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18 09:44:46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파일:카자흐스탄 대통령기.png
카자흐스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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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초대 대통령
Нұрсұлтан Назарбаев
Nursultan Nazarbaev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파일: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jpg
본명 카자흐어: Нұрсұлтан Әбiшұлы Назарбаев
누르술탄 애비슐러 나자르바예프
출생일 1940년 7월 6일 ([age(1940-07-06)]세)
출생지 파일:소련 국기.png 소련 카자흐 SSR 알마터주 샤말간(현 우슈콩어르-Үшқоңыр)
국적 파일:카자흐스탄 국기.png 카자흐스탄
학력 ПТУ № 22[1] (전문학사) (-1960년)
카라간다 기술공업대학원[2] (금속공학 / Ph.D) (1960-1967년)
배우자 사라 알퍼스커저 나자르바예바
(Сара Алпысқызы Назарбаева)
슬하: 3녀
약력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제1비서관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카자흐 공산당 제1서기장
카자흐스탄 제1대 대통령 (1990년2019년)
정당 [[누르 오탄|
누르 오탄
]]
재임기간 1990년 4월 24일2019년 3월 20일
직업 정치인, 공학자
종교 이슬람교
서명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png
1. 개요2. 생애3. 독재4. 마냥 막장인가?5. 이야깃거리

1. 개요

카자흐스탄정치인. 초대 대통령으로 무려 5선을 지낸 사실상 독재자이다. 소련 해체 직후인 1990년부터 2019년까지 29년이 넘는 세월을 장기집권했다.

그러다 2019년 3월 20일 고령 등의 이유로 대통령직에서 사임한다고 발표했고, 그 자리에서 즉시 공문에 서명하는 퍼포먼스까지 벌였는데, 이후로도 카자흐스탄의 NSC인 보안위원회 의장직과 여당 당수직은 유지한채 대통령 위의 최고지도자로 머물러 있다. 분명 대통령이 아님에도 민족 지도자(?)라는 칭호를 얻고 다양한 직함으로 외국 정상과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다. 즉, 쉽게 말해서 대통령 자리에서만 물러났지 실상을 보면 계속 정권 장악력은 유지하고 있다는 소리.

2. 생애

1940년 7월 6일 생.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근처의 샤말간(Шамалған)에서 태어났다. 1960년 철강에 관련된 전문대학교를 졸업한 후 금속을 가공하고 주조하는 철강 노동자로 일했으며 1965년부터는 임원으로 일하였다. 정치활동은 1962년 공산당을 들어가며 시작하였고 1984년 카자흐스탄 각료회의 의장에 올랐다.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카자흐스탄 공산당중앙위원회 제1서기장으로 24년 동안 집권한 카자흐인, 딘무하메드 코나예프(Дінмұхамед Ахметұлы Қонаев, 1912년 ~ 1993년)를 실각시키고 러시아인인 겐나디 콜빈(Генна́дий Васи́льевич Ко́лбин, 1927년 ~ 1998년)을 서기장직에 임명하였는데, 이는 코나예프 재직 당시 많은 우대를 받았던 카자흐인들의 반발을 사는 계기가 된다. 때문에 콜빈이 몇 년 안가 물러나고 나자르바예프가 뒤이어 1989년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고, 1990년카자흐스탄 독립 후 대통령 선거에 단독 출마했으며 그대로 당선되었다.

