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9:35:33

데니스 쿠시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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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대 클리블랜드 시장
데니스 존 쿠시니치
Dennis John Kucinich
파일:데니스쿠시니치.jpg
<colbgcolor=#214388> 출생 1946년 10월 8일 ([age(1946-10-08)]세)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배우자 헬렌 쿠시니치(이혼)
샌드라 리 매카시(1977년 결혼~1986년 이혼)
엘리자베스 하퍼(2005년 결혼~현재)
자녀 슬하 1명
학력 케이스 웨스턴 리버스 대학교(B.A.)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경력 클리블랜드 시의원(1970~1973)(1983~1985)
제 53대 클리블랜드 시장(1977~1979)
오하이오주 23구 하원의원(1995~1997)
오하이오 주 10구 하원의원(1997~2013)

1. 개요2. 일생3. 성향
3.1. 도널드 트럼프에 관한 시각
4. 선거 이력

[clearfix]

1. 개요

미국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하원 의원 중 한 사람이었다.

1997년대 의회에 입성하면서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민주당에서 가장 좌측에 있는 정치인이라고 평가받았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 와서는 더 진보적인 엘리자베스 워런, 버니 샌더스 등 더욱 진보적인 인사들이 성장하면서 옛말이 되어버렸다.

2. 일생

정계 시작은 빨랐으나 다소 흑역사였다. 1977년 31세의 나이로 무소속 삼파전에서[1] 일약 무소속 클리블랜드 시장이 되었으나, 공화당 랠프 퍼크(Ralph Perk, 1971~1977)의 방만한 재정을 이어받았으며, 24세 변호사를 재정이사로 임명하여 빈축을 사고, 그와 충돌하던 인기 좋은 시 경찰청장을 해임하기도 했다. 결국 1978년 8월 주민소환 투표에서 236표차로 가까스로 승리해 소환을 면했지만, 그러나 결국 그해 12월 16일 신용등급이 강등되면서 클리블랜드 시는 부도가 났다(...) 그가 전기 민영화 반대를 이유로 시영 발전소 매각을 거부하자, 주정부는 그를 몰아내고 새 법정관리인을 파견했다. 클리블랜드는 1979년 2월 주민투표에서 1) 전력민영화 반대, 2) 소득세 인상 등의 자구노력을 통과시켰다. 결국 쿠시니치는 11월 재선거에서 낙선했고, 후임 시장인 조자 보이노비치의 노력 하에서야 1980년 말에야 법정관리에서 벗어났다. [2] 결과적으로는 끝이 다 좋으면 다 좋다고, 그래도 시영 발전소 매각을 결사로 막아낸 것[3]과 갈수록 초기의 미숙함을 시정하는 태도를 보인 점은 훗날 부활의 자산이 되었다.[4]

그로부터 정계에서 사라졌던 그는 1986년 주지사 선거, 1988년과 1992년 선거에서도 줄곧 낙선했다. 그러나 15년 만인 1994년 오하이오 상원의원으로 부활하였고, 2년 뒤 11월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1997년 1월 3일부터 2013년 1월 3일까지 미국 하원의원(8선)을 지냈다. 하원의원을 지내면서 딕 체니 탄핵안을 발의해 주목받았다. 2004년과 2008년 대선에서 미국의 진보 진영을 대표해 대선 출마를 선언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11년 리비아 폭격 당시 버락 오바마를 탄핵해야한다는 과격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결국 그 다음해 탈당하였으며 9선에 실패했다.

2018년 오하이오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고 친 버니샌더스 성향 PAC인 우리의 혁명(Our Revolution)의 지지도 받았지만, 경선에서 3위로 낙선했다. 2021년에는 42년만에 클리블랜드 시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역시나 16.6%의 지지를 받아 3위로 떨어졌다.

2023년, 2024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를 공식 지지했다. 민주당 주요 정치인 중 RFK 주니어를 지지한 사람은 데니스 쿠시니치가 유일하다. 하지만 케네디가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자 케네디의 캠페인을 떠났다. #

2024년, 오하이오 7구 무소속 하원의원 출마를 선언했다. 무소속 후보 치고 선전했으나 결과적으로 15%도 얻지 못하고 패배했다.

3. 성향

보편적 의료보험을 지지하며 사형제 폐지 지지자이다.

미국 진보파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불개입주의(Non-interventionism)[5] 성향이 매우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 이러한 성향의 연장선상에서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나 북한의 김정일에 대해서도 다소 우호적인 발언을 하는 등의 행보로 인해 논란을 빚기도 하였다.

민주당 진영 인사로써는 드물게 친러 성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 도널드 트럼프에 관한 시각

도널드 트럼프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미국 진보파들과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일단 쿠시니치는 다른 리버럴파나 진보파 인사와 달리 반트럼프 인사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일례로 쿠시니치는 트럼프의 취임사를 위대하고 통합을 위한 메세지라며 극찬했으며, 트럼프의 친러시아적 외교 정책을 평화주의적 시도라며 그를 두둔했다.

