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주의 Евразийство Eurasianism | |
유라시아당의 당기. 유라시아주의를 상징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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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라시아주의의 대표적인 학자 알렉산드르 두긴. |
유라시아주의는 전간기 드미트리 스뱌토폴크미르스키 대공(Дми́трий Петро́вич Святопо́лк-Ми́рский)과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로부터 시작된 민족주의 사상과 오늘날 러시아 파시스트 철학자인 알렉산드르 두긴을 중심으로 언급되는 러시아 제국주의 및 러시아 파시즘 사상을 일컫는 말이다.[1]
유라시아주의는 기존 러시아 민족주의 사관이었던 범슬라브주의와는 큰 차이가 있다. 기존의 범슬라브주의적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몽골의 러시아 지배를 '몽골-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르며 치욕으로 취급한 반면, 유라시아주의 학자들은 오히려 몽골 제국에 상당히 호의적이다.
러시아 제국 시대의 범슬라브주의가 "러시아는 아시아 무슬림들로부터 유럽을 보호하는 방파제"라는 정체성[2]을 주입했다면,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는 "러시아는 유럽과 다른 아시아 대륙의 정복자들을 이은 계승자"라는 사상을 주입한다. 이를 바탕으로 유라시아주의자들은 러시아가 맹목적으로 유럽(서구 문명)을 따를 것이 아니라 유라시아 지역의 맹주가 되어 독자노선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련 붕괴 이후에는 알렉산드르 두긴 등의 학자들에 의해 범슬라브주의, 정교회 전체주의와 결합한 신유라시아주의가 탄생했다. 그 결과 반서방, 반유대주의, 팽창주의, 패권주의 성향이 강해지며 여타 국가주의나 사회보수주의 성향의 민족주의 사상과 별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2. 역사
유라시아주의의 뿌리는,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가 표트르 대제의 시베리아 개척을 통해 유럽 동단 끝에서 우랄 산맥을 넘어 아시아 북쪽까지 이르게 되면서 생긴 정체성이다. 키예프 루스 시절부터 있었던 "슬라브족은 유럽의 동쪽을 지배한 민족"이라는 역사의식이 표트르 대제 이후 확장되면서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있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위치로부터 "러시아인은 유럽인인가 아시아인인가?"라는 질문이 시작이었다.그 해답 중 하나로 "우리는 유럽인이기도 하면서 아시아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유럽과 아시아를 모두 접수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해결책까지 같이 나오게 된 것이다.
기존의 범슬라브주의는 러시아 제국과 함께 붕괴했고, 범슬라브주의 이론을 대표하던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같은 인물들은 소련 치하에서 반동분자로 격하되었다. 유라시아주의는 근대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와 마찬가지로 러시아가 서유럽에 가지고 있었던 문화적 열등감을 해소하고, 러시아(엄밀히는 유라시아의)의 독자성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3. 고전적 유라시아주의
유라시아주의의 본격적인 시작은 소련이 건국되던 무렵 2명의 인물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시작되었으며, 이를 좌익 유라시아주의와 우익 유라시아주의로 구분한다.좌익 유라시아주의와 우익 유라시아주의의 공통점은 두 사상 모두 결국 민족주의에 기반함에도 범슬라브주의를 거부하고 다문화-다민족주의를 견지하여 민족과 인종 간 차별에 반대하고 민족 자치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고전적 유라시아주의는 비잔틴주의로 불리기도 한다.
고전적 유라시아주의자들은 군주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민주주의를 지지하지도 않았다. 당장 좌익 유라시아주의만 봐도 소련을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데서 이들이 민주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3.1. 좌익 유라시아주의
좌익 유라시아주의는 미르스키 대공으로 불리던 드미트리 스뱌토폴크미르스키가 창시한 사상이었다. 미르스키는 러시아 내전이 끝나고 폴란드를 거쳐 1921년에 영국에 정착한 백계 러시아인이었는데, 갑자기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어 처음으로 '유라시아주의'를 창시했으며 이를 민족 볼셰비즘이라고 칭했다.[3]
미르스키는 자신의 유라시아주의를 서구의 타락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러시아가 스스로 일궈낸 러시아식의 발전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라고 일컬었다. 그는 러시아 제국을 끝낸 창조적이고 열정적인 10월 혁명의 기치 아래 러시아만의 모스크바 제국이 아닌 전 유라시아의 단합된 다민족 연방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종교와 문화의 자유도 인정하여 민족-인종 간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르스키 등 좌익 유라시아주의자들은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는 더 낫고, 더 연방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변증법적으로 일궈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이들은 소련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현재 좌익 유라시아주의를 추구하는 단체는 알베르트 마카쇼프(Альберт Михайлович Макашóв)[4]의 신스탈린주의적 민족 볼셰비키와 러시아의 좌파 민족주의 정당인 E. V. 리모노프의 다른 러시아[5]가 있으며 다른 러시아는 서구의 타락한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 중국, 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직접민주주의적 유라시아주의를 주장 중이다.
