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1 16:22:36

포클랜드 전쟁

스페인어: La Guerra de las Malvinas, Conflicto del Atlántico Sur
영어: Falklands War, Falklands Conflict, Falklands Crisis, South Atlantic War
1. 개요2. 배경
2.1. 아르헨티나의 선제 상륙, 그리고 침공2.2. 제국의 역습
3. 전개
3.1. 양국의 전략 차이3.2. 빙하 작전3.3. 블랙 벅 작전3.4. 원자력 잠수함 컨커러의 아르헨티나 순양함 격침3.5. 아르헨티나의 반격 - 셰필드 쇼크3.6. 영국의 상륙전3.7. 엑조세의 마지막 발악
4. 영국의 승리5. 결과
5.1. 포클랜드 전쟁 당시 프랑스 관련 루머와 반박
6. 기타7. 명칭 문제

1. 개요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영국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자, 이에 영국이 군사 대응으로 맞서면서 발발한 전쟁.

발생한지 3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도 미사일 시대로 대표되는 현대 해전, 공중전의 교과서적 사례로 평가되는 전쟁이다.

2. 배경

아르헨티나는 1976년 군부쿠데타로 우익 군부가 들어서면서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기침체를 극복하려고 외국자본과 외채를 대규모로 도입하는 정책을 폈지만[1] 1980년 금리 인상으로 이자율이 급상승하고, 기업채무를 국가에서 갚도록 하는 정책을 펴면서 재정난은 극심해졌다. 거기에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재정지출을 대폭 줄이는 정책을 도입하였으나, 외채는 더더욱 불어나고, 사회 복지 정책의 실종으로 빈부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졌으며, 경제상황은 악화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불만이 쌓여 있었고, 때문에 국민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1978년 월드컵을 개최하고 해당 대회에서 온갖 무리수를 두어 자국 팀을 우승시킨 것 등이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내부적 요인으로 전쟁으로 국내의 단결을 꾀할 필요성과 함께, 포클랜드 제도의 영국군은 소수[2]여서 기습으로 손쉽게 제압이 가능하다는 점, 영국 해군의 마지막 정규 항공모함아크로열이 퇴역하여 영국이 유사시 장거리 항공작전을 하기 어려워졌다는 점, 무엇보다 영국이 몇 해 전에 IMF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경제력이 나빠진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당시 영국 또한 경제가 어려워서 아르헨티나의 작전 개시 전 포클랜도 제도는 본국으로 통하는 항공편도 없었고, 의료 서비스조차 본국이 아닌 아르헨티나에 의존해야 했다.[3]

2.1. 아르헨티나의 선제 상륙, 그리고 침공

1982년 3월 아르헨티나의 고철 수집상들이 포클랜드 제도 쪽으로 들어왔다. 목표는 단순한 고철수집. 문제는 이들이 단순히 마땅한 해상편이 없다라는 이유로 아르헨티나 국기를 올린 아르헨티나 해군 소속 수송함을 타고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도착한 곳은 현재는 별개의 속령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당시는 포클랜드 제도의 일부였던 사우스조지아 섬. 이들은 영국 정부로부터 당시 방치되어 있던 포경 공장의 해체권을 얻었다고 주장했지만, 입국 절차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불법 상륙으로 취급되었다. 이들이 아르헨티나 국기를 게양한 상황에서 상륙한 것을 당시 영국의 남극관측대원이 발견하고 이에 대한 항의와 함께 본국으로 알리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위키피디아의 사우스 조지아 침략 항목 참고. 국방TV의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는 좀 더 디테일하게 나오는데 고철상들에게 항의 방문한 기지 대원들은 의외로 순순히 사과를 받고 술도 얻어먹고 돌아왔는데 섬이라는 지형상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고 감히 우리땅에 깃발을 꽂아? 라고 빡친 강경한 주민들이 아르헨티나의 민간인 시설을 공격, 건물벽에다 "대영제국 만세", "까불면 코피 터질 줄 알아라!" 같은 낙서를 하고 떠났다고 한다...

이 과정에 영국군과 아르헨티나군은 각각 100명 안쪽의 병력을 파견하여 이들이 대치하는 것으로, 최초의 병력 파견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해군참모총장이던 해군중장 호르헤 아나야(Jorge Isaac Anaya) 제독을 중심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개전 시점을 8, 9월 정도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빠른 진도에 당황했다. 8, 9월인 이유는 이 때에 엑조세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는 쉬페르 에탕다르를 비롯한 주력 무기의 도입이 완료되고, 영국이 퇴역시킬 계획인 주력 군함들이 고철로 해체, 폐기되어 실제로 사라지는 가운데, 겨울이라서 날씨도 극히 추워지고 대형함정이 퇴역한 영국 입장에서는 브리튼 섬의 영국 해군이 겨울바람으로 거칠어진 북대서양을 넘어오는데 큰 장애를 줄 것이므로 영국이 반격하는 데 훨씬 불리해질 것이라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전략이었던 셈. 하지만 그해 3~4월에 경제난으로 아르헨티나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다급해진 군부 정권이 국내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침공을 서둘렀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관련 다큐

어쨌든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4월 2일아르헨티나 해병대특수부대 소속인 지상군 4,000명이 해군의 지원으로 포클랜드 제도를 기습 침공했다. 현장의 영국군은 고작 영국 해병대(코만도) 100여명으로 미미한 충돌이 있었으나 이내 제압당하고 항복했다. 이때 포로로 잡힌 병사들의 사진이 매우 굴욕적이었기에[4] 영국인들의 여론에 불을 질렀다나. 일부 부대는 총독의 항복 명령에도 불응하고 다른 곳에서 전투를 이어나가다가 제압당했다고도 한다. 포클랜드의 총독 렉스 헌트 경은 총독의 예복을 차려입은 다음에 아르헨티나군에게 무기를 내놓으라는 지시를 내리고 아르헨티나 사령관에게 영국 땅을 무단으로 침입하고 있으니 즉각 퇴거할 것을 요구했으나 아르헨티나 군대는 즉각 헌트 경을 체포하여 우루과이로 추방했다. 헌트는 포클랜드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총독으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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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는 어느 정도 강경한 무력적 실효점유를 시작하면 영국이 그 살림살이에 엄청난 재정적 소모를 감수하고 지구 반대편의 포클랜드를 재점령하러 오기보다는 협상에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몇십년 전에 일본이 실패한 그 전략을 따라하는... 국제사회의 생각도 비슷해서 영국이 외교적 항의 및 협박 정도만 하고 말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2.2. 제국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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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mpire Strikes Back. : 포클랜드 사태.
HMS 허미즈가 남쪽으로 향하다
- 뉴스위크 1982년 4월 19일자 표지.

그러나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점령에 분노하였고 이 당시 철의 여인이라 불릴 만큼 강경한 성향을 가진 마가렛 대처 총리는 대외정책 역시 매우 강경하여 즉시 탈환작전을 군에 명령했다. 여기에 쇠퇴 일변도의 영국이라도 더 이상 해외영토가 잠식되고 대외 영향력이 침해당하는 것을 좌시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국민 여론이 들끓어 오르면서 영국은 순식간에 전쟁 분위기에 휩싸였다. 경제난과 내적 혼란이라는 위기상황에 실제 영토 손실이라는 외부영향이 더해지면 국민 감정과 국가 안정성은 안드로메다로 갈 것이 뻔했고, 아직 남아 있는 수많은 영국령들에서 비슷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선례가 될 것이 명백했으므로 영국 정부 입장에서는 무조건 대응하는 것 이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영국에게 포클랜드의 가치는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포클랜드의 지리적 위치는 남극으로의 전진 기지였고, 파나마 운하가 차단될 경우,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대체 항로의 가치를 지녔다. 실 사례로,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중국 산동 반도에 배치되어 있던 독일 동양함대가 본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태평양을 횡단하여 칠레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를 격파하자 영국은 순양전함 2척을 포클랜드로 급파했고 결국 포클랜드 해전이 발발, 독일 함대를 격파했다. 아울러 포클랜드를 포기할 경우, 세계 각 지역의 다른 식민지들, 특히 지중해의 해군 요충지인 지브롤터의 영유권까지 위협받는 파급력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1970년대 제기된 포클랜드 인근의 석유 자원 매장 가능성은 덤. 독도처럼 섬 자체는 별볼일 없지만 상징성과 함께 주변 해역과 위치가 가지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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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 총리는 즉시 아르헨티나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영국 의회는 여야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전쟁을 승인했고, 4월 5일 영국은 해군대장 존 필드하우스(John Fieldhouse) 제독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해군 기동부대인 Task Force 317.8의 지휘관 해군소장 존 포스터 우드워드(John Forster Woodward) 제독과 지상군 총지휘관인 해병 소장 제레미 무어(Jeremy Moore) 장군에게 출동을 명했다.

