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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마라도나/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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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소년 시절3. 성인 대표팀
3.1. 데뷔3.2. FIFA 75주년 기념 대회3.3. 1979 코파 아메리카
3.3.1. 조별리그
3.4. 1980 문디알리토
3.4.1. 조별리그
3.5. 1982 FIFA 월드컵
3.5.1. 1차 조별리그3.5.2. 2차 조별리그
3.6. 1986 FIFA 월드컵3.7. 1987 코파 아메리카
3.7.1. 조별리그3.7.2. 4강전
3.8. 1989 코파 아메리카
3.8.1. 조별리그3.8.2. 결선 리그
3.9. 1990 FIFA 월드컵
3.9.1. 조별리그3.9.2. 결선 토너먼트
3.9.2.1. 16강전 vs 브라질3.9.2.2. 8강전 vs 유고슬라비아3.9.2.3. 4강전 vs 이탈리아3.9.2.4. 결승전 vs 서독
3.10. 아르테미오 프란키 트로피3.11. 1994 FIFA 월드컵
3.11.1. 남미 예선3.11.2. 조별리그
4. 역대 대회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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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에고 마라도나의 국가대표 경력을 서술하는 문서이다.

2. 유소년 시절

2.1. 1979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마라도나는 아직 너무 어렸어요. 신체적으로는 물론 감정적인 면에서도 그랬죠. 우리가 만약 대회에서 실패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런 압박감이 만들어낼 일들을요?

월드컵 조 편성 결과 아주 어려운 조에 속했어요. 플라티니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헝가리와 한 조에 들어갔죠. 게다가 마라도나는 아직 성장기에 있는 선수였죠. 아직 근육 구조가 갖춰지는 중인 선수입니다. 만약 월드컵에서 나쁜 파울을 당하게 되면 앞으로 이어질 축구 인생 전체를 망가뜨릴 수도 있습니다.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 (1978 월드컵 감독)
1978년 당시 마라도나는 자국 최고의 유망주를 넘어선 스타였다. 그렇기에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마라도나를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 엔트리에 넣어주기를 기대했고, 정치적으로 순박했던 마라도나는 군정권의 대표작에 출연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메노티 감독은 굳이 마라도나를 넣지는 않았다. 이유는 실력 부족은 아니었고, 아직 마라도나는 프로무대 2년 차인 17살 청소년으로서 치열한 월드컵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소위 선수 보호 차원이었다. 결국 그 월드컵에서는 마라도나 없이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결과로만 따지면, 대표팀도 우승을 거뒀고 마라도나 또한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원맨캐리로 조국 아르헨티나에 우승을 안겨주며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게 됐으니,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되었다.
파일:maradona 1979 U20.jpg
월드컵에 참여하지 못한 아픔을 날려버린 대회
이후 마라도나는 일본에서 열린 1979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궤를 달리하는 기량을 보여주며 팀을 결승까지 진출시켰고 결승전에서 프리킥골을 터트리며 소련을 3:1로 무너뜨리는데 일조하며 우승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대회 최우수 선수에 등극하는 것은 물론 6골을 기록하며 득점 2위[1]에 오르며 전세계에 축구 신동의 출현을 알렸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며 마라도나는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 참여하지 못한 아픔을 날려버릴수 있었고, 이후에도 각종 큰 경기들에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1979, 1980년 연속 남미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로 올라서게 된다.

3. 성인 대표팀

3.1. 데뷔

뛰어난 기량으로 15살의 나이에 성인 클럽팀에 데뷔한 마라도나는 당시 하나의 현상이 되어있었다. 아르헨티나 성인 대표팀과 U-20 감독이던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는 그런 그를 주목하고 있었고, 한번은 U-20 훈련에 동참시켰는데 자신보다 3~4살 많은 선수들을 갖고 노는 모습을 보이며 놀라게 했다.

메노티는 마라도나의 기량이 이미 U-20 수준을 넘었다고 평가했고 1977년 2월 27일 라 봄보네라에서 열린 헝가리와의 친선경기에 그를 콜업한다. 아르헨티나가 5:0으로 앞서고 있던 후반 62분, 마라도나는 2골을 터트린 레오폴도 루케와 교체 투입하며 성인 대표팀 데뷔전을 치른다.

관중들은 19번을 단 마라도나가 들어서자 일제히 박수를 보냈고, 이는 아르헨티나 대표팀 최연소 출전 기록이었다.

자국에서 월드컵이 개최되기로 결정되었고 감독이던 메노티는 대표팀 감독에게는 절대 주어지지 않는 기회를 잡았다. 그의 팀은 대회를 6개월 앞두고 소집되었다. 매일 함께 훈련하면서 수없이 친선전을 치렀고 선수들은 단체 합숙에 돌입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메노티가 마라도나를 중용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마라도나가 팬들이 원할 때가 아니라 감독인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때에 출전한다는 사실을 팬들은 이해해야 한다. 그는 우리나라 축구를 제대로 보여주는 선수다. 그렇지만 겨우 17세 나이에 최고 평가를 받는 선수가 된다는 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너무 위험하다. 마라도나의 앞에는 엄청난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만 그의 발전은 그가 무엇을 하느냐, 어떤 조언을 듣느냐에 달렸다.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 (1978 월드컵 아르헨티나 감독)
여름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마라도나는 단지 1경기에 출전했을 뿐이였다. 또한 이미 국보 대접을 받은 탓에 외국에 진출할 수 없는 선수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약삭빠른 메노티는 젊은 선수들의 외국 진출을 막아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냈고 아스널과 바르셀로나, 유벤투스의 제안을 받았던 마라도나의 머리는 살짝 아수라장이 됐다.
브라보와 보타니스, 그리고 마라도나.
이후 더 큰 아수라장이 이어졌다. 5월 19일 메노티는 25명의 선수를 모은 뒤 그중 3명은 올 여름 자신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선언했다. 그는 큰 목소리로 "브라보와 보타니스, 마라도나"라고 말했다.

