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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2004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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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f0f0> 선거 일시 | 11월 2일 5시 ~ 11월 3일 6시 (UTC) | ||||||||
선거인단 | 538명[1] | ||||||||
투표율 | 60.1% ▲ 5.9%p | ||||||||
선거 결과 | |||||||||
후보 | [[공화당(미국)| 공화당 ]]대통령 조지 W. 부시 부통령 딕 체니 | [[민주당(미국)| 민주당 ]]대통령 존 케리 부통령 존 에드워즈 | |||||||
홈스테이트 | 대통령 텍사스 부통령 와이오밍 | 대통령 매사추세츠 부통령 노스캐롤라이나 | |||||||
승리 주 | 31 | 19 + D.C. | |||||||
선거인단 | |||||||||
53.16% 286명 | 46.65% 251명[2] | ||||||||
전국 득표 | |||||||||
50.7% 62,040,610표[3][4] | 48.3% 59,028,444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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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4년 11월 2일에 실시된 미국 제43대 대통령(또는 제44대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이며 21세기 첫 미국 대통령 선거이다.미국의 50개 주(州)와 수도인 워싱턴 D.C.에서 치러졌으며 선거인단 숫자는 538명이다.
선거 결과는 현직 미국의 대통령이자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조지 W. 부시가 당선 되어 재선에 성공했다.
또 공화당이 콜로라도, 버지니아, 뉴멕시코에서 마지막으로 승리한 미국 대통령 선거이다.
2. 배경
엄청난 논란을 불고 온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50%대 초반~40%대 후반의 어중간한 지지율로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다. 9.11 테러가 일어나자, 비록 초기 대응에 논란이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국가적 혼란 상황에 잘 대응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90%대로 상승,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 지지율을 기록했다. 9.11 테러로 공화당에 유리한 안보 이슈가 선거에서 부각되는것까지 겹쳐 2002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몇십년만에 중간선거를 이긴 여당이 된다.[5] 부시 대통령의 엄청난 인기 때문에 2004년 대선에서 재출마를 고려하던 앨 고어 전 부통령마저 재출마를 포기한다.그러나 2003년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몇가지 변수로 인하여 부시 대통령의 인기가 낮아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라크 전쟁 수행 여론이 높았지만 몇달이 지나도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자 부시 대통령의 호언장담이 의심받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프랑스, 독일, 스페인[6] 등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국들이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며 미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황에 놓였다.
내부적으로는 아동낙오방지법과 세율 인하 패키지 법안이 논란이 되었다. 아동낙오방지법은 미국의 부족한 공교육 시스템을 보완한다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된 정책이었지만, 각종 프로그램들이 소요한 자금이 당초 배정했던 예산보다 크게 상회하는 문제가 일어났고, 표준화된 시험을 통한 평가방식으로 인해 주입식 교육을 야기하는 부작용이 발생하며 현장 교육계와 진보 진영에서 반발을 샀다. 또 부시 대통령은 역사상 최대폭의 감세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부자감세 논란과 더불어, 당초 목표했던 세율 인하로 인한 경기진작 효과 또한 9.11 테러로 인한 불경기가 장기화되면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배경을 두고 민주당은 2002년 중간선거의 패배 후 지도부를 물갈이하고 신문물(?)인 온라인에서의 지지를 바탕으로 지지율을 크게 회복시켜 2004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노린다.
