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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 |||
출생 | 1833년 8월 20일 | ||
미국 오하이오 주 노스 벤드 | |||
사망 | 1901년 3월 13일 (향년 67세) | ||
미국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 | |||
재임기간 | 제23대 대통령 | ||
1889년 3월 4일 ~ 1893년 3월 4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 아버지 존 스콧 해리슨(1804 ~ 1878) 어머니 엘리자베스 어윈 해리슨(1810 ~ 1850) | |
형제자매 | 10명 중 둘째 | ||
배우자 | 캐롤라인 스콧 해리슨(1832 ~ 1892, 1853년 결혼) 메리 디믹 해리슨(1858 ~ 1948, 1896년 재혼) | ||
자녀 | 러셀 벤저민 해리슨(1854 ~ 1936) : 1남 1녀 메리 해리슨 맥키(1858 ~ 1930) : 1남 1녀 엘리자베스 해리슨 워커(1897 ~ 1955) : 1녀 | ||
학력 | 파머스 칼리지[1] (편입) 마이애미 대학교 (B.A.) | ||
종교 | 개신교 (장로회) | ||
신장 | 168cm | ||
최종 당적 | |||
문장 | [2] | }}}}}}}}} |
백악관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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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 미국 대통령의 육성[3] |
1. 개요
미국의 제23대 대통령, 제9대 미국 대통령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손자로 미국의 유일한 조손 대통령이다.2. 생애
2.1. 정계 입문 전
1833년 8월 20일에 할아버지인 미합중국 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 소유의 오하이오 농장에서 태어났다. 해리슨은 윌리엄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에 태어났지만 해리슨이 태어날 당시부터 윌리엄은 이미 미국의 유명인사가 된 상태였고 아버지인 존은 연방 상원의원이었으며, 해리슨의 증조할아버지는 독립선언서 서명자 명단에 버지니아 대표로 등록된 벤저민 해리슨 5세이다. 해리슨의 이름은 윌리엄이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그대로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렇게 해리슨은 태어날 당시부터 유력 정치인들과 함께였다.해리슨이 유년기를 보낸 농장은 매우 광활하였지만 해리슨이 성장하던 무렵에는 할아버지도 세상을 뜬 후였고 가세도 기울어 명문가 출신들이 진학하던 동부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오하이오의 농민대학과 마이애미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친다. 대학생 시절에는 연설능력이 뛰어나 토론 과제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 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하는데 뛰어난 언변으로 많은 승소판결을 이끌어내는 변호사로 이름난다. 제법 인기가 많은 변호사 해리슨이지만 뛰어난 언변과 별개로 사교성이 떨어져서 '빙산', '고드름'과 같은 별명도 따라다니게 된다. 변호사 개업을 하고 조금 지나서 공화당에 입당한다.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한다.[4]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가문의 힘으로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밑에서 싸운 것이 전쟁 경력의 전부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셔먼의 테너시 연방군[5] 제20군단(XX Corps) 산하 제1사단 제1여단의 여단장으로 싸운 것 외에도 전공이 많고 종군 기록이 꽤나 대단한 축에 속한다. 일단 전쟁 발발 2년에는 켄터키나 테너시의 물자보급선을 지키는 2선 담당이였으나[6], 셔먼의 애틀란타 전역에 본격적으로 1선으로 투입[7] 옮긴다. 이 때부터 레사카 전투부터 연방군 약 100,000명으로 시작해서 애틀란타 점령까지 약 30,000명의 피해를 본[8] 엄청난 치열한 전쟁터를 뚫고 살아남았다. 특히, 복숭아나무 계곡 전투는 우월한 교환비로 연방군을 괴롭히고 있었으면서도 계속 밀려서 애틀란타로 후퇴하고 있던 남부군이 사령관을 후드 장군으로 바꾸고 연방군이 강을 건널때 대규모 기습으로 역습을 가한 대규모 전투에서[9] 살아남은 뿐만 아니라[10] 공까지 세웠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서부에서 후드가 약 3만의 병력을 이끌고 건곤일척 대규모 북진을 감행했는데, 후드가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패배를 한 전투이자 가장 대규모였던 내쉬빌[11] 전투도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12] 이렇게 굵직 굵직한 전투들에 많이 참여했는데 이 정도면 가문 빨이 있었어도 충분히 군사적 능력이 어느 정도 있었다고 인정해도 좋다. 즉, 해리슨의 파격적인 승진은 가문의 힘만이 아니라는 주장도 무시할 수 없는 근거가 충분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셔먼도 웨스트포인트 출신이지만 이렇다할 경력을 쌓지 못하고 전역한 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국회의원인 양아버지와 동생의 도움으로 재입대해 성공적인 활약을 펼쳤는데, 해리슨도 비슷한 사례였다고 보면 좋을듯 하다.
