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13 05:20:38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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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스탄 제2대 대통령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Курманбек Бакиев | Kurmanbek Bakiyev
파일:КурманбекБакиев982766288478.jpg
<colbgcolor=#E8112D><colcolor=#ffff00> 본명 쿠르만벡 살리 울루 바키예프
Курманбек Сали уулу Бакиев[1]
출생 1949년 8월 1일 ([age(1949-08-01)]세)
소련 키르기스스탄 SSR 마사단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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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 제2대 대통령
2005년 8월 14일 ~ 2010년 4월 7일
대통령 권한대행
2005년 3월 25일 ~ 2005년 8월 14일
직업 정치인,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가족 배우자 타티야나 바키예바
정당 악졸
1. 개요2. 생애
2.1. 정계 입문2.2. 튤립 혁명2.3. 대통령 재임2.4. 실각

1. 개요

키르기스스탄의 정치인이자 제2대 대통령.

2. 생애

2.1. 정계 입문

1949년 잘랄아바트주 수작 군 마사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살리 바키예프는 집단농장의 지도자였다. 바키예프는 성인이 된 후 쿠이비셰프의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쿠이비셰프 기술전문대학을 다니며 컴퓨터를 전공했고, 1978년 학위를 취득한 후 잘랄아바트로 돌아와 다시 기술자가 되었다.

그는 1990년 그가 이사를 맡은 공장이 있는 쾩장각(Көк-Жаңгак) 시의 공산당 위원회 서기장이 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고, 이후 여러 행정 관련 직책을 맡다가 1995-97년엔 잘랄아바트주, 1997-2000년엔 추이주 주지사를 지냈다. 2000년 바키예프는 키르기스스탄의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아짐벡 벡나자로프 사건의 여파로 사임하였다. 이후 바키예프는 2002년 총선에서 잘랄아바트주에 위치한 15선거구 최고회의 의원으로 다시 당선되었다.

2.2. 튤립 혁명

2005년 2월 총선에서 여권이 석연치 않은 압승을 거두자 소련 붕괴 이후 장기집권해온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시위가 격화되고 비슈케크의 정부청사가 점령되자 3월 24일 아카예프 대통령은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도주하였고, 타나예프 총리 역시 사임하였다. 이에 키르기스스탄 최고회의는 바키예프를 총리로 선출하였다.

아카예프가 축출된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가장 유력한 정치 지도자는 바키예프와 북부 출신의 야당 정치인 펠릭스 쿨로프(Феликс Кулов)였다. 그러나 아카예프 축출 이후 정치 혼란이 지속되고, 이웃나라 우즈베키스탄에서 안디잔 학살의 여파로 난민이 유입되자 바키예프와 쿨로프는 혼란 종식을 위해 바키예프가 대통령, 쿨로프가 총리를 맡는 조건으로 단일화에 합의한다.# 2005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89.5%를 득표하면서 압승을 거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3. 대통령 재임

바키예프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이내 의회 및 쿨로프 총리와의 관계가 냉각되기 시작한다. 2006년 1월 쿨로프 총리는 법 집행기관에 부패가 만연해 있음을 지적하고, 의회와 함께 조직범죄 대응에 실패한 타슈테미르 아이트바예프 국가안보국장의 경질을 요구했으나 바키예프는 이를 거부하고 쿨로프와 의회를 비난했다. 이에 외뮈르벡 테케바예프(Өмүрбек Текебаев) 의장은 바키예프를 “그는 불명예이자 개가 되었다. 그가 사나이라면 자기 목을 매달아야 한다.”라고 비난했고, 바키예프는 러시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의회가 ‘대결의 길’을 선택한다면 헌법상 권리를 이용해 해산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튤립 혁명 이후 대통령제의원내각제 중 어느 정체를 택할 것이냐는 지속적인 이슈가 되었는데, 의회와 대립하던 바키예프는 2007년 새로운 대통령제 헌법을 제시하고 국민투표에서 헌법안이 통과되면서 의회가 해산되었다#. 이후 치러진 2007년 총선에서 여당 악졸은 의회 90석 중 71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고, 펠릭스 쿨로프가 이끄는 아르나므스와 오무르벡 테케바예프가 이끄는 아타메켄[2]은 모두 원외로 밀려났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는 선거 결과를 정치적 다원주의를 훼손한다고 비판한 반면 독립국가연합 감시단은 선거 결과를 고평가했다.#

바키예프 정권은 점점 권위주의적으로 변해 갔는데, 특히 그는 부패와 족벌주의로 큰 비판을 받았다. 그는 동생 자니시벡 바키예프를 국가안보국장으로 임명했는데, 자느시는 2009년 3월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으나 사이가 틀어진 후 야권으로 전향한 정치인 메데트 사디르쿨로프의 암살을 지시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아들 막심 바키예프는 2009년 10월 신설된 중앙개발투자혁신청장을 지내며 공유재산 불법 사유화를 비롯해 여러 비리를 저질렀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은 마나스에 있는 미 공군 기지에 연료를 판매하는 계약과 관련된 비리였다.# 당시 러시아는 마나스 미군기지 폐쇄를 압박하고 있었는데, 바키예프는 이를 이유로 더 높은 수수료를 받는 대가로 기지를 사용하는 협상을 체결한 다음 차액 상당수를 가족이 운영하는 국영 기관을 통해 빼돌렸다#.

2009년 7월 치러진 대선에서 바키예프는 77.4%를 득표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번에도 OSCE는 선거 과정에서 참관인들이 투표함을 채워넣거나 투표자를 매수하는 등 부정 행위를 저지른 것을 비판하였다.#

2.4. 실각

2010년 4월 수도·전기 요금 인상이 도화선이 되어 바키예프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리기 시작했다. 4월 7일 군경은 비슈케크의 정부청사 앞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포해 85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하룻밤 사이 시위대는 정부와 국회, 검찰청 건물을 점거했고, 야당 지도자 로자 오툰바예바는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바키예프는 처음엔 자신의 지지 기반인 남부로 피신했다가, 4월 15일 카자흐스탄행 비행기를 타고 키르기스스탄을 떠났다#. 이후 그는 벨라루스로 망명했고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밝혔다#.

바키예프가 남부 지방으로 피신한 당일 키르기스스탄 법원은 시위대에 대해 발포를 지시한 혐의로 바키예프에게 종신형을 선고했고, 이후 이는 30년으로 경감되었다. 한편 바키예프는 2023년 쿰퇴르 금광 비리 및 관련 살인 사건에 대해서도 징역 30년형을 선고받았다. 사디르 자파로프 대통령은 바키예프 대통령을 송환할 계획이 없으며 그가 귀국하면 체포할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1] 러시아식 이름은 쿠르만베크 살리예비치 바키예프(Курманбек Салиевич Бакиев).[2] 아타메켄은 11.3%를 득표해 2번째로 표를 많이 받은 정당이었으나, 북부 지역에서만 지지를 받아 전국 모든 주에서 0.5% 이상을 득표해야 한다는 신설 규정에 걸려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