3. 정당별 상황
3.1. 공화당
재선에 나선 조지 W. 부시와 딕 체니 |
2004년 부시-체니 캠페인 로고 |
Stronger America
더 강한 미국
2004 부시-체니 티켓 슬로건
공화당에서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만장일치로 대통령 후보로 재선출된다. 딕 체니 부통령의 저조한 인기로 교체 여론이 나왔고, 대타로 콜린 파월 국무장관, 빌 프리스트 상원의원,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 등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체니를 부통령 후보로 재지명하였다. 재선을 앞둔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50%대 초반으로 유지되었고 재선 여론은 약 50% 정도로 점쳐졌다.더 강한 미국
2004 부시-체니 티켓 슬로건
3.2. 민주당
존 케리 대통령 후보와 존 에드워즈 부통령 후보 |
케리-에드워즈 캠페인 로고 |
Stronger at Home, Respected in the World
국내에서는 강하게, 국외에서는 존경받게
2004 케리-에드워즈 티켓 슬로건
민주당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가장 유력한 주자였던 앨 고어가 재출마를 포기하면서 10여명의 대권 주자가 나와 각축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유력 후보자는 데니스 쿠시니치 하원의원, 조 리버만 상원의원, 하워드 딘 버몬트 주지사, 딕 게파트 상원의원, 웨슬리 클라크 전 나토 사령관, 존 케리 상원의원, 존 에드워즈 상원의원,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 등이 꼽혔으나 모두 여론조사에서 경합의 양상을 보였다.국내에서는 강하게, 국외에서는 존경받게
2004 케리-에드워즈 티켓 슬로건
이중 가장 먼저 치고 올라온 것은 하워드 딘 버몬트 주지사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오히려 이를 무기로 정치 혐오에 빠져있던 청년 지지층에게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워드 딘은 이라크 전쟁 반전파로,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즉각 이라크에서 철수하겠다고 주장할 정도로 좌파적인 색체가 강한 대중주의 후보였다. 이는 민주당의 미적지근한 성향에 실망하고 있던[7] 많은 민주당 지지층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딘 주지사의 뒤를 딕 게파트 상원의원이 이었으며 3위는 웨슬리 클라크 사령관이 차지했다.
하지만 하워드 딘의 병역 논란[8]이 불거지고, 버몬트 주지사 시절의 행각[9]이 드러나며 당내 좌파가 딘의 지지를 철회한데다, 지나친 네거티브/무리수 캠페인[10]을 하는 바람에 딘의 지지율이 떨어진다. 거기다 선거 자금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며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형편없이 뒤쳐진 모습을 보여주었고 패배를 수용하는 연설에서 정체 불명의 괴성까지 지르며 이미지가 나락으로 치달았다. 딕 게파트, 웨슬리 클라크 역시 핵심 공약이 부족하다는 비판으로 인해 결국 지지율이 하락했고,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존 케리였다.
케리는 진보파 상원의원으로 딘의 지지층을 흡수했으며 이라크 전쟁에 관해서는 온건한 입장을 내비쳐 딕 게파트의 지지층을 흡수했다. 워싱턴 정가에서 오래 활동한 존 케리였기 때문에 민주당 진성당원의 지지를 받아내기도 쉬웠다. 특히 원내에서 오래 진보를 대표해왔던 테드 케네디가 케리를 초기부터 지지했고, 케네디의 보좌진들이 케리의 선거 팀 참모로 들어가 케리의 승리를 견인하였다.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에서 무려 11개의 무공훈장을 따낸 전쟁영웅이자, 1970년대 반전운동의 아이콘으로 이라크 전쟁 정국에서 더 없이 완벽한 조건을 갖춘 후보였다. 덕분에 전체적으로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점차 자신의 지지 기반을 비롯해 정치 상황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기반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케리는 초기 여론조사의 불리함을 이겨내고 경선에서 연전연승해 압도적 승리를 거두게 된다. 존 케리는 부통령 후보로 존 에드워즈를 지명했다. 존 에드워즈는 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인 노동자 계급 출신의 온건파 상원의원으로, 북동부 엘리트 출신 진보파 상원의원인 케리의 반대편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케리는 자신의 단점을 보완할 후보로 존 에드워즈를 선택한 것이다. 부통령 후보로 존 매케인[11]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매케인 자신이 거부하여 불발되었다.