그는 국민투표로 1991년 임기를 연장했고, 부정부패로 얼룩진 선거로 81%라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받아 1999년 재선되었다. 2005년 선거에서 그는 91.1% 지지율로 재선되었으며 역시 부정선거라고 국제사회와 야당의 비판을 받았다. 2007년 총선에선 여당인 누르 오탄당(Нұр Отан)이 88.0%의 득표로 국회의석 98석 중 98석을 차지하는 위엄을 보여줬다. 그는 2011년 대선에서 95.5% 지지율로 재선되었고, 2012년 총선에서 누르-오탄 당은 여전히 80%가 넘는 수상쩍은 고득표를 보였으나 이번엔 야당이 15석을 얻었다. 2015년 선거엔 당연히 출마해서 97.8%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외교적으로는 기본적으로 친러, 친중 스탠스를 취했다. 사실 카자흐스탄 외교 자체가 중국과 러시아가 바로 옆나라에 있는 강대국이므로 어찌보면 이들 국가와 잘 지내는게 당연한 반응. 하지만 일방적으로 중국, 러시아에만 기울어 있는 건 아니고, 서방과의 관계도 (그쪽에선 그닥 신경을 안쓰거나 독재자라고 욕도 하는 것 같지만..) 제법 신경을 썼다. 왜냐하면 러시아는 두말할 필요없는 가장 확고한 군사, 정치, 경제적 동맹이지만 러시아 특유의 대러시아주의에 카자흐스탄의 주권이 침해받을 것을 우려하고 있고, 중국은 자기들을 경제적 영향력으로 잠식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어느 정도 거리를 뒀기 때문. 특히 정권은 친중이라고 부를 만하지만, 일반 카자흐인 사이에서는 지금도 위구르마냥 중국이 자기들도 꿀꺽 하는 것 아니냐는 반중 감정이 엄청나다고 한다. 이는 청나라 때부터 지속되어오던 긴장감으로 카자흐족이 중국 대신 소련을 택했던 것도 이런 이유가 있다고 한다. 물론 러시아에 대해서도 주권 문제에 있어선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

'2019년 3월 19일, 카자흐스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따라서 다음 대통령이 선출되기 전까지 카섬조마르트 토카예프(Қасым-Жомарт Кемелұлы Тоқаев, 1953년 ~ ) 국회의장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다. #(러시아어) 그리고 나자르바예프는 토카예프를 차기 대통령으로 공개 지지했다.#

3. 독재

"카자흐스탄 국민이 나를 지지하고, 나에게 자리를 허락하여 주었기 때문에 지난 27년 5개월 동안 대통령으로 일할 수 있었다."
위에서 알 수 있듯 나자르바예프는 전형적인 독재자이다. 그는 서방국가들이 다른 나라에 서방의 가치를 주입하려 한다며 혁명이 일어나면 경제가 후퇴하며[3], 이슬람 국가에서는 혁명을 통해 정부가 샤리아에 기우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 혁명 일어난 서방국가들도 다 중세 교황 시절로 돌아갔어야지 물론 정부를 비판했다고 자신의 정적인 알마티 시장에게[4] 총탄 세례를 퍼부어 살해하는 게 샤리아보다 뭐가 그리 좋은 가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이 양반 이슬람교인이다.

