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몬테 카시노 전투 The Battle of Monte Cassin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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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 전선의 일부 | ||
| 날짜 | ||
| 1944년 1월 17일 ~ 5월 18일 | ||
| 장소 | ||
| 이탈리아 왕국, 몬테 카시노 |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
| 지휘관 | |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 프리들린 폰 센게르 |
| 결과 | ||
| 연합군의 승리 | ||
| 영향 | ||
| 몬테카시노 수도원 손실 | ||
| 피해규모 | ||
| 사상자 5만5천 명 | 사상자 ~2만 명[1] | |
| 민간인 2천 명 사망 | ||
1. 개요
1944년의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중 하나. 독일 국방군 공군 공수부대 팔시름예거가 카시노 산을 방어 거점으로 삼고 미국·영국·자유 프랑스·폴란드 망명 정부·오스트레일리아·브라질·벨기에·캐나다 육군 및 공군으로 이뤄진 연합군[2]과 맞선 방어전이었다. 또한 공동교전국으로 연합국에 전향한 이탈리아 왕국군과 현지 레시스텐차도 연합군을 돕는 데 가세했다.독일 공수부대의 용맹함과 나라 잃은 설움을 불타는 복수심으로 푼 폴란드 망명 정부의 자유 폴란드군의 기상을 널리 알린 전투이다.
2.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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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white> 폭격 이전 온전했던 몬테카시노 수도원 모습 |
독일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패배한 이후 연합군이 남쪽 시칠리아를 시작으로 이탈리아를 공격해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에 따라 1943년 7월 제1강하기갑사단 헤르만 괴링과 제 1 공수사단으로 구성된 제1 낙하산 군단을 시작으로 전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1943년 7월 10일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작전의 성공을 기점으로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9월엔 연합군에 상륙을 허용하자 독일군은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를 포기하되 로마는 계속 수중에 넣은 상태로 유지하고자 지연전을 수행하며 서서히 후퇴하고, 연합군은 이를 추격하는 형국이었다. 1943년 11월 경 독일군은 서쪽의 가릴리아노 강 하류부터 몬테카시노를 가로질러 아드리아해로 이어지는 '구스타프 라인(혹은 윈터 라인)'이라 불리는 방어선에 도달했다. 당초 연합군은 12월까지 로마를 탈환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독일군의 지연전과 이탈리아 산악지형에 가로막혀 11월 5일 공세를 전면 중단했다. 잘 짜인 방어선에 들이박기만 반복하고 있던 연합군은 독일군 방어선을 무력화 시키기 위해 안치오 상륙작전을 계획했다. 연합군은 안치오 상륙작전으로 독일군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동시에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로 결심했고 상륙작전 5일전인 1944년 1월 17일 가릴리아노 강과 몬테 카시노 수도원 일대에 대한 공세를 계획했다.
몬테카시노산에는 가톨릭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방어하면 연합군의 진격을 능히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수도원은 중세 시대에 지어진 유서 깊은 수도원으로[3] 가치 있는 고문서들도 많은 중요한 문화유산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전선 총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 공군원수는 부대에 "수도원에 손 끝 하나라도 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1943년 12월, 연합군 지휘부에도 방침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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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white> 몬테카시노 수도원일대에 대한 연합군 1차 공격 계획도[4] |
| <rowcolor=white> 연합군의 몬테카시노 수도원 폭격을 전쟁범죄라고 비난하는 1944년 2월 23일자 독일 주간 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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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white>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폭격하는 미 육군 항공대 B-17 |
이렇게 무리하게 폭격을 감행한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이탈리아 전선은 독일군이 이탈리아의 험악한 지형을 끼고 방어를 폈는데, 이를 억지로 뚫고 지나가는 양상이었기 때문에 연합군 입장에서는 진격속도가 느린 데 비해 보병의 손해가 엄청났다. 몬테카시노 전투에 참전한 어느 육군 대령은 "이런 험악한 곳에서 연이은 혈전에 지친 병사들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리고 김영옥 미합중국 육군 보병 대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 당시 수도원 안에는 수도자들과 부상당하거나 피난온 민간인도 다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케셀링 장군이 수도원을 방어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예하 부대에 명령을 내렸고, 자신들이 수도원에는 부대를 전혀 배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연합군에 통보하기까지 했다.
