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크나우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 〈The Relief of Lucknow〉 1859년 Thomas Jones Barker 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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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포이 항쟁(Sepoy Mutiny[1], Indian Rebellion of 1857[2])은 1857년부터 1858년까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인도인 용병들인 세포이들이 인도를 간접적으로 통치하고 있던 영국에 대항해 일으킨 항쟁이다. 세포이 항쟁 이후 인도는 영국령 인도 제국으로 개편되어 영국 본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2. 배경
영국은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와 인도 제후의 연합 세력을 꺾어 벵골 지배의 길을 연 뒤 1764년 북사르 전투에서 무굴 제국 및 아와드와 연합한 벵골의 항쟁을 분쇄하고 벵골 지배를 공고화했으며 18세기 중후반 인도 남서부를 장악한 마이소르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19세기 전반 인도 북중부의 마라타 동맹, 북부의 시크 왕국 세력을 물리치면서 1세기만에 인도 반도를 평정하기에 이른다.그러나 무굴 제국의 틀과 크고 작은 지역 왕국은 아직 존속하고 있었다. 영국의 지배는 인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매우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에 대한 불만과 적대감이 인도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지역 왕국들의 구지배층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선 산업 혁명 당시 영국에서 들어오던 무수한 면직물 등으로 인하여 인도 현지 경제가 붕괴되었다. 당시 면산업의 중심지였던 다카는 15만이나 되던 인구가 3~4만으로 줄어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동인도 회사의 토지개혁 등으로 중소농민들이 땅을 잃게 되자 이들은 동인도 회사에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선교사들의 포교와 동인도 회사 행정부의 인도인에 대한 무시가 심했다. 당장 1853년 창설된 법무위원회에서는 자문위원들이 전원 영국, 유럽인들이었으며 인도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한편 동인도 회사도 인도의 군소 번왕국들을 병합했는데 동인도 회사 사장이었던 댈후지(1812~1860)는 적법한 후계자가 없다고 동인도 회사에서 판단했을 경우 영국에 종속된 번왕국의 영토를 합병할 수 있다는 규정을 내세웠다.[3][4] 이 수법에 눈뜬 채로 영지를 잃은 왕족들 중 나중에 항쟁에 가담하는 락슈미 바이도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영국의 인도 지배의 시발점인 플라시 전투 (1757년)의 100주년에 영국이 인도에서 쫓겨난다는 첨언이 민중 사이에 돌았다.
3. 세포이 용병들
인도에 주둔한 영국 육군에는 많은 인도인 용병들이 있었는데 1850년 당시 영국군 269,000명 중 영국인은 46,000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이슬람, 힌두교, 시크교 등등 다양한 종교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 용병을 가리켜 '세포이(sepoy, 페르시아어의 'sipahi'에서 유래)'라고 불렀다. 이들은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 정복을 위해 고용한 것이었다. 영국은 이들을 출신지역에 따라 3개군으로 나누어 배치시켰는데 각각 벵골군, 봄베이군, 마드라스군이었다.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처우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데 우선 연공에 따라 진급을 시키는 영국 육군의 진급 제도를 적용하다 보니 나이가 어느 정도 있던 세포이들은 상대적으로 진급에서 불이익을 겪었다. 힌두교의 상층 카스트들은 인도의 바깥 세계로 나가는 것을 꺼렸는데[5] 영국인들이 해외 원정을 요구하면서 힌두교도 세포이들과 갈등을 빚었고 영국 측에서는 이에 해외 원정을 거부하는 세포이들을 해고하도록 하는 지침으로 대응했다. 그래도 먹고 살려고 입대한지라 참고 있었는데 1856년 제정된 일반 복무 규정에 의하여 벵골군의 상당수는 해외 원정에서 제외되면서 이 부분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게다가 이들의 수가 늘어나자 동인도 회사 측은 경비를 아끼려고 세포이들의 퇴직 연금 지급을 중단했다. 특히 벵골군 세포이들은 퇴직금 부담을 줄이려고 봄베이군이나 마드라스군보다 급료까지 적게 받던 와중에 이 일이 터져 버렸다. 여기에 1856년 아와드 지역이 병합되자 세포이들은 자기 지역에서 누려 온 토지세 특권이 축소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사실상 세포이들은 토지세 특권을 이유로 세포이업을 세습 가업으로 삼고 있었다. 즉 세포이 항쟁의 배경에는 종교적 이유도 있었지만 생업적 문제와 기득권 사수 문제의 비중도 컸다. 다만 반란을 일으킬 때 '연금 내놔!' 보다는 '신앙을 위해 싸우자!' 가 멋진 명분인지라...
