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16:04:00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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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독립전쟁
Revolusi Nasional Indonesia
영어: Indonesian War of Independence
네덜란드어: Indonesische Onafhankelijkheidsoor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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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45년 8월 17일~1949년 12월 27일
위치
네덜란드령 동인도
결과
인도네시아 독립군의 승리
네덜란드 식민제국의 사실상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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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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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25,000~100,000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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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영국 국기.svg 영국군 1,200명 전사

1. 개요2. 배경
2.1. 동인도 재점령을 원한 네덜란드2.2. 영국군의 진군
3. 발발 및 전개
3.1. 네덜란드군 상륙과 초기 전개
3.1.1. 수라바야, 암바라와 전투3.1.2. 스마랑, 메단, 남술라웨시3.1.3. 반둥 불바다
3.2. 링가르자티 협정3.3. 네덜란드의 1차 공세3.4. 렌빌 협정3.5. 마디운 사태3.6. 네덜란드의 2차 공세3.7. 1949년의 독립군 공세
3.7.1. 욕야카르타 공세3.7.2. 수라카르타 공세
3.8. 미국의 개입
4. 종전5. 전후
5.1. APRA 쿠데타5.2. 다룰 이슬람 반란5.3. 전후 인니의 외교 변화5.4. 인도네시아의 채무 이행
6. 현대 네덜란드에서의 인식7. 여담

[clearfix]

1. 개요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인도네시아네덜란드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패망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인도네시아는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언했으나 원래 인도네시아를 식민 지배하던 네덜란드가 이를 승인하지 않아 발생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에 이미 네덜란드 제국은 짧은 전성기를 끝으로 완전히 몰락한 상태였으며 규모가 컸던 식민지는 오늘날의 인도네시아인 네덜란드령 동인도뿐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전쟁의 여파로 온 국토가 잿더미가 된 데다 본토는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로 전락하여 나치 독일이 보낸 총독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의 패악질이 벌어졌고, 식민지는 일본 제국의 점령으로[6] 일본령 동인도가 세워지면서 네덜란드의 통제 밖에 놓인 상황이었다.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네덜란드는 미국경제 원조를 받아 피폐해진 나라를 겨우 재건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토를 수습해야 될 상황에도 식민지를 못 잃겠다고 십수만여 명의 병사를 동원해 인도네시아를 침략하여 전쟁을 벌였고 국제 여론이 악화되어 초기 국면 이후 시종일관 유리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미국 등 서방 강국들의 압력으로 독립을 허용하는 망신을 당했다. 현재에도 이는 네덜란드 현대사의 큰 오점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이유로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재침략이라고도 불리며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의 최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베트남프랑스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도 비슷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국민 혁명(Revolusi Nasional Indonesia)이라고도 부른다.

2. 배경

인도네시아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이미 20세기 초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 수카르노가 활동한 것도 이 시기였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은 동남아로 진군해 자바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인도네시아를 점령함으로서 많은 이득을 손쉽게 챙길 수 있었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에 일본령 동인도를 설립해 군정을 실시했다. 한때 동남아 해방자로 여겨졌던 일본도 동남아 점령지에서 제국주의적 통치를 펼쳤지만 그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독립에 기여한 면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은 행정, 군사, 제도적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식민통치 체제를 배격했고 언어 또한 네덜란드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의 사용을 권장하였는데, 인도네시아인들이 하루아침에 일본어를 배워 쓸 수는 없었으므로 인도네시아어의 사용을 허용해 주었고, 결과적으로 행정언어와 통용어로 인도네시아어가 자리잡게 되었다.

또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에 작게는 아리사카 소총부터 하고 전차, 크게는 G4M 폭격기까지 일제 무기를 많이 남겨 놓고 갔는데 이 또한 독립전쟁 때 큰 보탬이 되었다.

일본은 보조 병력으로 쓰기 위해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1942년 말 탕그랑에 '청년도장'(青年道場)이라는 이름으로 중졸 학력[7]이 있는 토착민에게 게릴라전, 정보전 등을 가르치는 특수전 학교가 설립되었다. 일본군은 보다 대대적인 규모의 토착군 조직 '향토방위의용군'(郷土防衛義勇軍, PETA)을 1943년 10월 3일 창설했다. 우선 일본군은 보고르에 간부 학교 '의용군 연성대'(義勇軍錬成隊)를 설치해 기존 청년도장 출신 등 학력이 높은 엘리트 토착민을 입교시켜 장교 교육을 실시한 뒤 이들을 고향으로 내려보내 각각 약 500명 규모의 대단(大団, 대대)을 결성시켰다. 이 아래에 중단(중대), 소단(소대), 분단(분대)이 조직되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향토방위의용군은 종전 시점 자바에 66개 대단, 발리에 3개 대단(여기까지 합쳐 약 37,000명), 수마트라에 약 20,000명 규모로 합계 약 6만 명 수준이었다. 군사 훈련은 기본적으로 모두 일본군 방식대로 일본군 육군 야전교범, 즉 보병조전(歩兵操典)을 기준으로 행해졌지만 물자가 부족한 등의 문제로 전반적으로 군사 훈련 자체가 그렇게 강도 높게는 이루어지지 못한 편이었다. 대신 일본군은 충성, 용기, 불굴 등 정신력을 강조하면서 곧 맞이할 인도네시아 독립을 준비시켰다. 이들이 바로 독립전쟁에서 인도네시아군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동시에 토착민을 노무자(労務者, 로무샤)로 징용해 철로 건설 등 군사 프로젝트에 동원하기도 했다. 노무자(로무샤)라는 용어는 명확하게 정의되지는 않은 통칭이며 무급 노동자부터 자원자까지 다양한 분류를 포함하는데 자바에서 적어도 20만에서 50만 명의 노무자는 일본군의 강요로 일해야 했다. 미 국회도서관 자료는 자바에서 모든 분류를 포괄하는 노무자의 총 수가 400만에서 1000만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유엔은 일본 점령기 인도네시아에서 400만가량의 인도네시아인이 점령 도중 벌어진 기아[8]와 노역으로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1944년부터 토착민들은 일본군의 가혹한 처우에 반발해 가끔 봉기를 일으켰지만 모두 진압당했다. 특히 1945년 2월 14일 동부자바 블리타르에서는 향토방위의용군 대단장 수프리야디(Soeprijadi)가 자신의 대단을 이끌고 반일 봉기를 일으켜 일본인 4명을 살해했지만 곧바로 진압당하기도 했다.
파일:Javaanse_Revolutionairen_strijden_voor_onafhankelijkheid.jpg
<rowcolor=white> 일제 무기와 죽창으로 무장한 자바 혁명군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지배도 얼마 가지 못했는데 태평양 전쟁제국의 본토에 핵폭탄 두 방이 내리꽂히는 결말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일제는 패색이 짙어지자 인도네시아를 적국인 네덜란드에게 다시 빼앗기느니 차라리 독립시키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고, 인도네시아인들 또한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보다 독립국 건설을 원했다. 점령국과 점령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인도네시아는 일제가 항복한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수카르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인도네시아 중앙 국가위원회(KNIP)'는 일제의 항복으로 발생한 행정 공백을 빠르게 메꾸려 했으나 인도네시아에는 연합군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동쪽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이, 자바 섬을 비롯한 중앙 인도네시아 쪽에는 영국군이 상륙했으며 억류되어 있던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 문제, 그리고 잔여 일본인들의 송환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2.1. 동인도 재점령을 원한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아니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지배 당사국이었던 네덜란드는 세계 대전의 여파로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국왕은 영국에 망명가 있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야욕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후세의 관점에서 보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식민제국제국주의 시대가 이미 저물어가고 있었음은 명백하지만, 패전국이라 겨우 얻어서 갖고 있던 식민지를 찍소리도 못하고 강제로 헌납해야 했던 이탈리아헝가리, 일본 정도를 제외하면 당시의 제국주의 열강들, 특히 유럽의 식민제국들은 이러한 현실을 별로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프랑스알제리인도차이나를 재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고 포르투갈도 아프리카 식민지는 물론 저 멀리 포르투갈령 마카오, 포르투갈령 티모르, 포르투갈령 인도를 놓고 싶어 하지 않았다. 벨기에콩고를 놓지 않으려 열심히 애썼다. 그나마 변화하는 시대를 가장 순순히 받아들인 영국조차도 "수에즈 운하는 계속 가지면 안될까?" 정도의 집착은 있었다. 본국 인구와 영토보다 훨씬 큰 동인도를 식민지로 삼았던 네덜란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덜란드 입장에서 자바의 설탕, 수마트라의 석유고무 등 네덜란드가 오랜 기간 투자하여 개발해둔 동인도의 상품작물과 원자재 산업은 경제적으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이었고, 이를 관리하며 거둔 수익은 네덜란드의 전후 재건에 유용하게 쓰일 것으로 기대되었다.

2.2. 영국군의 진군

영국은 원래 연합국의 일원이자 식민 제국주의 열강으로서 네덜란드의 동인도 재점령을 지지했다.

