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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국가 파시스트당 당원들의 모습. 가운데가 바로 베니토 무솔리니이다. |
이탈리아 파시즘의 상징으로 사용된 파스케스 |
Tutto nello Stato, niente al di fuori dello Stato, nulla contro lo Stato.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국가에 반항하는 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반니 젠틸레, 파시즘의 교리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국가에 반항하는 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반니 젠틸레, 파시즘의 교리
이탈리아 파시즘(fascismo italiano)[1]은 미래주의, 사회주의, 과거의 영광, 자본주의 그리고 협동조합주의 등에 입각하여 나타난 이탈리아 최초의 파시즘이며 고전적 파시즘(fascismo classico)[2]이라고도 한다.[3]
2. 역사
1914년 이탈리아 사회당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여부를 놓고 당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노선에 반대하면서 갈등을 빚고, 탈당한 민족주의 성향의 사회당원들은 베니토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파시스트 혁명행동이라는 정당을 창당했다. 전직 이탈리아 사회당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파시즘을 창설했기 때문에 조반니 젠틸레 등을 위시로 하는 국가사회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 심지어 이탈리아의 일부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4] 등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던 이 이탈리아 파시즘은 당시 이탈리아에 널리 퍼졌던 미래주의 예술을 통한 젊음[5]의 맹신, 사회주의를 통한 협동조합주의[6], 국가의 적극적인 통제, 군국주의 등을 내세우며 이탈리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탈리아인들의 우월함을 강조하고, 고대 로마 제국 시절의 광대한 영토의 회복을 강조하면서 스파치오 비탈레를 내세웠다.그 결과 1921년에는 이탈리아 의회에서 37석을 확보했고, 국가 파시스트당으로 발전했다. 1922년, 로마 진군을 통해 국가 파시스트당이 집권하면서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설립되었다. 집권한 국가 파시스트당은 일당제를 통해 다른 정당들을 하루 아침만에 일개 불법 정치 조직으로 전락시키고, 1928년에는 파시즘 대평의회(Gran Consiglio del Fascismo)라는 정부 기구를 만들어 독재 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이후 파시즘은 기존의 보수파 세력과 손을 잡기 위해 지지세력이었던 사회주의자, 조합주의자, 미래주의자 등을 모조리 숙청하거나 탄압했고, 이때부터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7] 1936년에는 에티오피아 제국을 병합했고 1939년에는 알바니아 왕국을 보호령으로 만들어 본격적으로 팽창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후 이집트 왕국, 그리스 왕국, 튀니지 등을 노리면서 제2차 세계 대전에 뛰어들었다가 1943년 패전했고 1945년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마저 무너져 이탈리아 파시즘의 시대는 끝나 버렸다.
3. 성격
이탈리아 파시즘은 원래 인종주의나 반유대주의가 그다지 없었으며, 심지어 파시스트당에는 유대인 간부도 있을 정도였다. 애초에 이탈리아부터가 무솔리니의 롤모델인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인종적 단일민족국가가 아니었으며, 북방 민족[8]과 남방 민족[9]이 섞여서 형성된 나라였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경제제재를 당하면서 고립되자,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는 경제제재를 하지 않은 나치 독일에게 접근하게 되었고, 독일과의 동맹을 위해 인종차별법을 도입했다.독일의 나치즘을 모방한 것들 중에 가장 치욕적인 것은 1938년 11월에 도입된 인종차별법이었다. 이탈리아의 유대인은 아리아인과의 결혼, 공공부문에의 취직, 정당 가입, 50헥타르 이상의 토지 소유를 금지당했다. 이것은 말 그대로 극단의 조치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에 그 어떤 인종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오랫동안 유대인 정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유대인은 대략 45,000명 정도로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학자와 사업가로서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이탈리아 사회에 거의 완벽하게 동화되었다. 따라서 대부분이 이탈리아인들이 이 법에 분노를 금치 못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도 이 법을 거부했다.
크리스토퍼 듀건,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332p
크리스토퍼 듀건,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332p
4. 여담
- 나치즘 등 변형적인 형태의 파시즘이 아닌 정통 이탈리아 파시즘을 이념으로 내세운 정당으로는 산마리노의 산마리노 파시스트당이 있으며, 이들은 이탈리아가 파시즘화되자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영향을 받아 집권했다. 오스트리아 파시즘(오스트로 파시즘)도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다.
[1] 영어로는 Italian fascism[2] 영어로는 classical fascism[3] 이탈리아 파시즘을 최초의 파시즘이라 애기하기도 하지만 이미 이전부터 다른 파시즘은 얼마든지 있었다. 소렐이 소속되었던 프랑스의 왕당파 단체인 악시옹 프랑세즈와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의 이름을 가져왔던 프루동 서클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4] 특히 무솔리니는 막스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 소유》라는 책을 읽은 뒤, 혁명적인 철학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에고이스트적인 아나키즘에 빠져들었다. 실제로 무솔리니는 에리코 말라테스타와 같은 이탈리아의 아나코 코뮌니스트들을 독재자나 전체주의자라고 말할 정도였다.[5] 사실상 미래주의에서 애기하는 젊음은 활력이다. 문제는 이 활력이 과거의 유산을 파괴하고, 전쟁을 예찬하는 방향으로 가 버린 것이며, 그 외에도 이탈리아 미래주의 예술은 파시즘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특히 무솔리니는 이 미래주의 예술을 자신의 선전에도 잘 써먹었다. 그의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예술('SISISISI'라고 적혀 있는 파시즘 당사 등)들은 대부분 이 미래주의 기조에서 나왔으며, 특히 미래주의의 창시자였던 마리네티부터가 이 파시즘에 기대를 크게 품기도 했다.[6] 이탈리아 파시즘은 가면 갈수록 소렐의 생디칼리슴에서 좀 더 국가의 영향력을 부여한 형태로 나아갔다. 소렐이 예기한 형태의 생디칼리슴은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의 팔랑헤당이 직계로 이어받았으며, 노동자 자가관리 등을 내세웠다.[7] 특히 반유대주의적인 정책이 대표적인데, 단눈치오로 대표되는 초기 파시즘은 반인종주의적 성격의 민족주의를 주장했다. 실제로도 마리네티 등의 미래주의자들도 이탈리아의 반유대주의법 제정 당시 격렬하게 반대했다.[8] 켈트족, 게르만족 등[9] 대부분 라틴족이지만 중세 시대에는 북아프리카의 아랍인과 베르베르인도 유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