4. 선거 진행
선거전은 그야말로 초접전이었다. 처음에는 조지 W. 부시가 우위를 점하고 존 케리가 이에 따라붙는 구도였으나 경선이 마무리되고 민주당 지지층이 결집하면서 두 후보의 지지율이 거의 동률로 나오게 되었다.조지 W. 부시와 존 케리 모두 안보 이슈를 내세웠고 모두 테러와의 전쟁에 찬성하는 모양세를 띄면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게 되었다. 조지 W. 부시는 "강을 건너는 도중에 말을 바꿔타지 말자"라는 슬로건 하에 강한 안보를 위해서는 대통령 연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존 케리의 당선이 동맹국 눈치를 보느라 아무것도 못하는 미국을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존 케리는 "해외에서 존경받는 미국"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조지 W. 부시로 인해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 외교가 훼손되었으며 자신이 당선되면 한국, 일본, 프랑스, 독일 등 동맹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할 것을 천명했다. 이라크 전쟁에 있어서는 더 많은 NATO 국가들을 전쟁에 끌어들여 미국 우선주의가 아닌 동맹 외교를 통한 이라크 문제 해결안을 제시했다.
안보 문제에 있어서는 조지 W. 부시가 앞서나갔다. 처음에는 조지 W. 부시의 병역 문제가 제기되며 주춤하기도 했으나 이내 케리 캠프 측에서 제기한 부시의 탈영 논란이 거짓으로 드러나며 케리가 타격을 입었고, 반대로 SBVT(진실을 위한 참전용사 모임)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직에서 존 케리의 베트남 전쟁 전공이 과장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며 케리의 지지율이 하락하게 되었다.[12] 결정적으로 존 케리는 안보관에 있어 동맹 외교를 앞세운 것 외에는 부시와 이라크 전쟁, 테러와의 전쟁 등에서 차별화를 보이지 못했고 자신이 11개의 무공훈장을 땄다는 사실만 지겹게 반복하거나 동맹을 이라크 전쟁에 참여시켜야한다는[13] 지엽적인 의제를 강조하는 등 전략에 있어서의 실패를 보이게 된다.
존 케리가 승리를 거둔 2004년 대선 토론 |
하지만 대선 토론에서 존 케리가 우위를 잡으며 안보 이슈로 벌어졌던 부시-케리 간 지지율 격차가 다시 좁혀지게 되었다. 케리는 부시의 논란거리였던 아동낙오방지법과 감세를 끊임없이 공격했는데, 3차례의 토론에서도 부시가 초조한 모습을 보인 반면, 케리는 190cm가 넘는 훤칠한 키와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부시를 몰아 붙여 토론에서 압도적인 대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케리가 부시의 국정운영을 비판하는 데에 성공한 것과 달리, 미국 국민들에게 국정운영의 대안으로 인식되는 데에는 실패했다. 특히 경제운용의 경우, 부시의 경제운용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49%,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51%인 반면, 케리의 경제운용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45%,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53%로 나타나 부시보다 더 낮은 평가를 받았다. #
사회문화 이슈에 있어서는 양 후보의 진영이 결집하는 양상을 보였다. 존 케리는 처음에는 동성혼에 반대했으나 이후 찬성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꿔 진보 표의 결집을 노렸다. 부시는 반대로 동성결혼 반대를 일찍이 주장해 보수적인 히스패닉의 표심을 사로잡았으며 400만표에 달하는 극단적 복음주의 표까지 결집시키는데 성공한다. 다만, 동성혼 의제는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케리의 남부 표심을 무너트린데다 보수 히스패닉까지 부시에게 투표하게 만들어 케리의 전략이 부족했던 것으로 평가받았다.[14] 그 외에도 시민결합, 낙태 등 여러 의제가 논의되었고 양 후보는 평행선을 달리면서 각자의 진영을 결집시키는 모습을 보여줬다. 부통령 선택에 있어서는, 존 에드워즈가 참신하고 젊은 이미지로 초기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나 그 뿐이었고, 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딕 체니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이며 지지율 상승에 한계를 보이게 되었다.[15]
역사 속의 전설로 남은 "윈드서핑" 광고 |
홍보전에서는 조지 W. 부시가 앞서나갔다. 특히 위의 Windsurfing 광고는 민주당 지지층에게서도 잘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존 케리는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으면서 여론이 나빠지자 소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고, 그외에도 여러 사안에서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상원의원으로서의 표결 결과를 뒤집는 입장을 취했는데, 부시 캠프는 이를 놓치지 않고 말 뒤집기(Flip flop)로 공격한 것이다.