영국은 대서양 헌장에 따라 식민지에서의 민주주의와 식민지인의 권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존중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영국이 네덜란드를 지지한 이유는 영국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인의 독립 의지는 일부 토착 엘리트층만이 주도하는 지역 이권 문제이며 대부분의 식민지 민중들은 네덜란드의 합리적 통치를 여전히 원하고 있을 것'이라고 오판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5년 말 동인도에 진주한 영국군은 인도네시아 독립 투쟁을 단순 소요로 치부하고 네덜란드를 도와 진압에 들어갔다.

영국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군과 함께 활동했는데 이들은 인도네시아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독립파 인도네시아인들을 살해, 납치했다. 영국은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독립 진영 사이에서 협상을 중재했으나 인도네시아 현지에서는 마치 한반도 해방 직후처럼 혼란기가 이어졌고 제2차 세계 대전의 피해를 직격으로 본 영국이나 네덜란드나 본국 상황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인도네시아 문제까지 상세히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영국군은 우선 인도네시아 인민 치안군을 비롯한 민중들의 무장해제를 명했으며 무기를 제출하라는 통보를 내렸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인도네시아 측을 자극하는 기폭제 역할이 되었고 급기야 인도네시아인들은 영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무기를 내리면 어떻게 될지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무장을 한 상태에서도 걸핏하면 네덜란드령 동인도군이 인도네시아 독립 세력과 인민 치안군을 공격하여 잡아들였는데 무기가 없으면 더 쉽게 잡혀들어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리고 영국군과 인도네시아군 및 민병대 간의 대립은 자바 중부와 동부, 특히 수라바야와 암바라와에서 대규모의 전투로 발전하게 되며, 반둥에서도 인도네시아 측의 대규모 철수 작전을 야기해 소위 '반둥 불바다' 사건이 벌어졌다.

3. 발발 및 전개

3.1. 네덜란드군 상륙과 초기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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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인도네시아에 상륙중인 네덜란드 해병대
1945년 말부터 인도네시아 재점령을 위해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에 상륙하기 시작했는데 1946년 11월에는 그 규모가 총 12만, 자바에만 5만 5천에 이르렀다. 이들은 우선 동인도 진주 과정에서 자카르타(1946년 1월), 보고르 등 일부 주요 도시 지역을 재점령하고 기존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민정부를 재수립했다. 인도네시아군은 1946년 초 자카르타 방어를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8천 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고 도시를 내주어야 했다. 한편 네덜란드군과 함께 진입하여 한동안 이들과 함께 행동한 영국군도 단독으로, 또는 네덜란드군과 함께 1946년 상반기까지 인도네시아의 여러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영국군은 1946년 말 철군 전까지 일단 점령 지역을 순차적으로 네덜란드군에 인계했다. 특히 1946년 4월 17일에는 반둥이 영국에서 네덜란드 관할로 이전되었다. 수라바야, 반둥 등 여러 주요 대도시 지역의 점령에 관해서는 밑에서 조금 더 상세히 서술한다.

1946년 시점에 모든 주요 도시가 재점령된 것은 아니어서 자바 중부 욕야카르타나 수마트라 동부 프칸바루, 잠비처럼 인도네시아가 계속 보유한 도시도 있었다. 특히 수마트라 서북부 아체 지역은 반네덜란드 정서가 강해 네덜란드군이 한 번 반다아체로 진입을 시도했다가 민심이 흉흉해 쫓겨나온 후에는 다시 진입할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

독립전쟁 발발 직후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수라바야였는데, 인도네시아군은 이 수라바야 전투에서 동원 가능한 자원을 상당히 소모시키며 영국군과 맞붙었지만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패배했다. 비슷한 시점에 벌어진 암바라와 전투에서는 수디르만 대령이 영국군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투의 규모나 전략적 중요성은 수라바야 전투와 비교하기 어려웠다. 독립전쟁 막바지에 외교적으로 승리한 욕야카르타, 수라카르타 전투를 제외하면, 이 초기 국면 이후 인도네시아군 및 민병대는 연합군 정규군이 동원된 대규모 회전에서는 승리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인도네시아군의 군사적 열세는 잘 훈련받은 병력 자원의 양과 훈련의 질, 간부 교육의 수준과 간부들의 복무 경험, 동원 가능한 무기의 양과 질, 정보전 능력 등 모든 면에서 인도네시아군이 네덜란드, 영국 연합군에 열세였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인도네시아 독립파에서 무력을 중시하는 아미르 샤리푸딘(사회당 강경파), 공산당 등 강경파보다는 외교적 협상을 중시하는 수카르노(국민당), 모하맛 하타(국민당에 가까운 무소속), 수탄 샤리르(사회당 온건파) 등의 온건파가 득세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기도 했다. 온건파는 외교전을 통해 전쟁 초기의 적이었던 영국호주를 중립 내지 약한 인도네시아 지지 노선으로 돌리고, 강경파 쪽으로 기우는 청년층의 불만을 관리하며 강경파를 숙청한 후, 나중에는 중립 노선이었던 미국을 인도네시아 지지로 끌어들이면서 군사적 실패를 만회하며 결국 인도네시아 독립을 성공시켰다.

3.1.1. 수라바야, 암바라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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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바야 전투를 상징하는 붕 토모[9]의 사진.
(《난양 포스트》 1947년 2월자)
"어이 영국군 놈들! 우리 인도네시아 청년, 인도네시아의 성난 황소들에게 흰옷을 적실 붉은 피가 흐르는 한 우리는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동지들이여, 투사들이여, 인도네시아 청년이여, 우리는 계속해서 싸운다. 우리는 사랑하는 조국 인도네시아 땅에서 식민주의자를 모두 몰아낼 것이다. 오래도록 우리는 고통받고, 착취당하고, 짓밟혔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독립을 쟁취할 시간이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 신은 가장 위대하시다('Allahu 'Akbar)!... 신은 가장 위대하시다!... 신은 가장 위대하시다!... 자유를!"
수라바야 전투 중 붕 토모(당시 25세)의 연설, 1945년 11월 9일.

수라바야에서 영국군은 독립 지지파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수라바야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자카르타 다음 가는 제2도시로서[10] 도시 그 자체로 중요했고 주요 항구와 공군 기지가 있어 전략적으로도 자바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수라바야를 일단 관리했던 일본군 중장 시바타 야이치로는 10월 3일 도시로 온 연합군 대표인 네덜란드군 대령에게 항복했지만, 동시에 인도네시아 독립파에게 동조하였고, 독립파에게 일본군의 남은 무기를 나눠 주어 인도네시아군의 무장을 도왔다.

이어 10월 내로 파견된 영국군이 수라바야에 도착했고 인도네시아군과 교섭하며 궁극적으로 인도네시아 측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독립군 연설가 붕 토모(Bung Tomo, 1920 ~ 1981)의 애국적 라디오 연설이 연거푸 흘러나오는 가운데 인도네시아군과 민병대, 많은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끓어올랐다. 지속적 협상에도 불구하고 양측 간 오해와 불신이 겹치고 현장을 통제할 수 없게 되어 결국 10월 27일 영국군과 인도네시아군 간 전투가 시작되었다. 수카르노와 하타는 상황을 통제하려 애쓰면서 전투 개시 후 10월 30일 영국군과의 휴전을 가까스로 이끌어냈지만 10월 30일 휴전 합의 직후 영국군 준장 오버틴 월터 소던 맬러비(Aubertin Walter Sothern Mallaby, 1899 ~ 1945)가 현장의 영국군에게 휴전 소식을 알리려고 이동하다가 전투 중이던 인도네시아 민병대와 조우해 피살되면서 휴전은 불가능해졌다.

이 수라바야 전투(1945년 10월 27일~11월 20일)에서 영국군은 12만 명에 달하는 독립군(10만 정도는 무장 수준이 빈약한 민병대)에 맞서 최대 3만 명의 정규군 및 해군의 엄호와 전차[11]전투기를 동원해서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힘겹게 승리했다. 영국 측 사상자는 최소 600명, 최대 4000명 이상이었다. 무장과 훈련이 빈약했던 인도네시아군은 훨씬 큰 피해를 입었는데 전사자는 6,000~16,000명이었고, 20,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그 밖에도 20만 명에 달하는 수라바야의 민간인들이 피난을 갔다.

한편 중부 자바의 암바라와(Ambarawa)에서 벌어진 암바라와 전투(1945년 10월 20일~12월 15일)에서는 영국군이 처음에는 독립군의 저항 없이 주둔한 일본군을 무장 해제하고 암바라와 지역을 점거했지만 11월 말 시작된 독립군의 조직적인 공격으로 전투에서 패배하여 암바라와를 인도네시아군에 넘겨주고 퇴각하고 만다.

자바에 도착해 인도네시아군과 전투를 치른 영국군 일부도 동요하고 있었다. 영국군 병사들은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그저 일본군 부역자들이 세운 단명할 괴뢰국이고 이상한 사상을 따르는 극단주의자들에 불과하다는 편향된 네덜란드 측 정보를 접하고 전선으로 나갔다. 즉 당시 영국군들 입장에서 독립파는 '인도네시아 국민'이 아니라 '추축국의 잔당'이라고 교육받고 작전에 투입되었다. 직전까지 독일, 일본 등 추축국들과 싸워 나갔던 영국군인 만큼 그 잔당을 소탕한다고 하니 전쟁 초기 영국군의 사기는 당연히 좋았다.

