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6 03:46:24

캐터펄트 작전

Operation Catapult
1. 개요2. 배경
2.1. 낫질 작전2.2. 프랑스 해군 함대와 영국의 곤란2.3. 독일 해군 수상함대의 사정
3. 작전 진행4. 충돌5. 결과6. 평가
6.1. 영국을 위한 변명
7. 이후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초기에 영국 해군이 시행한 작전.[1] 1940년 7월 3일에 벌어졌다.

2. 배경

2.1. 낫질 작전

1940년, 프랑스는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완벽하게 박살나버렸다. 훗날, 그것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소위 '전격전'의 진실이 밝혀졌지만, 어쨌든 위험하기 짝이 없었던 독일 국방군의 작전 계획을 스스로 완성시켜 준 연합군은 도처에서 밀리고 밀리고 또 밀리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공군이 최선을 다해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고, 육군도 아라스 전차전이나 샤를 드 골 준장이 이끄는 제4기갑사단의 분투 등, 나름대로 선전했지만 대책없이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결국 독일은 연합군 작전 계획 상의 허점을 공략하며 38만 명에 이르는 연합군 병사들을 됭케르크에 고립시킨다.

하지만 여기서 독일군 내부에서 의견이 갈라지는데 빠르게 공격해서 포위된 연합군을 전멸시키자는 일선 지휘관(구데리안, 라인하르트)의 의견과, 육군사령부와 야전군, 집단군 사령관들(클루게, 룬드슈테트)과 국방군 최고사령부를 중심으로 한 부대간의 간격을 좁히자는 의견으로 대립하고 있었고 히틀러 또한 간격을 좁히는게 좋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기에 진격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된다.

연합군은 이 틈을 타서 됭케르크에 방어를 보강하는 한편 대대적인 철수, 즉 됭케르크 철수를 감행했다. 하지만 그건 영국의 사정이었고, 프랑스 측에서는 프랑코 총통의 은사였으며 당시 스페인 대사였던 앙리 필리프 페탱 원수가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이때 프랑코 총통은 "장군님, 가지 마세요. 저 자들은 자신들의 실책을 모두 당신에게 떠넘길 작정입니다. 여기에 계세요. 가시면 안됩니다."라고 간곡히 만류했지만, 페탱 원수는 "알고 있습니다, 장군. 하지만 이것이 제가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라 대답하고 돌아와 임시 국가 수반이 되어서 독일과의 휴전 협상을 진행하게 된다. 훗날 프랑코의 이 생각이 맞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2.2. 프랑스 해군 함대와 영국의 곤란

그런데 영국 정부를 곤란에 빠트린 또 하나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바로 거의 멀쩡하게 남아있는 프랑스 해군 함대였다. 항복 당시, 포츠머스와 플리머스 항구에 정박한 쿠르베급 전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8척, 잠수함 약간, 그리고 소해정 및 대공함정 200척은 영국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프랑스 함대도 영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있었고, 잔 다르크급, 에밀 베르탱급도 캐터펄트 작전 바로 얼마 전인 5월 말에 브레스트항에서 영국 영향권이라고 볼 수 있는 캐나다로 탈출에 성공했던 상황이었다.

문제는 프랑스 본토의 툴롱, 알제리의 오랑 등에 영국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프랑스 함정들이 다수 정박해있다는 점이었는데, 그 중에는 최신예 전함인 됭케르크급, 리슐리외급을 비롯하여 항공기 수송함 베아른, 다수의 구축함 및 순양함 등 프랑스 해군의 주력이 집결해 있었다.

스칸디나비아나르빅 등지에서 전력이 뒤떨어지는 독일 해군 해상 함대와 교전, 쌍방의 손실은 비슷했지만, HMS 글로리어스전함의 포격에 격침당한 항공모함이라는 치욕적인 기록을 남기는 등, 객관적인 전력 차를 생각한다면 엄청난 망신을 당한 영국은 이들 함정이 독일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을 매우 두려워하게 된다.

