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4 19:13:49

타루마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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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루마 왕국
Tarumanagara[1]
ᮒᮛᮥᮙᮔᮌᮛ[2]
358년?–669년?
수도 순다푸라(Sundapura[3], 397–6세기 중반)[4]
정치체제 군주제
언어 고대 순다어?(문어로는 사용되지 않음)
산스크리트어(문어)
종교 힌두교(초기와 중기의 주류는 비슈누파)
불교, 순다 위위탄
민족 순다인
성립 이전 부니 문화(선사 시대)
살라카 왕국(실존 여부 논란 있음)
멸망 이후 순다 왕국
갈루 왕국

1. 개요2. 살라카 왕국
2.1. 살라카 왕국에 대한 당대 기록?2.2. 살라카의 군주 목록
3. 역사4. 군주 목록

[clearfix]

1. 개요

타루마 왕국은 자바섬 서부에 있었던 고대 왕국으로, 인도네시아 군도 지역에서 보르네오섬 동부의 쿠타이 왕국과 함께 당대 문헌 기록으로 실존이 입증된 가장 오래된 두 왕국 중 하나다. 기록이 매우 단편적이고 관련 유물, 유적도 적으며 4–5세기 이후의 기록도 수백 년 동안 발견되지 않는 쿠타이 왕국과 달리, 타루마 왕국은 역사적으로 전후 연속성이 뚜렷한 명확한 실체가 있으며 관련 고고학 연구도 활발한 편이다.

2. 살라카 왕국

2–3세기 자바 서부에 존재하였다고 17세기 자바 연대기 《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Pustaka Rajya Rajya i Bhumi Nusantara) 등 후대 연대기가 주장하는 살라카 왕국(Salakanagara, 130–362)이라는 국가가 있다. 《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에 따르면 살라카 왕국은 인도에서 온 상인이 건국했다고 한다. 그러나 타루마 왕국과 달리, 살라카 왕국에 대해서는 2–3세기 당대 현지 문헌이 어떤 형식으로도 확실히 발견되지 않아 실존 국가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4세기 자바 최서부 지역에 타루마 왕국의 봉신국이 되는 살라카 왕국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높지만, 그 체제가 고전 연대기처럼 2세기에 기원하였는지를 확정하려면 적어도 고고학적 추가 조사가 필요한 실정이다.

살라카 왕국은 산하에 살라카 왕족이 다스리는 우중쿨론(Ujung Kulon)과 탄중키둘(Tanjung Kidul) 두 왕국을 봉신국으로 거느렸다고 한다.

2.1. 살라카 왕국에 대한 당대 기록?

살라카 왕국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당대 외부 기록이 약간 존재하기는 한다. 우선 중국 측 기록인 《후한서》에 따르면 기원후 131년(후한 순제 치세의 영건永建 6년)에 엽조(葉調)라는 국가에서 온 사절이 후한 조정에 당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엽조는 '야와드위파'(Yavadvipa)의 음차일 가능성이 높으며 자바 또는 수마트라 지역에 존재했던 국가로 보이지만, 엽조의 국가 체제가 어떠한 형태를 갖추었는지, 또는 엽조와 살라카 왕국이 같은 국가인지 등의 기본적인 의문들에 대해서도 기록 부족으로 확정하기 어렵다.

그리스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2세기)가 당대 지리학 지식을 종합하여 2세기 중반에 저술한 《지리학》(Γεωγραφικὴ Ὑφήγησις)에 따르면, 자바섬에 '아르기레 코라'(άργυρε χώρα, Argyre Khora) 즉 '의 마을(도시)'이라는 지역이 있었다고 한다. '살라카나가라'가 산스크리트어로 곧 '은의 나라'라는 뜻이므로 '아르기레 코라'가 살라카나가라를 의역한 명칭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직접 증거는 되지 않으며, 당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제한된 지리 지식으로 인도양이나 그 너머에 존재한다고 여겼던, 가령 대 플리니우스(23–79)가 《박물지》(Naturalis Historia, 77) 6권 23장에서 언급한 '금의 섬과 은의 섬'이 와전된 것일 수도 있다.

