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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기의 정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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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3대 왕당파 | ||
정통왕당파 | 오를레앙파 | 보나파르트파 |
오를레앙파 Orléanisme / Orléanism | |
프랑스 왕국 7월 왕정 시기의 국장이자 오를레앙주의의 상징. | |
프랑스 왕국(7월 왕정)의 국왕, 루이필리프 1세 | |
<colbgcolor=#000> 영어 명칭 | <colbgcolor=#ffffff,#1f2023>Orléanists / Orléanist Party |
활동 시기 | 1830년 ~ 1899년 |
왕위 계승자 | 루이필리프 1세 |
주요 정치인 | 아돌프 티에르, 프랑수아 기조 빅토르 위고[1], 앙리 도를레앙[2] |
이념 | 반(反) 부르봉 왕조(~1871년) 보수주의 근왕주의 입헌군주제 계파 : 자유주의 자유보수주의 (이상 7월 왕정 시기) 입헌자유주의 (제 2제국 시기)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자유보수주의(~1877년) 반동적 보수주의(1899년~) (1870년대 이후) |
스펙트럼 | 중도좌파 ~ 중도우파 (7월 왕정 시기) 중도우파 ~ 우익 (제 2공화국 시기) 중도 ~ 중도우파 (제 2제국 시기[3]) 우익 (1871년~1877년) 우익 ~ 극우 (1878년~1899년) |
영향 | 프랑스의 자유주의 입헌자유주의 자유보수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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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프랑스의 주요 정치 세력 중 하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루이필리프 1세가 있으며 7월 왕정기에는 주류 중도주의 세력, 이후 공화정 체제에는 우파의 위치에 있었다.2. 기원과 7월 왕정 시기
오를레앙파의 전신인 교조주의파(Doctrinaires)는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 동안 존재한 정파로, 온건 자유주의 성향이었으며 부르봉 왕정을 지지했으나 극렬 법통주의 초왕당파와는 구별되었고, 급진공화파와도 구별되었다. 이들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루이 18세의 통치에 협력했으나[4] 샤를 10세가 반동적인 정치를 펴자 부르봉 왕정을 적대하게 되었고, 7월 혁명에 참가해 오를레앙 공 루이필리프를 지지하게 된다.7월 왕정기의 오를레앙주의는 크게 순수 오를레앙주의("pure" Orléanisme)와 진보 오를레앙주의("progressive" Orléanisme)로 나뉜다. 주류 세력이였기 때문에 중도우파부터 중도좌파까지 성향이 다양했다.
정통왕당파와 보나파르트파와 함께 19세기 프랑스의 3대 왕당파 우익세력을 구성했으나, 그 중에서는 제일 온건하고 의회민주주의 친화적인 성향으로 평가받았다.
2.1. 순수 오를레앙주의
저항당 Parti de la Résistance | |
<colbgcolor=#5f85bb> 이전 정당 | <colbgcolor=#ffffff,#1f2023>교조주의파 (Doctrinaires) |
활동 시기 | 1832년 ~ 1848년 |
주요 정치인 | 프랑수아 기조 장드디외 술트 |
이념 | 보수주의 자유보수주의 |
스펙트럼 | 중도우파 |
저항당(Parti de la Résistance)이 이러한 성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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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진보 오를레앙주의
운동당 Parti de mouvement | |
<colbgcolor=#FF0080> 이전 정당 | <colbgcolor=#ffffff,#1f2023>자유주의파(Liberals, 1817-1824), 교조주의파(Doctrinaires) |
활동 시기 | 1831년 ~ 1848년 |
주요 정치인 | 알렉시스 드 토크빌 아돌프 티에르 |
이념 | 자유주의 내셔널리즘 |
스펙트럼 | 중도좌파 |
운동당(Parti du Mouvement)이 이러한 성향을 보였다.
