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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H. W. 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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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41대 대통령
조지 H. W. 부시
George H. W. Bush
파일:George_H._W._Bush_presidential_portrait_(cropped).jpg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본명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George Herbert Walker Bush
출생 1924년 6월 12일[1]
매사추세츠 주 노퍽 카운티 밀턴
사망 2018년 11월 30일 (향년 94세)
텍사스 주 해리스 카운티 휴스턴 웨스트 오크스
묘소 텍사스 주 브라조스 카운티 칼리지스테이션 조지 H. W. 부시 대통령 도서관&박물관
재임기간 제43대 부통령
1981년 1월 20일 ~ 1989년 1월 20일
제41대 대통령
1989년 1월 20일 ~ 1993년 1월 20일
서명
파일:조지 H. W. 부시 서명.svg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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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프레스콧 부시 (1895 ~ 1972)
어머니 도로시 워커 (1901 ~ 1992)
형제자매 형 프레스콧 부시 주니어 (1922 ~ 2010)
여동생 낸시 워커 부시 엘리스 (1926 ~ 2021)
남동생 조너선 부시 (1931 ~ 2021)
남동생 버키 부시 (1938 ~ 2018)
배우자 바버라 부시 (1925 ~ 2018, 사별[2])
자녀 조지 W. 부시 (1946 ~)
로빈 부시 (1949 ~ 1953)[3]
젭 부시 (1953 ~)
닐 부시(1955~)
마빈 부시 (1956 ~)
도로시 부시 (1959 ~)
학력 필립스 아카데미 엔도버(졸업)
예일 대학교 (경제학 / B.A.)[4]
병역 미합중국 해군 대위 전역[5]
종교 개신교 (성공회)[6]
신체 190cm / 체중 86kg / O형[7]
최종 당적

의원 선수 2 (하원)
의원 대수 90, 91 (하원) }}}}}}}}}
파일:15.t56cc6f71.m1200.tif.pv.xkqqFA-IcN7nCG4Nr.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약력3. 생애
3.1. 어린 시절3.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3.3. 정계 초기 활동3.4. 부통령 재직3.5.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선3.6. 조지 H. W. 부시 행정부3.7. 재임 행적3.8. 퇴임 이후3.9. 사망
4. 평가5. 논란6. 기타7. 선거 이력8. 소속 정당9. 대중매체10. 가정11. 관련 문서12.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제41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
Read my lips. no more(/new) taxes.
제 입술을 보세요. 더 이상의 세금은 없습니다.[8]
미국의 제41대 대통령.

이름이 비슷한 아들 조지 W. 부시와의 구분을 위해 흔히 "아버지 부시(Father Bush / Bush Senior)" 혹은 "HW 부시(HW Bush)"[9]라고 불리며, 아들 조지 W. 부시는 "아들 부시(Bush junior)" 혹은 "W 부시(W Bush)"[10]라고 불린다.

아들 부시와의 혼동 우려 때문에 자주 불리지는 않지만, 미국 내에서는 그냥 '조지 부시'라고만 칭하면 아버지 부시를 가리킨다. 반면 아들은 조지 W. 부시라고 꼬박꼬박 불러주는 편이다.

한국에서는 젊은 세대의 경우 조지 부시라고 부르면 아들 부시를 먼저 떠올리지만, 2024년 기준, 40대 이상의 경우에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먼저 떠올리기도 한다. 어떤 부시 대통령을 먼저 접했는지에 따른 차이인 듯 하다. 아들 부시는 9.11 테러 및 한국군이 파병된 테러와의 전쟁 때 재임 중인 대통령이어서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에겐 먼저 각인되어 있다.

전임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뒤를 이어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더불어 길고 길었던 냉전을 종식시킨 인물이다.

2. 약력

  • 1942. 6. 필립스 아카데미 엔도버 졸업
  • 1953. 자파타 코퍼레이션 설립자
  • 1964. 제89대 상원의원 후보 (텍사스 제1부 / 공화당, 낙선)
  • 1967. 제90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7선거구 / 공화당)
  • 1969. 제91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7선거구 / 공화당)
  • 1971. 제92대 상원의원 후보 (텍사스 제1부 / 공화당, 낙선)
  • 1971. 유엔 주재 미국 대사 (1971. ~ 1973.)
  • 1974. 9. 제2대 미합중국 국무부 베이징 연락사무소장 (1974. 9. 26. ~ 1975. 12. 7.)
  • 1976. 1. 제11대 CIA 국장 (1976. 1. 30. ~ 1977. 1. 20.)
  • 1977. 퍼스트 인터내셔널 은행 의장
  • 1978. 라이스 대학교 존스 경영대학원 겸임교수
  • 1981. 1. 제43대 미합중국 부통령
  • 1985.7. 미합중국 대통령 권한대행[11]
  • 1989. 1. 제41대 미합중국 대통령
  • 2004. 11. 세계무역센터 재건이사회 명예 구성원
  • 2008. 헨리 키신저상 수상
  • 2011.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수훈
  • 2014. 케네디 용기상 수상

3. 생애

3.1. 어린 시절

1924년 6월 12일에 아버지 프레스콧 부시와 어머니 도로시 워커 부시 가정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미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동네이자 뉴욕주에 인접한 코네티컷 그레니치에서 자랐으며 미국 최고 명문 보딩스쿨[12]로 꼽히는 필립스 아카데미 엔도버를 나왔다. 풀네임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는 외할아버지 조지 허버트 워커의 성명에서 그대로 따왔다.

아버지는 투자은행가로 10여년동안 코네티컷 주 연방 상원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예일 대학교에 합격하고 바버라 피어스와 약혼하며 평범한 부잣집 도련님으로 살던중에 18세가 되던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대학 입학을 연기하고 해군에 자원입대하여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3.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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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당시의 모습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다. 같은 조종사였지만, 베트남 전쟁의 와중에 미합중국 공군 주방위군 소속의 본토 비행단에서 군생활을 날로 해 욕먹는 아들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미 해군에 입대해 장교로 임관한 그는 TBF(M) 어벤저 뇌격기의 조종사로 참전했고 자신의 비행기에 약혼녀 바바라 피어스의 이름을 따 바바라라고 불렀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오키나와 주변의 섬들을 제압하는 임무를 띄고 출격했다가 일본군 대공포에 격추당했다. 해상에 착수한 부시는 자칫 일본군의 포로 신세가 될 뻔했지만 다행히 아군기들이 다가오던 일본 해군 선박을 쫓아냈고, 이후 가토급 잠수함 USS 핀백(Finback)에게 구조된다. 이 구조상황은 실제 영상까지 있어서, 당시 미 해군 잠수함의 주요 임무였던 파일럿 구출(라이프가드)의 미국내 홍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그때 추락한 다른 동료들은 일본군에 포로로 붙잡히고 일본군이 이들을 재미로 살해한 뒤 시체를 술안주로 먹은 치치지마 식인 사건이 발생한다. 부시 중위는 당시 격추 당한 부대원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고, 구조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면 그 자신도 술안주가 될 뻔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전후에 태어난 아들 부시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이 결과로 미국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란 농담이 있다.

이 일로 사적으로는 일본을 굉장히 싫어했다. 히로히토의 부고를 들었을 때야 '이제야 일본을 용서할 마음이 조금은 생기는 듯하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사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대통령으로서는 대 소련 포위망 때문에 일본을 한국과 함께 비 NATO 주요 동맹국으로 지정할 정도로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했다. 공사 구분은 충분히 한 것이다.

45년 1월에 바바라와 결혼하고, 종전 후 9월에 해군 중위로 전역한 뒤 예일 대학교에 입학하여 1948년에 졸업한다.

