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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 Ulysses Simpson Grant | ||
출생 | 1822년 4월 27일 | ||
오하이오주 포인트플레센트 | |||
사망 | 1885년 7월 23일 (향년 63세) | ||
뉴욕주 윌턴 | |||
묘소 | 그랜트 묘지 | ||
재임기간 | 제18대 대통령 | ||
1869년 3월 4일 ~ 1877년 3월 4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 아버지 제시 루트 그랜트[1] 어머니 해나 심슨 그랜트[2] | |
배우자 | 줄리아 그랜트 | ||
자녀 | 프레더릭 그랜트 율리시스 그랜트 주니어 넬리 그랜트 제시 루트 그랜트 2세 | ||
학력 | 미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 ||
종교 | 개신교 (감리회 / 감리교 감독교회) | ||
신체 | 키 173cm / 체중 108kg | ||
소속 정당 | |||
군사 경력 | |||
임관 | 미국 육군사관학교 (1843년 임관) | ||
복무 | 미국 육군 | ||
1839년 ~ 1854년 1861년 ~ 1869년 | |||
최종 계급 | 대원수[3] (미합중국 육군) | ||
주요 참전 | 미국-멕시코 전쟁 남북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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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공식 초상화[4] |
1. 개요
Although a soldier by profession, I have never felt any sort of fondness for war. And I have never advocated it, except as a means of peace.
나는 군인이 직업이었지만, 전쟁에 어떠한 호감도 가진 적이 없다. 그리고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닌 전쟁을 옹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국의 제18대 대통령.나는 군인이 직업이었지만, 전쟁에 어떠한 호감도 가진 적이 없다. 그리고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닌 전쟁을 옹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북군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때문에 남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로버트 E. 리와도 자주 비교된다. 대통령 시절에는 장군 시절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미국을 분열의 위기에서 구하고, 재건의 기반을 닦은 점을 인정받아 지금도 미국 50달러 지폐 모델로 기념되고 있다. 생전 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5]였으나, 사후 137년이 지난 2022년에 대원수(General of the Armies)로 추서되었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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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3. 기타
- 부부 사이는 매우 좋았다. 자식들과도 마찬가지. 가족이 없으면 외로움을 많이 탔다고 하며 그랜트가 부인에게 심리적으로 많이 의지를 했다고 한다. 부인은 그랜트가 사업 실패를 연속해서 할 때도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완벽한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매우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하는데 한번은 계단을 올라가던 아들이 내려오던 그랜트와 마주치자 장난을 걸었다고 한다. 그러자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어린 친구에게 질 수 없지" 하면서 레슬링을 해서 아들이 이기게 해줬다고 한다. 가족에게 굉장히 따뜻했던 모양. 참고로 그랜트의 가족사진에 찍힌 그랜트의 부인은 정면이 아니라 옆으로 보는 포즈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백악관에서 사진을 찍을 때도 그런 포즈를 취했는데, 약간의 사시가 있어 본인이 그런 포즈를 고집했다고 한다.
- 총각 시절 영부인이 되는 줄리아 덴트 그랜트와 연애할 무렵에 마차를 타고 가다가 비가 마구 쏟아지는 상황에서 개울을 건너야 했는데, 줄리아는 위험할까봐 두 손으로 그랜트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랜트는 대뜸 이런 말로 프러포즈를 했다."바라건대, 평생 내게 매달리면 어떻습니까?(I wonder if you would cling to me all my life?)"
- 덥수룩한 수염, 꾀죄죄한 인상과 더불어 덩치도 제법 있는 편이라 좀 험상궂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 좋고 순진하고 여린 성격이었던 듯 하다. 상기했듯 아내, 자녀들과 사이가 매우 좋았으며, 가족들이 곁에 없으면 그리움 때문에 술로 날을 지새우기도 할 정도였다. 또 사람을 너무 잘 믿는 탓에 측근들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부패 스캔들로 뒤통수 맞은 적도 많다. 말년에도 이런 순진한 성품으로 인해 친구 보증을 잘못 섰다 빚더미에 올라 후두암 걸린 상태에서도 가족들을 위해 자서전 집필을 한 것을 보면 인상과는 상당히 다른 인품.
