한 식량에 분노했다고 한다. 해질 무렵 세쿠리타테는 도심을 포위하고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는데, 사망자는 없었으나 300명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는[101] 1987년까지는 정확히 61명, 1990년까지 100여 명이 최종적으로 유죄를 선고받아 6개월~3년 이내의 징역형을 선고받거나 고향에서 쫓겨났으며, 당 간부들은 고향에 남아있는 노동자들의 아내에게 추방된 남편을 만나려면 당의 승인을 받아야만 가능하게 했으며, 극단적으로는 추방된 남편과의 이혼을 '권유'하기도 했다. 여하튼 이 사건은 차우셰스쿠에 대한 노동자 계층의 불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자 루마니아 혁명의 예고편과 다를 바 없었다고 평가받는다.
1989년 4월 14일에 루마니아는 외채를 전부 다 갚았지만 차우셰스쿠는 자녀들의 말도 제대로 안들으면서 긴축정책을 완화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정보통제를 한다 한들, 주변국의 TV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정세변화가 보도되던 상황이라 루마니아인들의 불만이 언제라도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던 상황이었다. 이 당시에 차우셰스쿠 찬양집회를 위해 억지로 동원된 사람들도 집회가 끝나면 뒤로는 이디 아민[102]이니 스탈린에 빗대 욕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였다. 차우셰스쿠 초기 당시에는 루마니아인들은 불가리아와 헝가리를 소련의 따가리 국가라면서 비웃거나 우월감을 뽐낼 때가 많았지만 긴축정책이 장기화되면서 이웃한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과 몰도바 SSR[103], 우크라이나 SSR을 그래도 고기와 버터는 잘 먹는 풍요로운 공화국이라면서 부러워했고,[104] 독일계 주민들은 동서독과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비롯한 독일어권 국가들을 동경하면서 우리도 언제 동독[105]처럼이라도 되었으면이라면서 부러워했고, 헝가리계 주민들은 헝가리 본토가 외채문제가 있다고 해도[106] 생필품 공급은 잘된다면서 헝가리 본토를 부러워했을 지경이었다.
1989년 12월 15일에 루마니아 서쪽의 도시 티미쇼아라[107]에서 반차우셰스쿠 운동을 하던 헝가리계 개혁교회 목사 퇴케시 라슬로(Tőkés László, 1952~)가 강제 추방이 결정된 후 군에 의해 집에서 끌려나와 폭행을 당하자, 다음 날인 16일부터 티미쇼아라의 시민들이 이에 대한 항의 시위를 하면서 차우셰스쿠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시위가 격화되자 차우셰스쿠는 12월 17일에 티미쇼아라에 군 투입을 지시한 후 전국 지방당 최고간부들을 모아 긴급소집한 텔레비전 화상회의에서 '질서를 회복하라'며 직접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지시하며 세쿠리타테와 정규군을 동원해 반독재 시위대에게 실탄을 발포하게 했다. 심지어 당시 현장에 있던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루마니아 정규군이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거부하자 북한에서 파견된 용병들까지 동원해 시위대에게 총탄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 잔혹한 유혈진압이 자행된 단 하루 동안 2살짜리 아기와 69세의 노인을 포함한 최소 66명이 사망했고 300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다.
거기에 엘레나는 티미쇼아라의 시위대 중 사망한 사람들을 비밀리에 화장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실제로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43명과 병원에서 처형된 부상자들의 시신은 영안실에서 도난당해 강제로 부쿠레슈티로 운송된 후 화장되어 쓰레기통에 버려진 후 그 재는 운하 입구에 버려졌다. 그리고 12월 18일에는 티미쇼아라에 계엄령도 내려졌다.
이에 대해 시위 진압 과정에서 1만 2천 명이 학살당해서 냉동고에 처박혀 있다는 등의 과장된 소문[108]이 서방 언론을 통해서 확산되었고 루마니아 국민들은 매우 동요하기 시작하였으며 민주화 시위가 루마니아 전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국민을 감시하던 루마니아 정보부 또한 민심을 읽었지만, 이미 민심은 돌이킬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의 종말이 머지 않았다는 생각에 일부러 차우셰스쿠에게 이런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109] 그래서 그런지, 티미쇼아라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2인 이상 모임이 금지된 12월 18일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정국이 혼란한 와중에도 이란을 2박 3일의 일정으로 방문하면서 그해 갓 취임한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만나는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 차우셰스쿠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모든 국민들을 감시하고 도청했으며 우상화 작업을 철저히 해왔다. 또 1984년에 일어난 쿠데타 역시 실패로 돌아갔으며 국민들의 소소한 저항은 항상 유혈진압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6개월 전, 중국에서 학생 시위대를 탱크로 깔아뭉개고 중국공산당 정권이 승리한 것을 보고 차우셰스쿠는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110] 이란 방문 직전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차우셰스쿠는 시위대에게 본때를 보여줬어야 한다, 총 몇방 쏘면 다 달아나게 되어 있다고 내무부, 국방부, 비밀경찰을 상대로 폭언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1989년 12월 21일, 이란에서 돌아온 차우셰스쿠는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평소처럼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 광장에서 10만 명의 국민들을 불러놓고 티미쇼아라의 시위를 규탄하는 연설과 지지대회를 벌였다. 이 과정이 차우셰스쿠 입장에선 정말 재수가 없었는데 원래대로라면 광장에는 차우셰스쿠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열성당원들이 모여서 차우셰스쿠의 연설을 화려하게 장식해야 했다.[111]
그런데 차우셰스쿠가 늦는 바람에 연설이 취소되었단 소문이 퍼지면서 모여있던 열성당원들은 거의 해산해버렸고 이에 허겁지겁 인근의 노동자들을 닥치는대로 징발해서 모아놨는데 난데없이 10년 가까이 쥐어짜대서 꼴보기 싫었던 독재자의 연설에 강제로 모인 사람들의 기분이 당연히 좋을 리 없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는 언제나처럼 자화자찬식의 연설을 했지만, 연설 중간 광장에 모여 있던 국민들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차우셰스쿠여! 우리도 사람이다", "학살자를 타도하자!", "루마니아는 잠에서 깨어났다!"라는 식으로 야유를 퍼붓고 티미쇼아라 시위의 무력진압에 항의를 하는 구호를 외치는 등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의 몰락의 시초가 되는 이 역사적인 사건은 방송국을 통해서 루마니아 전역에 생방송으로 나가고 있었다. 이 당시 평일 낮에는 방송을 내보내진 않았지만 차우셰스쿠가 해외순방이나 연설이 있을 때 특별방송이라며 낮방송을 내보냈는데, 이렇게 우연의 우연이 겹쳐서 차우셰스쿠가 당황하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 된 것이다.
1분 25초부터 이러한 광경이 나온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연설에 군중이 야유와 비난을 퍼붓자 말을 잇지 못한 채 손을 흔들어 보이며 심히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고, 공산당 보안국 간부들이 "어서 관저로 들어오십쇼!"라고 재촉을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사자후에 군중이 진정할 것이라고 착각했는지 "이보시오!(Alo!)"만 미친듯이 외쳐댔다. 옆에서 엘레나는 재촉하는 간부들과 야유하는 군중에게 "닥치시오!"라고 을러댔고 결국에는 부부가 같이 군중들에게 "동무들, 입 좀 다무시오!"라고 악을 써대는 상황이 되었다.
한참동안 목이 쉬도록 조용히 있으라고 소리질러도 군중이 잠잠해지지 않자 당황한 차우셰스쿠는 멍청하게 손이나 흔들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5분 30초 경에 보다못한 엘레나가 '뭐라고 말 좀 해 봐요!'라고 말한 것이 결정타였다. 결국 차우셰스쿠는 국가의 단합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허겁지겁 연설을 마무리했지만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고 옆에서 엘레나와 공산당 간부들만 열심히 박수를 쳐댔다. 한편 군중들의 성난 함성은 마침내 폭발했다. 차우셰스쿠는 예정된 것인지는 몰라도 연설 중에 1990년 1월부터 전국민의 월급을 2,000 레이에서 2,200 레이로, 노인 연금도 800 레이에서 900 레이로 올려주겠다고 했지만 그런 당근으로 국민들을 진정시키기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텔레비전 연설 방송은 예정보다 일찍 종료되면서 바로 방송이 종료되었지만, 라디오 방송은 계속 진행되어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알려졌고 방송이 나간 후의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챈 부쿠레슈티 시민들은 궁전광장에 더욱 많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외곽에서 2번의 폭발음이 들린 후[112] 세쿠리타테가 시위대들에게 발포하기 시작했고,[113] 분노한 시민들은 반차우셰스쿠 구호를 외치고 차우셰스쿠의 초상화를 찢었으며 차우셰스쿠를 찬양하는 책들을 불태워가며 더욱 열정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이에 진압군들은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다. 당시 시위 실제 영상 다른 영상
당시 진압군들은 시위대에게 자동화기를 동원한 무자비한 발포와 구타를 퍼부은 것은 기본이고 시위대를 총검으로 찔렀으며,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며 군중들에게 로켓포를 난사하기도 했고, 심지어 호텔 인근에 있던 민간인들을 장갑차로 깔아뭉개기도 했다. 거기에 소방관들까지 물대포로 시위대를 공격했고, 부쿠레슈티 대학교 근처의 지하철역에서 하차한 모든 승객들은 임산부, 노인, 아이 가릴 것 없이 진압군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땅에 끌려다녀 지하철역 계단이 피로 범벅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1989년 12월 21일 오후 6시부터 시작된 부쿠레슈티의 반차우셰스쿠 시위 진압은 다음날 새벽 3시에야 끝났고, 이 짧은 기간 동안 무려 50명이 사망하고 46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245명이 구금되고 고문당했다. 거기에 사망한 시위대에 대한 부검도 금지되었고, 시신을 소각하라는 명령도 있었지만 이 명령은 이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위진압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루마니아의 정규 군대는 시위대에게 발포하지 않았고, 이에 차우셰스쿠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국방장관인 바실레 밀레아(Vasile Milea, 1927~1989) 장군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밀레아가 겉으로는 이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따르지 않자 차우셰스쿠는 밀레아에게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맹비난하면서 앞으로도 병사들에게 데모 군중들을 향한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싹 다 갈아치워 버릴 것이라고 협박했다. 결국 밀레아는 12월 21일 밤에 시위 진압을 명령했지만, 다음날 의문의 총상을 입은채 발견되었다가 사망했다. 차우셰스쿠는 이러한 참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군대의 도움없이도 시위가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고 생각하고 다음날 회의를 소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의 희망대로 시위가 바로 잠잠해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공단에서 일하던 노조원들이 부쿠레슈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대를 지원하기 위해 자동차와 버스, 화물차 등을 타고 차우셰스쿠 하야를 위한 상경투쟁에 나섰던 것이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 밀레아가 1989년 12월 22일 아침에 의문의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9시 30분 경에 사망했고, 그날 라디오 속보를 통해 루마니아 전역에 발표되면서 상황은 시위대에 더욱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차우셰스쿠 정권은 그의 죽음을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국방장관은 반역자였으며, 그가 정체가 들통나자 자살했다"고 선전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고 다른 소식통들은 차우셰스쿠의 지시에 따른 암살이라고 주장했다.[114]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루마니아군 내부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밀레아가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며 루마니아군의 반차우셰스쿠적 행동을 촉발한 것이다. 시위대의 편이었던 빅토르 스턴쿨레스쿠 장군은 가짜 깁스까지 하면서 차우셰스쿠와 연루되지 않으려고 했으나, 엘레나 차우셰스쿠에 의해 끝내 국방장관으로 임명당했고, 이렇게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서자 차우셰스쿠는 11시에 계엄령을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격 선포했지만,(당시 TV에서 낭독된 계엄령 선포) 군대가 돌아선 이상 무쓸모한 조치였다.