3.2. 우익 유라시아주의
이에 반대되는 이들이 우익 유라시아주의자들로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트루베츠코이는 유라시아주의를 언어학적으로 해석한 언어학자로 본디 미르스키와 같은 유라시아주의 단체에 있었으나 미르스키의 마르크스주의적 행보에 반대하여 단체를 탈퇴, 자신의 유라시아주의당을 만들게 된다. 트루베츠코이는 이후 오스트리아에 살았는데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에 대해 비판을 가했으며 언어학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아리아 인종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이 하는 행보도 역겹다고 비판하다가 이후 안슐루스 당시 게슈타포에 의해 교수에서 해임당하고 지병으로 사망하였다.우익 유라시아주의의 특징은 완고한 반공주의와 언어학적 유라시아 접근, 그리고 민족-인종 간 차별의 철폐 주장에 있다. 트루베츠코이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는 서유럽과 다른 정체성을 지녔으며 유라시아주의가 대서양주의에 대항하는 첨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 가장 유명한 우익 유라시아주의자인 소련의 역사학자 레프 구밀료프(Лев Никола́евич Гумилёв)는 반스탈린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의 아들로서, 역사적으로는 그의 탄생 시대가 신유라시아주의가 태동하던 시기임에도 고전적 우익 유라시아주의를 지지하며 이를 토대로 한 러시아 제국주의 비판과 인종차별의 폐지를 통한 전 유라시아 민중의 연합을 애기했다.[6] 정작 구밀료프는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을 지녔는데 유대인의 하위 민족인 카라임이 자신의 조상인 타타르족과 친밀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3.3. 소련에서의 유라시아주의
유라시아를 제패했던 현실사회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유라시아주의와는 대척점에 있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결국 마르크스주의자이기에 제3차 코민테른 당 대회에서도 밝히듯 국가의 완전한 철폐를 목적으로 한 전 국가의 민족자결적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그렇기에 약간만 비틀면[7] 러시아 제국주의 또는 (신유라시아주의의) 파시즘적 행태가 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시작은 결국 백계 러시아인의 사상이었던 유라시아주의는 좌익 유라시아주의와 우익 유라시아주의를 막론하고 반동이나 파시스트 첩자로 낙인 찍히기 십상이었다. 좌익 유라시아주의의 창시자 미르스키 또한 영국 공산당에 입당한 후 다시 소련으로 돌아와 활동하다가[8] 간첩 협의로 체포되어 노동수용소에서 노동하다가 사망하였다.[9] 결국 고전적 유라시아주의 지지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조직화된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조국전쟁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은 민족주의가 국가를 단결시키고 전쟁에 사용함에 있어 상당히 유용함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민족주의적 선전을 이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죽었던 유라시아주의, 특히 좌익 유라시아주의가 다시금 태동하기 시작했고 이후 정부의 개혁, 개방 정책에 따라 다당제가 들어서며 고전적 유라시아주의가 21세기까지 존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4. 신유라시아주의
신유라시아주의가 본격적으로 태동한 시기는 러시아 연방 수립 이후부터이다. 유라시아주의는 범슬라브주의, 이반 일린[10]의 정교회 전체주의와 결합하여 신유라시아주의로 거듭났다.
4.1. 특징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주변국을 정복, 이를 기반으로 국가연합을 만들어 유라시아 권역을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러시아 정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졌다.이러한 신유라시아주의를 명분으로 러시아에서는 온갖 우경화 정책, 호전적 대외 정책이 실행되고 있다. 이는 소련의 강대한 국력과 영토에 대한 향수로 인한[11] 민족주의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것이다.
5. 러시아 세계
루스키 미르(Русский мир)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이 소련 붕괴 이후 좌우 상관없이 제기한 민족주의 사상으로 좌파 민족주의자들의 동슬라브권 사회주의 연대나 루테니아, 러시아 정교회의 루스의 신앙적인 단결, 일치 주장, 그리고 푸틴주의자를 포함한 러시아 보수주의, 국수주의 세력에서 주장하는 'Russian World' 등이 있다.