사실 이 시점에서 독일 해군은 그나마도 있던 수상함 전력을 거진 날려먹었지만 이들 함정을 접수한다면 단기간에 전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영국은 전 세계에 함대를 분산 배치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 상황에서 독일 해군이 통상파괴전을 기도한다면 아주아주 재미없는 상황이 벌어질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프랑스 해군 총사령관인 프랑수아 다를랑 원수의 행보였다.

다를랑 제독은 프랑스 전격전이 진행되면서 프랑스가 항복하더라도 프랑스 해군은 영국과 함께 싸우겠다고 했다가, 이후에는 프랑스의 함정이 독일군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겠다고 했다가, 이후에는 프랑스의 이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프랑스가 패전하고 비시정부가 성립 되는 2주간에 걸쳐 여러번 말을 바꾸는데, 문제는 다를랑 제독이 날고 기어봐야 일개 군인의 신분일 뿐 프랑스나 영국, 독일 사이의 정치적, 외교적 갈등속에서 어떤것을 전적으로 약속 할 수 있는 위치는 전혀 아니었다는 점이다.

프랑스가 철저히 육상에서 박살나는 동안 비교적 온전하던 프랑스 해군을 자신이 쥐고 흔들며 일개 군인에 불과한 인사가 영국의 수상인 처칠을 상대로 공수표를 날려댔던 것이다. 이런 월권에 가까운 언사나 비시정권하에서 자기보전, 출세욕의 의도가 명확한 다를랑의 행동거지를 정치 고단수인 처칠은 단박에 간파했고 당연히 영국 정부의 다를랑 제독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으며, 캐터펄트 작전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2.3. 독일 해군 수상함대의 사정

제3제국의 서자로 불리던 독일 해군, 특히 그 중에서도 수상함대의 상황은 아주 암울하여,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원수가 "이제 우리 해군에겐 멋지게 죽는 일만 남았다."고 자조하던 개전 당시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물론 항공모함 4척, 전함 10 척 등을 건조하는 Z 계획이라는 것을 진행하고는 있었으나 제대로 뭘 하기도 전에 전쟁이 터졌고 그라프 체펠린처럼 그나마 이전부터 진행되던 계획들 조차 유보트 등 잠수함을 제외하면 사실상 방치되게 된다.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베르사유 조약의 여파로 변변한 전함도 얼마 없었으며, 나르빅 전투에서 다수의 구축함과 순양함을 손실하여 그나마도 얼마 남지 않았던 수상함 세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2]

그래서 사실상 비스마르크급 전함 2척과 기존의 포켓전함 몇 척만이 이들의 주력 함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독일은 멀쩡한 프랑스 함대를 그냥 놓아 둘 생각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애초에 독일은 프랑스 함대에 관심이 거의 없었다. 영국이 알았다면 아주 놀랐을 노릇이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는) 독일은 프랑스의 함정을 자군에 편입시켜 쓸 계획이 없었다. 휴전 조항 8조를 보면 '프랑스 함대는 지정된 항구에 집결하여 독일 및 이탈리아 해군의 감시 하에 무장 해제를 하며, 이들 함정은 전력으로 사용하지 아니한다.'고 되어있다.