그리하여 시위를 진압하러 보낸 정규군이 혁명 세력에 가담해 차우셰스쿠에게 되려 총부리를 겨눴고 수도 부쿠레슈티에서는 정규군과 세쿠리타테 사이의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런 시가전에도 시위대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부쿠레슈티 주민은 물론이고 지방노동자까지 합세하여 중앙광장과 그 근교에 수십 만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세쿠리타테를 압도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날 점심에 차우셰스쿠가 관저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위대는 TVR과 정부청사를 장악했으며, 12시 50분에 오후 TV방송이 시작되었을때 문학가 미르체아 디네스쿠와 배우 이온 카라미트루가 "동지 여러분 우리가 승리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차우셰스쿠가 도망쳤다는 소식이 루마니아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그 뒤에 루마니아 전역에서 노조원과 주부, 학생들까지 합세해서 차우셰스쿠 축출을 환영하는 시위가 열렸고, 각지에 공산당 지구당들과 보안대를 상대로 습격하는 사건이 잇따라 벌어졌다. 그리고 그간 TVR의 뉴스 프로그램 텔레조날(Telejurnal)의 앵커를 맡았고, 그날 오전까지도 밀레아의 자살을 위시한 속보 및 계엄령 선포를 전한 게오르기 마리네스쿠(George Marinescu, 1941~2011) 아나운서[115]를 비롯한 여러 방송인들이 그간 거짓소식을 보내서 죄송하다며 사과방송을 내보낸 다음에 혁명을 지지하는 뉴스 및 속보를 내보냈고, 루마니아 공산당도 차우셰스쿠를 제명하며 그를 손절했으며, 3시에 이온 일리에스쿠가 임시 혁명정부 수립을 발표했고, 후에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16] 그리고 이들은 전력과 난방 공급 정상화 및 식량의 대대적인 배포를 약속했다. 이렇게 국민들 뿐 아니라 군대와 당에게까지 버림받은 차우셰스쿠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제 도망치거나 저항하는 것밖에 남는 길이 없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루마니아 정규군이 차우셰스쿠를 지지하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차별대우 때문이었다. 차우셰스쿠는 정규군을 신뢰하지 못했고 낙태와 콘돔 사용 등의 피임을 금지하면서 급증한 고아원에 넘쳐나는 고아들을 뽑아다가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비밀경찰과 특별 보안군 '세쿠리타테(Securitate, Departamentul Securității Statului)'를 조직하고는 그들에게만 특별 대우를 해주었다. 게다가 친위대 역할을 맡은 보안군에게는 정규군에도 지급되지 않은 최신 장비와 더 많은 급여가 주어졌고, 이에 정규군은 분노와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편 티미쇼아라의 학살 하루 후인 1989년 12월 18일에 루마니아 정교회 대주교 테옥티스트(Teoctist)는 "티미쇼아라에서의 반공주의 운동 탄압에 동의한다. 이 사건은 외국의 간섭으로 발생했다."고 회의에서 말했고, 바로 다음 날에도 차우셰스쿠에게 전보를 보내 그의 공산당 서기장 재선을 축하하고 그의 '훌륭한 활동', '현명한 지도', '대담한 생각'을 칭찬하면서 "루마니아인들이 (차우셰스쿠의) 이름을 올바르고 의롭게 지니는 황금 시대에 살고 있다"며 차우셰스쿠를 칭송하기도 했다.[117]
4.2. 도주와 체포
이렇게 헬게이트가 벌어지는 와중에 차우셰스쿠는 자신이 선포한 계엄령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음과 동시에 많은 시위 군중들이 관청들을 장악할 기세가 되어버리자 관저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외국으로 망명하려 했다. 북한으로 망명하려 했다는 설이 잘 알려져 있고 이원복 교수 학습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1권에서도 사실인 양 단정지었으나, 실제로 확증된 것이 없다. 북한 이외에도 소련,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일본, 쿠바, 모로코, 리비아, 앙골라, 중국 등 많은 국가들이 1989년 동유럽 혁명 당시 국제 전문가들과 외신들 사이에서 망명 후보국으로 언급, 거론된 적이 있었다.[118]그러나, 차우셰스쿠의 전용 헬기가 관저 옥상에서 이륙하는 장면이 TV 카메라에 포착돼 생중계되며 그의 해외 도주 시도는 바로 봉쇄됐다. 차우셰스쿠가 탑승했던 헬리콥터의 조종사인 바실레 말루찬 공군 중령은 차우셰스쿠의 망명 계획을 나쁘게 생각했고 평소에 자신이 차우셰스쿠 부부의 독재정치에 대한 불만, 엘레나의 잔소리에 대한 불만, 차우셰스쿠의 푸대접에 대한 불만 등이 많았기 때문에[119] 비행 중 일부러 기체를 요동치게 하면서 '반란군의 대공 사격을 받고 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결국 헬리콥터 탈출이 힘들다고 판단한 차우셰스쿠는 육로로 이동하기 위해 착륙 명령을 내렸고, 안전한 곳에 헬리콥터를 비상 착륙시킨 말루찬 중령은 경호원들이 속임수를 알아채고 자신을 사살할 것을 우려해 적당히 눈치를 보다 곧장 소속 부대로 달아났다. 말루찬 중령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엘레나가 자신을 무섭게 째려봤다고 하는데, 소속 부대로 복귀한 무렵에 그는 쇼크상태에 얼굴의 거의 모든 혈관들이 터진 상태였으며, 혈압은 200을 넘는 상태였다고 한다. 얼마나 극심한 공포를 느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차우셰스쿠 부부와 경호원들은 도로를 달리던 시민의 차를 징발해 계속 도피하면서 은신처를 수소문하느라 바빴고, 사람들에게 계속 "나를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인정하는가?"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편인지 꼭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군대가 등을 돌리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갈 곳을 잃어 우왕좌왕하다가 트르고비쉬테에서 어느 산림 감시원의 숙소를 발견해 그 곳에 은거하고 다음날 아침에 국경을 넘어 주변 동유럽 국가들로 탈출/망명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감시원들은 차우셰스쿠 일당에게 순종하는 척 하면서 혁명군 측에 몰래 전화를 걸어 자신들의 숙소에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가 있다고 고발했고, 결국 23일에 루마니아 육군 병력이 숙소를 포위하고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소수의 경호원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무장해제당했고, 차우셰스쿠 부부는 도주한 지 하루도 안 돼서 출동한 혁명군에게 붙잡혀 체포되었다.