대수도원장(아빠스)은 미군이 뿌린 폭격예고 삐라를 보고 부랴부랴 피난행렬을 꾸렸지만, 행정상의 착오인지 조급증이 난 미군의 무리한 작전개시인지 몰라도 삐라에 예고된 날보다 일찍이 미 육군 항공대의 B-17이 폭격을 개시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이탈리아 민간인들이 폭격에 희생되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지 율리우스 슐레겔 공수중령이 폭격을 피하기 위해 수도원 지하로 옮겨놓은 중세 필사본 서적 등 수도원의 1만 2천 권에 달하는 장서들과 미술품들을 모두 바티칸의 안전한 곳으로 옮겨두었기 때문에 문화재 소실은 방지할 수 있었다. 미국 정부의 입장은 전후 조금씩 정정되었는데, 1969년 최종적으로 확정된 미 육군 공식 문서는 '폭격 당시 수도원은 독일군에게 점거되어 있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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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white> 수도원 폐허 속 MG42를 겨누고 있는 독일군 공수부대원들 독일군은 사진과 같이 폐허가 된 수도원 건물을 요새화하여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
-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파괴된 게 온전히 연합군의 탓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2020년 비오 12세의 보관고에서 발견된 문서에 의하면 양군은 1943년 10월에 수도원이 전투에 휘말리지 않게 하겠다며 중립지대를 설정했으나, 1943년 12월 23일 히틀러의 직접 지시로 몬테카시노에 독일군의 방어 진지가 구축되기 시작했다는 것. 1944년 1월부터는 아예 중립지대 표지판까지 철거됐다. 그래서 중립지대의 수도원 벽 아래에서 독일군은 잘만 군사행동을 했고, 포탄과 전차를 둔 채 포격까지 행하고 있었다.
물론 케셀링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수도원 안에는 독일군이 없었기 때문. 하지만 수도원 안에 들어가지만 않았을 뿐이지, 수도원 담장 밖에서는 잘만 군사행동을 했다. 심지어 야간에는 아예 수도원 벽을 엄폐물 삼아 탱크로 포격까지 쏴대었으니 현장의 연합군이 민감해지기엔 충분했다. 물론 그렇다고 민간인이 있는 곳까지 폭격한 연합군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독일 역시도 이 사건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순 없다. 어쨋든 케셀링이 가치가 높은 수도원을 보호한 행동은 연합군 사이에서 매우 높이 평가되었고 훗날 케셀링은 전범재판에서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할 당시 민간인과 파르티잔에 대한 학살을 벌인 혐의가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연합군 장성들은 문화재를 보호한 케셀링에게 선처를 베풀것을 탄원하며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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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white> 몬테카시노 수도원 일대에 대한 연합군 2차 공격 계획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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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white>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대한 연합군의 3차 공격 계획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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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white> 1944년 3월 24일 제 9구르카보병연대 1대대 전투일지 |
Lt. Mallinson 1/4 Essex Regiment arrived at Battalion Headquarters with verbal orders from Brigadier Bateman to the effect that the enemy was all around our positions, in apparently quite considerable strength; that the New Zealanders had been continuously attacking in Cassino for 9 days and were now played out; that the rest of 4 Indian Division were not in any position or condition to make further attacks. There were therefore two courses open to the Army Commander; (a) he would put in fresh formations or (b) he would withdraw 1/9 Gurkha Rifles and call the battle off.
제 4 에섹스 연대 1대대의 말린슨 중위가 대대 본부에 도착하여 베이트먼 준장[11]으로부터 구두 명령을 전해왔다. 그 내용은 적이 우리 진지를 사방에서, 상당히 강한 병력으로 포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뉴질랜드군은 카시노에서 9일 동안 계속 공격을 감행했으나 이제 완전히 소진되었고, 인도 제4사단의 나머지 부대들 역시 더 이상 공격할 수 있는 위치나 상태가 아니었다. 따라서 사령관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아 있었다. (a) 새로운 부대를 투입하거나, (b) 제 9구르카 보병연대 1대대를 철수시키고 전투를 중지시키는 것이었다.
