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프랑수아 드 라 로크 François de La Rocque | |
본명 | 프랑수아 드라로크[1] François de La Rocque |
출생 | 1885년 10월 6일 |
프랑스 제3공화국 브르타뉴 로리앙 | |
사망 | 1946년 4월 28일 (향년 60세) |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파리 | |
국적 | 프랑스 제3공화국 → 비시 프랑스 →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
직업 | 정치인, 군인 |
정당 | 불의 십자단 (1927~1936) 프랑스 사회당[2] (1936~40) |
계급 | 대령 |
가족 | 부 레몽 드 라 로크 모 안 솔리에 |
[clearfix]
1. 개요
1930~1940년대 프랑스의 정치가. 불의 십자단이라 불리는 극우 반공화국 운동을 이끌며 제3공화국 타도를 주장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독일에 항거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5년 10월 6일 브르타뉴 로리앙에서 군주주의자 장군인 레몽 드 라 로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5년 생시르 사관학교에 입학했으며 1907년 졸업해 임관하여 프랑스령 알제리, 사하라에서 근무하다가 1912년 본토 근무로 전환되었으나 바로 다음해인 1913년 프랑스령 모로코에 파견되었고 1914년 모로코에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1916년 극심한 부상을 입고 본국으로 후송되었다.[3] 종전 이후 페르디낭 포슈의 참모가 되었다가 1921년 막심 베이강의 명령에 따라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한창이던 폴란드 제2공화국에 파견되어 폴란드군의 고문이 되었다. 이후 필리프 페탱 휘하에서 이마지겐(베르베르) 토벌을 맡았다가 1927년 육군중령으로 퇴역했다.1931년 재향군인 단체인 <불의 십자가>를 장악하여 반의회주의, 반마르크스주의, 극단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매우 공격적인 활동을 벌였다. 라 로크는 의회가 우유부단하며 부패해 있다고 비판했으며 볼셰비키 혁명이 프랑스를 위협한다고 주장하며 노동자들을 국가조합주의 경제 하에 통합시켜 권위주의 국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2.2. 불의 십자단 활동
"프랑스 인종은 위대한 종합이다. 그것은 전체를 이룬다. 언어 연구도 유전 분석도 이 사실을 거스를 수는 없다. 지리적 출신과 종교적 신념도 통용될 여지는 없다. 오직 그들이 진실하고 검증된 확신에 차 있는 한에서 프랑스인의 자질과 헌신만이 중요하다."
프랑스 민족주의에 대한 라 로크의 견해
프랑스 민족주의에 대한 라 로크의 견해
개선문 앞에서 행진하는 라 로크 |
하지만 라 로크는 단순한 수꼴이 아니라서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드레퓌스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당시 반유대주의에 찌들어 있던 프랑스의 다른 우파들과 달리 반유대주의를 반대하여 일부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기도 하였으며 <불의 십자가의 아들과 딸>, 여성단체인 <프랑스사회운동>, <민족 의용대> 등 여러 단체를 만들어 여성, 어린이, 노동자 등의 지지를 끌어내고자 했다. 이어 그는 <디스포스>라 불리는 준군사단체를 조직하여 1933년과 1934년에 걸쳐 무력시위를 감행했고 공산주의 폭동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디스포스, 기동돌격대, 민족의용대 등은 좌파의 반대 시위에 맞서는 돌격대 역할을 했으며 불의 십자단은 수천대의 차량을 동원하여 군대의 사열식을 방불케 하는 거창한 퍼레이드를 전개하곤 했다. 나중에 프랑스 대통령이 되는 프랑수아 미테랑도 이때 민족의용대 파리 3지부에 18세의 나이로 가입했다.[4]
1934년 2월 6일 하원의사당 앞의 극우파 시위에서 극우 가두시위대가 대규모 행진을 벌이다가 15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졌는데 불의 십자단은 시위는 참여했으나 다른 극우파들의 폭동에는 가담하지 않고 질서를 지켰다. 이에 3만 5천명이었던 불의 십자단 회원수는 1935년 22만 8천명으로, 다시 50만명으로 폭증하였다.
불의 십자단의 급격한 성장에 좌파들은 불의 십자단이 파시스트라고 비난하면서 크게 경계하였다. 하지만 히틀러와 달리 라 로크는 불의 십자단이 벌이는 모든 집회와 행진을 멀리서 구경할 뿐 참여하진 않았으며 공식석상에서 무분별한 폭력행위를 비난하면서 자신의 집단이 엄격한 규율과 질서를 갖추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라 로크는 곧 제3공화국을 타도할 D-DAY가 오고 있다는 선동적인 발언을 하였으며 히틀러는 경계했지만 무솔리니에 대해서는 친근감을 보였다. 이러한 반마르크스, 반혁명 구호들은 라 로크가 프랑스의 부르주아들의 지지를 받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보르고 공작, 전기산업 재벌 에른스트 메르시에, 화장품 업계 재벌 프랑수아 코티, 철강업계 재벌 프랑수아 드 벵델 등 프랑스의 귀족과 재벌들이 라 로크를 재정적으로 지원했고 프랑스 최대 보수정당인 공화주의 연맹도 불의 십자단과 연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라 로크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농민과 노동자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일반적인 프랑스 우파와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다. 라 로크는 이윤 공정 배분, 우수한 노동자들에 대한 유급휴가 제도, 최저임금제, 직업조합 창설 등을 주장하며 산업 노동자들의 지지를 추구했고 또한 농업노동자들에 대한 '우호적 대우'를 호소하고 농민조합을 조직하여 부농들에게 빈농들에게 양보할 것을 촉구했다. 이 때문에 1934년 시점에서 부르주아들이 압도적인 구성을 차지했던 불의 십자단은 기존의 지원세력인 부르주아와 갈등하게 되었다.