3.3. 정계 초기 활동

파일:external/www.catholiclane.com/George-H.W.-Bush-UN-1971.jpg 파일:external/www.familyofsecrets.com/Slideshow-2.jpg
UN 대사 시절 모습 (1971년) CIA 국장 시절 모습

1959년 공화당에 입당해 1964년 상원의원 선거에 처음으로 출마했으나 패배하고 만다. 그러나 1966년, 1968년 텍사스 7선거구 하원의원에 연이어 당선된다. 이 후 1970년 상원의원 선거에 다시 한번 출마했으나 민주당 로이드 벤슨 상원의원에게 석패하며 잊혀지는 듯했다.[13]

그러나 하원의원 시절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데탕트 정책을 적극 지지한 것을 인정받아 UN 주재 미국 대사초대 중국 주재 연락사무소장을 지냈고,[14][15] 제럴드 포드 대통령 시절에는 CIA 국장을 지냈다.[16] 이런 경험들을 통해 국제 정세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력을 쌓게 된 것이 후일 대통령 재직 시 냉전 종식, 걸프전, 독일 통일, 소련 해체 등의 격변기를 미국의 승리로 헤쳐나가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사실 부시는 레이건이 아니라 포드의 부통령이 될 수도 있었다.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받으면서 공석이 된 부통령 자리를 메꿀 유력한 후보로 부시가 거론되었기 때문. 허나 그 자리는 당시 뉴욕주지사 넬슨 록펠러에게 돌아가고, 대신 부시는 1년 뒤 도널드 럼즈펠드가 주도한 "할로윈 대학살"[17] 이후 CIA 국장에 임명된다.

1980년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배하였다. 부시는 온건 보수주의자로 강경파였던 로널드 레이건의 공급 위주 정책(Supply side policies)를 부두 경제학(Voodoo Economics)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한마디로 사이비란 이야기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레이건이 당내 화합의 목적과 차기 대통령감으로 염두에 두고 그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해 같이 대선을 치러줄 것을 제안했을 때 이를 수용했고 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 그리고 부통령직 수행 중에도 레이건 대통령을 잘 보좌하여 대통령으로 가는 탄탄대로를 닦아 놓았다. 어떻게 보면 2인자가 차기 1인자로 되는 과정의 좋은 선례를 보여줬다고 볼 수도 있다.

3.4. 부통령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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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 시절의 조지 H. W. 부시[18]
1981년부터 1989년까지 로널드 레이건 정권의 부통령을 지냈다. 이전의 리처드 닉슨과 훗날의 앨 고어가 그랬듯 그의 대통령 선거는 부통령 선거 때에 비해서 매우 힘들었다.

이 시기 사양길로 접어들 뻔했던 미국의 석유산업을 살리기도 했다. 1985년 하반기부터 1986년 상반기까지 영국과 사우디간의 석유전쟁이 벌어지면서 유가가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원유가격이 배럴당 20달러 후반대에서 10달러 아래로 떨어지자 미국 경제전반적으로 보았을때 유가하락으로 인해 소비자들은 자동차를 마음껏 타고 다닐 수 있었고 업체들이 부담하는 물류비도 싸게 변해서 미국 경제 전반적으로는 이득이기는 했는데, 미국의 석유 기업들이 상당수가 파산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자유시장 논리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조지 부시 부통령은 석유업체가 대거 도산하면 도산하는 대로 문제가 있는데다가 석유 소비량이 급증할 경우엔 에너지 안보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사우디를 적절하게 압박하고 석유값 하락으로 위기에 처한 OPEC내 여러 나라들과도 의견 조율로 감산합의안을 통과시키게 만들었고 덕택에 석유값은 다시 18달러대로 올라서 미국의 석유업계는 도산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석유로 먹고살았던 소련이나 알제리, 베네수엘라, 멕시코는 못살렸다.

부통령 재직 중 임시 대통령을 맡은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레이건이 총에 맞고 인근 병원에서 대수술을 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때 레이건이 죽었다면 부시는 41대 대통령으로 더 일찍 활동하게 되고, 그가 재임하던 때는 42대 대통령이 했을 가능성이 높다.[19]

3.5.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선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초반 미국 민주당마이클 두카키스에게 무려 17% 격차로 밀리고 있었고, 당 내에도 밥 돌 상원의원 등 강력한 경쟁자에게 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선거 참모인 리 애트워터의 치밀한 선거 전략에 힘입어, 사형제를 이슈로 한 TV토론에서 듀카키스에게 결정타를 입히고 승리하였다.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네거티브 선전류 甲. 이는 EBS 다큐프라임 "킹 메이커"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두카키스 문서를 참고할 것.

이 선거에서 부시는 부통령-상원의장이라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대통령 당선을 본인이 직접 발표하게 되었다. 참고로 1837년 취임한 마틴 밴 뷰런 이후 무려 154년 만에 현직 부통령이 승계가 아닌 선거 당선으로 대통령에 오른 케이스가 되었다.

3.6. 조지 H. W. 부시 행정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조지 H. W. 부시 행정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H. W. 부시가 당선되면서 구성된 행정부다.

3.7. 재임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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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을 앞둔 1990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둔 미군들을 시찰하는 모습

1991년 1월 17일, 걸프 전쟁 개전을 알리는 TV 발표 모습

비록 집권 과정은 긍정적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지만, 재임 시절의 치적은 분명 긍정적이었던 미국 대통령이었다.[20]

재선에 실패해서 임기가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공화당의 정권 수명을 4년 더 연장한데다[21][22] 공산권의 붕괴를 지켜봤던 미국의 행정부가 바로 조지 H.W 부시 행정부였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재임 4년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베를린 장벽동유럽의 공산주의 블록이 무너졌고,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붕괴되어 전 인류를 반으로 갈라서 공포에 떨게 했던 냉전이 종식되는 그야말로 대격변이 도래했다.

이렇게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이 된 것은 레이건 시기 정책의 효과를 후임인 부시가 본 것에 더해 공산권의 자멸을 통해 어부지리로 얻어낸 거라고 쳐도, 무엇보다 공산권의 붕괴로 인한 힘의 공백을 파고든 이라크를 걸프 전쟁[23]에서 다른 국가들과는 비교를 거부하는 첨단 무기와 효율적인 운용으로 제압하면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그야말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를 연 것이다. 지지율이 최대 89%[24][25]까지 치솟았고 평균지지율 역시 61%로[26] 갤럽 조사 시작 이래 존 F. 케네디(70%), 드와이트 아이젠하워(65%), 프랭클린 D. 루스벨트(63%)[27]를 제외하면 가장 높았을 정도로[28] 인기도 높았기에 92년도 대선 상대였던 빌 클린턴은 부시의 재선이 확실하다고 여기면서 출마를 망설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임기 내내 상원, 하원 모두 의석의 60% 가까이 차지한 민주당으로 인한 여소야대에 시달려왔고[29], 공화당의 12년 장기집권으로 인해 국민들이 피로감에 빠진 데다가, 로스 페로의 등장으로 인한 보수층의 분열과[30], 끝내 레이건 시절 재정/무역의 쌍적자에 기인한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점[31]을 파고든 빌 클린턴에 밀렸고,[32][33][34] 결국 고작 37.4%를 득표하며 클린턴(43.0%)에게 5.5%로 밀리며 1992년 재선에 실패했다.[35]

재선에 도전할 시기에 터져나온 사건들도 영 좋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1992년에 테일후크 스캔들이 전미를 들썩였다. 걸프전 참전 군인, 그것도 하필 부시의 먼 후배들이라 할 수 있는 해군 항공장교들의 대규모 성폭력 스캔들이었던지라 해군 조종사 이력이 있는 부시에게까지 좋지 않은 이미지를 전염시켰다.