2.2. 정계 입문 후
종전 후 공화당에서 활동하며 인디애나 주지사에 2번 출마하지만 낙선한다. 1881년에 가문의 힘이 작용하여 인디애나 주의회가 만장일치로 해리슨을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13]하지만 1887년에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면서 상원에서 다시 낙마한다. 낙선한 해리슨은 이듬해인 1888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고 선언하고 후보로 선발되어 그로버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선거운동에 돌입한다. 당시 공화당은 부패하고 타락한 정당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고 클리블랜드의 강직함과 개혁 열풍 때문에 민주당이 압도적으로 지지받는 상황인데 해리슨도 클리블랜드 못지 않게 청렴하고 강직한 인물로 평가받아서 불리하지만은 않았다.해리슨은 퇴역군인의 연금 지급, 흑인의 시민권 부여, 수입품에 대한 높은 관세 유지를 주장하는 등 현안에 중점을 두어 선거운동을 벌였으나 해리슨의 참모들은 클리블랜드에 대한 흑색선전과 비방을 일삼아서 해리슨의 생각과 주장은 빛이 바래버리고 만다. 그리고 참모들은 영국 대사에게 선거에 대한 조언을 요청하는데 영국 대사는 자신들은 클리블랜드를 원한다고 거부하자 이것을 역으로 홍보해 클리블랜드는 친(親)영국파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 여파로 영국의 앙숙이자 클리블랜드가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뉴욕의 아일랜드계 유권자들이 클리블랜드에게 등을 돌린다. 결국 대선에서 클리블랜드는 해리슨에게 90,000여표 앞섰지만 선거인단에서 233:168로 패배하면서 결국 해리슨이 백악관의 주인이 된다.
2.3. 대통령 취임 후
해리슨은 공약대로 1890년에 퇴역 군인에 대한 연금법안을 제정한다. 이 법은 퇴역한 상이군인과 그 부양가족에 대한 보상을 확대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당시 윌리엄 매킨리가 주장한 '매킨리 관세법'을 제정하는데 이것은 수입 상품에 매기는 관세를 높이 올리는 법안이다. 또한 미국 국고에 매달 450만 온스의 은을 매입하는 법을 제정히는데 이 법들은 수입 상품 가격이 폭등하자 덩달아 다른 상품의 가격이 뛰는 바람에 물가가 올라 버려 불황을 초래한 데다가 은을 구입하기 위한 자금을 금과 은으로 충당하는 바람에 은을 많이 보유한 사람들이 은을 다시 금으로 상환받아서 국고에 금이 고갈되고 결국 다시 불황이 오고 만다.또한 당시 미국에 만연하던 대기업의 독점 체제인 '트러스트'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1890년에 '셔먼독점금지법'을 통과시킨다. 이 법 자체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과감한 정책이었으나 해리슨의 추진력은 정책을 추친하기에 너무 부족하였고 기업과 정치인들의 유착은 여전해서 기업들의 합병과 담합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 법이 제대로 작용한 것은 훗날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집권할 무렵이다. 외교와 국방에서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와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우호적 무역 협정을 추진하였으며 해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군을 현대적으로 무장시키는 기반을 닦았다. 또한 해리슨은 중앙아메리카 어딘가에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운하의 건설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해리슨의 주장은 10여년 뒤에 파나마 운하가 착공되면서 이루어진다.
해리슨은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였다. 대통령으로서 세부적인 면도 매우 꼼꼼히 챙겼고, 다른 부서의 전문가들이 못 미더워서 대통령이 된 후 16개월 동안 거의 매일 1,700명에 달하는 정부 관료들의 후보자들을 직접 면접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독자적인 해리슨의 정책은 의회와 공화당과 마찰을 겪어 결국 지지를 잃었고 법안 제정하면서도 정작 법의 시행에는 상당히 소극적인 입장을 유지해서 나라의 발전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14] 재임 도중 경제 공황이 지속되자 1890년 민주당에게 전체 하원 의석의 2/3를 내주는 굴욕을 당한다.
2.4. 퇴임 후 말년
말년에 촬영한 사진
1892년에 해리슨은 대통령을 탈환하려는 라이벌 클리블랜드와 다시 격돌한다. 그러나 선거 2주 전에 영부인이 사망하자 의욕을 상실하고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다. 당시 출마한 후보인 민주당의 클리블랜드, 농민당의 위버, 금주당의 피드웰도 예의를 지켜서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킨리법에 의해 빚어진 불황으로 유권자들의 지지를 상실한 해리슨은 결국 클리블랜드에게 패배하여 백악관을 떠난 후 인디애나에서 변호사 활동을 재개한다. 1894년에는 스탠포드대학에서 강사로 일하였으며 베네수엘라 국경선에서 일어난 영국령 기아나와 베네수엘라 간의 국경 분쟁에 대해 베네수엘라 측 법률고문으로 활약하였다. 퇴임 후 해리슨은 자신보다 25세 연하인 메리 디믹과 재혼하고 60대 중반인 1897년에 메리와의 사이에서 딸을 얻는다. 퇴임 후에도 공직 생활을 계속 이어가면서 살아가다가 1901년 3월 13일에 폐렴으로 사망하였다.[15]
3. 평가
백악관 밖에서 마주앉아 저녁식사를 하면 그는 아마 공손한 신사일 것이다. 그러나 백악관 안에서 어떤 공직을 청하는 사람을 접견할 때의 그는 시베리아에서 모피를 벗은 것 같이 차갑고 냉담한 모습이다.
