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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E.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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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8379242-641F-4E16-9EC4-4DDE7A61F63B.png 스미스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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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재단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colbgcolor=#000047><colcolor=#FFC224> 개척자들 <colbgcolor=#FFF,#000>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헨리 허드슨 | 아메리고 베스푸치 | 존 스미스 | 조반니 다 베라차노 | 존 뮤어 | 메리웨더 루이스 | 사카자위아 | 키트 카슨 | 존 웨슬리 파월 | 닐 암스트롱
혁명가 & 저항가들 마틴 루터 킹 | 로버트 E. 리 | 토머스 페인 | 존 브라운 | 프레드릭 더글러스 | 수전 B. 앤서니 | W. E. B. 듀보이스 | 테쿰세 | 타탕카 이요탕카 |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 말콤 엑스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 토머스 제퍼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우드로 윌슨 | 에이브러햄 링컨 | 제임스 매디슨 | 앤드루 잭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W. 부시
첫 여성들 포카혼타스 | 엘리너 루스벨트 | 힐러리 클린턴 | 마사 워싱턴 | 오프라 윈프리 | 헬렌 켈러 | 소저너 트루스 | 제인 애덤스 | 이디스 워튼 | 베티 데이비스 | 세라 페일린
범법자들 베네딕트 아놀드 | 제시 제임스 | 존 윌크스 부스 | 알 카포네 | 빌리 더 키드 | 윌리엄 M. 트위드 | 찰스 맨슨 | 와일드 빌 히콕 | 리 하비 오즈월드 | 러키 루치아노 | 존 딜린저
예술가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앤디 워홀 |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 |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 잭슨 폴록 | 존 제임스 오듀본 | 조지아 오키프 | 토머스 에이킨스 | 토머스 내스트 |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 앤설 애덤스
종교인들 조셉 스미스 | 윌리엄 펜 | 브리검 영 | 로저 윌리엄스 | 앤 허치슨 | 조너선 에드워즈 | 라파예트 로널드 허버드 | 엘런 화이트 | 코튼 매더 | 매리 베이커 에디 | 빌리 그레이엄
팝 아이콘들 마크 트웨인 | 엘비스 프레슬리 | 마돈나 | 밥 딜런 | 마이클 잭슨 | 찰리 채플린 | 지미 헨드릭스 | 마릴린 먼로 | 프랭크 시나트라 | 루이 암스트롱 | 메리 픽포드
제국-건설자들 앤드루 카네기 | 헨리 포드 | 존 D. 록펠러 | J. P. 모건 | 월트 디즈니 | 토머스 에디슨 |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 하워드 휴즈 | 빌 게이츠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스티브 잡스
운동선수들 베이브 루스 | 무하마드 알리 | 재키 로빈슨 | 제임스 네이스미스 | 아널드 슈워제네거 | 타이 콥 | 마이클 조던 | 헐크 호건 | 짐 도프 | 세크리테리엇 | 빌리 진 킹
출처 }}}}}}}}}
<colbgcolor=#003458><colcolor=#fff> 아메리카연합국 총사령관
로버트 에드워드 리
Robert Edward Lee[1]
출생 1807년 1월 19일
미합중국 버지니아 주 스트랫포드 홀
사망 1870년 10월 12일 (63세)
미합중국 버지니아 주 렉싱턴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학력 미국육군사관학교 (차석졸업, 학사)
신장 178cm(5 Ft 10 In)[3]
병과 공병
복무 미합중국 육군 (1829 ~ 1861)
아메리카연합국 육군 (1861 ~ 1865)
최종 계급 대령 (미국 육군)
대장 (아메리카연합국 육군)
최종 보직 아메리카연합국 총사령관
종교 성공회
서명
파일:Robert_E_Lee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
2.1. 군복을 입다2.2. 남북전쟁2.3. 북군에게 무릎을 꿇다2.4. 전쟁 후
2.4.1. 말년
3. 평가
3.1. 성품과 도덕성3.2. 군사적 평가
4. 기타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It is well that war is so terrible, or we should grow too fond of it.
전쟁이 그토록 끔찍한 것은 잘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전쟁을 좋아하게 될 테니까.[4]

19세기 미국 남북전쟁 기간 동안 남군을 이끌었던 장군. 남북전쟁 개전 당시 북버지니아군 사령관, 종전 직전에는 남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남북전쟁에서 남군은 순전히 그의 능력과 인품만으로 버텼다고 봐도 될 정도로 뛰어난 명장이었고 공격적이고 과격한 성향의 인물이 많았던 남군측에서 보기 드문 온건하고 유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실제 능력 측면에선 지나치게 공세지향적이며 전략적 판단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전술적 국면에 치중한다는 분석이 이후에 대두되었다. 또한 명확한 작전목적(적 야전군 격파, 도시 공략, 보급물자 강탈 등)을 잘 알려주지 않는 경향이 있어 이게 부하 장군들 사이에 혼란을 일으켰고, 더불어 현대전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분석도 있다. 다만 전략적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리가 남군 전체를 지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본 적이 없는 이상, 확실하게 입증된 것은 아니다.