- 친구 중에 이로쿼이 원주민인 엘리 파커가 있었다. 그래서 남북전쟁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참전이 거부되었지만 엘리 파커는 그랜트 덕에 보좌관으로 남북전쟁에 참가할 수 있었으며, 그랜트의 대통령 재임기간에 인디언국 국장으로 재임하며 원주민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과 독특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랜트는 상기했듯 휘하에 인디언 부관을 둘만큼 반인종차별주의자면서 나쁘게 말하면 소심하고, 좋게 말하면 가족과 주변인들을 따뜻하게 대하는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반면, 셔먼은 입이 상당히 거친 인종차별주의자면서[7] 성격도 다혈질이고 무언가 배배꼬인 그야말로 사이코틱한 성격을 가진 양반이었다. 허나 둘은 이런 상극점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신뢰하여[8] 그랜트는 셔먼에게 서부전선의 전권을 맡겼으며, 대통령 취임 후에는 셔먼을 군고위직에 임명했다. 셔먼 역시 상관인 그랜트를 충실히 보필하여 서부전선을 그야말로 초토화시키며 그랜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고, 그랜트가 대통령에서 퇴임할 때까지 그를 상관으로 모셨다. 이는 두 사람이 전장을 함께 누빈 전우였기 때문에 가능한 측면도 있었다.
- 자서전 집필을 통해 인연을 가진 마크 트웨인과는 다른 일화가 있다. 마크 트웨인이 무명 작가이던 시절 상원의원인 친구의 소개로 대통령직에 갓 취임한 상태의 그랜트와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트웨인은 상대가 대통령인데다 그랜트의 무뚝뚝한 대응에 지나치게 긴장해서 "어... 참으로 당황스럽네요."하며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다. 이후 1879년 그랜트가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것을 환영하는 시카고의 행사장에서 다시 트웨인과 그랜트가 만나게 되었는데, 인사 대신 그랜트가 한 말은 "저는 당황스럽지가 않는데, 지금 당신은 어떤가요?"였다. 트웨인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대로 말해 놀려먹은 것. 그래서 트웨인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그랜트가 상당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참고로 트웨인은 어릴 땐 뭣도 모르고 지역대립에 휩쓸려 남부군에 잠깐 소속되어 참전하기도 했던 인물로, 탈영한 이후 나이가 들면서 당시 북부 연방의 정의가 옳았다는 것을 깨닫고 이후 그랜트의 회고록을 도와주며 생애 마지막 조력자가 된다.
- 미국사의 주요 인물들이 그러하듯, 그의 평전도 나와있다. 아마존닷컴 1,104쪽이라는 육중한 분량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그만큼 내용은 굉장히 충실하다.
- 재임 중 체포되었다는 설이 있다. 사유는 마차 과속운전. 흑인 경찰관 윌리엄 H. 웨스트(?~1915)가 마차 과속운전을 단속하던 중 그랜트의 마차를 적발했다. 첫날에는 경고만 주고 넘어갔으나 다음날 또 과속운전이 발각되자 결국 현직 대통령을 과속운전으로 체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다만 기소까지 가지는 않았다. 다만 최초 기사가 1890년대에나 나온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좀 의심되는 썰이라는 모양이다. # 만약 설이 사실이라면 최초로 재임 중에 체포된 대통령인 셈이다.[9] 20세기 후반 어느 시점[10] 이후로는 시크릿 서비스의 경호 대상인 미국 전, 현직 대통령의 공도 운전이 금지되면서, 현직 미국 대통령이 교통 법규 위반을 사유로 체포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 사실 현직 미 육군 원수 신분이던 1866년에도 마차 과속운전 혐의로 두 차례 체포되었던 경력이 있으며, 위의 대통령 시절 썰과는 다르게 당대의 기록이 확실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승마술이 뛰어났던만큼 말을 빠르게 몰고 가고 싶었던 모양.