당초 영국 군부 내에서는 전쟁에 회의적인 반응도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 일단 거리가 너무 머니까. 대규모 원정을 위해 좀 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이미 남반구의 4월은 겨울을 앞두던 터라 "정치적인 목적에서라도 포클랜드 탈환은 필요하며, 할 수 있다. 대신 포클랜드로 갈거면 지금 가야 한다"는 제1해군경이었던 해군대장 헨리 리치 제독[5] 등의 조언을 받아들여 일단 본토와 지브롤터에 있는 전투함을 싹 긁어모으고 상선까지 징발했다. 마침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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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무어 장군(왼쪽)과 샌디 우드워드 제독(오른쪽). 전쟁 당시 영국군의 양대 현장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당시 영국의 기동함대 투입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점령이 장기화, 기정사실화되면 영국의 재탈환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므로 단기전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을 반영한 것이었다. 아울러 약 한 달 정도 소요되는 기동함대의 항해 기간 동안 외교적 해결이 시도될 경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압박 수단 역할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대처 총리는 영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외교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먼저 아르헨티나의 침공 다음날에 UN 안보리에서 아르헨티나를 침략자로 규정하며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유럽 국가들의 대(對) 아르헨티나 수출 금지 조치를 유도했다. 심지어는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국의 동맹이었던 미국의 지지까지 얻는데 성공했다. 이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마가렛 대처가 이런 통화를 했다고 하는데, 레이건은 본건을 UN에 맡기자고 했지만 대처는 패기롭게도 "알래스카가 침공당하면 그대로 같은 말을 돌려주겠다."고 반응했다.[6]

반면, 4월 포클랜드 제도를 점령한 직후 아르헨티나 측에서도 미국에 협조를 요청했었으나 결국 거부당했다.# 아르헨티나는 미국이 '자신들이 사회주의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것처럼, 만일 자신들이 지지를 잃고 사회주의 정권이 재집권하게 되면 이는 남미 전체의 공산화로 이어질 것이다'라는 논리로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실 미국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남미의 반공쿠데타를 묵인 및 지지했던 터라 남미 정권은 미국과 꽤나 돈독했다[7]. 포클랜드 전쟁 기간만 제외하고.

당초 미국은 자국과 동맹이었던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서 중재 외교를 실시하여 전쟁으로의 악화를 막으려 했고, 이 과정에서 알렉산더 헤이그 당시 국무장관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런던을 오가는 셔틀 외교를 수행했다. 미국은 '아르헨티나 군이 철수한 후, 포클랜드 현지 주민들의 주민 투표로 귀속 국가를 결정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아르헨티나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 입장에서는 기껏 병력을 동원해서 '실지를 회복'했는데, 제대로 싸움 한번 안해보고 철수하는 것이 국민들에게 굴복으로 여겨져 정권을 위태롭게 할 것으로 우려했다. 여기에 포클랜드 주민 대다수가 영국계여서 주민투표로 결정할 경우, 영국이 훨씬 유리했을 것이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입장에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제안이기도 했다. 결국 4월 말 미국도 영국을 공개 지지하면서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수출 금지를 포함한 제재안을 발표했다. 이로써 영국은 국제사회, 특히 동맹국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서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이 모든게 가능했던 것은 아르헨티나가 저지른 행동이 빼도 박도 못하게 침략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영국에게도 구린 구석이 있는 상황이었다면 모든 국가가 영국에게 동조하지는 않았을텐데 멀쩡히 (너무 심심해서 탈일 정도로) 잘 지내고 있는 섬에 대뜸 군대를 보내 무단 점령을 시도했으니 영국이 국제 사회의 지원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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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의 영국에서 남대서양의 포클랜드까지의 원정은 영국으로서도 거의 지구 반바퀴를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4월 중순에서 하순에 걸쳐 긁어모을 수 있는 함대와 항공기는 모두 동원되었다. 심지어는 호화 여객선 퀸 엘리자베스 2까지 징발하여 병력을 수송했다. 1956년 수에즈 전쟁 이후 이렇게 본격적인 군사 행동은 오랜만이었다.

3.1. 양국의 전략 차이

당시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자 독재자였던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포클랜드를 빼앗아 자국의 군사력을 과시할 겸 해서 프로파간다를 하기 위해 그 동안 전임 대통령들도 건드리지 않았던 포클랜드를 공격했다. 승리하면 진짜로 섬을 수복한 것이 되어 국가영웅으로서 탄탄대로를 걷게 될 것이라 생각했고 패배하더라도 국민들을 교묘히 속여서 승리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언론을 통제해서 계속 집권할 생각이었다.

반면 영국은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전쟁을 진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가렛 대처 본인이 직접 당시 칠레의 독재자였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찾아가서 피노체트에게 영국이 몰린 상황과 이 전쟁에서 영국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피노체트를 설득했다. 그리고 피노체트로부터 칠레 영공에 영국의 항공기를 배치해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아냈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대처는 미국 등 온 우방국을 돌며 자신은 가만히 있었는데 아르헨티나가 먼저 쳐들어왔다는 점을 강조하며 자신의 편이 되어 달라고 설득하고 다녔다.

대처는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주장을 무시한 주요 국가들이 있었는데, 일본중국이었다. 중국은 홍콩 문제가 걸려 있어서 더욱 영국의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고,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상실한 부속도서(쿠릴 열도 등)들에 대해 민감한 처지이다보니 마냥 영국 손을 들어줄 수 없었다. 하지만 냉전으로 영국과 대립했던 소련은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을 지지했다.

3.2. 빙하 작전

5월에 접어들어 영국군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첫 번째로 SAS를 파견해서 아르헨티나 사령부를 기습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작전이라는게 해군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SAS 대원들을 포트 스탠리 빙하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 이유라는 것도 또 걸작인데, "아르헨티나 애들이 설마 빙하를 거쳐서 급습할 것이란 생각은 안하겠지?" 그 말을 들은 해군 조종사들은 "차라리 폴라리스 미사일을 날리는게 더 빠를걸요." 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어쨌든 SAS 대원들은 빙하에 도착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끔찍한 날씨 앞에 장사 없다고, 결국 임무를 포기하고 항공모함으로 귀환했다. 이 와중에 3기의 헬리콥터 중 2기가 손실됐지만 전사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결국 이 작전은 실패했다.