나자르바예프가 장기집권하기 위해 카자흐스탄에서 벌이는 꼼수와 부정부패는 엄청난 수준이다. 일부 유권자들은 고용주 등으로부터 나자르바예프를 뽑으라는 강요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2010년에는 여권이 차기대선을 없애고 2020년까지 나자르바예프의 임기를 보장하자는 국민투표안을 제안해서 서방의 강한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 2015년 대선에서는 방송 및 지면을 통한 공약설명이 모든 후보들에게 보장된다고 하였으나, 정작 현지에서는 나자르바예프의 목소리만 들렸다. 심지어 많은 유권자들이 다른 후보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야당 탄압과 언론 통제를 계속하고 있는데, 나자르바예프는 초대 대통령에 오른 뒤 정적 감시를 위해 자신을 향한 야당 및 언론의 비판을 불법화했고, 모든 사회단체에 대해 의무등록제를 시행했다. 계속해서 반정부 성향의 인사들을 체포 및 투옥했으며, 카자흐스탄 정보기관과 체코 수사당국은 시민들의 개인 스마트폰 대화 내용을 감시하는 데 해킹 프로그램을 사용했다는 폭로도 나왔다. 또 이러한 독재 권력으로 대통령과 친인척들이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한때 카자흐 대통령의 신뢰를 얻었던 일리예프가 카자흐스탄의 비리에 대해 폭로한 적이 있었다. 일리예프는 카자흐스탄 정보국의 부국장이었으며, 카자흐스탄 세무당국의 고위 공직자이자 주 오스트리아 대사였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일리예프가 나자르바예프의 사위였다는 점이다. 결국 2007년 일리예프와 일가족은 누르슬탄의 총애를 잃고 납치와 정부전복 혐의로 궐석재판을 받아 징역 40년형을 언도받았으며, 살인과 고문, 돈세탁 혐의로 기소되어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검사들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알리에프는 혐의를 부인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혐의 중 일부는 대통령의 짓이라며 대통령을 고발했다. 알리에프에 따르면, 나자르바예프는 야당세력에 대한 고문과 살인 등을 저지르고 있으며, 수 조 달러의 거액을 해외의 비밀 계좌에 숨겼다고 한다. 실제로 러시아측 자료에 따르면 나자르바예프 가족의 자산은 7억 달러(약 7천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나자르바예프가 비판받는 일 중 하나는 바로 자나오젠 지역에서 시위대를 탄압한 것이다. 2011년 12월 17일 나자르바예프는 카스피해와 가까운 서부 석유산업 도시 자나오젠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나자르바예프는 "평화와 평온을 저해하고, 우리가 독립을 통해 성취한 것들을 망치려는 시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시위를 강경진압했다. 자나오젠의 석유 노동자들은 지난 5월 위험수당이 지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업을 벌였는데, 이에 국영 석유회사는 그 중 989명을 해고했고 노동자들이 반발하자 경찰이 시위대에 실탄을 발포하고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체포한 사건이다. 자나오젠의 한 현지 주민은 "시위대 3명이 사살당하는 것을 봤다"고 증언하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이것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카자흐스탄 정부차원에서 자나오젠 지역에 대한 인터넷 연결을 끊기까지 했다. 기사

그런데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2011년 자나오젠 사태와 관련하여 카자흐스탄으로부터 거액을 받고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에게 대응 방안을 조언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사 이에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의 유럽ㆍ중앙아 담당자인 휴 윌리엄슨은 카자흐스탄의 인권 문제들은 외면한 채 독재자를 위해 원고를 써주고 수백만 파운드를 받은 토니 블레어 총리가 수치스럽다고 비판했다.

또한 지난 2010년에는 카자흐스탄 의회가 국가지도자법을 제정하였는데, 이 법은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퇴임 후에도 국정에 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며, 재임기간에 벌어진 일에 대해 어떠한 민형사상의 책임도 묻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과 가족의 재산권을 영구적으로 보장해 국제사회로부터 사실상 종신 대통령의 권한을 부여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비난을 샀다. 기사

2014년 4월에 트위터는 물론 휴대전화도 통제하려는 정부 방침이 논란이 되고 있다. 독재의 기본 옵션인 언론통제를 충실히 시행하는 중 물론 일부 시민들의 반대도 있지만, 정부의 거수기에 불과한 의회가 이미 개정 법안을 모두 승인하고 대통령 서명만 기다리는 중이라 그대로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 법에 의하면, 앞으로 카자흐스탄 검찰은 국가나 사회에 유해하다고 판단될 때 인터넷 및 통신 사업자에게 접속차단을 요청할 수 있으며, 해당 사업자는 통보를 받고 1시간 이내에 사용자의 접속을 차단해야 한다. 만약 이를 어기면 관계기관과 사업자는 법적 책임을 지게 된다. 또한 허위사실 유포자에 대한 처벌을 징역 12년으로 강화하고, 정부 또한 국가비상사태 시 언론보도를 사전 검열키로 한 법이다. #