1944년 3월 24일 435고지(행맨 힐)에 고립되어 있던 제 9구르카 보병연대 1대대 전투일지 중
9일에 걸친 격렬한 전투로 제4 인도사단은 3000명의 병력을, 제 2 뉴질랜드 사단은 1600명의 병력을 상실했고 3월 26일 뉴질랜드 군단은 아예 해체되어 13군단으로 편입되었다.[12] 이후 작전 구역은 영국군 78사단과 1근위여단이[13] 인계받았다.[14]제 4 에섹스 연대 1대대의 말린슨 중위가 대대 본부에 도착하여 베이트먼 준장[11]으로부터 구두 명령을 전해왔다. 그 내용은 적이 우리 진지를 사방에서, 상당히 강한 병력으로 포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뉴질랜드군은 카시노에서 9일 동안 계속 공격을 감행했으나 이제 완전히 소진되었고, 인도 제4사단의 나머지 부대들 역시 더 이상 공격할 수 있는 위치나 상태가 아니었다. 따라서 사령관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아 있었다. (a) 새로운 부대를 투입하거나, (b) 제 9구르카 보병연대 1대대를 철수시키고 전투를 중지시키는 것이었다.
1944년 3월 24일 435고지(행맨 힐)에 고립되어 있던 제 9구르카 보병연대 1대대 전투일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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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white> 1944년 5월 연합군의 다이어뎀 작전 계획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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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white> 1944년 5월 자유 폴란드 2군단 작전 계획도 |
우리는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군대였고 그 점은 이미 우리의 적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군은 모든 점에서 이성을 상실한듯 보였다. 그들은 흡사 이 전투에서 전원이 몰살당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부상을 입은 어느 폴란드군 부상병이 우리가 다가가자 마치 야수같은 괴성을 질러대며 마구 돌을 집어던지며 계속해서 저항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하반신 전체는 이미 수류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뭉그러져 있었음에도 말이다.
5월 12일 폴란드군은 몬테카시노 수도원 북쪽 고지를 크게 우회 공격하기 시작했다. 폴란드군 제2 카르파티아 소총병 대대는 593고지를 점령하고 569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으나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격퇴당했다. 폴란드군은 1대대와 3대대를 추가투입해 공격을 이어나갔지만 모조리 격퇴당했고 오히려 독일군은 탈취된 593고지에 대해 격렬한 공세를 펼쳤다.폴란드군 제3 카르파티아 소총여단은 5월 12일 하루에만 700명이 넘는 병사들을 잃었고 5월 13일 593고지를 다시 독일군에게 내주어야 했다. 한편 3카르파티아 여단 북쪽에선 산탄젤로산과 산탄젤로 산 남쪽 575고지에 대해 폴란드군 제13, 14, 15 빌노 소총병 대대가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독일군 1공수사단 4낙하산 연대는 이를 모조리 격퇴했고 고작 800명의 병력으로 13일 폴란드 2군단이 공격을 중지할때까지 폴란드군 2개 사단의 공격을 방어해냈다[15]한편 몬테카시노 수도원 측면의 연합군 공세는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을 맞았지만 성과를 내고 있었다. 프랑스 원정군단(FEC)에 소속된, 모로코의 구미에 산악병들은 고향이 험한 산악지형이라 몬테카시노 산 정도를 등반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5월 14일 모로코 산악병들은 독일군이 험난해 공격해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 리리 계곡 측면을 등반해 영국군 13군단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15일엔 리리 계곡을 통과한 영국군 78보병사단은 수도원을 포위하기 위한 측면 기동을 시작했다. 5월 16일 오후 공격을 재개한 폴란드군은 독일군과 백병전까지 동반한 격렬한 전투 끝에 다음날인 17일 수도원 북쪽 산탄젤로 산과 593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한때 독일군이 산 안젤로산을 따라 가한 역습으로 방어선이 무너질뻔했지만 16 르보프 소총대대는 독일군을 격퇴했고 산 안젤로산으로부터 593고지까지 이어지는 포위망을 형성했다. 폴란드군의 분전과 연합군의 측면 공세로 수도원이 포위될 것이 확실해지자 케셀링은 같은 날 수도원 포기 명령을 내렸고, 1공수사단이 야음을 틈타 철수함으로써 몬테카시노 전투는 막을 내렸다. 케셀링의 명령에 따라 제 1 공수사단이 철수를 완료한 5월 18일 오전, 부상이 심각해 동행할 수 없었던 제 1 공수사단 생존자 30여명이 백기를 계양했고, 오전 9시 50분 수많은 전사자를 내었던 폴란드군이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올라 폴란드 국기를 계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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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color=white> 1944년 5월 18일 몬테카시노 수도원 폐허에 올라 나팔을 부는 자유 폴란드 2군단 에밀 체흐(Emil Czech) 상사 |
