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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본명 | 러더퍼드 버처드 헤이스 Rutherford Birchard Hayes | ||
출생 | 1822년 10월 4일 | ||
오하이오 주 델러웨이 | |||
사망 | 1893년 1월 17일 (향년 70세) | ||
오하이오 주 프리몬트 | |||
묘소 | 스피겔 그로브 | ||
재임기간 | 제19대 대통령 | ||
1877년 3월 4일 ~ 1881년 3월 4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 아버지 러더퍼드 헤이스 주니어(1787 ~ 1822) 어머니 소피아 버처드(1792 ~ 1866) | |
배우자 | 루시 웹 헤이스(1831 ~ 1889) | ||
자녀 | 버처드 오스틴 헤이스(1853 ~ 1926) 제임스 웨브 쿡 헤이스(1856 ~ 1934) 러더퍼드 플래트 헤이스(1858 ~ 1927) 조제프 톰슨 헤이스(1861 ~ 1863) 조지 크룩 헤이스(1864 ~ 1866) 페니 헤이스(1867 ~ 1950) 스콧 러셀 헤이스(1871 ~ 1923) 메닝 포스 헤이스(1873 ~ 1874) | ||
학력 | 케년 칼리지 (B.A.) 하버드 대학교 법학대학원 (법학 / LL.B.)[1] | ||
종교 | 개신교 (감리회)[2] | ||
신체 | 키 176cm / O형(Rh-) | ||
소속 정당 | |||
문장 | }}}}}}}}} |
백악관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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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19대 대통령.대통령 선거 당시 선거인단에서 상대 후보인 새뮤얼 틸던을 1명 차이로 이기고 대통령이 된 인물로도 유명하다. 자세한 건 하단 선거 분쟁 참고.
2. 생애
1822년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엄격한 도덕주의자였던 어머니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이것은 헤이스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젊은 시절.
노르워크 신학교[3]를 거쳐 캐니언 대학을 간 그는 졸업생 대표가 될 정도로 성적이 뛰어났다고 한다. 대학을 마친 후엔 하버드 법학 대학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 후 변호사가 되었고 이때에도 그는 노예제 폐지 운동에 앞장섰다. 이즈음 미국-멕시코 전쟁이 터진다. 하지만 당시 그는 결핵에 걸린 상태였기에 참전하지 못했다.
전쟁 후 새로운 법률 사무소를 차리면서 명성이 높아진 그에게 1860년대 남북 전쟁이 찾아왔다. 여기서 그는 연방군에 자진입대하였다. 참고로 이때 헤이스의 부관이 윌리엄 매킨리였다. 전쟁 도중 부상을 입어 명예 제대한 그는 1864년 하원 의원이 되었다.
하원 의원 시절 그는 흑인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법을 갖춘 후 남부가 연방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민권법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 후 오하이오 주지사에 당선되었고, 2번 더 연임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1876년 대통령에 도전하게 되었고, 당시 그랜트 대통령의 측근들이 부패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부패정당이라는 오명을 벗을 만한 후보를 찾던 공화당은 도덕성을 내세우던 그를 후보로 추대하게 되었다.