마라도나의 경력에서 가장 슬픈 나날이었다. 하지만 대표팀 탈락을 행운으로 받아들일 여지도 있었다. 훗날 FIFA의 간부가 되는 라코스테가 마라도나의 탈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리버 플레이트 서포터였던 라코스테는 리버의 노르베르토 알론소를 대표팀에 포함시키기 위해 권력을 남용했다. 또한 유순하기만 했던 마라도나가 1978년 월드컵에 출전했다면 정부에 의해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 당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그날 나는 저녁까지 팀 훈련장에 남아 있었다. 날이 춥고 어두워져 혼자 가려고 하는데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마라도나가 나무 옆에 앉아서 슬픔을 가누지 못한 채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네가 얼마나 많은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는지 알아?’라고 물었다. 어린아이를 위로할 때 할 법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내게 되레 ‘아빠한테 어떻게 얘기하죠?’라고 물었다. 그는 메노티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카를로스 아레스 기자
그는 어렸지만 매우 뛰어난 선수였고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승선할 것이라는 전망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메노티는 아직 어리고 성장해야 된다는 이유로 그를 부르지 않았고 이는 마라도나에게 매우 실망적인 결정이었다. 그러나 대표팀 탈락은 우리가 알고 있는 디에고의 빛나는 경력의 시발점이었다.

마라도나는 대표팀에서 제외된 그날, 이후 자신의 연료가 된 분노를 깨달았다. 화가 난 10대의 소년은 20세가 되기 전까지 100골을 터트렸고 이후 일들은 축구의 역사가 되었다.

3.2. FIFA 75주년 기념 대회

1977년 성인 대표팀에 데뷔한 마라도나는 이후 메노티의 부름을 받지 못했지만 1979년 5월 22일 FIFA 창설 75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아르헨티나네덜란드의 경기에 소집되며 출전할 수 있었다. 마라도나는 어린 나이 답지 않게 드리블과 패스를 보여주며 활약했고 경기는 득점 없이 종료된다.

이어진 승부차기에서 마라도나는 6번째 키커로 킥을 성공시키고 무려 10번째 키커까지 가는 접전 끝에 얀 피터스의 실축으로 아르헨티나는 우승을 차지한다.

3.3. 1979 코파 아메리카[2]

1978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 참여하지 못한 마라도나가 출전한 첫 성인 메이저 대회로 마라도나는 자신의 상징인 등번호 10번이 아니라 6번을 달고 참가했다.[3] 당시 코파 아메리카는 3팀이 한조로 상대팀인 2팀과 각각 홈, 어웨이 방식으로 4경기를 치러 1위팀만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는 방식이었다.

3.3.1. 조별리그[4]

아르헨티나와 같은 B조에 속한 팀은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지쿠소크라치스가 이끄는 브라질과 볼리비아. 첫 경기인 볼리비아와의 원정 경기는 벤치에 머물렀고 팀도 2:1로 패했다.
파일:maradonazico.jpg
마라도나와 지쿠
이어진 브라질과의 원정 경기에서 선발 출장하지만 공격포인트는 기록하지 못하고 팀 또한 2패를 기록한다.

마라도나는 볼리비아와의 홈 경기에서 선발 출장하여 1골을 기록하며 3:0 승리에 일조하였지만 벤치에 머무른 브라질과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는 2:2 무승부를 거두며 1승 1무 2패를 기록하며 조별리그에서 3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 대회 이후 마라도나는 1987 코파 아메리카를 통해 다시 코파 아메리카를 참여하게 되는데 이는 바르셀로나에서 당한 부상과 더불어 1983 코파 아메리카 당시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가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아르헨티나 리그 프리메라 디비시온 소속 선수들로만 팀을 맞춰 출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바르셀로나 소속이던 마라도나는 참여하지 않았다.[5]

3.4. 1980 문디알리토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과 클럽에서의 퍼포먼스로 이미 세계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던 마라도나는 우루과이에서 개최된 최초의 FIFA 월드컵인 1930년 FIFA 월드컵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개최된 국제 축구 대회인 1980 문디알리토[6]에 참가하게 된다.

6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서독과 함께 B조에 속하게 된다. 대회 방식은 조 1위팀만 결승전에 올라 우승자를 가리는 시스템으로 치러지게 된다.

3.4.1. 조별리그

첫경기인 서독과의 대결에서 마라도나는 센스있는 플레이와 패스, 연계, 드리블을 보여준다. 경기는 전반 41분 호르스트 흐루베슈에게 골을 내주면 후반 80분까지 끌려가다가 84분 만프레트 칼츠의 자책골과 88분 라몬 디아스의 결승골로 2:1승리를 가져간다.

이어진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마라도나는 전반 30분 후안 바르바스의 롱볼을 바티스타[7]와의 경합을 이겨내고 따낸 뒤 드리블로 브라질의 문전까지 돌파하며 그대로 슛을 때려 골을 만들어낸다.[8] 그러나 후반 47분 이데바우두에게 골을 내주며 무승부에 그치고 만다. 최종 순위는 1승 1무로 브라질과 동률을 이루었으나 서독에게 무려 4골을 득점하며 승리한 브라질에게 득실차로 아쉽게 1위를 내주고 조별리그에서 탈락한다.

3.5. 1982 FIFA 월드컵

파일:maradona 1982 world cup.jpg

이미 당대 최고의 스타이자 선수였던 마라도나는 1982년, 바르셀로나에 입단하면서 유럽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에 온 마라도나에게 주어진 첫번째 과제는 클럽 경기가 아닌 스페인 월드컵이었고, 펠레를 잇는 천재로 일컬어진 이 선수의 첫 월드컵은 세계의 관심을 이끌었다. 아르헨티나 또한 마라도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기대회 우승을 이끈 주역인 마리오 켐페스까지 포함되어 있는 상태였으므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서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월드컵이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과 겹쳐 있었고 아르헨티나는 정상적인 경기를 펼치기에는 심리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당시 아르헨티나 정부는 포클랜드 전쟁 당시 거짓 언론플레이를 일삼으며 "콩알만한 섬나라 놈들 우리에게 개기다가 박살났다. 무찔렀다 대영제국!" 따위의 슬로건으로 국내 신문지상을 폭격하다시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언론플레이와는 다르게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스페인에 전초 기지를 차린 5월 중순부터 아르헨티나의 전세는 밀리기 시작했으며, 그 상황은 아르헨티나에서와 달리 생생히 유럽에 머물고 있는 아르헨티나 대표 선수들에게 전달되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일종의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서 훈련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나가기만 하면 포클랜드 전쟁에 대한 소견을 묻는 기자단에 둘러싸였으며 조국이 전쟁에 패배하는 꼴을 생방송으로 보고있으니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문 잠그고 하루종일 울기만 했다.