4. 화약 탄포 문제
영국군과 세포이 간에는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다. 1857년 3월 29일 벵골군 세포이였던 망갈 판데이(1827~1857)가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하고 지휘관의 말까지 쏘는 하극상을 벌이자 연대장은 판데이의 체포를 명령하였으나 단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세포이들이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 외에도 아그라 등 많은 도시에서 충돌이 있었는데 이는 1857년 5월 10일 델리 북쪽 미루트에서 발생한 '화약 탄포 문제'를 계기로 항쟁으로 발전했다.영화 망갈 판데이에서 묘사된 엔필드 강선 머스킷의 장전 및 사격 방법[6] |
특히 힌두교도는 쇠고기를 입에 대면 카스트를 강등당하게 되는데 벵골군 세포이들은 상층 카스트가 많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더더욱 분노했다고 한다. 본래 세포이들은 카스트에 상관없이 모집했으나 벵골군의 경우에는 플라시/북사르 전투로 인해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상층 카스트를 모집하고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힌두교 의식/방식도 허용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로 인해 벵골 세포이들은 영국 문화에 더더욱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4.1.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였나
실제 미니에 탄의 장전 및 사격 방법 | 실제 프리쳇 탄의 장전 및 사격 방법[7] |
따라서 윤활을 위해 머스킷 탄환이나 총열에 동물성 기름을 소량 도포하는 정도로 충분했고 정기적으로 총열을 청소하면서 기름칠을 해주면 되었기 때문에 동물성 기름의 사용도 크게 문제시 되지 않았다. 마침 당시 사격 교범에선 전술 하였듯 탄두의 정반대 방향을 뜯어내는 게 표준이며, 화약 삽입 후 탄두와 탄피를 통째로 넣는 방식이 표준화 된 시기었다 보니 총알에 미약하게 기름이 발라져 있어도 세포이들 입장에선 잘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하단 중앙과 우측이 남북전쟁 당시 영국에서 생산되어 미연합국에 수출된 프리쳇 탄환이며, 갈색이 산화된 동물기름이다.[9] |
남북전쟁기 엔필드 탄환 생산공정. 탄피를 기름에 찍어 마무리한다. | 남북전쟁기 미니에 탄환 생산공정. 밀랍과 양기름을 8대 1로 혼합한 용액에 탄환 뒷부분을 찍는다. |
게다가 영국 특유의 탄환 문제 및 포장법이 문제를 심화시켰는데, 영국은 1851년 도입한 미니에 탄에 그루브를 새기는 것에 부정적이었고, 결국 영국식 미니에는 탄환 압축을 하지 않은 프리쳇 탄이나 다름 없는 모양이었다. 이에따라 미니에 탄 처럼 탄두 후미에 왁스를 발라 탄을 윤활시키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고, 탄피의 불완전 연소를 보완할 겸 탄피 외부를 기름에 적셔 쉽게 윤활시키는 방법을 채택했다. 영국 특유의 방식으로 포장된 미니에 탄.[11]
5. 영국 당국의 오판
사실 영국 당국의 생각은 기존 총알과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데[12] 총신에 기름을 바르지 않아도 되고 총도 가벼워진 데다 장전하기도 쉬우니 세포이들은 분명히 좋아하겠지[13]였고 이것 때문에 세포이 전원에게 이 총을 지급하려고 했다. 진영이 자꾸만 어수선해지자 여기에 이 문제에 대해 영국인 장교들이 "그럼 너희들이 새로 만들어서 밀랍이나 양기름으로 코팅하라"고 말한 것이 결정적인 화근이었다. 즉 기름 문제는 사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나중에 영국이 조사한 결과 소기름은 확인되었으나 돼지기름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쨌든 이 사건은 인도인들의 대대적 분노를 불렀다.이에 따라 1857년 1월 27일 리처드 버치 (Richard Birch) 육군 대령은 창고에서 발행된 모든 탄약통에 기름이 없어야 하며 세포이가 원하는 혼합물을 사용하여 스스로 기름칠할 수 있도록 명령했고 카트리지 역시 입으로 물지 않고 손으로 찢을 수 있도록 장전 드릴을 수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은 오히려 많은 세포이들에게 떠돌던 소문이 사실이며 그들의 두려움도 정당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만들었으며 이전에 사용한 종이보다 광택이 있고 더 뻣뻣한 새 카트리지의 종이도 기름이 스며들었다는 추가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것은 앞선 동물기름 논란과 달리 의도치 않은 오해가 맞다. 원래 뻣뻣한 밀랍종이로 만드는 페이퍼 카트리지에 추가적인 기름 처리를 할 필요가 없었고, 그저 오염이 덜 되어서 광택이 살아있었던 것. 하지만 이미 영국군의 태도에 대한 불신이 인도인들에게 퍼진 상태였기에 오해라 할지라도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다.