2.2. 살라카의 군주 목록

이하는 17세기 후반 치르본 술탄국에서 편찬된 《왕사크르타 필사본》(Naskah Wangsakerta)의 일부인 연대기 《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에 기록된 군주 목록과 재위 기간이다. 그러나 이상에 서술한 것처럼 살라카 왕국의 실체는 아직 불확실하다.
  • 데와와르만 1세(Dewawarman I, 130–168): 원래는 인도에서 온 상인이었음
  • 데와와르만 2세(Dewawarman II, 168–195): 데와와르만 1세의 장남
  • 데와와르만 3세(Dewawarman III, 195–238): 데와와르만 2세의 아들
  • 데와와르만 4세(Dewawarman IV, 238–252): 데와와르만 3세의 사위로, 우중쿨론의 영주
  • 데와와르만 5세(Dewawarman V, 252–276): 데와와르만 4세의 사위
  • (女)마히사 수라마르디니 와르만데위(Mahisa Suramardini Warmandewi, 276–289): 데와와르만 4세의 장녀이자 데와와르만 5세의 왕비
  • 데와와르만 6세(Dewawarman VI, 289–308): 데와와르만 5세의 장남
  • 데와와르만 7세(Dewawarman VII, 308–340): 데와와르만 6세의 장남
  • (女)스파티카르나와 와르만데위(Sphatikarnawa Warmandewi, 340–348): 데와와르만 7세의 장녀
  • 데와와르만 8세(Dewawarman VIII, 348–362): 데와와르만 6세의 손자이자 스파티카르나와 와르만데위의 국서[5], 독립 살라카 왕국의 마지막 왕.
  • 데와와르만 9세(Dewawarman IX, 362–?): 타루마 왕국 치하 살라카 지역의 세습 영주

3. 역사

파일:tarunamagara.png

타루마 왕국에서 당대 문헌으로 남긴 것은 비문들뿐이지만, 이 왕국의 왕사는 17세기 자바 연대기 《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를 비롯하여 자바의 여러 후대 문헌에서 언급되며 왕들의 계보와 재위 기간은 오늘날 잘 정리되어 있는 편이다. "타루마"라는 지명은 당대 기록 크본코피 제1비문(Prasasti Kebon Kopi I), 잠부 비문(Prasasti Jambu) 등에서 언급되므로 당대 현지에서 사용되었음이 입증되었다.

당대 기록으로 중국계 사료도 약간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타루마에서 528–535년과 666–669년 사이 중국으로 보낸 사신들의 기록이 있다. 타루마 왕국은 자바 서부 선사 시대 부니 문화가 인도화되어 기록 문화를 갖추고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고고학적 증거로 보면 타루마 시대의 유물은 이전 부니 문화의 유물과 연속성이 있다. 타루마 왕국은 코뿔소 뿔, 상아, 거북 등껍질 등 수렵으로 얻은 물품 외에 채광한 금·은 등 광물도 수출하며 인근 지역과 무역하였다.

이하에서 연대기를 출처로 하는 경우 출처는 《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를 비롯한 《왕사크르타 필사본》인데, 서적으로 정리된 것으로는 오늘날 구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는 해도 17세기에 정리되어 기록된 문헌인 관계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오늘날 타루마와 순다 초기에 대한 역사적 재구성은 불가피하게 이러한 근세 연대기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근세 연대기 기록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비문 기록 등 당대 기록에만 의존하는 역사학자도 많고, 근세 연대기보다 더 오래된 연대기가 추가적으로 발견된다면 타루마와 순다 초기의 역사는 상당히 크게 바뀔 수도 있다.

타루마 왕국의 왕 가운데 특히 4세기 말부터 5세기 전반에 걸쳐 재위한 3대 왕 푸르나와르만(Purnawarman, 재위 395–434)에 대한 당대 비문 기록이 풍부하여 이로부터 자바의 초기 역사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푸르나와르만의 치세는 크게 세 가지 점에서 역사적으로 특기할 만하다. 우선 투구 비문(Prasasti Tugu, 5세기 초)에는 왕이 지역의 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물길을 냈다는 내용이 있어, 당시 이미 관개 사업이 국가적으로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치당히양 비문(Prasasti Cidanghiyang, 4–5세기), 치아루튼 비문(Prasasti Ciaruteun, 5세기 초) 등에 따르면 푸르나와르만 왕은 주로 북인도에서 발달한 비슈누파 힌두교를 신봉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자바 지역을 포함한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지배층이 신봉한 힌두교는 비슈누파가 아닌 시바파였음을 고려하면 이는 이례적이다.[6] 또 《왕사크르타 필사본》을 신뢰한다면, 푸르나와르만 왕은 397년 오늘날 자카르타브카시 인근에 해당하는 지역에 새 도읍 순다푸라(Sundapura)를 건설하고 인근 지역에 398년부터 399년까지 큰 항구를 건설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당시 타루마 왕국이 단순한 도시국가 수준은 넘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확실한 물증은 없으나 연대기 기록에 바탕하면 6세기 중반 이후 타루마 왕국의 수도는 순다푸라에서 동쪽 어딘가로 이동했고, 순다푸라는 타루마 왕국 산하 순다 지방의 중심지로만 남았다는 설이 있다. 또한 옛 수도 순다푸라 지역을 중심으로 순다 지방은 점점 독립성을 띠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7] 이 설을 따르면 6세기 중반 이후 순다의 중심지는 순다푸라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6세기 중반부터 7세기 중반까지 타루마의 수도가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불명확하다.