재임 기간 중 한국에는 1989년과 1992년 두차례 방한했다. 북한의 핵활동이 점차 가시화 되면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추진하고 팀스피리트 훈련도 취소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했으나, 퇴임 직후인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로 빛이 바랬다.

3.8. 퇴임 이후

1992년 방한했으며 퇴임 후에도 두 차례(2001, 2005) 한국을 방문했고, 특히 2005년에는 아들보다 먼저 안동을 방문했다.

2009년 자신의 85번째 생일 기념으로 스카이다이빙을 했다. 지상에 착지하고 나서 한 말이 "90살 생일날 또 할 거다"였다고.[36] 그리고 2014년 자신의 90번째 생일에 진짜로 또 했다. 낙하산에 90세와 자신이 미국 41대 대통령이란 것을 조합하여 "41@90"이라고 썼다고. 그런데 나이가 나이라서 그런지 이번에는 베테랑 다이버의 도움을 받았다.

2012년에는 대통령 재직시절 경호원의 아들이 백혈병에 걸리자 치료비를 대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자신의 머리도 삭발했다!용기를 주기 위해서라나. 조지 부시는 둘째딸 로빈이 4살 때 백혈병으로 사망한 적이 있다. 이때 기사에 이 사람을 아들 조지 부시로 착각하고 댓글을 단 사람들이 많았다.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지만 2016년 대선 당시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대표로 당선되자 아들인 조지 부시와 마찬가지로 공화당의 선거유세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물론 민주당인 힐러리에게 투표했다고 한다. 반면 아들 부시는 뽑을 사람 없다고 대선에서 기권했다고. 아들 부시처럼 트럼프의 행보를 비판하지는 않지만 이런 행동을 볼 때 그도 트럼프에 대해 마음에 안 들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갑부지만 돈을 버는 방식과 인격이 다르며 자기애의 충족을 위해 대통령을 하는 사람이라며 아들 부시가 비판했던 걸 볼 때 원래부터 가문의 모토가 트럼프 대통령과는 안 맞는 모양이다.

2018년 4월 17일에 부인 바버라 부시가 폐질환으로 사망하였다.

3.9.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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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모습[37] 2018년 11월 1일 중간선거 투표를 하는 모습[38]

2018년 11월 30일 금요일,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39]에 조지 H. W. 부시는 향년 94세의 나이에 숙환으로 사망했다.[40]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30년 만에, 아내 바바라 여사와 사별한 지 7개월만의 일이었다.

현지 보도에 의하면 '자신의 영원한 사랑이자 인생의 73년을 함께 해온 바바라 부시 여사의 타계 이후[41] 부시 전 대통령은 상심이 매우 컸다'고 알려졌으며 이러한 '상실감으로 인해 이미 안 좋았던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결국 향년 94세에 사망했다'고 전했다.

공식적인 사망 발표는 아들이자 43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가 가족 재단의 홈페이지와 각종 SNS를 통해 추도문을 게재하면서 대중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그의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된 직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다른 거물 정치인들과 정치 기관보다 가장 먼저[42] 트위터를 통해 A4 종이 한 장을 빼백히 채운 애도문을 개재하며 애도를 표했다.[43] 아버지 부시 타계에 애도 물결

같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은 그 어떠한 매체를 통해 아직도 공식적인 애도를 표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물론 이는 늦은 금요일 밤인 탓도 있고 트럼프 대통령이 G20 회의를 위해 아르헨티나로 가고 있었던 것도 있지만, 부시 가문과 트럼프 대통령의 악연으로 인해 늦어지고 있는 것으로 많은 이들이 추측했다.[44]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그 다음 날 2018년 12월 1일, 토요일 새벽 0시 49분[45]이 되어서야 애도문을 자신의 트위터에 개재하며 애도를 표했다.

얼마 뒤 백악관으로부터 트럼프 대통령이 12월 5일을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했으며 워싱턴에 있는 미 국립 성당에서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질 것이라는 공문 개재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이 장례식에 참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유해는 12월 3일 저녁부터 12월 5일 아침까지 미국 국회의사당 중앙 홀에 안치되어 일반인의 조문을 받았다.#

5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장례식에는 전직 미국 대통령들과 조문을 위해 미국을 찾은 해외 정치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대한민국에서는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단장을 맡은 공식 조문단을 파견했다.

부시의 사망 이후, 그의 아들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을 포함한 버락 오바마, 빌 클린턴,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당내 경쟁자였던 밥 돌, 민주당힐러리 클린턴, 버니 샌더스, 조 바이든, 공화당폴 라이언, 마르코 루비오, 마이크 폼페이오, 댄 퀘일 등 미국 정치인들과 유명인사들이 소속 당적에 관계 없이 애도의 뜻을 전했다. 또한 청와대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이 냉전 종식과 동서화합에 기여한 고인의 뜻을 기리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그 외에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 등 각국 정상들이 애도의 뜻을 전하였다. 쿠웨이트에서도 그의 사망 소식에 전국민이 슬퍼했다. 걸프 전쟁 당시 쿠웨이트를 구해준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장례식 후 유해를 장지인 텍사스 휴스턴으로 운구하여 12월 6일 휴스턴의 세인트 마틴 성공회 교회에서 추도식을 연 뒤, 텍사스 A&M 대학의 조지 H. W. 부시 도서관-기념관 부지에 안장되었다. 이 곳에는 앞서 세상을 떠난 부인인 바바라 부시와 딸 로빈도 묻혀 있다.

4. 평가

전임자인 레이건, 후임자인 클린턴과는 달리 재선에 실패했던 탓인지[46]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강한 존재감을 남기지는 못했다. 게다가 역시 대통령이 된 그의 아들이 저지른 여러 정책 실패들(예: 이라크전, 세계 금융 위기)로 인해 아버지인 자신마저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기는 손해를 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재임 시절에 분명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받을 자격이 있는 치적들을 남겼다.[47] 본인은 보수 온건파에 속했지만 당선 후에는 전임자 레이건의 공약을 상당수 계승한 정책을 실시한 것으로도 평가받는다.

그의 대표적 치적인 1991년 걸프전만 해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불가피한' 전쟁이었다. 미국은 이라크의 군사력에 의한 역내 세력균형 변경 시도를 저지하고 중동에서의 "사활적 국가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개입한 것이다. 이라크에 "미국적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한다는, 이상주의적이고 일종의 혁명적 목표를 갖고 전쟁에 뛰어들었다가 중동의 세력균형을 뿌리부터 뒤흔든 아들의 이라크 전쟁과는 목적에 있어서 완전히 정반대다. 목표가 극과 극이니 당연히 방법론도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부시는 공화당의 매파에서 제기한 "바그다드로 진격해서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어야 한다"는 주장을 신문 기고를 통해서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 미국이나 현지 국가들은 모두 이라크란 국가가 쪼개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우리는 페르시아 만 지역 한복판의 장기적 세력균형에 대해 우려했던 것이다.
사담 제거를 시도하려고 지상전을 이라크 점령으로 확대하면, 일을 진행하는 도중에 목표를 변경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정책지침을 어기고, 욕심을 부리다 수렁에 빠져들게 되어(mission creep), 예측 불가능한 인적 정치적 비용을 유발하게 될 것이었다.
그를 체포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파나마에서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던 노리에가도 찾아낼 수 없었다.[48] 우리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실질적으로 이라크를 통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연합군은 즉시 붕괴되고, 분노한 아랍 국가들이 전열에서 이탈하며 다른 동맹국들 또한 철군하게 될 것이었다.
... 우리가 그러한 침공 코스를 밟는다면, 생각건대 미국은 아직도 극도로 적대적인 땅에서 점령세력으로 남아있을 것이며, 이는 극적으로 다른 -그리고 아마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심지어 이후 방송에서도 본인이 직접 이라크를 침공하지 않은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도 하였다. 10여년 뒤 아들내미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거의 예언같은 통찰력이다. 사담 제거에 성공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미래로 표현한 것을 과거로 표현해도 문제될 점이 없다. 즉 아들 부시가 이라크전을 일으킨 것은 흔히 말하듯이 아버지 부시의 정책을 이어받은 게 아니라, 멍청하게도 뒤집어 엎은 것이었다. 아버지 부시는 아들 부시가 일으킨 이라크전과 같은 전쟁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걸프전 당시에는 이라크를 점령해도 명분상으로는 문제가 없었으며[49] 이라크에서 가장 거대한 권력을 가진 시아파가 준 우방이었다. 게다가 미국에 대한 평판도 그리 나쁘지 않았던데다가, 미국과 사이가 나쁘다는 이란도 후세인 정권 축출에는 적극적으로 동참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음에도 그랬다. 반면 이라크전 때는 이미 미국의 일방주의로 인해 평판이 바닥으로 추락한데다 시아파도 수니파와 같은 미국의 적이었으니 더욱 그렇다.