한편 차우셰스쿠가 도피한 이후, 그를 지지했던 테옥티스트 대주교 역시 정교회 신도들에게 민족구국전선(혁명 당시 권력을 잡은 조직)을 지지하도록 독려했고 차우셰스쿠에 대해 "어린이를 살해한 우리 시대의 헤롯"이라고 맹비난하며 그를 손절했다.[120][121]
4.3. 수감, 재판과 처형 과정
체포된 이후에도 이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122] 군대의 총사령관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거나, 그들에게 지급된 식사인 육군 장교들의 식사를 "인간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며 입에도 대지 않고 그 지방의 특산품인 고급 빵과 사과, 가미되지 않은 차를 줄기차게 요구해서 매 끼니마다 끝끝내 그것들만 받아내 먹었다고 한다. 그는 건강 때문에 소금기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데 신경을 써 주지 않는다고 항의했고, 설탕이 든 음식을 주면 각하는 당뇨병이 있는데 왜 이런 걸 주냐고 아내 엘레나는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 놓았다. 또한 목욕탕 가는 것조차 거부해서 수감실로 욕조를 갖다 주기도 했다.게다가 그는 감금 후에도 갈색 빵을 들고 '이런 것은 먹을 수 없다'고 하자 한 대위가 '우리 군인들은 이 음식을 오랫동안 먹어 왔다'고 대꾸했으며, 소시지와 소금기가 배어 있는 치즈를 보고는 "이 지역은 루마니아에서도 빵이 제일 맛있는 곳인데 나에게 이런 형편없는 음식을 주다니!"하고 소리를 질렀다. 엘레나도 이에 맞장구치듯 각하께서 소금기 있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냐고 소리쳤다. 게다가 엘레나는 음식, 방, 침대, 깨끗한 옷이 없다며 "이렇게는 살 수 없다. 집에서는 충분한 음식이 있지 않았냐?"고 말하며 심한 욕을 퍼붓기까지 했고, 이런 분위기가 3일간 지속되었다. 덤으로 차우셰스쿠는 자기를 반대하는 시위 소리를 들을 때마다 '창문을 열어라, 내가 군중에게 직접 말하겠다'라며 자기가 아직도 최고 권력자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그 외에도 당시 차우셰스쿠를 관리하던 세쿠 육군 소령의 증언에 따르면 차우셰스쿠 부부는 금슬은 좋았는지 갇힌 상황에서도 둘이 부둥켜 안고 잠을 잤다고 한다.[123] 거기에 자신이 여전히 군중들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자신을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게 해달라거나, 자고 있던 자신을 깨워서 텔레비전 방송국에 자신을 데려다 주면 100만 또는 200만 달러의 돈을 줄 수 있으며, 달러를 주기 전에 가까운 마을 보이네슈티에 감춰둔 수백만 레이의 돈을 준다고도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쿠 소령이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가난하게 산다는 사실에 다소 충격을 금치 못하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세쿠 소령은 그토록 태양처럼 받들라고 교육받은 차우셰스쿠의 진짜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이 이 마을을 샅샅이 뒤졌으나 돈은 발견되지 않았다.
혁명정부는 차우셰스쿠 부부가 체포되기 전부터 그들의 재판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보통 국민에게 하는 것처럼 일반적인 형사재판을 열어 형법으로 처벌하자고 주장하였지만 루마니아 군부에서 "차우셰스쿠가 항소하여 살아있으면 추종자들이 역으로 혁명을 일으켜 큰 내전으로 번질 것이다. 결국 외국 군대가 루마니아에 들어올 것이고, 만약 우리가 패하면 역시 차우셰스쿠와 똑같이 처벌받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군사재판을 열기로 하였다.
판결도 내부적으로는 차우셰스쿠가 완전히 미쳤다는 증거 등이 나오지 않은 이상 무조건 사형에 처하기로 결론 내려진 상황에서 그들의 신병만 확보되면 바로 속결하기로 하였다. 그외에도 당시 차우셰스쿠를 지지하는 친위 세력을 두려워해 일찍 처형했다는 의견도 있다. 세쿠리타테 같은 차우셰스쿠파와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었고, 당시 혁명세력은 숨어있는 차우셰스쿠파의 저격이나 테러로 크게 고생했다. 차우셰스쿠의 처형 직후까지도 보안군의 지하요새는 건재했으며, 이들을 진압하는 동안에도 많은 사상자가 속출했다. 차우셰스쿠 재판을 위해 가던 사람이 총을 맞기도 했다.
이 페이지 참고. 그의 몰락 과정이 꽤 자세히 나와있다.
차우셰스쿠 이후 집권한 이온 일리에스쿠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일리에스쿠 정권이 차우셰스쿠 일가만 빠진 차우셰스쿠 정권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차우셰스쿠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옛 공산당 정권 고위직들은 차우셰스쿠를 향한 부정적 여론이 술렁이는 틈을 보이자 재빠르게 태세를 전환, 정권을 장악했고, 1990년 루마니아 민주화 후 첫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에서도 야당이 지리멸렬한 틈을 타 압승을 거두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차우셰스쿠 정권이 유지될 수 없다고 판단한 당시의 루마니아의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최대한 빨리 차우셰스쿠만 제거하여 문제를 봉합하려 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참고할 것.
MBC뉴스데스크 방영 재판장면(3분)
198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한 작은 초등학교에서 차우셰스쿠에 대한 비밀재판이 열렸고, 차우셰스쿠는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오후 4시 사형판결 1시간 반만에 차우셰스쿠 부부는 건물에서 끌려나와 담벼락에 세워져 총살형에 처해진다.
- [사형 장면 (펼치기 · 접기)]
이후 총살형을 집행할 육군 제64공수 연대에서는 기존의 사형 집행 방법에 따라 부사관급 이상 소총수 열 명에 실탄 다섯 발을 준비하여 사형을 집행하려 했다. 탈출할 때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었는데 한국과 미국을 제외한 서양에서 사형수에게는 사복을, 군인에게는 군복을 그대로 입히고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다.[124] 총살형은 보통 한국이나 미국, 중국을 제외하고 일반 징집병이 집행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기 때문에 군사경찰대 부사관급 이상이 총살형 집행을 맡으며, 그마저도 실탄은 일부에게만 지급한다.
루마니아군도 원칙대로 총살형을 집행하기 위해 지원자를 뽑았는데, 이때 군인들이 서로 자기 손으로 독재자를 처단하겠다면서 지원자가 속출했다. 그중 8명을 차출했고, 최종적으로 장교인 대위 1명과 원사 계급의 군인 2명을 그 중에서 선출하여 집행했다.[125] 군인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현재 전해지는 영상에는 사형 판결 직후 차우셰스쿠 부부를 결박하는 장면과 건물 벽을 배경으로 하여 사격이 끝나가는 때, 그리고 사형된 두 사람의 모습과 사망을 확인하고 후처리를 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찍혀있다. 정작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은 당시 사용 중인 비디오 카메라의 전원이 끊어지는 바람에 촬영되지 못했다. 사형 집행 당시 차우셰스쿠의 나이는 71세였고 엘레나의 나이는 73세였다.
차우셰스쿠는 사형 판결을 받고 눈물을 흘렸고 죽기 직전까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다가, 1절도 못 마치고 총살형이 집행되어 사살되었고, 이 노래는 그대로 그의 유언이 되었다. 처형 장면은 군에 의해 녹화된 후 프랑스 A2-TV[128]를 통해 전세계 언론을 통해 지상파를 탔다. 여담으로 미국에서 처형 장면을 아침속보로, 그것도 무삭제 방영하는 바람에 이런 거에 민감한 자들에게 심대한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한국 일간신문이나 KBS 9시 뉴스에도 그 영상이 실렸다.(열람 주의)[129]
게다가 차우셰스쿠 본인은 죽기 직전 자유롭고 독립적인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조사 결과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에게는 약 120발의 총알이 박혔다고 한다. 그런데 부검 결과 차우셰스쿠는 총격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는데, 심장마비가 와서 발사 직전에 이미 사망한 뒤였다고 한다. 당시 그는 71세의 고령이었으므로 어마어마한 공포감에 그 정도 연령이었으면 충분히 일어날 만한 일이다. 그리고 루마니아의 국민들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민주화를 쟁취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차우셰스쿠의 죽음을 기뻐하는 루마니아 국민들 사이에 섞인 한 여성은 "도대체 왜 차우셰스쿠를 그렇게나 쉽게 죽인 거냐?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들을 천천히... 그리고 영원히 겪게 했어야지!"라고 말했으며, 육체적 고통보다는 정신적 좌절감이 심했다는 한 중년층은 차우셰스쿠의 초상화에 침을 뱉으며 "운명의 1989년 12월 25일, 당신은 너무 편안하게 죽었다."라고 말했다. 이 두 발언만 봐도 당시 루마니아 국민들이 차우셰스쿠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130]
당시 프랑스의 법의학 연구소장인 로이르 리보는 처형 영상이 공개된 이후 총탄 자국이 난 옷 주변에 혈흔이 없는 곳도 있는 것으로 보아 사망한지 최소 수 시간 뒤에 또 총격을 가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죽은 뒤 수시간에 걸쳐 시신이 경직화 되면 사체에 상처가 나도 피가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확인사살이라는 설과 단순히 집행관들의 증오심이 그만큼 컸었다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사실 단순하게 생각해도 탄창 6개분의 총알을 거의 대부분 맞은 노인이 살아남았다고는 생각하기 매우 어려우니 후자가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 프랑스 신문에서는 익명의 루마니아 관리의 말을 인용하여, 차우셰스쿠가 처형되거나 그 직전에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외국은행계좌의 비밀번호가 담긴 가방의 행방을 묻는 고문을 받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총살 장면은 그 후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부인 역시 차우셰스쿠 사망 직후 처형된 것이고 총살 장면이 촬영된 시점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겔루 보이칸 루마니아 부총리는 이 보도내용을 부인하였다.한국경제
그리고 차우셰스쿠 부부에 대한 집행을 끝으로 루마니아에서 사형제는 1990년 1월 7일자로 기존에 있던 사형수들까지 종신형으로 감형받는 형태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민주화 직후 처음이자 마지막 사형집행인 셈이다. 결국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마지막 사형수라는 불명예를 지게 되었다.
