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7:36:09

벤저민 버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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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추세츠 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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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벤저민 버틀러
Benjamin But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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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벤저민 프랭클린 버틀러
Benjamin Franklin Butler
출생 1818년 11월 5일
미국 뉴햄프셔 디어필드
사망 1893년 1월 11일 (향년 74세)
미국 워싱턴 D.C.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콜비 칼리지 (BA)
직업 정치인, 군인
최종 당적

서명
파일:벤저민 버틀러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
3. 남북전쟁4. 남북전쟁 이후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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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군인. 남북전쟁에서 대표적인 정치인 출신 장군(political general)으로서 북군의 주요 직책을 맡았다. 이후 제 33대 매사추세츠 주지사직과 미국 연방하원의원직을 역임하였다. 18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그린백당의 제3후보로 출마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이름은 벤저민 프랭클린에서 따왔다. 어린 시절부터 무모하고 고집이 세며 자주 싸우는 태도를 보였다. 독실한 침례교 신자였던 그의 어머니는 버틀러가 목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버틀러는 대신 법조인의 길을 선택했고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초기부터 민주당원이었던 버틀러는 1850년 타협에 찬성했고 폐지주의에 반대했다. 민주당-자유토지당 연합을 지지하면서 1852년 매사추세츠 주의회 하원의원이 되었다. 하지만 대통령 후보로 프랭클린 피어스를 지지했다가 의석을 잃었다. 1858년에는 매사추세츠의 강한 공화당 지지세를 뚫고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온건파 남부 대통령만이 연방의 분열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제퍼슨 데이비스를 민주당 후보로 내세우고자 했고,[1] 여의치 않자 존 C. 브레킨리지를 지지했다. 하지만 북동부 뉴잉글랜드 한복판의 매사추세츠에서 버틀러의 의견은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버틀러는 1860년 브레킨리지파 민주당의 매사추세츠 주지사 후보로 나섰지만 압도적인 차이로 낙선했다.

3. 남북전쟁

1861년 4월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버틀러는 이전의 친남부적 태도에서 전향하여 전쟁 지지파가 되었다. 버틀러는 전쟁장관 사이먼 캐머런에게 로비를 넣어 매사추세츠 민병대의 준장 직위를 획득했다. 메릴랜드가 친남부파의 폭동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버틀러는 매사추세츠 8연대를 이끌고 메릴랜드 주도 애나폴리스에 도달했으며, 뉴욕 7연대와 함께 메릴랜드의 친남부파 준동을 억제하고 워싱턴 DC와 나머지 북부 주들을 연결하는 철도를 확보하였다. 이는 링컨 취임 직후 메릴랜드에 막혀 고립 상태였던 워싱턴 DC의 링컨 정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버틀러는 이후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 일대에서 북군 해군과 함께 남부 해안가 요새들을 점령하는 작전을 실행했고, 버지니아에서 남군 매그루더에게 패배하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1862년 5월 버틀러는 북군 해군의 데이비드 패러것과 함께 뉴올리언스 점령을 마무리하고 군정 사령관이 되었다. 버틀러는 강력한 방역 정책으로 도시의 황열병을 박멸하는 등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지나치게 고압적인 태도로 현지인들의 큰 반발을 사기도 했다. '야수(Beast)' 버틀러라는 멸칭이 생겼고, 한 남부 여인의 은제 식기 세트를 압수한 일로 인해 '숫가락(Spoons)' 버틀러라는 멸칭도 있었다. 목화 집산지였던 뉴올리언스의 목화를 압수하여 자신의 형제 앤드루 버틀러의 회사에 싼 값에 넘기기도 했으며, 강도 높은 언론 통제를 실시하였다. 매우 강한 반유대주의적 언행을 보이기도 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남부의 민심 악화를 우려하여 12월 버틀러를 중앙으로 소환하고 대신 너새니얼 P. 뱅크스를 걸프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버틀러는 공화당원이 되어 공화당 급진파와 우호관계를 맺었고, 자신이 소환된 것을 국무장관 윌리엄 H. 수어드의 탓으로 돌리며 그에게 복수하려 했다. 버틀러는 급진파의 지지를 받았던 동시에 남북전쟁 극초기부터 활약하여 같은 계급의 여러 장군들 중 서열이 매우 높은 편이었고, 링컨은 그에게 주요 보직을 맡겨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1864년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연방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그는 여러 야전군을 동시에 움직여 남군이 서로를 지원하지 못하게 하고 남군 주력을 궤멸시키고자 했다. 그랜트가 동부전선 주력 포토맥군을 직접 통제하며 리치먼드로 직접 남하하는 가운데. 버틀러는 제임스군(Army of the James)의 사령관이 되어 리치먼드 남동쪽에 상륙하여 리치먼드와 피터스버그를 노리는 버뮤다 헌드레드 전역(Bermuda Hundred campaign)에 나섰다. 피터스버그의 방비는 약했지만 버틀러는 너무 느리게 움직였고 남군의 P.G.T. 보우리가드는 약한 전력으로도 버틀러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버틀러는 삼면이 제임스 강으로 둘러싸인 막다른 곳으로 후퇴했는데, 버틀러의 병력은 완전히 안전했지만 남군이 유일한 입구 지역을 틀어막으면서 아무것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랜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버틀러의 신세를 코르크 마개로 막힌 병 안에 갇힌 것에 비유했다.