6. 전개
세포이 항쟁 당시 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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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농민과 시민도 참가해 영국의 지배는 위험에 빠졌지만 영국 정부는 가만있지 않아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9월 델리의 세포이군을 격파한 다음 무굴 황제를 체포했다. 여기에 강력한 통일 지도조직을 가지지 못한 것도 커다란 한계였다. 세포이 모두가 참여한 것도 아니었으며 75개 연대 중 44개 연대나 참여한 벵골군과는 달리 봄베이군은 3개 연대만 동조했다.
마드라스군은 영국을 지지했는데 여기에는 민족적 배경이 있다. 마드라스는 타밀족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며 무굴 제국의 전성기에도 타밀족은 완전하게 복속되지 않았고 자체적으로 정복전쟁을 벌였으며 타 민족들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문화를 발달시켰다. 때문에 타밀족은 현재까지도 타 민족 특히 북인도의 아리안족들과 언어와 문자 모두 다른 걸 사용하고 사이도 영 안 좋다. 게다가 타밀족은 이때만 해도 대부분 불교 신자라서 화약을 감싼 기름종이에 어떤 기름이 쓰였는지를 신경쓰지 않았다. 한마디로 마드라스군의 세포이들은 반란 동기인 탄포 문제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는데, 반란의 주축인 벵골인들하고 사이도 안 좋으니 반란에 가담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
한편 이 항쟁에 대해 여러 힌두교 번왕국 및 시크교도들은 오히려 영국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번왕국들은 락슈미 바이나 나나 사힙처럼 동인도 회사에게 영지를 잃은 왕족들을 제외하면 항쟁에 가담할 이유가 없었고 시크교도들은 시크교를 탄압했던 '무굴 제국의 부흥'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교리상 고기를 가리지도 않아서 이들 역시 타밀족들과 마찬가지로 탄포에 무슨 기름이 사용됐든 별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 때문에 시크교도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펀자브 지방의 토후와 손을 잡을 수 있기도 했다.
이후에도 세포이 항쟁은 여러 지역에서 소모적인 활동이 있었으나 결국 영국군의 압도적인 기술력과 화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1858년 7월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이 와중에 세포이들은 포로들과 민간인들을 매우 우대했는데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도 거의 없었다고 하지만 결국 항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점점 과격해졌다. 특히 칸푸르에선 반란군 지도자 나나 사힙이 포로와 민간인들을 학살했는데 남자들은 전부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한 후[14] 아이들과 같이 정육용 칼로 토막 내 살해하고 우물에 던졌다.
당시 영국군은 저소득층이 돈을 벌고자 서로 오려던 경우가 허다해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약탈이나 강간과 같은 전쟁범죄가 워낙 흔했고 영국 여론도 이걸 비난하지 않았으며 이는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약탈,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거나 시체를 뒤져 물건을 차지하는 부하까지 가차없이 교수형시킨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는 영국에서도 괴짜로 취급받았다.[15]
반란군 포로들은 영국 육군에서 배신자를 처형하는 방식인 야포의 포구(砲口, 대포 입구)에 머리가 위치하도록 묶은 뒤 포탄을 쏴 머리를 날려 버리는 포살형(Blowing from a gun)으로 처형됐다. 어찌됐든 반란에 가담한 세포이들은 영국 육군 군인 신분인 채로 반란을 일으켰으니 집행하는 입장에선 배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7. 이후
인도 통치 개선법
제1조 지금까지 동인도 회사가 점유했거나 통치했던 영토와 그 권력을 영국 여왕 폐하가 대신한다.