리는 백인의 도덕심을 해친다는 이유로 노예제도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흑인을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1856년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는 노예제 하 흑인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규율"들이 야만성에서 문명 상태로 흑인들을 고양시켜준다고 생각했으며, 노예제는 신의 뜻에 의한 것이고 신이 뜻할 때 끝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생각보다 신이 일찍 뜻했다 그리고 노예제 폐지 주장에 대해서는 지역에 대한 증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사악한 행위라고 묘사했다. 애초에 리의 아내부터가 열렬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5] 다만 리를 비롯한 남부의 지도층 상당수들은 인종차별보다는 노예제가 언젠가는 없어져야 하지만 아직은 경제적-현실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1860년도 대선에서도 노예제 유지를 주장하고 후일 남부연합 전쟁장관을 지낸 존 브레킨리지를 뽑았다.

2. 생애

2.1. 군복을 입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1px-Robert_E_Lee_1838.jpg
1838년경, 32살의 공병 중위 시절 초상화

버지니아 주 렉싱턴 출생. 아버지는 독립전쟁에서 활약한 육군 기병대장이었고, 1829년 웨스트포인트를 차석으로 졸업하며[6] 당시 웨스트포인트 우수 졸업생들의 전통을 따라 육군 공병소위로 임관하여 일선 근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7]
파일:external/www.texasbeyondhistory.net/lee-lg.jpg
1850년대. 텍사스에서 근무하던 중령 시절

그 뒤 1846년부터 미국-멕시코 전쟁에 종군하며 참모로서도 많은 공을 세웠고, 이후 웨스트포인트 교장직을 맡기도 했다. 미군(정확히는 연방 육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대령이나, 보직은 중령 시기에 맡았던 제2기병연대 부연대장직이 마지막. 이는 남북전쟁 직전의 혼란과, 아내가 갑자기 많은 부동산을 유산으로 물려받게 되면서 이를 관리하기 위해 1858년부터 1860년까지 안식년을 얻어서 고향에서 농장을 경영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마샤 워싱턴과 그의 첫 번째 남편의 증손녀였다. 즉 조지 워싱턴의 양증손녀. 그리고 이렇게 상속한 유산 중에는 워싱턴 DC에 있는 농장이 있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미국정부에 압류되면서 알링턴 국립묘지가 된다.

1859년에는 그 유명한 '존 브라운의 난'을 진압한 적도 있다. 과격 반노예주의자였던 존 브라운이 노예들을 해방시킬 목적으로[8] 연방 육군의 무기 창고를 습격해 점령한 사건으로, 이때 로버트 리는 연방 해병대민병대를 이끌고 브라운 일행을 공격, 소탕하고 존 브라운을 체포한 것이다. 브라운은 반란 행위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헌데 남북전쟁 이후 브라운의 행적이 재평가되면서 덩달아 리에 대한 평가가 미묘해지기도 했다. 리 입장에서야 어디까지나 불법으로 군 창고를 점령한 자들을 상층부의 지시 아래 진압했을 뿐이고, 노예 해방 문제에 대해선 별로 관여하지 않았지만 이 흑인 노예 문제가 워낙 거대한 사안인데다 리 자신이 남북전쟁 당시 미연합국(남부)의 대장으로 임명되고 미연방국(북군) 그랜트와 일전을 펼치는 등 상당히 큰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이라서 구설수에 오르기가 쉽다.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대령으로 진급한 리는 연방 정부의 명령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워싱턴으로 복귀, 무보직 상태로 대기했다. 본래 리는 고향 버지니아의 연방 탈퇴를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연방정부의 편이라는 인식이 많았다. 이 덕분에 총사령관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소장의 추천으로 미합중국 육군(북군)의 사령관 후보자로 올라있는 상태였다. 스콧은 리와 같은 버지니아 출신이었고,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리의 활약을 직접 목격하여 리를 연방군에서 가장 유능한 장교로 볼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이 시점에서 리는 남부의 독립에 대해 확고한 반대 의사를 밝히고 있었으나, 1861년 4월 섬터 요새에서 연방군과 남군의 최초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연방 정부가 반란 진압을 위한 의용군을 편성하자 연방 정부에 등을 돌렸다. 이 시점에서 스콧의 추천으로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를 지목하여 임시 소장 계급과 함께 반란진압 총사령관 직책을 제안했으나, 리는 고향에 총을 들이댈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고향인 버지니아로 돌아갔다. 스콧은 리가 거부 의사를 자신에게 직접 밝히자 크게 상심하였고, 리가 '일생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을 남겼다. 리는 버지니아가 중립으로 남거나 연방에 가담하면 연방군에 복귀할 의사가 있었던 것 같으나, 정작 버지니아는 그가 사령관직을 거부한 바로 그날 주지사가 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하고 남부연합에 가담했다.