2.1. 선거 분쟁
선거 결과 헤이스는 승부를 벌이게 되는데, 일단 전체 득표율에선 403만 표 밖에 얻지 못해 428만 표를 얻은 민주당의 새뮤얼 틸던에게 많이 밀렸고[4], 일부 주 선거가 끝나진 않았지만 확보한 선거인도 18명이나 적은 상황을 맞게 된다. 한편, 틸든은 184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함으로서 한명만 더 확보하면 과반수 확보가 눈앞이었다. 그러나 남부의 3개 주 사우스캐롤라이나(7명), 플로리다(4명), 루이지애나(8명)의 선거 승자가 결정나지 않은게 문제였다. 이것이 문제가 된 이유는 3개 주의 선거인을 모두 합치면 19명이었기 때문에 만약 이 3주가 헤이스의 것이 된다면 선거인단 1명 차이로 전세 역전이 가능했던 것. 거꾸로 말하면 틸든은 세 동네 가운데서 한 군데만 이기면 대통령이 되는거였다.그리고 1876년 선거인단 문제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는데, 공화당이 투표에서는 승리했던 오리건(3석)의 공화당 선거인단 중 1명이 위법 선거인단이라 교체 대상이었던 것이다. 원래 미국 대통령 선거인단은 연방, 주를 불문하고 공무원이 자리를 맡을 수가 없는데, 이때 오리건 공화당이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선거인단으로 하필이면 오리건 주 모 지역 우체국 국장을 선거인단으로 넣어놨던 것. 위법 선거인단이 있을 경우 교체권한은 각 주 주지사한테 있었는데, 하필이면 또 당시 오리건 주 주지사는 민주당원이었다. 당연히 민주당 소속 오리건 주지사는 이 위법 선거인단에 대해 대체 선거인단으로 민주당원을 넣으려고 했고, 안 그래도 선거인단 딱 1표가 아쉬웠던 새뮤얼 틸던 쪽이 당연히 선거인단 교체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오리건 주 선거인단만 교체되면 나머지 개표에 상관없이 당선 확정이니) 안 그래도 혼란스럽던 정국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근데, 3개 주 선거가 재개표와 재검표를 반복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결과가 다르게 나왔다. 수작업으로 개표한 거라 어느 정도의 오차는 있을 수 있다 해도 분명한 건 양측의 표 차이가 수작업의 오차 범위 안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플로리다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양 후보간 표차이는 1,000표도 되지 않았다! 결국 수십 번도 더 개표를 한 끝에, 결론이 난 건 대통령 취임식 이틀 전이었다.
결론이 난 경위를 살펴보자면, 수개표를 아무리 해도 결론이 안나자 양당은 각자 자기 측에 유리한 주장을 하며 정국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는데, 결국 이러한 양상을 해결하고자 특별개표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때 당시 개표위원은 민주당이 7명, 공화당이 7명씩 배정되고 당적이 없는 데이비스가 들어가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가 상원의원이 되면서 개표위원에서 빠지게 되었고 그 자리를 상원 다수당(47:19)인 공화당 소속이 채우게 되었다.[5] 당연히 결과는 8-7로 공화당에 유리한 주장이 반영되어 185-184로 헤이스가 이겼다고 선언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쟁점이 됐던 오리건 주 위법 선거인단 문제까지 오리건 주 주지사가 아닌 오리건 주 공화당 위원장이 대체 선거인단을 지명하도록 해버렸다.
이렇게 되자 당연히 남부는 폭발하고 만다. 당시 3주는 아직 연방군의 군정을 받고 있었던데다가 부정 투표 의혹까지 발생했던 상황이라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봐도 남부 입장에서는 충분히 도둑맞은 선거라고 주장할 법 한 결과였다. 이때 안티 세력은 헤이스의 이름인 "Rutherford"를 비꼬아서 "RutherFRAUD"(사기)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공화당 입장에서도 할 말이 아예 없는건 아닌게, 당시 남부에서도 백인들이 불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해 이때만 해도 공화당 지지가 높던 흑인들의 투표를 방해했기에, 흑인에 대한 투표 방해가 없었다면 새뮤얼 틸던이 선거인단이나 득표율이나 둘 다 깔끔하게 졌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한다. 현대의 한 예측에 따르면 불법적인 폭력이 없었을 경우 이들 주 3개 중 2군데에서 공화당이 이기고 1군데에서 민주당이 이겼겠지만 다른 주에서 공화당이 이겨서 헤이스가 정당하게 당선됐을 것으로 분석되기도 했다. Who Won the 1876 Election? Issue 9 of Buttons and Ballots, in Spring 1997.
결국 남부에서는 폭동(이라고 쓰고 반란이라고 읽는 것)이 발생하려는 등 상황이 심각해지자, 헤이스는 타협안을 내놨다. 그 내용이란...이것을 1877년의 타협이라고 하며, 헤이스는 재선에 출마하지 않으면서 약속을 지켰다. 허나 이때 남부에서 연방군이 철수해버리면서 방치된 남부 흑인들은 이후 1950~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이 촉발되기 전까지 다시 권력을 획득하기 시작한 남부백인들이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주법을 발의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박해당하는 비극을 겪게 되고 북부로의 탈출이 가속화되면서 남부는 점점 쇠락하게 된다.
이때문에 다른 대통령들과 달리 취임 선서를 취임 전날 백악관에서 비공개로 했다. 원래 취임 선서는 취임 당일 공개 행사로 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것을 깬 것이다.