이런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반영되어 선거를 며칠 앞둔 여론조사에서도 어떤 조사에서는 부시가, 어떤 조사에서는 케리가 1~2%p 내외의 격차로 우세한 초접전의 양상이 나타났고 수많은 조사에서는 두 후보가 동률을 기록하는 등 그야말로 "투표함을 까보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 없는" 구도가 펼쳐졌다.
5. 결과
최종 선거 결과 | ||
투표 시간 | ||
2004년 11월 2일 (UTC +9) | ||
투표 결과 | ||
후보자 | 조지 W. 부시 | 존 케리 |
선거인단 수 | 286 / 538명 | 251 / 538명 |
전국 득표 수 | 62,040,610표 (50.7%) | 59,028,444표 (48.3%) |
대통령 당선인 | ||
조지 W. 부시 | ||
부통령 당선인 | ||
딕 체니 |
주별 결과 | ||
정당 | 승리한 주 | 선거인단 |
민주당 | 캘리포니아(55),델라웨어(3), DC(3), 하와이(4), 네바다(5), 뉴햄프셔(4), 뉴저지(15), 뉴욕(31), 버몬트(3), 워싱턴(11), 미네소타(10), 로드아일랜드(4), 오리건(7), 일리노이(21), 메릴랜드(10), 매사추세츠(12) , 위스콘신(10), 미시간(17), 메인 (4)[16], 펜실베이니아(21),코네티컷(7) | 251[17] |
공화당 | 알래스카(3), 애리조나(10), 아칸소(6), 앨라배마(9), 조지아(15), 아이다호(4), 캔자스(6), 켄터키(8), 루이지애나(9), 미시시피(6), 미주리(11), 몬태나(3), 인디애나(11),네브래스카(5)[18], 노스다코타(3), 오클라호마(7), 콜로라도 (9), 뉴멕시코(5), 오하이오(20), 노스캐롤라이나(15),사우스캐롤라이나(8), 사우스다코타(3), 테네시(11),플로리다(27), 텍사스(34), 유타(5), 웨스트버지니아(5), 와이오밍(3)버지니아(13),아이오와(7) | 286 |
부시의 재선이 확정된 날, 영국의 일간지 《더 가디언》[19]의 표지 오, 신이시여. |
선거인단으로 볼 때 박빙의 선거였으며, 스윙스테이트 한두곳의 차이만으로 선거의 결과가 뒤집힐 정도로 차이가 크지는 않았다. 세부적으로 보자면 서부 해안가 주와 동북부를 제외한 나머지 주에서 부시가 승리하였다. 특히 지난 번엔 537표 차이로 신승했던 플로리다에서 29만표(5.01%) 차이로 낙승했고, 저번 선거에서 앨 고어가 이겼던 뉴멕시코에서 5,988표(0.79%) 차이로 이겼다.[21] 존 케리는 캘리포니아, 뉴욕 등 큰 주에서 승리했지만 55%[22] 정도밖에 얻지 못했고 특히 동성결혼 찬성의 여파로 남부 출신 러닝메이트의 이점을 누리지 못하고 테네시, 플로리다, 노스캐롤라이나, 아칸소, 버지니아 등 경합에 가까웠던 남부 주를 큰 차이로 부시에게 넘겨주며 뒷심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이는 이후에 진행되었던 선거들에서도 민주당이 승리를 가져오기까지 시간이 더 걸리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다.