전쟁 이전의 외교적 노력 수행 단계에서도 두 행정부의 차이는 극명하다. 걸프전 당시 H. W. 부시 행정부는 군사력을 직접적으로 사용하기 전에 치밀하고 광범위한 외교전을 수행했다. 이때 미국의 외교적 역량이 어떠했느냐면, 당장 이라크의 위협에 직면한 역내 동맹국과 우방국은 물론이고 역외 동맹 및 우방, 심지어 적대국인 시리아까지 전쟁에 동의하고 참전하도록 만들 정도였다. 그야말로 다자적 접근의 모델. 정당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국제연합의 결의 아래에서 군사력을 사용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50] 반면 이라크전은 미국의 역내/역외 동맹과 우방을 가릴 것 없이 맹렬한 반대에 직면했으며, 국제연합의 승인조차 받지 못했다. 물론 미국은 동맹국과 우방국도, 국제연합도 알 바 아니며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적 역량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일방주의적 행동방식을 보였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정책에는 외교정책이 실종되어 있었다. 아들 부시가 워낙 문제를 많이 일으켜서 흔히 아들 부시와 비슷한 정책을 편 것으로 생각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선거 캠페인 방식에서 주로 비판받을 뿐, 대통령으로서는 자질 면에서나 실제 통치나 우수한 인물이었다. 손자병법에 적의 외교관계를 단절, 최소한 지지는 못 받도록 하라. 라고 나와있는것을 보면 아들이 멍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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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전 당시 부시의 외교안보팀[51]

물론 딕 체니(국방장관 → 부통령)나 콜린 파월(합동참모의장 → 국무장관)과 같은 인사들은 아들 부시때까지 중임되긴 했지만, 파월은 아버지 부시 때건 아들 부시 때건 늘 전쟁을 내켜하지 않은 온건파에 가까웠고 H. W. 부시 행정부 당시 대외정책을 주도한 것은 대통령 본인과 스코우크로프트 안보보좌관이었다. 사실 UN 대사, 국무부 중국 연락사무소장으로 외교판에서 잔뼈가 굵다 못해 CIA 국장까지 지낸 대통령이 딕 체니에게 외교안보적 사안으로 자문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52]

1991년 우크라이나에서 행한 연설도 유명하다. 당시 소련은 1991년 화폐개혁의 실패와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호흡기만 겨우 달고 있는 상태였고 우크라이나에서는 독립의 열기가 점차 높아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시절에 우크라이나에 가서 "미국은 멀리 있는 폭군(소련)을 없애자고 현지(우크라이나)의 독재자를 내세우지도 않을 것이고 인종적 증오에 뒷받침된 자기파괴적인 민족주의를 지원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 이 내용은 당시 높아져가는 우크라이나 독립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연설로 유명하다. 소련으로부터의 즉각적인 독립을 원하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이 연설에 매우 실망했고 소련에 반대하던 우크라이나에 심정적인 동조를 보내던 미국내 보수주의자도 이 연설을 크게 비판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치킨 키예프'라는 이름의 우크라이나식 닭고기 요리[53]가 널리 퍼진 때 였고 미국의 보수 평론가는 치킨이라는 단어가 미국에서 겁쟁이를 상징한다는 점을 빗대어 이 연설을 '치킨 키예프 연설(Chicken Kiev speech)'로 불렀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비에트 연방은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얻었다.

2004년 부시는 우크라이나 독립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이 연설에 대해 해명하기를, 만약 당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무모한 행동을 벌였다면 모스크바로부터 강력한 저항이 있었을테고[54] 결국 대참사가 벌어졌을 거라 언급했다. 당시에는 긴가민가했으나 이후 2008년 미국(아들 부시)과 서유럽의 지지를 믿은 조지아(그루지야)가 남오세티야 전쟁을 벌이다가 재앙을 불러왔고,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가 곧바로 크림 반도와 동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이후 내전을 가장한 침공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2022년 마침내 전면적인 침공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1991년 당시 부시의 혜안이 타당했다는 평가가 점점 지지를 얻고 있다. 실제로 당시 소련의 당과 군을 비롯한 보수파들을 가장 자극한 문제는, 캅카스와 발트에서 독립하겠다고 민족주의자들이 궐기하는 상황이었고, 리투아니아 독립 사태는 고르바초프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소련을 강화하자던 KGB 등의 초강경파의 입장을, 배신자 고르바초프를 축출하고 반동들을 때려잡자는 더욱 극단적 방향으로 기울게 했다. 동독에서의 철수 시작, 통일 독일의 나토 가입 등 계속 실추되는 소련의 국제적 위상에 분노하던 보수파들인데, 만약 앞마당처럼 여기던 우크라이나까지 떨어져나갔더라면 분노의 폭발성은 더욱 높아졌을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초반 유고슬라비아 분열 당시에도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 H. W. 부시와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 3세는 2차대전 종전 이후의 유럽 국경선을 '연방 구성국들의 주민투표만을 이유로 변경하는 선례 도입'은 위험하다고 경고하며 동구권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여 '유럽 내 지정학 질서의 변동 초래'를 꺼리는 입장이었다.유고슬라비아 해체의 역사[55]

경제 문제도 사실 레이건 시절에 나타난 재정/무역의 쌍둥이 적자에 따른 후유증의 뒷수습을 맡은 판이라[56][57] 그다지 큰 비판을 받지 않는다.

대단한 것은, 부시 이전까지의 CIA는 한창 미국 내부의 정치인들과 여론의 비판이 집중되어 CIA 국장으로 가는 것은 정치 경력의 마지막 줄을 쓰는 것과 다름 없었고, 그 이전에도 CIA라는 부서의 특성상 양지에서 큰일을 맡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시는 사상 처음으로 CIA 출신으로 권력의 핵심에 올라섰고, 대통령이 되었다.[58][59] 포커 쳐서 CIA 국장 자리를 따낸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셈. 또 부시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CIA가 정치계나 언론에 의해 털리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뭐 그 이전에 이미 그럴 여지도 없을 정도로 꽉 조이고 있었지만.

파나마 침공에도 내정간섭 침공이다 하여 비난을 받는데, 아들부시가 대량살상무기 생산에 대한 증거도 확실치 않고 무작정 이라크를 침공한 경우와는 다르다. 일단 노리에가가 마약밀수하는 증거가 확실했던데다가 마약밀수범을 잡으러온 미군을 사살하는 도발을 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이러한 점들에서 아버지 부시는 평가에서 중상위권 정도는 하는 편이며, 현재는 그의 후임자인 빌 클린턴보다 약간 낮은 편이다. 무엇보다 트루먼 이후 유일하게 특정 정당의 정권 3연임에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의의는 크다.