6. 러시아 이외에 다른 나라에서
일부 친러 성향 국가들도 유라시아주의에 찬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으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시절에 유라시아주의를 공식적으로 천명한 카자흐스탄이 있다.[12]러시아, 카자흐스탄 외에도 튀르키예, 우즈베키스탄, 헝가리, 투르크메니스탄, 중국 등 유라시아 대륙의 국가들도 이러한 사상 및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튀르키예가 전파하는 범투란주의는 헝가리와 많은 중앙아시아인들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중국은 당나라 시절의 실크로드 무역을 독점한 경험을 되살려 시진핑 집권 이후 150년을 목표로 일대일로 정책을 진행하고 있다. 범투란주의 외에 '튀르크 평의회'라고 튀르키예와 구 소련권 및 구 동구권의 국가들이 운영하는 국제 기구가 있다. 이 쪽은 범튀르크주의에 더 가깝다. 그리스, 루마니아에도 유라시아주의자들이 있다.
여담으로 반러 성향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일부도 (물론 친러 성향 포함해서) 고대 유라시아의 스키타이 유목민들을 오늘날 우크라이나인들의 직계 조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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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민족(ethnic)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내셔널리즘인 에스닉 내셔널리즘의 사례가 많지만 미국 내셔널리즘, 프랑스 내셔널리즘, 싱가포르 내셔널리즘, 대한민국 내셔널리즘, 중화민국 내셔널리즘 같은 국적자/시민권자(citizen)를 중심으로 한 시민 내셔널리즘의 사례도 있다. 주요 3대 이념의 분파 (사회주의 · 자유주의 · 보수주의) · 기타(내셔널리즘 · 생태주의 · 포퓰리즘) |
[1] 다만 신유라시아주의가 정말로 파시즘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2] 이러한 정체성은 러시아만 가진 것은 아니고 그리스의 정교회 근본주의나 아르메니아, 조지아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정체성이 존재했다.[3] '민족 볼셰비즘'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인물이 바로 미르스키라고 한다. 다만 미르스키 등 고전적 유라시아주의 사상가들은 민족 볼셰비즘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파시즘적 이미지와는 달리 파시즘이 내포한 극단주의, 군국주의, 폭력성, 인종주의에 극도의 거부감을 보였다. 애초에 민족 볼셰비즘이 상당히 정체성이 애매한 이념인지라 민족 볼셰비키를 칭하면서도 파시즘을 배격하는 게 이상하지는 않다. 다만 초기 파시즘도 나치즘 이전까지는 인종주의적 관념이 없었다.[4]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당시 러시아 연방 공산당 당원이었다. 다만 마카쇼프는 반유대주의자라는 의혹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5] 전신은 민족 볼셰비키당으로 파시스트 당원들이 분당한 후 남은 좌파 민족주의 당원들이 창설하였다. 당수인 에두아르드 리모노프는 2020년 사망하였다.[6] 여기에는 구밀료프의 어머니 아흐마토바의 경우 친할머니가 타타르인 후손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아흐마토바는 본명이 아니라 필명인데 안나는 일부러 자신의 친할머니가 타타르인 조상을 두었다는 점을 기억하고 어그로를 끌기 위해 아흐마토바라는 이슬람식 이름을 필명으로 골랐다.[7] 일례로 고전적 유라시아주의의 인종차별 철폐 주장을 비틀면 여러 민족이 함께 살되 섞여서는 안된다는 민족다원주의(ethnopluralism)적 논리나 "러시아에 살면 모두 러시아인" 하는 식으로 타 민족의 민족성을 부정하는 논리를 만들 수 있었다. 어찌됐건 민족주의적 요소 또한 가지고 있었기 때문.[8] 막심 고리키가 그의 귀환을 도왔다고 한다.[9] 여담이지만 미르스키가 소련으로 돌아갈 때 버지니아 울프는 일기에 "그는 총에 맞을 것이다" 라고 걱정하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10] 러시아 혁명 당시 서구로 피신한 백계 러시아인으로, 제정복고 및 이탈리아 파시즘적 방법론에 바탕을 둔 사상가.[11] 재미있게도 소련 시절에는 러시아에서는 러시아가 낙후된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지역 공화국들의 경제적인 문제들을 러시아가 대신 해결해주었기 때문에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상당수였다. 소련 해체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았음에도 소련 해체 자체에 대한 반발이 생각 외로 적었던 것은 공산당 보수파가 8월 쿠데타라는 삽질을 한 데다가 옐친이 엄청난 인기를 끌던 정치인이었기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 러시아에서도 낙후된 구소련 구성국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을 덜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로 경제난에 시달리게 되면서 그 생각들이 처참히 깨지게 되면서 오히려 소련으로 재통합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일게 된 것이다.[12] 다만 카자흐스탄의 유라시아주의는 신유라시아주의 같은 건 아니고 통칭 '실용적 유라시아주의'다.[13] 좌익 유라시아주의 한정[14] 신유라시아주의 한정[15] 좌익 유라시아주의 정당[16] 신유라시아주의 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