오하이오에서 표차가 대략 10만표 정도 밖에 안나왔고 부정선거 논란도 제기되어 민주당 일각에서는 선거를 불복하자는 주장도 나왔지만 전국 투표에서 케리가 제법 크게 밀렸기 때문에 힘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오히려 민주당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던 것이, 이 선거의 승리로 민주당은 2005년 카트리나 사태와 2008년 금융위기의 책임을 모두 부시에게 떠넘길 수 있게 되어 1928년의 앨 스미스, 1976년의 제럴드 포드와 함께 선거에서는 졌지만 결과론적으로 그것이 당에는 더 이익이었던 사례로 남게 되었다.
한편, 부시 캠프의 총책으로 각종 전략을 총동원해 가까스로 부시의 재선을 성공시킨 전략가 칼 로브[23]는 승승장구해 백악관 서열 3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는 이 선거를 발판으로 공화당이 20년, 30년 간 장기집권하는 보수적인 기독교 신정국가 미국의 모습을 그렸으나, 불과 1년 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그의 야망은 산산조각났고 칼 로브 자신도 리크 게이트를 비롯한 몇몇 추문으로 불명예스럽게 자리에서 물러나야했다.
6. 관련 문서
[1] 선거인단 270명 이상 확보시 당선.[2] 선거인단 1명이 부통령인 존 에드워즈를 대통령 후보로 투표했다. 웃긴 것은 이 사람이 부통령 후보도 존 에드워즈로 투표했다는 것.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를 같은 사람으로 투표한 것은 역대 미국 대선 선거인단 투표에서 처음 있던 일이었으며 불충실한 선거인단이 나온 미네소타의 선거인단 10명 모두 이에 대해 함구했기 때문에 이 표가 누구한테서 나왔는지, 실수인지 의도적이었는지의 여부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3] 공화당에게 이 선거는 한동안 21세기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들 중 유일하게 전국 득표수에서 자당 후보가 승리한 선거였다. 조지 H. W. 부시 후보가 전국 득표수와 선거인단 수에서 모두 앞서며 당선된 1988년 대선 이후 2020년 대선까지 치러진 8번의 대선에서 공화당은 이 2004년 대선을 제외한 나머지 7번의 대선에서 모든 후보가 민주당 후보에게 전국 득표수에서 밀렸다. 물론 미국 대통령 선거 특유의 선거인단 제도 덕분에 그 7번의 선거 동안 조지 W. 부시(2000년)와 도널드 트럼프(2016년)라는 두 명의 대통령을 당선시킬 수 있었다. 공화당에게 하나의 징크스와도 같았던 이 흐름은 2024년 대선에서 징검다리 재선에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가 전국 득표 과반을 확보하면서 약 36년 만에 종결되었다.[4] 민주당이 1992년 대선부터 2020년 대선까지 8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른 32년 동안 이 2004년 대선 딱 한 번을 제외하면 줄곧 전국 득표수에서만큼은 앞서왔던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990년대에는 로스 페로 때문에 중도보수 유권자층의 표가 분열되어 민주당이 우세했고, 2000년대 이후로는 민주당의 표밭인 소수인종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전국 득표에서 우위를 보이기 쉬운 위치였다는 것. 이 2004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가 전국 득표에서 이긴 것조차 히스패닉이 54 대 46의 비율로 부시를 더 밀어줘서 그런 것이라는 분석도 있을 정도. 참고로 히스패닉이 부시를 밀어준 이유는 부시의 동생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의 부인이 멕시코인이라 히스패닉들이 부시를 더 선호했던 측면이 있다.[5] 1994년 뉴트 깅리치의 공화당 혁명 이후, 실질적으로 중간선거에서 여당이 승리한 경우는 뉴트 깅리치 공화당 하원의장의 혼외정사 논란이 불거진 1998년 중간선거, 2002년 중간선거, 그리고 2022년 미국 중간선거밖에 없었다.[6] 처음에는 이라크 전쟁에 동조했지만, 국민 91%가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조사가 나왔고, 2004년 3월 지하철 폭탄테러 사건의 여파로 이라크 전쟁에 결사반대하는 좌파 정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며 미국에 등을 돌리게 된다.