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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터스버그 포위전(Siege of Petersburg)은 남북 전쟁 당시 북군이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로 압박해 들어가던 1864년 6월 9일부터 1865년 4월 25일까지 리치먼드로 통하는 철도망의 핵심 거점인 버지니아 주 피터스버그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상징인 참호전의 시초가 된 전투이기도 하다.피터스버그 포위전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피터스버그 도시 자체를 고전적으로 포위해서 공성전을 한 것은 아니다. 양측의 참호는 피터스버그 주변은 물론 북쪽의 리치먼드까지 수십 킬로미터 이상 이어졌고, 율리시스 S. 그랜트의 의도로 인해 갈수록 길어져 100km를 넘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 전투가 1차대전의 서부전선을 예고했다고 보는 일이 많으며, 포위전(siege) 대신 리치먼드-피터스버그 전역(Richmond-Petersburg campaig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내 참호전만 한 것은 아니고, 북군이 남군 방어선을 우회하거나 기병대로 철도를 끊으려 시도하고 남군이 이를 저지하는 전투도 많았다.
2. 발단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S. 그랜트는 자신이 리치먼드 북쪽에서 로버트 E. 리의 남군을 상대하는 동안 여러 방면에서 남부를 동시에 공격하여 서로를 지원하지 못하게 하는 대전략을 실행했다. 이러한 주요 공격 루트 중 하나로 리치먼드 동남쪽에 상륙하여 리치먼드와 리치먼드 남쪽의 철도 거점 피터스버그를 공격하는 것이 있었다. 이를 맡은 북군 제임스군(Army of the James)은 정치인 출신 장군 벤저민 버틀러(Benjamin F. Butler)가 지휘했는데, 그는 리치먼드 주변의 수비를 맡은 남군의 P. G. T. 보우리가드(P. G. T. Beauregard)의 한참 열세한 병력에 저지당해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버뮤다 헌드레드 전역). 한편, 그랜트와 리의 싸움이 격화되면서 리는 피터스버그 방면의 병력을 북쪽으로 빼내고 있었고, 피터스버그 방어와 버틀러에 대한 견제가 약해졌다. 버틀러는 이 기회를 노리고 4,500명의 병력을 방비가 약한 피터스버그 공격을 위해 파견했지만, 뷰리가드는 청소년과 노인들로 이루어진 약한 전력으로 북군의 소극적인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제1차 피터스버그 전투).한편, 리치먼드 북쪽에서 리를 상대하던 그랜트는 리치먼드를 향해 남하하다가 리치먼드 동쪽으로 우회하여 기습적으로 제임스 강을 도하하는 데 성공했다(오버랜드 전역). 그랜트는 요충지 피터스버그를 공격하기 위해 윌리엄 ‘발디’ 스미스가 이끄는 18군단을 파견했고, 버틀러와 포토맥군 2군단 등에게 이를 보조하게 했다. 뷰리가드는 남군 상층부에 피터스버그에 공격이 임박했다고 경고했지만 리는 그랜트의 목적이 피터스버그임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하지만 뷰리가드는 북군보다 훨씬 약한 전력으로 필사의 방어전을 펼쳤고, 스미스의 소극적인 지휘로 인해 북군은 피터스버그를 적은 피해로 장악할 초기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북군은 대규모 지원군이 합세하며 6월 15일부터 18일까지 파상공세를 퍼부었지만 남군 또한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리가 보낸 지원군이 합류했고, 결국 북군은 큰 인명 피해를 입고서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제2차 피터스버그 전투). 이후 북군이 피터스버그 주변을 포위하고 양측이 참호를 파면서 본격적인 피터스버그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3. 구덩이 전투
피터스버그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는 1864년 7월 30일에 있었던 북군의 공세, 일명 구덩이 전투(Battle of Crater)이다. 남군은 북군의 공세에 대비해 길고 구불구불한 참호와 철조망 등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수준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자 북군은 공병을 활용해 빅스버그 포위전에서 써먹었던 지하갱도 폭파를 시도했다. 즉 남군의 방어선 지하까지 긴 갱도굴을 파고 대량의 화약으로 폭파해서 방어선을 파괴하고 방어선이 무너진 틈에 돌격하자는 것.빅스버그 포위전에서도 지하 갱도 폭파는 성공했지만 이후 혼란상 때문에 작전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전원 흑인으로 일선 돌격 부대를 구성하여 구덩이를 우회해서 진격한다는 작전 계획으로 다일간 훈련을 했었다. 하지만 이들을 이런 위험한 임무에 동원했다가 실패하고 사상자가 많아질 경우 흑인을 총알받이로 사용했다는 인종차별적 비판 여론이 높아질 것을 염려해 작전 개시 직전에 일선 부대를 일반 병사로 구성된 부대로 바꾸었고 이들은 작전 계획을 제대로 인수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이는 곧 치명적 참사로 이어진다.
폭파로 남군의 참호는 확실히 무력화됐지만 그 결과물로 깊이 9미터, 폭 50미터에 이르는 길쭉한 구덩이가 생겨났고 이는 직후 기세좋게 돌격해 들어간 북군 병사들을 가둬놓는 거대한 함정이 되고 말았다. 원래 작전대로라면 당연히 이 구덩이를 피해서 돌격해야 했으나 사전에 이를 알지 못한 데다 대규모 폭발의 먼지로 시야까지 차단된 북군 병사들은 그대로 이 구덩이 속으로 밀고 들어갔고, 곧 선두의 병사들이 9미터가 넘는 벽(...)에 가로막힌 걸 깨달았지만 후속 병력에 그대로 압사했다. 당연히 남군은 구덩이 위에서 북적대는 북군에게 총알과 포탄을 쏟아부었고, 북군은 3,800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입었다. 후에 이 전투에 참전했던 남군 병사들은 구덩이에 갇힌 북군과의 전투를 '칠면조 사냥'과 같았다고 회상했으니, 일방적인 학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