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9-18 12:27:02

카를로스 메넴

아르헨티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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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대 55대 56대
라울 알폰신 카를로스 메넴 페르난도 데 라 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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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os Saúl Menem

한때는 경제자유화의 명수이자 네자릿수대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켜서 국제 금융업계와 보수 경제학계의[1] 칭송을 한몸에 받았던 대통령. 그러나 말기에 결국 말아먹다.[2]

시리아 이민 2세로 아닐라코라는 그다지 크지 않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대학시절에 법학을 전공하면서도 농구선수로 활동하다가 후안 페론을 만남으로써 본격적으로 페론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55년 후안 페론이 축출되고나서 군부정권에 대항하다가 한번 체포된 적이 있었지만 어찌어찌 풀려난 이후로 이후로 페론주의 성향의 청소년 단체와 노동조합의 변호를 맡는 변호사일을 맡기 시작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고, 1973년 후안 페론이 복귀했을 때 페론당 소속으로 라 리오하 주지사에 당선되었지만 후안 페론이 얼마 안가 사망하고, 후임인 이사벨 페론은 무능한 통치를 펼치고, 기여히 1976년에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감옥에 수감되면서 주지사 직에서 강제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군사독재정권이 경제면에서나 정치면에서나 폭망해버리면서 결국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전쟁 이후로 민주주의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카를로스 메넴도 민주화 직후 지방선거에 출마해서 다시 라 리오하 주지사직에 당선되었고, 나름대로 호평을 받으며 유력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라울 알폰신 말기, 아르헨티나는 군사정권의 유산인 외채문제를 끝끝내 해결하지 못하면서[3] 다시 한번 경제위기에 빠지게 되었으며 재정적자를 모면하게 위해 통화남발을 하면서 물가상승률은 연 5000% 이상을 기록하다보니까 종이용지를 수입할 돈이 없어서 더 이상 지폐를 찍지 못한다는 말이 나오게 될 정도로 을씨년 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결국 알폰신은 국민들의 반발속에 임기를 6개월 남겨놓고 사퇴를 감행할수밖에 없었고, 이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 메넴은 경선에서 승리하여 후보가 되었고, 1989년 조기 대통령 선거에서 메넴은 페론주의적인 공약을 내걸어서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카를로스 메넴도 뾰족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공약을 저버리고 놀랍게도 군사정권때의 경제정책(신자유주의)을 다시 한번 도입하게 되었다.

카를로스 메넴은 IMF의 조력아래에서 국영기업 상당수를 매각하는 민영화를 진행했으며, 또한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1달러=1페소 태환화 정책 도입을 통해 네자릿수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은 한자릿수대로 급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민영화의 결과물로 각종 기업들에 대한 정부지출이 크게 줄어들면서 그간 문제가 되었던 재정적자 문제도 일단 해소했으며, 고금리 정책으로 해외투자자들을 유혹하며 투자자금을 많이 끌어모았다. 물론 그 부작용으로 각종 기업들과 공장들이 구조조정 당하며 실업률이 크게 증가하는 결과를 낳았지만[4] 그간 초 인플레이션에 시달린 상당수 유권자들에게는 이 정도는 감내할만한 고통으로 여겨졌고, 금융규제 완화도 대대적으로 단행하는 등 금융업계에도 우호적인 정책을 편 덕택에 외국으로부터 자본이 대거 유입되면서 외환보유고도 급증, 1인당 GDP도 한시적이나마 1만 달러 수준으로까지 올라가게 되었고,[5] 빈부격차는 크게 확대되었기는 했지만 일단 중산층들의 구매력이 크게 늘어나는 효과는 있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헌법 개정에 나서서 1994년에 대통령의 재선을 허용하고 상원의원의 임기를 9년에서 6년으로 줄이는 개헌안이 통과되었고,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49%의 득표로 여유있게 재선에 성공을 거두웠다.