3.5.1. 1차 조별리그

마라도나가 속한 아르헨티나는 벨기에, 헝가리, 엘살바도르와 함께 그룹 3에 배정되었다. 그룹 별 1,2위 팀이 2차 조별리그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약체 엘살바도르와 한물간 헝가리가 포함되면서 만족스러운 조에 속하게 되었다.

캄 노우에서 열린 벨기에와의 첫 경기, 마라도나는 선발 출장하며 월드컵 무대에 데뷔한다. 이미 세계 최고의 선수답게 민첩하고 날렵한 모습을 보여주며 화려한 돌파와 패스, 연계, 프리킥 등을 보여주며 신고식을 했다.
파일:maradona belgium.jpg
마라도나 vs 벨기에[9]
그러나 득점은 나오지 않았고 후반 62분 에르빈 판덴베르흐의 골로 0:1로 패하며 자신의 월드컵 첫 경기를 마쳤다. 첫경기에서 패배한 아르헨티나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이후 엘살바도르를 10:1로 이기고 온 한때 최고의 강호였던 헝가리와 맞붙게 된다.
파일:maradona 1982 world cup goal1.gif
마라도나의 월드컵 데뷔골
마라도나는 팀이 다니엘 베르토니의 골로 1:0으로 앞서던 전반전 28분 베르토니가 페널티 박스 왼쪽에서 찬 공이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며 튕겨 나오자 그대로 쇄도하며 자신의 월드컵 데뷔골을 만들어 낸다.

아르헨티나가 2:0으로 앞서는 상황에서 후반전에 들어서고 57분 마리오 켐페스와 2:1패스를 주고 받으며 페널티 박스 왼쪽에서 강한 슈팅으로 팀의 세번째 골을 만들어 낸다. 경기 결과 4:1로 헝가리를 상대로 마라도나는 월드컵 데뷔골과 추가골을 넣는 대활약을 펼치며 대승을 이끈 뒤 약체 엘살바도르를 상대로 선발 출장하여 2:0으로 제압하는데 일조한다.

비록 벨기에에게 패배했지만 마라도나는 절치부심하여 헝가리전, 엘살바도르전에서 눈부신 드리블 돌파와 골을 선보이며 역시 차세대 축구황제의 자격을 증명해내며 팀을 2차 조별리그로 진출시킨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라도나의 축구황제 대관식은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3.5.2. 2차 조별리그

허나 불행하게도 아르헨티나는 벨기에전 패배 때문에 결국 죽음의 조에 합류하게 되는데 파올로 로시가 이끄는 이탈리아와 남미에서 마라도나의 라이벌이자 미셸 플라티니의 라이벌이기도 한 지쿠를 포함한 황금의 사중주가 이끄는 영원한 우승 후보 브라질과 같은 조가 되었다.
파일:젠틸레_마라도나.png
마라도나 vs 젠틸레
2차 조별리그 첫번째 경기 이탈리아전에서 클라우디오 젠틸레의 거친 마크에 고전했고 아르헨티나도 마르코 타르델리, 안토니오 카브리니에게 골을 헌납하며 결국 2:1로 패배하고 만다. 다음 경기인 브라질전에서 반드시 이겨야 다음 라운드 진출에 희망이라도 볼 수 있는 상황에서 마라도나는 브라질과 맞붙게 된다.
파일:maradona brazil kick.gif
바티스타를 걷어차고 퇴장당하는 마라도나
이탈리아전에서 젠틸레의 거친 수비에 자기 플레이를 제대로 하지 못한 마라도나는 이날 더욱 분전하며 화려한 돌파와 패스를 수차례 보여준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골은 터지지 않았고 브라질은 지쿠, 세르지뉴 슐라파[10], 주니오르의 연속골로 이미 승부는 0:3으로 아르헨티나는 탈락이 확정적이었다. 문제는 경기에서 패배를 절감한 마라도나는 포클랜드 전쟁으로 기분이 영 좋지 못한 상태에서 결국 경기 종료 5분을 남기고 바티스타에게 거친 복부 발차기로 다이렉트 레드 카드를 받아 쓸쓸하게 퇴장했고 마라도나의 1982 FIFA 월드컵에서의 커리어는 마침표를 찍었으며 마라도나가 빠진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전에서도 1:3으로 패배하며 월드컵 우승의 꿈을 접은 채 2차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만다.

혹자는 이 대회가 마라도나 최악의 월드컵이라고 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마라도나가 이 대회 5경기에서 보여준 개인능력은 특유의 드리블 돌파와 창의적인 킥과 패스로 우승후보인 이탈리아와 브라질 모두에게 곤욕을 안기는 활약을 하는 등 당시 황금의 사중주로 찬양받던 지쿠, 소크라치스, 토니뉴 세레주, 호베르투 파우캉에 밀리지 않는 활약을 보여주며 1986 멕시코 월드컵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축구는 개인 스포츠가 아닌 팀 스포츠고, 결국 팀의 탈락을 막지 못하고 개인으로서는 퇴장까지 당했으니 결국 실패한 월드컵이 된 셈이다.

여담으로 리오넬 메시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실패한 것을 스페인 월드컵과 평행이론이라고 생각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도 있다고 한다.

3.6. 1986 FIFA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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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1987 코파 아메리카

아르헨티나에서 개최한 대회로 9팀이 참가해 조별 리그에서 A, B, C 3개 조로 나누어 한 조당 3팀으로 조 1위만 4강에 진출하는 방식으로 치러졌다.[11]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우승과 나폴리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살아있는 축구의 신으로 등극한 마라도나는 코파 아메리카 우승을 위해 참가한다.

