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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dth=100% | ||
| 날짜 | 1672년 4월 7일 ~ 1678년 9월 17일 | |
| 장소 | 베네룩스 3국 | |
| 교전국 | 교전국1 | 교전국2 |
뮌스터 주교후국 | ||
| 지휘관 | ||
| 결과 | 프랑스-스웨덴 승리 네이메헌 조약 체결 | |
1. 개요
1672년부터 1678년까지 프랑스가 네덜란드 공화국과 맞서 싸운 전쟁으로 프랑스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네이메헌 조약을 통해 프랑슈콩테 와 여러 플랑드르 요새를 획득함으로써 유럽 최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2. 배경
상속 전쟁 이후 루이 14세는 계속해서 스페인에 대항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속 전쟁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 편을 들었다. 이는 네덜란드 독립전쟁 당시 네덜란드 독립군을 지원했던 프랑스에게 크나큰 배신감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더해서 당시 프랑스는 중상주의 정책에 입각해 상업을 발전시키고 있었는데 네덜란드가 큰 경쟁 상대였다. 특히 더욱이, 1664년과 1667년에 프랑스가 강력한 보호무역 관세를 부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는 프랑스 상인과 제조업자들에게 만만치 않은 경쟁자였다. 더구나 루이 14세는 라인 강 서쪽은 자신의 영토라는 자연 국경설을 주장하였는데, 라인 강 서쪽에는 네덜란드 공화국이 포함되어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안 루이 14세는 잉글랜드를 끌어들여 동맹을 맺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와 두 차례의 전쟁을 벌인 상태였다. 특히 제2차 영란전쟁이 잉글랜드의 패배로 끝나자 찰스 2세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와의 동맹을 통해 네덜란드를 손봐줄 생각이었다.[1]한편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급속도로 가까워 지자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어 이들을 막으려고 했다. 네덜란드가 프랑스와 사이가 안 좋은 국가들과 동맹을 맺자 프랑스의 루이 14세 또한 뮌스터 주교후국, 쾰른 선제후국, 그리고 스웨덴과 동맹을 맺었다. 이로서 네덜란드는 프랑스와 그 동맹국들에 의해 포위되어버렸다.[2]
3. 전개
1672년 3월 28일잉글랜드의 찰스 2세는 네덜란드 공화국에 전쟁을 선포하자 루이 14세도 뒤따라서 전쟁을 선포했다. 프랑스군은 곧장 뫼즈 강에 위치한 마스트리흐트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영국 해군은 네덜란드 해상을 봉쇄해 네덜란드로 발트해에서 수입되는 곡물이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래서 네덜란드는 영국 동부 해안의 솔베이 해역에서 영국-프랑스 연합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하지만 영국-프랑스 연합 함대가 전열을 가다듬고 역공을 취하자 미힐 더 라위터르제독은 템스강에 봉쇄선을 설치하여 연합 함대의 진격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템스강 봉쇄를 시도했으나 실패한 뒤, 수심이 얕고 모래톱이 많은 스호네벨트 해역으로 이동해 소형·저흘수 함선의 이점을 활용했고, 그 결과 수적으로 우세한 영불 함대를 분산시켜 1672년 6월 프랑스 함선 두 척을 격침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두 차례 스호네벨트 해전에서 결정전을 피하면서도 영국과 프랑스를 분리해내 네덜란드 공화국은 양대 강국의 압박을 견뎌냈으며 이는 매우 큰 성과였다.한편 마스트리흐트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방어가 잘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다. 한편 프랑스의 동맹인 뮌스터 주교군은 큰 저항 없이 흐로닝언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흐로닝언에서 네덜란드군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양측은 주로 포병을 이용해 전투를 벌였는데, 이 때문에 베른하르트 폰 갈렌은 "폭격하는 베렌드" 라는 별명을 얻었다 . 4주간의 공성전 끝에 뮌스터 주교군은 병력의 절반을 잃고 항복했는데, 이는 적과의 전투와 악천후 때문이었다. 흐로닝언에서 뮌스터 주교군을 막아냈지만 사방에서 프랑스군이 몰려오고 있었다. 특히 튀렌 자작은 아른험과 네이메헌을 점령함으로서 암스테르담을 목전에 앞두고 있었고 몽모랑시 공작은 라인강을 건넌 다음 데벤테르, 츠볼레를 점령하고 국왕과 콩데 공작이 이끄는 본대는 느릿느릿하지만 착실하게 라인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래서 압도적인 압박에 굴복한 네덜란드는 6월 16 일 일찌감치 협상단을 보내 라인 강변 도시들, 마스트리흐트, 브라반트, 네덜란드령 플랑드르를 할양하고 1천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지금이 승기라면서 네덜란드의 제안을 거절하고 전군에게 암스테르담으로 진군하라고 명을 내렸다. 이에 네덜란드는 무이덴 수문을 파괴하여 네덜란드 전역을 물에 잠기게 했다. 이로서 프랑스군은 더 이상 진격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군의 진격이 지지부진하자 신성 로마 제국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날렸다. 