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06 14:45:33

클뢰브 데 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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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기의 정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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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정보
파일:푀양파.jpg
이름 헌법의 벗 결사단
원어 이름 Société des Amis de la Constitution
배경색 파란색
지도자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
선행조직 클뢰브 데 자코뱅 (일부)
1789년 애국회
창당 1791년 6월 18일
해산 1792년 6월 10일
스펙트럼 중도 ~ 우파[1]
이념 온건주의 (자유주의 보수파)
입헌군주주의, 앙시앵 레짐 반대,
온건 보수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1. 개요2. 역사3. 지지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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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Feuillants Club
불어: Club des Feuillants

한국에서는 '푀양' 혹은 '푀양파'라고도 한다. 프랑스 혁명기의 정파 중 하나였다. 왕정시대에는 자유주의 혁명을 지지했고 바렌 사건테르미도르 반동 이전 시기에는 군주의 권위를 옹호한 보수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공화파 빅 텐트 정당인 클레브 데 자코뱅과 달리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파라서 내부 이견이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코뱅과 달리 정당(클레브 조직)이자 동시에 정파로도 간주된다.

2. 역사

본래는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진보좌파들의 일원으로 1789년 애국회와 일부 클뢰브 데 자코뱅의 일원들이 창당했다. 왕실이 오스트리아로 튀려고 시도한 바렌 사건 이후 급진적 공화파들이 자코뱅을 점령하자 1791년 탈당해서 새 살림을 차려서 만든 정당이 클뢰브 데 푀양이다.

창당 초기에는 지롱드당 등 온건적 공화파들과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1792년 경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반대했던 푀양파쪽 외무대신이 지롱드당에게 고발당해서 파면됨으로써 관계가 틀어지게 된다. 클뢰브 데 푀양의 공식 해산일은 1792년 6월 10일이지만 실질적인 해산일은 8월 경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이후 지롱드를 포함한 공화파들에 의해 철저하게 탄압당하게 된다.

그러나 공포정치기 살아남은 푀양파 잔존세력은 테르미도르 쿠데타 이후 프랑스 정계로 돌아와 클리시파(Club de Clichy)를 결성해 가톨릭 교회와의 화해, 언론 검열 철폐, 부르봉 왕가 구성원들의 프랑스 귀국 허용 등을 주장하며 공포정치와 탄압, 언론 검열에 지친 민중들로부터 인기를 쓸어담았다. 그 결과 1797년 총선에서 과반이 훨씬 넘는 의석을 얻으며 압승을 거두었으나, 이로 인해 왕정이 복고될까 두려워한 테르마도르파가 군부를 조종해 프뤽티도르 18일의 쿠데타(Coup d'État du 18 fructidor an V)을 일으켜 클리시파 정치인들을 대거 체포해 유배를 보냈고 파벌은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이번엔 반대로 자코뱅 잔존 세력이 부활해 총재정부에 더더욱 분노한 민중들로부터의 인기를 쓸어담으며 1798년 선거에서 전체 의석이 70%을 얻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테르미도르파는 이번에는 플로레알 22일 법(Loi du 22 floréal an VI)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일방적으로 자코뱅 의원 106명의 당선을 무효화하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켜버렸다(...) 그런데도 이듬해 선거에서 자코뱅이 우세를 점하자 시에예스가 자코뱅을 끌어내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이다.

3. 지지 세력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가 당을 이끌었으며 후기에는 지롱드파에서 전향한 앙투안 바르나브가 중심이 되었다. 이외에도 알렉상드르 드 라메트, 아드리앙 뒤퐁 등이 핵심 인사였다. 루이필리프 조제프 도를레앙과 함께 혁명을 지지한 귀족들, 부르주아 내 보수파들의 주 지지를 받았다. 진보적인 부르주아들은 공화파인 지롱드파를 지지했다.
[1] 좌우의 분기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중도파냐 우익이냐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들이 훗날 부르봉 왕정복고~7월왕정 시기에 오를레앙주의자가 된다. 여담으로 당시에는 중도우파라는 용어가 없었으므로 중도우파로 적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