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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필드 스콧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윈필드 스콧
Winfield Scott
파일:윈필드 스콧 장군.jpg
출생 1786년 6월 13일
미국 버지니아 딘위디 카운티
사망 1866년 5월 29일 (향년 79세)
미국 뉴욕주 웨스트포인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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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윌리엄 & 메리 대학교(단기 재학)
직업 군인, 정치인
소속
서명
파일:Winfield_scott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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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정치인.

미영전쟁부터 미국-멕시코 전쟁, 남북전쟁 초기까지 미국 육군의 핵심 인물로서 여러 중책을 맡은, 남북전쟁 이전 시기 미국을 대표하는 장군이다. 특히 미멕전쟁에서 육군 총사령관으로서 재커리 테일러와 함께 승전에 크게 공헌했고,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총사령관으로서 남부연합의 해안을 봉쇄하고 미시시피강을 장악하는 ‘아나콘다 계획’을 대전략으로 내세워 연방의 재통일에 기여했다.

정치에도 관심을 보여 여러 번 휘그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노렸고, 마침내 1852년 휘그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지만 남북갈등으로 인한 휘그당 당내 분열의 여파로 프랭클린 피어스에게 패배했다.

2. 생애

1786년 버지니아의 대농장주이자 미국 독립 전쟁 참전용사 윌리엄 스콧의 아들로 태어났다. 윌리엄 & 메리 대학교를 다니다가 곧 학교를 떠나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고, 버지니아 민병대에서 군사 경력을 쌓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영국이 대서양 무역 봉쇄를 강화하고 미국이 피해를 입자 미국은 군사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스콧은 22세가 채 되기 전에 가족 연줄을 활용하여 확대된 군대에서 포병 대위가 되었다. 스콧은 당시 미군 장교 및 사병들의 수준에 매우 실망하고 자신의 부대에 엄격한 훈련 프로그램을 시행했으며, 상관 제임스 윌킨슨 장군과 갈등을 빚었다. 윌킨슨에 대한 모욕 혐의로 징계를 받기도 하고 윌킨슨의 친구와 결투까지 갔지만, 스콧의 윌킨슨 공격은 군 내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후 1년 동안 군사와 법률을 공부하며 안식년을 가졌다.

1812년 미영전쟁이 발발하자 스콧은 중령으로 진급했고 영국령 캐나다 공격 작전에 참가했다. 스콧은 증강된 영국군에 밀려 포로가 되었고, 영국군에게 잘 대접받았지만 모호크 부족에게 죽을 뻔하기도 했다. 11월 말 포로 교환으로 풀려난 스콧은 대령이 되어 포병연대장이 되었고, 포트 조지 요새를 영국군으로부터 점령하는 공을 세웠다. 1814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다시 캐나다 침공에 나섰고 치파와 전투에서 영국 정규군을 상대로 의미있는 승리를 거두어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받았다.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연방 육군 총사령관이었고, 전쟁 초기에는 주로 육군을 확장시키고 훈련하는 행정적인 업무를 맡았다. 이후 전쟁을 끝내기 위해 멕시코만의 베라크루즈에 상륙하여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를 함락시키는 작전을 직접 지휘하였다. 스콧의 지휘 아래에는 이후 남북전쟁에서 유명해진 조셉 E. 존스턴, 로버트 E. 리, 율리시스 S. 그랜트, P. G. T. 보우리가드, 조지 B. 매클레런, 조지 미드, 그리고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스콧과 맞붙은 프랭클린 피어스 등이 장교로서 포진했다. 스콧은 당시까지 세계 최대의 상륙작전이었던 베라크루즈 상륙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산타 안나의 멕시코군을 세로 고르도(Cerro Gordo) 전투 등에서 격파한 뒤 멕시코시티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스콧은 가톨릭 교회의 협력을 받아 멕시코인들을 위로하며 치안을 유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에 반대하여 미군에서 탈영하고 멕시코 편으로 싸운 성 패트릭 대대(Saint Patrick's Battalion) 72명은 모두 군사재판 뒤 처형되었다.

제임스 K. 포크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스콧은 1848년 대통령 선거의 잠재적인 휘그당 후보였다. 스콧의 주요 지지 기반은 노예 소유주 헨리 클레이재커리 테일러에 반대했던 북부의 양심 휘그당원(conscience Whigs)이었다. 하지만 휘그당 경선에서는 스콧과 같은 전쟁영웅이면서도 남부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재커리 테일러가 승리하였고, 결국 대통령까지 당선되었다. 스콧은 최선임 장군으로서 군 내에서 계속 행정적인 업무를 수행했고, 클레이가 주도한 1850년 타협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1852년 선거에서 스콧은 밀러드 필모어대니얼 웹스터를 제치고 마침내 휘그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지만, 1850년 타협을 내세운 스콧의 선거 플랫폼은 많은 북부 휘그당원들이 자유토지당 존 헤일에게 이탈하게 했다. 결국 스콧은 민주당 후보 옛 부하 프랭클린 피어스에게 완전히 밀리며 대선에서 단 4개 주만 획득하며 참패했다.

남북전쟁 시기까지도 연방 육군 총사령관 자리에 있었다. 스콧은 버지니아주 출신이었음에도 연방군 소속으로 남아 독립을 선언한 남부 주들을 진압하고자 했다. 전쟁 발발 당시 스콧은 74세였고 몸 상태도 좋지 못해 전선 지휘는 불가능했다. 스콧은 실전 지휘관으로 같은 버지니아주 출신이자 스콧이 아끼는 후배였던 로버트 E. 리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게 추천했지만, 리는 고향 버지니아에 총구를 돌릴 수 없다며 스콧의 제안을 거절하고 군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스콧은 독립한 남부 주들을 제압하기 위해 남부 해안을 봉쇄하고 미시시피강을 제압한 뒤 강을 따라 진격하는 전략을 제시했는데, 당시 미국 해군의 역량이 부족했고 더 빠르게 남부를 진압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기에 처음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 전략은 뱀이 먹잇감을 졸라 죽이는 것에 비유되어 '아나콘다 계획'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링컨 정부의 전쟁 수행 대전략이 되었다. 봉쇄의 효과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엇갈리지만, 빅스버그 함락 등 미시시피강 장악이 북군의 승리에 매우 중요했다는 것은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스콧은 남부를 빠르게 제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희망적으로 예측했지만, 1861년 제1차 불 런 전투의 패배로 이는 불가능해졌다. 건강이 악화된 스콧은 조지 B. 매클레런이 부상함에 따라 점점 영향력을 잃었고, 10월 총사령관직에서 사퇴했다. 링컨은 스콧이 원하던 후임인 헨리 할렉 대신 매클레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스콧은 은퇴 직후 유럽에 여행을 가 영국과의 외교 문제 해결에 참여하기도 했고, 돌아온 뒤에는 웨스트포인트에 칩거하며 회고록을 집필했다. 스콧은 남북전쟁의 진행 상황을 꾸준히 관측했으며, 링컨 대통령은 1862년 스콧을 방문하여 전쟁 수행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스콧은 남북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끝나는 것까지 본 뒤 1866년 사망했다. 장례식에는 율리시스 S. 그랜트, 조지 미드, 조지 H. 토머스 등 연방군 고위 장성들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