사실 전함과 순양전함 합쳐서 서너 척, 대부분 순양함과 구축함, 잠수함으로 이뤄진 독일 해군의 입장에서는 저 정도의 대규모 전력을 단시일 내에 편입한다고 해봐야 먹고 체할 가능성이 더 컸다. 거대한 전함, 그것도 타국에서 인수한 함정이라면 세세한 내부 구조와 운용방법을 파악하는데만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뿐더러 그만한 인원을 충원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해군은 선박의 건조비용, 유지비용, 기술도 엄청난 난관이지만, 그 엄청난 것 못지않게 중요한게 그걸 다루는 사람이다. 어설픈 인력으로는 평탄한 바다에 내보내기만 했는데 사고사, 혹은 함정 자체가 사고를 칠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 바다라는 곳이다. 게다가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오랫동안 해군력이 제한되면서 해군의 인재풀 자체가 박살난 상태였는데 이건 단기간에 회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독일이 진짜로 그걸 계속 지킬 가능성은 없었다.[3] 이 조약을 해독한 영국 입장에서는 독일의 약속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었고, 뮌헨 협정을 어기고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이 무장 해제를 핑계로 프랑스 함대를 뺏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훗날 북아프리카 전역이 연합군의 승리로 결론나자, 명목상으로나마 동등한 동맹국이었던 비시 프랑스마저도 굴복시키고 식민지로 써먹었다. 아무튼 프랑스는 독일의 요구 사항을 가능한 유리하게 끌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 건너편에 있어서 이런 상황을 알 수도 없었고, 밥줄이 끊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던 영국은 결국 지중해의 주력함들을 불러모아서 프랑스 함대를 인수, 혹은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이것이 바로 캐터펄트 작전이다.

3. 작전 진행

영국 해군은 제임스 서머빌 해군대장의 지휘 하에 후드, 아크 로열, 레졸루션, 밸리언트 등 항공모함 1척, 전함 3척, 순양함 2척, 구축함 11척으로 구성된 'H기동부대'를 파견하여 프랑스 함대에 대한 통제를 시도했다.

다행히 포츠머스의 프랑스 함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영국 함대에 합류했지만 북아프리카 오랑의 메르 엘 케비르 항구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이곳의 함대는 마르셀-브루노 장술(Marcel-Bruno Gensoul) 제독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그는 파리에서 벌어지는 휴전 협상의 진행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중이었다.
It is impossible for us, your comrades up to now, to allow your fine ships to fall into the power of the German enemy. We are determined to fight on until the end, and if we win, as we think we shall, we shall never forget that France was our Ally, that our interests are the same as hers, and that our common enemy is Germany. Should we conquer we solemnly declare that we shall restore the greatness and territory of France.

For this purpose we must make sure that the best ships of the French Navy are not used against us by the common foe.

In these circumstances, His Majesty’s Government have instructed me to demand that the French Fleet now at Mers el Kebir and Oran shall act in accordance with one of the following alternatives;

(a) Sail with us and continue the fight until victory against the Germans.

(b) Sail with reduced crews under our control to a British port. The reduced crews would be repatriated at the earliest moment. If either of these courses is adopted by you we will restore your ships to France at the conclusion of the war or pay full compensation if they are damaged meanwhile.

(c) Alternatively if you feel bound to stipulate that your ships should not be used against the Germans unless they break the Armistice, then sail them with us with reduced crews to some French port in the West Indies — Martinique for instance — where they can be demilitarised to our satisfaction, or perhaps be entrusted to the United States and remain safe until the end of the war, the crews being repatriated.

If you refuse these fair offers, I must with profound regret, require you to sink your ships within 6 hours. Finally, failing the above, I have the orders from His Majesty’s Government to use whatever force may be necessary to prevent your ships from falling into German hands.
한역)지금까지 당신의 전우였던 우리는, 당신의 훌륭한 함대가 적국인 독일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연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우리가 이긴다면, 우리는 프랑스가 우리 연합국의 일원이었음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이익이 곧 프랑스의 이익이며, 우리의 공통의 적은 독일입니다. 우리가 승리한다면, 우리는 프랑스의 위대함과 그 영토를 되찾아 줄 것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프랑스 해군의 함정들이 공통의 적에게 쓰여서 우리에게 저항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하에, 국왕 폐하의 내각(영국정부)은 본관(서머빌 제독)에게 현재 오랑의 메르 엘 케비르 항구에 주둔 중인 프랑스 함대에게 다음과 같은 절차를 제안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a) 우리와 함께 승리의 그 날까지 계속 독일과 싸울 것.

(b) 잔존 승조원들은 영국 항구로 회항하여 우리의 통제를 받을 것. 잔존 승조원들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프랑스 본국으로 송환될 것입니다.