- 퇴임한 후 어떤 연회에 초청되어 길을 가고 있었는데 그날 비가 왔다.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행인이 우산 없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우산을 씌워 주었다. 마침 그 행인도 그랜트가 초대받은 연회에 가던 사람이라 즐겁게 대화를 하며 연회장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같이 가는 사람이 그랜트인 것을 몰랐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나는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을 본 적이 없는데 오늘 그 연회에 가는 것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요.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긴데 난 그랜트 장군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하오." 그러자 그랜트는 화를 내기는커녕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웃어넘겼다.
- 라이스 푸딩을 매우 좋아했다.
- 대단한 애주가라서[11] 술주정뱅이로 찍히곤 했다. 실제 작전이 없을 때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말 그대로 깡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남부연합이 승리하는 대체역사물에서는 주로 술주정뱅이로 일생을 마치는 역으로 나온다.
- 평상시에는 꾀죄죄한 행색으로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덕분에 잘 씻지도 않고 대충 기른 지저분한 수염에다가 술에 절은 추레한 꼴을 많이 보였다. 게다가 복장관리도 안하고 청결도 가뿐하게 무시해서 술에 취한 채 더러운 군복과 진흙투성이인 장화를 신고 그대로 쓰러져 자기도 했다. 작전 날이라고 다를 것은 없어서 술에 취하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똑같았다고 한다. 남북전쟁 당시의 라이벌이었던 명장 로버트 E. 리와도 멕시코 전쟁 시절에 만난 적이 있었으나 리는 그랜트를 그냥 술주정뱅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했던 것 같다. 혹은 이때 리가 그랜트의 복장불량을 지적했다는 역사가도 있다. 반면에 그랜트는 리와 만났던 날을 잊지 못할 순간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훗날 로버트 E. 리와 다시 만나 그로부터 항복을 받는 순간을 그려놓은 기록화도 여럿 있는데, 말끔히 차려입은 리와는 대조적으로 꾀죄죄하고 추레한 행색을 한 경우가 많아 그림만 보고 있으면 어느 쪽이 항복을 하고 있는 쪽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다만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봐도 크게 드문 일은 아닌데, 패전한 쪽에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복장이나 예법에 더 신경을 쓰고, 승전한 쪽에서는 패전한 쪽의 자존심을 꺾기 위해 어떤 경우는 고의적으로까지 복장이나 예법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생각보다 흔하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일본에서 승전국인 미국측 대표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가 일부러 일본 국민들에게 패전했음을 확실히 각인시켜주기 위해 정복도 아닌 넥타이도 안 한 열대 근무복 차림으로 말쑥한 양복을 입은 천황 히로히토를 맞은 사례가 유명하다.[12] 물론 율리시스 그랜트의 경우엔 그의 성정상 고의적으로 꾀죄죄하고 입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사실 당시 그랜트는 전쟁 마무리 문제를 놓고 신경을 너무 쓴 나머지 심한 두통을 앓다가, 항복을 타전하는 리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급히 달려온 거라 군복을 갈아입을 틈도 없었다. 그리고 흙투성이 길을 말을 타고 달려왔으니 흙먼지를 뒤집어쓴 것은 당연한 노릇. 그 점 외에는 그림에서 보듯 육군중장의 정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예법을 어긴 것은 아니다. 사실은 리도 전쟁 중에 예복을 차려입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남군 장교들은 대부분 소매에 금줄을 수놓은 화려한 군복을 입었으나, 정작 총사령관인 리는 수수한 민간용 프록코트에 계급장만 달고 다녔기 때문에 종종 민간인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항복할 때만 정식으로 예복을 갖춰입었던 것이다.