3.7.1. 조별리그

아르헨티나는 페루, 에콰도르와 같은 A조에 배정되었다. 마라도나는 개막전 페루전에서 후반 47분 좌측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트래핑으로 잡아 놓은 뒤 그대로 골문으로 집어넣으며 선제골을 터트리고 골대를 맞추는 등 맹활약했으나 후반 59분 레이나에게 골을 내주며 무승부에 그친다.

다음 경기인 에콰도르전에서 엄청난 드리블과 침투를 보여주며 후반 67분 페르쿠다니가 얻어낸 페널티킥과 후반 85분 프리킥을 성공시키며 2골을 기록한다. 경기 결과는 3:0 완승으로 아르헨티나를 4강 토너먼트에 진출시키며 역시 마라도나라는 찬사를 받는다.

3.7.2. 4강전

4강에서 만난 상대는 1980년대 아르헨티나의 천적 우루과이. 마라도나는 혼자서 수차례 단독 돌파와 키패스를 뿌려 주었지만 카니자와 파스쿨리가 찬스에서 마무리짓지 못하고 선 수비 후 역습으로 나온 우루과이의 육탄방어와 전반 43분 안토니오 알사멘디의 골에 1:0으로 결국 고배를 마시고 만다.

결국 안방에서 열린 대회에서 결승전으로 가지 못하고 콜롬비아와 3위 결정전을 치르게 된다. 마라도나는 90분 풀타임을 소화하며 센스 있는 플레이를 보여줬지만 공격 포인트는 기록하지 못한채 2:1로 패배하며 최종 순위 4위로 대회를 마친다. 3골을 기록했고 대회 MVP 투표 3위[12]에 올랐지만 4강 탈락이라 빛이 바랬다.

3.8. 1989 코파 아메리카

브라질에서 개최한 대회로 10개국이 참가했다. 대회 방식은 예선 리그를 5팀씩 A, B 두개의 조로 나뉘어 경기를 진행하여 각 리그의 상위 2팀이 결선 리그로 올라가는 방식으로 치러졌다.

1987 코파 아메리카 이후 주전들이 노쇠화 내지 이탈한 아르헨티나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년 전인 이 대회에서부터 이미 전력 약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3.8.1. 조별리그

칠레, 우루과이, 에콰도르, 볼리비아와 만나게 된 마라도나는 첫 두경기인 칠레, 에콰도르전에서 선발 풀타임을 소화했지만 프리킥이 골대를 맞는 등 운이 따르지 않으면서 공격포인트는 기록하지 못한다. 다행히 아르헨티나는 칠레전 카니자의 골로 승리를 거뒀고 에콰도르와의 경기에서 득점없이 무승부를 거두며 1승 1무로 여유를 가지고 저번 대회 4강에서 자신들을 떨어트렸던 난적 우루과이를 만나게 된다.

전반 17분 루게리가 이른 시간에 퇴장당하며 수적 열세로 불리해지지만 마라도나는 후반 67분 카니자에게 스루 패스를 찔러주고 카니자가 그대로 골대에 슛을 때린게 우루과이 골키퍼 하비에르 제올리의 손에 맞았지만 그대로 들어가며 어시스트를 기록한다. 이어진 볼리비아전에서도 특유의 플레이메이킹과 드리블로 에이스로서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아르헨티나는 2승 2무로 조 1위로 결선 리그에 진출한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약점은 최전방으로서 주전 공격수였던 호르헤 발다노가 은퇴하고 그 공백을 메꿀 대체자가 마땅치 않아 믿을만한 공격수는 클라우디오 카니자 하나밖에 남지 않아서 예선 리그 내내 득점력 빈공에 시달렸다.[13]

3.8.2. 결선 리그

결선 리그와 상대하게 될 팀은 브라질, 우루과이와 파라과이. 최전방의 무게감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에이스인 마라도나는 분전했지만 다시 만난 우루과이와 홈팀 브라질에게 한골도 기록하지 못하며 연달아 2:0으로 패배하고 만다. 이미 우승은 물 건너간 상황에서 맞이하게 된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마라도나는 벤치에 머무르며 대회를 마감한다.

3.9. 1990 FIFA 월드컵

파일:maradona90.jpg

3.9.1. 조별리그

마라도나는 당시 마약 문제가 심각했지만 월드컵 출전을 위한 광기 어린 투지로 몸을 만들었고 다시 한번 세계 정상에 서기를 원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는 대회 직전 발목 부상으로 그 후유증 때문에 1986년 멕시코 월드컵만큼의 절정의 컨디션은 아니었다. 또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우승 당시 주전 공격수 호르헤 발다노의 은퇴와 호르헤 부루차가, 세르히오 바티스타, 오스카 루게리, 리카르도 지우스티, 네리 품피도 등등 주전들의 노쇠화로 아르헨티나의 전력 역시 크게 약화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마라도나의 발목 부상 후유증과 아르헨티나 팀의 전력 약화로 인한 결과는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다. 대회 개막전부터 로저 밀러가 이끄는 카메룬과의 경기에서 0:1로 지며, 이변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소련에서는 마라도나의 코너킥이 소련 선수를 맞고 나온 공을 받은 훌리오 올라르티코에체아가 다시 한번 크로스를 올리고 페드로 트로글리오가 헤더 골을 넣으며 트로글리오의 선제골에 관여하며 2:0 승리에 일조한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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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킥으로 몬손의 선제골을 돕는 마라도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루마니아에서는 당시 '발칸의 마라도나'라고 칭송받던 게오르게 하지와의 대결로 주목받는다. 전반이 득점없이 종료되고 후반 62분 마라도나는 코너킥에서 크로스로 페드로 몬손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였다. 그러나 68분 가브릴 발린트에게 골을 얻어맞으며 무승부에 그친다. 아르헨티나는 1승 1무 1패로 루마니아 승점이 같았으나 다득점에 밀려 3위로 밀려나지만 다행히 각 조의 3위팀들에서 1위를 차지하며 간신히 16강에 올라가게 된다.[15]