[7] 아닌게 아니라 1984년 이후 민주당은 마이클 두카키스, 빌 클린턴, 앨 고어 등 당내 온건파 혹은 보수파가 계속 대선 후보로 선출되던 상황이었다.[8] 베트남 전쟁에서 군 면제를 받았는데, 이를 두고 웨슬리 클라크는 "내가 베트남에서 부상당해 병원에 누워있을때 딘은 버몬트에서 스키를 즐기고 있었다!"라고 맹공했다.[9] 주지사로 지낼 당시 총기 규제를 해제하는 등 상당히 보수적인 행정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위장좌파" 논란이 일었다.[10] 상대 경선 후보를 향해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라"라는 막말을 하는가 하면, 존 케리 후보를 상대로 보톡스를 맞았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조지 W. 부시와 같은 사람과는 이웃도 하기 싫다는 식의 망언을 해 빈축을 샀다. 조지 W. 부시 측이 하워드 딘의 네거티브 프레임을 그대로 가져가 존 케리를 공격한건 덤. 심지어 사담 후세인 체포에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며 뭐하는 짓이냐는 말만 들었다.[11] 존 매케인은 조지 W. 부시의 안보 정책을 비판하며 차라리 케리가 대통령이 되는게 낫다는 투의 인터뷰를 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또 매케인은 오랜 상원 중진의원으로 존 케리의 개인적인 친구이기도 했다.[12] 후일 SBVT 조직은 공화당의 사주를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미 해군까지 케리의 전공을 인정했으므로 케리가 과장된 전쟁영웅이라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13] 이를 두고 SNL에서는 "만약 내가 당선된다면 NATO 뿐 아니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까지 이라크 전쟁에 참전시켜 존경받는 미국의 동맹외교를 구축하겠다"(...)라는 말로 조롱했다.[14] 민주당 내 보수파 정치인이었던 빌 클린턴은 케리가 동성혼에 찬성하면서 사실상 대선을 포기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클린턴과 달리 케리는 남부 주에서 단 한 주도 승리하지 못했고 이것이 결정적인 패인의 원인이 되었다.[15] 아무리 체니가 이미지가 나빴을지언정 정치 경력이 6년 정도밖에 안되는 에드워즈가 닉슨 때부터 워싱턴에서 구른 정치 9단 체니를 꺾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다.[16] 메인 1,2구 모두 승리[17] 불충실한 선거인단 1명이 부통령 후보를 찍었다.[18] 1구, 2구, 3구 승리.[19] 타블로이드판인 G2이다.[20] 테드 케네디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케리의 선거팀은 초기 개표결과와 투표율을 감안했을 때 케리가 300명 이상의 선거인단을 얻을거라고 확신했다고 한다.[21] 플로리다 주는 대표적인 스윙스테이트 주이자 캐스팅 보트 지역으로 플로리다에서 승리한 후보는 대부분 대선에서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계속해서 이어졌으나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가 여유로운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플로리다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는 대선에서는 패하게 되었다. 플로리다 주는 이제 스윙스테이트 지역으로 평가받기 보다는 레드스테이트 지역으로 여기는 매체들이 많으며 오하이오 주 역시 비슷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플로리다 주는 스윙스테이트로서 플로리다 주를 민주당이 가져오는 경우 선거에서 여유있게 승리할 수 있었지만 2010년대 이후로 전체적인 선거 전략의 수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반면 버지니아 주 같은 지역은 민주당 우세주로 자리잡게 되었다.[22] 후일의 오바마, 힐러리, 바이든이 모두 이 주에서는 60% 이상을 득표했다.[23] 아들 부시의 리 애트워터라고 불리며, 오랜 기간동안 부시의 측근으로서 부시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공화당의 대표적인 전략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