- 7대 대통령인 앤드루 잭슨이 퇴임한 1837년부터 34대 대통령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취임을 시작한 1953년까지 정상적인 경로로 대통령이 되고 재선에도 성공하고 임기도 건강하게 마친 인물은 그랜트 대통령이 유일하다. 일단 정상적으로 취임했지만 재선을 못한 대통령이 꽤 있고, 나머지도 에이브러햄 링컨은 재선 후 얼마 안 돼 암살당했고,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임기를 2번으로 나눴으며, 윌리엄 매킨리도 링컨처럼 재선 후 얼마 안 돼 암살당했다. 그리고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투표가 아닌 매킨리의 뒤를 이어서 대통령이 되었으며, 우드로 윌슨도 재임 후기에는 반신불수가 되어 아내인 이디스 윌슨이 직무를 대신 수행했다. 그리고 캘빈 쿨리지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워런 G. 하딩 사망 이후 그의 뒤를 이어서 대통령이 되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재선, 심지어 4선에도 성공은 했지만, 4선 이후 얼마 안 가 뇌출혈로 사망했고, 해리 트루먼도 그의 뒤를 이어서 대통령이 되었다.[13]
- 1865년 4월, 그랜트는 링컨과 동행하여 포드 극장에 가려고 했으나, 아내인 줄리아 그랜트가 평이 안좋은 링컨의 아내 메리 토드 링컨을 싫어하여 그가 가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랜트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이 이유를 대놓고 링컨에게 말할 순 없으니 "자식들 졸업식이 있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결국 그랜트의 자리는 육군 소령이었던 헨리 래스본 소령이 대신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미국을 뒤흔든 희대의 대사건이 발생했고, 링컨 대통령은 세상을 떠났으며, 본인의 자리를 대신한 래스본 소령은 평생 링컨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정신병에 걸려 자식과 아내를 칼로 찌르는 암담한 짓[15]을 한 후에 정신병원 독방에 30년 동안 갇혀있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만일 그랜트가 그날 그곳에 갔다면, 그가 대통령으로 남은 지금의 역사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 역대 미국 대통령 인기 순위를 보면, 옛날과 오늘날의 순위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나는 대통령이다. 1913년부터 지폐 모델에 쓰일 정도로 '군인 그랜트'의 업적은 일찍부터 인정받았음에도 '대통령 그랜트'는 20세기 대통령 평가 지표에서는 뷰캐넌, 피어스[16], 앤드루 존슨, 워런 하딩[17] 등과 함께 꼴찌 라인이었을 정도로 평가가 매우 나빴으나[18][19], 21세기 들어 인종 해방 등에서 재평가되는 측면이 있어서 순위가 중위권 이상까지 많이 올라왔다.[20] 2024년 APSA 학회 회원들 조사에서는 2015년 조사 대비 무려 9계단이 올라 17위에 랭크되었다. 애초에 재선에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당대 사람들에게는 그랜트가 최악의 대통령으로 찍히진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21]
- 1860년에 노튼대학 창립자인 호레이스 노튼에게 시가를 한 대 선물한 적이 있다. 노튼은 그 시가를 기념으로 보관했는데, 그 시가를 물려받은 손자 윈스테드가 1932년 노튼대학 동창회에서 조부와 그랜트의 교분을 강조하면서 시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시가는 폭발했다. 알고 보니 해당 시가는 불을 붙이면 작은 폭발이 일어나도록[22] 만들어진 폭탄 시가였던 것. 다만 이 일화가 사실이 아니거나 좀 과장되었다는 설도 있다.