한편 카자흐스탄은 대표적인 기독교 탄압국으로, 오래 전부터 가정에서 진행되는 예배와 국가의 허가 없이 운영되는 교회에 대해 꾸준히 단속을 해오고 있다. 예를 들어서 침례교 목사인 안드레이 파나피딘(Андре́й Петро́вич Панафи́дин)은 2011년 3월 4일, 타라즈에서 불법 비등록 교회를 운영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카자흐스탄 평균 임금 100개월치에 해당하는 엄청난 벌금을 선고 받기도 했다. 근데 솔까 이때 카자흐스탄 평균 임금이 1년에 300만원 수준이라 100개월이면 4년치인데 겨우 1200만원 지금 평균 임금 800만원으로 치면 겨우 3200만원이라 한국인한테는 적은 금액이다 심지어 이 사람은 이렇게 무거운 벌금형을 선고 받은 것이 처음이 아니며, 과거에도 이미 7차례나 벌금을 부과 받은 적이 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등록을 하지 않은 교회는 당연히 법률 위반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파나피딘 목사 말고도 이런 식의 단속의 사례는 다수 확인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잠빌지역에서도 지하교회의 단속이 있었고, 심켄트에서도 새생명오순절교회가 가정에서 예배를 진행하다 단속을 당했다. 교회의 대부분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등록을 하고 싶어도, 당국에서 좀처럼 등록을 받아주지 않다보니 등록이 어렵다고 하소연하지만, 일부 강경한 교파에서는 등록제도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등록서류 제출조차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이 부분은 한국과도 무관한 일이 아닌데, 카자흐스탄 내의 고려인들 중 대다수가 정교회를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 탄압을 빌미로 고려인들의 권리가 침해될 부분도 무시할 수 없다.

2017년 4월 본인이 주도하여 의회를 통과시킨 헌법 개정안에 서명했는데, 내용이 고무적이다.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키고 내각과 의회의 결정에 대한 거부를 불가능하게 하는 등 권력의 분립이 한층 뚜렷해졌다는 평. 이미 2020년까지인 현 임기를 마치고 최고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오겠다고 밝힌 바 있어 카자흐스탄의 민주화와 정치 개혁의 신호탄이 될지 주목받고 있다. 2019년 2월 기자회견에서 개헌에 따른 다른 법률 개정들이 동반되면 2020년에 새 시대를 맞기 위해 조기 퇴진도 검토할 수 있다고 했다. 고령이라 은퇴하고 싶다고 한 것은 덤.

앞의 조기 퇴진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한 지 1달 만인 2019년 3월 20일부로 전격 사퇴를 발표했다. 기사. 구소련 국가들의 독재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직접 자기 자신이 자기 손으로 권력을 내려 놓고 국민들이 대통령을 뽑게 하는 결정을 내린 거의 첫번째 사례가 되었다.[5] 사임 호소문을 보면 소련 해체로 인해 독립된 구소련 국가들이 성장과정에서 많은 외부 영향과 부작용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며 자신이 독재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 비슷한 말을 하는 모양. 그러기엔 기간이 너무 긴데

허나 2017년경 나자르바예프가 곧 퇴진하겠다고 밝혔을 때만 해도 카자흐스탄 국민들 사이에서는 나자르바예프가 세계 여느 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뻔한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냉소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다.[6] 그러다가 2019년 3월 나자르바예프가 실제로 권좌에서 물러나자 카자흐스탄 국민들 중에는 독재자의 퇴진을 환영하는 것 이전에 실제로 퇴진 의사가 있었다는 점을 충격과 공포로 받아들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대통령직에선 물러나더라도 여전히 여당 당수나 정보기관장 등의 직위는 유지하고 측근에게 대통령을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 노릇을 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전두환이 6월 항쟁으로 못다이룬 꿈을 나자르바예프는 이뤘다? 대통령이 아님에도 민족 지도자(?)라는 칭호를 얻고 외국 정상과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다.

4. 마냥 막장인가?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가 카자흐스탄에서 사실상 술탄 대접받는 오글거리는 독재자인건 사실이다. 물론 세부적으로 따져보면 일정부분 정도차는 있다지만[7] 그 역시 결국엔 반정부 운동과 타 종교(기독교) 탄압, 정적 알마티 시장 사살 등 독재자가 아니라고 변명하기엔 막장스런 행태는 꽤나 보여줬기 때문. 다만 그가 그럼에도 상대평가 정도는 받는 것은 재임시기 어느정도 경제를 발전시킨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중 일가 부정축재 등 부패도 묵인해 왔기에 말이 많긴 하다만.