3.3. 블랙 벅 작전

그 다음으로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의 비행장을 쓰지 못하도록 활주로에 폭격을 가하는 "블랙 벅(Operation Black Buck)" 작전을 시행했다. 1단계로 아브로 벌컨 폭격기, 2단계로 함재기 시해리어가 동원되고, 3단계는 함포사격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특기할 만한 일은 1단계로, 대서양어센션 섬에서 발진한 벌컨 폭격기가 몇차례나 공중 급유를 받아가며 왕복 7천km를 날아갔다는 점.[8] 이 기록은 걸프 전쟁에서 미군 B-52가 미 본토 - 이라크 - 영국 주둔 미 공군 기지를 날아가기 전까지는 세계기록이었다.[9]

이는 활주로를 일시적으로 이용할 수 없게 하기 위해 활주로 중앙에 폭탄을 떨어트리는 것이 목표였다. 확실한 명중을 위해 아예 활주로와 비스듬한 방향으로 폭격 코스를 잡았으며 교차점에서 21발중 적어도 1발은 확실하게 명중하도록 계획하였고 계획대로 그대로 작전이 실행되었다. 투하한 폭탄들은 대부분 빗나가거나 활주로 가장자리에 떨어지고, 단 1발만이 제반 시설에 명중했다. 그린 구스 비행장과는 달리 포트 스탠리 비행장은 그럭저럭 제트 전투기를 운용할만 했지만, 포트 스탠리 비행장도 벌컨의 폭격을 얻어맞아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초음속 제트 전투기인 미라지본토에서 출격할 수밖에 없는, 아주 불리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그 말인즉슨, 아르헨티나 전투기들은 전투 공역에 진입해도 작전 가능 시간이 5분 이내였으며 그나마 그 와중에도 애프터버너를 점화하여 속도 이점을 살릴 수 없었다.[10] 즉, 무장 및 전술적인 상황에서 열세[11]이면서 속도 이점도 살리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이다.[12]

사실 5월 1일에도 아르헨티나 공군과 해군 비행단은 영국 함정들을 폭격했다. 이 당시만 해도 P-2 넵튠이 날아다녔던지라 그나마 영국 해군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었는데 이것도 며칠후에 운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도루묵...어쨌든 이 날 공격은 중고도(15,000 피트 이상, 3만 피트 이하 고도)에서 실시했는데, 영국 해군 함대 방공망에 걸려 도리어 털렸다. 이후부터 저공 침투(대략 100피트-30m 상공-고도로 침투했다.) 전술을 기본으로 삼게 된다. 이 저공 침투 때문에 불발탄이 많이 생겨 큰 피해를 주지 못했기에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자유 낙하 폭탄들은 보통 500 파운드(227kg)나 1,000파운드(454kg)의 무게다. 이런 쇳덩이들이 400kts(740km/h)속도로 날아들어오는 것이다. 포탄만큼은 아니라도 상당한 피해를 주며 이 때문에 호위함 같은 경우는 명중했다 하면 침몰 직전까지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3.4. 원자력 잠수함 컨커러의 아르헨티나 순양함 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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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 컨커러(HMS Conqueror)
5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초로 "극적"인 교전상황이 발생하여 이목을 끈다. 영국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 HMS 컨커러(Conqueror)가 아르헨티나 해군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General Belgrano)를 MK 8 어뢰로 침몰시켰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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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 General Belgrano underway, 아르헨티나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들 중에는 이 사건은 사실 아르헨티나의 뻘짓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오래되었지만 강력한 함정이라도 잘 짜여진 호위 함대의 잠수함 방어 체계를 전혀 동반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이기 때문이다. 현대전 경험이 없는 아르헨티나의 한계였다.

원자력 잠수함의 실전 격침 첫 사례 정도로 보이는 이 교전의 의의는 생각보다 큰데, 아르헨티나의 해군 가용전력 대부분이 투입되어 있었고[14] 포클랜드 북쪽에서는 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의 함대가, 남쪽에서는 헤네랄 벨그라노의 함대가 포클랜드 해역의 영국 항모기동부대를 협격하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상 문제로 공격이 취소된 후 철수하던 벨그라노가 격침당하자 아르헨티나 해군 수상전투함은 더이상 바다에 나올 생각을 하지 않게 됐고, 제해권과 제공권[15]은 영국이 가져갔다. 이로써 영국은 사실상 이렇다 할 방해 없이 포클랜드 섬을 공략하게 되었으며[16] 아르헨티나 입장에서는 전투기들 항속 거리 끝자락에 위치한 영국 해군에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포클랜드 전쟁 전체의 승패를 결정지었다고 할 정도다. 아니, 대잠 전력을 갖춘 함대, 장거리 전폭기, 정찰기 편대 등 해상전의 필수 요소들조차 없이 전쟁을 벌였다는 것은 애초에 시작하기 전부터 진 싸움이었다.

이 직후 해프닝이 하나 있었는데,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의회에서 컨커러의 함장을 소환하여 비인도적 행위가 아닌가 하는 청문회를 연 것.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전쟁이니만큼 영국 내에서도 매사 명분에 대한 강한 목소리가 있었다는 예증이다. 국회의원들은 함장에게 '왜 경고사격을 하지 않았는가' ??? : 빈 라덴을 잡기 전날 주민들에게 소음이 날 거라는 불편 안내방송을 왜 하지 않았지? 에 대해 추궁하였으나, '타이거피시 어뢰의 가격이 얼마나 하는지 아는가' 라는 논리에 침묵했다.[17]

3.5. 아르헨티나의 반격 - 셰필드 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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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S Sheffield, 영국 구축함 HMS 셰필드(Sheffield) 함
그리고 이틀 뒤 아르헨티나 해군의 반격은 해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5월 4일 보복에 나선 아르헨티나군 해군 항공대 소속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가 엑조세 미사일로 영국 해군의 42형 구축함 HMS 셰필드를 격침시킨 것이다. 이로써 장군 멍군….[18]

당시 아르헨티나 해군 공격기는 2대씩 짝을 짓고는 셰필드를 공격하기 위해 공역으로 진입해왔는데, 공교롭게도 셰필드의 대공 레이더가 두 전투기를 1대로 인식하는 치명적인 버그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2대가 모두 레이더에 감지되는 순간, 이러한 상황을 예정하지 못했던 셰필드의 전투 통제 시스템에 오류가 생겼고, 아르헨티나군의 쉬페르 에탕다르는 셰필드로부터 어떠한 대공 공격도 받지 않는 '거의 훈련 상황' 속에서 엑조세를 셰필드에 명중시켰다. 또한 영국 해군은 이 과정을 좀 더 면밀하게 조사한 끝에...
  • 당시 영국 해군도 사용하는 엑조세를 셰필드의 컴퓨터가 아군 장비로 인식, 적성 장비로 인정하지 않아서 대응할 수 없었다.
  • 왠지는 모르지만 함장 이하 주요 승조원들이 CIC(전투정보통제실, 그러니까 지휘소)에 없었다.
  • 이전부터 ECM 장비인 UAA-1의 경우에는 위성 통신 장비가 내는 신호가 쉬페르 에탕다르 전투기 탑재 레이더와 유사해서 위성 통신을 하는 데에도 무작정 전투기 접근 중이라는 식의 오보가 끊이질 않았기에 실제 접근한 쉬페르 에탕다르기를 위성통신 장치 사용에 따른 오보로 판정한 대공전 통제함 인빈시블이 동료함의 경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 낮게 날아온 쉬페르 에탕다르 2기를 레이더가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등의 보고를 내놓았다. 정말 안 좋은 상황들이 극적일 정도로 완벽하게 겹친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때 셰필드를 격침시켰던 엑조세는 불발탄... 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2010년대 영국에서 최신 분석기법을 활용해 재평가를 한 결과 탄두는 기폭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탄두 기폭으로 셰필드의 주요 기능이 마비된 이후 로켓모터에 남은 잔존 연료에 불길이 옮겨붙으며 셰필드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것이다. 미사일 자체가 영 좋지 않은 전투 통제실에 직격하는 바람에 셰필드는 격침 이전에 이미 바다 위에 떠 있는 고철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 연료가 남아있던 로켓 모터가 화재를 일으켰고 이때 하필이면 셰필드의 피해 컨트롤 시스템이 피격과 함께 멈춰버린 바람에 화재진압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셰필드는 후에 영국으로 예인 중에 피탄된 곳에 침수되어 6일 뒤인 5월 10일에 최종 침몰했다.

