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프리카 전역 | ||
| 담바차 요새 함락 후 회의를 하고 있는 하일레 셀라시에 | ||
| 시기 | ||
| 1940년 6월 10일 ~ 1941년 11월 27일 | ||
| 장소 | ||
| 동아프리카 | ||
| 원인 | ||
| 중동에서의 추축국 위협 제거 | ||
| 교전국 | | |
| 지휘관 | | |
| 결과 | ||
|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해체 | ||
| 피해 | 4.000여명 사상 | 6.000명 사상 230,000명 포로 |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과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해방하기 위해 벌인 전투로 동아프리카 전역은 이 전쟁에서 연합군의 첫 전략적 승리였다.2. 배경
1870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교황령을 점령하여 통일된 이탈리아 왕국을 수립하였다. 이탈리아 왕국은 식민지를 만드려고 했고 그 대상 중 하나가 에티오피아였다. 하지만 1896년 아드와 전투에서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에 참패하였고 이로인해 이탈리아는 굴욕적으로 에티오피아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약 30년 뒤인 1935년 이탈리아의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는 아드와의 복수를 외치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의 결과로 이탈리아는 승리하였고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를 합쳐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수립하였다. 이로인해 나치 독일을 견제하기 위한 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이 결성한 스트레사 체제는 붕괴되었고 이탈리아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이 때 고립된 이탈리아에 접근한 나라가 나치 독일이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강철 조약을 맺으면서 서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의 편을 들었고,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이탈리아는 1940년 6월 10일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날렸다. 이탈리아는 지중해를 봉쇄하고 동아프리카 연안, 아덴만, 홍해, 수에즈 운하를 따라 있는 영국의 해상 교통로를 위험에 빠뜨렸다. 이로인해 이집트, 수에즈 운하, 프랑스령 소말릴란드,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이탈리아의 침략에 취약해졌다. 특히 1936년에 체결된 영국-이집트 조약으로 이집트에 주둔한 영국군의 규모는 크게 축소되었고, 이는 이탈리아가 북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이미 이탈리아 참모부는 1942년에 동아프리카에 위치한 영국 식민지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베니토 무솔리니는 침공 날짜를 앞당기도록 참모본부에 명령을 내렸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영국과 프랑스를 동아프리카 일대에 축출하기 원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군은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 소말릴란드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동원하여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침공하였다.
3. 전개
3.1. 이탈리아의 소말릴란드 침공
1940년 8월 3일, 이탈리아는 약 25,000명의 병력과 포병, 기갑 차량, 항공 지원을 동원하여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에 맞선 영국군은 주로 인도군과 현지에서 모집된 아프리카 병력으로 구성된 약 4,000명 규모의 수비대로,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였다. 이탈리아군은 세 방향에서 동시에 진격하며 전면 공세를 펼쳤고, 영국군은 후방 보급선의 취약성과 병력의 열세로 인해 방어선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8월 5일, 이탈리아군이 하르게이사를 점령하고 이틀 간 멈춰 재정비한 후 아사 힐즈에 있는 터그 아르간을 향해 진격을 재개했다. 아오스타 공작은 서두르라고 촉구했지만 나시 장군은 폭우로 진군하기 어렵다면서 지시를 거부했다. 이탈리아의 진격은 8월 8일에 재개되었고, 이들은 쭉쭉 진격하였다. 가장 격렬한 전투는 8월 중순 터그 아르간 고지에서 벌어졌으며, 여기서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저지했으나, 수적 우세를 앞세운 이탈리아군의 지속적인 공격 앞에 방어선이 결국 무너졌다. 이에 따라 영국군은 철수를 결정하고, 8월 19일 베르베라항을 통해 병력을 아덴으로 철수시켰다. 이틀 뒤인 8월 21일, 이탈리아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베르베라에 입성하며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 즈음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프랑스령 소말릴란드도 별 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이탈리아에 항복하였다. 윈스턴 처칠은 충분한 전투 없이 식민지를 버린 웨이벌을 비판했지만, 웨이벌은 적이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철수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항변하였다.3.2. 이탈리아의 수단 침공