제2조 여왕 폐하의 국무위원 중 한 사람은 동인도 회사가 가졌던 권력과 그 의무를 모두 가지고 실행한다.
제39조 동인도 회사의 토지, 부동산, 금전, 저당품, 상품, 재산, 그 밖의 부동산과 동산은 이 회사의 자본금과 배당액을 제외하고 폐하에게 귀속된다.
항쟁 이후 영국은 무굴 제국 황제를 폐위시켜 추방해 무굴 제국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했다. 1858년에는 인도 통치 개선법이 하원되어 동인도 회사가 영국 정부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고 해체되었기 때문에 아예 직접 통치로 전환했다. 이후 총독에 의한 정치를 지나 1877년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황제' 자리에 올라 황제를 칭하고 영국령 인도 제국이 세워졌다.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바하두르 샤 2세는 영국령 버마로 귀양을 가서 마지막 여생을 쓸쓸하게 보냈고 그의 아들들은 영국에 대항한 책임을 물어 투항한 황후 지낫 마할의 세 아들을 제외하고 전원 처형되었으며 딸들은 영국 장교의 첩이 되었다.제1조 지금까지 동인도 회사가 점유했거나 통치했던 영토와 그 권력을 영국 여왕 폐하가 대신한다.
제2조 여왕 폐하의 국무위원 중 한 사람은 동인도 회사가 가졌던 권력과 그 의무를 모두 가지고 실행한다.
제39조 동인도 회사의 토지, 부동산, 금전, 저당품, 상품, 재산, 그 밖의 부동산과 동산은 이 회사의 자본금과 배당액을 제외하고 폐하에게 귀속된다.
당시 영국은 제2차 아편전쟁도 겪었기 때문에 양쪽에서의 전쟁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정책을 수정하게 되었다. 물론 식민지를 위해서가 아닌 본국을 위한 것이었고 인도인의 처우가 나아지거나 정치적 권리가 더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세포이 항쟁을 기점으로 인도 왕공들에 대한 정책도 대대적으로 수정되어 이전까지는 동인도 회사에서 발단 문서의 법령에서 볼 수 있듯이 번왕국들을 동방식 전제정으로 비난하면서 마구 해체하고 영국의 직할령으로 흡수하고 있었지만 인도 총독 캐닝 후작은 세포이 항쟁의 빠른 확산에는 지위를 위협받은 라자들의 분노가 큰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영국에 계속 충성한 라자들의 존재가 없었으면 반란 진압이 훨씬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라자들의 지위를 보전할 것을 제안해 1858년 11월 1일 칙령을 통해 인도 왕공들의 명예와 존엄이 곧 영국의 명예와 존엄이라고 선포하고 인도의 600여 라자들을 영국왕, 즉 인도 황제의 신하로서 영국이 보호하게 하였다. 1947년까지 영국에 저항한다고 폐위된 라자는 있어도 번왕국 자체는 영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존속했다.
사건의 발단을 제공한 영국 동인도 회사의 댈후지 사장은 세포이 항쟁 1년 전인 1856년에 임기를 마치고 영국으로 귀국했는데 세포이 항쟁이 터지자마자 영국 국내에서 만악의 근원이라고 손가락질당하면서 정치 생명도 끝나고 4년 뒤인 1860년에 죽었다. 게다가 생전에 쌓은 공로로 댈후지 백작을 후작 작위로 승작하는 데 성공했으나 아들이 없어서 락슈미 바이와 같은 이유로 후작 작위는 단절당하고 백작만 겨우 사촌에게 계승했다.