4.4. 사후
총살형을 당한 차우셰스쿠 부부의 시체는 원칙대로 부검 뒤 가족에게 인도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찢어진 텐트로 둘둘 말려 헬기에 실은 뒤 부쿠레슈티 교외의 운동장 한 가운데에 내려놓았는데, 시신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육군 수색대가 샅샅이 뒤져 다음날 아침 운동장 차고에서 시신을 찾아냈다. 하지만 누가 무슨 목적으로 시신을 그곳에 두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루마니아 정부는 시신을 인도하려 했지만 가족이 풍비박산났기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되자 그냥 공동 묘지에 매장하는 형태로 장례를 치렀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 그런지 묻어주는 것까지 규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묻어줬다고는 해도 한 구석에 처박히듯 묻힌 거여서, 보통 서양식 무덤은 대리석을 이용해 장식하기 마련인데 그의 무덤은 그냥 흙 봉분으로 되어있으며 잡초와 나무가 무성히 자라기도 했다. 비석도 죽고 나서 한참 후에야 세워졌다. 부부 매장도 허용되지 않아서 그의 아내의 묘지는 차우셰스쿠의 묘지에서 약 5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머리의 방향이 서로 반대 방향이 되도록 묻혔다. 이렇게 시신을 성의없이 매장하면 흡혈귀 스트리고이로 부활해서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전승 때문에 차우셰스쿠 사후 루마니아인들은 차우셰스쿠 부부가 스트리고이로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으며, 공포를 진정시키기 위해 생전 기거했던 관저에 마늘을 뿌리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렇게 루마니아 국민들을 도탄에 빠트린 독재자 부부는 국민의 손으로 처형당했지만, 이를 위해 국민들이 흘려야 했던 피는 처참했다. 12월 16일부터 30일까지 2주일 동안 총 1,104명이 죽고 3,352명이 다쳤는데, 그 중 차우셰스쿠가 퇴출당한 22일까지 162명이 죽고 1,107명이 다쳤고, 루마니아가 사실상의 내전 상태였던 30일까지는 942명이 죽고 2,245명이 다쳤다.
차우셰스쿠의 처형 소식이 북한에 전해지자 <로동신문> 등 관영매체들은 동구권 붕괴가 관료주의 때문이라 주장하는 한편, 주체사상이 옳다고 하며 개혁/개방이 필요없다는 식으로 선동하고 이념교육을 더욱 강화했다. 김정일은 최단 시간 내에 처형 장면 비디오를 구해 오라고 명령했다고 하는데, 이 얘기는 2006년 영국 <선데이 타임즈>에 보도됐다.(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사) 이 때는 김일성이 생존 중이었는데, 김일성은 루마니아 군대가 차우셰스쿠를 배반했다는 점, 그리고 소련이 이를 방관했다는 점에 상당히 충격을 먹었다고... 그래서 아들 김정일에게 하루빨리 군권을 넘겨 김정일이 군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남한과의 남북기본합의서 체결도 서둘러 추진하게 된다. 루마니아를 포함한 동유럽 공산권 붕괴에 대해 소련은 관심을 껐고, 미국은 갈수록 세계에서 공세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 기댈 언덕이 없어진 북한은 심화조 사건처럼 북한 내의 반대파들을 더더욱 무자비하게 숙청을 하게 된다.
덕분에 유럽 쪽의 북한 외교관들이 고생 깨나 했다고 한다.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의하면 20-25명 정도의 간부들이 김정일과 함께 비디오를 보았는데, 차우셰스쿠가 죽는 장면을 본 김정일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영상이 끝나자 간부들은 할말을 잃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고 한다. 이때 김정일이 "우리도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반동들을 때려잡지 않으면 우리도 저 꼴이 된다."라고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제 아비와 친목질 하던 작자가 분노한 국민들의 손에 끌어내려 져서 끔찍하게 살해당한 데다가 자기도 국민들을 착취 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으니, 똑같이 될까봐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렇긴 해도 북한은 전통적으로 무조건 집권한 정부를 지지해 왔으므로 거리낌없이 새롭게 들어선 루마니아 민주정부를 인정했다.
처형 후 중국 정부는 베이징에 1급 경계령을 내리고 천안문 사태 같은 전민항쟁을 막고자 공안들을 동원해 학생들의 동향을 철저히 감시하는 한편, 루마니아 민주정부를 마지못해 인정했다. 당시 중국의 덩샤오핑도 중국공산당 간부들과 함께 차우셰스쿠의 처형 비디오를 봤다고 한다. 덩샤오핑은 처형 비디오를 보면서 한참만에 "어쩌다 저 꼴이 되었는가?"라고 물었고 공산당의 한 간부가 "반동분자들을 때려잡지 않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틀렸다. 우리도 개혁하지 않고 인민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천윈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대부분 역시 부르주아 학생들을 때려잡고 경제에 대한 당의 통제를 강화하지 않으면 저꼴이 된다는, 김정일과 비슷한 결론을 내렸고 1989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중국은 일시적인 보수화, 폐쇄화를 겪었는데 유학생들에 대한 탄압 및 자본가 당원 입당 금지 등의 조치가 취해졌고 계획경제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보수화에 분노한 덩샤오핑은 1992년 남순강화를 통해 군대가 자신의 뒤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며 개혁개방을 지속하게 된다. 노쇠한 천윈이나 학살자로 인민의 증오를 사고 있어서 입지가 좁아진 리펑은 구태의연한 '경제조정'으로 시장을 통제할 수 없을만큼 중국경제가 고도화, 시장화된 것을 인정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또 공산권에서도 유별나게 억압적이고 폐쇄적이었던[131] 알바니아에서 민중들이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처형한 이 사건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줬다. 오죽했으면 알바니아의 민주화에 앞장선 알바니아 민주당의 6인 집행위원 겸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그라모즈 파스코 교수는 알바니아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줬던 게 바로 천안문 6.4 항쟁과 차우셰스쿠의 처형이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 #
쿠바 정부 역시 북한, 중국과도 행보가 비슷했는데, 전국인민권력회의 측이 해당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 체제를 포기하느니 바닷속으로 침몰하는게 낫다"고 선언하여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교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후 1994년 선박 나포 사태와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이어지게 된다. [132]
2010년까지 존재했던 차우셰스쿠의 가묘. 여러모로 독재자의 비참한 최후를 한 몸에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그의 처인 엘레나의 무덤 위에는 지금 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어디에 있는지도 구별이 안 갔던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민주화 이후에 경제난과 함께 차우셰스쿠의 사후 평가가 높아지면서,[133] 지지자들의 청원에 힘입어 이 가묘는 20여 년만에 재발굴되었고, 감식팀의 감정 끝에 유골이 수습되어 이장, 정식으로 묘가 세워졌다. 위에 보이는 묘가 바로 그 차우셰스쿠의 묘지. 이장된 이후, 그의 처형일이나 생일마다 지지자들이 몰려와서 꽃을 놓고 추모집회를 가진다고 한다. 물론 루마니아 정부는 2015년에 이들에 대한 찬양, 고무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며 차우셰스쿠 추종자들의 움직임을 억제하고 있다.
2013년 9월 4일 차우셰스쿠 부부의 처형지가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 심지어 이들의 처형 당시 쓰러진 모습도 쇼케이스로 볼 수 있다고.(...) #
그리고 차우셰스쿠 정권 치하의 범죄는 거의 단죄되지 않았다. 그냥 차우셰스쿠 부부 저 2명을 사형시킨 걸로 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내부 조직에서 권세를 누리던 사람들 중 혁명의 여파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거의 없었고, 정권의 범죄에 대한 기소 시도는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현재까지 루마니아 공산정권의 인권 탄압과 관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인권 탄압에 가담한 사람들 중 일부는 차우셰스쿠가 처형된 지 한참 후에도 국가의 행정 또는 입법 기관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를 유지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차우셰스쿠가 총살당한 날로부터 10년 뒤인 2000년에 루마니아의 이웃나라인 세르비아에서도 유고 내전 최악의 전범이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이 코소보 전쟁에서 나토군의 개입과 코소보 전쟁 패전 이후 벌어진 반정부 시위로 대통령직에서 실각하자, 밀로셰비치의 뒤를 이어 세르비아의 새 대통령이 된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는 밀로셰비치를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유고전범국제재판소로 인도하지 않고 차우셰스쿠를 총살형으로 처단한 인접한 루마니아의 사례처럼 세르비아 국내에서 밀로셰비치를 처벌하자고 주장한 바 있었다.