2.2. 남북전쟁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리는 처음엔 버지니아 주 시민군 사령관으로 취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특명으로 준장이 되어 국방부 내근직 근무를 시작했다. 1861년 9월 버지니아 주 서부 공업 지역들이 독립해 연방에 가입하는걸 막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치트 산의 전투에서 패배해 해안경비 등 한직으로 빠졌다. 이후 1862년 반도 전역에서 북버지니아군 사령관이자 웨스트포인트 동기인 조셉 존스턴 장군이 페어오크스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그 뒤를 잇게 된다. 북버지니아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리는 짧은 준비를 거쳐 전면 반격으로 이행, 남부 수도 리치먼드 지척까지 접근해 있던 조지 매클렐런 휘하의 북군 10만여 명을 그 절반 남짓한 병력만으로 7일에 걸친 지속적인 공세 끝에 몰아내어 명성을 얻었다. 7일 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남군은 북군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북군의 전투의지를 결정적으로 분쇄, 이후 리치먼드는 2년 동안 더 이상 북군으로부터 일절 위협을 받지 않게 되었다.[9]

남군은 북군에 비해 항상 보급과 병력이 열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가 지휘하는 북버지니아군은 의표를 찌르는 기습과 교묘하고 과감한 병력운용 및 기동으로 북군을 끊임없이 괴롭히면서 불리한 전황에서도 3년이나 싸웠다. 그 와중에 두 차례에 걸쳐 북부 침입을 감행했지만 각각 앤티텀 전투게티즈버그 전투의 패배로 인해 좌절되었다.[10] 사실상 남부 핵심인 북버지니아군 전력의 50%를 잃은 게티즈버그 전투 직후 리는 너무나 상심한 나머지 남부연합 대통령 데이비스를 찾아가 사임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데이비스는 가뜩이나 유능한 군 장교들도 부족한 상황인데 그 없이는 전선을 유지할 능력자도 없었던 탓에 결국 직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다음해인 1864년, 서부에서 리 이상으로 적극적인 전투를 구사해 명성을 떨친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북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북부의 공업시설을 풀 가동하여 만든 무기와 식량 등 보급을 기반으로 소모전에 가까운 강력한 공세를 펼친다. 가뜩이나 남부는 농지와 목축지를 먹지도 못 하는 목화밭으로 만드는 바람에 오히려 농업중심인 남부가 되려 식량난이 온데다가 공업시설이 없어 탄약 보급이 안 되는 등 리의 능력으로 해결이 안되는 요소들이었으니 한계가 찾아오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도 리는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를 상대로 전술적으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다. 그랜트 역시 서부전선에서의 활약을 비롯해 빼어난 전술적인 능력으로 유명한 장군이지만, 리와 사상자 수로 비교하면 차이가 엄청나다.[11] 피터스버그에 틀어박히기 직전 1864년 5월 초에서 6월 초 사이에 리는 그랜트가 이끄는 북군과 큰 전투를 3번 치렀는데, 대략 6만의 병력으로 10만을 살짝 웃도는 북군에 맞서길 3번 반복했다.[12] 이 3번의 전투를 통틀어 남군은 약 2만 6천의 사상자를, 북군은 4만 8천 가량의 사상자를 냈다. 절반 조금 넘는 병력으로 싸웠으면서 사상자는 오히려 북군이 남군의 2배 가량이었다는 말이다.

다만 그랜트는 그런 상황에서도 북부의 우월한 물량을 기반으로 뚝심있게 버티면서 물고 늘어졌다.[13] 전투의 손실면에선 더 컸는데도 불구하고 퇴각하지 않으면서 남군을 우회하여 계속 남진해서 몰아붙인 것. 결국 리가 그랜트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면서도 그랜트가 지휘하는 포토맥군의 리치먼드를 향한 기동을 차단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장기였던 기동전을 포기하고 리치먼드 남쪽의 소도시 피터스버그에 틀어박혀 반 년에 걸친 농성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피터스버그에 틀어박히게 된 이유는 이곳이 리가 지휘하던 남군과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의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던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그랜트는 리치먼드 동쪽으로 빙 둘러 남하하고 기습적으로 제임스 강을 도강하여 피터스버그를 급습했다. 리는 이를 다소 늦게 알아차려 하마터면 전쟁이 여기서 끝날 뻔 했지만 겨우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리는 공병장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농성전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사실 피터스버그의 농성전은 일반 농성전과는 달리 그랜트가 피터스버그 주변에 길게 참호를 둘러판 뒤에 전개된 일종의 참호를 끼고 싸우는 장기전이었는데, 약 9개월 동안 피터스버그를 공격하는 북군은 또 거의 두배 가까운 병력 우세로 절반 가량의 남군을 상대하다가 4만 2천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 남군은 그 기간동안 약 2만 8천의 사상자를 냈다.

이런 막대한 피해 덕분에 하마터면 링컨이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할 뻔할 정도로 리는 북군에게 엄청난 출혈을 강요했다.

1865년 2월 리는 뒤늦게 남부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리는 남군 최대부대 북버지니아군 사령관이자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가장 중요한 조언자로서 총사령관에 가까운 영향력을 가졌다.

2.3. 북군에게 무릎을 꿇다

다만 이러는 동안 리의 병력도 그랜트의 엄청난 뚝심과 남부의 최대 약점인 보급상황을 악화시키기 위해 끈질기도록 보급로를 노리는 전술 덕분에 차근차근 소모되고 지쳐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리가 그랜트를 상대하는 사이에 윌리엄 테쿰세 셔먼이 무수한 약탈과 파괴를 통해 서부전선을 완전히 박살내버렸고, 전쟁 내내 탈영병이 없기로 유명했던 리의 군대에서도 서부전선 출신의 병사들이 탈영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반 년이 넘게 피터스버그 주변에서 장기전을 벌인 탓에 부상병이 누적되고 질병이 번지기 시작했는데 식량과 무기를 비롯한 각종 보급은 오히려 부족해지고 있었다.