그런데 더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아르헨티나는 셰필드의 침몰 사실을 영국 언론이 기사를 낼 때까지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거리 정찰이 가능한 기종들은 전쟁 초반부에 전부 쓰지도 못하는 꼴이 나 버렸고[19], 장거리 레이더 또한 작동 불가 상황이라 믿을 건 실전에 투입되었던 조종사들의 증언이었는데, 이러한 증언은 예로부터 신뢰도가 그다지 적절하지 못했다. 일단 불이 붙으면 격침!이라고 잘못 알 수도 있는 것이고, 더군다나 이 엑조세 2기를 쏘았던 쉬페르 에탕다르 조종사들은, 발사 직후 방공망의 사거리를 벗어나기 위해 바로 도주했기에, 발사는 했는데 도무지 어찌되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사실,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 전체에 걸쳐 이렇게 부족한 면모를 많이 보였던 이유는 군대 조직 자체가 남미 패권 다툼을 위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즉, 고속 장거리 전폭기가 없었고, 재급유기도 단 2대였던 이유는 보통 국경 지역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분쟁을 대비해 시스템을 구축해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조금 어려움에 처했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해상전을 벌였으니 그 결과는 안 봐도 뻔한 것이었다.

이후 셰필드 격침 전과를 기록한 엑조세는 옛 소련스틱스중국실크웜 못지않은 대함 공격수단으로 각광을 받는다. 이 사건은 대함 미사일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어, '셰필드 쇼크' 혹은 '엑조세 쇼크'라 불리며 이후 군함의 건조에 있어서 대함 방공 능력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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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페르 에탕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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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격당한 셰필드

참고로 침몰할 때 승조원들이 몬티 파이톤과 브라이언의 삶에서 나온 곡 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 of Life를 불렀다고 한다(...). 가사의 뜻을 보면 뭔가 참 거시기하다.

3.6. 영국의 상륙전

지상군 전투서열
https://en.wikipedia.org/wiki/British_ground_forces_in_the_Falklands_War

5월 21일 영국군이 동포클랜드 산 카를로스(섬 서북쪽 위치, 반면 포트 스탠리는 동쪽이다.)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지상전이 시작되었다. 지상군은 영국 해병대 제3코만도 여단(제40, 42, 45 해병코만도, 육군 낙하산 연대 제2, 3대대 증원, 해병대 SBS 제2, 3, 6분대 증원, 육군 SAS D, G중대 증원)과 영국 육군 제5보병여단(Scots Guards 연대 2대대, Welsh Guards 연대 1대대, 제7에든버러 공작의 구르카 연대 1대대)이 투입되었으며 목표는 섬 동쪽 끝의 포클랜드 제도 최대도시이자 총독부가 있는 항구도시 포트 스탠리였다. 이 날 아르헨티나 공군 FAS가 공습을 가했는데, 엑조세를 피해 이 곳에 상륙하던 계획이 도리어 역류해, 자연 방벽(근처에 산지와 언덕이 제법 있는 지형이라 엑조세를 방어하기는 좋았다.)에 저공비행하는 FAS 전투기들을 발견하지 못해 대략 5척이 큰 피해를 입고 격침까지 가기도 하는 피해를 당했다. 물론, 그래봐야 상륙 작전은 잘 끝났기에 전황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덤으로 이날 게릴라 때려잡는 데나 유용하지, 현대전에서는 무력한 푸카라나 에르마치도 휴대용 대공 미사일(레이피어, 블로우파이프)에 제압당했다.

5월 25일, 아르헨티나군은 다시 한번 쉬페르 에탕다르를 동원하여 영국 함대 본진에 2발의 엑조세 미사일을 발사하였으나 이번에는 영국군이 엑조세 발사를 탐지하고 즉시 대응에 나서 본진은 타격을 입지 않았으나 그 중 1발이 수송선 아틀란틱 컨베이어[20]에 명중하여 불길이 치솟았고 적재되어있던 물자인 에섹스 헬리콥터와 치누크 헬리콥터가 있는 상태로 5월 30일 격침되면서 이후 영국 해군측이 헬리콥터를 이용한 대규모 상륙작전이 힘들어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군은 더 심각한 보급난을 겪고 있었다.) 또한, 사우스 조지아 섬에 있던 아르헨티나 해군 부대가 이 날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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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해군 프리깃 HMS 플리머스(Plymouth)의 사관실에서 함장 데이비드 펜트리스(David Pentreath) 대령과 부하 장교들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사우스 조지아 섬 주둔 아르헨티나 해군 지휘관 알프레도 아스티스(Alfredo Astiz) 정보소령. 아스티스 소령은 전후 중령까지 진급했으나, 1995년에 군부독재 시절 부에노스 아이레스해군 기관부사관학교(Escuela Superior de Mecánica de la Armada, ESMA)에서 반정부 시위대 5,000여명이 학살된 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불명예 전역, 이후 65세로 췌장암 투병 중 숨졌다.

5월 28일, 진격로의 측면을 위협하는 아르헨티나 육군 잔존부대를 제거하여 안전을 확보코자 섬 중앙의 좁은 길목인 구스 그린(Goose Green)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영국군 피해는 전사 17명, 부상 31명. 반면 아르헨티나군 피해는 전사 250명, 부상자 121명, 투항병력 1,400명…. 사실 SAS에 구르카까지 투입된 순간 사망 플래그는 성립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구르카병들이 실전에 참여하기도 전에 전투에서 패하고 지칠대로 지친 아르헨티나 육군들은 구르카병들이 온다는 소문에 항복했다고 한다. 덕분에 상태가 멀쩡한 아르헨티나 육군 포로들이 가득한 사진이 남게 되었다.

일시적으로 이긴다 하더라도 제해권을 영국이 장악한 이상 추가적인 지원은 없어 아르헨티나는 결국 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아르헨티나 육군 병사들은 대부분 징집병으로 전문성이 의심되는 병사들이었다. 쉽게 말해 총알 떨어진 카빈총 든 예비군 10명이 중무장한 네이비 씰 1명과 맞서 싸웠다는 이야기다. 숫자가 차이가 나더라도 게임이 될 리 없다. 게다가 아르헨티나측이 머리수[21]만 믿고 중화기도 없이 병력을 분산배치하는 바람에... 서경석 퇴역 장군이 집필한 <전투감각>을 보면 보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 사례로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군의 방한 장비가 부족한 것을 꼽고 있다. 전쟁 시기가 겨울(남반구이므로)임을 감안하면... 그러나, 이 아르헨티나군 수송부대 조종사들도 사실 용자들이다. 전쟁이 시작되고, 여건상 포클랜드 섬 주변의 제공권은 당연히 영국군의 차지였던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보급 및 부상자 후송 임무를 수행했다. 주로 밤중에 이륙했는데, 이 당시 악천후를 감안하면 호위기들도 없이 임무를 수행한 이 조종사들은 영웅 칭호를 받아 마땅하다. 실제로 아르헨티나군의 C-130이 초계 중이던 해리어들에게 격추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는 당시 포트 스탠리를 점령하면 영국이 응답해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포클랜드 제도에 그토록 인해전술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활주로 확장 공사(1주일 걸릴 것으로 예정) 및 전차, 야포탄 등 그야말로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건들은 제대로 운송할 수 없었다. 전쟁 준비를 거진 1개월에 걸쳐 할 수 있었기에 서두른다면 가능한 일이었지만 현대전의 필수품은 물론, 기본적인 보급품(월동 장비마저도.)마저 다 빼먹은 것이다.[22]