하지만 막상 현지에서 싸우다 보니 정작 자기들이 싸운 상대는 진심으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원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을 침략자로 인식하고 죽기살기로 처절하게 대항했던 것이다. 여러 전투 현장에서 인도네시아군과 동행하며 친인도네시아 영어 라디오 방송을 진행한 일명 '수라바야 수'(Surabaya Sue), 크툿 탄트리(K'tut Tantri)[12]도 나중에 수라바야 전투를 회고하면서 이러한 영국군의 동요와 인지부조화를 기록으로 남겼다.

자바에 동원된 인도 제국군은 자신들 역시 식민지인이라는 점에서 스스로 모순을 느끼기도 했으며 아예 인도네시아군으로 전향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인도네시아군으로 전향한 인도 제국군의 수는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대부분 수라바야 전투에서 발생했고 무슬림이 대부분으로 6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 가운데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끝난 후 죽거나 실종되지 않고 남은 인원은 75명뿐이었다.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간 전향자도 있었지만, 많은 인도 제국군 전향자들은 인도네시아 독립 후 인도네시아에 남기를 선택했고, 새로 정비된 인도네시아군에 정식으로 편입되었다.출처

이러한 결과를 받아든 영국은 동인도의 독립 투쟁이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판단을 유보하고 이에 대한 정보를 전면적으로 재점검하게 되었다. 결국 영국은 독립파가 추축국의 잔당이라는 판단이 오판임을 인정하고 네덜란드 식민지 유지는 불가능한 만큼 인도네시아를 독립시킨 뒤 친서방 진영으로 편입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영국 세력은 1946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사이의 협상을 중재하면서 1946년 11월과 12월을 거쳐 군대를 모두 철수시켰다.

수라바야 전투에서 영국군이 맬러비 준장의 피살에 대한 대규모 보복 공격을 벌여 인도네시아군이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11월 10일은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영웅의 날'(Hari Pahlawan)로 지정되었으며 인도네시아의 국가 기념일 중 하나다. 자바 동부나 수라바야에서는 이 11월 10일을 단체명으로 따 오거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특별히 기념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오늘날 수라바야에 소재한 인도네시아 명문 공대의 명칭이 바로 '11월 10일 공과대학교'다.

3.1.2. 스마랑, 메단, 남술라웨시

인도네시아의 제3도시 반둥과 다른 대도시인 스마랑, 메단, 마카사르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자카르타 및 수라바야와 조금 다른 양상으로 인도네시아군의 후퇴와 영국/네덜란드의 점령이 이루어졌다. 이 중에서 스마랑을 제외하면 대규모 전투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우선 스마랑에서는 1945년 10월 15~19일 인도네시아 민병대와 잔류 일본군 간 전투가 벌어졌고 여기서 일본군이 승리해[13] 스마랑의 관할권은 그대로 10월 19일 스마랑에 진입한 영국군에 인계되었다. 이후 영국군은 귀환한 네덜란드군에 스마랑을 넘겼다.

수마트라의 최대 도시 메단에서는 1945년 10월 9일 네덜란드-영국 연합군이 도시로 진입해 인도네시아군과 전투를 벌였다. 12월 초까지 양측은 도시를 부분적으로 점유하고 대치했지만 12월 중순부터 전투가 격해졌고 1946년 4월 결국 인도네시아군은 패배해 도시를 내주고 후퇴해야 했다. 동인도네시아의 주요 거점 마카사르를 비롯한 남술라웨시에서도 비슷하게 처음에는 현지 독립파가 어느 정도 지역을 장악했지만 1946년 4월 초까지 귀환한 네덜란드군이 독립파에게서 행정 기구를 대부분 빼앗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북수마트라와 남술라웨시에서는 산발적인 독립파의 게릴라 항쟁이 이어졌고 특히 남술라웨시에서는 1946년 12월이 되면 네덜란드가 통제 가능한 지역은 마카사르시 영역 정도뿐인 상황으로까지 가기도 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비정규전 전문가 라이몬트 피에르 파울 베스테를링(Raymond Pierre Paul Westerling, 1919 ~ 1987)이 이끄는 특공대를 투입해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저항군에 대한 잔혹한 즉결 처형을 포함하는 강압적인 방식으로 남술라웨시를 안정화했다. 베스테를링의 특공대는 적어도 약 1,500명의 인도네시아인을 살해했다. 1,500명은 네덜란드 역사학자의 추정치이며 인도네시아 측은 이후 희생자 규모를 15,000명으로 주장했다가 40,000명으로 수정했는데 40,000명이라는 수치는 과장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3.1.3. 반둥 불바다

반둥에서는 1945년 10월 영국군이 진입하며 도시 북쪽을 일본군에게서 인계받아 점령했고 도시 남쪽을 점유한 인도네시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인도네시아군이 11월 말 공세를 펼치며 12월 초까지 혼란스러운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가전 도중 발생한 홍수로 민간인 사망자가 속출하던 가운데 구호 활동을 벌이는 인도네시아군을 영국군이 공격하기도 했다. 반둥 북부에서는 인도네시아 민간인 약 10만 명이 1945년 11월부터 1946년 3월까지 피난길에 올랐다.

영국군과 인도네시아군은 1945년 11월 말~12월 초를 제외하면 소강 상태로 대치했지만 1946년 2월 중순 영국군의 증원이 도착하면서 1946년 3월 초 다시 소규모 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1945년 말의 수라바야-암바라와 전투 이후 인도네시아군과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1946년 3월 22일 영국군은 인도네시아 총리 수탄 샤리르에게 반둥에서 도시 장악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알리면서 불필요한 전투를 피하기 위해 인도네시아군이 반둥 남부에서 자발적으로 퇴거할 것을 요청했다. 이어 3월 23일 오후, 영국군 23사단장 더글러스 호손(Douglas Hawthorn)도 반둥 현장에서 라디오 방송으로 민간인은 잔류해도 좋으나 인도네시아군은 자정까지 퇴거할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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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불길에 휩싸인 반둥, 1946년 3월 23일
영국군이 대규모 공세로 나오면 버틸 수 없음을 알았던 나수티온(Nasution)의 인도네시아군은 퇴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군과 인도네시아 민병대, 남부 지역의 민간인들은 3월 23일 밤, 함께 도시를 떠나면서 영국군이 도시의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반둥 남부의 가옥과 상점 등에 고의로 대규모 방화를 벌여 도시 남부를 초토화했다. 이것을 소위 반둥 불바다(Bandung Lautan Api, Bandung Sea of Fire) 사건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반둥 시가지의 약 3분의 1이 파괴되고 수만~수십만 명의 주민이 피난을 갔다. 이때 과격한 인도네시아 민병대 청년 2명은 영국군에 피해를 입히기 위해 퇴거하지 않고 다이너마이트를 안고 영국군 탄약고로 뛰어들어가 자폭하기도 했다.

대규모 민간인 피난으로 1945년 8월 48만 명에 달하던 반둥의 인구는 1946년 영국군 및 네덜란드군의 접수 이후 10만 정도로 일시적으로 감소했고 반둥 남부는 완전히 파괴되어 1947년 말 한 미국인 역사가는 반둥을 방문하고 "거리에 풀이 자라는 죽은 도시"라는 평을 남겼다. 반둥의 인구는 독립전쟁이 끝난 후 빠르게 회복되었으며 반둥 불바다 사건은 전력을 보존하고 적에게 항전 의지를 각인시킨 적절한 전술적 판단의 결과인 동시에 극적인 민족적 의지의 상징으로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인도네시아 작곡가 이스마일 마르주키(Ismail Marzuki)는 이 반둥 불바다 사건을 테마로 '할로 할로 반둥'(Halo, Halo Bandung)이라는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3.2. 링가르자티 협정

1946년 11월 15일, 영국이 물러나기 전 벌인 중재로 인도네시아 측과 네덜란드 측은 우선 임시로 정전협정, 즉 링가르자티 협정(Perundingan Linggardjati[14]/Overeenkomst van Linggadjati)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자바, 마두라, 수마트라 지역에서 신생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반대로 인도네시아는 보르네오와 동인도네시아(술라웨시, 말루쿠, 소순다 열도)에서 식민 정부를 인정하기로 합의되었다. 또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1949년 1월까지 기존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을 포괄하며 네덜란드 국왕을 상징적 국가원수로 하는 연방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에 네덜란드 치하의 다른 지역과 함께 연방 구성국으로 참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링가르자티 협정은 양측 모두 서로를 불신하는 상황에서 위태롭게 체결된 것이었다. 협정 체결 직후에도 네덜란드군은 아직 독립파의 준동이 정리되지 않은 동인도네시아 지역에서 군사 행동을 개시하여 술라웨시 남부와 발리 등지에서 독립파를 진압해나갔다. 특히 네덜란드군은 발리에서 응우라 라이(I Gusti Ngurah Rai) 중령이 이끄는 인도네시아군이 1946년 내내 네덜란드군을 괴롭히던 상황에 주목하여 11월 20일 마르가라나(Margarana) 지역에서 응우라 라이의 세력에 대해 최종 공세를 취했다. 후일 '마르가라나의 푸푸탄'(Puputan Margarana)으로 불리게 된 이 전투에서 응우라 라이의 인도네시아군 96명은 수적으로 우세한 네덜란드군에 4배가 넘는 전사자를 강요했으나 결국 패배했고 응우라 라이 중령을 포함한 96명 전원이 전사하였다.

