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프리카 제국 Empire centrafricain | Central African Empire | ||
국기 | 국장 | |
Unité, Dignité, Travail 통일, 존엄, 노동 | ||
1976년 12월 4일 ~ 1979년 9월 20일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 |
위치 | 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 |
수도 | 방기 | |
정치체제 | 명목상 입헌군주제, 군사독재 사실상 전제군주제[1] | |
국가원수 | 황제(보카사 1세) | |
언어 | 상고어, 프랑스어 | |
종교 | 가톨릭, 이슬람교 | |
통화 | CFA 프랑/중앙아프리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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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중앙아프리카 제국 국기.png황제기.
1976년 12월 4일에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이던 장 베델 보카사가 '보카사 1세'라는 이름으로 황제를 자칭하고 제국을 선포하면서 수립된 국가. 참고로 인류 역사상 가장 마지막으로 건국된 제국이다.
2. 역사
보카사 1세의 대관식 당시 실제 영상 |
제국 수립 1주년이던 1977년 12월 4일에 보카사 1세는 과거 중앙아프리카의 종주국이던 프랑스의 원조금까지 빼돌려가며 1년 국가 예산의 1/3, 국가 GDP의 18% 정도인 2200만 달러[2]를 들인 초호화 대관식을 열었다. 이에 대해 다른 나라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3] 이후 프랑스는 중앙아프리카 제국과 보카사를 암묵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보카사 1세는 국민들을 위해 나름 선정을 펼쳤다고 볼 여지도 있는 대통령 집권기와 달리 국민들의 자유를 심각하게 탄압했고, 경제를 파탄내며 점점 국민의 신뢰를 크게 잃었으며, 폭정이 얼마나 심했는지 우간다의 이디 아민 이상으로 잔혹한 식인 소문까지 나돌았을 정도였다.[4]
1978년 10월부터 보카사 1세는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황제의 모습이 그려진 교복을 학생들에게 국민들의 반년 봉급 이상으로 비싼 가격으로 강매했는데,[5] 이 조치에 항의하는 학생들과 국민들이 1979년 1월 18~20일/4월 17~19일에 방기에서 2차례에 걸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열었다.[6]
이 두 시위에서 보카사는 황실 근위대와 자이르에서 파견된 군대[7]를 시위 진압에 투입한 후 발포를 명령하며 폭압적인 진압을 자행하여 1차 시위에서는 50~150명의 민간인들을, 2차 시위에서는 100명의 학생들을 포함한 4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을 살해했다.[8] 심지어 이 참극들이 일어난 1979년은 UN에서 세계 아동의 해라고 선포한 해이기도 했다.
이 피의 학살은 세계적으로 거센 비난을 받게 되었고, 이 광풍을 보다 못한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은 조사 위원회를 만들어 방기에 왔지만, 보카사는 자신에 대한 비난을 2년 전에 이혼한 프랑스인 아내의 복수극이라고 일컫는 등의 궤변을 일삼았지만, 오히려 조사관들은 이 아동 학살을 고발하는 보고서 발표하게 되며, 보카사를 암묵적으로 지원하던 프랑스도 특사를 보내 보카사에게 선정을 베풀라고 다그쳤으나 보카사는 그 특사를 두들겨 패고 쫓아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프랑스는 제국에 대한 지원을 사실상 완전히 끊은 후 보카사의 전임 대통령이던 다비드 다코를 지지하는 세력과 쿠데타를 계획하였고, 1979년 9월 20일에 제1해병공수연대를 방기에 투입하는 '바라쿠다 작전'를 실시하여 제정을 무너뜨린 후 다코를 다시 대통령에 앉혔다.
보카사 1세가 쫓겨난 후 방기는 축제 분위기였다고 하며, 이후 보카사는 프랑스로 망명을 갔다가 1986년에 고국에 돌아와 재판을 받게 되어[9] 1987년에 사형 판결을 받게 되나, 1988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93년에 사면되고 1996년 11월 2일에 방기에서 향년 75세로 사망한다.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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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 방기 · 우방기 강 | |
민족 | 우방기어족(반다족·바야족) · 사라족 · 풀라족 |
[1] 마찬가지로 공식적으로는 입헌군주제였던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도 가끔씩은 전제군주적인 일면을 보이기는 했으나 보카사 제국은 이들과는 비교도 안 될 뿐인 완전한 전제군주국이었다.[2] 2022년 가치로는 약 9천만 달러로, 원화로 환산하면 약 1200억 원이다.[3] 실제로 보카사의 대관식에 외국의 국가원수는 단 한 명도 오지 않았고, 영부인을 보낸 나라도 단 2개국(모리셔스, 모리타니)밖에 없었다.[4] 다만 식인 소문만큼은 무근거로 확인되었다.[5] 당시 교복의 가격은 당시 가치로만 165달러였고, 2022년 기준으로는 약 680달러(약 92만 원)이다. 참고로 2022년 기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1인당 GDP가 527달러다.[6] 참고로 문제의 교복 규정은 1차 시위 종결 후에 폐지되었기 때문에, 2차 시위의 발생은 이후에도 반정부 학생들에 대한 탄압이 그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온 것에 가깝다.[7] 심지어 이들은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용병도 아니었고, 보카사가 모부투 세세 세코 자이르 대통령에게 군대 파견 요청을 해서 온 것이었다.[8] 심지어 2차 시위 당시에 보카사 1세 황제는 감옥에 가서 수감된 어린 학생들을 직접 때려 죽였다고 한다.[9] 여담으로 이 재판은 아프리카 역사상 최초로 열린 전직 독재자에 대한 재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