반면 북군은 남군보다 피해는 컸지만 엄청난 보급능력과 압도적인 인구수 덕분에 병력이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처음 피터스버그 전투를 시작한 북군은 10만을 살짝 웃도는 수준이었는데, 9개월 동안 리가 입힌 피해보다 북군에 보충되는 병력이 더 많았기 때문에 농성 후기의 북군은 12만 5천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여기에 셰리던 장군이 이끄는 5만 가량의 추가병력이 머지않아 합류할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으며, 보다 더 장기적으로 본다면 서부전선을 박살내고 돌아오는 셔먼의 군세까지 고려해야 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리는 북군의 공격계획을 방해하기 위해서 1865년 3월 말 일부 병력을 돌려 스텟먼 요새(Fort Stedman)를 공격하여 북군에게 한 차례 피해를 입힌 다음 철수할 계획을 짰는데, 요새는 쉽게 함락시켰지만 그동안 굶주려있던 남군병력들이 함락시킨 요새에 남아있던 식량을 주워먹느라(...) 빠질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그 사이에 4천명의 북군이 우회기동으로 요새를 도로 함락시킨 뒤 철수 중이던 남군을 패퇴시켜버렸다. 북군의 공세는 이 공격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요새 공격을 위해서 나눈 병력이 패한 남군 쪽의 방어가 취약해졌다.

더이상 견디지 못한 리는 4월 2일, 만신창이가 된 북버지니아군을 이끌고 피터스버그를 탈출했고, 바로 다음 날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함락되었다. 리는 전임 북버지니아군 사령관 존스턴이 이끄는 남부의 잔존전력과 합류하기 위해 노스캐롤라이나로 이동하려 했으나 포토맥군에게 퇴로가 차단되고 포위되었다. 인원이 겨우 8명에 불과한 여단이 있을 정도로 심하게 소모된 북버지니아군은 전체 병력이 도합 겨우 1만 5천에 지나지 않았고, 12만 5천의 포토맥군을 상대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리는 5년 동안 자신과 함께 싸우고 살아남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그랜트에게 항복하였다.

리가 항복할 당시 장병들에게 남긴 고별사(일반명령 9호)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능가할 자가 없는 용기와 인내로 지난 4년간 복무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불굴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북버지니아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자원 앞에서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굴복에 동의한 이유가 그처럼 많은 전투를 겪으며 마지막까지 견실하게 지탱해 준 용사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님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전투를 계속함으로써 발생할 손실을 보상할 용기가 없습니다. 더 이상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느껴 나는 무익한 희생을 피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용감했으며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종전협정에 의거하여 장병은 포로교환이 이루어질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 머무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임무를 성실하게 완수했다는 만족감을 항상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축복과 가호가 여러분과 함께할 것을 열심히 기도합니다. 조국에 대한 여러분의 충성과 공헌을 존경하는 마음과 여러분의 친절과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사랑에 넘치는 고별 인사를 보냅니다.'
항복하기 위해 그랜트 장군을 찾아갔을 당시 둘은 서로에 대한 악감정도 없었고 오히려 호감을 느껴 제법 사이좋게 대화를 이어나갔다고 한다.[14] 그랜트는 동포끼리의 싸움에서 수치를 주는 것은 옳지 않다며 남부가 연방의 품으로 돌아와 하나의 미합중국이 완성되는 것만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남부 군인들 개개인에 대해서도 식량을 나누어주겠다고 하고,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갈 때 장교는 명예의 상징인 검을 휴대하고, 병사는 농사에 필요할 말을 타고 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심지어 승리한 북군 병사들이 남군 병사들을 조롱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2.4. 전쟁 후

전쟁이 종결된 후 남부연합의 핵심 군인이었던 만큼 수감된 뒤 충성서약을 맺고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렉싱턴에 있는 워싱턴 대학교 학장으로 일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패장이었음에도 그의 전시 명성뿐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성실함과 훌륭한 인품은 종전 직후부터 북부에도 널리 알려져, 그가 대학 학장이 되자 북부로부터 유학생들이 몰려오기까지 했다. 이 중 상당수는 지난 전쟁에서 그의 적으로 싸운 젊은이들이고, 나머지 남부 출신 학생들의 절반 이상도 리의 옛 부하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적과 아군이 한데 모인 셈이다.[15] 그 전까지 평범한 작은 대학에 불과했던 워싱턴 대학교는 덕분에 빠르게 성장, 지금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리버럴 아츠 칼리지로 성장했고 이름도 워싱턴 앤 리 대학교로 바꾸었다. 또한 이 대학의 최대 특징은 교칙이 전혀 없다는 것인데, 유일한 교칙은 리가 만든 모든 학생은 신사여야 한다뿐이며[16] 이 교칙 때문에 꽤 오랫동안 여학생을 받지 않았다.[17] 물론 지금은 남녀공학이다.

1870년 사망한 리의 사인은 뇌졸중이었으며, 사후 워싱턴 대학 내부에 있는 자기 이름을 딴 리 성당에 안치되었다. 지금도 그의 유해가 담긴 관은 그 성당 안쪽에 전시되어 있어서 직접 볼 수도 있다.