3.9.2. 결선 토너먼트

3.9.2.1. 16강전 vs 브라질
조별리그에서의 부진으로 아르헨티나는 결국 조 3위로 16강에 올라 C조를 1위로 토너먼트에 오른 숙명의 라이벌 브라질과 승부를 벌이게 되었다. 당시 브라질은 1989 코파 아메리카 우승, 남미 예선과 조별리그에서도 무패로 순항하여 강력한 우승 후보를 주목받았으며 이에 축구 관계자들은 브라질의 승리를 예측했다. 경기가 시작되고 아르헨티나는 경기전 예상과 다르지 않게 경기 내내 브라질에게 가패당하면서 하면서 끌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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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자에게 선사한 환성적인 어시스트
그러나 경기 내내 브라질의 집중마크를 당하던 마라도나는 후반 36분경 단독으로 하프라인을 넘어서 40미터 가까이 질주하며 브라질 선수 3명을 제친 후[16] 클라우디오 카니자에게 킬패스를 찔러 줘서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마라도나는 이날 대놓고 파울작전으로 나온 브라질의 겹수비에 고전했으나 이 한 방으로 승부를 종결하는 천재성을 입증했다.[17] 골이 터진 후 브라질은 총공세를 가했으나 주장 히카르두 고메스가 퇴장 당하고 아르헨티나의 저항 및 정교한 역습에 고전하면서 결국 패배하였고 아르헨티나는 8강에 올라가게 되었다.

경기가 끝난 후 브라질의 라자로니 감독은 인터뷰에서 "도대체 우리가 왜 졌는지 모르겠다. 설마 마라도나가 거기서 오른발로 패스를 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라고 말할 만큼 아르헨티나의 승리는 이변이었다. 다만 아르헨티나에는 마라도나가 있었고 승리에는 단 몇 초 동안의 천재성으로 충분했다.
3.9.2.2. 8강전 vs 유고슬라비아
8강 상대는 드라간 스토이코비치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마라도나는 전반 초반 폭발적인 드리블 돌파로 유고슬라비아 수비수의 이른 퇴장을 만들어내면서 이름값을 해냈지만 팀은 스토이코비치의 활약상에 고전하며 연장전까지 승부를 보지 못하고 승부차기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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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퇴장을 유도해내는 드리블
스토이코비치의 실축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3번째 키커로 나선 마라도나는 골키퍼의 선방에 실축하고 만다. 다행히 골키퍼 세르히오 고이코체아가 유고슬라비아의 브르노비치, 하디베치치의 킥을 연속으로 막아내면서 4강에 진출하게 된다.
3.9.2.3. 4강전 vs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이태리와 아르헨티나의 경기라니 이탈리아 연맹이 실수한 거예요! 아주 큰 실수. 문제될 만한 상황도 예상했어야죠. 아르헨티나를 나폴리에 배정하면 안 됐죠. 절대...
알베르토 비곤 (당시 나폴리 감독)
우승에 대한 강한 열의로 당시 문제이던 마약을 끊고 월드컵에 집중하던 마라도나와 아르헨티나의 4강전 상대는 개최국 이탈리아였다. 경기가 열리는 지역은 나폴리였고 그는 그곳의 신이었다. 또한 구장은 그의 신전인 스타디오 산 파올로였다.[18]
나폴리에서 6년을 보냈어요. 이젠 사람들이 저를 잘 아니까 아르헨티나를 응원해주리라 믿어요. 갑자기 너무 많이 바라면 안 되겠지만 분명 제가 기뻐하길 바랄 거예요. 아르헨티나를 응원해주면 좋겠어요. 그 응원이 필요하기도 하고 저도 그분들이 절 필요로 할 때 늘 열심히 했으니까요.
디에고 마라도나 (경기 전 인터뷰에서)
마라도나는 나폴리인들에게 아르헨티나를 응원해달라면 인터뷰 하였고, 나폴리 시민들은 자신들에게 영광을 안겨다 주었지만 남미의 마라도나와 멸시와 차별을 겪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조국인 이탈리아 사이에서 누구를 응원해야 하냐는 선택 속에 크나큰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이탈리아 여론은 남북부 사이의 분쟁을 이용하여 남미 팀을 응원해달라는 마라도나의 발언에 분노에 차 들끓었다.

경기날이 밝았고 나폴리의 이탈리아 관중들의 생각은 분명해졌다. 아무리 마라도나가 나폴리의 신이라해도 응원하는 팀은 자신들의 조국 이탈리아였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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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슛을 시도하는 마라도나
경기는 전반 17분 이른 시간에 살바토레 스킬라치에게 골을 얻어맞으며 결승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골을 넣어야하는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마라도나 또한 골을 넣기 위해 슈팅을 때리며 공격적으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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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의 패스로 시작된 동점골
그러나 0:1로 끌려간 채 전반을 마치고 후반전에 들어서게 된다. 아르헨티나는 계속 이탈리아의 골문을 두드리며 골을 노렸다. 후반 67분 공을 잡은 마라도나는 측면의 훌리오 올라르티코에체아에게 공을 전달하고 올라르티코에체아가 중앙으로 올린 공을 카니자가 그대로 헤더 골로 연결하며 승부를 원점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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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수비진을 휘젓는 마라도나
경기는 정규시간 내에 승부를 끝내지 못하고 연장에 들어서게 되고 연장전에서도 공방전이 이어지는 와중에 마라도나는 연장 후반 이탈리아 수비진을 헤집으며 올라르티코에체아에게 공을 전달하지만 올라르티코에체아의 슛은 아쉽게 골대를 빗나가고 만다.

그러나 결국 골은 터지지 않으며 승부차기에 들어서게 된다. 앞서 세르히오 고이코체아로베르토 도나도니의 슛을 막아내면서 유리해진 상황에서 마라도나는 키커로 나섰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조국의 결승 진출을 원하고 있었고 하지만 득점하면 이탈리아와의 유대는 영원히 깨질 듯했다. 마라도나는 침착하게 공을 골대에 차 넣으면서 8강전과 다르게 승부차기를 성공시킨다.