-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생전에 아들이 대통령이 된 모습을 본 후 사망했다. 아버지 제시 루트는 아들의 취임 2년 후인 1871년, 어머니 해나 심슨은 아들의 사망 2년 전인 1883년 사망했다.[23]
4. 매체에서
쥘 베른의 소설 신비의 섬과 지구에서 달까지는 남북전쟁 당시와 이후를 다루기 때문에 언급된다. 주인공들의 상관이나 동업자[24]라서 좋게 묘사되는데 실제로 쥘 베른이 노예 해방론자였기 때문이다. 신비의 섬 경우 지명에 그랜트 장군의 이름을 딴게 많다.영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에서 주인공들의 상관으로 그랜트 대통령이 등장하며, 미친 과학자에게 미합중국의 안전을 위협받는다.
죽은 자의 제국에서는 전직 미국 대통령으로 등장. 남북전쟁 때 미국에서 발전한 시병(屍兵) 기술을 각국에 판매하려는 목적 겸 '빅터의 수기'를 손에 넣기 위해 아달리 릴리스를 비서로 대동하고 해외를 순방한다. 애니메이션판에서는 시체 폭탄에 의해 폭사한다.
2012년 영화 링컨에서는 자레드 해리스가 연기했다. 주인공이 수정헌법 제13조를 통과시키기 위해 애를 쓰는 에이브러햄 링컨인만큼 어디까지나 조연이지만 남부연합에는 무조건 항복을 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링컨 대통령에겐 빠른 종전을 건의하는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 미디어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애포머톡스에서 남부연합 북버지니아군 사령관 로버트 리에게 항복을 받는 모습도 나온다.
2018년 스티븐 스필버그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그랜트 관련한 전기물 영화를 제작 준비 중이라는 기사가 떴다.# 이후 영화는 아니지만 2020년 디카프리오가 제작에 참여한 다큐 형식의 일대기가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되었다.
앤트맨과 와스프에서는 앤트맨이 비행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몸이 작을 때는 수개미를 타고 다니는데, 이때 그는 자신이 타고 다니는 개미 중 한 마리한테 율리스 S. 그래-앤트(영문판은 Ulysses S. Gr-Ant)라는 명칭을 지어준다. Grant(그랜트) 안에 Ant(개미)가 들어간 것을 이용한 것.
비디오 게임 폴아웃: 뉴 베가스의 최종 보스인 율리시스의 이름은 이 사람에게서 따온 거다. 이 게임의 배경이 핵전쟁에서부터 200년 후인데도 남북전쟁과 율리시스 그랜트를 아는 걸 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이전의 미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참고로 폴아웃: 뉴 베가스의 율리시스가 자신의 이름을 율리시스라 지은 이유는 그리스 고전의 오디세우스[25]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까지도 염두에 둔 것. 핵전쟁으로 문명이 사라지고 200년이나 지났는데 기원전의 고전과 19세기의 장군, 20세기의 문학작품을 기억하는 걸 보면 상당한 지식이다.
대체역사소설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에서는 남북전쟁이 일찍 끝나서 대통령 자리를 노릴 엄두를 못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전임 대통령으로 신미양요 사건에 대해 조선사절단에게 사과를 할 정도로 인품이 높은 사람으로 등장한다. 군인으로서 희생을 높게 치는 사람이라 신미양요 당시 조선 군인들의 희생을 높게 산다. 원래 역사대로 2007년에 돌려주는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를 돌려주는데 협조한다.