여담으로 이들의 후예는 19세기 말 드레퓌스 사건과 그 후폭풍으로 인해 크게 우경화, 중도우파 성향으로 전향해 20세기 초 프랑스의 주요 우파 정당인 공화연맹(Republican Federation)을 결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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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질서당 창당과 그 이후
질서당 Parti de l'ordre | |
<colbgcolor=#000080> 이전 정당 | <colbgcolor=#ffffff,#1f2023>운동당, 저항당, 일부 법통파 |
활동 시기 | 1831년 ~ 1851년 |
주요 정치인 | 프랑수아 기조 알렉시스 드 토크빌 아돌프 티에르 빅토르 위고[5] |
이념 | 자유보수주의 보수주의 왕당파[6] |
스펙트럼 | 중도우파 ~ 우익[7] |
당시 오를레앙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이들은 푸아티에 거리 위원회(Comité de la rue de Poitiers)[9]라는 우파 빅텐트 정파로 이어진다. 당시 계파는 정통왕당파, 오를레앙파, 공화파로 나뉘었다.
1848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돌프 티에르의 주도 하에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지지해 대통령 당선을 도왔고, 이듬해 치러진 선거에서 전체 705석 중 450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이후 질서당은 루이 나폴레옹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질서당은 군주제 복원을 위한 전초단계로서 이용하기 위해 루이나폴레옹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조종하려 했지만 그 본인이 최고 권력자가 되고자 했던 루이 나폴레옹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1849년에도 왕정복고를 이루려는 질서당과 내쫒기지 않으려는 보나파르트파 사이의 권력투쟁이 있었고 이때문에 몇몇 각료가 사퇴해야 했으나, 둘의 대립은 1850년 질서당을 중심으로 통과시키고자 했던 선거법 개정안에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났다. 질서당은 지난 선거에서 온건공화파를 누르고 제2당으로 등극한 산악파의 성장을 막기 위해 투표를 위해서는 현재 거주하는 지역에 최소 3년 이상 거주해야 한다는 제한을 추가한 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이는 거의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 가까이 투표권을 빼았겠다는 것이었기에 즉각 반발이 뒤따랐다. 질서당은 온건공화당과 산악파의 반발을 물리치고 물량으로 법을 날치기 통과시켰으나 루이나폴레옹은 자신의 재선을 위해 내심 이 법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일단 법이 선포되기는 했으나 하루아침에 투표권을 빼앗긴 노동계급과 기타 수많은 국민들이 이 법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하자, 마침 1851년 7월 19일 재선을 위한 개헌 시도가 좌절된 루이나폴레옹은 의회를 해산해버리기로 마음먹고 이 법을 폐지하는 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아슬아슬 표차이로 의회에서 부결되자 이를 명분으로 12월 2일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했다. 이 쿠데타 이후 결국 질서당은 강제 해산되었다.
제2제국이 무너진 후에는 법통주의 등 기타 군주주의자들과 함께 왕당파(Monarchites)를 결성했다가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나자 반드레퓌스파의 대두에 대한 반동으로 1899년 악시옹 프랑세즈를 결성한다. 이 조직은 본래 오를레앙주의 성향의 민족주의 단체로 성립되었지만 30년대 이후 파시즘의 영향을 받아 극우화하였고, 이에 실망한 오를레앙 왕가 당수 기즈 공작 장은 악시옹 프랑세즈와 관계를 끊어버린다. 가톨릭교회에서도 악시옹 프랑세즈를 비난한 결과 많은 가톨릭 신자가 이탈하면서 운동 동력을 상실하고 잠시 주춤했으나 살아남아 1940년 비시 프랑스 정권 창립에까지 관여하게 된다. 이 단체는 현재에도 남아 있으며 파시즘 물이 빠진 지금까지도 오를레앙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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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융합주의(보수 오를레앙주의)