지금 몬테카시노산에 재건된 수도원에는 몬테카시노 전투를 비롯한 이탈리아 전선에서 전사한 양측 장병들의 묘비가 세워져 전사자들의 넋을 달랜다. 다만 묘지는 국가별로 나뉘어져있는데 수도원에 가장 먼저 올라 깃발을 계양한 폴란드군의 묘원이 수도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고 서쪽에는 영연방 국가의 전사자 묘원이 마련되어 있다. 미군은 로마-안치오 미군 묘지에 묻혔고 프랑스군의 묘원은 수도원 북쪽 15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방어 작전을 펼친 독일군의 묘지는 북쪽 3.2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 전투에서 '몬테카시노의 녹색 악마들'이라는, 독일 공수부대의 별명이 하나 추가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의 전용 피복인 녹색 계열 배색의 위장무늬 덧옷과, 역시 일반 공군 병력들에겐 지급되지 않은 녹색 강하복 하의 덕에 멀리서 보면 이들이 녹색 덩어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 이견이 있는데 드레스덴 군사사박물관의 마그누스 팔 연구원에 따르면 이는 별명이 붙은 가설 중 하나일 뿐이며 정확한 기원은 불확실하다고 한다. 공수부대원들이 자체적으로 괴벨스의 연설이나 독일 기갑부대가 자주 쓰던 "악마" 별명에 영감을 얻어 쓰다가 미군이 다시 그렇게 불러주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3. 연합군 전투서열
3.1. 1차 전투
이탈리아 연합군 해럴드 알렉산더 대장미국 제5군 마크 클라크 중장
- 영국 제10군단(좌익) 리처드 매크리리 중장
- 군단 예비대
- 제23기갑여단 제럴드 아크라이트 준장
- 제2특전여단
- 제2왕립포병여단
- 미국 제2군단(중앙) 제프리 키스 소장
- 제1기갑사단 어니스트 N. 하먼 소장
- 제34보병사단 찰스 W. 라이더 소장
- 제36보병사단 프레드 L. 워커 소장
- 제1특전단[18]
- 제1차량화여단(이탈리아) 디센조 다파노 준장
- 프랑스원정군단 알퐁스 쥐앵 대장
- 제3알제리보병사단
- 제2모로코보병사단
- 제45보병사단 윌리엄 W. 이글스 소장 (야전군 예비대)
3.2. 4차 전투
이탈리아 연합군 해롤드 알렉산더 대장미국 제5군 마크 클라크 중장
- 미국 제6군단(안치오) 루시안 트러스콧 소장
- 미국 제3보병사단 존 W. 오대니얼 준장(~5월 25일)
- 영국 제1보병사단 존 호크스워스 소장
- 미국 제45보병사단 윌리엄 W. 이글스 소장
- 미국 제1기갑사단 어니스트 N. 하먼 소장
- 미국 제34보병사단 찰스 W. 라이더 소장
- 미국 제36보병사단 프레드 L. 워커 소장(1944년 5월 18일부터)
- 영국 제5보병사단 필립 그렉슨-엘리스 소장
- 제1특전단 로버트 T. 프레더릭 준장
- 미국 제2군단 제프리 키스 소장
- 프랑스원정군단 알퐁스 쥐앵 대장
- 제4군단(야전군 예비대)
영국 제8군 올리버 리스 중장
- 영국 제13군단
- 제1캐나다군단
- 폴란드 제2군단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 영국 제10군단 버나드 프레이버그 중장
- 제6남아프리카기갑사단(야전군 예비대)
4. 기타
결국 몬테카시노를 점령한 것은 자유 폴란드군이었다. 물론 엄청난 서방 연합군의 포위공격이 바탕이 된 것이었지만. 사상자 수만도 4,000명을 넘어가는 등 가장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폴란드군 소속 제4소총대대의 경우 대대장이 단 하루만에 2명이 전사했다. 5월 17일에 카롤 판슬라우 중령이 전사하고, 유제프 스토예프스키-리브친스키 소령이 지휘권을 인계받았는데 같은 날 전사한 것이다. 그 외에도 13빌노 소총대대장인 브와디스와프 카민스키 중령이 같은 날 산 안젤로 고지로의 공격을 이끌다가 전사했다. 전사자 대부분은 인근 언덕에 묻혔고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이탈리아의 녹색 악마였던 독일 정예와, 각종 우주방어라인을 분쇄하여 질주한 미군의 전과도 눈부시지만, 잃어버린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폴란드군도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진정한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몬테카시노의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은 전쟁이 끝난 후 복구되었는데, 이 수도원은 이로써 총 5번 파괴되고 5번 재건되었다. 첫 번째는 581년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한 랑고바르드족에 의해, 2번째는 844년 시칠리아 섬 정복 과정에서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약탈하던 아글라브 왕조에 의해, 3번째는 1349년 수도원을 덮친 지진에 의해, 4번째는 1799년 이탈리아로 원정을 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5번째가 바로 몬테카시노 전투였다.