이탈리아가 영국에 선전포고하자 마자 이탈리아는 앵글로-이집트 수단을 침공하였다. 이탈리아군의 주요 목표는 수단 북부와 다르푸르 지역을 점령하는 것이었으며, 그 후 하르툼까지 진격하려는 계획이었다. 이탈리아군은 일단 수단의 동쪽 국경을 넘어섰고, 주요 거점인 카살라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의 침공은 영국군의 저항에 부딪혔다. 영국군은 수단 북부 지역에서 보유하고 있던 인도군과 아프리카 군단을 동원해 수단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이탈리아군의 전진을 막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이탈리아군은 에리트레아와 소말릴란드에서부터 철수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했고, 수단으로 진격한 이탈리아군은 일정 부분 수단 동부 지역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수단 북부의 방어선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이탈리아군은 초기 전투에서 일부 승리를 거두었지만, 수단 내에 영국군의 방어선과 현지 저항군의 격렬한 반격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편 11월 5일, 이탈리아군은 갈라바트를 목표로 강력한 공격을 시작했다. 영국군은 제5인도보병사단의 일부와 가젤 부대와 함께 이탈리아군의 침공을 방어하고 있었다. 11월 5일, 이탈리아군은 갈라바트를 목표로 강력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탈리아군은 이 지역의 방어를 뚫고 수단으로 진격하려 했다. 영국군은 가젤 부대의 기동성을 활용해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교란하고, 그들의 보급선을 차단하며,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의 공격은 매우 강력했고, 영국군은 갈라바트 요새에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힘겹게 버텼다.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의 공격에 대응하여 기계화 부대와 가젤 부대의 기동성을 활용한 반격을 가했다. 결국 영국군의 맹렬한 반격을 버티지 못한 이탈리아군은 갈라바트 요새에서 철수하였고, 갈라바트 요새 전투는 영국군의 방어 성공으로 끝났다.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우고 카발레로 장군은 수단 침공 계획을 포기하고 방어에 집중할 것을 현지 사령부에 지시내렸다. 이 즈음 영국이 이탈리아를 몰아붙여서 이집트 서부를 탈환하고 리비아 동부 키레나이카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월 초부터 이탈리아가 수단 국경의 병력을 줄이고 카살라에서 철수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현지 사령부가 철수에 미적거리는 사이 영국군 특수부대 중 하나인 가젤 부대가 가쉬 강 삼각주에서 카살라 주변의 이탈리아 전방 기지들을 상대로 작전을 벌였다. 이들의 히트 앤 런 공격에 정신을 못차린 이탈리아군은 결국 큰 피해를 입고 1월 17일 카살라와 테세네이에서 후퇴하여, 카살라에서 북쪽과 남쪽 도로가 만나는 케루, 지아말 비시아, 아이코타가 형성하는 삼각지대로 이동했다. 수단 카살라에 주둔한 이탈리아군과 식민지군이 철수하자, 1941년 2월로 예정되었던 영국의 에리트레아 공세는 1월 중순에 시작되었다.
3.3. 영국의 에리트레아 침공
영국군은 아고르다트를 목표로 아프리카 군단과 인도군을 포함한 주요 부대를 동원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탈리아군은 에리트레아의 북부 방어선을 강화하려 했으나, 영국군의 기동력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가젤 부대가 후퇴하는 이탈리아군을 측면 공격하고 포위하려고 위협하자 암하라 기병대는 적어도 24시간 동안 연합군의 진격을 늦추라는 명령을 받았다. 암하라 기병대는 영국-인도군을 은밀히 우회하고 1월 21일 새벽에 후방에서 기습 돌격을 시작했다. 돌격으로 영국군에 큰 혼란이 생겼지만 기병대가 다시 돌격할 준비를 하는 동안 연합군은 재편성하여 암하라 기병대에 사격을 개시했고 기갑 부대는 그들을 포위하려고 했다. 레나토 토그니 중위는 30명의 식민지 군인으로 구성된 소대와 함께 마틸다 전차 부대를 향해 돌격했고 전원이 사망했지만 이를 통해 영국군의 진격을 늦출 수 있었다.1941년 1월 28일, 제4인도사단은 아고르다트 북쪽에 있는 이타베레 산과 카이아낙 산 방향으로 우회 진격을 시작했다. 이들 부대는 평원을 가로질러 진격했고, 어두워진 후에는 이탈리아군의 측면에 참호를 팠다. 1월 28일 밤, 이탈리아군의 두 개 대대가 코첸 산을 강화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전투는 1월 29일 내내 계속되었다. 1월 30일, 이탈리아군의 세 개 대대가 도착해 반격을 가하며, 인도 보병부대를 물리쳤다. 각 인도 대대에서는 부족한 노새로 인해 탄약, 물, 식량을 손으로 운반해야 했으며, 벵골 공병들이 이를 지원했다. 보급 작전 중, 수송 부대는 짐을 내려놓고 총검을 고정하여 진지의 공백을 메워야 했다. 이탈리아군은 코첸 산 뒤편에 포병을 배치하여, 공격자들을 후퇴시키고, 능선과 협곡에 흩어진 두 개의 인도 대대를 재조직해야 했다. 세 개의 인도 대대가 다시 공격을 감행하여 이탈리아군을 바렌투 도로 방향으로 밀어냈다. 아스카리와 암하라 기병대가 야외에서 여러 차례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이탈리아군은 케렌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2월 1일 아르고다트는 영국군에 점령되었다. 아르고다트가 점령되자 이탈리아군은 바렌투에서 후퇴하였다. 그래서 다음 날 바렌투를 점령했다.