카자흐스탄은 냉전 체제가 끝난 이후 보유 여론에도 결국 자발적인 핵 포기를 결심하면서 국제적으로 체제안정과 경제지원을 받아낸다.[8] 그리고 이런 점을 힘입어 2000년대 들어 드넓은 영토에 펼쳐진 천연자원 산업을 필두로 1인당 GDP가 1992년 약 1,500불에서 2012년 약 12,000불까지 성장하는 발전을 이루었다. 물론 세계금융위기와 저유가 여파로 2010년대 중후반 들어선 8,000불대까지 떨어지는 등[9] 카자흐스탄 경제가 주저앉긴 했지만(...), 그래도 절대평가 기준에선 여전히 아프리카 개막장 국가나 북한급과 비교하긴 실례인 수준이고, 그냥 러시아나 중국과 비슷한 수준 정도라고 보면 될듯. 사실 형식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선거제가 있고 2010년대 경제가 폭망했지만 (서방 제재탓 등을 하며) 여전히 일당 우위를 지키고 있다는 점에선 중국보단 과거 상왕이던 러시아랑 흡사한 측면이 많다. 실제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와 비슷하게 석유, 천연가스같은 자원이 풍부한 편이다. 물론 이걸 천연자원빨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뭐가 어찌 되었든 자원빨로라도 빠르게 성장한건 사실이니 말이다.[10]

사실 다른 지역의 수장이기만 했어도 명암이 더 심하게 엇갈리는 인물이었을 것이나, 주변 중앙아시아권 국가들 상태가 우즈베키스탄에는 이슬람 카리모프라는 더 잔혹한 독재자가 있었고, 타지키스탄의 에모말리 라흐몬은 경제개발에도 실패, 투르크메니스탄의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는 경제개발에는 그럭저럭 성공했지만 자국민들과 세계인들이 부끄러워할 정도의 우스운 기행(...)을 선보여주고, 니야조프의 후임인 베르디무하메도프는 니야조프보다 더 억압적인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며 국민들을 탄압하였기에 상대적으로 그나마 고평가된 부분이 있다.[11][12]

그 외 인종 문제에 있어서도 알마티에 한국어 학교 건립을 승인해 고려인 편의를 봐주는 등 다수민족인 카자흐인[13] 외 소수민족을 마냥 배척하진 않았다. 우크라이나나 우즈베키스탄, 조지아 같은 옛 소연방권 나라들이 소련에서 독립 이후 자민족 중심의 민족주의를 앞세워 소수민족들을 억압하여 내전, 분쟁이 발생했던 것과는 대비되는 대목. 물론 첨부터 그랬던건 아니라 1991년 러시아에서 독립했을 당시엔 이쪽도 민족주의가 심하여 많은 고려인들이 직업을 잃고 사할린으로 다시 이주하기도 하였지만. 게다가 사실 독재자가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것은 그리 특별한 사례도 아니긴 하다.

당장 과거 이라크 후세인만 봐도 집시 등 소수민족과 소수종교를 우대하였고,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과 엘 시시 대통령도 콥트 교도 등 소수종교를 보호, 시리아 아사드도 아시리아인 등의 소수민족과 정교도, 시아파 등의 소수종교를 보호해줬다. 왜냐하면 '독재 반대'를 외치는 사람은 어찌됐든 다수민족, 다수종교 출신이 아무래도 많을터인데, 그들이 집권하면 혹여라도 사이가 나쁜 소수는 (그쪽에서 그런 점을 막아줄 지도자가 없는한) 차별을 당할 것이 분명할 상황에서 독재자가 소수를 보호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광적으로 충성을 하게 된다. 즉, 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한 것이다. 실제로 아사드 친위대 소리 듣을 정도로 이들 소수 민족과 소수 종교인들은 시리아 내전 때 반대파 지역에서 무차별 학살을 벌였으며, 아사드가 망하면 우리도 망한다고 결사항전을 외쳤을 정도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보도에서도 한 기독교인 환자가 해외 기자들에게 '당신들은 아사드를 독재자라고 욕만 하지만 정작 우리들은 아사드가 희망이다 그걸 아시오!'라고 말하던 사례가 나오기도 했다.