토머스 플랫.
토머스 플랫.
빌어먹을 대통령! 냉혈한데다, 편협하고, 속 좁은 고집불통에 소심하게 오래된 찬송가나 부르는 인디애나폴리스의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어도어 루스벨트.
해리슨은 공화당 인사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고집했다. 그로 인해 여당인 공화당과 갈등하면서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데도 해리슨은 의원들을 설득하고 타협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사교성이 부족한 해리슨의 성격은 직무수행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강직한 면모와 청렴함, 그리고 고집이 센 성격은 대통령을 두고 다툰 라이벌인 클리블랜드와 흡사하다.
개인적으로는 강직하고 청렴한 인물이었다. 푸근한 인상과 달리 유달리 차가운 해리슨의 성격은 엽관 청탁을 거절하는 면모 때문에 더 부각되었다. 일도 열심이고 뛰어난 언변의 소유자로 이름이 높았지만 친화력, 반대파들을 타협하고 중재해나가는 능력, 정책을 밀어붙이는 추진력은 일국의 대통령으로 매우 부족했고 정책 수행에 스스로 걸림돌을 만들었다. 해리슨의 이러한 면모는 대통령 해리슨의 평가를 떨어뜨리는데 일조했다.
게다가 인디언 전쟁의 책임도 있는데, 그 유명한 양민학살인 운디드니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실제로 2022년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뒤에서 10등(....)을 했다.
4. 여담
- 키가 168cm이었는데 8대 대통령인 마틴 밴 뷰런과 더불어 역대 미국 대통령 중 두번째로 단신이다.[16] 그래서 붙은 별명이 '꼬마 해리슨(Kid Gloves Harrison)', '작은 벤(Little Ben)'.
- 언변은 뛰어났지만 유머 감각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무대에서 연설할 때는 유창하게 말하였지만 개인적으로 사람을 만날 때는 침묵을 지켰다. 인상이 너무 냉정해서 해리슨과 악수한 모 의원은 시들어 버린 피튜니아 같은 악수라고 평가하였다. 친화력이 부족하고 감정 표현도 서투른 해리슨은 말년에 감정 토로나 대통령의 관점을 표현하는 일에서 동요 없이 자신의 일을 처리해야 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회상하였다.
- 옥수수를 좋아해서 옥수수로 만든 요리를 즐겨먹었다. 대통령으로 재임할때도 옥수수 농업에 많은 신경을 써서 미국이 오늘날에 세계 최대의 옥수수 생산국이 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 대통령 시절 인디애나 출신의 모 유력 인사가 해리슨에게 와바시 지역에 새로운 우체국장이 필요하다고 청탁을 했다. 해리슨이 이유를 물으니 그는 현직 우체국장이 민주당 소속이라는 이유를 대고, 황당한 해리슨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유냐고 반문한다. 이에 그가 "제 기억이 맞다면 클리블랜드가 대통령께 진 이유는 바로 민주당 소속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자 해리슨은 하단의 말로 단호히 거절한다.
그렇지요. 하지만 제 기억이 맞다면 클리블랜드는 임기를 완전히 마쳤습니다. 저는 우체국장도 임기를 채우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첫 대선에서 참모들과 함께 개표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뉴욕의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서 참모들이 당황하자 해리슨은 태연하게 참모들을 보고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뭔 걱정을 하나? 우리 텃밭인 인디애나에서만 승리하면 되지. 낙선하면 고향에서 살면 되는 거고."라며 웃었다. 이윽고 밤 11시에 인디애나에서 이겼다는 보고를 들은 해리슨은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17] 당선 소식을 접한 해리슨의 친구가 축하해주려고 전화를 걸었지만 해리슨이 자느라 받지 못하였다. 다음 날에 친구가 해리슨에게 "자네는 왜 그렇게 일찍 잤는가?"라고 묻자 해리슨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18]
만약 내가 졌다면 밤을 새도 달라질 건 없지. 하지만 내가 당선된다면 다음 날 얼마나 할 일이 많겠나. 그래서 밤에 푹 자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일찍 잔 걸세.