5. 논란

2017년 10월~11월에 여배우 헤더 린드, 조던 그론릭을 비롯해 총 10명의 여성이 부시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했다.## 이들은 부시가 신체 일부를 움켜잡았으며 이를 합리화하는 말을 했다고 주장했고, 부시는 성추행을 의도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고 해명하며 사과하겠다고 성명을 냈다. 아예 여성의 둔부에 손을 당당히 올린 채 찍힌 사진도 나온 탓에 오해 받을 일을 안 했다고는 주장 못하는 상황.

6. 기타

  • 퇴임 당일, 백악관 집무실에 후임자인 빌 클린턴에게 자필 편지를 남겼다. "당신의 성공이 곧 우리나라의 성공이다. 행운을 빈다"는 격려, 덕담을 담은 내용이었다. 미국에는 전임 대통령이 후임 대통령에게 응원과 지지가 담긴 편지를 전달하는 전통이 있는데, 처음 이런 편지를 남긴 사람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지만 실질적인 전통으로 굳어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부시-클린턴 대통령 때부터다. 같은 당의 동지가 아닌 경쟁자에게 편지를 남긴 첫 사례이기 때문.

    전임 대통령의 관용과 배려에 깊은 인상을 받은 클린턴 대통령 역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비슷한 편지를 전달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부시와 클린턴은 선거에서 직접 경쟁했던 관계임에도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60], 그가 2018년에 타계했을 당시에도 클린턴 가문은 깊은 애도를 표했다.

  • 1992년 1월 8일, 당시 일본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의 연회에 초대받아 참석했는데 이 때 만찬을 하던 중 식중독에 걸려 미야자와의 무릎에다 구토를 한 적이 있다. 경호원들이 질식사를 막기 위해 책상을 뛰어넘어 기도를 확보하느라 잠시 소동이 있었다.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 때 자신의 전우가 일본군에게 스시로 잡아먹힌 것 때문에 PTSD가 와서 저랬던거라는 루머가 있다. 경호원들이 응급처치를 하고 나서 벌떡 일어나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 20세기에 임기를 지낸 대통령 중에서 전임자가 사망하지 않고 부통령을 거쳐 바로 다음 대선에서 대통령이 된 유일한 인물이다.[61][62]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9대 지미 카터와 마찬가지로 재선에 실패한 미국 대통령으로[63], 조지 H. W. 부시 이후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64] 대통령은 모두 재선에 성공했다. 또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다.
  • 존 애덤스에 이어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두 번째로 대통령 아들을 둔 대통령으로, 묘하게도 애덤스 부자도 아들인 존 퀸시의 미들네임을 빼면 이름이 동일하다.
  • 가족 항목 명단에 있는 로빈 부시는 조지 허버트 부시 본인의 둘째이자 장녀로 조지 W. 부시의 여동생이다. 그러나 1953년 3살이라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백혈병에 걸려 요절했다. 지금은 몰라도 의료기술이 발전하지 않았을 당시의 백혈병은 흑사병과도 같은 굉장히 무서운 병이였기에 깨끗이 완치될 확률은 0에 가까웠다고 한다. 조지 허버트 부시는 딸의 백혈병 발병 소식을 듣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회사로 출근하기 전 새벽부터 일찍 집을 나서 인근 교회로 가 로빈의 완치를 위해 하루도 빠지지 읺고 기도를 했다.

    하지만 결국 로빈은 백혈병으로 요절했고 딸의 사망 소식을 접한 부시는 그날 집에서 아내인 바바라와 당시 7살이었던 장남 조지 W. 부시와 함께 한참을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후 나이가 들어 백발의 노인이 된 후 경호원의 아들이 백혈병에 걸려 머리카락이 다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경호원의 아들과 똑같이 삭발을 하여 완치를 기원했다고 한다. 자식을 잃은 고통은 얼마나 마음에 사무치는 일인지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67]
  • 식성이 매우 까다로웠다고 하며, 편식도 굉장히 심했다. 좋아하는 음식은 돼지껍데기 스낵이었다. 심지어 백악관에 입주하자마자 요리사를 불러서 식단에 삶은 당근브로콜리콜리플라워를 몽땅 다 빼버리라고 요구했다. 브로콜리는 어지간히 싫어했는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짜증을 냈다고 한다.

    영양학자들은 대통령의 이러한 공식 행동이 아동들의 편식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우려했으며, 농부들이 집단 항의를 하기도 했다. 2018년 그의 장례식에서 아들 조지 W. 부시는 추모사를 할때 이런 아버지의 편식을 언급하며 자신도 그 식성을 물려받았다는 작은 유머를 하여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참고로 아들 부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치즈버거 피자다.[68]
  • 오랫동안 공직에 있었던지라 직접 식료품을 살일이 없어서 1992년 재선 캠페인 중에 슈퍼마켓의 스캐너를 보고 놀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던 부시는 퇴임 이후 처음으로 장을 보러 가서는 "세상에서 제일 큰 스파게티 소스와 스파게티 면"을 사왔다고 한다. 게다가 영부인이 요리를 하다가 소스병을 깨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피자를 전화 주문 할 수 있는 것을 알게되고는 정말로 놀랐다고 한다.
  • 걸프 전쟁 이후 암살당할 뻔한 적이 있다. 배후는 물론 당시 이라크의 지도자였던 사담 후세인으로 이 영향 때문인지 그의 아들이였던 조지 W. 부시는 사담 후세인에 대해 "한때 우리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자."라고 언급하는 등 적개심을 드러냈고 결국 이 악연이 이라크 전쟁이라는 헬게이트를 연 것에 일조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 지미 카터와 동갑인데 사실 카터보다 4개월 정도 생일이 빠르다.[69] 2017년 11월 25일을 넘겨 생존하고, 2018년 6월 12일(본인 생일)로 94세가 되면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장수한 대통령 타이틀을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게서 가져오게 됐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30일 수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할리우드에서 만드는 영화들이 경찰을 너무 죽이고 문제되는 게 많다고 비난하다가 공화당 지지자인 아놀드 슈워제네거까지 비난하라는 역반격에 처해 경솔했다고 꼬리를 내린 적도 있다. 자세한 건 터미네이터(영화)를 참고할 것.
  • 전직 대통령 신분 기준으로 인생의 동반자 바버라 부시와 함께 최초이자 유일하게 동년에 사망한 대통령이 되었다.[70]
  • 한국에 대해서는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통일될 것"이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 2018년에 사망함으로써 그 예언은 성취되지 못했으나, 2017년 11월 26일부로 제럴드 포드의 기록을 깨고 전직 미국 대통령 중 최장수 대통령의 기록은 세웠다. 그러나 4개월 늦게 태어난 동갑내기 지미 카터가 2019년 이후 부시의 기록을 깨다보니 지금은 2번째 장수 대통령이 되었다.
  • 이라크 내전 개입을 검토중인 미군이 걸프 지역으로 USS 조지 H. W. 부시 항공모함[71]을 배치한다고 발표하여 호사가들이 이라크를 능욕하는 거냐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 재임 당시 한국에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반미 시위가 자주 있었는데 그 때 사용되던 구호는 '조지 부시, 조지부시자'였다. 이후 아들 부시에게도 같은 말이 쓰였다.
  • 말뚝에 편자던지기 놀이를 좋아했다고 한다.
  • 휠체어와 스쿠터를 많이 이용했기 때문에 발목이 다 보여 다양하고 화려한 양말을 신었다. 장례식에도 전투기 양말을 신어 화제가 되었다.
  • 한국의 전임 대통령인 김대중과 같은 년도에 태어났다.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생이다.[72]
  • 2014년 동갑내기인 지미 카터와 함께 90대에 진입하면서[73] 사상 처음으로 4번 연속 90세를 넘긴 대통령이 되었다.[74] 이전에는 90세를 넘긴 대통령이 존 애덤스허버트 후버 둘밖에 없었는데[75], 의학의 발달로 평균 수명이 연장되면서 장수하게 된 것이다.2036년 8월까지 클린턴아들까지 살아았다면 무려 6연타 갱신[76]