[134] 하지만 루마니아 내부에서만 악행들을 저질렀던 차우셰스쿠와 다르게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은 과거 구 유고 연방에 속해있다가 독립한 모든 발칸반도 신생국들의 내전에 개입, 침범한 전범이었기에 몰락 이후 루마니아 신정부에게 자국내에서 사형당한 차우셰스쿠와는 그 급이 달랐고, 구 유고 내전 당시 저지른 인종학살 등 유럽과 서방세계에 남긴 전쟁범죄의 규모와 경악성도 차우셰스쿠가 루마니아를 지배하면서 남긴 악영향보다 더 컸던데다 국제사회에서 밀로셰비치의 국내 처벌을 핑계로 봐주는 게 아니냐며 코슈투니차의 제안을 반대, 묵살하고 밀로셰비치의 유고전범재판소 인도를 강하게 압박하였고, 이웃나라이자 차우셰스쿠의 모국이었던 루마니아조차도 이러한 코슈투니차의 밀로셰비치 국내 처벌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면서 끝내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 본명은 '릭산드라 밀리타루(Lixandra Militaru)'.[2] 1명은 일찍 사망했지만 나머지는 차우셰스쿠 치하에서 고위급 인사를 맡는 등 출세했다.[3] 그래서 차우셰스쿠는 본인이 무신론자였음에도 후술하듯 종교에 어느 정도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4] 다만 나중에 차우셰스쿠가 대통령이 되고 출세하면서 대통령이 된 아들의 입김 덕에 고향에서 시장직을 지냈다고 한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한 자리를 내준 것이다. 참고로 정치성향은 농민당을 지지하는 성향이었다.[5] 이때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차우셰스쿠와 같은 방에 수감된 감옥 동기가 있었는데 이 동기의 증언으로는 차우셰스쿠가 교도관들 사이에서도 독종으로 통했으며 교도관들의 폭행에도 비명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교도관들이 폭력과 고문으로 죄수들을 통제하는 방법에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동기도 차우셰스쿠에게 루마니아 민중의 분노를 경고하는 서한을 보냈다가 독살을 당할 뻔하자 해외로 망명했다.[6] 문헌에 따라서 블라디슬라브 타르노브스키(Vladislav Tarnovschi)로도 표기.[7] 당시 실제 사진[8] https://www.youtube.com/watch?v=z-of4mBh60E 영어번역본.[9] 얼마나 흔했냐면, 하지 않는 지도자가 특이하다고 욕을 먹었을 정도로 흔했다.[10] 다만 이 시절에도 낙태금지와 출산강요 때문에 젊은 여성층들에게 인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11] 르노와의 합작 업체. 지금도 르노 산하에서 운영 중이다.[12] 시트로엥과의 합작업체. 1980년대에 올트시트 클럽/시트로엥 악셀만을 잠시 생산하고 대우자동차와 포드로 넘어가 현지공장으로 운영되었다.[13] 물론 라다도 따지고 보면 이탈리아에서 자동차 기술을 받아서 쓰기는 했다.[14] 더 정확한 진앙지는 부쿠레슈티 북동부의 브란체아주에 위치한 브란체아 산맥으로 루마니아에서 지진활동이 활발한 지역 중 하나다.[15] Edward Behr (1926–2007), 프랑스의 유대계 저널리스트. 마지막 황제의 원작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16] Alexandru lvasiuc (1933–1977). 차우셰스쿠에 비판적이던 소설가였으며, 후술할 지진으로 사망한다.[17] 참고로 8월 23일은 1944년 8월 23일에 루마니아의 국왕이던 미하이 1세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추축국에 부역하던 이온 안토네스쿠 총리를 위시한 친추축국 세력들을 몰아낸 것을 기념하던 날로, 공산정권 시절의 루마니아에서는 이 사건을 '영광스러운 소비에트 군대에 의한 루마니아 해방'으로 여기며 국경일로 삼았다. 실제로 이 사건 후 루마니아는 연합군에 가담하게 된다.[18] 실제로 차우셰스쿠는 북한을 벤치마킹하여 대규모 매스게임을 매년 개최했다고 하며, 후술할 루마니아 최초의 컬러 방송으로 남은 1983년 8월 23일의 국경절 열병식 중계에 기록된 것처럼 어린이들을 동원한 매스게임까지 하기도 했다. 1980년 루마니아의 어린이 매스게임[19] 뜬금없이 공산권 지도자도 아닌 이디 아민이 들어간 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는 소련의 KGB가 이디 아민 시기 우간다 비밀경찰인 SRB의 창설을 도와줬고, 동독 역시 SRB를 지원했으며, 북한도 아민 시기 우간다의 군대에 무기를 지원하고 훈련을 돕는 등 아민이 제1세계보다 제2세계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에서 기인한다. 사실 아민이 딱히 사회주의를 내세워서 집권한 것은 아니었고, 소련은 아민의 전임이던 밀턴 오보테도 지원해주고 있었으니 이익이 된다고 양다리를 걸친 것이기는 하며, 북한도 오보테의 2차 집권기에 우간다 정규군을 지원하기도 했다. 차라리 공산권 국가들이랑 절친하면서 공산주의 성향의 정책들을 여럿 펼친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를 넣는 게 더 적합했을 것 같다.[20] 다만 이는 어떻게 보면 차우셰스쿠에 대한 굉장히 적절한 비유인 셈이다.[21] 참고자료(루마니아어 위키피디아에 있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개인 숭배' 항목).[22] 차우셰스쿠는 64세 생일을 맞이한 1982년에도 당원들과 일반 시민들을 동원해 '혁명가로서 콘두카토르의 젊음'을 찬양하게 했다.[23] 물론 주변인들에 따르면 차우셰스쿠는 공산주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한다.[24] 실제로 차우셰스쿠는 17살에도 문맹이었으며, 얼마나 무식했는지 당시 그의 동년배는 차우셰스쿠가 "어린애들이 보는 만화책이라도 볼 수가 있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라고 회고했을 정도였다.[25] 이것은 독재자들의 공통 사항인지 아돌프 히틀러도 집권 후에 <나의 투쟁>을 사실상 전국민에게 강매하다시피 해서 엄청난 인세수입을 올렸다.[26] 차우셰스쿠의 몰락 4개월 전인 1989년 8월 23일 국경절 행사 영상에서 이런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영상을 보면 차우셰스쿠 부부의 모습이 나올 때 항상 멀리서 차우셰스쿠 부부의 모습을 촬영했기에 차우셰스쿠 부부의 얼굴을 명확히 확인하기 힘들다. 마치 김정일이 생전에 북한 주민들에게 목소리를 사실상 공개하지 않은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도 볼 수 있다.[27] 이것 역시 스탈린의 우상화에서 쓰이던 방법이었다. 스탈린 사후에도 후임 독재자들에 대한 선전화나 사진들이 나오긴 했지만 흐루쇼프보다 더 큰 사람이 등장하는 것 정도는 허용되었다.[28] 실제로 이오시프 스탈린/김정일이 자신을 우상화함과 동시에 전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김일성도 우상화하면서 그 후광효과를 보고자 했다.[29] 마치 전두환/김정은이 집권 후 부족한 정통성 확보를 위해 자신들이 권력을 잡을 기반을 마련해준 박정희/김일성&김정일을 격하한 것을 연상시킨다.[30] 참고로 김정일이 후계자로 지명되어 '당중앙'으로 불린 것이 차우셰스쿠의 방북 3년 후인 1974년이다.[31] 물론 일반적인 북한인들의 접근은 원천 차단되어 있다.[32] 이러힌 면에서는 배은망덕에도 해당된다.[33] 그나마 장성택처럼 출세한 사람도 있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김씨일가의 철저한 통제 하에 있었으며 실제로 김정은이 집권한 후 빛의 속도로 몰락했다.[34] 실제로 루마니아 국민들은 사실상 전부가 정권에 대해 '무언의 소극적인 못마땅함'을 갖추고 있었다고 1985년에 한 영국인 기자가 증언했다.[35] 1985년에 세쿠리타테 수는 11,000명에 정보원은 5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루마니아의 인구는 약 2,270만 명이었다.[36] 참고로 비슷한 시기 동독의 슈타지는 무려 국민 6.5명당 1명의 어마어마한 요원을 고용했다.[37] 사실 중국도 이와 비슷한 제도를 '후커우(戶口)'라는 이름으로 현행으로 실시하고 있긴 하나, 차우셰스쿠 시기 루마니아처럼 직업 변경까지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게 하는 정도는 아니다. 그나마 양심은 있었는지 차우셰스쿠는 자신이 존경하던 김일성으로부터 국내의 타 지역 이동을 통제하는 제도까지는 도입하지 않았다.[38] 참고로 차우셰스쿠 시기인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루마니아에서 사형당한 사람은 104명에 달했다. 특히 루마니아가 경제난에 시달리던 1983~1984년에 경제적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총합 19명에 달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대량으로 고기를 절도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39] 참고로 투르크메니스탄은 1999년에 사형제를 완전히 폐지했으나,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갑자기 '실종'되거나 정치범수용소의 극악한 환경과 고문 속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0] 차우셰스쿠 시기에 총 64,000명이 죽었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루마니아 혁명 당시 사망자 수가 차우셰스쿠 집권 당시 사망자 수로 와전된 것이고, 심지어 루마니아 혁명 당시 사망자 수라는 것도 완전히 뻥튀기된 것이다.[41] 사실 당대 종교단체 중 차우셰스쿠를 비판한 단체는 복음주의 개신교밖에 없었다.[42] 1986년부터 2007년까지 루마니아 정교회 대주교를 역임했다.[43] 사실 불편하다는 이유로 안경을 꺼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 인기가 많은 간행물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큰 글씨로 된 간행물을 별도로 내고 있다.[44] 게다가 차우셰스쿠의 방영 당시 여왕과의 만찬 등 모든 공식 행사들은 루마니아에서 TV를 통해 방송되었는데, 이로써 차우셰스쿠는 자국민들한테 대놓고 나라 망신을 시켜주는 꼴이 되어버렸다.[45] 참고로 차우셰스쿠의 집권기에 부쿠레슈티에는 지하철 노선이 1979년부터 1986년까지 총 3개가 개통했다.[46] 후술하듯 당시 루마니아인들은 한 달 동안 겨우 두 끼 분량의 고기만 배급받던 판이었다.[47] 이는 칼리굴라가 자신의 말을 집정관에 추대했다는 일화와 비슷한데, 칼리굴라의 일화는 루머에 불과하나(사실 칼리굴라의 기행들은 대부분 허위사실로 판명되었다.) 차우셰스쿠가 자신의 애완견을 대령으로 추대한 것은 사실이다.[48] 이전에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였던 라파엘 트루히요도 3살짜리 아들을 대령으로 앉히긴 했지만, 적어도 애완견을 대령으로 만들지는 않았다.(...)