위협적인 인도네시아군 세력이 사라지고 발리가 안정화되자 네덜란드는 곧 발리의 덴파사르에서 1946년 12월 토착민 유력자들과 덴파사르 회담을 열고, 술라웨시, 말루쿠, 소순다 열도를 포괄하는 '동인도네시아 자치국'을 수립하였다. 새로 수립된 동인도네시아 자치국의 정부가 전부 친네덜란드파로만 구성되지는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동인도네시아 지역은 네덜란드에 보다 가깝고, 독립파의 세력이 미치기 어려운 제3지대가 되었다.

1947년 초, 인도네시아 독립파 내부에서는 독립에 열정적인 청년 등의 지지를 얻은 강경파가 득세하고 있었고, 수탄 샤리르 등 온건파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져 갔다. 1947년 초 당시만 해도 링가르자티 협정의 비준조차 불확실할 정도였다. 순탄치 않은 내부 협상 끝에 1947년 3월 25일까지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양측은 협정을 비준했으나 인도네시아 공화국에서는 협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회당의 수탄 샤리르 내각이 지지를 잃었고 1947년 6월 사퇴하였다. 네덜란드 측에도 협정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고, 인도네시아에 너무 큰 양보를 했다며 공개적으로 협정을 비판하기도 했다. 네덜란드 대중들 사이에서도 아직 동인도는 당연히 네덜란드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남아 있었는데 협정 체결 후 네덜란드에서 수행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38%가 협정에 찬성했고, 36%가 반대했다.

결국 네덜란드는 협정을 그대로 지킬 생각은 없었고 인도네시아 측에서 추가적으로 압박과 회유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했다. 네덜란드는 어떻게든 인도네시아 지역 전체에 대한 네덜란드의 주권을 유지하고 싶어 했고 특히 인도네시아 쪽으로 공동 경찰을 창설하여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치안 유지를 함께 수행하자는 제안을 했다. 인도네시아 지도자들이 이러한 제안에 난색을 표하자 네덜란드는 작정하고 판을 뒤엎을 준비를 했다. 네덜란드군은 여러 첩보로 인도네시아군의 사정을 파악한 결과 1947년 중반 자바와 수마트라 핵심 지역이 네덜란드군의 수중에 들어오는 데는 2주간의 집중 공격으로 충분하고 공세 시작 후 6개월 내로 독립파 지역 전체를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하였다.

3.3. 네덜란드의 1차 공세

마침내 준비를 완료한 네덜란드군은 1947년 7월 20일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12만 병력을 동원하여 링가르자티 협정을 깨고 전면 공세에 나섰다. 이 작전(Agresi Militer Belanda I, Operatie Product)은 네덜란드 측의 전략, 전술적 대성공이었고 인도네시아 측 사상자는 최대 15만에 달했지만 네덜란드 측 사상자는 6천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 정도로 커져버린 전쟁은 국제적 주목을 끌었고 기대와는 달리 네덜란드도 독립파를 완전히 소탕해버릴 수는 없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공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47년 8월부터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인도네시아에서 재개된 전쟁에 주목했으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호주가 8월 1일 즉각 휴전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기하여 통과되었다. 그러나 아직 국제 사회는 네덜란드에 직접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네덜란드는 일단 8월 초 적극적인 공세는 멈추었지만 여전히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적대하였다.

이렇게 8월이 흘러가며 양측의 화해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침내 8월 중순부터는 관망하던 상임이사국 미국이 나섰고 8월 25일 미국은 휴전 요구 결의안을 안보리에서 제안해 통과시켰다. 미국이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간 중재자로 나서자 네덜란드도 이번에는 무시할 수 없었다. 미국과 안보리는 분쟁 당사자 양측이 각자 한 명의 대표와 양측이 동의하는 중립적인 한 명을 위촉하여 3자 위원회를 조직하고, 분쟁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킬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는 벨기에인 대표를, 인도네시아는 호주인 대표를 선정했고 중립 측으로는 미국인 대표가 참가하기로 결정되었다.

8월 29일, 네덜란드는 해당 시점까지 네덜란드군이 군사 작전으로 확보한 지역을 포괄하는 휴전선 판모크선(Garis van Mook)을 발표했다. 이에 따른 영토 분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수마트라에서 메단을 중심으로 한 오늘날 북수마트라의 위쪽 절반, 팔렘방을 중심으로 한 남수마트라, 방카블리퉁 제도, 그리고 서수마트라 해안의 일부 지역은 네덜란드 측에 귀속되고 이를 제외한 전부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귀속된다.
  • 그러나 동인도 핵심 지역 자바 대부분의 주요 대도시 및 자바의 여러 비옥한 농경지는 네덜란드 측에 귀속되도록 되어 있었다.
  • 자바와 수마트라 외 칼리만탄, 술라웨시, 말루쿠, 소순다 열도 지역은 모두 네덜란드 측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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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쟁점이었던 자바에서의 판모크선.
붉은색이 인도네시아 공화국 지역이다.

3.4. 렌빌 협정

마침내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 양측이 협상을 시작했지만 진행은 순탄치 못했다. 협상 장소를 선정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는데 양측이 합의를 보지 못해 자카르타에 정박한 미국 수송함 USS 렌빌(USS Renville)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협상은 1947년 12월 8일부터 개시되었다. 인도네시아 측 협상 대표는 공화국 총리 아미르 샤리푸딘(사회당)과 보건부 장관 요하네스 레이메나(Johannes Leimena, 1905 ~ 1977)[15]였고 네덜란드 측 대표는 자바인 식민 정부 관료 압둘카디르 위조요아트모조였다. 핵심적인 영토 문제에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가 후퇴하여 1947년 7월 공세 시작 전의 경계로 돌아가기를 주장하였으나 네덜란드는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한편 협상 도중인 12월 19일 네덜란드는 동인도네시아 자치국과 유사하게 수마트라의 네덜란드 점령 지역인 메단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동수마트라 자치국(Negara Sumatera Timur)을 수립하였고, 향후 형성될 동인도 연방(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에서 네덜란드의 입지를 굳히려 하였다.

이어진 1948년 1월의 협상 결과 결국 네덜란드의 주장이 관철되어 네덜란드군이 진입한 지역을 일단 거의 확보하도록 판모크선을 휴전선으로 하게 되었다. 링가르자티 협정과 유사하게 동인도 연방, 즉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을 창설하는 것 자체는 여전히 합의로 남았는데 각 구성체가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가입할지에 대한 주민 투표를 연방 수립 후 6개월 내에 시행하기로 하였다. 인도네시아 측은 판모크선을 인정하되 이 주민 투표가 많은 지역에서 친공화국파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보고 이와 같은 합의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는 이와 같은 렌빌 협정(Perjanjian Renville)을 1948년 1월 17일 USS 렌빌 선상에서 체결하고 휴전하였다. 판모크선에 따라 자바에서 바타비아, 수라바야, 보고르, 치르본, 스마랑, 말랑은 네덜란드 영역 하에 남았고 욕야카르타와 마디운 및 서부 일부 지역은 독립파 영역이 되었으며 네덜란드군은 독립파 영역에서 철수했다.

참고로 미국이 개입하고 렌빌 협정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던 가운데에도 네덜란드군은 작전을 지속했다. 특히 1947년 12월 9일 네덜란드군이 자바 서부 라와그데(Rawagede) 지역에서 인도네시아군 게릴라 색출을 위해 마을을 공격해 법적 절차 없이 431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라와그데 학살' 사건이 바로 정식으로 협상이 시작된 다음 날 벌어졌다. 학살 과정에서 게릴라가 라와그데 마을에 잠입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3.5. 마디운 사태

한편 수카르노가 이끄는 독립파 세력은 1948년 말부터 미국의 외교적 지지를 획득했다. 원래 미국 정치권은 어느 정도 반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며 수카르노의 독립 투쟁을 동정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1948년 중순까지는 아직 수카르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유보하며 일단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사이에서 중재자로서 관망하는 입장이었는데 무엇보다도 공산주의 내지 공산 세력에 대한 수카르노의 입장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입장에서 최선의 결과는 친서방 자본주의 계열의 인도네시아 정권 수립, 차악은 네덜란드 식민제국의 유지, 최악은 인도네시아의 공산화였다. 만약 수카르노가 '친공산주의 성향'을 보인다면 미국은 수카르노 및 독립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네덜란드의 손을 들어줄 수도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향후 행보에는 수카르노가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가 중요했다.