1월 12일, 아오스타 공작은 제65보병사단을 케렌으로 파병하였다. 제4인도보병사단과 제5인도보병사단은 아고르다트에서 동쪽으로 진격하였다. 이들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군은 고지에 참호를 파고 있었다. 방어 진지는 전쟁 전에 만들어졌고 영국의 침략으로부터 아스마라와 에리트레아 고원을 지키기 위한 주요 방어 진지였다. 3월 15일, 며칠간의 폭격 후, 제4인도사단은 도로의 북쪽과 서쪽을 공격하여 좌측 측면을 점령하고 제5인도사단이 동쪽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3월 16일 동안 이탈리아군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산칠 지형에서는 제4인도사단이 제10인도보병여단의 지원을 받아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3월 17일과 18일 밤, 많은 병력을 잃은 뒤, 제4인도사단은 산칠의 경사와 브릭스 피크에서 철수했고, 제10여단은 제5인도사단에 복귀하여 재편성했다. 그 틈에 이탈리아군은 협곡 양쪽에서 계속해서 반격을 감행했으며, 전투는 절박하고, 종종 근접 전투로 이어졌다. 하지만 포위된 이탈리아군은 사기가 떨어졌고, 보급품은 바닥을 쳤다. 3월 27일 초, 53일간의 전투 끝에 케렌이 영국군이 함락되었다. 케렌에서의 패배로 이탈리아군의 사기는 크게 꺾였고, 영국이 아스마라를 향해 진격하자 별 다른 저항없이 항복하였다.
3.4. 에티오피아 해방
영국이 이탈리아령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군이 후퇴하자 에티오피아 애국자들은 셀라시에 황제의 귀환을 대비하여 수도 아디스아바바 주변에 집결했다. 영국과 영연방군의 급속한 진격과 에티오피아 애국자들의 총봉기에 대응하여 에티오피아의 이탈리아군들은 산악 요새로 후퇴했다. 이에 아오스타 공작은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해 진격해 오는 영국군에게 교전 없이 아디스아바바를 내어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디스아바바에 있던 아게노레 프랑지파니 총독은 영국군에게 아디스아바바를 내어주지만 같은 날 불명예를 느껴 자살하였다. 아디스아바바가 해방되자 5월 5일에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정식으로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하였다.아디스아바바를 내준 이탈리아군의 군 지도자인 루이지 프라토 장군은 에티오피아에서의 최후의 저항을 시작했으며, 일부 부대는 에티오피아 고산지대로 후퇴하거나 소수의 부대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와 에리트레아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에티오피아 제2의 도시인 곤다르에 모여 최후의 저항을 하려고 했다. 1941년 11월 초, 영국군의 제4인도사단과 제5인도사단은 곤다르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고, 이를 위해 에티오피아군과 협력했다. 전투 초기, 영국군은 곤다르를 포위하고 공격을 시도했지만, 이탈리아군은 도시 주변의 험난한 산악 지형을 이용해 방어를 강화하고,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기동전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탈리아군을 압박했으며, 이탈리아군에게 급여를 받지 못한 많은 아스카리가 탈영 하면서 곤다르 수비대는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결국 2주 간의 저항 끝에 구글리엘모 나시 장군은 영국군에 항복하였다. 하지만 1941년 말부터 1943년 9월까지 약 7,000명의 이탈리아군이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의 사막에서 에티오피아의 숲과 산에 이르기까지 게릴라전을 벌였다. 그들은 이집트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게릴라전에 나섰다. 하지만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추축국이 패하고 저항 지도자인 루케티 소령이 체포되자 게릴라 활동은 쇠퇴하였다. 결국 1943년 10월이 되어 마지막 게릴라인 Corrado Turchetti이 항복하면서 게릴라전도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