[49] 서방 국가들도 비슷한 전략을 펼칠 때가 많았지만, 내수시장을 위해서라도 경공업 분야 전체를 무시할 수 없었고 정부가 굳이 지시하지 않아도 경공업 산업으로 수익을 거두려는 수많은 민간 사업자들이 알아서 생산하고 시장에 납품했기에 어느 정도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소련은 옛부터 본인들도 비누, 치약, 면도날 따위의 자질구레한 것들조차도 모자라서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많이 발생됐고, 본격적 시장경제가 도입된 러시아 시절인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쳐 과자와 라면 같은 가공식품과 소비재의 상당량을 자체적으로 손수 생산하지도 못하고 대한민국, 중국 등지에서 수입해서 소비하고 있다. 물론 러시아도 바보는 아닌지라 자국 기업의 자체 생산도 비중이 적지 않지만, 문제는 외국 기업의 제품 수입량이 여전히 더 많다는 것이다.[50] 우리나라를 함 예로 들어보자면 당장에 외채 갚겠다고 국내에서 생산하는 쌀은 다 팔면서 석유는 전혀 안 사오는 정책을 시행했다고 가정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게 모든 국내 생산품과 모든 수입품으로 확대된 차우셰스쿠의 정책은 루마니아라는 국가를 문자 그대로 루마니아 국적자 2000만여명과 차우셰스쿠만 있는 238, 391km²의 허허벌판으로 만드는 멍청한 짓거리였다고 봐도 무방하다.[51] 대부분 트란실바니아와 몰도바 지방에 거주했으며, 이들은 단순히 헝가리어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잡혀온 경우가 많았다.[52] 루마니아어가 과연 라틴계 언어라 그런지 바로 이해가 간다. 혁명 이후에는 Palatul Parlamentului(국회 궁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53] 물론 건설 당시에는 세계 2위였다.[54] 이때 일반인들은 그냥 환호하는 시늉만 했다.[55] 다만 이는 적어도 차우셰스쿠가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1973년의 증언이란 것은 감안해야 한다.[56] 물론 차우셰스쿠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는지, 엄청난 고령이던 프르불레스쿠까지 구금시키지는 못했고 루마니아 동부로 강제로 이주시킨 후 연금하는 데서 그쳤다.[57] 사실 곤룡포 역시 불태워졌다는 것은 루머로 밝혀졌다. 정말로 한 번 입고 불태워졌던 옷은 잉카 제국의 사파 잉카가 입던 옷이다.[58] 로마 제국의 네로가 로마 대화재 후에 화재로 피해를 입은 장소에 '황금 궁전' 등 자기 취향의 건축물을 지은 것이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내용으로 와전된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59] 술에 취해 그랬다는 주장도 있다.[60] 진짜 헬게이트가 열리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눈높이도 낮아지고, 인식도 변하게 마련이다.[61] 이런 사람들은 아이 낳는 것 자체가 절대 불가능한 일인데 이들에게 세금을 물렸다는 건 막말로 이 나라에서 살지 말라는 거다.[62] 이러한 출산율은 동독이나 불가리아, 헝가리보다는 높은 수준이기는 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에 비하면 특출나게 높지는 않았다.[63] 가장 추운 날에도 최대 6시간만 난방을 공급했다고 한다.[64] 참고로 대한민국 4인 가구의 월평균 전기사용량이 350kWh다. 즉, 차우셰스쿠 치하의 루마니아인들은 현대 한국인들이 이틀간 쓰는 전기사용량보다 더 적은 전기로 한 달을 살아야 했다는 뜻.[65] 참고로 TVR2의 폐국은 엘레나 차우셰스쿠의 명령이었다고 하는데, 물론 TVR2는 차우셰스쿠의 축출 후인 1990년 2월 19일에 다시 개국했다.[66] 다만 주말에는 방송 시간이 보다 널널했으며, 1988년 11월 1일부터는 오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방송하며 1시간 방송이 추가되었다.[67] 물론 라디오 방송도 하루종일 차우셰스쿠를 찬양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68] 여담으로 루마니아는 1983년 8월 23일에야 국경일 열병식 중계를 송출하며 컬러 방송을 시작했는데, 이는 유럽에서 가장 늦게 컬러 방송을 시작한 것이었다고 한다.[69] 여담으로 이 당시에 미국의 인기 드라마 댈러스가 1980년대 초반 루마니아에서 큰 인기를 끈것과 관련지어서 댈러스가 루마니아 혁명과 관계가 있다는 말이 나왔지만, 댈러스가 인기를 끌었을때는 루마니아 혁명 한참 이전의 일이었고, 혁명 직전의 루마니아에서는 옛날드라마 취급이었다고 한다.(...) 즉, 미국 언론인들이 댈러스가 인기가 많다는 얘기만 들어서 소설을 지어댄 것이다.[70] 소련과 북한도 마찬가지였고, 1970년대 대한민국의 불경기도 부분적으로는 박정희 시대의 지나친 중공업 과투자 때문이었다. 박정희 사후 집권한 전두환의 신군부가 이를 부분적으로 정리하고, 때마침 유가도 떨어지고 나서야 한국의 경기는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한다.[71] 반대로 중남미 국가들은 푸대접했었다. 당시 페루 대통령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가 자국의 경제가 막대한 외채로 어려움에 처해서 채무조정을 하려고 방미했을때 레이건 대통령과 30분만 만나고 결국 페루로 되돌아갔다는 일화는 이 당시의 미국의 정세판단력을 엿볼수있었다.[72] 당시 루마니아의 식료품 통계는 '루마니아 전역에서 팔렸다는 차우셰스쿠가 쓴 책의 판매 부수만큼이나' 신뢰성이 없었다고 한다.[73] 1989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698달러로 당대 기준으로도 개발도상국 중하위권 수준이었다.[74] 2022년 가치로 환산해도 4501달러에 불과하다.[75] 오늘날로 치면 코소보보다도 못한 포지션이라고 보면 된다.[76] 정확하게는 1983년에 '돈 나중에 갚아줄 테니 제발 채무 좀 유예해 주세요'라는 식으로 나섰던 적은 있었다.[77]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극단적인 고립주의에 기반하여 외부의 원조도 거부하다가 동구권 최빈국으로 전락한 알바니아는 역설적으로 이 덕분에 외채가 하나도 없어서 동구권 붕괴 무렵 당시 타격이 적은 편이었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 전환 과정에서의 타격은 타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 매우 컸지만.[78] 그나마 사정이 나은 소련이나 동독은 첨단산업에도 투자했지만, 실패로 끝났다.[79] 당시에는 마오쩌둥이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1년 후 문화대혁명으로 덩샤오핑은 실각하게 된다.[80] 1971년 6월 첫 평양 방문시 북한은 '친근하신 챠우쉐스꾸 동지의 노래'라는 노래까지 지어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본 영상 1분 15초에서 2분 55초 사이에서 등장한다. 여담으로 다른 배경 음악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0:34~1:15),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우상화 노래 <인민, 차우셰스쿠, 루마니아(Poporul, Ceauşescu, România)>(3:24~끝).[81] 1970년대 루마니아는 자가용차가 많이 보급되고 흔한 공산권 국가에서 보이는 물자부족현상도 별로 일어나지 않았으며 자영업도 꽤나 활성화되어서 일반적인 직장인들은 길거리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점심이나 간식을 사먹고 그랬다고 한다. 그리고 2년에 한번씩 외국여행갈 수 있게 허용하기도 해서 여유만 있다면 해외여행도 갈 수 있고 그랬다고 한다. 물론 그게 사실은 외채를 잔뜩 빌려서 온 호황이라 문제였을 뿐이었다.[82] 반면 옆나라인 헝가리와 불가리아에는 Mi-24와 Su-22를 제공했다.[83] 다만 국빈 만찬에 차우셰스쿠의 부하들이 검사한 음식들만 상에 오를 수 있었다는 점을 거론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타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이를 두고 비판하는 건 어폐가 있다.[84] 메리의 친할머니 클라우디아는 헝가리 귀족 출신이다.[85] 당장 엘리자베스 2세의 큰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는 입헌군주제임에도 열혈 나치당원 수준으로 대독외교에 노골적으로 간섭해서 나라를 히틀러에게 갖다 바칠 뻔했다.[86] 앞서 말한 엘리자베스의 헝가리 조상의 이름이다.[87] 영국 왕실은 외국 국빈의 이름이나 관련 있는 것을 딴 특별식을 대접하곤 했는데, 이란의 샤 팔라비 2세가 방문했을 때는 테헤란의 이름을 붙인 음식 ‘Aiguilette de Sole Tehran'을,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방문했을땐 그의 왕비인 루이즈 마운트배튼의 이름을 탄 음식 ‘Soufflé Glacé Louise’를 대접했다. 근데 차우셰스쿠가 왔을 땐 그에게 헌정하는 음식은커녕 대놓고 그를 엿먹이는 음식을 내준 것이다. 그외에 여왕은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이나 독일 대통령 테오도어 호이스에겐 최고급 와인을 내주었으나 차우셰스쿠에겐 싸구려 와인만 내놓았다.[88] 정작 엘레나는 방사선이 무섭다고 태닝 살롱을 전혀 쓰지 않았다고 한다.[89] 이와 비슷하게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나 로버트 무가베도 차우셰스쿠 이상의 사치 생활을 한 것으로 악명이 자자한 것과는 정반대로 식생활만큼은 채식 위주로 검소하게 했고, 세계 최악의 부패 독재자로 꼽히는 수하르토는 한술 더 떠 장관들과 컵라면을 끓여먹기도 했을 정도로 식생활이 소탈했다.[90] 그 외 암살을 우려해 믿을 만한 국영농장에서 공급한 재료들만 사용했고 식사 전 소량을 연구실로 먼저 보내 검사를 거치게 하고는 24시간 동안 별도로 보관한 후에 먹었으며 식사 때마다 영양사와 감별사가 함께 동행하기도 했다는 걸 비판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이 부분은 여타 독재자들도 대동소이 했다.[91] 루마니아의 국토 크기는 23만 Km2이다. 즉 굳이 한국 영토가 아니더라도 루마니아 국토의 10%에 달한다.[92] 북극곰은 해양생물이다.[93] Vasile Malutan, 1942~1995