한편 반유대주의와 장검의 밤에 대해서 라 로크는 "라틴적 분별"에 위배되는 "독일적 잔혹함", "폭정과 종교재판의 체제"라고 비난했으며 국가주의적 예속을 강요하는 파시즘은 "우리 인종의 절도 있는 개인주의"와 다르다면서 파시즘에 대해선 반대하고 공화주의를 지지했다. 하지만 알자스-로렌의 불의 십자단 지부는 반유대주의를 공개적으로 옹호했고 라 로크 역시 반유대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평가된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열렬히 옹호했다. 이 때문에 그가 파시스트였는지 아닌지는 아직까지도 논란 대상이다. 자세한 것은 프랑스 파시즘 문서 참조.
2.3. 프랑스 사회당 활동
결국 1934년 2월 6일 시위로 파시즘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진 인민전선 정부가 1936년 6월 프랑스의 여러 우익 준군사조직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불의 십자단을 해산시키자 라 로크는 기존의 반의회주의를 버리고 프랑스 사회당을 조직하여 의회제도를 인정하는 공식정당을 창설하였다. 허나 <기동선전단>을 비롯한 준군사조직을 유지하였으며 대규모 집회를 벌이고 좌파 시위대와 폭력적으로 충돌하는 등 기존의 불의 십자단 시절의 모습을 상당수 유지했다.라 로크와 그의 프랑스 사회당은 1936년 4백만 명이 참가한 총파업과그 여파로 노동조합이 성장하고 인민전선 정부가 집권하자, 전술을 수정하여 준군사조직의 거리 행진을 자제시키고 합법 정당으로서의 등록을 수용하는 등 이미지를 쇄신하고 총파업 기간 동안 위축된 조직을 추스리는데 주력했다. 사실, 시기에 따라서 거리 투쟁과 폭력 사용을 자제하는 조치는 극우 파시즘 조직 상당수가 필요에 따라서 취하곤 했던 전술로서 특별히 이상하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선거에 참여하기 위한 정당 등록은 대다수 극우 파시즘 조직이 취해왔던 조치로서, 오히려 라 로크와 그의 조직은 이 점에 있어서 뒤늦은 편이었다.[5]
1940년 선거에서 라 로크와 프랑스 사회당이 프랑스 최대의 정치세력으로 부상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프랑스 침공 때문에 선거가 없어졌으니까.
2.4.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여름에 독일 국방군이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어 비시 프랑스 정부가 수립되었다. 프랑스의 권좌에 오른 필리프 페탱은 모든 민주정당을 해산시켰고 이에 따라 프랑스 사회당도 해산되었다. 이에 라 로크는 프랑스 사회진보단을 창당하여 페탱을 지지했다. 하지만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로 미국이 독일과 전쟁에 돌입하고 독일이 영국 점령에 실패함에 따라 라 로크는 독일과의 동맹을 유지하면 안된다고 판단하고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여 독일에 대한 저항운동을 전개했다.결국 1942년 프랑스 사회진보단은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혐의로 활동 금지처분되었고 1943년 3월, 라 로크와 152명의 조직원이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다. 라 로크는 독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으며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하면서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6] 하지만 과거 비시 프랑스에 협력했었던 전력으로 인해 돌아오자마자 대독 협력 혐의로 투옥되었다.
2.5. 죽음
허나 그의 수감생활도 오래가지 않았다. 독일에서의 수감생활 동안 1차 대전 때 입은 그의 부상이 극도로 악화되었고 라 로크는 1946년 4월 28일, 파리에서 사망했다.3. 파시스트였나?
프랑스 파시즘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프랑스 학파의 주장이 정설을 차지함에 따라 한동안 라 로크는 부르봉 왕조파, 오를레앙파, 보나파르트파와 같은 기존 프랑스 보수주의자들의 일원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학자 스테른헬이 프랑스가 파시즘의 요람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며 30년대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 파시즘이 만연했다고 주장하면서 프랑스 파시즘 논란이 불거졌고 여기에 케빈 패스모어, 로버트 수시 등이 개입하면서 불똥은 라 로크에게 튀게 되었다.자세한 논쟁은 프랑스 파시즘 문서 참조.
3.1. 파시스트가 아니다
라 로크가 파시스트가 아니라는 주장은 프랑스 파시즘을 부정하는 프랑스 학파나, 프랑스 파시즘의 존재는 인정하더라도 파시즘을 좌파 현상으로 규정한 스테른헬 계열이며 다음과 같은 근거과 논리를 제시한다.- 라 로크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부르주아의 지지를 받았다. (프랑스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파시즘은 좌파 현상이므로 부르주아의 지지를 받은 라 로크는 파시스트일 수가 없다.