5. 둘러보기
미합중국군 원수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대원수 General of the Armies / Admiral of the Navy | |
육군 Army | 조지 워싱턴 | |
율리시스 S. 그랜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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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Navy | 조지 듀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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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Air Force | 헨리 아놀드 | |
* 헨리 아놀드의 원수 진급 당시 공군은 육군 항공대였다. | }}}}}}}}} |
Radical Republican Leaders 공화당 급진파 지도자들 | |||
제18대 미국 대통령 | 제5대 애리조나 준주 주지사 | 매사추세츠 주 상원 의원 | 펜실베이니아 주 하원 의원 |
율리시스 S. 그랜트 | 존 C. 프리몬트 | 찰스 섬너 | 새디어스 스티븐스 |
[1] 아들의 대통령 취임 2년 후인 1871년 사망했다. 향년 79세.[2] 아들의 사망 2년 전인 1883년 사망했다. 향년 84세.[3] 생전 예편 당시 계급은 원수였으나 2022년 NDAA에 따라 대원수로 사후 승진.[4] 1875년 제작.[5] 그랜트가 받을 당시에는 General이라는 계급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대장'의 계급에 서임되었다.[6] 1위는 175kg을 기록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7] 다만 항목에도 있듯 인종차별적인 정책엔 반대하는 모순적인 모습도 보인다.[8] 한 예로 샤일로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남군의 공격 정보를 알고도 제대로 대비하지 않아 큰 피해를 본 책임 역시 있는 셔먼을 그랜트는 감싸줬고, 이에 셔먼은 감동 받았는지 상관 그랜트를 쭉 따르게 된다. 또 공세 전략을 선호하고 총력전 개념을 이해하는 등 둘의 전략적 관점이 유사했던 것도 파트너십을 키웠다.[9] 2022년 12월 7일 페루의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이 내란 혐의로 탄핵 7분 전 체포되고 2025년 1월 15일 대한민국의 윤석열 대통령 역시 직무정지 상태에서 내란 혐의로 발부된 체포영장이 집행되면서 유일한 사례는 더 이상 아니게 되었다.[10] 명확하게 언제부터인지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로 미국 전현직 대통령에 대한 경호 수준이 대폭 강화되었다는 점, 린든 B. 존슨 대통령까지는 재임 도중 공도에서 직접 운전을 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로널드 레이건 재임 시기 들어서는 명확하게 대통령의 공도 운전이 금지되었다는 기사가 확인된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1970년대 즈음으로 추정 가능하다.[11] 당연히 중요한 군사작전 때는 마시지 않았다.[12] 물론 패자 측이라도 예법에 신경 안쓰는 경우 역시 있긴 하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 싱가포르 전투 당시 영국군의 항복 사절이 (엄연히 군복이긴 하지만) 반바지를 입고 유니언잭(영국 국기)도 어깨에 덜렁덜렁 메고 가는 사진이 찍히는 바람에 "국가적 망신"이라며 해당 사령관이 비판을 받은 적도 있다.[13] 게다가 나중에 나온 대통령들 중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임기를 마친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가 유일하다. 왜냐면 린든 B. 존슨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그 뒤를 이어서 대통령이 되었고, 리처드 닉슨은 2번째 임기 도중 물러났으며, 로널드 레이건은 임기 도중 암살 미수를 겪어서 부통령인 조지 H. W. 부시가 잠시 대통령직을 맡은 적이 있었고, 빌 클린턴은 2번째 임기 도중 탄핵소추를 겪었고, 조지 W. 부시는 임기 도중 질식사고에 걸려서 부통령인 딕 체니가 잠시 대통령직을 맡은 적이 있었고, 도널드 트럼프는 클리블랜드와 마찬가지로 임기를 나눠서 재선했고 동시에 두 차례 탄핵소추를 겪었으며 여기서 언급되지 않은 대통령들은 모두 재선에 실패.