융합주의파 Fusionist | |
<colbgcolor=#a9a9a9> 이전 정당 | <colbgcolor=#ffffff,#1f2023>질서당, 일부 법통파 |
이후 정당 | 왕당파(Monarchites), 이후 반드레퓌스파 및 악시옹 프랑세즈 |
활동 시기 | 1871년 ~ 1879년[10] 또는 1883년[11] |
주요 정치인 | 앙리 도를레앙[12] 알베르 드 브로이[13]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14] 피에르 드 블라카스[15] |
이념 | 프랑스 민족주의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전통적 보수주의 가부장적 보수주의[16] 법통주의 가톨릭 교권주의 |
스펙트럼 | 우익[17] ~ 극우 |
이들은 민족주의를 수용하여 스페인 부르봉 왕조 구성원을 모셔오자고 주장한 일부 법통주의자들의 주장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부하고 오를레앙주의자들과 결탁하였으며, 이후 오를레앙주의는 전반적으로 보수주의, 권위주의 성향을 띄게 되어 크게 우경화한다. 왕정복고가 최종적으로 좌절되고 군주주의자들이 선거에서 대패한 1898년 이후 보수 오를레앙주의자들이 오를레앙주의 운동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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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악시옹 프랑세즈(반동적 오를레앙주의)
악시옹 프랑세즈 Action Française | |
<colbgcolor=#000> 이전 정당 | <colbgcolor=#ffffff,#1f2023>왕당파(Monarchites), 일부 법통파, 반드레퓌스파 |
활동 시기 | 1898년 ~ 1933년[18] |
주요 정치인 | 샤를 모라스 |
이념 | 프랑스 국수주의 반자유주의 반민주주의 반유대주의 반동주의/왕당파 |
스펙트럼 | 극우 |
자세한 내용은 악시옹 프랑세즈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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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의의
부르봉 왕정복고 시기부터 7월 왕정기 까지, 프랑스 2월 혁명 이전까지의 오를레앙주의자들은[19] 자유보수주의에 가까운 성향이였고, 보통 역사적 의미의 오를레앙주의는 이 시기의 정치 세력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후로는 우파로 분류되었다. 당시 정권내내 기업가, 학자, 언론인, 그리고 군인들과 같은 부르주아들의 지지를 유지했으며, 그들이 다소 분열된 파벌들로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제도를 지지했다.20세기 이후 공화주의가 주요 정치 이념으로 자리잡은 프랑스에서는 왕당파 자체가 반동적 보수주의이기 때문에 여러 오를레앙주의자들은 차별화와 타협을 위하여 보나파르트주의, 법통주의와 달리 공화주의적 이념들을 채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오를레앙주의자들은 우경화를 거치며 극우 이데올로기를 채택하였기에 반동우익으로 분류된다.[20] 현대 프랑스에서 왕당파는 거의 몰락하다시피 하여 학술적으로 오를레앙파가 논해질 때는 보통 부르봉 왕정복고 ~ 7월 왕정 시기의 오를레앙파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입헌군주적 자유주의제도를 옹호하는 우파 세력이었다고 평가받는다.
6.1. 현대 프랑스 '자유주의 우파' 전통
||<-3><tablebgcolor=#002395><tablebordercolor=#002395><tablewidth=100%> ||
사회주의 | 자유주의 · 급진주의 | 자유주의 우파 드골주의 내셔널리즘 |
현대 프랑스의 (극우가 아닌) 우익 세력을 크게 둘로 나눌때 자유주의 우파[21]와 드골주의 우파[22]로 나눈다. 프랑스 현대 주류 우파들은 공화주의자들이지만 보수적인 우파 이념 특성상 정치적 전통과 뿌리를 중시하는데, 가령 자유주의 우파들은 오를레앙주의 전통, 드골주의자들은 보나파르트주의 전통으로 분류한다.[23]
이 오를레앙주의 기반 '우파 자유주의'(droite libérale) 전통은 니콜라 사르코지같은 현대적인 우파 자유주의자부터 현대기준 극우 왕당파적 오를레앙주의자까지 다양하다.