여기서도 일부 비화가 있는데, 당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전쟁이니만큼 상륙군의 일거수일투족을 취재하려는 각국 취재진의 경쟁 또한 뜨거웠다. 이러한 열기가 과열되어, BBC에서는 영국군의 상륙작전을 즉각 중계하는 것도 모자라 상륙군이 구스그린을 공격하려고 이동중이라는 설명까지 친절하게(?) 덧붙였다. 실제로 아르헨티나 측에서도 BBC의 보도 내용을 인지하고 구스그린 방어에 힘을 더했으며, 전쟁 후 영국군은 BBC를 (아군 병사들에 대한) 살인죄로 고소하기까지 했다. ( 이 내용은 정확한 출처가 없음/ 출처 발견시 추가 바람 )

3.7. 엑조세의 마지막 발악

5월 30일, 아르헨티나군은 마지막 남은 1발의 엑조세 미사일을 발사하는 승부수를 띄웠으며, 작전이 끝난 직후 "이번에 발사한 엑조세가 인빈시블에 명중했다!" 라고 발표했다. 영국은 즉시 아르헨티나군의 주장을 일축했으나, 피격당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아 한동안 아르헨티나 측의 발표대로 인빈시블이 피격당해 손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 마지막 엑조세는 함대 방공망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측의 발언도 약간 일리있게 보였던 게, 그 전에 얻어맞고 폐기 상태가 된 채 둥둥 떠 있던 애틀랜틱 컨베이어가 그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헐크 함선을 인빈시블로 오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이 당시 영국 언론들도 조용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첫 엑조세 공격이 이들 덕분에 아르헨티나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이 마지막 엑조세 공격 당시에 인빈시블의 시킹 헬리콥터 조종사로 근무 중이던 엘리자베스 2세의 둘째 아들 앤드루 왕자가 인빈시블의 갑판 위에 있었다고 한다.

4. 영국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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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제도에 다시 유니언 잭을 게양하는 영국군.
5월 31일, 영국군은 켄트 산에 도달하여 포트 스탠리를 포위할 태세를 갖추었다. 상황이 아르헨티나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UN은 아르헨티나군으로 하여금 포클랜드에서 철수할 것을 제안했지만 아르헨티나는 거부했다. 결국 전세가 영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그동안에도 자신들을 남미국가가 아닌 서방 백인 국가의 일부로 생각했던 아르헨티나는 정작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자신들을 지원해주지 않자 급기야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들은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제도 침공을 비난하거나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당시 아르헨티나와 사이가 좋지 않던 칠레는 아예 영공통과 허용 등으로 영국을 지원했다. 중남미 국가 중에서는 페루만이 아르헨티나를 지지했으나, 이미 전세는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영국 측에게 유리해졌다.[23]

6월 8일 영국군 기동 부대가 이동한 상태에서 항공 호위기가 적은 상태로 상륙 작전을 펼치다가 상륙함(LSL) 2척이 A-4 공격기에 의하여 피해를 입었다.

당시 방공 미사일인 레이피어는 5여단 본부대 호위로 빠져있었고, 체공하던 해리어들도 아르헨티나 공군기들이 침투하는 척하면서 빠져버리는 것 때문에 지친 상태라서 제대로 된 저지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고, 이 상륙함 자체가 현대적인 LSD나 LPD 같은 게 아니라 LST에 가까운 형태인지라 이후 영국측의 상륙 전술이 초수평선 상륙 작전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아르헨티나군에서 급히 차출한 민항기들로 이루어진 미끼 부대를 운용해 해리어들을 낚시하기도 했다. 이는 아르헨티나가 영국제인 B-108 캔버라를 보유했기에 민항기를 출격시켜 영국군들로 하여금 캔버라 폭격기들이 출격한 것으로 오인하게끔 낚시를 시도한 것이다. 실제로 효과가 꽤 있어서 영국군 조종사들 및 승무원들을 피곤하게 만들었고, 저공 침투하는 A-4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포클랜드판 볼로 작전...이 아니고 Fenix 작전이다. 이후 이 A-4들은 영국군 해리어의 AIM-9L 미사일을 맞고 격추당했다.

6월 11일 영국군 최후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이때 영국군은 개방된 칠레 영공[24]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면서 아르헨티나에 대한 공세를 실시했다. 11일 포트 스탠리의 마지막 방어선인 롱돈(Longdon) 산에서 아르헨티나군이 마지막 저항을 했다. 이 방어선을 지키던 아르헨티나군 중대병력은 의외로 분투했으나 이미 전세는 기울었고, 롱돈 방어선이 뚫린 뒤 14일 포트 스탠리의 아르헨티나군이 백기를 들면서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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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7월 21일 영국남부 포츠머스 항으로 개선하는 원정 기동 함대 기함 HMS 허미스

영국 측 258명, 아르헨티나 측 649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21세기까지의 세월 동안 양측 참전자들 중 자살한 이들이 전사자의 수를 넘어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자살자 숫자가 과장되어 있다는 말도 있다. # Mod에 따르면 포클랜드 참전 군인의 7%, 즉 95명이 자살과 관련된 죽음을 맞았다.

이 전쟁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사망자 3명인데 모두 포클랜드의 영국인 주민들이다. 6월 11일 마지막 공세 때 영국군의 오폭으로 사망했다. 그 외에 아르헨티나 해군에서 동원한 민간인 선원 16명이 사망하였다.

전쟁이 아르헨티나의 패배로 종료되자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승전했다고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어떻게든 발악했으나 그 해가 하필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이 개최된 해라서 월드컵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단이 본국의 패전을 알렸으며, 이에 따라 국민적인 분노가 솟아오르자 갈티에리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레이날도 비뇨네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비뇨네 역시 국내의 반발을 이기지 못하였고, 결국 이듬해인 1983년 비뇨네 정권도 여러 반정부 세력들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면서 1976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여 반인륜적 폭력과 살인 등으로 국가를 공포로 몰아넣은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정권은 포클랜드 전쟁으로 사실상 붕괴되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라울 알폰신이 대통령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영국도 뜻밖에 막대한 전비를 쓰고 사상자도 꽤 나온 전쟁이었다.[25] 그래서 영국에서는 포클랜드 전쟁을 미국베트남전에 비유하고 있다. 전쟁 규모도 피해도 비교 불가능한 수준인데다 영국은 이기기까지 했으니 베트남전과 비교하는 것은 이래저래 무리지만.[26]

여하간 대처는 그 막대한 전비에도 불구하고 지지도가 급상승해 정권연장에 성공했으며, 덕분에 노동당은 길고 긴 야당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에 대해 포클랜드 전쟁에서의 막대한 전비는 안 그래도 힘든 영국 재정에 직격타를 날렸으며, 영국 경제가 악화되는데 크게 기여한 전쟁이기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전쟁 이전 70년대의 영국은 연간 2.8%의 저성장, 석유파동으로 연평균 20% 이상의 인플레이션 발생, 평균 10.1%의 실업률, 영국병으로 생긴 고비용 저생산성에 의한 재정 악화 등으로 경제규모가 1인당 GDP 세계 18위까지 떨어지며 신음한 반면, 전쟁 이후인 1980~1990년대 이후부터는 경제가 다시 발전해 2016년 기준으로 세계 13위. 즉 포클랜드 전쟁이 영국 경제를 망쳤다는 설은 근거가 떨어진다. 이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회적 문제가 생기기는 했으나, 영국이란 나라의 총 경제규모 자체는 엄청나게 발전했다. 적어도 IMF 금융지원을 받던 1970년대[27]보다는 훨씬 낫다.[28] 물론 전쟁으로 인해 영국 경제가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국이 전쟁하다가 경제를 말아먹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게다가 명분도 실리도 없이 손해만 본 베트남전에 비해, 영국은 위에서도 언급되었듯 참전하지 않았을 때 질 리스크가 너무나도 컸고, 큰 전비를 소모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승전하여 목표를 달성했다. 승전으로 인하여 발생한 국가여론의 무형의 플러스 효과는 덤이다.