훗날 차우셰스쿠가 축출될 때에도 그가 망명을 위해 이용한 헬리콥터를 조종했는데, 이때 차우셰스쿠 부부의 체포에 소소한 공헌을 하였다. 전역한 뒤 민간 헬기 조종사로 일했다. 1995년 5월 26일, 포도밭에서 헬기를 이용해 제초 작업을 하다가 헬리콥터의 꼬리가 근처에 있던 고압 전선에 걸려 추락하는 사고를 당한 후 병원으로 이송되는 중에 사망했다. #[94] 영국 사냥총 제조사 홀랜드&홀랜드를 네덜란드로 혼동한것으로 추정. 확인요망[95] 위 사진에서 차우셰스쿠가 들고 있는 총으로 보이는데, 굳이 스코프가 달려있는 걸 봐선 더블 배럴 샷건이 아니라 더블 배럴 라이플인 듯하다.[96] 오늘날에는 '혁명 광장'(Piața Revoluției)으로 개칭되었다.[97] 루마니아와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끔찍한 유혈 사태를 겪은 유고슬라비아는 공산주의 체제 붕괴 후 내전을 겪었다. 이와 함께 연방이 산산히 분해되며 루마니아보다 더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다만 연방 내 개별 구성국별로 보면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렸는데, 예를 들어 슬로베니아는 내전의 화마를 크게 입지 않고 동구권에서 선두를 달리는 부국으로 성장한 반면,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는 내전의 화마를 직접적으로 입은 뒤에도 사회적 혼란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코소보는 여전히 유럽 최빈국 신세다.[98] 한때 루마니아 최대의 탄광이라 불렸다.[99] 6시간 근무, 토, 일요일 휴무, 광부들의 아내와 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공장을 건설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참고로 원래 광부들은 법정으로 정해진 8시간 근무를 초과하는 장기간 노동과 저임금은 기본에 토, 일요일에도 열악한 환경에서 쉬지 않고 일해야 했고, 할당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급여가 삭감되었다.[100] 당시에는 진미로 여겨졌던 시비우 살라미 소시지, 치즈, 바나나, 오렌지, 펩시 콜라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고 한다.[101]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는지 7~8일 만에 최소 12~13kg이 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102] 차우셰스쿠의 별명 중 하나가 무려 이디 아미네스쿠(Idi Aminescu)였을 정도면 말 다 한 셈이다.[103] 아이러니하게도 이쪽은 소련 붕괴 후 아프리카 최빈국 수준의 빈곤국으로 전락한 바가 있다.(...) 물론 2020년대에는 중진국 수준에 돌입했지만.[104] 이 당시 소련의 1인당 육류소비량이 62~75kg 정도로 매일같이 고기를 먹을 정도는 되었다.[105] 당시 공산권 중에 인민의 생활수준이 가장 높다고 평가받는 나라들 중 하나였다.[106] 헝가리 서기장 카다르 야노시는 집권 이후 '굴라쉬 사회주의'라 부르는 일련의 개혁정책의 자금을 루마니아, 폴란드 등 다른 동구권 국가들처럼 주로 서방의 외채에 의존했다. 그러던 중 두 번의 오일쇼크와 1980년대 초반의 세계적 경기침체(경기침체가 왜 일어났는지 궁금하다면 폴 볼커 문서 참고.)가 겹치자 1982년 90억 달러렸던 외채가 1989년 200억 달러까지 증가하기에 이른다. 헝가리 정부는 국가파산을 막기 위해 1982년 IMF, 1983년 IBRD에 가입해 긴급자금지원을 받아 위기를 넘겼다.[107] 역사적으로 트란실바니아 지역은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던지라 헝가리계 사람들이 여전히 살고 있다.[108] 심지어는 6만 4천 명이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소문까지 돌았고, 이 수치는 루마니아 내에 역수출되어 차우셰스쿠의 재판에서 이 수치를 인용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 소문에 낚인 일부 서방 기자들이 티미쇼아라로 잠입했는데 아무리 티미쇼아라 시내를 뒤져도 수만 구의 시신을 찾을 수 없자 영안실과 티미쇼아라 극빈자 공동묘지를 습격해서 시체를 파낸 후에 학살당한 시신이라고 가짜 뉴스를 보낸 엽기적인 사건도 있었다.[109] 물론 차우셰스쿠가 자기 자녀들이 조언을 해줘도 말을 안듣던 상황이라서 제대로 들을지 의문이기도 했다.[110] 정작 반대로 중국공산당은 차우셰스쿠가 끔살당하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111] 참고로 이건 나치 독일의 요제프 괴벨스가 쓰던 유명한 수법이다.[112] 이는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터트린 폭죽 소리였다는 말도 있고, 총소리였다는 말도 있다.[113] 후술하듯 루마니아군은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거부했다.[114] 그러나 2005년에 밀레아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밀레아는 자살한 것이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사태의 전개에서 비롯된 중압감과, 끝내 진압을 명령했다는 죄책감이 원인으로 보인다. #[115] 차우셰스쿠가 가장 아꼈을 정도로 유명한 아나운서였으며, 민주화 후에도 별 탈 없이 방송에서 활동했다. 북한에서의 전형규, 리춘히급 포지션이라 봐도 될 듯.[116] 한편, 차우셰스쿠 정권 당시에 총리직을 지냈던 일리 베르데도 대통령직을 승계받을려고 했지만 시위대에게 막혔다.[117] 사실 그는 이전에도 부쿠레슈티에 있는 7개의 유서깊은 교회를 철거하는 데에 동의했고, 차우셰스쿠에게 수많은 축하 전보와 '오래된'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그가 세쿠리타테 정보원일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118] 일각에서는 차우셰스쿠가 정권 붕괴 당시 루마니아와 이웃한 동유럽 이웃나라들(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헝가리, 소련 등)을 경유한 다음, 북한이나 다른 먼 나라로 탈출/망명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119] 위의 사냥 문단에도 나오듯이 말루찬 중령은 차우셰스쿠의 사냥 내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대기태세를 갖춰야 했다고 하는데, 이에 시달린 것을 보면(게다가 문맥상으로도 한두번도 아닌 것 같고 자주 그런 것으로 보인다.) 안 싫어하는게 오히려 이상하다.[120] 차우셰스쿠의 처형 후인 1990년 1월 18일에 테옥티스트는 신자들과 신에게 '위협 하에 누워 있고' 차우셰스쿠의 독재에 반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했고, '건강과 나이'를 이유로 3개월 동안 일시적으로 총대주교직에서 사임하기도 했으며, 자신이 보낸 전보에 대해서도 "정당이 부과한 의식일 뿐 내 신념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하면서도 당시 공산주의 시절 비밀경찰에 협력했던 성직자들에 대한 조사에는 강하게 반대했으며, 공산주의 붕괴 이후에도 루마니아 정교회는 과거 청산의 여파를 거의 받지 않았다.[121] 이후 테옥티스트는 가톨릭교회와의 일부 관계 정립에 실패했다는 지적에도 1999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루마니아로 초청해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간의 오랜 반목과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을 유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참고로 1054년에 기독교가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두 교파로 분열된 이래 가톨릭 교황이 동방 정교회 국가를 방문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이후 테옥티스트는 2007년 7월 30일에 향년 9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인은 심장마비.[122] 다비자 대위는 '그녀(엘레나)가 미친 사람' 같았다고 증언했다.[123] 심지어 엘레나는 "날 죽여도 (니콜라에랑) 같이 죽여라, 우린 같이 죽을 권리가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그 말대로 되긴 했다.[124] 중국에선 사형수는 형복을 입는 게 원칙이고, 현역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군인은 사형 집행 시 무조건 원래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는 것이 원칙이다.[125] 장교는 어지간해서는 총살형에서 사격수 일을 하지 않는다. 보통 군의관이 사형수의 사망을 확인하고 사망 선고를 내리거나 군종장교가 사형수의 고해성사를 맡는 등 병과에 따라 보조적인 임무를 행한다. 유일하게 사격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장교는 사형수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을 때 확인 사살을 하도록 되어있는 군사경찰대 장교밖에 없다.[126] 집행 이후 대위에서 중령까지 진급하였고 2002년 제대하였다. 그와는 별개로 처형 이후 차우셰스쿠 부부의 추종자에 의한 보복을 상당히 두려워했다고 한다.[127] 제대 이후 수도 부큐레슈티에서 관광가이드를 하기도 했다. #[128] 지금의 프랑스-2TV(France 2).[129] 해당 영상은 폐쇄 아카이브인 KDAS에 저장된 마스터본 영상을 그대로 올린 터라 자막이 안 나온다.[130] 이와 비슷하게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이 망명지에서 사망한 후에 한 상인은 "그는 그가 죽인 다른 사람들처럼 죽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참고로 이디 아민은 지옥과도 같은 수용소에서 온갖 끔찍한 고문들로 정적들을 살해한 것으로 악명이 자자하다.[131] 과장 하나도 안 보태고 북한과 동급 내지 그 이상(!!!)이었을 정도.[132] 이하 KBS 및 조선일보 기사 참조[133] 물론 그의 업적이 좋은 면으로 변한 게 아닌, 후의 상황 때문에 평이 나아진 것 뿐이다. 차우셰스쿠를 뒤엎었더니 이번에는 물가가 폭등해버리고, 결국 물가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다시 받아 재긴축에 들어갔고, 주요 기업들을 구조조정, 민영화하여 실업률이 크게 증가, 10%를 넘기는 테크를 밞았기 때문이었다. IMF 외환 위기 시기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결국 돌고 돌아서 그 기간 동안 호황은커녕 긴축정책과 경기불황의 여파를 20년 씩이나 제대로 맞아버렸던 것이다. 차우셰스쿠에서 부정부패를 자행했던 자들이 처벌받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지사.[134] 실제로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 전 세르비아 대통령은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는 미국과 서방 열강들의 정치도구에 불과하다고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했던 사람이었다. 정작 그 당시 국제형사재판소가 친중, 친러적인건 간과한 게 함정.