그러던 와중인 1948년 9월 18일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수카르노의 무장 해제 요구에 반발해 마디운에서 마디운 소비에트를 결성하고 '일본과 미국의 노예'인 수카르노 및 하타 지도부에 대한 반란 사건, 일명 마디운 사태를 일으켰다. 공산당이 일본을 지목한 이유는 일본의 동인도 점령 시기에 수카르노는 일단 일본 점령군에 협조하는 자세를 취했으며 나중에 후회하기는 했지만 일본의 동인도인 동원에 협력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수카르노는 항상 일본군에 기꺼이 협력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협력적이었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 오자 일본은 동인도에 '독립 준비 위원회'(PPKI)를 설치했는데 수카르노는 이 위원회의 의장으로 위촉되었다.

수카르노는 미국에 대한 확실한 지지를 얻기 위해 공산당이 일으킨 이 반란을 확실하게 진압하고자 했다. 수카르노 일파는 12월 초까지 가혹하리만치 잔혹하게 처리했고 반란 주동자 무소(Musso)를 10월 31일에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사건의 추이를 지켜본 미국 정부는 마침내 수카르노의 반공 의지를 확신하고 수카르노에 대한 본격적인 외교적 지원을 하기로 결심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 입장에서는 궁지에 몰린 나머지 최후의 수를 던져본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타이밍이 안 좋았다. 만약 조금만 더 버텼으면 2년 뒤 일어난 6.25 전쟁으로 더 이상 미국은 이쪽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공산당의 성급한 봉기가 없고 미국의 외교적 지지가 미진했다면 네덜란드와 독립파의 분쟁은 지지부진했을 가능성이 높고 베트남 전쟁이나 그 이상의 수렁에 빠졌을 확률이 높았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은 독립파의 전술적 열세를 외교적 우세로 뒤엎은 것이기 때문에 전개에 미국의 개입이 미친 영향이 컸다.

3.6. 네덜란드의 2차 공세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있어 판모크선은 욕야카르타, 수라카르타, 크디리, 마디운 정도를 제외한 자바의 주요 대도시 전체를 네덜란드에 넘긴 불만족스러운 휴전선이었으며 이에 따라 네덜란드 지역에서 독립파의 물밑 공작은 계속되었다. 한편 1948년 내내 네덜란드는 비공화국 지역에서 연방 구성체가 될 여러 새로운 자치국 및 자치령을 수립하고, 네덜란드 주도의 연방 체제를 형성하기 위해 다각도로 준비하였다. 이러한 네덜란드의 노력은 인도네시아 공화국과 열성 독립파, 특히 강경 독립파 청년들을 자극했고 네덜란드 통제 지역에서 독립파의 소요가 벌어지기도 했다. 네덜란드와 공화국 간 협의는 정체되었고, 갈등의 골이 점차 깊어지고 있었다.

결국 1948년 12월 19일, 네덜란드 측에서 휴전을 먼저 깨뜨리고 자바 및 수마트라에서 독립파 지역으로 재공세에 나서게 되었다(Agresi Militer Belanda II, Operatie Kraai). 여기서도 독립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전술, 전략적으로 패배하고 독립파의 수도 역할을 하던 욕야카르타가 점령되었다. 2차 공세 과정에서 수카르노 등 인도네시아 독립파 지도부 중 상당수도 네덜란드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러나 동인도의 상황이 연일 서방 언론에서 주목받았으며 네덜란드에 가해지는 국제적 압박이 거세어졌다. 미국은 심지어 네덜란드가 군사행동을 계속한다면 마셜 플랜에 따라 네덜란드에 주어질 물자 지원을 연기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네덜란드 측에 전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1948년 12월 2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공식적으로 네덜란드에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1949년 1월에는 독립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를 재수립시키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네덜란드군은 중요 전략 목표를 대부분 달성하고 나서 자바에서 1948년 12월 31일, 수마트라에서 1949년 1월 5일 휴전을 선언했다. 이제 인도네시아군의 저항은 게릴라전에 주로 의존하게 되었고 명목상 휴전 선언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적대 행위는 1949년 중순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 간 협상이 시작되면서 재차 적대 행위 중지가 발효되기 전까지 멈추지 못했다.

3.7. 1949년의 독립군 공세

3.7.1. 욕야카르타 공세

한편 독립군 지도부에서는 국제사회에 연이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독립군 세력이 아직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지배하 욕야카르타에 대해 공세를 취해야 한다는 안이 지지를 얻었다. 이에 따라 수디르만(Soedirman) 장군이 주도하는 독립군 세력이 1949년 3월 1일 욕야카르타를 공격하게 된다. 수카르노 등 공화국 지도부 주요 인물들은 당시(1948년 말부터 1949년 중순까지) 네덜란드에 의해 체포되어 방카섬에 유배되어 있어 직접 작전 입안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던 인물이 바로 당시 중령이었던 수하르토다. 이 때 독립 지지파였던 욕야카르타 술탄 하믕쿠부워노 9세(하멩쿠부워노 9세)는 궁전을 독립군의 은신처로 제공하였다. 이 공세는 전술적으로는 인도네시아군의 패배였지만 미국, 영국, 소련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오히려 반네덜란드 여론을 자극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네덜란드군이 욕야카르타에서 철수하여 독립군의 외교적 승리로 끝난다.

이에 따라 독립파는 네덜란드와의 협상에 확실히 유리한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1949년 5월 7일의 룸–판로이연 협정(Perjanjian Roem–Roijen, Van Roijen–Roem–verklaring)에서 독립군과 네덜란드군은 상호 적대 행위를 완전 중단하고, 상호 인정 하에 원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적대행위 전면 중지는 8월에 발효되었으며 8월 23일부터 10월 31일 간 덴하흐 원탁회의가 열렸다.

3.7.2. 수라카르타 공세

덴하흐 원탁회의 직전인 1949년 8월 7일 역시 원래 독립파 지역이었으나 네덜란드군에 점령되었던 수라카르타를 현지 반네덜란드 게릴라와 합세한 인도네시아군이 공격하여 독립전쟁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적대행위 중지는 자바에서 8월 11일, 수마트라에서 8월 15일에 이행될 예정이었고 인도네시아군 지도부는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점하기 위해 그 전에 3월의 욕야카르타 공세에서처럼 독립파 무장 세력이 아직 건재함을 보여주는 무력 시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공세가 시작되자 독립파의 공격을 예상치 못한 네덜란드군은 수세에 몰렸지만 여전히 화력 및 전술 측면에서 우세하였으므로 정신을 차리고 방어전을 펼쳤다. 전투는 적대행위 중지가 발효되기 직전인 10일에 절정에 달했고 인도네시아군은 여전히 네덜란드군보다 큰 피해를 입는다. 여기서 네덜란드군과 인도네시아군 양측의 자료에서 전투 참전자 수와 사상자 수를 각자에게 유리하도록 다르게 집계하고 있다. 어느 자료로 보든 3월 공세보다는 네덜란드군 사상자가 많았고, 인도네시아군이 3월 공세에서보다는 비교적 잘 싸운 편이었다. 네덜란드군은 정치적, 외교적으로 수세에 몰린 상태에서 방어전을 수행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고, 인도네시아군과 협상하여 8월 중으로 도시를 인도네시아군에 넘겨주기로 합의함으로써 이 전투는 인도네시아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수라카르타의 행정 기구는 8월 24일까지 인도네시아군이 접수했다.

3.8. 미국의 개입

전쟁의 흐름은 미국의 등장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2차대전 종전 후 대부분의 구 식민제국 열강들이 속한 서방 진영의 맹주가 된 미국은 구 식민제국의 식민지 재획득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마셜 플랜으로 엄청난 자금 지원을 받고 있는 서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재획득 전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전후 복구비용은 미국이 대신 지불하고, 아낀 돈으로는 식민지나 다시 만들겠다는 몰염치한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서방의 맹주가 된 이상 식민지 당사국의 여론 악화로 인한 뒷감당도 미국이 책임지게 될 것 역시 명확했다. 안 그래도 2차대전 이전부터 식민지 독립운동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비중이 커지고 소련 역시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자금 지원까지 시도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미국이 열강 국가들의 편을 들어 버리면 신생 독립국들이 죄다 공산진영(제2세계)으로 넘어가 버릴 위험이 컸다. 즉, 미국 입장에서 서구 열강의 식민지 재획득 시도는 소련의 동맹세력이나 부풀려 주는 행위었던 것이다.

반면에 소련은 그냥 속편하게 도덕적 원론만 주워섬기면서 손쉽게 외교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한 50년대 정도에 이르면 "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재침략을 시도하면 핵으로 보복할 수 있다."며 착한 편 역할을 하고 있으면 또 이 핵의 위협을 대신 방어해 줘야 하는 것이 미국이었던 것.