2.4.1. 말년

전쟁이 종료되고 1865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앤드루 존슨은 남군에 가담한 사람들을 사면하였으나 핵심 역할을 맡은 14계층은 제외하였다. 제외된 사람들은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청하는 충성 서약서를 제출해야 사면될 수 있어서 리는 존슨에게 서약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담당 공무원이 개인적인 남부를 향한 반감을 이유로 존슨에게 서약서를 전달하지 않고 반려하여 사면은 이뤄지지 않았다. 사후 이 사실이 잊혀졌다가 1975년에야 리는 사면된다. 당시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가 시민권이 박탈된 사람들의 목록을 확인하다가 리의 충성 서약서를 발견하고 직권으로 사면하고 국적을 회복시킨 것이다. 그렇게 리는 공식적으로는 국적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사망하고 사후에야 국적을 회복하게 되었다.

3. 평가

3.1. 성품과 도덕성

리는 당시의 많은 군인들과 달리 성격이 독선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온화하며 부하들의 판단을 최대한 존중하는 스타일이었다. 덕분에 뛰어난 장교들은 그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는 활약을 보여줬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예스맨 스타일이나 무능한 인간들은 도저히 그의 방식으로는 써먹을 방도가 없었다.

당시의 전쟁에서는 전자에 해당하는 장교가 매우 드물었으므로, 이런 장교들이 전쟁기간 동안 소모되기 시작하면서 리의 군대가 약화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세심한 작전계획을 수립하는데 능하면서도 직관적으로 순간순간 상황에 따라 작전을 바꾸는 일이 잦았는데, 이에 대비해서 작전계획이 꽤 모호하게 작성되는 경우가 많아 당연히 그를 못 따라가는 부하장교들은 명확한 계획이 없어 혼란을 일으키곤 했다. 특히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토머스 잭슨이 쓰러진 이후 승진한 신임 군단장 및 사단장들이 그런 경우가 많아, 이것이 게티즈버그 전투 패전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또한 리는 시대가 바뀌면서 평가가 크게 요동을 치는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 남부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남부는 물론이고 한때는 북부까지 포함한 미국 전역에서 존경을 받았으나, 최근에는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각되면서 리의 평가도 떨어지고 있다. 특히 찰스턴 총격 사건 이후로는 남부에 있는 리의 동상들에 대한 철거 여론이 높아지고, 리의 이름을 딴 공공건물들이 하나 둘 이름을 바꾸고 있다.

일단 기존의 훌륭한 인품으로 적인 북부에서도 존경받았다는 로버트 리의 신화는 당대 여러 사람들에게서 확인되고 있지만, 알려진 것만큼 도덕적 흠결이 없는 인물이라 할 수 없다는 것도 밝혀지고 있다. 리 역시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노예들이 자유를 원했다는 이유로 탄압했고, '노예제는 나쁘다' 정도의 발언을 한 적은 있으나, 노예제에 반대하는 행동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도덕적으로 나쁘다고는 생각하지만 필요악이다' 정도로 표현하는 것은 당시 남부 지도층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리가 더 특별하게 좋거나 나쁘거나 할게 없었다는 뜻이다. 사실 그 당시 북군 장군인 셔먼조차도 노예제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던걸 감안하면 남군 장군인 리는 말할 것도 없다.

결국 리 개인의 고결한 인품은 당대에도 인정받았지만, 격동기 남부의 유지라는 시대적, 환경적 배경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샬러츠빌의 리 동상 철거운동은 이런 재평가의 분위기 속에서 불거진 문제. 시대적 한계 운운하기도 뭣한게, 셰리던은 원주민 학살에 열을 올렸고, 셔먼도 사적으론 남부에서 오래 살았고 남부 출신 지인, 친구들이 많아 인종 관련해선 전쟁 전만 하더라도 오히려 노예해방 반대론자에 가까웠으며, 전쟁 중에도 해방 노예 출신 병사들의 부대 편입을 막는 등 전형적인 인종차별적 모습을 보였다.

3.2. 군사적 평가

아군보다 더 많은 수의 북군을 상대로 여러 번 승리를 거두어 남북전쟁 최고의 전술가 중 하나로 꼽힌다. 스톤월 잭슨, 제임스 롱스트리트, 젭 스튜어트 등 유능한 장교단을 기용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휘하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시키는 데도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공병장교 경력을 살려 피터스버그 포위전 등에서는 야전 축성으로 공격하는 북군에게 큰 피해를 강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군사적으로도 부정적인 재평가를 받는 경우도 많다. 전술적으로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유리한 위치에서 방어하는 상대를 공격하기 어려워진 당시 전장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공세 일변도로 나서 남부연합이 감당하기 어려운 큰 인명피해를 자주 입었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7일 전투나 챈슬러스빌 전투 등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를 입었고, 앤티텀 전투는 전투 전 강을 건너 후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리한 전력으로 전투를 고집하여 치명타를 입을 뻔 했다. 게티즈버그 전투에서의 피켓의 돌격을 명령하고 실패한 것은 가장 대표적인 리의 공세 실패 사례이지만, 이는 게티즈버그뿐만 아니라 리가 전쟁 내내 보여준 문제점이었다.