5. 이야깃거리

파일:jagangducheon.jpg
이명박 전 대통령과 제법 친했다고 한다. 나이대도 비슷했고, 이명박 정부 시절 자원외교의 핵심국 중 하나에 카자흐스탄도 있었기 때문에 더 접근한 것도 있을듯. 하지만 자원외교가 결국 실패한 정책이 되어서 흐지부지.(...) 그래도 MB 정권이 끝난 후에도 만나서 우애를 다지기도 했다고 한다.

2018년, 한국 아이돌그룹 VIXX라디오스타에 출연해서 아시아 투어 중 "카자흐스탄 왕녀에게 납치"[14]당했던 썰을 풀었던 적이 있는데, 이 회차가 영어/러시아어 자막이 붙어서 배포되자 카자흐스탄 케이팝 팬들 사이에서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아무리 손녀들을 위한다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승인해 줄 사람은 아니다"는 반응이 많이 나왔는데, 이런걸 보면 상식 밖 기행을 자주 저지르는 타입은 아니었던듯. 정적 총살건은 일단 넘어가자 참고로 VIXX가 납치당했던 사건은 정치권보단 카자흐스탄 현지 재벌 중 누군가가 단독으로 벌인 일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돈이 남아도는건 맞는지, 연예인 부르는데 돈을 엄청 쓰는 편이긴 하다. 2013년 9월 1일엔 자기 손자 결혼식 축하 파티비욘세랑 칸예수(...)카녜 웨스트를 무려 30억을 주고 초대했다. 축하 알바 한 번 뛰고 30억 받는 비욘세랑 카녜도 여러모로 대단한 건 안 자랑 문제는 이날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져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면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자기들은 목숨 걸고 시위하는데 대통령은 손자 결혼식한다고 수십억 뿌려대니 열불 터지긴 했을듯.(...)

이런 점 때문인지, 2011년 영국 가수 스팅은 카자흐스탄 국영 석유기업의 노동자 탄압에 항의하기 위해 실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생일 축하 공연을 취소한 적도 있었다.

자식으로는 딸들만 있는데, 이중에 정치에 참여하는 이는 장녀인 다리가 나자르바예바다. 2015년 9월에 다리가를 부총리에 임명했다. 다리가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 지난 2007년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지면서 국회에서 축출된뒤 모스크바 볼쇼이 극단에서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다 2012년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와 정계에 재진출, 국회 부의장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상원의장으로 재직중이다.

다리가 나자르바예바의 전 남편인 라하트 앨리이예프(Рахат Мұхтарұлы Әлиев, 1962년 ~ 2015년)는 망명길에 올랐다가 카자흐 당국으로부터 2007년 자신의 영향권 하에 있던 카자흐 은행 '누르방크'의 행장과 부하직원을 납치·살해한 혐의로 오스트리아에서 징역형을 살았는데, 카자흐스탄 정부가 송환을 요구했지만[15] 오스트리아 정부가 거부했다.# 결국 2015년 2월 빈의 교도소에서 옥사했다. 게다가 손자는 영국으로 망명한 상태이다.#

소련의 영광을 계승하자는 유라시아 연합 구상은 이 사람의 머리에서 처음 나왔다.

2006년에 교체된 카자흐스탄 국가의 가사 일부를 직접 작사했다. 물론 노래 자체는 1956년에 나온 노래이기 때문에 전체를 작사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일부분을 직접 개사했기 때문에 작사자에는 이름을 나란히 올리고 있다. 참고로 이전에 쓰던 국가는 카자흐 소비에트 공화국 시절에 쓰던 국가의 곡조에 새 가사를 붙인 것이었다.

퇴임 후, 수도 아스타나가 그의 이름을 딴 누르술탄으로 개명하였다.(...) 항목 참조.