게다가 미국은 독립 이후부터 꾸준히 자국에게 제국주의 국가나 식민지 지배국 같은 프레임이 씌워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식민지배를 하더라도 최대한 보기 좋게, 인도적인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럴 수 없다고 판단되면 쿠바처럼 과감히 독립시키거나, 아니면 하와이처럼 아예 미국 영토에 넣어 버리곤 했다.[16]

이러한 미국 입장에서는 인도네시아 독립군이 독립을 쟁취했을 때 누구 지원으로 독립했느냐가 중요했다. 서방 국가들의 도움으로 독립한다면 그나마 네덜란드를 제외한 나머지 친서방 국가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겠지만, 만약 소련의 도움으로 독립한다면 공산 국가가 될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주변의 동남아 국가들도 도미노처럼 공산화될 가능성이 높고 인도네시아가 공산화가 되어버리면 직접 맞닿은 호주가 '최전방'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매우 골치아픈 일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수카르노의 '반공 노선 천명'은 미국이 인도네시아에게 원하는 것 그 자체였기에, 이를 통해 미국의 강한 신뢰를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미국은 수카르노 주도 하의 인도네시아라면 공산화는 막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여 본격적으로 네덜란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네덜란드 측에 '협상하지 않으면 경제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네덜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본국의 피해를 정리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막대한 비용이 지출되는 군사 행동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때문에 네덜란드의 입장에서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으며 결국 미국이 원하는 대로 협상 테이블에 나오게 된다.

4. 종전

수카르노 등 인도네시아 독립진영 지도자가 참가하고 네덜란드 총리가 주재한 원탁회의(Nederlands-Indonesische rondetafelconferentie/Konferensi Meja Bundar)의 결과 다음과 같은 합의가 이뤄졌다.
  1. 뉴기니 서부를 제외한 구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에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Republik Indonesia Serikat)을 수립한다.
  2.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의 주권을 인정한다.
  3.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 네덜란드령 뉴기니(서뉴기니), 네덜란드 및 그 속령은 네덜란드 군주를 원수로 하는 네덜란드 연합에 속한다.

이는 링가르자티 협정과 렌빌 협정에서 이미 합의되었던 바와 겉으로는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주권 이양을 위한 최소한의 유예 이후 네덜란드가 관리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기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이 새로 창설되어 대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네덜란드 연합은 영연방과 유사하게 인도네시아에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순수 협의체에 불과하게 되었으며 주권 이양과 함께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에서 네덜란드군은 신속하게 철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가 1949년 12월 27일 공식적으로 서뉴기니를 제외한 동인도 지역의 주권을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에 이양함으로써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서뉴기니 지역은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간접 주민투표 및 자치를 하는 조건으로 넘겼는데, 1969년에 인도네시아가 합의안을 무시하고 직접통치를 강행하는 바람에 내전이 벌어진다.

표면적인 정치적 합의 외에 신생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계승함에 따라 동인도 식민정부의 채무 45억 휠던도 함께 승계하는 합의 또한 이루어졌다. 이 채무액 가운데 상당량은 동인도 주둔군의 전쟁 경비였으므로 사실상 인도네시아가 일종의 전쟁 배상금을 네덜란드 대신 지불하게 된 것이었다.[17]

이 채무 이양 때문에 지금도 인도네시아에서는 당시 사실상 돈을 주고 독립을 산 게 아니냐는 평가를 받는다. 식민지 배상금은커녕 오히려 돈을 네덜란드에게 지불하고 독립한 격이었으니, 인도네시아에서는 독립 이후에도 종종 '그때 확실히 배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성토하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그것보다 나은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채무 이양에 동의했다. 시종일관 전세는 인도네시아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고 네덜란드가 협상 테이블로 나온 것은 미국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꿔 말하면 미국이 변심하는 순간 네덜란드는 언제든지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다시 전쟁을 이어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입장에서는 어렵사리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5.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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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세력은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이 정식으로 수립된 후에도 독립파의 인도네시아 공화국 직할지 외에는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독립전쟁 초기 국면, 예를 들어 1947년 링가르자티 협정 비준 직후라면 가능할 수도 있었을 기대였다.

그러나 상황은 독립전쟁 초기와 크게 달랐다. 네덜란드는 적어도 인도네시아 문제에서는 당시와 달리 서방의 지지를 더 이상 얻지 못하고 있었고, 비공화국 지역의 여론 역시 네덜란드에 적대적이고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에서 비공화국 지역이 1950년 내로 모두 공화국에 합류하여 인도네시아의 연방제는 빠르게 소멸하였고,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의 정치적 영향력도 함께 사라졌다.

5.1. APRA 쿠데타

인도네시아 독립 초기에는 여러 반공화국 세력이 내란을 일으켰는데, 그중 공의의 군주 부대(APRA)가 일으킨 쿠데타는 독립전쟁과 직접 관련이 있으므로 여기서 간략히 서술한다.

남술라웨시에서의 가혹한 진압 작전으로 유명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육군 대위 레이먼드 베스테를링[18]은 1949년 1월 공식적으로 제대한 후에도 독자적으로 2천 명 규모의 반공화국 민병대, 즉 공의의 군주 부대(APRA)를 이끌고 있었다. 민병대의 구성원은 수카르노-하타의 인도네시아 공화국 지도부에 반대하는 구 네덜란드군, 네덜란드령 동인도군 전투 경험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 민병대는 종결지어져 가는 독립전쟁 자체에서는 그다지 활약할 기회가 없었다.

독립전쟁이 끝나고 1949년 12월 출범한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의 내각은 처음에는 인도네시아 공화국과 비공화국 지역 간 균형을 고려하여 공화국 계열 인사 11명과 비공화국 인사 5명으로 구성되었다. 비공화국 인사 가운데는 친네덜란드파인 폰티아낙 술탄 하밋(하미드) 2세(Hamid II)도 있었다. 그러나 견해 일치 없이 억지로 모인 내각 내부에서는 공화국과 비공화국 간 갈등이 심각했다. 하밋 2세는 급기야 연방 내에서 비공화국 지역의 입지를 보장할 수단으로 공화국 지도부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까지 고려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그는 베스테를링과 접촉하고, APRA가 벌이는 반공화국 활동을 지원했다.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베스테를링과 APRA의 활동이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음을 감지하고 APRA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베스테를링은 APRA를 서부자바(파순단) 지역의 정규군으로 인정하라는 요구를 포함해 공화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로 인해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APRA는 마침내 1950년 1월 22일 밤 기습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APRA의 계획은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인도네시아 군과 경찰을 쉽게 무찌르고 구 네덜란드령 동인도군[19]의 묵인 내지 협조를 얻어 반둥과 자카르타에서 주요 행정 시설을 빠르게 접수하여 강제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킨다는 것이었다.

공화국 측은 첩보로 이미 APRA 쿠데타의 계획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APRA는 쿠데타 개시 직후 반둥 주둔 인도네시아군 부대를 빠르게 공격해 인도네시아군 94명을 사살하고 반둥을 점령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구 동인도군 지휘관들 대부분은 쿠데타를 일으킨 APRA에 협조하기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APRA의 작전이 틀어졌다. APRA 부대는 자카르타로 접근했지만 1월 23일 새벽으로 계획한 자카르타 공격은 동인도군의 지원을 받지 못해 늦춰지다 지리멸렬해졌다. APRA는 구 동인도군과 협상한 끝에 더 이상의 소득 없이 반둥을 버리고 바로 후퇴해야 했고, 반둥은 23일 17시까지 공화국군이 다시 접수했다. 쿠데타 시도는 이렇게 용두사미로 끝났고, 2월까지 APRA 잔당은 공화국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쿠데타 수괴 베스테를링은 네덜란드 정부의 도움을 받아 싱가포르로 도주했다가 다시 네덜란드 본국으로 망명했다. 쿠데타에 동조한 폰티아낙 술탄은 체포되었고, 4월 19일 반둥-자카르타 쿠데타에 본인이 연루되었음을 실토했다. 결국 이 쿠데타로 인해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에서 반공화국파의 세는 급격히 위축되었고, 반대로 공화국은 대중들과 의회의 지지를 얻어 비공화국 지역을 빠르게 흡수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하밋 2세가 다스리던 특별 자치 지역 서칼리만탄을 비롯한 비공화국 지역은 8월까지 모두 공화국으로 합류하였다.

5.2. 다룰 이슬람 반란

인도네시아 독립 전후에 존재했던 대표적인 내란 중 하나로는 이슬람 민족주의자인 스카르마지 마리잔 카르토수위료(Sekarmadji Maridjan Kartosoewirjo)가 새로운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인도네시아의 이맘으로 선포하면서 인도네시아 이슬람국가(다룰 이슬람)를 수립하여 발생한 반란이 있다.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는 네덜란드에 맞서기 위해 여러 민병대가 조직되었다. 카르토수위료는 이러한 민병대 중 서부 자바에서 활동하던 실리왕이(Siliwangi) 사단의 지도자였다.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네덜란드와의 협상이 진행되고 인도네시아의 완전한 독립이 확실시되어가자 수카르노는 모든 민병대에 해산을 지시했는데 카르토수위료는 이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을 인도네시아의 이맘이라고 지칭하면서 인도네시아 이슬람국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카르토수위료는 위에서 언급한 APRA와 동맹을 맺었는데 APRA 부대가 힘도 못 쓰고 진압되고 주요 인물들이 싱가포르 등으로 도주하자 정부에 항복을 거부한 APRA 잔당들을 흡수하였다. 이외에도 카르토수위료는 1952년에 중부 및 남부 술라웨시에서 반란을 일으킨 전 대통령 경호원인 카하르 무자카르, 1957년에 술라웨시 주에서 자치권 등의 문제로 정부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킨 보편투쟁헌장(Permesta), 1956-1957년 사이에 수마트라와 술라웨시 북부 등에서 개별적으로 일어난 반란을 통합하여 출범한 1958년의 인도네시아 공화국 혁명정부(PRRI) 등과 협력하였다.