한편 신자유주의적 경제 패러다임이 전 세계를 휩쓰는 방아쇠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의 레이건만으로는 전세계의 신자유주의화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전쟁 승리의 업적으로 재집권을 할 수 있었던 덕분에 수월히 진행되었다는 것. 전쟁 발발 직전 시기인 1982년 영국은 실업률이 10%에 실업자가 300만에 달했으며, 특히 영국 북부 지역은 5명 중 1명이 실업자였다. 비록 대처 정권 이전에 장기집권한 노동당 정권들의 실정이 누적된 결과이긴 하였지만, 이러한 경제파탄으로 인한 비난의 화살은 모조리 현직 총리였던 대처에게 쏠렸다. 집권 3년차 타임지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처는 "체임벌린(히틀러를 막는데 실패하여 2차대전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 수상과 더불어 가장 무능한 수상"이라고 평가되었으며, 대처 내각과 집권 보수당의 지지율은 10%대에 머무는 등 당시 영국 정권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차기 총선에서는 분명히 대처가 질 것이라고 모두가 예상했던 그때,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로 인한 엄청난 지지율 상승세에 힘입어 대처가 재집권했으며, 이후 대처 내각은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나갔다. 대처 내각의 감세, 규제 완화, 정부 지출 축소, 공기업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적 경제 조치들은 영국 경제의 회복에 큰 공헌했으며, 비슷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던 다른 나라들은 이러한 대처의 경제정책을 자국의 실정에 맞추어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 경제의 신자유주의화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내내 이어지던 경제 호황에 크게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으나, 이전보다 경제적 상하위계층 간의 소득과 자산 수준의 양극화를 더욱 강화하고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발생에 일조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양립한다.

5.1. 포클랜드 전쟁 당시 프랑스 관련 루머와 반박

  • 관련 문서: 프랑스의 역대 사기 행각 전설
  • "아르헨티나에 엑조세+쉬페르 에탕다르 조합을 판매한 프랑스가, 영국에 엑조세의 정보를 넘겨줘서 고객을 배신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양 인터넷을 떠돌아다니고 있지만 이건 프랑스 안티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이다.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기습공격하자마자 프랑스는 즉각 아르헨티나로부터 주문받았던 엑조세와 쉬페르 에탕다르의 인도를 중지했으며, 영국에도 정보를 알려주지 않음으로서 동맹국과 고객 양쪽과의 의리를 모두 지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70년대부터 영국은 엑조세를 도입해 운용한 국가였다. 뭐하러 정보를 또 얻겠는가. 한마디로 까기 위한, 억지 주장'''이니 (더 이상) 믿지 말고 말하지도 말자. 그러니까 진짜 문제는 주문한 물품을 다 받지도 못했는데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 쪽에 있었다. 급하게 전쟁을 일으켜도 딸랑 5발밖에 안 받은 대함 미사일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말이니.
    안티들 중, 위 떡밥이 논파되면 "어쨌든 고객에게 물건을 넘기지 않은 것은 배신이다! 프랑스는 나쁜 나라다!"라고 비난하는 2페이즈(…)로 넘어가는 경우가 생기면 이렇게 반박해주자. 게다가 이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수출 금지는 비단 프랑스 독단적인 조치가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내린 조치로, 같은 이유로 독일 역시 아르헨티나에 넘기기로 했던 구축함의 인도를 전쟁기간 동안 보류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이탈리아가 이라크에게 5척의 구축함을 다 완성된 상태임에도 인도를 거부했다. 만일 이때 이 구축함들이 이라크로 넘어왔으면 이란 해군은 그나마 유지되던 고속정 부대마저도 전멸했을 것이다.
    그래도 포기를 모르는 극렬 프랑스 안티들은 위 두 가지가 모두 깨지더라도 "전쟁 중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쟁 끝났으면 주문한 물건은 줘야지요? 돈만 먹고 모른척한 프랑스 나쁜 놈!"이라며 마지막까지 반격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쟁이 끝나자 주문한 물건을 정확히 다 넘겨줬다. 프랑스는 약속을 지켰다. 마찬가지로 독일도 넘기기로 했던 구축함을 넘겼다.
  • 위와 마찬가지로, "프랑스가 공군합동훈련을 통해 영국에게, 아르헨티나의 주력기인 미라지의 비행성능과 정보를 넘겨줬다"는 소리도 새빨간 루머에 불과하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원래 정기적으로 합동훈련을 하며, 포클랜드 전쟁 때문에 시행된 훈련이 아니다. 게다가 프랑스 공군이 공중전 훈련에 미라지를 안 가지고 가면 뭘 가지고 가겠는가? 무엇보다도 이 훈련에 참가했던 영국 조종사들은 포클랜드에는 가지도 않았고, 정작 영국에게 정보를 제공한 것은 뉴질랜드 공군, 그것도 프랑스제 미라지가 아닌 미국A-4 스카이호크 공격기에 대한 정보였다. 게다가 그 정보가 아르헨티나군이 사용하던 그 모델들이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등장한지 30년이 지난 기종에 관한 정보가 이리저리 넘어갔다고 전쟁 수행에 큰 문제가 생긴다면 자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 아르헨티나 스스로는 엑조세를 운용하지 못했다. 기술적으로 매우 진보된 물건이라 그 동안 A-4 스카이호크와 비유도 폭장만 사용하던 아르헨티나는 도입시 상당한 기술장벽으로 발생한 애로사항 때문에 슈페르 에탕다르에 설치된 발사대 자체도 제대로 튜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다소에서 기술진을 파견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이 기술진들이 포클랜드 전쟁 시에도 그대로 남아서 셋업을 도와주고 있었다.
  • 다만, 당시 프랑스의 한 방산업체 관계자가 포클랜드 전쟁에 관해 평론한 내용이 이후 논란이 되었는데, 그 내용이 과장이 섞여있음을 고려해도 좀 많이 충격적이다.
    우리 프랑스의 미사일에 희생되는 것이 영국군의 함정이든 아르헨티나군의 함정이든 그것은 프랑스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우리 프랑스의 관심은 단지 이 11만 파운드짜리 값비싼 미사일이 가급적 많은 함정을 격침시킨다면 프랑스 국민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해주게 되는 것이다.



    - 토크멘터리 전쟁사 제 134부 영국vs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전쟁II. 일본 군사잡지 하비재팬으로부터 재인용.

    하지만, 핑계없는 무덤 없다고, 당시 프랑스로서도 변명은 있는데, 원래 방산업체라는 곳이 그렇게 전쟁으로 무기팔아 살아가는 업계이다. 이를 가지고 비판하기 시작하면 모든 방산업체와 군대가 존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두번째, 프랑스는 2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이후로 자국의 거의 모든 인프라가 하나같이 아작나 있었고, 모든 게 풍족하던 유럽 내에서도 특히 풍족했던 'La Grande Nation'[29]은 이미 개발살나 역사책 속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래서 자국의 경제를 단기간에 정상궤도로 살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물색하다 무기판매를 자국 경제의 중점으로 맞춰두었고 그 여파로 자연스럽게 방산업체를 대대적으로 밀어주고 있었다. 그래서 이는 사실 당시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필터링 없이 대변해준 것이기도 하며 실제로도 이 이후 엑조세 미사일을 비롯한 프랑스제 무기들이 국제 무기시장에서 대박을 쳐 프랑스의 경제가 급격히 나아지기도 했다.[30] 이 점들을 감안하면 위 평론이 도를 넘은 지나친 발언임은 틀림없으나, 방위산업의 본질을 정확히 짚고 있기도 하다.