7.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당선 여부 비고
1964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텍사스

1,134,337 (43.56%) 낙선 (2위)
1966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텍사스 제7구 53,756 (57.07%) 당선 (1위) 초선
1968 110,455 (100%) 재선
1970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텍사스 1,071,234 (46.58%) 낙선 (2위)
1980 미국 부통령 선거[A] 미국 43,903,230 (50.75%, 489명) 당선 (1위) 초선
1984 미국 부통령 선거[A] 54,455,472 (58.77%, 525명) 재선
1988 미국 대통령 선거 48,886,588 (53.37%, 426명) 초선
1992 미국 대통령 선거 39,104,545 (37.45%, 168명) 낙선(2위)

8.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63 - 2018 정계 입문
정계 은퇴
사망

9. 대중매체

  • 파일:심슨가족 아빠부시.png


    심슨 가족에 찬조 출연해서 호머 심슨 옆집으로 이사를 오는 에피소드가 있다(1996년 7시즌 13회). 명대사는, 자서전 집필 도중 중얼거리며 한 말인 재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안 했다. 결국 호머와 바트 심슨의 등쌀에 시달려서 스프링필드를 떠나버린다. 마지막에 호머와 영혼의 맞다이(...)를 뜨면서 호머가 이기며 말하는 세금 네 멋대로 올린거 사과해!!!가 가히 압권. 그리고 그 자리에 이사 오는 것은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

    그는 호머와 매우 죽이 잘 맞아 순식간에 친구가 되며 끝난다. 이 에피소드에서 바바라 부시 여사는 굉장히 온화한 할머니로 나온다. 바트가 조지 부시의 집안에서 사탕 찾는답시고 다 어지르자 바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노인들은 사탕을 잘 안 먹는다며 쿠키를 구워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조지 부시는 이걸 바라보면서 "나한테는 쿠키 안 구워줬는데"라고 중얼거린다. 이후 21시즌의 심슨 20주년 스페셜 영상에도 출연했다. 재미있는 게, 1992년 재선 캠페인 당시 부시는 심슨 가족에 대해 미국의 전통적인 가족상을 훼손한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는데, 제작진들은 Stark Raving Dad(시즌3 1화)에서 부시를 까면서 응수했다.

  • 대통령으로 재직중이던 1991에 개봉한 총알탄 사나이 2편에서 현직 대통령으로 나온다. 물론 부시 본인이 직접 출연한 것은 아니고, 존 로아크(John Roarke)라는 배우가 연기했다. 여기서도 드레빈 경감때문에 바바라 부시 여사가 온갖 수난을 겪는다.
  •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와 탁구를 치는 장면이 나올 뻔 했으나 제작진이 포기하고 삭제했다. 원래 장면은 부시가 중국 주재 대사로 활동하던 시절 중국 선수와 탁구를 치는 장면이었다. 제작진들은 힘들게 탁구 장면을 합성 제작했지만, 완성하고 보니 영화의 전체 흐름과 맞지 않아서 결국 뺐다고 한다.
  • 마이클 무어식코에 등장해서 캐나다의 의료체계를 마구 비난하는 장면으로 한컷 등장한다.
  • 바이스에서 부통령 시절 모습이 묘사된다. 공화당 하원의장 체니를 방문하여 지지를 청하는데, 이때 등장한 아들이 말썽을 피우자 뒷수습하기 위해 퇴장한다. 딕 체니의 꼭두각시 정도로나 묘사되는 아들 부시와 달리 능력은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미국 배우 존 힐너가 분했다.