이어진 이탈리아의 5번째 키커 알도 세레나[20]가 찬 슛을 고이코체아가 선방하며 아르헨티나는 결승에 진출하게 된다. 마라도나는 동료들과 결승 진출의 기쁨을 누렸고 그때부터 모든 일은 꼬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아무도 그를 옹호하지 않았고 당시 마약 문제가 수면에 들어나게 되는 시발점이었다.
3.9.2.4. 결승전 vs 서독
결승전이탈리아수도 로마에 있는 AS 로마의 홈구장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열렸다.

아르헨티나의 결승전 상대는 4년 전 결승에서 격돌했던 서독. 서독은 당시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 안드레아스 브레메로 이루어진 게르만 삼총사피에르 리트바르스키, 루디 푈러 등 쟁쟁한 선수들로 명성을 떨치며 역대 최강이라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초호화 전차군단의 위용을 자랑하던 팀이었다. 경기장에 들어섰고 분위기는 4강전과 달랐다. 아르헨티나를 응원하던 팬들은 있었던 나폴리와는 달리 관중들은 서독을 응원했다.

이탈리아인들은 아르헨티나 국가 연주가 나오자 일제히 야유를 보내면 서독이 이탈리아의 복수를 해주기를 기원했다. 아르헨티나가 싫어서가 아니라 마라도나가 싫어서 였다. 이탈리아인들은 이미 그에게 등을 돌렸고 정말 싫어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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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집중 마크에 고전하는 마라도나
1990년 월드컵 결승전은 반칙으로 얼룩진 경기였다.[22] 마라도나는 볼을 잡기만 해도 거친 태클이 들어와 흡사 미식축구 경기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서독은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를 이끌었고 이를 막던 아르헨티나는 페드로 몬손[23]과 구스타보 데소티가 퇴장당하는 등 편파 판정에 시달렸으며 에이스인 마라도나는 드리블로 루디 푈러의 파울을 유도해내며 옐로 카드를 얻어내지만 경기 내내 서독의 집중마크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후반전에 데소티의 퇴장에 항의하다가 옐로 카드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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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빗나가는 프리킥
결국 후반전이 끝나기 전 석연치 않은 페널티킥 판정으로 결국 안드레아스 브레메의 페널티킥 득점이 결승골이 되어 아르헨티나는 1:0으로 패배, 월드컵 2연패 달성에 실패한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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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대에서 눈물을 흘리는 마라도나
그에게는 최악의 결승전이었다. 이탈리아와의 유대를 깨면서까지 결승에 올라올 만큼 조국의 우승을 누구보다 꿈꿨지만 결국 준우승에 그쳤다. 결국 경기가 끝나고 마라도나는 시상대에서 눈물을 흘렸고 잔인했던 월드컵을 마무리 했다.

이미 30대에 접어들던 마라도나는 이전 월드컵만큼의 절정의 파괴력을 보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대회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과 더불어 마라도나의 천재성이 번뜩였던 대회로 평가된다.[25]

이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는 결승전까지 올라간 팀 치고는 매우 적은 7경기 5골에 그쳤는데, 마라도나는 2개 어시스트, 2골의 기점이 되는 드리블 돌파를 하며 아르헨티나 득점의 4골, 즉 80%를 기여했다. 무엇보다 이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는 4년 전보다 더 전력이 약해져 Elo 랭킹 19위였다. 이 대회에서 마라도나는 La Ripublica 평점으로는 6.43으로 골키퍼 세르히오 고이코체아 다음으로 팀내 2위(즉 필드 플레이어로는 팀 내 1위), 가제타 평점으로는 6.50으로 팀내 평점 1위를 기록했다. 특히 6.5 이상부터 잘한 선수로 간주하는 가제타 평점 상 6.5 이상은 마라도나가 아르헨티나 팀 내에서 유일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마라도나는 브론즈볼을 받았는데, 그만큼 본인에게도 매우 아쉬웠을 법한 대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24년 후 마라도나의 뒤를 이은 또다른 천재복수전에 나서지만...[26]

3.10. 아르테미오 프란키 트로피

1990, 91년 대표팀에서 15개월 출장 정지 징계로 한 경기도 뛰지 못한 마라도나는 대표팀에 복귀해 1993년 아르테미오 프랑키 트로피[27]참가한다.

1991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 자격으로 출전한 아르헨티나의 상대는 1992년 유로에서 우승한 덴마크. 전반 12분 아르헨티나 문전으로 올라온 크로스를 크라비오토가 걷어내려다 그만 자책골을 기록하며 이른 시간에 0:1로 끌려가게 된 상황에서 마라도나는 시메오네에게 패스, 시메오네가 바티스투타에게 패스를 주었고 그대로 바티스투타가 찬 공을 카니자가 골문으로 집어 넣으며 동점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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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스투타와 함께 우승을 기쁨을 누리는 마라도나
경기는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내지 못하며 승부차기에 들어선다. 마라도나는 첫번째 키커로 나와 피터 슈마이켈을 상대로 정확히 왼쪽 골포스트 쪽으로 슛을 성공시킨다. 골드벡의 슛을 고이코체아가 선방해 내면서 다음 아르헨티나 키커가 승부차기를 성공하면 승리하는 상황에서 훌리오 살다나가 성공시키면서 우승을 차지한다.