6. 기타

  • 과거 예비군정신교육의 주요 단골 소재 중 하나였다. 아르헨티나가 무리하게 영국하고 싸우다가 참패해서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직면해 대국민 혼란이 일어난 대신, 승전국인 영국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
  • 위의 찌라시와는 또 별개의 군 정훈교육 자료가 있다. 포클랜드 전쟁 당시 영국 언론의 무분별한 전황 보도가 아르헨티나의 전쟁수행에 도움이 되어 이후 영국 언론이 자체 통제에 들어간 것을 다루고 있다. 즉 전시상황에서 국민의 알 권리가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지 고민해보자는 내용이다. BBC는 포클랜드 전쟁 때도 언론의 중립을 유지하면서 '아군'이라고 부르지 않고 '영국군'이라고 불렀으며, 언론의 알 권리를 추구한 나머지 군사작전을 실황하여 적의 방어를 강화시키기까지 했다. 이 덕에 영국군은 전후 BBC를 고소할 정도로 화를 냈다. 반면 대놓고 군부독재정권이 언론을 통제했던 아르헨티나는 완전히 패전하면서 망했다.
  •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에이스인 피에르 클로스테르망이 아르헨티나를 지지했다가 영국 국민들에게 배신자라고 욕먹었다. 아르헨티나를 지지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을 교육했다는 이유.
  • 마가렛 대처는 전쟁기간 중 발생한 자국군 전사자 258명의 가족들에게 일일이 추도편지를 작성하였다. 결코 이름만 다르고 내용은 똑같은 형식적인 편지가 아니였다. 이로 인해 일과시간은 물론이고 본인의 휴가도 반납해 가며 희생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론하고 각자의 개인사와 전사자의 죽기 전 상황을 상세히 적어 정성들여 편지를 썼다.
  • 탑기어 시즌 21 에피소드 8과 9는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무대로 펼쳐지는데 아르헨티나의 티에라 델 푸에고의 우수아이아라는 곳에서 나갈 것을 강요받고 실제로 이에 응해서 나갔다. 제러미 클락슨이 탄 포르쉐의 번호판이 포클랜드 전쟁을 기반으로 놀리려고 일부러 만들어진 가짜 번호판이라 우기는데 칠레 국경으로 떠날 때 아르헨티나 우익들이 위협 운전을 한 것은 물론 계란부터 시작해서 돌까지 던져 차 유리가 깨지는 등 뭔가 많았다고 한다.
  • 원래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에서는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이 영국을 돕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는 얘기도 있다. 결론적으로는 완벽하게 빗나갔다. 호주와 캐나다는 영국을 지지하고 나서며 여러가지 군사적 지원을 제안했으며, 뉴질랜드의 경우 아르헨티나군이 운용하는 장비 정보를 넘기는 것은 물론 해군 함정을 보내 영국을 직접 돕겠다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이때 인도양에 배치된 영국 해군이 포클랜드 전장으로 출동해 전력 공백이 생기자 이를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이 메워줬다고 한다. 동시에 남아프리카 공화국호주, 뉴질랜드는 아예 아르헨티나와 단교를 하거나 경제 제재를 가하며 외교적-경제적 압박도 병행했다. 이 때문에 포클랜드 전쟁을 영연방과 중남미의 충돌로 해석하기도 한다. 심지어 아르헨티나 입장에서는 예상조차 못했던 뒤통수를 얻어맞았는데, 칠레까지 영국의 편을 들며 자국 영공을 영국 공군에게 개방해버린 것도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패배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 영화 디스 이즈 잉글랜드의 주인공의 아버지도 포클랜드 전쟁에서 전사했다.
  • SA80이 똥망화(...)된 이유이기도 하다. 포클랜드 전쟁과 이전의 북아일랜드 분쟁사태로 인해 영국은 L1A1을 대체할 소규모 고속탄을 사용하는 새로운 돌격소총의 개발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마가렛 대처가 IMF 경제위기를 이겨낸다고 시원하게 영국 정부의 각 부처 예산들을 단체로 삭감했고, 더해서 포클랜드 전쟁까지 치루면서 영국 국방부는 말 그대로 호주머니가 텅텅 빈 상황에서 SA80을 개발하게 된다. 사실상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하는, 아니 애초부터 투입 자체가 없는거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는데 제대로 된 산출이 나올리가. 더해서 이 없는 돈을 마련한다고 국립 조병창을 하루아침에 민영화했는데, 이들의 상당수가 해체 및 대량해고를 통한 대규모 축소를 맞을 상황이었다. SA80의 개발회사였던 로열 오도넌스(구 엔필드 조평창)가 대표적이었고, 이 회사의 SA80 개발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개발진들은 SA80의 아버지뻘인 XL64E5를 5.56mm NATO 탄을 받아먹고 쏠 수 있게끔만 하도록 XL70E3으로 개조를 했고 이 외의 안전성이나 신뢰성의 문제에서는 '나 몰라. 배 째든지 등 따든지 맘대로 해.'로 일관하면서[31] 영국 국방부는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이 XL70E3를 SA80으로 도입했다. 다행히 L85A2(HK에서 개수한 모델)로 개조되면서 현재는 나아졌지만.
  • 엑조세 대함 미사일 쇼크로 전세계 해군이 진보적인 성향을 띠게 만들어 미사일 군비경쟁을 일으킨 사건임과 동시에 2차 세계대전때부터 대공포로 사용되어 온 보포스 40mm 포가 중소형급 전투함에서 여전히 주력 무기로 사용될 수 있음을 검증하여 구식 무장을 유지하게 한 사건이다. 영국 해군이 아르헨티나 공군의 A-4 제트전투기를 보포스 포로 격추하면서 컴퓨터로 작동되는 사격통제장치가 있다면 여전히 강력한 무기인것이 검증되었기 때문. 이 이후 전함들은 100mm 이상급의 거대주포보다는 근대전에서 대공포나 부포로 쓰이던 40mm, 75mm 급의 포를 주포로 채용하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부포가 자리잡던 곳은 어뢰와 대함미사일로 꽉꽉 채워넣는 양상을 띄게 되었다. 또한 방공함들에 주로 달리던 다양한 미사일 방어체계들이 함의 크기에 상관없이 우후죽순 달리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

7. 명칭 문제

한국에서는 당시 서방의 보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포클랜드 전쟁이라고 칭하나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제도라고 불리기에 포클랜드 전쟁/분쟁에서 아르헨티나 편을 드는 나라들에서는 말비나스 전쟁이라 하고 있다. 실제로 영국이 이겨서 포클랜드 제도는 포클랜드 제도로 남게 되었고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기에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인과 대화할 때 등에는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32]

중국의 경우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에서 공식적으로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으며, 때문에 포클랜드 전쟁을 '마도 전쟁'(马岛战争)으로 표기한다. 그리고 홍콩마카오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기반을 완성한 요즘에는 이 전쟁을 아르헨티나가 고유 영토를 되찾기 위한 정당한 전쟁이었다고 말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 정당성=중국이 홍콩과 마카오를 가져간 정당성"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