전략적으로도, 남부연합 수도 리치먼드에서 가장 가까운 야전군의 사령관으로서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조언자였지만 지나치게 버지니아 중심으로 전쟁을 바라보았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서부전선에서 주요 거점들이 하나하나 북군의 손에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지원군을 차출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이 지원군을 받아야 한다고 고집했다. 서부전선에 지원될 수 있었던 병력과 물자를 대신 받아 북진에 나서 북군에 대승을 거두고 협상을 이끌어내고자 했지만, 당시 전쟁 환경에서 북군 주력을 대파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고 결국 리의 두 차례의 북진은 모두 실패했다. 반면 북군의 그랜트는 서부전선에 있을 때도 지원군을 달라고 고집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휘하에서 다른 지역으로 지원군을 차출하는 데 열려 있었으며, 총사령관에 오른 뒤에는 전쟁 전체를 아우르는 대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하여 리와 남부연합을 항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로버트 리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로버트 리가 남군 총사령관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애틀랜타가 함락당하고 이미 전세가 북군 쪽으로 기울어져가는 상황이었다. 로버트 리는 버지니아군 사령관으로 버지니아를 중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또 보급 거점으로 가장 중요한 버지니아와 수도 리치먼드는 워싱턴 DC에서 현대에서 자동차로 2시간 가량, 도보로는 2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대단히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방어하기가 쉽지 않았다

4. 기타

  • 리와 부인인 메리 커스티스는 워싱턴 근교에 농장을 갖고 있었는데, 남북전쟁이 발발할 무렵 농장을 남겨두고 남부로 떠나게 되었다. 남북전쟁 당시 리의 남군에 의해 북군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연방 정부의 육군 병참감이었던 메이그스 장군이 열받아 리의 농장에 전사자들을 매장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의 알링턴 국립묘지이다. 그리고 그 농장에 있던 집이 알링턴 하우스(Arlington House)라고 불리는 기념관이 되었다. 참고로 이 토지와 메리 커스티스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과 살짝 연결되어 있다. 메리 커스티스는 조지 워싱턴의 의붓 아들[18]의 직계 후손. 손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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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포머톡스에서 항복하는 리.
  • 북군 사령관 그랜트 장군이 주정이나 부리다가 군대에서 쫓겨나고 매일 옷도 허름하게 입고 다니던 나사빠진 사람이었던 반면 리는 굉장한 신사였고 절도가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은 미국-멕시코 전쟁 때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랜트는 그때의 기억을 평생 잊지 않았지만 리는 그랜트가 하도 추레하게 하고 다녔던 탓에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19] 1865년 버지니아 애포머톡스에서 리가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를 보면 말끔한 차림의 리 장군과 신발도 안 닦고 추레한 그랜트 장군이 같이 나오는데 옷 매무새를 보면 오히려 그랜트가 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 항복하는 측에서 그나마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대한 옷차림을 단정하고 깔끔하게 하는 경우는 흔하다. 리 본인도 평소 전장에선 프록코트 차림이 대부분이었고 제복을 제대로 입는 것은 항복 때와 같이 아주 드문 경우였다. 반면 그랜트는 성정 탓도 있지만 항복 직전까지 전쟁의 마무리를 위해 업무에 시달리다가 항복 소식을 듣고 급하게 흙먼지를 뚫고 달려온 것이라서 옷차림이 꾀죄죄할 수 밖에 없었다.
  • 리가 학장직을 수행하고 있을 무렵 그랜트도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면서 리의 살아 생전인 1869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랜트는 취임 후 1년 뒤 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슬퍼했다고 한다.
  • 윌더니스 전투 당시 때맞춰 전장에 도착한 텍사스 여단을 보고 흥분한 리가 "텍사스인들이 언제나 적을 몰아내주는군"이라고 하자 텍사스 여단의 한 병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리 장군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돌격해 가겠다"고 외쳤다고 한다. 또한 그가 선봉에서 돌격하려 하자 병사들은 리 장군이 안전한 후방으로 가지 않는다면 돌격하지 않겠다고 거부한 일도 있었다. 훗날 애포머톡스에서 포위당했을 때 부하 장교가 항복을 권유하자 리가 최후까지 싸우지 않으면 국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화를 냈는데, 그 부하 장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조국은 무슨 놈의 조국입니까!(Country be damned!) 조국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몇년간 우리에게 조국은 없었습니다. 당신이 저 불쌍한 병사들의 조국이었으며, 그들은 급료도 피복도 없이 굶주리면서도 오직 당신을 위해 싸웠습니다. 수천의 병사들이 아직도 당신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하고 있습니다!

  • 후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그의 이름을 딴 M3 리 전차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M3 전차를 일부 개량한 개량형에는 그랜트의 이름이 붙었다. 이 이름은 영국군이 붙인 것으로, 영국군은 리와 그랜트 양자를 모두 공여받아서 북아프리카에서는 그랜트 중심으로 운용했다.
  • 2011년 6월 20일 보도에 의하면 미국의 포털 MSN.com에서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 16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특히 미국 남부에서 그에 대한 추종은 절대적이어서 군신(軍神)을 넘어선 거의 반인반신(半人半神)으로 추앙받고 있다고 한다.
  •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 망연자실한 일반 사병들 앞에서 "Friends, it is all my fault. It is entirely my fault(친구들, 이것은 모두 나의 잘못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입니다)."[20]라며 장엄하게 고백했다. 사실 전적으로 리의 책임은 아니었다. 핑계는 얼마든지 댈 수 있었다. 이 때 이 부대는 이렇게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았고[21] 기병대는 늦게 도착했고[22] 여기서는 이것이 잘못되었고 저기서는 저것이 잘못됐다는 등...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리는 남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 역사에 남은 위인들 중 이 정도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그것도 사병들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할 정도의 용기와 인품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23]