3.11. 1994 FIFA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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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1. 남미 예선

축구계를 은퇴한 것만 같았던 마라도나는 34세의 나이로, 1994 미국 월드컵 남미 예선에 출전한다. 이는 사실 자의반 타의반 떠밀려 나온거나 다름없는데, 마라도나가 은퇴한 아르헨티나는 지역 예선에서 콜롬비아에게 원정가서 2대1로 패배한 데 이어 홈에서 무려 0:5라는 기록적인 대패를 당하며 졸전을 거듭하다 지역 예선에서조차 탈락할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남미예선 A조에서 콜롬비아에 밀려 호주와의 플레이오프까지 몰리게 된다.[28] 호주와의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하면 미국 월드컵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 결국 여론은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마라도나를 다시 대표팀에 소집해야 한다는 데에 이른다. 결국 호주와의 플레이오프 직전 마라도나는 대표팀 복귀를 선언, 호주를 플레이오프에서 1승 1무[29]로 꺾고 본선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기적적으로 본선에 진출했지만 당시 축구 관계자들은 아르헨티나는 우승 후보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30]

3.11.2. 조별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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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전 골과 세리머니
마라도나는 그리스와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가 골을 넣는데 관여했고, 후반 60분에 패스 플레이를 통해 골을 기록하며, 4:0 대승을 거두는데 일조한다. 바티스투타의 해트트릭과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한 마라도나의 활약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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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적인 패스로 카니자의 결승골을 어시스트 하는 마라도나
이어지는 2차전에서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동점인 상황에서 빈 공간에 있던 동점골의 주인공 클라우디오 카니자에게 패스를 찔려주며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카니자가 그대로 결승골을 집어넣으며 어시스트를 기록한다. 결과는 2:1로 아르헨티나가 승리한다.

1994 미국 월드컵에서 마라도나는 이미 전성기에 비해 운동 능력은 많이 하락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역시 천재적인 축구 감각만큼은 살아 있어서, 플레이메이커로서 팀을 진두지휘하는 면모를 보이며 아르헨티나는 초반 두 경기에서 6득점 1실점을 기록하며 지역 예선에서의 불안함을 씻어내고 브라질과 함께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그러나 마라도나는 두번째 경기 후 실시한 도핑검사에서 금지약물인 에페드린 양성 반응으로 미국을 떠나야만 했고,[31] 강자의 면모를 상실한 채 이 대회에서 이전까지 나이지리아에 3:0으로 지는 등 아르헨티나보다 당연히 한 수 아래라 여겨지던 불가리아한테 졸전 끝에 2:0으로 패해 조 3위로 떨어져 간신히 16강에 안착하는 한심한 상황이 연출되었다.[32] 가브리엘 바티스투타가 버텼지만, 아르헨티나16강전에서 게오르게 하지루마니아와 난타전을 벌인 끝에 패하며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마라도나는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을 허무하게 끝낸 후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단순히 위대한 축구 선수로서의 그가 끝났던 것이 아니라, 위대한 아르헨티나의 표상이 끝났던 순간이었다.[33]

이 대회에서 마라도나는 축구를 1년 넘게 쉬고 남미로 복귀한 34살의 노장이었음에도 자신이 출전한 2경기에서 완벽한 공수조율 플레이메이킹을 하면서 클래스를 보여줬다. 하지만 도핑에 걸리게 되고 월드컵에서 추방당하면서 플레이메이커를 잃게 된 아르헨티나는 무기력하게 월드컵에서 떨어지고야 만다.[34] 아르헨티나에 마라도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35]

4. 역대 대회 기록

역대 대회 기록
대회 성적 골·어시스트 수상
FIFA 월드컵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2차 조별리그 C조 3위 파일:득점 아이콘.svg파일:득점 아이콘.svg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우승 파일:득점 아이콘.svg파일:득점 아이콘.svg파일:득점 아이콘.svg파일:득점 아이콘.svg파일:득점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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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볼
실버슈
[36]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준우승 파일:Assist.png파일:Assist.png
브론즈볼
1994 FIFA 월드컵 미국 16강[37] 파일:득점 아이콘.svg파일:Assist.png
코파 아메리카
1979 코파 아메리카 조별리그 B조 3위 파일:득점 아이콘.svg
1987 코파 아메리카 아르헨티나 4위 파일:득점 아이콘.svg파일:득점 아이콘.svg파일:득점 아이콘.svg
1989 코파 아메리카 브라질 3위 파일:Assist.png
기타 대회
FIFA 75주년 기념 대회 우승
1979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일본 우승 파일:득점 아이콘.svg파일:득점 아이콘.svg파일:득점 아이콘.svg파일:득점 아이콘.svg파일:득점 아이콘.svg파일:득점 아이콘.svg
골든볼
실버슈
1980년 문디알리토 조별리그 B조 2위 파일:득점 아이콘.svg
아르테미오 프란키 트로피 우승