[1] 사실 칠레 피노체트 정권이 시행한것을 아르헨티나에서도 효과가 있다고 보면서 그대로 도입한것이다. 즉, 신자유주의의 원조격 되는 정책이라는 셈이다. 차이점이라면 칠레도 무분별한 외채와 외자도입이 이자율 상승가 겹치면서 경제가 파탄날뻔했지만 구조조정에 성공하면서 일단 한숨 돌릴수있고 군부가 물러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정수준에 있어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반면에 아르헨티나 군부는 구조조정에 실패한 와중에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면서 철저하게 패망했다는 점이다.[2] 주민 1500명과 60만 마리의 양떼가 사는 곳에 영국 해병대 50명이 주둔하고있었다.[3] 영국은 무상의료 서비스를 하고 있었지만, 당시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펼친 임금삭감 정책 덕택에 아르헨티나의 의료비용이 외국인들 기준으로는 획기적으로 낮아졌다. 즉, 비행기값을 감안하면 큰 차이가 없어진 셈이다.[4] 보통 한곳에 서 있게 하거나 앉혀두는데 범죄자처럼 엎드리게 해놨다.[5] 말레이 해전에서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 함장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존 리치 대령의 아들이다.[6] 진주만 공습 당시 미국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자국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온 반응일 수밖에 없다. 아르헨티나의 친미적 성향도 레이건의 이런 반응을 이끌었지만 미국 입장에서 아르헨티나와 영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아무리 이빨이 빠졌어도 당연히 영국이다.[7] 이 당시 아르헨티나군 사진을 보면 장비가 미국스럽다.[8] 링크1 링크2[9] 미군이 그동안 장거리 폭격비행 기록을 수립하지 않은 것은 물론 전선 가까이의 해외기지를 이용한 덕분이었다. 다만 보안상의 문제로 1999년 유고 공습(코소보 사태)과 2001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B-2 스피릿이 아예 미 본토에서 목표지역 사이를 논스톱 왕복비행하기도 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는 인도양 디에고 가르시아 섬의 기지를 이용하여 그나마 비행거리를 줄일 수 있었다.[10] 이랬다가는 연료가 없어서 본국에 돌아가지 못한다. 포트 스탠리 비행장은 활주로가 짧아 미라지가 이착륙하기에는 무리인 곳이다. 그래도 미라지 1대가 연료부족으로 비상착륙을 시도하기는 했다. 대공포 사수들이 격추시켜서 그렇지... 그래도 대공포 사수들을 욕할 수는 없는게, 그 날 새벽부터 영국군의 공습과 해상포격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전쟁 기간중 해리어 4대를 격추했다.[11] 영국의 해리어는 아르헨티나가 쓰던 Matra 530과 Shafrir-2와는 비교불가인 AIM-9L을 사용했다.[12] 이런 와중에서 폭격을 가하여 영국 함선들을 격침시킨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은 그야말로 용자, 능력자들이다. 사실, 이만큼이라도 한게, FAS의 지휘관은 베테랑 조종사 출신의 장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13]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침몰로 323명의 승조원이 전사하고 700명의 승조원들은 악천후 속에서 구조되었다고 나왔다. 헤네랄 벨그라노는 아르헨티나에서 건조한 순양함이 아니라 1938년에 취역한 미국의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USS 피닉스(CL-46)였다. 진주만 공습 와중에 아무런 상처 없이 살아남아 남은 전쟁 동안 활약했지만 결국 전쟁 후 아르헨티나에 매각되어 활동하다가 침몰했다.[14] 정확히 말해서 투입되어 있었다는게 포인트다. 물에 띄워놓으면 뭐하나, 유기적으로 잘 짜여진 체제가 있어야지... 실제로, 대잠 전력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 전쟁 전 4월 동안에도 대부분의 수송은 공중으로 했다. 잠수함 공격이 무서웠기 때문이다.[15] 항공모함조차 짱박혀 버렸으므로, 함재기들도 본토 기지에서 출격하게 되어 간당간당한 항속거리 내에서 작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함재기들이야 전부 A-4들이었으나, 영국도 미사일을 제외하면 해리어 또한 공중전에 유용한 기종은 아니었다.[16] 게다가 첫 날 이후로 최첨단 레이더 시스템까지 오프라인이 되어 영국 해군 함정들이 포격 거리로 접근하기 전까지 알아챌 수도 없었다.[17] 격침시킨 어뢰는 타이거피시가 아닌, MK 8 어뢰였으나 경고사격+실사격의 2발을 쏘기 위해서는 타이거피시 어뢰를 어쨌든 사용해야 하기 때문. 당시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던 영국이었기에 먹히는 발언이었다.[18] 그렇지만 아르헨티나가 보유하고 있던 쉬페르 에탕다르와 엑조세는 각각 5기와 5발뿐이었다. 항공모함을 격침시키는 대박이 나지 않는 이상 전황 자체를 뒤집기에는 매우 적었다. 사실 영국군이 상륙을 시작한 5월 중순 이후부터는 항공모함을 격침시켰다고 해도 털렸을 것이다. 지상군은 장비도 부족하고 예비군보다 못한 수준이며, 아르헨티나 해군은 항구에 짱박혀 있었으니... 아르헨티나 공군 및 해군 항공대는 전쟁 전에 자국의 42식 구축함을 이용해 가상 전투를 벌여 보았으나 생환기가 50%정도 밖에 안 되는 결과를 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로서는 방법이 없었다...[19] 이 기체들도 사실 노후화된 기종들이라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에는 문제가 좀 있었다.[20] 수송선에 전방에 수직이착륙을 하기 위하여 방염처리한 장소를 만든 것이라고 하면 정확하다. 아틀란틱 컨베이어을 항공모함이라고 하는데 사실 아틀란틱 컨베이어의 임무는 2척의 항공모함에게 헬리콥터와 해리어를 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워낙 컨테이너선에서 해리어를 운용한다는 사실이 너무 놀랍다보니 항공모함이라고 표기하지만 정확히 이야기하면 항공기 수송함이다.[21] 지상군(알보병이 대부분)만 10,000명 가량 투입했다. 포클랜드 제도 인구가 많이 따져봐야 3,000명인 사실을 감안하면 인해전술 그 자체다. 제한된 수송 전력으로 이 병력을 수송하느라 5월 개전까지 준비 기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장비(전차, 야포, 공사용 장비 등)와 전문가(공병 등)들은 전혀 데리고 오지도 못했으며, 개인 화기의 탄환도 재고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22] 더군다나 현대적인 해군의 부재로 전부 공중수송을 했다. 중장비 수송은 거의 불가능했으므로[23] 사실 페루는 포클랜드 전 발발 초 아르헨티나와 영국을 상대로 평화 협상을 중재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아르헨티나 지지로 돌아섰다.[24] 흔히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동서로 나뉘어있다고 인식되므로 의아하게 여겨질 수 있으나, 칠레 영토 최남단 부근을 보면 푸에고 섬 근해에서 대서양 방향으로 열려있는 해안선이 확보되어 있다. 때문에 영국군 전폭기들이 이쪽을 돌아다니려면 칠레의 허가가 필요했다.[25] 아르헨티나의 함선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는 전쟁 초반 헤네랄 벨그라노의 격침 이후 아르헨티나 해군이 항구에 숨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26] 특히 포클랜드 전쟁의 패배로 아르헨티나는 군사력에 큰 타격을 입어 중남미의 군사강국 위치를 상실했다. 게다가 경제난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아르헨티나는 약화된 군사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27] 정확히는 1976년에 금융지원을 받음.[28] 예를 들어 1970년대까지 영국의 농업은 말 그대로 파탄났지만, 전쟁 이후 1980년대 이후부터는 최신 기계화되어 2000년 기준으로 국내 필요량의 60% 정도의 양을 생산하면서 노동력은 2%만 사용한다. 금융 및 일반 서비스 분야도 이때부터 엄청나게 발전했다.[29] 라 그랑드 나시옹, 소위 '위대한 조국'. 프랑스인들이 자국을 부르는 별명이다. 이는 유럽이 세계를 주도해 나가던 18~19세기 당시 특히 유럽을 주도해 나간 국가로서의 자부심이 들어있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프랑스가 강대국의 지위에서 내려오고 자국 내외적인 문제로 한참 휘청이고 있는 현대에도 꾸준히 쓰이고 있는, 프랑스인들의 애국심과 자국에 대한 자긍심을 보여주는 단어이다.[30] 다만 이 이전에도 미라주 III 등이 중동전을 포함한 여러 국제 분쟁을 통해 검증되고, 심지어 큰 전과를 올려 잘 판매되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무기시장의 아주 큰 혁명까지는 아니고 기존에 잘 팔리던 프랑스제 무기들에게 다시 한번 조명이 비춰지는 정도였다.[31] 단가 맞춘다고 조악한 재료들로 총기를 만든 것은 덤이다.[32] 그런데 요즘에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조차도 포클랜드 제도가 영국 영토라는 것을 사실상 인정하거나 그냥 영국 땅으로 인정하고 영국과 관계 개선을 하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제 "말비나스는 아르헨티나 땅이다!" 라고 소리지르면, 전쟁때 진심으로 그렇게 외쳤던 사람들을 놀려먹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