현재 수도원의 청동제 정문 하단부 좌측에는 수도원을 처음으로 파괴한 랑고바르드족의 얼굴이, 우측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수도원을 파괴한 연합군 폭격을 뜻하는 군용 철모와 폭탄이 새겨져 있다.
이 전투 당시 이곳에는 크루프 K5라는 그나마 실용적인 열차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K5는 일반 철로에도 쓸 수 있어서 한동안 갈긴 뒤 터널 등으로 도망치는 방법으로 나름 활약했지만 후퇴할 때 폐기되었으며, 잔해는 연합군이 확보했다.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저자였던 월터 M. 밀러 주니어는 이 베네딕토회 수도원 폭격에 승무원으로 참여했다가 죄책감에 시달려 1996년에 자살했다. 참고로 저 소설도 인류의 문화유산을 수납한 교회에 대한 것이다.
HBO 드라마<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가니어의 형이 이 전투에서 죽은 것으로 언급되었다.
그 외에도 폴란드군 소속으로 참전한 불곰 보이텍이 유명하다. 한 폴란드군이 이란에서 구입해 그의 손에서 길러진 시리아 불곰 보이텍(Wojtek)은 자유 폴란드군 2군단 포병사단 22탄약보급중대 소속으로 참전했으며 상병(Kapral) 계급까지 받았다. 어릴 때부터 인간들의 손에 길러진 탓에 야생적인 본능은 많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과 레슬링을 하기도 했다. 격렬했던 몬테카시노 전투에서는 포탄 운반을 담당했는데, 이 모습이 22탄약중대의 부대마크가 되었으며, 장병들의 인기를 끌었다. 또한 운반중에 탄약을 단 1발도 떨어트리지 않았다고 하며, 부대 안에 잠입한 스파이를 잡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폴란드는 공산화되었기 때문에 자유 폴란드군 소속이었던 보이텍은 폴란드로 가지 못했고[20],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동물원에서 살다가 1947년 에든버러의 동물원으로 옮겨진 뒤 1962년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맥주와 담배를 즐겼고, 동물원에 옛 전우들이 보러오면 담배를 달라는 제스쳐를 취했다고 한다.
스웨덴의 록 밴드인 Sabaton의 노래 <Union>의 배경이 되었다.
폴란드어 위키엔 폴란드군이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제1강하기갑사단 헤르만 괴링과 교전했다고 적혀있지만 명백한 오류로 헤르만 괴링사단은 다이어뎀 작전 당시 로마 인근 네투노에 위치해있었다.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의붓아들 하랄트 크반트가 독일군 제1 공수사단 소속으로 이 전투에 참여했다. 1공수사단의 전신 7항공사단의 무덤이었던 크레타 섬 전투에서 살아남은 크반트는 1944년 2월 경 병에 걸려 뮌헨으로 후송되었으나 의붓 아버지 괴벨스가 전선으로 나가라고 닥달한 덕에 4월 경 전선으로 보내졌고 살아남아 9월 볼로냐에서 영국군에게 사로잡혔다.
Er schildert seinen Flug von Ainring nach Berlin, der meiner Ansicht nach ein zu großes Risiko, zumal im gegenwärtigen Zeitpunkt, gewesen ist. [. . .] Er erkundigt sich eingehend nach Harald und freut sich, daß er wieder in Cassino an der Front steht.
“총통께서는 아인링에서 베를린까지의 비행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내 생각에는 특히 현 시점에서는 지나치게 큰 위험이었다. […] 그는 하랄트의 안부를 자세히 물었고, 하랄트가 다시 카시노 전선에 서게 된 것을 기뻐했다.”