그러나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켜서 아르헨티나 중산층들의 소비력을 크게 늘리는데 기여했지만 반대급부로 국내제조업이 크게 위축되어 매년 상당액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그로 인해 실업자가 늘어난데다가 광범위한 민영화로 인해서 공공요금도 같이 오르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사회복지의 혜택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면서 빈부격차는 극심해지게 되었다. 또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는데에는 성공했지만 투자자의 신뢰를 높이겠다며 고금리 정책을 펴면서 국가경제를 진흥시키겠다면서 상당한 외채를 빌리게 되는데 그로 인해서 집권 후반기 들어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재정적자를 해소하겠다며 시행한 민영화 조치들이 과도한 외채로 인해서 약빨이 먹지 않기 시작했고, 팔수있는 기업도 한계에 달하면서 국가예산의 상당액을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이자로 내주면서도 복지혜택은 열악해져만갔고[6] 국내제조업의 성장을 등한시한 결과로 경제성장률이 급속히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벌어지자, 아르헨티나로 몰려든 금융업계 자본도 아르헨티나의 외채가 너무 많다면서 대탈출을 시작하였고 이 시점을 계기로 아르헨티나 경제는 파탄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외국자본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부패스캔들도 일어나면서 메넴의 지지율은 곧두박질 쳤고 한때 3선까지 노리던 메넴은 1999년 대선 출마를 포기했고 1999년 대선에서 메넴의 후계자로 나선 두알데 정의당(아르헨티나) 후보가 패배하고, 라 두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급진시민연합 정권으로의 정권교체가 일어나게 되었고, 이후로는 메넴은 상원의원으로 재작하게 되었지만 집권기간 동안의 스캔들로 인해서 메넴의 이미지는 고향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일제히 떨어지게 되었다.

허나 라 두아 정권도 뾰족한 수는 없는지라 무리하게 태환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7]고금리 정책을 펴면서 외채는 더욱 불어나는 바람에 경제위기는 악화일로에 치달았고 달러화도 강세를 보이면서 안그래도 줄었던 수출은 더욱 줄어들며 자금줄이 메마르게 되었고,

메넴 정부 후반기부터 시행했던 재정긴축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했지만 안 그래도 실업률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이나 빈곤층들은 필요한 그나마 있던 지원도 줄어들었으니 당연히 빈곤율만 늘리는 결과만 낳았고 상황반전에는 별 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IMF로부터 자금을 수혈받아서 외채를 갚았지만 아르헨티나 정부와 국민들이 감당해야할 부담에 비하면 말 그대로 조죽지혈일뿐이었다. 급기야 2001년에 디폴트를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실업률은 20%대, 빈곤율도 50%까지 폭풍같이 상승하는 결과가 나오면서 결국 급진시민연합 정권이 실각하게 되었다. 페론당이 다시 정권을 잡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와중에 메넴은 정계복귀를 선언하였으며 메넴은 기존 양당인 페론당이든 급진시민연합이든간에 핵분열 되어서 후보가 난립하는 상황속에서도 승산이 있다고 보고 대선에 출마하게 되었다. 실제 대통령 선거에서 메넴은 예상외로 선전하였지만 목표했던 25% 득표에 실패하게 되면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대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위기의 원흉이 메넴이었다는 점때문에 메넴은 키르치네르에게 압도적으로 밀렸고 결국 대통령 선거에서 40-50%차이로 낙선당할 것이 확실시되자 아예 스스로 사퇴를 했다. 그 이후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대 들어서부터는 예상을 깨고 아르헨티나 경제가 급속한 회복세를 보이면서 메넴에 대한 관심은 옅어졌고, 메넴 자신이 부패혐의로 기소를 당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고향인 라 리오하에서 상원의원직에 지속적으로 재직되고 있기 때문에 면책특권을 가지고 있어서 감옥에는 가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이후로도 달러화 공용화 드립이나 페소-달러화 페그제 드립을 치곤한다. 달러화 공용화를 하면 물가를 잡고 외국인 투자자 유치도 많이 할 수 있다면서(...) 사실 페그제 폐지 이후로 아르헨티나의 물가상승문제가 상당하기 때문에 그렇듯한 얘기로 들리기는 하지만 위에 써져있듯이 한번 말아먹은 전적이 있는지라(...) 염치가 없다

북한이 아르헨티나에게 관계 재개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2007년에도 관계 재개를 원한다고 메시지를 보냈고 그보다 전인 카를로스 메넴 집권 중이던 1990년에도 관계 복원을 원한다고 했지만 하필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이었던 카를로스 메넴이 친미외교를 하던 중이라 관계가 복원되지는 않았다. 사실 북한이 딱히 중요한 나라는 아니기 때문에 굳이 재개할 이유를 못느꼈다는 것이 더 큰 이유라고 할수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영국과 북한이 수교를 맺은 것보다) 더 아이러니한 건 정작 1990년 당시에 포클랜드 전쟁을 치르고 그로 인해 단교한지 10년도 안 지난 영국과의 관계는 메넴 당시에 재개되었다는 것.