[1]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주 카미얀시케(Кам'янське)에 소재한 기술전문대학. ПТУ은 대게 전문대학기관이라고 보면된다. 해당 교육기관은 북유럽 국가들이나 독일식 교육, 러시아식 교육에 영향을 받은 국가들에만 존재하고 영미권 국가나 동아시아권에서는 없는 교육제도라서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수있다. 그나마 비교하자면 캐나다의 퀘벡 주에 있는 CEGEP(시젭)과 유사하다고 보면된다. 시젭이란 고등학교 졸업 후 단기대학에 입학하여 2년제 전문학사 학위를 받고 2~3학년으로 대학교에 입학하는 제도로 여기서의 단기대학이 전문대학교 혹은 ПТУ라고 볼수있다. ПТУ은 소련시절에 쓰던 용어이고 현재는 용어가 ПУ로 바뀐상태다.[2] Карагандин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индустриальный университет.[3] 다만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체제와 상관없이 카자흐스탄 GDP도 많이 후퇴하긴 했다.[4] 이름은 Altynbek Sarsenbayuly이라고 한다.[5] 물론 몽골처럼 아예 냉전 끝날 무렵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한 사례도 있긴 하다.[6] 2019년 4월 기준으로 결국 혁명으로 강제 축출된 수단 독재자 오마르 알바시르만 해도 이미 오래 전부터 곧 퇴진하겠다고 입을 털다가 부정선거로 재집권 하는 일을 여러번 반복했었다. 독재자들이 이런 식으로 언론플레이를 해대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라는 것. 한국만 해도 전두환은 지금까지도 자신은 6월 항쟁 때문에 퇴임한 게 아니다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반복해서 빈축을 사고 있는데 이런 것과 비슷하다.[7] 일단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상술되어있듯 온갖 치졸한 방법에 부정선거 논란도 있긴 하지만 어찌됐든 형식상으론 선거로 장기집권했고(이점에선 러시아 푸틴과 비슷하다. 독재도 진화 중? 반대로 말하면 국민 수준이 딱 거기라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이기니 굳이 한국 군부독재자들처럼 간선제 등 잔머리 안굴리고 정공법을 밀어붙였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독재하면 흔히 떠올리는 군바리 출신은 아닌 노동자-임원-공산당 서기장 출신으로 나름 민간 정통 코스(?)를 밟은 정치인이긴 하다.[8] 덕분인지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북한과 비핵화 협상할 때 참고할 나라로 실제 고려되기도 했다.[9] 그가 201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것도 표면적 이유는 이런 경제실적 악화였다. 물론 속내는 경제침체 와중에 부패 스캔들까지 터지자 국민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실권을 움켜쥔채 자기 말 잘 듣는 얼굴마담격 후계자를 내세운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10] 다만 다른 산업을 육성할 필요성은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산업이 천연자원에만 너무 몰빵되어있기 때문.[11] 아시아의 공산권 국가들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라오스의 수파누봉 전 주석과 베트남의 호찌민 전 주석 역시 알고보면 반대파 숙청 및 살인교사, 시위 무력진압 등의 논란과 비판에 그다지 자유롭지 않음에도, 바로 나라들에 폴 포트마오쩌둥이라는 학살자 대마왕이 엄청난 극을 자행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고평가를 받았다.[12] 다만 호찌민은 베트남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에 토지개혁, 사유재산 금지 등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강압적인 토지개혁, 농지 국유화에 반대, 시정을 요구하던 농민, 노동자들의 항의시위와 파업이 일어나자 처음엔 피해 보상 대책을 제시하여 수습하려 했으나, 사태가 토지개혁 시정 요구에서 베트남 독립동맹회의 정권 퇴진과 공산주의화 정책 폐지를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 집회로까지 확산되자 결국 무력진압을 펼쳤다. 또 이후 사상자가 나오는 등 사태가 악화되자 자아비판을 하며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기도 했다. 사실 호찌민이 아시아의 공산 독재자들중 지금도 그나마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로 이러한 점이나 사후 가산이 거의 없었다는 점 등 진정성은 인정받았기 때문이다.[13] 다만 언어는 정부 차원에선 카자흐어를 밀어주고 있지만, 러시아어가 특히 도시에선 여전히 주를 이룬다.[14] 카자흐스탄은 군주제가 아니기에 애초에 왕녀가 없다. 후술되어있지만 다른 세력 혹은 카자흐스탄 대통령 자녀를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대통령이 자신은 왕이다라고 선포한 적이 있나본데, 이걸 가지고 비꼰 것일지도 모른다.[15] 물론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 입을 막으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