패배를 시인하는 리. 1분 00초부터.
  • 고향인 버지니아 주에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에서 남북전쟁의 주역인 리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에 항의가 많았고 결국 주에서 철거를 결정했다. 이에 후손인 로버트 W. 리 목사는 철거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 리의 어머니 앤 카터 리에게는 상당히 특이한 일화가 존재한다. 당시 강경증[24]을 앓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 병이 발현되면서 쓰러져 버린 것. 당시엔 의학이 그다지 발전한 상황이 아니라 의사들이 사망상태 진단을 제대로 못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리의 어머니도 의사의 실수로 죽은 것으로 간주되어 버렸고, 결국 관에 들어가서 장례식까지 치르게 된다. 다행히 완전히 매장되기 전에 리의 어머니는 관 안에서 깨어났고, 교회지기가 관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열어준 덕분에 생매장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리는 이 사건이 있고나서 1년 후에 태어났다고 한다.
  • 조지 워싱턴급 핵잠수함에 그의 이름이 붙여진 핵잠수함이 있었다(USS Robert E. Lee(SSBN-601)).
  • PragerU 유튜브 채널에서 이 사람을 옹호하는 영상을 올리다가 욕을 쳐먹고 영상이 제한 당한적이 있다.
  • KKK단의 초대 회장이었던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를 회장으로 추천한 이가 다름아닌 리였다. 같은 남군의 젭 스튜어트, 북군의 필립 셰리든과 더불어 남북전쟁 시기 최고의 기병대장으로 이름 높았던 그는 막나가는 KKK의 행보에 질려 회장직에서 사임하려 했으나, 자신을 추천한 리의 명성에 피해를 줄까 우려해 결국 훗날 회원들에 의해 제명당할 때까지 회장직을 유지한다. 참고로 포레스트는 본래 노예상인 출신으로, 남북전쟁 시기까지만 해도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으나, KKK에서 제명당한 뒤로는 흑인 민권 운동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 자신의 천막으로 도망친 암탉 한 마리에게 넬리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전쟁 기간 동안 애완동물로 삼기도 했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남부가 승리하는 대체역사물에서 남부연합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경우가 많다.[25]
  • 마틴 신(게티즈버그), 로버트 듀발(신의 장군들[26])이 리 역을 맡았는데, 특히 마틴 신의 연기가 유명하다. 연기도 출중했고 촬영 당시 보조 연기자들[27]에게도 정중하게 대해서 평가가 좋았다.

이 장면은 본래 계획되지 않은 것으로, 마틴 신이 촬영을 위해 이동하자 갑자기 리인액터들이 열성적으로 뛰쳐나와 환호했고, 이것이 영화에 추가되었다.

  • 영화 링컨 마지막 애포머톡스에서 항복하고 돌아갈려는 과정에 그랜트가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하자 맞예의를 하는 장면에서 짤막하게 나온다.