어느 정도 안정화를 이루어 낸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1956년을 기점으로 반정부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인도네시아는 1957년에는 아체를, 1959년에는 남칼리만탄을 수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1962년 6월에는 가룻(Garut)에서 카르토수위료가 체포되면서 9월에 처형되면서 다룰 이슬람은 해체되었고 결국 1965년에 남술라웨시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잔당들이 항복하면서 군사적 충돌은 끝이 났다.

다룰 이슬람은 1962년에 결국 해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잔당이 일부 지지자들과 함께 1970년대에 급진적 이슬람주의를 내건 느슨한 무장 조직 연합체인 제마 이슬라미야(Jemaah Islamiyah)를 결성하였다. 제마 이슬라미야는 1970년대부터 폭탄 테러, 정치권 개입 시도 등의 여러 반정부 활동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제마 이슬라미야는 1993년 공식적으로 결성을 선포하고, 21세기가 되자 알카에다 등과 연합을 맺으며 2002년 발리 폭탄 테러나 2005년 기독교 학생 참수 사건 등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로 2000년대~2010년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중 하나로 꼽히게 된다. 그러나 2024년 조직의 몰락을 견디다 못해 공식적으로 해체를 선언하게 되었다.

1976년부터 2005년까지 아체의 독립을 위해 조직된 자유 아체 운동(GAM)의 반란 주도자 하산 디 티로(Hasan di Tiro) 또한 다룰 이슬람의 조직원이었다. 자유 아체 운동은 2005년 8월에 헬싱키에서 평화 조약을 통해 모든 적대적 군사 행위의 중단이 이루어졌고 합의 조건에 따라 인도네시아 정부는 진압군과 경찰의 철수와 정부에 수감되거나 타국에 망명한 GAM 조직원의 석방과 아체 기반 정당의 설립을 촉진하고 GAM은 무장해제하였다.

이 외에도 전후 인도네시아 공화국과 동인도네시아 자치국의 통합 과정에서 말루쿠인들이 반발하여 남말루쿠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기도 하는 등 독립 전후로 여러 내란이 있었다.

5.3. 전후 인니의 외교 변화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군사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외교적 지원 덕에 독립했으므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독립전쟁 시기에는 친미 반공에 가까운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카르노는 집권 후반에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가까워지면서 공산당 서기장 등을 내각에 참여시키고 비교적 온건한 다른 공산계 정당 무르바당을 탄압하는 선택적 친공 행보를 보였다. 수카르노는 집권 초반부터 비동맹 운동의 수장국으로 인도네시아를 자리매김하며 미국과 소련 양쪽 모두와 외교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집권 후반인 1964년부터 수카르노는 완연한 반미 성향을 보이며 미국 영화와 록 음악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 다음 권력을 잡은 수하르토는 확실한 친미 반공 성향의 인물이었으며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패함으로써 동남아시아 대륙이 공산화될 때도 인도네시아가 버텨준 덕택에 동남아 전역이 공산화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5.4. 인도네시아의 채무 이행

상기한 네덜란드와의 합의에 따라 독립과 함께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채무 45억 휠던을 떠안아야 했다. 갖춰진 인프라도 애초 선진국에 비해 크게 빈약했던 인도네시아는 전후 재건과 함께 이 빚을 갚느라 꽤 고생해야 했고 이는 인도네시아의 초기 경제에 상당한 부담이었다. 인도네시아가 아직 네덜란드 연합에 남아 있을 때였던 1950~1956년까지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 정부는 노력해서 약 39억 휠던을 갚는 데 성공했고 1956년의 잔여 채무액으로 약 6억 휠던만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네덜란드령 뉴기니의 영유권을 두고 네덜란드와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인도네시아는 구 동인도 채무 6억 휠던의 상환을 중단했다. 최종적으로 유엔과 미국이 개입하여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된 1962년에야 인도네시아는 구 동인도 채무의 상환을 재개했는데 그간 이자가 붙어 액수는 약 6억 2천만 휠던이었다.

수카르노 정부는 1965년까지 떨떠름하나마 이 빚을 꾸준히 상환하려고 노력했다. 이후 집권한 수하르토는 잠시 채무 상환을 유예하다가 결국 동인도 채무를 두고 재협상하여, 연 1% 이자 조건으로 남은 채무를 천천히 상환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인도 채무 상환은 1976년부터 재개되었지만 당시 인도네시아 경제도 빠르게 성장 중이었던 관계로 남은 빚은 인도네시아 경제에 그다지 큰 부담을 안기지는 않았다. 인도네시아가 재조정된 동인도 채무를 최종적으로 완전히 상환한 것은 2002년이었다.

6. 현대 네덜란드에서의 인식

네덜란드 현대사의 오점이라고 불리고 명분 없는 전쟁이었던 만큼 이 전쟁에 참전한 네덜란드군의 취급은 아주 박했다. 참전 군인들은 종전 후 본국으로 돌아간 뒤 영 좋지 못한 대접을 받았는데 집에 돌아갔을 때는 네덜란드 본국에서 보내준 오렌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환영해 주는 사람은커녕 경험을 말할 사람도 없어서 고통이 컸다고 한다.[20]

이 전쟁에 참여했던 네덜란드군은 곧 이어 나름대로 명분도 있고, 훨씬 더 스케일이 방대해진 전쟁에 지원자에 한하여 참전하게 되었다. 나이는 어려서 잘 모르지만 공산주의는 아무튼 나쁜 것 같으니 참전한 사람, 군에서 실적을 좀 쌓아야겠다며 참전한 사람, 일본이 점령했던 어딘지는 모르겠는 쪼그마한 나라에 가면 뭐 큰 일이라도 있겠냐며 안일하게 참전한 사람 등등이 있었지만 어딜 가든 불바다에 비명소리일 줄은 몰랐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과 똑같이 오렌지만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끌려간 것도 아니고 자원해서 간 거라서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21]

현대 네덜란드에는 인도네시아와의 관계 개선 및 식민 지배 시기에 대한 청산을 위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네덜란드가 저지른 패악질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독립전쟁이 끝나고 거의 64년이 흐른 2013년에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 이하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 벌인 잔혹한 즉결 처형 행위에 대해 주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대사 체이르트 더즈반(Tjeerd de Zwaan)을 통해 공식 사과하고 1947년 12월 라와그데 학살(Pembantaian Rawagede)의 희생자 부인 약 50명에게 인당 2만 유로를 배상하였다.

네덜란드 ‘68년 만의 사과’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점령시절 즉결처형 잘못" 64년만에 과거史 사과

그러다가 2020년에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독립투쟁 진압 과정에서 즉결처형한 모든 피해자 자녀에게 5천 유로(670만원)씩 배상금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사법부에서도 2012년과 2013년에 걸쳐 각각 네덜란드 법원의 당시 학살과 만행에 대해 보상하라는 판결과 정부의 사과 및 보상이 있었다.

7. 여담

  •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 독립군에 가담해 네덜란드와 싸운 사람 가운데는 일본군 패잔병, 심지어 그 안에서 징병된 조선인 출신도 있었다. 일본군 패잔병 항목 참조.
    파일:인도네시아_독립전쟁_2.jpg
    인도네시아에서는 중요한 전쟁으로 인식되고 있고 매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그러나 이후 신생 독립국 인도네시아는 서구 식민통치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령 파푸아, 포르투갈령 티모르침공하여 강제로 병탄한 뒤 친인도네시아 민병대를 앞세워 학살과 약탈을 저질렀으니 이는 후일의 동티모르, 서파푸아 문제를 초래하게 되었다.[22] 놀랍게도 이 전쟁에 참여했던 한국인들이 존재한다. 양칠성과 이종렬이 그 주인공. 이들은 포로감시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왔다가 2차대전 종전 후에 네덜란드군이 포로감시원을 전범으로 몰아 처형하는 와중에 동료들과 함께 탈출했다. 이후 이들은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투신하여 네덜란드군에 맞서 싸웠다. 특히 양칠성은 독립군들을 훈련하고 폭탄을 제조하는 등의 큰 도움을 주었고 직접 전투에도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네덜란드군과의 전투에서 양칠성은 생포되었고 이종렬은 전사하였으며 양칠성은 1949년 결국 네덜란드군에 의해 총살되었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양칠성을 독립 영웅으로 추서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양칠성이라는 이름 대신 일본군으로 알려진 채 매장되었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70년대에 인도네시아의 바자란대학에서 유학한 일본인 교수가 쓴 적도에 묻히다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 목마와 숙녀라는 시로 유명한 시인 박인환이 1948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을 보고 인도네시아인들을 위한 시를 빌표하였다. 제목은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동양의 오케스트라
가메란의 반주악이 들려온다
오 약소민족
우리와 같은 식민지의 인도네시아