6세기를 다루는 연대기 기록 일부는 타루마 왕국에서 중앙 집권이 약해지고 지방 영주들의 세가 강해졌음을 가리키고 있다. 순다 지역 외에도 수랴와르만(Suryawarman, 535–561)의 치세에, 수랴와르만 왕의 딸 티르타 칸차나(Tirta Kancana)와 결혼하여 부마로서 왕국 동부 갈루 지역을 다스리게 된 영주 마니크마야(Manikmaya)[8]는 오늘날 가룻(Garut) 지방에 해당하는 큰단(Kendan)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타루마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반독립적 세력을 구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대기에 따르면 마니크마야의 한 아들은 타루마 도성에서 왕과 함께 지냈으며, 나중에 타루마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또 이후 7세기 중반 재위한 왕 링가와르만(Linggawarman)의 둘째 딸 소바칸차나(Sobakancana)는 나중에 스리위자야의 왕이 되는 스리 자야나사(Dapunta Hyang Sri Jayanasa, 스리위자야 국왕 재위 671–702)와 결혼하였다.

타루마 왕국은 7세기 후반에 약화되고 멸망하며, 이후 순다 왕국과 갈루 왕국으로 분리된다. 타루마의 멸망과 분리가 7세기 후반에 일어났다는 것은 상당히 믿을 만하지만, 그 정확한 과정은 다소 불명확하다. 우선 7세기 초·중반에 마니크마야의 손자로 타루마 동부 갈루 지방을 다스리던 영주 우르티칸다윤(Wretikandayun)은 독립성을 주장하였고, 동부에 명목상으로만 타루마의 종주권을 받아들이는 갈루 왕국이 존재하였다. 갈루 왕국의 확실한 성립(반독립적 왕국 수립) 시점에 대해서는 6세기 중반 설(마니크마야의 독립)과 7세기 초·중반 설(우르티칸다윤의 독립) 두 가지가 있다. 연대기에 따르면 우르티칸다윤은 큰단에서 보다 동쪽인, 즉 순다 지방에서 보다 먼 카왈리(Kawali, 오늘날의 치아미스Ciamis)로 세력 중심지를 옮겼다. 7세기 중반까지 타루마를 통치한 링가와르만 왕은 아들이 없었고, 링가와르만 왕의 맏딸 마나시(Manasih)가 순다 지방의 영주 타루스바와(Tarusbawa)와 결혼하였는데 타루스바와가 링가와르만 왕을 계승하여 타루마 왕국은 사라지고, 7세기 중반 또는 말 순다 왕국이 자바 서부의 주류 세력으로 성립하였다.

그러나 타루스바와의 집권 과정은 순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타루스바와의 집권으로 우르티칸다윤이 이끄는 갈루 세력은 타루스바와를 타루마 전체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완전한 독립 세력이 되었다. 또한 타루마 세력 또는 순다 세력은 7세기 후반 수마트라의 스리위자야 세력과 전쟁을 벌이고 패배하여 약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686년에 기록된 방카섬의 코타카푸르 비문(Prasasti Kota Kapur, 고대 말레이어)에는 스리위자야 왕국이 자바를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적혀 있으며, 확실한 전투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686년 전후 스리위자야의 자바 서부에 대한 공격이 있었고, 스리위자야가 승리하였다고 본다. 순다의 초대 왕 타루스바와는 치세에 수도를 해안에 위치한 순다푸라에서 약간 내륙인 오늘날의 보고르 인근으로 옮겼는데, 이 천도는 스리위자야 세력의 위협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인도네시아 대학교의 고고학 연구진은 1984년 카라왕군(Karawang)의 바투자야(Batujaya)에서 고대 사원들의 유적을 발굴하였다. 바투자야 사원군 가운데 지와 사원(Candi Jiwa), 블란동안 사원(Candi Blandongan) 등은 4–5세기 타루마 시대에 건축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오늘날에는 이들 건축물의 상단부가 사라지고 기단만 남아 있다. 그래도 이 사원들은 2020년 현재 남아 있는 타루마 시대의 건축물 유적 가운데[9] 상태가 가장 좋은 편이다. 지와 사원은 건축 양식으로 볼 때 온전했던 과거에는 불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4. 군주 목록