1944년 4월 27일자 요제프 괴벨스 일기 중
“총통께서는 아인링에서 베를린까지의 비행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내 생각에는 특히 현 시점에서는 지나치게 큰 위험이었다. […] 그는 하랄트의 안부를 자세히 물었고, 하랄트가 다시 카시노 전선에 서게 된 것을 기뻐했다.”
1944년 4월 27일자 요제프 괴벨스 일기 중
5. 전쟁범죄
몬테카시노 전투 이후 자유 프랑스군 사령관 알퐁스 쥐앵 장군이 이끄는 군단이 인근 지역인 치오치아리아(Ciociaria)에서 50시간 동안 약탈과 강간을 자행했다. 이때 프랑스 육군 소속의 모로코 식민지인 출신의 구미에 병사들이 총 2,000여 명에 달하는 이탈리아 여성들을 강간했는데, 피해자들 중에는 [age(1944-01-01)]년도 넘은 아직까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여성이 있다고 한다. 참고로 주민이 2,500명에 불과했던 도시인 에스페리아(Esperia)에서만 700명이 강간당했다고 보고되었다. 쥐앵 장군부터가 승전하면 그 댓가로 시간을 줄테니, 그동안 마음껏 약탈과 학살을 저지르라고 허락했기에 마음대로 벌인 일이었다.
그 외에 남성 800여 명을 살해했으며, 마을을 불태우고, 재물들은 모두 약탈했다. 이탈리아 영화 <두 여자>(Two Women, 1960)가 이 참혹한 사건 당시 강간당한 모녀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몬테카시노에서 발생한 강간 피해자들을 이탈리아에서는 모로코인들의 짓(Marocchinate)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어지간히 데인 국가였기 때문에[21] 소련군이 저지른 범죄와 비슷하게[22] 현재까지도 잘 언급되지 않는다. 게다가, 피해국가인 이탈리아 역시 북아프리카에서 학살과 약탈, 강간을 엄청나게 저지르며 추축국다운 온갖 전쟁범죄를 벌인 터라 이탈리아도 이런 피해에 대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이걸로 징징거리자면 압도적으로 훨씬 더 많은 강간, 학살, 약탈, 탄압을 이탈리아령 리비아와 이탈리아령 에티오피아에서 저지른 것이 같이 거론되며 역공당할 뿐이니까.[23]
참고로 이탈리아는 구미에나 프랑스 때문에 당한 학살 말고도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1941년 나치와 손잡고 멸망시키고 좋아라 차지하며 이탈리아인들을 보내 정착시켰지만, 2차대전 말기에 이 이탈리아인들은 같이 이주한 독일인들과 함께 현지인들에 의해 무수히 학살당한 바 있다. 대표적인 사건이 '포이베 학살사건 (Foibe massacres)' 이다. 당연히 이 학살들도 국제적으로 묻혀져 이탈리아로서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뭐라고 하자면 "쳐들어와서 텃세부리고 약탈하던 침략자 주제에 뭐라고 하냐?"는 소리만 듣으니까.