2.2. 대통령 시절
우선 상기한 타협대로 남부의 경제 기반 시설들을 재건하였다. 그렇지만 흑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시도는 불발에 그치게 되었는데, 공화당이 위의 선거 결과 때문에 민주당에 기세가 눌리게 됨으로서 급진파들이 퇴조하고 온건파격인 헤이스의 노력도 실질적으론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그 밖에 헤이스가 마주하게 된 최대의 문제는 노동자 운동 문제였다. 형편없는 저임금과 가혹한 노동(장시간 노동, 산업재해)에 시달리던 철도 노동자들이 회사의 가혹한 조치[7]에 반발하여 파업이 발생하였다.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시작된 파업은 빠르게 확산되어 결국 헤이스는 군대를 동원해 간신히 이들을 진압할 수 있었다.
허나 덕분에 헤이스는 노동 운동에는 무심했던 도덕적 온정 대통령이라고 까이기도 한다. 파업은 단순한 철도 노동자의 파업이 아닌 다른 많은 노동자들이나 사회에 불만을 가진 시민들이 대거 가담하였기에 더욱 빠르게 확산되었던 것.[8] 이 일 이후 노동자들에게 뜨거운 맛을 본 철도회사들은 한동한 임금 삭감을 시도하지 않았다.
한편, 공무원 제도를 시험으로 뽑게끔 바꾸려고 시도하였는데, 이땐 실패하였지만 이는 훗날 펜들턴 법을 통과시키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외에도 은화제도[9]나 중국인 이민 제한[10]을 둘러싼 의회와의 갈등 등으로 시름하다 임기를 마쳤다.
2.3. 퇴임 이후
상기된 타협안에 따라 재선에 출마하지 않고 가필드 후보를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뜬금없다면 뜬금없게도 1884년 선거에서는 공무원 개혁을 주장하는 민주당 그로버 클리블랜드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11]퇴임 후에는 자선 단체를 설립하고, 특히 교육 관련 사업에 집중했다. 자신이 창립을 주도했던 오하이오 주립대의 이사 등 몇몇 공직을 거친 후 1893년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에 한 말은 4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이제 루시가 있는 곳으로 가겠군...(I know I am going where Lucy is)"이었다고 한다.
작가 마크 트웨인은 그를 "날이 갈수록 위대함이 더하는 인물"이라고 극찬하기도 했으나, 현재 미국의 대통령 인기 순위에서는 중위권~중하위권을 오가고 있다. 상기한 대선 당시의 난리통 덕에 정통성이 약한 대통령이라 현직 당시에도 권위가 잘 서지 않았고, 사망한 지금도 당시 그의 행적보단 대통령 선거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회자되는 영고라인의 일원으로 더 유명하다.
현재 미국에서 대체로 헤이스에 대한 평가는 '딱히 잘하진 않았는데 그렇다고 딱히 못하지도 않았다' 정도라고 볼 수 있겠다. 그야말로 무난함의 극치. 사실 정치인이, 특히나 한 국가의 수장이 평균적인것도 쉽지 않다는 점에서 대단하다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인물.
3.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수) | 당선여부 | 비고 |
1864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오하이오 제2구 | | 10,422 (58.68%) | 당선 (1위) | 초선 |
1866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11,459 (56.03%) | 재선 | |||
1867 | 미국 주지사 선거 | 오하이오 | 243,605 (50.31%) | 초선 | ||
1869 | 미국 주지사 선거 | 236,082 (50.74%) | 재선 | |||
1875 | 미국 주지사 선거 | 297,817 (50.25%) | 3선[12] | |||
1876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4,034,142 (47.92%, 185인) | 초선 |
4. 여담
헤이스는 엄격한 도덕주의자로 유명했다. 그가 중국인 이민 제한을 거부한 것도 그들을 토사구팽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 또한 그의 부인 루시 헤이스도 남편 못지 않은 인물로 노예제 폐지와 금주 운동에 앞장섰으며, 영부인이 된 이후에는 백악관에 절대 술을 들이지 못하게 하고 레모네이드를 대접하였기에 얻은 별명이 레모네이드 루시였다. 헤이스 재임기에 한 파티가 끝나자 국무장관인 윌리엄 애버츠라는 사람은 "너무 훌륭한 축제였습니다! 물이 샴페인처럼 흘러 넘쳤어요!"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루시 본인은 "저는 술보다는 레모네이드가 더 좋다고 권장했을 뿐이지 강요한 적은 없는데 왜들 이러시죠? 내가 너무 했나?"란 식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아내 루시 헤이스는 최초로 퍼스트 레이디라는 호칭으로 불린 대통령 부인이기도 하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음성기록을 남긴 최초의 대통령이다. 그러나 헤이스의 음성 기록은 소실되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미국 대통령의 음성 기록은 벤저민 해리슨의 음성이다.