이후 1864년 12월 버틀러는 노스캐롤라이나의 포트 피셔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큰 패배를 당했다. 버틀러는 포트 피셔가 난공불락이라고 변명했지만 해군의 데이비드 딕슨 포터 제독은 버틀러가 아닌 적당히 유능한 다른 장군이었다면 포트 피셔를 쉽게 함락시켰을 것이라고 그랜트에게 말했다. 버틀러를 해임할 기회를 벼르고 있던 그랜트는 1865년 1월 8일 마침내 버틀러를 치워버리는 데 성공했다. 버틀러는 길길이 날뛰며 그랜트와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한편, 포트 피셔가 1월 15일 북군에게 함락되면서 버틀러는 망신을 당했고 실질적으로 군사 커리어가 끝장났다.

4. 남북전쟁 이후

버틀러는 종전 이후 여러 사업체 및 로펌을 운영하며 부자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부를 전쟁 당시 부정하게 얻은 것으로 의심했다. 하지만 버틀러는 그의 재산 중 일부를 재건 시대 흑인들을 고용하는 사업체나 흑인 대상 장학재단, 남북전쟁 상이용사 지원에 사용하기도 했다.

1866년 공화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된 버틀러는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친남부적 재건 정책에 반대하였다. 새디어스 스티븐스가 노쇠한 모습을 보이자 그의 뒤를 이어 존슨의 탄핵을 주도하였으나 탄핵은 1표차이로 부결되었다. 버틀러가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존슨에게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탄핵 실패의 한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정책적으로는 여성 참정권, 공무원에 대한 일 8시간 노동, 그린백 발행 등 여러 시대를 앞선 대중주의 및 복지 정책을 지지하였다. 1871년 민권법(쿠 클럭스 클랜법)의 초안을 작성하여 1차 KKK단 박멸에 기여했다. 찰스 섬너와 함께 1875년 민권법을 발의하여 인종차별을 철폐하고자 했지만, 이 법은 1883년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위헌 처리되었다. 이 법은 1957년 민권법 이전 의회를 통과한 마지막 인권법이었고, 이후 1964년 및 1968년 민권법의 바탕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쟁 중 사이가 틀어졌던 그랜트 대통령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그랜트의 재건 정책을 의회에서 지지하는 대표적인 인사로 꼽혔다.

여러 차례 공화당의 매사추세츠 주지사 후보를 노렸으나 공화당 내 보수파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고, 1874년에는 공화당 보수파의 공격으로 하원의원 후보에서도 밀려났다. 이에 대항하여 버틀러는 좌파 성향 그린백당 창당에 참가하고 민주당과 협력했다. 버틀러는 1876년 공화당 소속으로 한 차례 더 하원의원을 맡았고, 그린백당과 민주당의 지지를 받아 여러 번의 도전 끝에 1882년 마침내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되었지만 1883년 선거에서 근소하게 패배했다.

5. 여담





[1] 버틀러는 데이비스를 연방 친화적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