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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패러것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데이비드 패러것
David Farragut
파일:빈 세로 이미지.svg
본명 제임스 글래스고 패러것
James Glasgow Farragut
출생 1801년 7월 5일
미국 테네시 캠벨스스테이션 (現 패러것)
사망 1870년 8월 14일 (향년 69세)
미국 메인주 키터리 포츠머스 해군조선소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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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조지 패러것 (친아버지)
엘리자베스 샤인 패러것 (친어머니)
데이비드 포터 (양아버지)
윌리엄 D. 포터 (의붓동생)
데이비드 딕슨 포터 (의붓동생)
수전 C. 패러것 (아내)
버지니아 패러것 (아내)
로열 패러것 (아들)
복무 미합중국 해군 (1810~1870)
최종 계급 해군 대장

1. 개요2. 생애
2.1. 두 뱃사람의 아들2.2. 미영전쟁과 첫 실전2.3. 계속되는 해군 생활2.4. 미국-멕시코 전쟁과 그 이후2.5. 남북 전쟁2.6. 말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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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해군 최초의 제독(소장, 중장, 대장). 10대 시절 미영전쟁부터 60대 남북 전쟁 시기까지 해군에 종사하며 여러 공적을 세웠다.

2. 생애

2.1. 두 뱃사람의 아들

데이비드 패러것은 1801년 7월 5일 미국 테네시에서 조지 패러것(George Farragut)과 엘리자베스 샤인 패러것(Elizabeth Shine Farragut)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는 본래 호르헤 파라구트(Jorge Farragut)라는 이름의 발레아레스 제도 태생 스페인인이었지만 1776년 북아메리카로 이주해 미국 독립 전쟁에서 싸운 전쟁 영웅이었다.

1807년 조지 패러것이 뉴올리언스의 해군 기지로 발령이 나며 패러것 가족은 그곳으로 이주한다. 1808년 어머니 엘리자베스가 황열로 사망한 후 패러것은 아버지와 함께 복무하던 해군 장교 데이비드 포터(David Porter)에게 입양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임종할 때 패러것 부부의 도움을 받았던 것을 잊지 않았던 데이비드 포터는 어린 패러것을 자신의 자식들과 함께 키웠다.

2.2. 미영전쟁과 첫 실전

1810년 12월 17일, 패러것은 9세의 나이로 미합중국 해군 사관후보생(midshipman)[1]이 된다. 1811년 포터가 32문 프리깃 에식스의 함장이 되며 패러것 또한 에식스에서 복무한다. 그러던 중 1812년 미영전쟁이 발발하며 10살짜리 사관후보생은 처음으로 실전을 경험한다. 이 과정에서 13세의 나이로 나포한 선박인 알렉산더 바클레이(Alexander Barclay)[2]의 지휘를 맡아 발파라이소로 데려가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바클레이호의 선장은 이 임명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다음날 아침이면 뉴질랜드 해안에 있게될 것"이라고 씹고 심지어는 권총 협박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패러것은 선박을 지휘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1814년 3월 28일 에식스가 영국 프리깃 포이베(Phoebe)와 슬루프오브워 체럽(Cherub)에게 나포될 때 패러것 또한 포로로 잡혔고, 그해 7월 뉴욕으로 송환된다. 11월에서야 포로 상태에서 벗어난[3] 패러것은 브릭 스파크(Spark)에 배치되지만 스파크와 패러것이 전투 준비를 마칠 무렵 전쟁이 끝났다.

대충 시기에 양아버지의 이름을 따 데이비드로 개명했다고 한다.

2.3. 계속되는 해군 생활

1815년, 패러것은 74문 전열함 인디펜던스(Independence)에 배치되었다. 당시 지중해바르바리 해적제1차 바르바리 전쟁에도 불구하고 미영전쟁에 국력을 쏟던 미국의 선박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미영전쟁을 마친 미국은 다시 한 번 지중해로 함대를 파견한다. 그 중에는 인디펜던스도 있었지만 인디펜던스가 도착할 쯤에는 이미 전쟁이 끝나있었다.

이후 지중해의 여러 함선에서 복무하다 1819년 장교 대리(acting lieutenant)가 되었고 1820년 미국으로 돌아와 장교 시험을 봤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냈다.[4] 1823년에는 양아버지 포터가 지휘하는 전단에서 해적 토벌 활동을 하며 증기함 씨굴(Seagull) 부함장 보직을 맡기도 했다. 이후 스쿠너 페럿(Ferret) 함장이 되며 처음으로 함장 자리에 올라보기도 하지만 잠시 미국으로 돌아온 동안 황열 때문에 본국에 남게 되었다. 이때 첫번째 아내인 수전 C. 머챈트(Susan C. Merchant)와 결혼했다.

1825년에 장교(lieutenant)로 승진, 프리깃 브랜디와인(Brandywine)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이때 브랜디와인함의 승무원 중 한 명으로 오랜만에 미국으로 돌아와 환영 받고 돌아가는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를 호위했다. 이후 미 해군 브라질 전단에서 복무하다 1830년 다시 본국으로 귀환했다. 프리깃 자바(Java)에서 복무하던 1831년에는 냇 터너의 반란으로,슬루프오브워 나체즈(Natchez)에서 복무하던 1833년에는 연방법 무효화 사태로 비상 사태에 돌입한 적도 있었다. 연방법 무효화 사태 후에는 또 브라질에 배치되었다. 1834년 스쿠너 복서(Boxer)의 함장이 되었고 1838년에는 슬루프 이리(Erie)의 함장이 되어 페이스트리 전쟁[5] 때 미국의 이권 수호를 위해 멕시코만으로 보내져 프랑스군 함대가 멕시코 도시와 요새에 포탄을 쏟아붓는 것을 직관했다.