[1] 득점 1위는 8골을 기록한 같은 아르헨티나 대표인 라몬 디아스.[2] 개최국이 따로 없었고 결승전은 아르헨티나에서 열렸다.[3] 10번은 수비수인 후안 카를로스 부제도가 달았다.[4] 볼리비아는 디펜딩 챔피언의 자격으로 결선 리그에 자동 진출했다.[5] 이 대회에서 마라도나를 대신하여 10번을 단 선수가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결승으로 이끈 알레한드로 사베야이다.[6] 1980년 12월 30일부터 1981년 1월 10일까지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개최된 국제 축구 대회이다. 문디알리토란 명칭은 스페인어로 '작은 월드컵'이란 뜻으로 역대 FIFA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우루과이, 이탈리아, 서독, 브라질, 아르헨티나잉글랜드를 대신해 1974년과 1978년 월드컵 연속 준우승을 차지한 네덜란드가 참가했다.[7] 2년 뒤인 1982년 월드컵에서 마라도나에게 복부 발차기를 당하는 선수다.[8] 골키퍼 발디르 페레스가 막아봤지만 워낙 강력한 슈팅이라 맞고 들어갔다.[9] "무려 6명이 견제를 하러 오는 마라도나의 위엄"으로 알려져있는 사진이지만 실제로는 프리킥 상황에서 아르헨티나 선수가 공을 마라도나에게 밀어줬고 벽을 쌓았던 벨기에 선수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찍힌 것이다.[10] 1982 셀레상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아르헨티나전과 뉴질랜드전에서 1골씩 기록했으나 지쿠, 파우캉, 에데르가 만들어낸 수차례의 골찬스를 날려먹으며 구멍 취급을 당했다. 월드컵의 실패를 온전히 그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을 정도.[11] 4강의 나머지 한 팀은 디펜딩 챔피언이 직행하는 방식이었다.[12] MVP는 카를로스 발데라마.[13] 예선 리그 1위를 기록했지만 넣은 골은 고작 카니자의 2골이었다.[14] 다만 전반전에 마라도나가 아르헨티나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소련 선수의 슈팅을 팔로 막았음에도 그냥 넘어간 큰 오심이 있었다.#[15] 6개의 조의 3위팀들이 승점순으로 순위를 매겨 4위까지 16강에 진출했다.[16] 마라도나한테 처음 제껴지는 선수는 얄궂게도 당시 나폴리 동료이던 알레망이다.[17] 이 장면을 잘 보면 의도적으로 브라질의 수비가 마라도나의 왼쪽 방향의 움직임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마라도나가 극단적으로 왼발 편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라도나는 보란 듯이 오른발로 카니자에게 킬패스를 넣어준다.[18] 마라도나가 세상을 떠난 2020년에 스타디오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도 엄청난 레전드 대우를 받으며 그를 기린다고 스타디움 이름까지 본인 이름이 들어갈 정도이니 생전 나폴리에서 뛸때 얼마나 많은 인기를 누렸는지 알 수 있다.[19] 이때 경기장에 걸린 현수막이 걸작이다. "마라도나,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우리의 조국입니다." 그래도 아르헨티나는 이탈리아의 대진 상대국 중에 편파적인 응원에 시달리지 않은 유일한 팀이었다.[20]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명문 클럽 유베, 인테르, 밀란에서 모두 뛴 선수이며 1988/89 시즌에 22골을 넣으며 세리에 A 득점왕을 차지한 선수다.[21]
이탈리아 관중들이 아르헨티나 국가 연주가 나올 때 야유를 보내자 마라도나는 Hijos de puta(개새끼들)라며 분개했다. 위 영상에서도 그의 입모양을 보면 해당 욕설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2]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은 대부분의 팀들이 수비 위주의 전술을 펼친 까닭에 골 흉년이자 파울이 남발하던 다소 불명예스러운 대회였다.[23] 페드로 몬손은 역대 월드컵 최초로 결승전 퇴장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24] 마라도나는 이 페널티킥 판정이 부당했으며, 월드컵을 도둑 맞았다는 주장을 하며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며, 시상식 내내 억울함의 눈물을 흘리는 마라도나의 모습이 전 세계에 중계되었다.[25] 물론 8강전, 4강전 승부차기를 모두 승리로 이끈 고이코체아와 16강전 결승골, 4강전 동점골을 넣은 카니자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다.[26] 놀랍게도 아르헨티나는 1990년, 2014년 모두 파란색 유니폼, 독일은 하얀색 유니폼을 입었다.[27] 이 대회는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챔피언과 코파 아메리카가 1985년과 1993년 두 번 개최한 협회 축구 대회였다. 유럽과 남미 최고의 클럽들이 참가하는 인터컨티넨탈컵에 동등한 국가대표 경기였으며 이 트로피의 명칭은 1983년 도로 사고로 사망 아르테미오 프란치 전 UEFA 회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85년 대회는 프랑스가 우루과이를 2:0으로 꺾고 승리했다.[28] 당시 남미예선은 징계를 먹은 칠레를 제외한 9개 팀이 참가했는데, A조에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파라과이, 페루가 배정되고 B조에 브라질, 볼리비아, 에콰도르, 우루과이, 베네수엘라가 배정되었다. 티켓 배분은 3.5장이었기에, A조에 1.5장, B조에 2장이 배정되어 있었다.[29] 1차전 시드니 원정에서 1:1 무승부, 엘 모누멘탈에서 있었던 2차전은 1:0로 간신히 승리하며 본선 진출. 그나마도 2차전에서의 골은 호주 선수의 자책골이었다. 1차전에서 기록한 골은 마라도나의 어시스트.[30] 이러한 지역 예선에서의 졸전 때문에 혹여 1994년 아르헨티나가 가장 약했던 시절로 알고 있는데 아이러니한 건 1991년과 1993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아르헨티나는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이 때 아르헨티나는 코파 아메리카에서 그 브라질도 꺾는 엄청난 경기력을 선보였는데, 코파 아메리카에서의 경기력과 남미 예선에서의 경기력이 그야말로 천지차이인 게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31] 에페드린을 단독으로 사용하면 약간의 체중 감량효과밖에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카페인과 함께 섞어 투여하면 38 또는 64%의 exhaustion cycle 증가 효과가 있다.출처 마라도나는 이런 식으로 7종의 약물 칵테일을 섭취한 혐의로 퇴출되었다. 이후 마라도나는 도핑 결과에 대해 FIFA의 음모를 운운하다가 20여 년이 지난 뒤 도핑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아르헨티나 대표팀 전체가 도핑을 했다.라고 말했다.[32] 3패를 기록한 그리스를 제외하면 나머지 팀이 모조리 2승 1패를 기록한 상태였고, 아르헨티나는 불가리아와 득점과 실점까지 같았으나 불가리아에게 패하는 바람에 승자승에 뒤쳐져 3위로 밀렸다.[33] 이후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의 뒤를 잇는 천재 리오넬 메시의 등장 이전까지 메이저 대회에서 오랜 기간 우승하지 못하며 과도기를 보냈다. 특히 2002 한일 월드컵의 조별리그 탈락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끝내 선수 생활 황혼기에 접어든 리오넬 메시의 원맨캐리에 힘입어 2021 코파 아메리카, 2022 카타르 월드컵 메이저 대회 2연패를 하여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34] 수비형 미드필더로 참가한 페르난도 레돈도는 후방 조율과 볼운반은 출중해도 2선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35] 레돈도도 레돈도지만 이 때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월드컵에서의 경기력이 아쉬웠다. 물론 이 대회 4골을 넣긴 했지만 1991년과 1993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무썅을 선보이며 조국의 연속 우승을 안긴 경기력만큼은 아니였다. 게다가 1991년과 1993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 당시엔 디에고 마라도나가 없었을 때였다. 바티스투타가 코파 아메리카에서의 모습을 월드컵에서 그대로 보여주었으면 아르헨티나는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36] 카레카,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와 공동 수상.[37] 금지 약물 복용으로 중도퇴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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