[1] Lee는 중국계 또는 한국계 교포가 아닌(...) 아일랜드계 성씨이다. 중국과 한국의 이씨들이 영어권의 해당 철자를 사용하게 된 것.[2] 1863년 남북전쟁 중에 찍은 사진이다.[3] 라이벌 율리시스 S. 그랜트는 3cm(약 1인치) 작은 175cm였다.[4] 동시대의 적장이자 후배격인 북군의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남겼다.[5] 북군이 리의 아내의 집을 보호할때 흑인을 둔 적이 있는데 제대로 서있지 못하는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항의한 적이 있다. 반대로 백인이 경비를 서주었을 때는 적군이지만 고맙다면서 매일 식사를 대접해주었다.[6] 동기이자 수석 졸업자인 찰스 메이슨에 이어 46명의 졸업생 중 2000점 만점에 1966.5점으로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점수로 졸업했다. 즉 200여년 역사에서 역대 2위인데 하필 역대 1위가 동기동창... 포병, 전술, 행동 부문에서는 메이슨과 리가 공동 선두를 지켰지만 다른 모든 과목에서 메이슨이 리를 꺾고 46명의 졸업생 중 2000점 만점에 1995.5점으로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가장 높은 점수로 졸업했다. 여담으로, 메이슨과 리에 이은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세 번째로 높은 점수의 졸업생은 93명의 졸업생 중 2470점 만점에 2424.12점을 기록한 더글러스 맥아더이다. 한편 찰스 메이슨 역시 공병장교를 선택했지만, 졸업 후 웨스트포인트에서 공학 교수로 2년간 복무하다 군인 체질이 아니었는지 전역해버렸다. 이후 법률 공부를 하더니 30대에 아이오와 주 초대 대법관이 되었고, 40대엔 철도 회사를 세워 사장이 되었고, 다음엔 미국 특허청장이 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다가, 결국 아이오와주 주지사에 도전하지만 당선에 실패했다. 공교롭게도 메이슨은 리와는 반대로 노예 해방주의자에 여성의 사회 참여에도 적극적인 사람이었다.[7] 미국은 그 당시까지 독재를 막기 위해 상비군의 규모가 작았고, 주로 외곽 쪽에서 경비와 진지 구축, 영토 개척 위주로 운용되었기 때문에 육군의 경우 공병에 가장 우수한 장교들을 배치하였다. 미 육군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도 공병 출신이다. 남북전쟁 발발 당시 연방 육군의 상비군은 3~4만 정도. 때문에 인사적체도 심하여 아무리 유능해도 진급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8] 이전에 브라운은 이미 노예제 옹호자인 백인 5명을 살해한 '포토와토미 학살사건'을 저지른 적이 있다.[9] 이 7일 전투의 전개 과정에서 리는 자신이 매우 공세지향적이며 고전적인 지휘관임을 드러냈다. 이 공세지향적 성향이 게티즈버그 전투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사실 7일 전투는 북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수적으로도 유리했고 포병대의 숫자도 유리했다. 하지만 포토맥군 사령관 맥클래런이 남군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 남부군은 총 9만명 정도였고 북군은 11만명수준이었지만 맥클래런은 남부군을 20만명 수준으로 파악하고 공격을 주저했다. 이 점을 리는 과감한 공격으로 북군을 압박해 철수시키는데 성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북군이 후미를 지키기 위해 배치한 33개 포대에 고작 10개 포대와 보병대를 진격시키다가 몰살당하는 등 지나치게 무모하다는 단점을 노출한다.[10] 앤티텀 전투는 리가 전술적으로는 승리한 전투라고 할 수 있었지만, 전략적 측면에선 리의 작전지속능력이 완전히 상실됨으로써 사실상 패한 전투가 되었다. 그리고 리 본인은 앤티텀 전투를 가장 자랑스러운 지휘경험으로 회고함으로써 자신이 전략 측면보단 전술 측면에 더욱 치중함을 드러냈다.[11] 다만 전쟁 초기 1:3이나 되던 남북간의 병력 교환비에 비하면 확실히 교환비가 한결 낫긴 했다. 그것도 일단 남부 최고의 명장인 로버트 리를 상대로.[12] 보충 병력과 치료된 부상자 덕분인지 3번의 전투 모두 이 병력이 비슷하게 유지되었다.[13] 그랜트가 일부 전투에서 너무 큰 피해를 입은 것 때문에 링컨의 내각관료들은 그랜트 희생이 너무 크니 총사령관을 바꿔야한다고 건의하자 링컨은 "나는 그랜트를 믿는다. 그만큼 지금 북부 지휘관 중 뛰어난 사람이 없다."며 거절하며 비호해주기도 했다.[14] 남북전쟁 내내 양군 장교들 간에 그닥 악감정은 없는 편이었다. 정치인 출신 장교는 몰라도 정규군 출신 장교끼리는 한두 다리 건너면 다들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랜트와 리도 기수 차이는 꽤 나지만 육사 선후배 사이였다.[15] 학생 전원의 이름을 알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 대학의 학장을 맡을 당시에 리는 너무 가난해서 계급장을 뗀 군복을 입고 취임식에 참석했다.[16] 정확하게는 교칙을 복사해주기를 원하는 학생들에게 "우리 대학에는 문서화된 규칙이 없다. 모든 학생이 신사로서 행동할 것을 기대한다."라고 답하였다.[17] 신사가 영어로 Gentleman. 그리고 이 단어는 숙녀를 의미하는 Lady의 대칭점으로 쓰인 단어이기도 하다.[18] 조지 워싱턴에게 친자녀는 없고, 아내인 마사 워싱턴이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만 있었다.[19] 여기에는 그랜트의 기억력이 매우 뛰어난 덕도 있었다. 마크 트웨인이 그랜트의 대통령 취임 직후 그를 만난 적이 있는데, 10년 후 그랜트와 트웨인이 재회했을 때 그랜트는 그 잠깐의 만남 동안 오간 대화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트웨인의 자서전에서 나오는 일화다.[20] 국내에 잘 알려진 의역은 "전우들이여,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사람은 오직 나 뿐이다"[21] 유얼은 '가능하다면 점령하라'는 지시에 소극적인 지휘로 세메터리 힐을 점령하지 않아 북군이 전열을 정비할 여유를 줘버렸다. 영화 게티즈버그에서도 부하가 이걸로 유얼을 작정하고 까자 리가 진정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가능하면'이라는 애매한 명령부터가 문제라고 봐야한다. 유얼 입장에선 그냥 불가능해 보여서 점령하지 않은 것이니까. 리도 그걸 알고 있기에 자기 책임이라 한 것.[22] 기병대장 제임스 이월 브라운 스튜어트(1833~1864)는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명령대로 안 움직이고 북군 진영을 휘젓고 다녀서 게티즈버그에서의 패배에 일조했다.[23] 데일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 p.232, 리베르 출판. 데일 카네기는 이 예화를 예로 들며 인간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리 장군처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라고 조언한다.[24] 기절한 상태에서 전신 근육이 경직되는 증상.[25] 실제 역사에서도 리의 라이벌 격이었던 그랜트는 16대 링컨, 17대 앤드루 존슨 이후 미합중국 제 18대 대통령에 당선된다.[26] 사실 엔하계 위키에서는 영화 원작 게임갓즈 앤 제네럴즈만 작성되어있다. 워낙 못만든 게임이라서(...).[27] 적은 보수와 숙식만 제공했음에도 남북전쟁 시기 남군 육군 피복과 장비를 자비로 갖추고 무리지어 자원한 리인액터들이 대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