10.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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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미 카터 前 대통령"과 생년은 똑같지만 미국의 9월에 입학하는 커리큘럼상 조지 부시 前 대통령이 1학년 더 일찍 취학했다"라고 오해하는데 사실 지미 카터 前 대통령은 이보다 더 빨리 졸업하여 1941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근데 부시 前 대통령은 1942년에 해군장교로 입대하고 카터 前 대통령은 1943년에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느냐면 카터 前 대통령은 2년 동안 조지아 공대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편입했기 때문이다.[2] 그 역시 바버라 부시와 사별한지 7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다.[3] 3세 때 병으로 사망했다[4]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해군에 입대하여 파일럿으로 참전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대학을 다녔다.[5]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6] 부시 집안은 대대로 성공회를 믿어왔다. 2018년 아내 바버라 여사의 장례식이 거행된 장소도 성공회 휴스턴 성 마틴 성당.[7] #출처[8] 1988년 8월 부시가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한 말이다. 이 때 부시는 민주당이 세금을 올리면 자신이 막겠다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리키며 이 말을 했다고 한다. 세금 인상이 더 이상 없다는 말로 한 공약이었지만, 그는 걸프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자로 이 말을 지키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상당한 증세를 하게 된다. 이에 빌 클린턴과 앨 고어 캠프는 "입술을 보지말고, 기록(record)을 보세요. 진짜 감세는 우리가 합니다."라며, 이를 대놓고 1992년 대선 캠페인에 활용하기도 했다.[9] 이 쪽이 더 많이 쓰인다.[10] 역시 이 쪽으로 더 많이 부른다.[11] 미국의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첫번째 부통령이며 1985년 7월 13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수술로 인해 7시간 54분 동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수행했다.[12] 부유층 자제들이 주로 다니는 기숙사형 사립학교.[13] 이들은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와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다시 만나게 된다.[14] 당시에는 아직 미국과 중국(당시에는 중공이라 불렀다.)이 정식으로 수교하기 전이어서 대사관이 아닌 연락사무소를 운영했다. 말하자면 비공식 주중 대사를 맡았던 것.[15] 타국의 UN 대사와 달리 UN 주재 미국 대사는 단순한 특명전권대사직이 아니며, 차관보급 대우를 받는 타 대사직와 다르게 장관급 대우를 받는 내각의 공식 구성원이며 국가안보회의에도 상시 참석하는 요직이다. UN 본부가 미국 뉴욕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 그리고 '연락사무소'는 미수교국들이 수교를 추진하는 상대 국가에 설치하는 외교공관이다. 공관장은 특명전권대사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16] 현재 버지니아에 위치한 CIA 본부 청사도 1999년부터 그의 이름을 딴 '조지 부시 정보센터'(George Bush Center for Intelligence)로 명명되었다.[17] 포드 대통령이 1975년 11월 럼즈펠드와 체니의 조언을 받아 닉슨 행정부의 인사를 대거 교체한 것을 일컫는다.[18] 찍힌 사진 날짜는 1981년이다. 왼쪽부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조지 H. W. 부시다.[19] 다만 승계받아도 그가 대통령이였던 시절은 대통령으로 활동이 가능하나, 불출마했을 가능성이 높다.[20] 이 점에서 조지 허버트 부시를 '재선에 실패한(즉, 단임)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는 최고'(best one-term President)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21] 해리 S. 트루먼 이후 미국에서 3연속 정권 재창출을 성사시킨 유일한 대통령이 바로 조지 부시 1세다. 이론상으로는 린든 존슨도 해당 기록 달성이 가능했으나 본인이 대권 재도전을 포기했다.[22] 그리고 부시 1세는 타 단임 대통령들과는 결이 다른 게, 대통령의 임기 중 사망, 사임으로 권한을 승계받거나 현직 대통령과 무관한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된 게 아니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현직 부통령 신분으로 대선에 출마해 당선된 거라 부통령 출신 대통령 중 가장 '정통성'이 높은 것은 물론이고(그 반대 케이스는 대통령직뿐만 아니라 부통령직도 승계받은 제럴드 포드다.) 어떻게 보면 레이건이 부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정권을 4년 더 연장한 케이스라 봐도 무방하다. 참고로 현직 부통령 신분으로 대통령이 된 마틴 밴 뷰런도 부시처럼 전임자가 연임에 성공했다.[23] 엄밀히 말하자면 소련 붕괴 전 일이다.[24] 1991년 2월 28일 갤럽 기준. 이는 당시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기록한 지지율 중 최대 기록인데, 아들 조지 W. 부시9.11 테러 직후 90%의 지지율(2001년 9월 22일 갤럽 기준)을 얻었다. 두 부시가 미국 대통령 역대 최고 지지율을 동시에 기록한 셈이다. 참고로 당시 부정평가는 8%. 그리고 해리 S. 트루먼은 집권 초 지지율이 87%(1945.6.1 기준)이었는데, 트루먼은 1945년 6~10월 사이 지지율 통계가 없으나 그 사이 제2차 세계대전이 완전히 종결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비공식적으로는 트루먼도 90%대 지지율을 찍었을 가능성이 높다.[25] 걸프전 참전 직전인 1월 11일에는 지지율이 64%, 부정평가 25%였으나 참전 직후인 1월 17일에는 지지율 84%로 지지율은 기존의 1/4 이상 늘고 부정평가는 기존의 절반 미만으로 줄었다.[26] 참고로 아들의 1차 행정부 시기 평균 지지율이 62%였다. 그리고 재선 성공 후 2차 행정부 시기 평균 지지율은 미국 역사상 평균 지지율이 가장 낮았던 도널드 트럼프 1차 행정부(41%)보다도 낮은 37%.(...)[27] 갤럽 조사가 1937년 시작되어서 1933~1937년 1차 행정부 시기 지표는 반영되지 않았다.[28] 그 외에도 1989년 말~1990년에는 여러 번 70%대 지지율도 기록하고 심지어 1990년 1월 4일에는 80%까지 찍었다. 조지 부시 1세의 지지율 추이[29] 사실 허버트 후버가 퇴임한 1932년부터 공화당 혁명이 발생한 1994년까지 62년 동안 연방 하원은 2차 대전 직후 치러진 1946년 선거와 반공주의 + 아이젠하워 버프를 업은 1952년 선거를 제외하면 항상 민주당이 독식해와서 이는 공화당 출신 대통령 중 부시만 겪은 약점은 아니다. 다만 상원은 공화당이 우세를 점한 적이 종종 있었다.[30] 18.9%의 표를 얻어 현재까지 미국에서 제3후보가 존재감을 발휘한 마지막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를 뽑은 사람 중 그를 찍지 않았더라면 부시/클린턴을 뽑겠다고 말한 사람은 38%로 완전히 동률이라 페로가 나오지 않았더라도 부시가 재선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31] 1991년 -0.1%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32] 이 때 빌 클린턴의 선거구호가 그 유명한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economy, stupid!)' 이다.[33] 1992년 8월 2일 갤럽 기준 지지율이 29%로 떨어지며 최저치를 찍기도 했다. 그 인기 없었다는 지미 카터의 최저 지지율이 28%(1979년 7월 2일 갤럽 기준)였다. 또 1992년 7월 31일 갤럽 기준 부시의 부정평가는 60%를 찍어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당시 도널드 트럼프(62%, 2021년 1월 15일 갤럽 기준)에 비견되는 수준이 되었다. 참고로 아들의 최대 부정평가는 대침체 시작 무렵(2008년 10월 10일 갤럽 기준) 기록한 71%로 역대 대통령 중 부정평가 최대치임과 동시에 유일무이한 부정평가 70%대였다.(...)[34] 때문에 부시는 지지율 최고치와 최저치 격차가 60%로, 그 다음으로 낮은 지미 카터(최고치 75%, 최저치 28%, 격차 47%)보다 무려 13%p나 높고 아들(최고치 90%, 최저치 25%, 총 65%), 해리 트루먼(최고치 87%, 최저치 22%, 총 65%)을 제외하면 가장 지지율 최고치와 최저치 격차가 큰 대통령이라는 기록도 남겼다.[35] 다만 퇴임 직전(1993년 1월 8일 갤럽 기준) 지지층들이 결합하며 지지율 56%를 기록, 1991년 11월 이후 처음으로 지지율이 1988년 대선 득포율(53%)를 넘기게 되었다.[36] 아내인 바바라 여사는 이걸 듣고 "언제 철들려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37] 세월 때문인지 외모가 많이 변화했다. 사실 이렇게 외모가 변한 것도 2015년 이후로, 2014년 스카이다이빙 할 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동안이었다.[38] 마지막으로 공개된 생전 모습이다.[39] 미국 중부 시간. 동부 기준으로 밤 11시.[40] 제럴드 포드의 장수 기록(93세 5개월)을 깨면서 당시 최고령의 나이에 사망했다. 이후 동갑내기인 지미 카터가 본인의 기록을 깨고 10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41] 향년 92세. 남편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천수를 누리다가 세상을 떠났다.