위의 조건 중 하나를 선택하신다면, 우리는 전쟁 종결시 함정들을 돌려드리거나 피해를 입은 함정들에 대한 응당의 보상을 해드릴 것입니다.

(c) 만일 귀하께서, 독일이 휴전 협정을 파기하지 않는 이상 이 함정들이 독일에게 저항하는 데에 쓰이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서인도 제도에 있는 몇몇 프랑스 항구로 함대를 보내어 이들이 우리 함대의 감독 하에 무장해제를 한 다음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의해 보관을 받을것. 승조원들은 프랑스 본토로 송환될 것입니다.

귀하가 6시간 이내에 확답을 주지 않는다면, 본관은 깊은 슬픔과 후회를 안고서 귀하께 귀하의 함대를 격침시키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만일 이 모든 요청을 거부하신다면, 본관은 국왕 폐하의 내각으로부터 귀하의 함대가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지 않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을 통보드립니다.
-서머빌 제독이 장술 제독에게 보낸 통지.

서머빌 제독이야 프랑스가 독일한테 배를 넘겨주느니 차라리 자침시켜버릴 위인들임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발포를 하기 꺼리며 시한을 연장해 주었다.

문제는 장술 제독이 위의 선택지 중 3번째, 그러니까 서인도 제도에 가서 무장해제를 한다는 선택지를 상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국에게 함대를 넘기든지, 싸우든지 선택지 2개만 있다고 보고했다. 사실 서인도 제도와 북아프리카 간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당시 장술 제독은 이를 립서비스로만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장술 제독에게는 '적'에게 함대가 빼앗길 것 같으면 미국으로 도망가라는 명령이 있는 상태였는데, 물론 '적'은 독일군을 의미했지만 명령을 잘 해석하면 양측 모두 타협의 여지가 남아있는 상태였다. 장술 제독은 여기서 또 문제를 일으켰는데, 영국은 프랑스어 구사자인 아크 로열의 함장 홀랜드 대령을[4] 보냈는데, 고위 장성을 보내지 않았다고 빡쳐서 베르나르 뒤페이 대위를 보내서 대신 협상하게 했다. 원래 기한인 오후 3시로부터 45분 전에서야 겨우 홀랜드 대령을 만났는데, 발포하기 꺼렸던 서머빌 제독은 기한을 오후 5시 30분으로 연장했다. 하지만 장술 제독은 영국이 발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고, 계속 시간을 끌었다. 그래도 협상은 어느 정도 되가고 있었는데.. 모리스 르 뢱 프랑스 해군 중장이 프랑스의 지원함대가 툴롱항에서 오고있다고 라디오를 통해 알리는 사고를 친다. 영국은 프랑스 함대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 처했고 결국 홀랜드 대령은 오후 5시 25분에 메르스 엘 케비르를 떠났다.

한편 별도의 함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커닝햄 제독은 그 곳의 프랑스 함대를 이끄는 고드프루아 제독과의 협상에 성공하여 모든 프랑스 함정에서 연료를 뽑아내고 함포의 중요 부품을 들어내서 폐품으로 만들어, 사실상 무장해제를 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사실 영국령 이집트라는 공간적 한계상 저항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프랑스령 알제리에 있던 이들과는 제반조건이 달랐던 것.

4. 충돌

결국 오후 5시 54분, 약속한 시간이 지나자 영국 함대는 발포를 시작했다. 이 느닷없는 공격을 받은 프랑스 함대도 반격에 나섰고, 결국 트라팔가르 해전 이래 135년만에 처음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해상전이 벌어지게 된다. 하지만 패전 직후의 상황에서 갑자기 항구 안에 있는 상태로 무방비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메르 엘 케비르의 프랑스 함대는 다수가 격침당했다.

전함 브르타뉴는 탄약고에 직격당하여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는데, 이에 서머빌 제독은 승조원들이 대피할 수 있도록 잠시 발포중지를 명령했다. 장술 제독은 고민 끝에 모든 함정을 해상에서 무장해제하겠다고 응답했지만, 서머빌 제독은 프랑스가 함선을 당장 자침하지 않으면 발포를 이어가겠다고 답신했다.

