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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공화국 مصر جمهورية | ||
1953년 ~ 1958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이집트 왕국 | 아랍 연합 공화국 | |
국가 | 이집트 공화국 국가[1] | |
수도 | 카이로 | |
정치체제 | 공화정, 이원집정부제, 군사독재, 나세르주의 | |
역대 대통령 | 무함마드 나기브 가말 압델 나세르 | |
공용어 | 아랍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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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3년부터 1958년간 있었던 이집트의 공화국이다. 나세르를 중심으로 한 자유장교단의 7월 23일 혁명으로 수립되었으며 냉전 시기, 기존 친서방 왕정 국가를 전복하고 청년 장교 중심으로 집권한 대표적인 아랍 사회주의 국가였다.[2] 수에즈 위기, 2차 중동전쟁을 겪다가 시리아와의 연합으로 흡수되었다.일종의 이집트 제1공화국으로 볼 수 있다.
2. 역사
2.1. 이집트 7월 혁명
이집트 왕국은 당시 많은 중동 국가가 그러하듯 서구 국가들의 간섭 상태에 놓여 있었고 특히 경제적으로 종속되었다. 여기에 더해 당시 이집트는 사실상 신분제가 유지되어 메흐메드 알리의 총독 부임 이후 형성된 귀족 세력과 토착 지주들이 국민 대다수의 농민을 억업하는 형국이었다. 이집트는 입헌군주제 국가였으나 왕실의 권력이 막강하고 무엇보다 영국의 개입이 있었기에 이집트 왕국의 의회 정치는 왕실과 영국 정부, 자유주의 개혁 세력간에 대립으로 유지되었다. 결정적으로 대공황 시기 정부는 당초 약속했던 복지 정책을 철회하면서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지지가 꺾이게 되었다. 이런 의회제의 실패에 민중들은 더 급진적인 체제 개혁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가난한 중산층 출신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반부패, 민주주의 회복을 주장하는 자유장교단이 결성된다. 이들은 2차 대전 중 추축국에 호의를 얻어 영국을 몰아낼 계획을 하기도 할 만큼 급진적인 반영주의자였다. 아랍 사회주의 사상을 습득한 자유장교단은 마치 1차 대전 이후 무스타파 케말이 했던 것처럼 군이 정치에 참여해서 사회를 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군부 내에서 부상한 자유장교단의 리더가 바로 가말 압델 나세르였다.2차 세계대전 후 대영제국이 몰락하자 이집트와 수단 지역의 민족주의가 부흥하며 반외세 반왕실 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난다. 특히 이즈음 벌어진 1차 중동전쟁에서 나세르가 이스라엘군의 반격을 저지하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다. 그러는 사이 1950년 총선에서 자유주의 정당, 와프드는 큰 승리를 거두며 다시 정부를 구성한다. 정부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얻기 위해 토지 개혁을 추진하지만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의 개입과 정치적 갈등으로 개혁에 실패한다. 와프드 내각은 이번에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시도하고 영국군과 이집트 경찰, 민병대와의 전투로 수십명이 사망하고 내정간섭에 분노한 이집트인들이 외국인 거주지를 급습하며 인명피해를 낸다. 상황이 이렇게 커지자 와프트 내각은 총사퇴하고 3번의 무소속 관료 내각이 이어졌다. 첫 내각은 토지 개혁을 추진했으나 왕실의 반대로 내각이 붕괴되었고 파루크 1세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었다, 두 번째 내각은 부패 척결과 관료제 개혁을 추진했으나 곧 내각의 청렴을 의심하는 여론이 펼쳐져 사퇴한다. 세 번째 내각은 이제는 갈 때까지 간 상황에서 계엄령의 해제도 신임 의회 선거도 이루지 못했다.
이런 틈을 타 자유장교단은 지지를 잃고 있는 파루크 1세를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할 계획을 짜고 무함마드 나기브를 쿠데타의 얼굴마담으로 포섭한다. 이들은 1952년 봄에 계획을 수립하여 8월 실행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파루크 1세는 군부의 불온한 움직임을 알아채고 군내 사조직의 해산을 명령한다. 곧 자유장교단 간부들이 체포될 거란 소문이 돌자 1952년 7월 23일 자유장교단은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들은 카이로를 점령하고 그들은 토지 개혁을 주장하다 해임된 전 총리 알리 메헤르를 총리로 임명했다. 무력한 정부는 이를 승인하며 혁명사령부가 정권을 차지한다. 7월 30일 무함마드 나기브는 첫 혁명 성명을 내고 안와르 사다트가 혁명 수뇌부의 대변인으로 이를 대독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혁명을 국가를 방위할 능력이 없는 정부를 대신하여 국민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파루크 1세는 영국과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이들은 파루크가 이집트의 독립을 시도했기에 요청을 무시했다. 파루크는 알렉산드리아로 도피하였다. 쿠데타 세력은 5인의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헌정을 복구시키지 않고 토지 개혁, 관료제 개혁, 독립적인 이집트의 수립을 완수 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까지 왕정 폐지를 확실히 주장하지 않았고 왕실 인사 2인과 군부 인사 1인으로 구성된 섭정위원회를 유지하여 차기 국왕의 선출을 준비했다.
2.2. 혁명 세력의 개혁
그들의 초기 개혁은 포퓰리즘에 가까웠다. 이들은 의회의 여름 휴회를 금지했고 각료에게 주는 세제 혜택과 보조금을 삭감하였다. 베이(대공), 파샤(각하) 등 튀르크식 경칭도 폐지하였다. 이후 총리 알리 메헤르와 함께 토지 개혁을 논의했고 토지 보유 한도와 소작료 조정에 성공하였다. 이렇듯 사회 개혁 및 토지 개혁의 숙원이 완수되자 이집트인들은 이제 군인들이 군으로 돌아가고 민간 정부로 이양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혁명위원회와 알리 메헤르는 최소한 6개월 이상의 계엄을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이제 숙청위원회를 구성하여 정당과 의원들을 감사하였고 특히 왕실에 충성하는 고위 관료들이 해임되었다. 이후 개혁파나 기존 정치인이었던 메헤르와 혁명위원회는 내각 구성을 두고 갈등을 벌였다.9월 7일 알리 메헤르를 해임시키고 무함마드 나기브가 총리가 되며 군부는 완전한 정권 장악을 시도한다. 자유장교단은 메헤르를 비롯한 64인의 기성 정치인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정당들에게 부패 정치인을 색출할 것을 요구했다. 당대 최대 정당인 와프드는 숙청위원회를 구성하여 16인을 추방했으나 그중 중요 인사는 1인었다. 이런 요구에 1923년 헌법을 수립한 원로 정치인들은 거부하였고 소장파 당원들은 지지하였다. 그러나 당 전체로 보았을 때 혁명위원회의 명령을 거부하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결국 합법적인 선에서 제도권 정치를 개혁할 수 없다고 판단한 군부는 모든 정당을 불법 해산하였다.
그리고 1953년 2월 헌법위원회를 소집하고 논의 끝에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헌법에 의회에 설립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서구식 정치 체제의 효용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은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6월 18일 무함마드 나기브는 투표도 없이 혁명위원회에게 대통령으로 추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