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폐지주의 혹은 폐지주의 운동[1]은 18세기~19세기 사이의 서양 국가들 사이에서 노예제를 폐지하려는 정치적 움직임이나 세력 등을 의미한다. 특히 대서양 노예 무역에 대한 반대와 함께 자주 언급된다.2. 미국의 폐지주의
미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은 미국 독립보다도 훨씬 전인 17세기 후반에 시작되었다. 미국 북부 퀘이커들에 의해 주도된 초기 폐지주의 운동은 북부에서 큰 호응을 얻어 독립전쟁 시기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페인 등이 노예제를 반대하는 데 영향을 주었으며, 남부에서도 1735년부터 1751년까지 조지아주가 노예제를 폐지하는 실험에 나서기도 했다.남북간의 갈등을 막기 위해 건국의 아버지들은 미국 헌법 제정에서나 정치적 논쟁에서나 노예제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피했다. 1804년 시점에서 메릴랜드 북쪽의 북부 주들은 모두 노예제를 폐지하는 주법을 제정하였다. 반면 미국 남부에서는 플랜테이션 농업의 발달로 인해 노예제가 점점 더 번성하게 되었다. 이에 북부 청교도들을 중심으로 부도덕한 노예제를 북부는 물론 미국 전체에서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으며, 이를 폐지주의(Abolitionism)라고 한다.
남북 전쟁 이전에도 노예제를 반대하는 북부인들은 물론 남부인들도 꽤 많았지만, 이들의 대다수는 폐지주의자가 아니었다. 정말 강경하게 노예제를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독립 당시부터 노예제가 합법이었던 남부의 노예제까지 연방 차원에서 폐지하는 것은 지나치게 각 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폐지론자들보다는 온건했던, 남부 주들이 아닌 연방 영토(territory)에서 노예제를 금지하고 새로운 노예주(slave state)의 탄생을 막자는 에이브러햄 링컨 등의 주장도 미국 전체적으로 보면 상당히 급진적인 주장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단, 남부의 강성 노예제 유지론자들은 단기적으로든 장기적으로든 노예제를 위협하는 모든 정치적 움직임을 폐지주의로 간주하고 공격했다.
하지만 노예제 문제, 북부와 남부의 발전 속도 차이 등으로 인해 미국의 남북갈등은 점점 깊어졌고, 이 과정에서 남부가 어떻게든 노예제를 연방 영토로 확대하기 위해 여러 무리수를 두기 시작하면서 북부에서 폐지론자들의 세력은 점점 강해졌다.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얻은 영토의 노예제 허용 문제를 놓고 의회는 파행으로 치달았고,[2] 이를 겨우 봉합한 1850년의 타협에서는 도망노예 단속법을 강화하여 북부 주들의 권리를 침해하면서까지 북부로 도망친 노예들을 강제로 붙잡아 남부의 노예 주인들에게 돌려보내게 되었다. 북부인들은 남부의 노예제 때문에 자신들의 권리가 침해됨은 물론, 이웃으로 잘 살고 있던 흑인들이 연방정부 차원에서 노예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 노예제의 부도덕함을 비판한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폐지주의의 확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정치적으로도, 휘그당의 북부 세력과 남부 세력이 노예제 문제로 갈라지면서 반노예제 북부 휘그당 세력을 주축으로 공화당이 탄생하였고, 폐지주의자들이 공화당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면서 휘그당 내의 반대에 시달리던 이전에 비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공화당 내의 폐지주의자들은 이후 공화당 급진파를 형성하여 흑인 인권과 남부에 대한 징벌을 주장했다.
1860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링컨은 엄밀한 의미의 폐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장기적으로 노예제의 폐지를 노리고 있었다. 남북전쟁 발발 이후 링컨은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하여 남부연합의 노예들을 법적으로 해방시켰고,[3] 연방 편으로 남은 노예주들에서는 연방정부의 눈치를 보며 점진적인 노예 해방 법안을 실행했다. 연방군은 노예해방선언 이후 지속적으로 점령지의 노예들을 해방시켰으며, 1865년 전쟁이 끝나고 모든 남부연합 주들이 연방의 통제 아래로 들어오면서 남부의 모든 흑인 노예들은 해방되었다. 마지막으로, 1865년 12월 수정헌법 13조가 비준되어 노예제는 미국 전역에서 완전히 금지되었다.
3. 관련 단체
4. 관련 사건
- 갑신정변
- 갑오개혁 - 한국사에서 노비제가 최초로 폐지된 개혁이다.
- 남북 전쟁 - 미국 북부의 폐지주의 vs 남부의 반폐지주의가 충돌해서 벌어진 전쟁이였다.
- 노예해방선언
- 아이티 혁명
- 프랑스 혁명 - 다만 푀양파 등은 폐지주의에 반대했다.
5. 관련 유명 인물
소극적 폐지주의자는 ☆ 표시.- 데이비드 C. 브로데릭 - 미국 상원 의원. 1859년 브로데릭과 테리의 결투에서 노예제 지지자와의 결투에서 사망하면서 "노예제 폐지 운동의 순교자"가 되었다.
-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 에이브러햄 링컨☆
- 윌리엄 윌버포스
- 자크 피에르 브리소
- 제러미 벤담
- 존 브라운
- 존 퀸시 애덤스
- 찰스 그레이
-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 아이티 혁명의 영웅
- 프레드릭 더글러스
- 해리엇 터브먼
[1] 다만 폐지주의 운동이라는 표현보다는 노예제 폐지 운동이라고 의역하는 경우가 많다.[2] 당장 그지역은 멕시코 때 부터 이미 노예제 폐지가 당연한 지역이었다.[3]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링컨이 지휘하던 북부 관점에서, 당시 남부는 독립선언을 해서 실질적으로는 어떤 노예도 해방되지 못했다. 단지 남북전쟁을 노예제 따위나 수호하고 있는 사악한 남부 VS 그런 남부를 응징하고 노예제를 없애려는 정의로운 북부의 대결로 보이려는 의도였다. 실제로 영국이나 프랑스는 남부 지원을 고민해보기도 했으나 노예해방선언이 터지자 '남부를 편든다 = 너는 노예제 옹호자'가 되어서 남부 지원을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