- 최단기 미국 대통령이지만 그럼에도 할아버지인 윌리엄 해리슨을 매우 자랑스러워하였다. 남북 전쟁에 참전한 이유도 군인이었던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밟기 위함이고, 뇌물이나 청탁이 들어와도 "할아버님의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안 되네."라는 말로 거절하였다. 해리슨이 윌리엄을 언급하는 것은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 윌리엄이 취임식에서 내린 폭우로 인해 걸린 폐렴으로 사망하는데 손자인 해리슨의 취임식에도 비가 내렸다. 해리슨은 윌리엄처럼 무모하게 옷을 벗고 비를 맞으며 연설하지는 않았고 짧게 마무리하였다.[19]
- 백악관에 들어온 전기를 최초로 사용한 대통령이 해리슨이다. 하지만 해리슨은 감전되는 것이 무서워서 전등 스위치를 만지는 것도 싫어하였다.
- 증조할아버지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벤저민 해리슨 5세이다. 증손자와 이름이 같은 이유는 해리슨의 할아버지인 윌리엄이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손자에게 붙였기 때문이다. 다만 차이점은 증조할아버지는 5세이고, 해리슨은 8세이다. 단지 할아버지 윌리엄과 아버지 존 스콧 해리슨이 벤저민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을 뿐이다.[20]
[1] 후에 오하이오 육군사관학교로 개칭하였다가 폐교되었다.[2] 윌리엄 헨리 해리슨과 문장이 같다.[3]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미국 대통령의 음성 기록. 사실 최초의 음성기록을 남긴 미국 대통령은 러더퍼드 B. 헤이스이지만 기록이 소실되었고 전임자이자 후임자인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두 번째 선거 시절의 육성이 남아있긴 하지만 더 이전의 미국 대통령들의 음성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4] 전쟁 이후에 정치인이 되려는 사람에게 병역기피는 치명타였다. 라이벌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선거에서 위기에 놓일 뻔한 이유 역시 병역기피이다. 다행히도 클리블랜드의 병역기피는 위기를 벗어나는데, 전쟁 도중의 클리블랜드는 형제들이 모두 참전해서 홀로 가족을 부양하느라 어쩔 수 없었고 상대방 후보인 블레인도 병역기피를 저질렀기 때문이다.[5] 남부군도 테너시 군이 있었다. 둘은 완전 군대니 구별해야 한다.[6] 그래도 위험했는데, 이 당시에는 연방군이 완벽하게 켄터키와 테너시를 장악하지 못했었다.[7] 이 당시 연방군도 가용 병력이 부족해 노예해방선언 이후 이제 막 군사 훈련을 받은 해방노예 및 자유흑인들에게 2선 병참보호를 맡기고, 군인으로 제대로 훈련을 몇 개월 이상 제대로 받은 백인들을 1선 전쟁터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병력이 더 부족해져서 미국 유색인종 사단(United States Colored Troops)들도 1선 전쟁터로 보내진다.[8] 사망, 부상, 실종, 포로등 모든 피해 합계[9] 애틀란타 전역에서 당시 가용할수 있던 거의 전 병력을 가용했다.[10] 여기서 연방군은 약 10%의 피해를 봤다[11] 테네시의 큰 도시 내쉬빌 맞다.[12] 이 전투에서 엄청나게 많은 흑인 병사들이 1선 전쟁터에 투입되어 그야말로 갈려 나갔는데, 이 때문에 이 전투에 참여한 연방군 출신들은 대부분 흑인 인권에 우호적이게 된다. 해리슨도 마찬가지.[13] 1913년 수정헌법 17조가 비준되기 전에는 연방 상원의원을 직선제가 아닌 주의회 간선으로 뽑았다.[14] 인사가 만사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해리슨의 정책은 적절할 수도 있지만 정말 인사가 만사였다면 다른 부서의 전문가들을 활용하는 것이 더 나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15] 사망원인이 할아버지와 같다. 다만 차이는 임기 도중과 퇴임 후라는 차이이다.[16] 최단신은 4대 제임스 매디슨.(163cm)[17] 참고로 해리슨은 뉴욕에서도 승리하였다.[18] 33대 대통령인 해리 S. 트루먼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재선에 도전하였지만 지지도가 낮아서 재선의 기대를 접고 일찍 잠들었지만 다음 날 일어나서 재선 성공이라는 결과를 받는다.[19] 게다가 할아버지는 취임식 당시에 68세의 고령의 나이(당시 19세기 중반), 폭우, 늦겨울 등의 데스 클리셰를 얻어맞았다. 그래놓고 코트를 벗고 8,500자에 달하는 긴 연설을 했으니...[20] 벤저민 해리슨 6세는 윌리엄 해리슨의 큰형의 이름이고, 벤저민 해리슨 7세는 6세의 장남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윌리엄 해리슨의 입장에서 '벤저민'은 아버지, 큰형, 조카의 이름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