문제가 된 패턴 1853 엔필드는 종전처럼 머스킷 볼을 사용하는 구식 카트리지를 쓸 수 있도록 내부 강선을 갈아 평평하게 만든 엔필드 1858 인도 패턴으로 개조되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명중률 및 위력의 저하를 불러왔으며 총열 두께가 줄어듬에 따라 폭발사고가 빈번해지게 되었다. 다만 기술적 개성과 함께 경량화된 인도식 소총은 영국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8. 명칭
세포이 반란(Sepoy Mutiny), 세포이 대반란(The Great Sepoy Mutiny), 인도 반란(The Indian Mutiny), 인도 항쟁(The Indian Uprising), 대반란(The Great Mutiny), 대항쟁(The Great Uprising), 1857년 항쟁(The Uprising of 1857), 1857년 반란(The Revolt of 1857) 등 논문이나 학술서마다 천차만별로 다르게 부르는데 한국에서는 이 사건을 영어 표현인 'Mutiny'을 그대로 해석한 세포이 '반란', '폭동'이라는 표현으로 가르쳤으나 반발이 강해지면서 1990년대 이후에는 세포이 항쟁이란 말을 많이 쓰게 되었다.그러나 세포이 항쟁은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에 기반한 독립운동과는 차이가 크다. 해당 사건이 반란·폭동인지 항쟁·의거인지 이름을 붙이는 것은 해당 사건을 보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16] 영국에서는 독립전쟁과 반란을 병기하며 인도와 같이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에서는 독립전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인도 내부에서도 독립운동으로 보며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1857년 인도의 반란(Indian Rebellion of 1857)이라고 부른다.
9. 여담
세포이 항쟁을 다룬 영화로 2005년에 인도에서 제작한 아미르 칸 주연의 'Mangal Pandey'(망갈 판데이)가 있다. 900만 달러로 제작하여 인도에서 22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면서 흥행은 그럭저럭 거둬들였다. 물론 이전에도 영화화가 몇 번 되었다.
위 세포이 항쟁과 관련된 영화에 이어 2019년에 락슈미 바이의 투쟁을 다룬 인도 영화 마니카르니카: 잔시의 여왕이 개봉되었다. 한국에서는 2019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되었으며, 걸리 보이와 더불어 그 해 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은 인도 영화였다.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에도 이와 관련된 사건들이 여럿 등장한다. 우선 장편으로는 네 사람의 서명에서 세포이 항쟁 당시의 인도의 지역 왕이 남긴 당시 가치로 50만 파운드가 넘는 어마어마한 이른바 아그라의 보물이 사건의 주요한 소재가 되며, 사건 관련자들이 세포이 항쟁과 연루된다. 또한 단편 시리즈인 셜록 홈즈의 회상록 가운데 하나인 '꼽추 사내'(The Adventure of the Crooked Man)에서도 세포이 항쟁이 줄거리에서 중요한 배경 사건으로 나온다.
2016년 12월 영국에서 새 5파운드 지폐를 발행했는데 여기에 수지가 사용되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영국에 거주하는 채식주의자 및 힌두교도 공동체[17]들 사이에 패닉이 벌어졌다. 세포이 항쟁 때처럼 전쟁이 벌어지지야 않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상황이었다.
당시 영국에서 그려진 선전물도 있는데 영국을 상징하는 사자[18]가 인도를 상징하는 벵갈호랑이에게 죽은 여자의 복수를 위해 벵갈호랑이를 공격하는 그림이다.
혹자는 세포이 항쟁을 '살인과 약탈은 하지만 돼지기름은 못 참는다' 며 돌려말했다. 용병이란 게 그런 거니까...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 인도 캠페인이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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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독립전쟁 ,1945 ~ 1946, | 인도네시아 | ||
말레이시아 비상사태 ,1948 ~ 1960, | 말레이시아 공산당 | ||
6.25 전쟁 ,1950 ~ 1953, | 북한 소련 중국 | ||
제2차 중동전쟁 ,1956, | 이집트 | ||
제1차 대구전쟁 ,1958 ~ 1961, | 아이슬란드 | ||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대치 ,1963 ~ 1966, | 인도네시아 | ||