1839년 이리함의 함장직을 그만두고 집에서 긴 시간 동안 병으로 고통 받던 아내 수전의 치료에 전념하지만 수전은 1840년 사망했다. 다음해 전열함 델라웨어(Delaware)의 부함장으로 복귀했으며 9월에는 준함장(commander)으로 승진했다. 이후 다시 브라질 전단에서 복무하며 슬루프오브워 디케이터(Decatur)의 함장으로 부임했고 1843년 귀국해 함장 자리를 마치고 두번째 아내 버지니아 로열(Virginia Loyall)과 결혼했다.

2.4. 미국-멕시코 전쟁과 그 이후

미국-멕시코 전쟁이 벌어지자 노퍽 해군조선소 부사령관으로 있던 패러것은 페이스트리 전쟁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존 Y. 메이슨 해군장관에게 직접 전선에 나가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6] 결국 1847년 슬루프오브워 새러토가(Saratoga)의 함장이 되지만 상관과의 마찰과 또다시 함대에 돈 황열로 실망스러운 경험만 하고 노퍽 해군조선소 부사령관으로 돌아오고 만다.

크림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과 프랑스의 함대를 참관하겠다고 해군부에 청원했지만 점잖은 거절을 당하고 서해안에 새로운 해군 기지를 세우는 임무를 받게된다. 그렇게 패러것은 1854년 캘리포니아 메어아일랜드 해군조선소 초대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사실 말이 초대 사령관이지 그때는 아무것도 없는 맨땅이라 만에 정박시켜둔 배에서 가족과 살며 기지가 토대부터 지어지는 광경을 봐야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최고 계급인 함장(captain)으로 승진했다.

1858 최신 슬루프오브워 브루클린(Brooklyn) 함장으로 부임해 다시 동해안으로 돌아왔으며 1860년 브루클린 함장을 그만두고 버지니아의 자택으로 돌아갔다.

2.5. 남북 전쟁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선출되며 분리주의 운동이 거세진다. 이에 테네시에서 태어났고, 루이지애나에서 자랐으며 버지니아에 사는 패러것은 "내가 남부를 향해 손을 올리는 일이 없기를"라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아메리카 연합국이 독립하고 남북 전쟁이 발발하고 버지니아가 연합국에 가입하는 상황이 되자 연방 지지 입장인 패러것에게 여기서 꺼지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패러것은 "좋아. 다른 곳에서도 살 수 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가족과 함께 뉴욕 헤이스팅스온허드슨으로 이주해버렸다.

1862년이 시작되며 미 해군부는 패러것을 서 멕시코만 봉쇄 전단 지휘관으로 임명한다. 기함 슬루프오브워 하트포드(Hartford)를 타고 전단의 지휘권을 인계받은 그의 임무는 미시시피강의 입구이자 남부에서 제일 큰 도시인 뉴올리언스의 방어시설을 약화시켜 도시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뉴올리언스는 남쪽 미시시피강 하구에 있는 세인트필립 요새와 잭슨 요새 뿐만 아니라 남부 충각함들[7]화공선의 보호까지 받고 있었다. 여기다가 강 하구의 모래톱도 큰 배가 다니기에 방해가 되었다. 거기다가 사슬로 엮은 폐선까지 가라앉혀 둔 상태였다.

멕시코만 봉쇄 전대를 지휘해 뉴올리언스를 함락시키고 미 해군 최초의 제독 중 하나가 된다. 당시까지 미 해군에는 제독(admiral)이 없었고 ‘flag officer’ 계급을 두었는데, 패러것은 최초로 임명된 ’rear admiral’ 14명 중 하나였다.

1864년 8월 모빌 봉쇄에도 참가했는데 이 당시 모니터함 테쿰세가 기뢰에 가라앉고 다른 함선들이 우왕좌왕거리자 "기뢰는 좆이나 까라하고 전속전진해!"(Damn the torpedoes, full speed ahead!)라는 과감한 명령을 내린 것이 유명하다. 모빌 만 해전 승전의 공으로 12월 중장(vice admiral)으로 승진했고 미국 해군 최고 서열 제독이 되었다.

2.6. 말년

1866 제독 승진

1867 유럽 전대

1870 사망

3. 여담

패러것급 구축함, 패러것급 방공구축함이 그의 이름을 땄다.


[1] 현대 영국 해군에서는 소위를 의미하지만 당시에는 함선에서 장교들이 시키는대로 구르며 교육을 받는 일종의 견습직이었다.[2] 본래 뉴베드포드가 모항인 미국 선박이지만 영국-스페인 연합국에게 나포되어 끌려가는걸 다시 나포했다.[3] 당시에는 포로가석방이 되어서 "포로 교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다시 참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날 수 있었다.[4] 아들인 로열 패러것은 아버지의 전기에서 "떨어진 것 같다"고 서술했지만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은 합격했지만 당사자의 기대에는 맞지 않았다고 서술했다.[5] 멕시코인 장교들이 자신의 상점을 약탈했다는 프랑스인 파티시에의 주장에 프랑스가 배상금을 요구하며 1831년 벌어진 전쟁.[6] 사실 전임인 조지 밴크로프트 해군장관 때도 보냈는데 씹혔다.[7] 제대로 된 철갑함부터 민간 증기선에 충각을 달고 목화 장갑을 두른 것까지 다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