이에 프랑스군은 튀렌 자작과 콩데 공을베스트팔렌과 알자스로 파견하였다. 프랑스 주력군이 가버리자 네덜란드군은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 네덜란드 내부에서는 정치적 격변이 발생하고 있었다. 1672년 네덜란드에서는 전쟁을 계기로 오라녜파가 주도한 민중 봉기가 일어나 섭정들이 프랑스에 항복하려 했다는 거짓 혐의가 퍼졌고, 그 과정에서 요한 더빗과 그의 형제 코르넬리스가 헤이그에서 군중에게 살해되었다. 이 혼란 속에서 “민중은 이성을 잃고, 정부는 갈피를 못 잡았으며, 국가는 위기에 빠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 결과 제1차 총독 공석 시대가 끝나고 1672년 빌럼 3세가 총독이 되어 프랑스와의 전쟁을 이끌었으며, 그는 프랑스와 영국의 예상과 달리 네덜란드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지도자로서 이후 유럽의 반프랑스 동맹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네덜란드 내부가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전쟁은 지속되었다. 1673년 6월 26일, 독일에서는 튀렌 자작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군을 격파하고 중립을 강요했고, 루이 14세가 이끄는 군대는 6월 29일에는 마스트리흐트를 점령하였다. 프랑스는 육상에서의 선전과 반대로 해전은 박살나고 있었다. 더 라위터르 제독은 6월 7일부터 14일 까지 발헤렌 해전에서 프랑스-영국 연합 함대를 격파했고, 8월 20일에는 텍셀 해전에서도 다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와 동시에 연합군은 빌헬름의 지휘 아래 3만 명의 네덜란드-스페인 연합군이 뮌스터와 쾰른 주교의 영토로 진군했다. 한편 9월 네덜란드 공화국 북부에서 뮌스터 주교후국군을 철수시킨 네덜란드는 곧장 독일 내부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3만 5천 명의 신성 로마 제국군과 함께 프랑스와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의 긴 보급로에 있는 중요한 보급 기지인 본을 점령했다. 본이 점령당하자 승부의 추는 급격하게 네덜란드에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안 그래도 인기가 없던 전쟁이었는데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패퇴하자 의회에서 전쟁 종식을 위한 압력을 찰스 2세에게 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네덜란드 함대가 영국으로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한 뉴암스테르담을 탈환하자 결국 의회의 압력에 굴복한 찰스 2세는 1674년 2월 네덜란드와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맺어 전쟁에서 손을 뗐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루이는 "전면적인 전투보다는 포위 공격과 전쟁세 징수, 습격, 봉쇄를 강조하는 소모 정책"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전쟁에 뛰어들기 주저하는 스웨덴을 보조금으로 협박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공격하게 만들었다. 스웨덴군이 엘베 강을 건너 독일 북서부로 진격하려하자 깜짝 놀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알자스를 떠나야만 했다.
이후 루이 14세는 프랑슈콩테와 라인 전선에서 전투를 이어가며 튀렌과 콩데 같은 지휘관들이 승패를 주고받았고, 해상에서는 뒤켄이 서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했으나 아고스타 해전에서 더 라위터르가 전사했다. 1677년 프랑스는 플랑드르에서 발랑시엔과 캉브레 등을 점령해 우위를 확보했지만, 영국과 네덜란드의 접근으로 외교적 위협이 커졌다. 1678년 루이 14세는 다시 공세에 나서 겐트와 이프르 등을 점령한 뒤 네이메헌 조약을 체결해 네덜란드와 화평했고, 이어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등과도 평화를 맺어 전쟁을 유리하게 마무리하며 프랑스의 승리를 확정지었다.
4. 결과
루이 14세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파괴와 스페인령 네덜란드 정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네이메헌 조약을 통해 프랑슈콩테 전역과 여러 요충지를 획득해 프랑스에 유리한 영토적 성과를 확정지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공화국은 전쟁으로 인해 부채가 쌓이기 시작했고 이로인해 군함 건조가 뒤쳐지기 시작했다. 군함 건조가 늦어지자 경쟁국에 뒤쳐지기 시작했고 이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첫 번째) 파산(1674년)으로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특히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굴복시키기 위해 사용한 초토화 정책은 플랑드르를 황폐화시켰고, 이로인해 1675년 부터 1800년까지 플랑드르에는 제대로 된 산업이 없게 되었다.프랑스는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했지만 연합 세력에 맞서 일방적으로 의지를 관철하기는 어렵다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로 인해 이후 스트라스부르 점령과 재결합 전쟁을 거쳐 반프랑스 대동맹이 형성되고, 9년 전쟁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