삼백년 동안 너의 자원은
구미 자본주의 국가에 빼앗기고
반면 비참한 희생을 받지 않으면
구라파의 반이나 되는 넓은 땅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가메란은 미칠 듯이 울었다


오란다의 58배나 되는 면적에
오란다인은 조금도 갖지 않은 슬픔에
밀시(密柹)처럼 지니고
육천칠십삼만인(六千七十三萬人) 중 한 사람도 빛나는 남십자성은
쳐다보지 못하며 살아왔다


수도 바다비아 상업항 스라바야 고원분지의 중심지
반돈의 시민이여
너희들의 습성이 용서하지 않는


남을 때리지 못하는 것은 회교서 온 것만이 아니라
동인도회사가 붕괴한 다음
오란다의 식민정책 밑에 모든 힘까지도 빼앗긴 것이다


사나이는 일할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약한 여자들은 백인 아래 눈물 흘렸다
수많은 혼혈아는 살길을 잃어 애비를 찾았으나
스라바야를 떠나는 상선은
벌써 기적을 울렸다


오란다인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처럼
사원(寺院)을 만들지는 않았다
영국인처럼 은행도 세우지 않았다
토인(土人)은 저축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저축할 여유란 도무지 없었다
오란다인은 옛날처럼 도로를 닦고
아시아의 창고에서 임자 없는 사이
보물을 본국으로 끌고만 갔다


주거와 의식은 최저도(最抵度)
노예적 지위는 더욱 심하고
옛과 같은 창조적 혈액은 완전히 부패하였으나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생의 광영은 그놈들의 소유만이 아니다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인민의 해방
세워야 할 너희들의 나라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성립하였다 그런데
연립 임시 정부란 또 다시 박해다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모략을 부숴라
이제는 식민지의 고아가 되면 못쓴다
전인민은 일치단결하여 스콜처럼 부서져라
국가방위와 인민전선을 위해 피를 뿌려라
삼백 년 동안 받아온 눈물겨운 박해의 반응으로
너의 조상이 남겨놓은 저 야자나무의 노래를 부르며
오란다군의 기관총 진지에 뛰어들어라


제국주의의 야만적 체제는
너희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욕
힘 있는 대로 영웅 되어 싸워라
자유와 자기보존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야욕과 폭압과 비민주적인 식민정책을 지구에서
부숴내기 위해
반항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라


참혹한 옛날이 지나면
피 흘린 자바섬에는
붉은 칸나 꽃이 피리니
죽음의 보람은 남해의 태양처럼
조선에 사는 우리에게도 빛이려니
해류가 부딪치는 모든 육지에선
거룩한 인도네시아 인민의 내일을 축복하리라


사랑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고대 문화의 대유적 보로 로도울의 밤
평화를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가메란에 맞추어 스림피로
새로운 나라를 맞이하여라


[1] Groot Dajak. 오늘날의 보르네오 중남부 칼리만탄틍아주에 해당함[2] 오늘날의 서부자바주, 반튼주, 자카르타[3] 보르네오 서부에 위치했던 네덜란드령 동인도 산하 술탄국[4] 保案隊(Pao An Tui). 1946년 수마트라의 메단에서 결성되고 1947년 자바섬에도 지부를 둔 동인도 화인들의 자위 민병대.[5] 인도네시아어로는 'Angkatan Perang Ratu Adil'(APRA). 여기서 '라투 아딜'(Ratu Adil)은 인도네시아 전설상의 공의의 군주(난세에 출현하여 세상을 구원하고 태평성대를 연다는 메시아적 존재)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공의의 군주 부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군 장교 베스테를링(Raymond Westerling)이 만든 친네덜란드 민병대로서 반공화국 활동을 벌이다 독립전쟁이 끝난 후인 1950년 1월에도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6] 초반 사령관이었던 이마무라 히토시는 온건한 성격에 현지 문화를 잘 고려한 정책으로 나름대로 선정을 펼쳤다. 그러나 일본 제국 본국은 이마무라가 너무 물러터졌다는 이유로 이마무라를 압박하여 내보내고 이마무라의 후임으로 바바 마사오를 보낸다. 바바는 산다칸 죽음의 행진을 일으키고 현지인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넘기는 등 잉크바르트와 다를 바 없는 학살과 폭정으로 점철된 정책을 폈다.[7] 식민지 시대에 최소 10년 정규 교육을 받은 중졸자는 전체 인구 중 소수 엘리트였다.[8] 일본군이 점령지에서 식량을 공출해 민간에서 식량이 부족해지기도 했다.[9] Bung Tomo, '토모 동지' 내지 '토모 형제'. 본명은 수토모(Sutomo). 독립전쟁 과정에서 독립을 지지하는 열정적인 라디오 연설로 유명했다.[10] 독립전쟁 발발 전 1945년 인구 기준으로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세 도시는 자카르타(인구 847,483명), 수라바야(618,674명), 반둥(약 48만 명)이었다.(Freek Colombijn, "Under Construction: The Politics of Urban Space and Housing during the Decolonization of Indonesia, 1930-1960", 2010) 동남아시아 전체에서도 당시 수라바야보다 큰 도시는 자카르타 외에는 방콕, 양곤, 사이공, 싱가포르, 마닐라뿐이었다. 마닐라는 전쟁 때문에 1945년에는 인구 집계가 어려웠다. 마닐라 전투(특히 마닐라 대학살)에서의 인명 손실 및 피난으로 인구가 감소해 1945년 마닐라는 일시적으로 수라바야보다 인구가 적었을 수도 있다.[11] 초기 동원된 전차는 M4 셔먼 24대, 비슷한 수의 M3 스튜어트 등이었고 나중에 증원되었다.[12] 미국인. 본명은 뮤리얼 스튜어트 워커(Muriel Stuart Walker, 1898 ~ 1997). '수라바야 수'는 영국군과 네덜란드군이 도쿄 로즈처럼 붙인 별명이다.[13] 인도네시아군 전사자 약 2천 명, 일본군 전사자 150~850명, 일본군 실종자 231명[14] 현행 인도네시아어 맞춤법으로는 Perundingan Linggarjadti[15] 인도네시아 기독당, 암본계 기독교인[16] 미국은 식민지 경쟁에 뒤늦게 뛰어들어 식민지가 적었고, 게다가 충분한 자원을 가진 광대한 영토 덕분에 굳이 서유럽 열강들과 달리 식민지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도 별로 없었다.[17] 대신 네덜란드도 지역별로 파편화된 인도네시아 루피아를 통합 화폐로 발행해 주는 거래를 했다. 둘 다 완전한 공짜는 아니었다.[18]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네덜란드군 측에서 잔혹한 학살극을 펼치고 공의의 군주 군단(APRA)같은 별의 별 친란 어용 테러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던 특수부대 대위였었다. 조금만 의심이 되면 불러서 조사도 안하고 즉결처형시키는 일이 빈번했는데, 남술라웨시 지역 어떤 마을은 독립군에 협조한 이력이 있다고 의심이 된다는 이유로 마을 남성 349명을 그자리에서 즉결 총살 시켰다.(...) 베스테를링은 아버지의 일 때문에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튀르키예어를 잘해서 별명도 "de Turk", 튀르크인이었다. 어머니는 그리스인이었는데 다문화가정에서 자랐는지 언어습득력도 뛰어나어 식민지 레인저 장교로 복무 할 당시 인도네시아어가 출중한 편이었다고 한다. 이 양반은 훗날 네덜란드로 귀국하고 나서도 성악 테너로 잘먹고 잘살다가 말년에 암스테르담에서 골동품점을 운영하다 죽는다. 부하들은 잘 챙겨줬는지 장례식 때 많은 네덜란드 베테랑 대원들이 참여했다. 끝까지 사죄한번 없이 살았고 때때로 네덜란드 언론으로 부터 악마, 학살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오히려 적반하장 식으로 이들 언론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기도 하였다. 인도네시아 사람들 입장에선 진짜 분통터질 노릇인데 천수를 누리다가 1987년 만 67세로 사망한다. 현재는 네덜란드 국내에서도 이 인물에 대한 재조사 및 재평가가 이루어져 레이먼드 베스테를링에 대한 평가는 거의 싸이코패스로 인식하고 있는 수준이다...[19] 당시는 종전 후 1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므로 인도네시아군의 조직이 진행되면서 잠시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과 불편한 동거 중이었다. 구 동인도군이 최종 해산된 것은 1950년 7월이었다.[20] 어쩌고 보면 네덜란드판 월남전이라 볼 수 있다.[21] 그래도 일부 참전용사들은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워서 영광이었다고 말하는 등 완전히 불평불만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22] 사실 구 식민지배국의 식민지가 독립 후 다른 소수민족,다른 영토를 침범해 자국 영토로 편이하거나 극심한 탄압을 하는 건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은 아니다. 사실 인도네시아가 좀 심했던 거지 베트남, 말레이시아, 남아공, 아르헨티나, 호주 등 구 식민지들이 다른 지역을 침공하거나 식민지로 삼거나 극심한 탄압을 가하는 등의 사례는 드문 건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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