프랑스군은 이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도 강간, 학살, 약탈 등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프랑스인들이 2차 대전 영웅으로 인정하고 있는 필리프 르클레르의 2기갑사단은 포로로 잡은 프랑스 출신 독일군 병사들을 전부 반역죄로 규정해서 총살해버리거나 프랑스인 무장친위대원들에게 "너네들 왜 나치 놈들 군복을 입고 있냐"는 질문을 했다가 '그럼 그쪽은 왜 미국놈 군복을 입고 있소?'라는 답변을 듣자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으로 죽여 버렸다. 프랑스 정부는 현재까지도 이 전쟁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1] 정확한 제대별 사상자 통계는 손실되었다.[2] 독일군의 결사방어에 연합군은 마지막 공세에서 몬테카시노 공략을 위해 영연방과 타 연합국의 망명정부들의 군대, 심지어는 연합군에 전향/항복해서 재편한 구 이탈리아군 군대까지 총동원했다.[3] 서기 529년 베네딕토회를 창설한 성 베네딕토가 직접 세운 베네딕토회의 첫 번째 수도원이면서 유럽에서 체계적인 수도원을 구현한 최초의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전 세계에서 11곳밖에 없는 교황청 직속 자치수도원이기도 하다.[4] 행맨 힐 상단 516 고지가 바로 몬테카시노 수도원이다[5] 미군은 155명 전사, 1052명 부상, 921명이 실종된 반면 독일군 15 기갑척탄병사단의 피해는 64명 전사, 179명 부상으로 극도로 미미했다.[6] 이 일로 36사단장이었던 프레드 L. 워커소장은 1946년 의회 진상조사단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수모를 당했다. 워커 소장은 마크 클라크의 무리한 결정이었다고 비판했지만 당시 전쟁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P. 패터슨은 마크 클라크의 손을 들어주었다[7] 이언 맥기번(McGibbon)(2000). 옥스퍼드 뉴질랜드 군사사 안내서 . 오클랜드: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ISBN 0-19-558376-0.[8] UK Ministry of Defence. (2004). The battles for Monte Cassino: Central Italy, 12 January – 5 June 1944. London: COI Communications. © Crown copyright.[9] Molony, Brig. C.J.C. (2004).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Volume V: The Campaign in Sicily (1943) and the Campaign in Italy (3rd September 1943 to 31st March 1944). Uckfield: Naval & Military Press Ltd. P 770~780[10] 193고지는 전초기지들을 전부 잃고 피탈직전까지 몰렸지만 뉴질랜드군은 독일군을 몰아내고 고지를 사수하는데 성공했다.[11] 제4인도사단 5보병여단장 도널드 베이트먼 (D.R.E.R. Bateman)[12] 전투 당시 뉴질랜드 군단 참모진이 편성되지 못한 상태라 뉴질랜드 2사단 참모부가 군단 참모부 역할을 겸임하는 매우 기형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13] 2차 대전기 영국군 근위대가 바로 이 제1근위여단이었다. 몬테카시노 전투 당시엔 그레나디어 가드, 콜드스트림가드, 웨일스가드가 편재되어있었다.[14] Majdalany, Fred (1957). 카지노: 전투의 초상 . 런던: Longmans, Green. OCLC 536746[15] Parker, Matthew (2004). Monte Cassino: The Hardest-Fought Battle of World War II. Doubleday. ISBN 0-385-50985-5.[16] 2004년 몬테카시노 전투 60주년을 맞아 영국 국방부에서 발간한 몬테카시노 전투 보고서에선 아예 클라크가 알렉산더의 의도와 다르게 행동해 승리의 빛을 바래게 했다고 적었다.[17] Zbigniew Wawer: Monte Cassino. Warszawa: Wydawnictwo Bellona, 2009. ISBN 978-83-11-11496-8.[18] 그린베레와 상관없는 미국 캐나다 연합군[19] Za naszą i waszą wolność. 폴란드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모토다.[20] 애초에 페르시아 산이었기 때문에 평생 폴란드는 간 적이 없다.[21] 동유럽에서 워낙에 스케일이 큰 학살들이 많이 일어났기에 가려진 사실이지만, 서유럽에서도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나치에게 살해당했다. 프랑스에서는 하루만에 어린아이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 642명이 죽은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마을 단위의 학살이 일어났고, 그 외에도 참혹한 마구잡이식 고문 치사와 강제노동이 일어났다. 프랑스까지 갈 것도 없이 네덜란드에서는 개전 후 5년 동안 무려 200,000명이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22] 독일에서 엄청난 강간 및 학살을 저질렀으나 소련에 먼저 쳐들어간 나치 독일이 저지른 엄청난 학살과 약탈 및 강간에 가려졌다.[23] 나치 독일이나 다른 식민지를 가졌던 나라들도 똑같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저지른 오스만 제국 역시 민간인들이 보복 학살당한 것이 있으나 워낙에 규모가 더 큰 자국군의 학살에 가려졌다. 이는 프랑스(알제리에서 벌어진 프랑스계 학살사건인 '오랑 학살사건'이 있지만 프랑스가 알제리인들에게 벌인 학살이 워낙 압도적이라 뭐라고 못한다.)나 영국이나 독일 역시 마찬가지이며, 일본조차도 만주나 한반도에서 일본인을 상대로 벌어진 보복학살이 있었음에도 정부에서 나서지 못하는 것이 그보다 훨씬 더 크게 저지른 학살이 부메랑으로 돌아오기에 입을 다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