아덴 비상사태 ,1963 ~ 1967, | NLF FLOSY | ||
베트남 전쟁 ,1964 ~ 1975, | 북베트남 | ||
제2차 대구전쟁 ,1972 ~ 1973, | 아이슬란드 | ||
제3차 대구전쟁 ,1975 ~ 1976, | 아이슬란드 | ||
포클랜드 전쟁 ,1982, | 아르헨티나 | ||
걸프 전쟁 ,1990 ~ 1991, | 이라크 쿠웨이트 공화국 | ||
보스니아 전쟁 ,1992 ~ 1995, | 유고슬라비아 | ||
코소보 전쟁 ,1999, | 유고슬라비아 | ||
시에라리온 내전 ,2000 ~ 2002, | RUF 라이베리아 | ||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 ~ 2020, | 탈레반 정권 | ||
이라크 전쟁 ,2003, | 이라크 | ||
제1차 리비아 내전 ,2011, | 리비아 | ||
이라크 내전 ,2014 ~ 2017, | ISIS | ||
시리아 내전 ,2017 ~ 현재, | 시리아 알 카에다 ISIS | ||
홍해 위기 ,2023 ~ 현재, | 최고정치위원회 | ||
번영의 수호자 작전 ,2023 ~ 현재, | 최고정치위원회 | ||
2024년 예멘 공습 ,2024 ~ 현재, | 최고정치위원회 | }}}}}}}}} |
[1] 세포이의 난[2] 1857년 인도 반란[3] 로마 제국이 브리타니아를 정복할 때 부디카가 비슷한 방법으로 영토를 빼앗겨 반란을 일으켰다.[4] 해당 규정을 요약하자면 번왕의 적법한 아들만 후계자의 자격이 있다는 내용이다. 후계자가 단절되기 딱 좋은 상황이다.[5] 힌두교의 마누 법전에는 한 번이라도 바다에 나갔다 돌아올 경우 이전의 계급과 상관없이 무조건 최하위 계급인 수드라로 강등한다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에 특히 높은 카스트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을 꺼렸다.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도 영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에 집안의 친척들이 이 마누 법전을 근거로 하면서 반대했기 때문에 이를 심각하게 고민했다.[6] 영상 16초에서 탄포를 싣고 움직이던 마차가 파손되어 탄포가 거리로 쏟아진 부분지자 거리의 개들이 쏟아진 탄포로 우르르 몰려드는데, 이는 동물 기름을 사용했다는 복선이다. 또한 원형 머스킷 볼이 들어가는건 고증오류로, 실제론 머스킷 볼 카트리지가 신규 미니에/프리쳇 카트리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보급된 탄포가 문제였다. 오히려 영상에 나온 머스킷 카트리지는 세포이 항쟁으로 이후 종교로 인한 문제를 방지하고자 인도 방면에 한정하여 재보급 된다.[7] 종이 탄피의 끝단을 찢는 장면이 생략되어 있다.[8] 플린트락 장전방식은 효율성을 위해 여러번 개정되었고, 물어 뜯는 부위도 탄피 방향 -> 탄두 방향 -> 탄피 방향 순으로 바뀌었다.[9] 특이하게도 좌측 하단의 남부맹방 생산분량은 미니에 탄환과 유사하게 탄두가 바깥을 향하며 종이로 이중포장하는 미니에 탄환 제작법을 따라 만들어졌다.[10] 원추형의 뭉툭한 부분을 총신에 넣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그 부분에 홈이 파여있기에 강선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11] 반면, 남북전쟁시기 프리쳇 탄환을 사용한 미연합국은 탄두에 왁스를 충분히 적용해 윤활시키는 대신 종이와 분리해서 장전하는 미니에 방식 탄피를 채택했고 외부에 기름이 남지 않았다.[12] 앞서 언급되었듯 기름 자체는 기존에도 있었다. 다만 페이퍼 카트리지 하단부에 듬뿍 적셔진 것 처럼 대놓고 보이지 않았고 영국인들도 딱히 문제시 되지 않은 사항을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다.[13] 실제로도 편의성 면에서는 확실히 개선된 게 맞긴 했다.[14] 다만 이 문제가 영국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영국인 관리들이 직접 현장을 방문하여 여성들의 시체를 조사해 보았으나 강간 흔적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15] 인도적인 이유도 있지만 민간인들이 적성 세력으로 돌아설 위험성 때문에 막았다. 이런 웰즐리가 있었던 이베리아 전역에서도 포르투갈은 인구 3%가 사망했다.[16] 당장 한자문화권인 한중일부터 해당 사건에 대한 명칭이 아예 다르다.[17] 힌두교도가 분노한 건 현대 사회에서는 수지가 대부분 소에게 채취되기 때문이며 채식주의자 중 비건 계열은 음식뿐만 아니라 일상용품도 동물로 된 것은 먹고 쓰지 않기 때문이다.[18] 영국에는 사자가 안 살았지만(오히려 인도에 사자와 호랑이 둘 다 산다) 영국에서는 노르만 왕조 시절인 1066년부터 사자를 상징으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