물론 쿠시니치도 보수주의자는 아니라서, 트럼프의 환경정책과 대이란 정책에 대해서는 비판하긴 했으나, 2019년 민주당 주도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시도는 반민주주의적이라고 일관되게 반대해왔다.[7] 또한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자신을 도청했다는 트럼프의 주장도 지지했다. 트럼프가 2019년 시리아에서 철군한 것에 대해서도 옹호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에 비판적인 리버럴파나 진보파들은 쿠시니치의 친러 성향이 트럼프에 대한 옹호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민주당 진보파에서는 꽤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아무래도 미국 청년 세대에서는 사회주의나 좌파적인 의제에 대한 호응과 별개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여론이 압도적일 뿐더러 우크라이나 지원에 미적거리며 어깃장을 부리는 미치 매코널, 케빈 매카시, 랜드 폴 등의 친러파 인사를 "Moscow Mitch" "Kremin Kevin" "Russia Rand"라 부르며 경멸할 정도로 친러 정치인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안좋기 때문이다.

4.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2 연방 하원의원 선거 오하이오 제23구

94,366 (47.27%) 낙선 (2위)
1974 연방 하원의원 선거

[[무소속(정치)|
무소속
]]
45,186 (29.45%) 낙선 (3위)
1977 클리블랜드 시장 선거 클리블랜드

[[무소속(정치)|
무당파
]]
93,047 (50.81%) 당선 (1위) 초선
1979 클리블랜드 시장 선거 73,755 (43.83%) 낙선 (2위)
1996 연방 하원의원 선거 오하이오 제10구

110,723 (49.06%) 당선 (1위) 초선
1998 연방 하원의원 선거 110,552 (66.77%) 재선
2000 연방 하원의원 선거 167,093 (75.00%) 3선
2002 연방 하원의원 선거 129,997 (74.06%) 4선
2004 연방 하원의원 선거 172,406 (60.03%) 5선
2006 연방 하원의원 선거 138,393 (66.41%) 6선
2008 연방 하원의원 선거 157,268 (57.02%) 7선
2010 연방 하원의원 선거 101,343 (53.05%) 8선
2012 연방 하원의원 선거 오하이오 제9구 30,564 (40.02%) 낙선 (2위)
2021 클리블랜드 시장 선거 클리블랜드

[[무소속(정치)|
무당파
]]
6,595 (16.47%) 낙선 (3위)
2024 연방 하원의원 선거 오하이오 제7구

[[무소속(정치)|
무소속
]]
50,321 (12.8%)


[1] 공화당 출신의 현직 시장 퍼크, 민주당의 후원을 받은 페이건을 모두 제쳤다. 퍼크 대 페이건 구도에서 퍼크는 발전소 민영화로 나가리, 페이건은 주 하원의원으로서 책임이 있다고 나가리였다.[2]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능한 시장이었던 보이노비치의 노력으로 시영 발전소는 클리블랜드 공공 발전소(Cleveland Public Power, CPP)로 거듭났으며, 민영화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보이노비치는 시장 임기를 4년 단위로 늘리며 시장 10년(1980~1989), 오하이오 주지사 8년(1991~1998), 그리고 상원의원 12년(1999~2011)을 지냈다. 나이도 1936년 생이라 쿠시니치에 비해 10살 연상일 뿐 역시 43세의 젊은 나이였다는게 함정.[3] 민간 발전사인 CEI(Cleveland Electric Illuminating Company, 클리블랜드 전기 조명 회사)의 인수 시도가 꽤 악랄했던 건 사실이다. 이를 테면 시 의회 로비를 통해 시영 발전소의 채권 발행을 무산시키고, 그렇게 발전기 수리를 막고, CEI의 전기를 구매하게 해서는 고액의 발전료를 책정해 통째로 시영 발전사를 인수하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쿠시니치는 퍼크가 중단했던 반독점 소송을 재개하며 강경하게 CEI와 맞섰다. 애초에 클리블랜드의 부도 자체가 시의 은행 트러스트가 CEI에 힘을 싣어주기 위해 전기 민영화를 조건으로 내세워 끝내 채권 연장을 거부한 것이다.[4] 물론 클리블랜드 시 차원에서 그를 재평가 한 것은 퇴임 19년 만이요, 하원의원으로 복귀하고 난 1998년이었다. 다만 대중들의 재평가가 반영된 것은 분명.[5] 한국에서는 '국내문제불간섭원칙'이나 '내정 불간섭 원칙'이라고도 번역한다. 한마디로 특정 국가의 정치에 대해서 다른 국가가 이래라 저래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6] 미국 진보파 인사들 중에서도 인권 문제에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타국 정치에 '개입'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7] 민주당계열 인사들은 절대다수가 트럼프 탄핵을 지지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