스트라스부르는 브로타뉴의 폭발으로 일어난 연기를 이용하여 항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를 뒤늦게 발견한 후드와 여러 호위함들이 쫓아갔지만, 작은 어뢰정인 Louis Frossard이 혼자서 돌격하여 어뢰 2발을 발사했다. 이를 회피하기 위하여 후드를 위시한 영국함대 함선들은 변침해야 했고, 이 용맹한 분전 덕분에 스트라스부르는 도망칠 수 있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Louis Frossard는 피해 없이 항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외의 피해는 컸다. 전함만 따져봐도 브르타뉴가 격침당하고 됭케르크와 프로방스는 대파되어 해저에 처박히고 말았다. 순양전함 스트라스부르를 위시한 몇 척의 순양함만이 간신히 탈출하여 툴롱으로 향했다. 카사블랑카에 정박 중이던 장 바르는 다행히 화를 모면할 수 있었고, 7월 8일에는 또 다른 항공모함 HMS 허미즈에서 이함한 페어리 소드피시 뇌격기 부대와 어뢰정다카르에 정박 중이던 리슐리외에 공격을 가하여 대파시켰다. 서인도 제도의 함정들은 미국의 협력을 얻어서 무력화시켰다. 임무를 끝낸 H기동부대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5. 결과

조지 6세 : "그대는... 오늘 어째서 그렇게... 기분이 좋은 것이오?"
앤서니 이든 : "그 말씀대로입니다, 폐하. 우리한테는 더이상 떨어져나갈 친구들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홀로 남았습니다."
영국 국민들은 '간만에 정부가 한 건을 해냈다'면서 열광했지만, 정부의 반응은 이렇듯 암울했다. 그리고 이든의 예측대로, 프랑스의 반응은 아쉬울 때 손 벌릴 때는 언제고 이젠 우리 등 뒤에 칼을 꽂냐였다. 됭케르크 철수작전과 함께 영국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던 비시 정부는 단박에 영국과의 국교를 단절했으며, 비시 프랑스 군대에는 반(反) 영국 정서가 퍼져나갔다.[5]

그 결과, 1940년 다카르 앞바다에서는 리슐리외를 위시한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함대 및 드 골의 공격을 방어했으며, 1942년 횃불 작전 때는 카사블랑카에 정박해있던 장 바르가 미완성 상태로 주포도 1개 주포탑만 완성돼서 절반인 4문만 보유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격렬하게 저항하여 미국 전함 USS 매사추세츠와의 포격전 끝에 대파당했고, 연합군은 한동안 비시 프랑스 군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야 했다.[6]

물론 리슐리외는 미국에서 재개장을 받고 자유 프랑스 해군 소속으로 영국 함대와 함께 작전하는 등의 기록이 있지만, 보통 이런 경우는 비시 프랑스로부터 전투를 통해 배를 빼앗거나 항복시킨 후의 이야기라는 것이 문제다.이 때문에 횃불 작전 당시 미국 외교관 로버트 H.머피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에게 이 사건을 들면서 프랑스는 순순히 협력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는데, 과연 그 말대로여서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에게 "미국인도 영국놈들하고 같은 족속이구만!"하고 까였다.

6. 평가

어떤 역사가들은 이러한 영국의 행동은 배신 행위나 마찬가지고, 장 술 제독이 응답 시간 내에 무장해제를 하겠다고 응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급하게 행동하여 자유 프랑스군으로 편입되기 위해 퇴각하던 예비 전력이 될지도 모르는 다수의 무방비 상태였던 프랑스 전함과 순양함들을 아군이었던 승조원들과 함께 순식간에 기습공격으로 침몰시키고 쓸데없이 유럽 본토에서 반영 감정을 증폭시켰다고 평가한다.

반면 다른 역사가들은 이후의 전쟁 판도를 보아 타당한 결정이라고 평가한다. 함대를 전략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현상유지에 급급하던 프랑스 제독들의 잘못도 없다고 볼 수 없다.