- 불의 십자단은 1936년 합법정당으로 전환했다. 이는 의회주의를 인정한 것으로 라 로크가 파시스트가 아니라는 증거다.
- 불의 십자단과 프랑스 사회당이 운용한 준군사조직들은 어디까지나 파시즘의 도구를 차용한 것이지 본질이 아니다.
- 불의 십자단과 프랑스 사회당의 주장의 근본은 기독교적 민족주의+보나파르티즘으로 봐야 한다.
- 라 로크가 공화주의를 부정하지 않았으니 그는 드골주의 선구자로 봐야 한다.
3.2. 파시스트다
반면 패스모어나 수시, 어빈은 파시즘을 근본적으로 보수현상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불의 십자단과 라 로크를 파시스트로 파악하였다.- 파시즘은 권위주의적 보수주의와 우파 민족주의의 새로운 변종으로 라 로크는 마르크스주의 분쇄, 정치적 자유주의 분쇄를 주장함으로 이를 충실히 따랐다.
- 파시스트들이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들과 결합할 수 없다는 주장은 프랑스 학계의 오류다.
- 1936년 합법정당 전환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인민전선 정부의 강요로 인한 것이므로 어디까지나 한가지 전략에 불과하다.
- 자본주의의 국제주의적, 비생산적인 면모를 비판하고 코포라티즘을 주장한 라 로크의 주장은 기존 보수주의와 명백히 다르며 그는 기존 보수주의와 구분되는 '급진적 보수주의'로 봐야 한다.
4. 참고문헌
- 파시즘, 로버트 팩스턴, 교양인.
- 파시즘, 케빈 패스모어, 고유서가.
- 파시즘, 장문석, 책세상.
- 사회하상과 정치이데올로기, 앤드류 헤이우드, 도서출판오름.
- 프랑스 파시즘에 대한 논쟁, 김용우, 서양사론 제68호.
- 1930년대 프랑스의 파시즘과 보수주의 -불의 십자가 논쟁과 그 문제점-, 김용우, 서양사론 제60호.
- 프랑스 파시스트 이데올로기 형성에 관한 연구, 김용우, 서양사론 제45호.
- 파시즘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김용우, 프랑스사연구 제32호.
- 파시즘의 알리바이?, 장문석, 영국 연구 제29호.
5. 대중매체
- Hearts of Iron IV에서는 라 레지스탕스 DLC가 있을 때 프랑스 파시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집권하면 이탈리아, 국민파 스페인과 함께 자체 세력을 만들고 독일과 대적하게 된다.
- Hearts of Iron IV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사회보수주의 정당 프랑스 사회당의 당수로 등장하며 프랑스 공화국이 프랑스 코뮌을 멸망시켜 본토를 탈환하고 민주정을 복구했을 때 군의 지지를 얻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이후 중점과 이벤트에 따라 프랑스를 독재 국가로 만든다.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독일에게 패배하고 페탱이 지배하던 프랑스에 파시즘인 국민협동주의를 주장하면서 집권. 일드 프랑스를 재무장 시키고 독일에 알자스 로렌 반환을 요구하는 등, 인종차별 안 하는[7] 프랑스 히틀러 같은 모습을 보인다. 결국 독일을 뒤통수치고 소련과 독일을 양분하지만 조지원이 파리에 핵을 투하했다는 말을 보면 결국 좋은 결말을 보지는 못한 듯.
-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2차대전 파트의 중간 보스격 인물로 등장한다. 자세한 행적은 문서 참조.
- 카이저를 구했다에서는 영국이 영불협상이 아닌 영독협상을 해서 프랑스가 협상국이 아닌 동맹국이 되었고, 결국 패전했다. 라 로크는 오히려 원 역사의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길을 걸어서 내독나없과는 다르게 완전히 흑화했고 끝내 무솔리니, 스탈린, 에드워드와 함께 교수형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현재의 프랑스 사회당과는 다른 정당이다. Pari Social François, 약칭은 PSF로 우익대중주의 내셔널리스트 정당이다.[3] 그의 형 레몽은 소령까지 진급했다가 솜 전투에서 전사했다.[4] 미테랑은 1994년 9월 12일 인터뷰에서 가입 15일만에 환멸을 느꼈다고 주장했다.[5] 집권 전까지 합법적인 정당으로 제도권에 보이고 싶어하면서 동시에 불법 폭력과 거리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파시즘 조직들이 보편적으로 보여왔던 모습으로서, 이들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어떤 때에는 불법 폭력 및 거리 투쟁에 무게중심을 두고 또 다른 때에는 선거운동에 무게중심을 두고 하는 방식으로 두 가지 수단(불법과 합법)을 병치시키고자 노력했다.[6] 이 때의 이야기는 이터성 전투 문서 참고 바람.[7] 라 로크는 인종보다 프랑스인이란 사실이 더 중요하다면서 흑인이나 유대인이라도 프랑스를 위해 싸우면 프랑스인이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