[14] 정확히는 애리조나의 그랜트 요새에서 따온거지만 해당 요새 역시 본 문서의 대통령 이름에서 따온거니 사실상 본 문서의 대통령 이름에서 따온거나 다름없다.[15] 그의 아내는 칼에 맞아 결국 사망했다.[16] 20세기에는 그랜트보다도 평가가 좋았다.[17] 20세기 기록된 모든 평가마다 항상 꼴찌였다.[18] 이에 대해 그랜트 옹호론자들은 20세기 영향력이 컸던 일부 친남부 역사가들에 의한 일종의 남부역사 미화(이른바 '잃어버린 대의'-노예제 언급은 줄이고, 주의 권리와 독립성을 위해 싸웠다는 식으로 서사 바꿔치기. 리 장군 신화는 덤.)가 그랜트의 영향력을 축소시켰다고 말한다. 이들이 그랜트에 덧입힌 전쟁 도살자, 술주정뱅이, 부패인사 기용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효과적으로 먹혔다는 것이다.[19] 사족으로, 국내외적으로 존경받는 위인임에도 대통령 시절 평가가 나쁜 경우로는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가 있다. 바웬사는 자유노조를 이끌며 폴란드의 민주화는 물론 동구권 붕괴의 도화선을 붙인 유명 민주화운동가였지만, 대통령이 된 후에는 체제전환기에 무력하게 대응했다가(민주화운동 시절 목표와 정반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쳤다) 민주화 이후 첫 총선에서 (투표로 얻을 수 있는) 모든 의석(하원, 상원 의석 중 상원 1석 빼고 다 자유노조가 얻었다)을 얻었던 자유노조의 의석을 2차례의 선거에서 죄다 날려먹고 극단적인 여소야대 의회(여당 계열 의석이 전체의 10% 미만에 공산당 계열 연정은 전체의 2/3에 근접했다고 한다)와의 갈등까지 겪으며 지지율 3%까지 찍고 (민주당에 대한 반감 버프로 재선 성공까지 했던 그랜트와 달리) 공산당의 후예 소속 후보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에게 단임 정권교체를 당했다.[20] 2020년 제작된 그랜트 관련 히스토리 채널 영상 댓글에서도 "그랜트 장군이 마침내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어서 너무 기쁩니다. 이 이야기는 길고 길어요. 오래전에 나왔어야 했어요!", "마침내 그랜트가 끔찍한 지도자였다는 신화가 파괴되었습니다. 이 남자는 연방을 두 번이나 구했습니다. 장군으로서,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등의 재평가를 환영하는 글들이 있다.[21] 다만 일각에선 '대통령' 그랜트의 국정수행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다기보다는 '전쟁영웅' 그랜트에 대한 개인적 인기와 이에 대비되는 남북전쟁의 원흉 민주당의 낮은 인기가 작용했을거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민주당은 북부, 남부민주당이 갈라지는 등 고생하다가 1869년 앤드루 존슨 퇴임 이후 무려 16년 후인 1885년에야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배출할 수 있었고, 사실 이후에도 20세기 초까진 잘 집권하지 못하는 비주류 정당으로 고생해야 했다.[22] 해당 시가 등, 대부분은 위험하지 않은 장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허나 살상용 폭탄 시가도 존재했다고 하는데, CIA가 피델 카스트로를 사살하기 위해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폭탄 시가를 만든 게 그 예시.[23] 공교롭게도 그랜트 등과 함께 현직 신분으로 체포된 국가원수로 꼽히는 윤석열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생전에 아들이 대통령이 된 모습을 지켜봤다. 아버지는 아들의 대통령 취임 1년 후인 2023년 사망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내란우두머리가 되어 탄핵되는 모습까지 살아서 지켜봤다. 다만 90대 고령이라 건강이 염려되어서인지 가족들이 윤석열의 비상계엄 이후 소식은 일부러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참고로 대통령 그랜트 체포설은 상기되어있듯 설일 뿐이다. 실제 사례로는 윤석열 외 페루의 페드로 카스티요가 있는데, 둘 다 0%p대 격차로 정말 아슬아슬하게 당선된 후 극단적인 여소야대와 10%까지 찍은 낮은 지지율을 타파하겠다고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 2시간 안에 제압당하고 현직 신분으로 체포, 탄핵되었다.[24] 신비의 섬 주인공들은 남군에게 잡혔다 탈출한 북부인들이고, 지구에서 달까지 주인공들 다수는 북부 대포제작자다.[25] 영어로는 Ulysses라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