이하는 《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 등 《왕사크르타 필사본》에 기록된 군주 목록과 재위 기간이다. 링가와르만의 재위 기간에 대해서는 628–650년 설도 있으며, 수다와르만, 하리왕사와르만, 나가자야와르만 세 왕은 일부 문헌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 자야싱아와르만(Jayasingawarman, 358–382): 굽타 제국의 공격으로 영지를 빼앗긴 인도의 브라만 성자(마하리시)로 기록된 인물로, 자바로 도피하여 살라카 왕국 데와와르만 8세의 사위가 되었다가 독립 세력을 만들고 362년 살라카 왕국을 흡수했다고 한다.
  • 다르마야와르만(Dharmayawarman, 382–395)
  • 푸르나와르만(Purnawarman, 395–434): 이상에 서술한 것처럼 타루마 왕국의 왕 가운데 가장 유명하며, 많은 비문을 남겼다. 특히 치당히양 비문과 투구 비문에서는 "푸르나와르만"이라는 명칭이 직접 언급되며, 잠부 비문(Prasasti Jambu)에서는 "타루마의 스리 푸르나와르만"이라는 구절까지 존재하므로 푸르나와르만 왕이 당대 실존 인물이었음은 확실하다. 푸르나와르만 이전 두 왕의 행적이나 실존 여부는 교차 검증할 당대 사료가 없거나 불분명하여 확실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 위스누와르만(Wisnuwarman, 434–455)
  • 인드라와르만(Indrawarman, 455–515)
  • 찬드라와르만(Candrawarman, 515–535)
  • 수랴와르만(Suryawarman, 535–561)
  • 크르타와르만(Kertawarman, 561–628): 크르타와르만은 수드라 계급에서 왕비 스탸와티(Setyawati)를 맞아들여 논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심지어 스탸와티는 수드라 계급이었을 뿐더러 왕비가 되었을 때 임신 상태였는데, 크르타와르만은 불임이었다고 한다. 크르타와르만은 왕비의 논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역시 수드라 계급에서 양자 브라자기리(Brajagiri)를 맞아들였다. 크르타와르만의 치세인 612년, 수랴와르만의 사위 마니크마야(Manikmaya)의 손자 우르티칸다윤(Wretikandayun)이 타루마의 봉신국 갈루 지방의 영주가 되었다. 우르티칸다윤은 갈루를 702년까지 통치하였다고 한다.
  • 수다와르만(Sudhawarman, 628–639): 크르타와르만의 동생.
  • 하리왕사와르만(Hariwangsawarman, 639–640): 수다와르만의 아들. 수다와르만의 인도인 왕비 소생으로 인도에서 자라면서 엄격한 사성계급의 상하 관계가 몸에 밴 인물로, 왕이 되자 수드라 출신이었던 크르타와르만의 양자 브라자기리의 왕족 작위를 박탈하고 궁성 문지기로 강등하였다. 분노한 브라자기리는 하리왕사와르만 왕을 살해하였다.
  • 나가자야와르만(Nagajayawarman, 640–666)
  • 링가와르만(Linggawarman, 666–669): 타루스바와의 순다와 우르티칸다윤의 갈루로 분리되기 이전, 타루마의 마지막 왕. 아들이 없어 사위인 타루스바와가 타루마의 왕위를 계승하였음.
  • 타루스바와(Tarusbawa, 669?–690?, 순다 국왕으로서의 재위는 723년에 종료): 타루마 왕국의 왕으로 얼마나 오래 인정받았는지 불확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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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스크리트어, 순다어, 인도네시아어[2] 순다어(순다 문자)[3] 오늘날의 자카르타브카시 인근[4] 6세기 중반부터 7세기 중반까지 타루마의 중심지는 다소 불명확하다. 상세한 내용은 본문 참조.[5] 사촌 간 결혼[6] 당대 굽타 제국의 군주는 대개 비슈누파였으며, 6세기 굽타 제국의 분열과 몰락으로 북인도에서 비슈누파 신앙이 퇴조하였다. 타루마 왕국 중기는 아직 굽타 제국이 건재하던 때였으므로 비슈누파 신봉 자체가 놀라운 일은 아니다.[7] 536년에 기록된 무아라치안튼 비문(Prasasti Muara Cianten)은 2021년 현재 완전히 해독되지 못했지만, 이것이 순다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볼 때 이때 이미 순다 지역의 영주(또는 왕)가 타루마에 대해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획득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8] 인도에서 도래해 지역에 정착한 찰란카야나(Calankayana) 가문에 속한 인물이다.[9] 타루마 시대의 유물은 종종 발굴되어 왔으며, 20세기 중반부터 타루마 시대의 건축물 유적이나 적어도 그 흔적은 조금씩 발굴되었지만 2020년 현재 아직 바투자야 사원군 정도 규모의 유적은 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