헤이스는 평생 동안 일기를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남북전쟁 당시 부상으로 죽을 뻔한 상황에서도 쓴 일기가 남아있다고.
나이가 들면서 수염을 길렀는데, 링컨과 그랜트 다음으로 수염을 기른 미국 대통령이다. 이후 클리블랜드까지 연속으로 수염을 기른 대통령이 취임.
루니 툰의 최신작에서 흉상, 조각상 등 여러가지 까메오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는 선거부정으로 당선된 자로만 기억되지만 그래도 그를 기억해 주는 나라가 있으니 파라과이이다.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의 국경분쟁을 파라과이에게 유리한 쪽으로 중재해 준 덕분에, 파라과이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주(州), 도시, 축구팀 등이 있고 아직도 기억된다.
19세기에 사망한 마지막 대통령이다.[13]
젊은 윌리엄 매킨리는 남북전쟁 당시 헤이스의 부하였고, 이후로도 가까운 관계를 지속했다. 매킨리의 정치 커리어를 도와준 멘토가 헤이스였고, 매킨리 또한 헤이스의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 직접 뛰며 헤이스를 도왔다. 헤이스의 장례식은 당시 오하이오 주지사였던 매킨리가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함께 주관했다.
5. 매체에서
광란의 수족관에서 설정상 그의 코인 노즈트라다무스라는 펫으로 등장한다. 능력은 1$짜리 콧물을 흘리고 구피가 그걸 먹으면 노즈트라다무스로 변한다. 이외에도 수족관에 에일리언이 쳐들어오려고 하면 일정 확률로 재채기를 해서 막아주기도 한다.[1] 당시에는 법무박사 학위였으며 1960년대 이후로는 J.D.로 변경되었다. 현재에는 미국에선 쓰이지않는 학위이며 국제적으로 보면 법학학사로 쓰이는 국가들이 존재해서 헷갈릴 수 있다.[2] 감리회뿐만 아니라 장로회에도 번갈아가며 출석했다.[3] 참고로 감리회 계열이다. 또한 헤이스 본인도 감리회를 믿었다.[4] 그냥 밀린것도 아니고 틸던은 이 선거에서 전체 투표수의 과반수를 획득했다.(득표율 50.9%) 현재까지 미국에서 득표율이 앞선 후보가 낙선한 적은 다섯번이 있지만 득표율 50%를 넘기고도 대통령이 못된 사례는 틸던이 유일하다.[5] 사실 상원이 다수당이어서만도 아니고, Justice(법사위)에서 더이상 선임할 민주당 의원이 없었다는 문제가 있었다.#[6] 당시 남부 백인들은 연방에 충성 서약을 하지 않으면 참정권 등을 얻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7] 요금은 크게 올리고 임금은 확 깎았다.[8] 참고로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보낸 군대의 지휘관이 바로 다음 선거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해 낙선한 윈필드 핸콕이었다.[9] 1873년 주화법으로 은화 생산이 중단됨으로 생긴 디플레이션으로 농부, 노동자의 생활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자 의회는 필요한 만큼 돈을 찍어낼 수 있는 은화제도를 주장했지만 헤이스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며 거부했다.[10] 당시 의회에서는 급증하는 중국인(쿨리)들의 이민을 막고자 하였지만, 헤이스가 거부함으로써 이 법은 아서 때 시행되었다.[11] 이 이야기는 그랜트의 3선을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문서 참조.[12] 1877.3.2. 미국 대통령 취임을 위해 사직[13] 후임인 제임스 A. 가필드와 후후임인 체스터 A. 아서는 헤이스가 죽기 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