[42] 2018년 12월 1일, 토요일 0시 36분, 미국 동부 시간[43] 이는 정치적 사상은 다르면서도 실제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부시 가와 오바마 가의 관계도 있지만, 그 만큼 오바마 대통령 또한 부시 대통령을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아끼던 마음에서 비롯된 걸로 볼 수가 있다.[44] 구체적으로는 지난 2016년 미국 대통령 공화당 후보 선출 과정에서 트럼프가 역시 공화당 내 경선 후보였던 젭 부시와의 경쟁에서 지나친 감정싸움을 벌였다는 것. 하지만 그 외에도 부시 가족들은 트럼프의 여러 논란과 구설수들로 인해 트럼프를 수차례 공식적으로 질타하였다. 심지어 대통령 선거일에 타계한 H. W. 부시를 포함하여 가족의 몇몇 구성원들이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했다고 알려졌다.[45] 미국 동부 시간[46] 다만 당선에 성공한 것도 레이건의 현직 부통령 신분으로 당선된 거라 트루먼 이후 유일한 특정 정당의 12년 집권을 성사시킨 것은 물론 어떻게 보면 레이건이 간접적으로 4년 정권연장을 했다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47] 이처럼 업적에 비해 저평가되고 있다는 점은 같은 시기 한국의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비슷하다. 두 사람은 전임자(레이건, 전두환)의 2인자 노릇을 하다가 선거를 통해 후임자로 당선되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또한 조지 H. W. 부시는 미국 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반면, 노태우는 대한민국 내에서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이건 아무래도 노태우도 전두환과 동반으로 신군부(하나회) 12.12 쿠데타에 가담했다는 오점 때문일 것이다.(다만 북방정책, 남북기본합의서, 토지 공개념노태우 정부의 외교·경제적 성과에 대해서는 최근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면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레이건과 부시는 대통령-부통령 관계이며, 전두환과 노태우는 거의 일생이 비슷할 정도로 친구이다. 게다가 이 두 쌍의 콤비는 서로 집권한 시기도 거의 똑같다. 레이건은 1981년~1989년, 전두환은 1980년~1988년 동안, 부시는 1989년~1993년, 노태우는 1988~1993년 동안 집권했는데, 오차가 1년 정도밖에 안 된다. 또한 4명 모두 보수주의 정당에 속한다.[48] 1989년파나마 침공을 말한다. 콜린 파월이 지휘봉을 잡은 첫 전쟁.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마약 밀수에도 관여하여, 미국이 체포하기 위해 병력 24,000명을 파병하여 선거를 통해 새 대통령을 옹립했다. 노리에가가 자수한건 1990년 1월이었다.[49]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인한 '쿠웨이트 해방'이라는 명분이 있었고 아랍 국가들 역시 '같은 아랍 형제국가를 다른 아랍 국가의 침략은 용납할 수 없다'란 의견이 강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미국의 군사작전 또한 쿠웨이트에서 이라크 군을 몰아내는 것으로만 촛점이 모여있었다. 그 반미국가 시리아가 미국 편을 들었으며, 눈치없이 끝까지 이라크 편을, 그것도 상당히 온건한 자세로 들었던 예멘은 걸프전 이후 중동의 왕따가 되어서 예멘 외노자들이 추방당하는 등 경제적 보복까지 당했다.[50] 대신 이슬람의 성지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미군을 주둔시키면서 먼 훗날 아들과 미국의 대외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테러리스트들의 대부를 분노하게 만들게 되지만. 물론 이건 부시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51] 왼쪽부터 미합중국 공군 퇴역 장군 출신인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국가안보보좌관, 딕 체니 국방장관, 부시 대통령, 콜린 파월 합참의장.[52] 아이젠하워같은 경우에도 대통령이 5성 장군,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이끈 전쟁영웅이였기에 군부와 군산복합체를 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후에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군부에게 시달리며 피그만 침공 등 실책을 남기기도 했는데, 후일 부시 부자의 사례와 다소 비슷한 일례.[53] 소련에서 외식메뉴로 흔히 먹은 음식으로 안에 버터가 들어간 치킨가스라고 보면된다.[54] 여기서의 저항은 독립에 대한 저항, 즉 무력 진압을 암시한다.[55] 유고슬라비아의 분열은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가 EC 구성국인 프랑스와 스페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자적인 유럽의 목소리'를 자처하며 독일어권과 공감대가 큰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지지하며 시작되었다.[56] 이 점은 오바마도 마찬가지. 현재 오바마를 공화당이 까는 건 공화당의 이념적인 성향이 티파티 등의 영향력으로 인해 부시 시절보다도 더 우향우, 자유의지주의로 간 게 크다.[57] 그리고 90년대 초반의 불황은 그렇게 오래가지도 않았고, 강도도 대침체에 비하면 약과였다.[58]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두번째로 현직 부통령의 저주를 깬 인물이다. 여러모로 나름 입지전적인 인물. (예컨데 리처드 닉슨은 현직 부통령으로서 출마했을 때는 패배했고, 이후에야 당선되었다. 앨 고어의 패배야 말할 것도 없고. FDR의 3기 부통령이었던 헨리 월리스도 대선에서 참패를 당했다.) 첫번째는 앤드루 잭슨의 부통령이었던(1833~1837) 마틴 밴 뷰런. 존 애덤스토머스 제퍼슨의 경우는 차점자가 부통령을 하던 시대라 제외. 조 바이든의 경우도 도널드 트럼프의 난맥상 덕분에 임기 하나를 건너 뛰고 대통령이 된 케이스이다. 그리고 카멀라 해리스가 도널드 트럼프에게 참패하며 현재까지 부시가 마지막 현직 부통령 신분으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대통령으로 남아있다.[59] 동시에 카터와 함께, 루즈벨트 이후 대통령 중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승계자 기준으론 카터의 전임자인 제럴드 포드도 포함된다. 참고로 원조 부통령 연임자 밴 뷰런도 재선에 실패했다. 트럼프도 추가 되었으나 징검다리 재선에 성공하며 One-term President 타이틀은 벗어났다. 바이든은 본인이 재선 도전을 포기하였으나 그를 대신하여 나간 해리스가 그의 부통령이었고 바이든이 후원 받았던 후원금까지 물려받아 대리전을 뛴 것이나 다름 없었기에 사실상 재선 실패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60] 클린턴은 H. W. 부시를 "미국, 우리의 헌법과 제도, 그리고 우리가 공유하는 미래를 믿는 명예롭고, 우아하며, 품위 있는 사람"으로 기억했다.[61] 이 기록도 본래는 앨 고어가 당선 됐다면(득표에서 이겼으나 선거인단에서 밀려남. 게다가 당시에는 21세기가 되기 2달 전이였음.) 고어에게 넘어갔겠지만, 부시 이후 부통령 경력을 마치고 대선 치러서 당선한 사례가 없어 현 기준으론 부시가 최신. 조 바이든은 2020년 대선에서 당선되었지만, 2016년 대선을 건너뛰었기 때문에 바로 다음 대선은 아니다. 20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면 마틴 밴 뷰런이 있다.[62] 리처드 닉슨은 부통령 임기를 모두 마쳤지만, 대선을 2번 건너뛰고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닉슨도 1960년 부통령인 상태에서 도전했긴 하나, 존 F. 케네디에게 졌다.[63] 게다가 카터는 정권교체에 성공하고 재선에 실패해서 단기정권의 기록을 세웠다. 그나마 부시는 초선에서 공화당의 3연승을 기록했기 때문에 단기정권은 아니다.[64] 트럼프는 징검다리로 재선에 성공한다[65] 노태우의 재임 기간 중 첫 1년인 1988년은 레이건의 마지막 해, 나머지 4년이 부시의 임기다. 두 사람의 퇴임은 1개월 차이로 이루어졌다.[66] 김일성은 근 말년에 가까웠다.[67] 이 백혈병에 걸렸던 소년은 다행히도 백혈병이 호전됐는지 3년 뒤 아버지 부시와 함께 비교적 건강해진 모습으로 다시 사진을 찍기도 했다.[68] 치즈버거에 들어가는 재료를 토핑으로 올린 피자다.[69] 미국은 9월생을 기준으로 학년을 끊으므로 아버지 부시는 1923년 9월 1일 ~ 1924년 8월 31일 생과 같은 학년, 카터는 1924년 9월 1일 ~ 1925년 8월 31일생과 같은 학년이 되므로 학년은 아버지 부시가 한 학년 위다.[70] 즉 역대 미국 대통령 & 영부인 중에 최초이자 유일하다는 뜻이다.[71] 니미츠급 항공모함의 최신형이자 마지막 항모다. 이후 항모 시리즈는 제럴드 R. 포드급 항공모함으로 계승된다.[72] 이 외에도 대통령이 많이 태어난 해는 1946년을 들 수 있는데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도널드 트럼프, 노무현이 이 해에 태어났다.[73] 사실상 부시가 카터보다 4개월 일찍 태어났기 때문에 부시가 90세를 맞아도 카터가 90세 생일 이전에 사망했다면 4연타 기록이 세워지지 못하는 것이다.[74] 2001년 전자인 로널드 레이건도 90세를 맞았고, 2003년 전전전자인 제럴드 포드도 90세를 맞았다.[75] 게다가 후버도 이 4명(포드, 카터, 레이건, 부시)이 재임한 시기가 약 반세기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그 이전에는 애덤스가 90세를 넘긴 유일한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76] 사실상 아버지 부시가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대통령들을 제외하면 가장 최근의 대통령이다.[77] 다만 이 때는 이미 휠체어 신세를 질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았던 터라 실제 시구는 아들 부시만 했다.[A] 대통령 후보는 로널드 레이건[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