훗날 차우셰스쿠가 축출될 때에도 그가 망명을 위해 이용한 헬리콥터를 조종했는데, 이때 차우셰스쿠 부부의 체포에 소소한 공헌을 하였다. 전역한 뒤 민간 헬기 조종사로 일했다. 1995년 5월 26일, 포도밭에서 헬기를 이용해 제초 작업을 하다가 헬리콥터의 꼬리가 근처에 있던 고압 전선에 걸려 추락하는 사고를 당한 후 병원으로 이송되는 중에 사망했다. #[94] 영국 사냥총 제조사 홀랜드&홀랜드를 네덜란드로 혼동한것으로 추정. 확인요망[95] 위 사진에서 차우셰스쿠가 들고 있는 총으로 보이는데, 굳이 스코프가 달려있는 걸 봐선 더블 배럴 샷건이 아니라 더블 배럴 라이플인 듯하다.[96] 오늘날에는 '혁명 광장'(Piața Revoluției)으로 개칭되었다.[97] 루마니아와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끔찍한 유혈 사태를 겪은 유고슬라비아는 공산주의 체제 붕괴 후 내전을 겪었다. 이와 함께 연방이 산산히 분해되며 루마니아보다 더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다만 연방 내 개별 구성국별로 보면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렸는데, 예를 들어 슬로베니아는 내전의 화마를 크게 입지 않고 동구권에서 선두를 달리는 부국으로 성장한 반면,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는 내전의 화마를 직접적으로 입은 뒤에도 사회적 혼란이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코소보는 여전히 유럽 최빈국 신세다.[98] 한때 루마니아 최대의 탄광이라 불렸다.[99] 6시간 근무, 토, 일요일 휴무, 광부들의 아내와 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공장을 건설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참고로 원래 광부들은 법정으로 정해진 8시간 근무를 초과하는 장기간 노동과 저임금은 기본에 토, 일요일에도 열악한 환경에서 쉬지 않고 일해야 했고, 할당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급여가 삭감되었다.[100] 당시에는 진미로 여겨졌던 시비우 살라미 소시지, 치즈, 바나나, 오렌지, 펩시 콜라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고 한다.[101] 얼마나 고문이 참혹했는지 7~8일 만에 최소 12~13kg이 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102] 차우셰스쿠의 별명 중 하나가 무려 이디 아미네스쿠(Idi Aminescu)였을 정도면 말 다 한 셈이다.[103] 아이러니하게도 이쪽은 소련 붕괴 후 아프리카 최빈국 수준의 빈곤국으로 전락한 바가 있다.(...) 물론 2020년대에는 중진국 수준에 돌입했지만.[104] 이 당시 소련의 1인당 육류소비량이 62~75kg 정도로 매일같이 고기를 먹을 정도는 되었다.[105] 당시 공산권 중에 인민의 생활수준이 가장 높다고 평가받는 나라들 중 하나였다.[106] 헝가리 서기장 카다르 야노시는 집권 이후 '굴라쉬 사회주의'라 부르는 일련의 개혁정책의 자금을 루마니아, 폴란드 등 다른 동구권 국가들처럼 주로 서방의 외채에 의존했다. 그러던 중 두 번의 오일쇼크와 1980년대 초반의 세계적 경기침체(경기침체가 왜 일어났는지 궁금하다면 폴 볼커 문서 참고.)가 겹치자 1982년 90억 달러렸던 외채가 1989년 200억 달러까지 증가하기에 이른다. 헝가리 정부는 국가파산을 막기 위해 1982년 IMF, 1983년 IBRD에 가입해 긴급자금지원을 받아 위기를 넘겼다.[107] 역사적으로 트란실바니아 지역은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던지라 헝가리계 사람들이 여전히 살고 있다.[108] 심지어는 6만 4천 명이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소문까지 돌았고, 이 수치는 루마니아 내에 역수출되어 차우셰스쿠의 재판에서 이 수치를 인용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 소문에 낚인 일부 서방 기자들이 티미쇼아라로 잠입했는데 아무리 티미쇼아라 시내를 뒤져도 수만 구의 시신을 찾을 수 없자 영안실과 티미쇼아라 극빈자 공동묘지를 습격해서 시체를 파낸 후에 학살당한 시신이라고 가짜 뉴스를 보낸 엽기적인 사건도 있었다.[109] 물론 차우셰스쿠가 자기 자녀들이 조언을 해줘도 말을 안듣던 상황이라서 제대로 들을지 의문이기도 했다.[110] 정작 반대로 중국공산당은 차우셰스쿠가 끔살당하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111] 참고로 이건 나치 독일의 요제프 괴벨스가 쓰던 유명한 수법이다.[112] 이는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터트린 폭죽 소리였다는 말도 있고, 총소리였다는 말도 있다.[113] 후술하듯 루마니아군은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거부했다.[114] 그러나 2005년에 밀레아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밀레아는 자살한 것이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사태의 전개에서 비롯된 중압감과, 끝내 진압을 명령했다는 죄책감이 원인으로 보인다. #[115] 차우셰스쿠가 가장 아꼈을 정도로 유명한 아나운서였으며, 민주화 후에도 별 탈 없이 방송에서 활동했다. 북한에서의 전형규, 리춘히급 포지션이라 봐도 될 듯.[116] 한편, 차우셰스쿠 정권 당시에 총리직을 지냈던 일리 베르데도 대통령직을 승계받을려고 했지만 시위대에게 막혔다.[117] 사실 그는 이전에도 부쿠레슈티에 있는 7개의 유서깊은 교회를 철거하는 데에 동의했고, 차우셰스쿠에게 수많은 축하 전보와 '오래된'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그가 세쿠리타테 정보원일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118] 일각에서는 차우셰스쿠가 정권 붕괴 당시 루마니아와 이웃한 동유럽 이웃나라들(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헝가리, 소련 등)을 경유한 다음, 북한이나 다른 먼 나라로 탈출/망명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119] 위의 사냥 문단에도 나오듯이 말루찬 중령은 차우셰스쿠의 사냥 내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대기태세를 갖춰야 했다고 하는데, 이에 시달린 것을 보면(게다가 문맥상으로도 한두번도 아닌 것 같고 자주 그런 것으로 보인다.) 안 싫어하는게 오히려 이상하다.[120] 차우셰스쿠의 처형 후인 1990년 1월 18일에 테옥티스트는 신자들과 신에게 '위협 하에 누워 있고' 차우셰스쿠의 독재에 반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했고, '건강과 나이'를 이유로 3개월 동안 일시적으로 총대주교직에서 사임하기도 했으며, 자신이 보낸 전보에 대해서도 "정당이 부과한 의식일 뿐 내 신념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하면서도 당시 공산주의 시절 비밀경찰에 협력했던 성직자들에 대한 조사에는 강하게 반대했으며, 공산주의 붕괴 이후에도 루마니아 정교회는 과거 청산의 여파를 거의 받지 않았다.[121] 이후 테옥티스트는 가톨릭교회와의 일부 관계 정립에 실패했다는 지적에도 1999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루마니아로 초청해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간의 오랜 반목과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을 유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참고로 1054년에 기독교가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두 교파로 분열된 이래 가톨릭 교황이 동방 정교회 국가를 방문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이후 테옥티스트는 2007년 7월 30일에 향년 9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인은 심장마비.[122] 다비자 대위는 '그녀(엘레나)가 미친 사람' 같았다고 증언했다.[123] 심지어 엘레나는 "날 죽여도 (니콜라에랑) 같이 죽여라, 우린 같이 죽을 권리가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그 말대로 되긴 했다.[124] 중국에선 사형수는 형복을 입는 게 원칙이고, 현역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군인은 사형 집행 시 무조건 원래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입는 것이 원칙이다.[125] 장교는 어지간해서는 총살형에서 사격수 일을 하지 않는다. 보통 군의관이 사형수의 사망을 확인하고 사망 선고를 내리거나 군종장교가 사형수의 고해성사를 맡는 등 병과에 따라 보조적인 임무를 행한다. 유일하게 사격수와 비슷한 일을 하는 장교는 사형수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을 때 확인 사살을 하도록 되어있는 군사경찰대 장교밖에 없다.[126] 집행 이후 대위에서 중령까지 진급하였고 2002년 제대하였다. 그와는 별개로 처형 이후 차우셰스쿠 부부의 추종자에 의한 보복을 상당히 두려워했다고 한다.[127] 제대 이후 수도 부큐레슈티에서 관광가이드를 하기도 했다. #[128] 지금의 프랑스-2TV(France 2).[129] 해당 영상은 폐쇄 아카이브인 KDAS에 저장된 마스터본 영상을 그대로 올린 터라 자막이 안 나온다.[130] 이와 비슷하게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이 망명지에서 사망한 후에 한 상인은 "그는 그가 죽인 다른 사람들처럼 죽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참고로 이디 아민은 지옥과도 같은 수용소에서 온갖 끔찍한 고문들로 정적들을 살해한 것으로 악명이 자자하다.[131] 과장 하나도 안 보태고 북한과 동급 내지 그 이상(!!!)이었을 정도.[132] 이하 KBS 및 조선일보 기사 참조[133] 물론 그의 업적이 좋은 면으로 변한 게 아닌, 후의 상황 때문에 평이 나아진 것 뿐이다. 차우셰스쿠를 뒤엎었더니 이번에는 물가가 폭등해버리고, 결국 물가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다시 받아 재긴축에 들어갔고, 주요 기업들을 구조조정, 민영화하여 실업률이 크게 증가, 10%를 넘기는 테크를 밞았기 때문이었다. IMF 외환 위기 시기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결국 돌고 돌아서 그 기간 동안 호황은커녕 긴축정책과 경기불황의 여파를 20년 씩이나 제대로 맞아버렸던 것이다. 차우셰스쿠에서 부정부패를 자행했던 자들이 처벌받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지사.[134] 실제로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 전 세르비아 대통령은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는 미국과 서방 열강들의 정치도구에 불과하다고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했던 사람이었다. 정작 그 당시 국제형사재판소가 친중, 친러적인건 간과한 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