7. 같이 보기
8. 둘러보기
자유주의적 패권 | 어퍼머티브 액션 | 소수자 권리 | 자유시장 | 양심의 자유 |
자유주의(국제관계학) | 소셜 저스티스 워리어 | 폐지주의 | 모병제 | 객관주의 |
민권 운동 | 세계화 | 부르주아 정당 | 현대자유주의 | 자결권 |
친선택 | 해방신학 | 무기소지권 | 사회자유 보수주의 | 세속주의 |
시니스트리슴 | ||||
관련 단체 | ||||
자유주의 인터내셔널 | 자유지상당 국제동맹※ | 나우만 재단 | 몽펠르랭 소사이어티 | 진보동맹※ |
주요 3대 이념의 분파 (사회주의 · 자유주의 · 보수주의) · 기타(내셔널리즘 · 생태주의 · 포퓰리즘) 자유주의와 관련된 다른 틀 (사회민주주의 · 신자유주의 · 자유지상주의 · 진보주의) ※ 넓은 의미의 자유주의 단체; 각각 자유지상주의, 진보주의에 속한다. |
[1] 초기 생애 동안 왕당파로서 1848년 국민의회 의장까지 했다[2] 루이필리프 1세의 아들이자 군 장교. 1871년 당시 왕당파 당수[3] 오를레앙주의자 다수가 자유 보나파르트주의라는 이름으로 보나파르트파 내 온건파를 형성했다. 중도좌파가 아닌 이유는 자유주의자와 공화주의자 파벌이 별도로 있었기 때문이다.[4] 정국의 안정을 중시한 루이 18세는 공화주의자들에 대한 복수를 부르짖는 초왕당파를 부담스러워했고, 교조주의파의 협력을 얻어 정국을 비교적 원만하게 이끌었다.[5] 1848년 국민의회 당시 의장이었다.[6] 소수 공화파도 있었지만 주류는 우익 왕당파였다.[7] 법통주의 등 노골적인 극우는 아니었다.[8] 이때 7월 왕정기에 좌익~극좌였던 공화파들이 주류 중도우파~중도좌파로 전환된다.[9] 질서당(Parti de l'Ordre)이라고도 한다.[10]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의 대통령직 사임으로 인한 군주제 복위 최종 좌절 시기 기준[11] 앙리 5세 사망 기준[12] 루이필리프의 아들로 오말(Aumale) 공작. 장교여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도 참가했다. 1871년 당시 오를레앙파의 수장으로, 아돌프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지지했다. 앙리 5세와 사이가 좋지 못해 브로이 공작에게 당권을 넘기고 정치에서 은퇴해 군으로 복귀했다.[13] 물리학자 루이 드브로이의 할아버지이자 4대 브로이 공작. 앙리 도를레앙이 물러난 이후 융합주의 운동을 사실상 이끌었다.[14] 프랑스 제3공화국의 첫 대통령, 크림 전쟁에 참전한 장교 출신으로, 개인적으로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성향이라 군주제 지지자였지만 동시에 공화국과 헌법을 수호할 의무가 있다고 여겨 개인적 호불호와 별개로 앙리 5세를 만나라는 브로이 공작의 제안을 헌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만나지도 않았고 군주제 복고안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왕당파를 더욱 분열시켜 오를레앙파 출신 온건 왕당파인 아돌프 티에르가 공화제를 지지하게 만드는데 크게 일조했다.[15] 제4대 블라카스 공작. 브로이 공작을 도와 앙리 5세와 의회를 설득하는 일을 했지만 실패한다.[16] 다만 경제적인 의미보다는 사회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17] 앙리 도를레앙처럼 중도우파에 가까운 이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1871년 이후 시점에 군주제 복원의 가능성이 점점 떨어져가자 일찍 버로우타고 아돌프 티에르 따라 공화제를 지지했다.[18] 극우 폭동으로 파시즘에 경도된 시기 기준[19] 주로 7월 혁명 이전까지[20] 파시즘과 손잡은 오를레앙주의자들도 있다. 제3공화정 후반에 끊임없이 공화정을 흔든 악시옹 프랑세즈(Action française)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파시스트 집단인 라 카굴(La Cagoule), 프랑키스트 운동, 불의 십자단, 프랑스 인민당 등과 자유전선 등의 동맹을 맺기도 했다.[21] 자유보수주의 또는 단순하게 자유주의. 현대 프랑스에서는 보수자유주의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사회'를 붙이지 않으면 보통 우익세력이 자유주의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22] 공동체주의나 가부장적 보수주의[23] 프랑스어 위키백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