6.1. 영국을 위한 변명

캐터펄트 작전의 타당성과 당위성을 논하기에 앞서, 영국의 상황에 대한 고려 또한 필요하다. 1940년 7월 3일이면 영국 본토 항공전이 불과 일주일 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시 영국이 직면한 상황을 되짚어보면 독일의 침략은 가시권에 있었고, 여전히 과대 평가되던 루프트바페는 영국 본토에 대한 공습 준비를 강화하고 있었다. 영국은 대서양과 지중해에서 해상 통로를 유지하고, 본토를 방어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안고 있었으며, 그러한 와중에 유일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던 해군력마저 독일군이 프랑스의 함대를 인수한다면 상실하게 될 판이었다.

심리적으로는, 나치 독일의 군사적 성공과 그 속도는 전 유럽에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영국인들은 독일이 언제든지 영불해협을 건너 침략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이 느꼈던 이 공포와 긴장은 영국인들이 캐터펄트 작전을 지지하거나 이해하게 만드는 중요한 심리적 요소였다.

정치적인 고려 또한 필요하다. 캐터펄트 작전의 당위성은 영국이 독일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당시 영국은 전 세계의 반파시스트 세력의 중심으로서, 나치 독일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야했다.

따라서 영국의 결정은 당대의 극한적인 위기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인들이 느꼈던 두려움과 절박함, 그리고 나치 독일의 위협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박감은 캐터펄트 작전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다. 영국은 이 공격을 통해 독일의 해군력 강화 가능성을 차단함과 동시에, 자신들이 전쟁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최소한의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7]

7. 이후

나머지 함대는 프랑스가 함락되고 2년 뒤 독일이 비시 프랑스와의 협약을 어기고 함대를 강탈하려고 하자 툴롱 항에서 자침한다. 툴롱 프랑스 함대 자침 문서 참고.


[1] 자료출처 - <제2차 세계대전 해전사. 이영우, 도서출판 공욱 1999 / <세계의 전함 1939-1945, 밀리터리 프레임, 2011, 타임 앤 라이프 2차대전사. '독일 전격전'[2] 그 중에는 이미 구식이었던 전함 도이칠란트도 포함되어 있었다.[3] 나치 독일은 애시당초 국가 간의 조약이나 국제법도 어기고 막무가내로 전쟁을 시작했다. 실제로 횃불 작전 이후 독일은 프랑스 함대를 접수하려고 시도하였고 프랑스는 침략자들에게 함대를 넘겨줄 바에야 자침시키는 것을 선택한다.[4]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 전사한 홀랜드 제독과는 다른 사람이다.[5] 뿐만 아니라 1940년 7월이면 프랑스의 빠른 전멸로 부터 별로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인 만큼, 독일군의 전력은 실제보다 크게 부풀려져 있었다. 요컨대 영국은, 답도 없는 싸움을 위해서 독일 수상함대는 냅두고 애먼 전 동맹국 함대나 쳐부시고 다니는 천하의 빌어먹을 놈들로 비춰졌다는 얘기다.[6] 사실 완강하다고 해봐야 아프리카 주둔 프랑스군은 횃불 작전이 개시된지 얼마 되지 않아 대부분 항복해버렸다. 항전파와 투항파가 갈려 있기도 했거니와, 영국에는 이를 갈아도 미국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재빠르게 전향하여 독일군과 싸운 것은 덤. 끝까지 항전을 이어나간 자유 프랑스군 정도를 제외하면 낮은 사기는 2차 대전 프랑스군의 고질적인 문제였다.[7] 이러한 관점은 스코틀랜드 애든버러에 위치한 Lamancha Productions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Battlefield>에서 두드러진다. 해당 작전을 다루는 회차인 Battle of Mediterranean에서는, 해당 사건을 통해 영국은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동맹국과의 갈등도 불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줬고 이것이 미국이 랜드리스를 결정하는데에도 일부 기여했다고 묘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