[1] 아닌게 아니라 국제통화기금나 보수경제학계, 월스트리트 저널이나 이코노미스트같은 세계적인 경제지나 엘 문도같은 보수지에서 카를로스 메넴을 페론주의의 구태를 끊은 인물이라고 칭송했었었고, 그래서인지 국내언론에서도 이들 보수경제학자들이나 해외 경제지들의 말이나 기사를 그대로 받아적어서인지 메넴에 우호적인 기사들이 실리기도 했다. 물론 2000년대 이후로는 그냥 흑역사 취급. 자신들이 조언했던 정책을 그대로 따라했는데 망하면 말하기가 껄끄럽겠지[2] 라울 알폰신 말기 당시 경제위기에 처했을 때 아르헨티나 외채가 652억 달러였는데 카를로스 메넴은 임기 말에 1478억 달러까지 늘려놓았다. 경제개발에 신경쓰겠다면서 외채를 마구잡이로 차압한 결과물로 메넴때는 민영화를 대대적으로 단행해서 공기업들을 팔어먹어서 재정적자를 충당했는데 어찌나 많이 팔아먹었는지 후임 정부때인 라 두아 들어서는 더 이상 민영화해서 자금마련하려고 해도, 민영화할 기업들이 남아있지 않다고 할 정도의 수준이었다.[3] 당시 아르헨티나의 외채는 군사정부때처럼 급속하게 불어나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상황에 비쳐보았을 때 아직도 과도했고 이자율은 아직도 너무 과도하여 만기가 돌아오는 상황에서 이자를 제때 지급하지 못하면서 다시 한번 시궁창에 빠지게 되었다.[4] 아르헨티나의 1989년 실업률은 10% 아래였지만 메넴이 재선했을 무렵에는 18%로 늘어나게 되었고, 비정규직 비율은 30%에 까지 이르렀다.[5] 참고로 1997년 이후로 아르헨티나가 1인당 국민소득이 다시 1만 달러를 돌파하기까지는 10년이 걸렸다. 1998년 IMF 외환위기에다가 2001년 금융위기까지 겹쳐져서 쭈욱 내리막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가 반전되기 시작한건 2003년부터이며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정부기때가 되어서야 회복되었다.[6] 흔히 국내보수언론에서 아르헨티나가 경제적으로 망한 이유를 복지 표퓰리즘을 들곤 했지만 이는 1990년대 아르헨티나 정부가 어떤정책을 폈는지 자료조차 안본 말 그대로 견강부회일뿐이다. 그리고 페론이 집권하여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이전인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한번 몰락하기도 했다.[7] 물론 태환정책을 포기하면 수출이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는것이야 알고있었지만 그러면 물가상승률이 크게 올라갈게 뻔한 일이었고 또한 그 동안 태환정책을 실시함으로써 페소의 안정성과 신뢰도를 확보해놓았는데 그런 것이 한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는 것이 중론이었지만. 여하튼 태환제도 폐지 이후로 아르헨티나는 매년 두자릿수대 수준의 물가상승률을 고정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태환제를 실시했다가 제대로 쪽박난 경험때문에 태환제 실시는 입밖에도 못내미는 상황이다. 마크리 정부 들어서 외채가 폭증하고 있기 때문에 태환제 실시 안해도 조만간 비극이 반복될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그런 상황이 트럼프 정부 재무담당이 아르헨티나에 달러화를 사용하거나 달러화와 페소화 가치를 동동하게 만드는것을 검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거절했기는 했지만 그리고 IMF로부터 200억 달러를 더 빌리게 되었다. 하지만 외채가 많은 상황에서 외채를 또 빌렸기 때문에 밑빠진 둑에 물을 더 붓기에 더 가깝다는것이 유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