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letter-spacing: -0.9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536349><rowcolor=#fff>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 |
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
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 |
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 |
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 |
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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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 |
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 |
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옥음방송)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바그라티온 작전 Операция Багратион, Белорусская операция Operation Bagration | ||
독소전쟁의 전투 | ||
기간 | ||
1944년 6월 22일 ~ 8월 19일 | ||
장소 | ||
소련, 헝가리 왕국, 발트 3국,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 ||
교전 국가 및 세력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폴란드 임시정부| ]] 인민군 | ]][[틀:깃발| ]][[소련| ]]헝가리 왕국 [[틀:깃발| ]][[틀:깃발| ]][[루마니아 왕국| ]]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틀:깃발| ]][[틀:깃발| ]][[이반 코네프| ]][1] [[틀:깃발| ]][[틀:깃발|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2] [[틀:깃발| ]][[틀:깃발| ]][[게오르기 자하로프| ]][3] [[틀:깃발| ]][[틀:깃발| ]][[이반 체르냐홉스키| ]][4] [[틀:깃발| ]][[틀:깃발| ]][[이반 바그라먄| ]][5] | ]][[틀:깃발| ]][[게오르기 주코프| ]][[틀:깃발|[6] [[틀:깃발| ]][[틀:깃발| ]][[발터 모델| ]][7]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발터 바이스[8] [[틀:깃발| ]][[틀:깃발| ]][[쿠르트 폰 티펠슈키르히| ]][9]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니콜라우스 폰 보어만[10] [[틀:깃발| ]][[틀:깃발|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11] | ]][[틀:깃발| ]][[에른스트 부슈| ]]
결과 | ||
소련의 승리 | ||
영향 | ||
독일 국방군 중부집단군의 궤멸, 소련군의 독일 본토 진입 | ||
전력 | ◆칼 하인츠 프리저[12]의 추측 총 병력 250만여 명[13] 전차 3,715대 돌격포 2,355대 포 45,000여 문 항공기 8,000여 기 ◆데이비드 글랜츠의 추측 총 병력 1,670,300명 전차 3,841대 돌격포 1,977대 포 32,718 문 항공기 7,799기 | 총 병력 849,000여 명[14] 전차 400여 대 돌격포 452대 포 3,236문 대공포 1,500여 문 항공기 920기 |
피해규모 | 총 피해 77만여 명 전사/실종 18만여 명 부상/질병 59만여 명 전차/돌격포 2,957대 손실 포 2,447문 손실 항공기 822기 격추 | 총 피해 45만여 명 전사/실종 22만 5천여 명 포로 15만여 명 부상 10만 명 전차/돌격포 600여 대 손실 중포/항공기 1,700대 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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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어: Белорусская операция[15], Белорус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Багратион» [16]독일어, 영어: Operation Bagration[17]
소련군이 독소전쟁 발발 정확히 3년 만인 1944년 6월 22일 벨로루시 일대의 독일 중부집단군을 상대로 실시한 대반격 작전. 소련이 독일에 내린 사형 선고라고 불린다.[18]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1944년 하계공세는 서방 연합군이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상륙한 오버로드 작전[19]과 시기를 맞추어 진행되었다. 미국이 랜드리스를 통해 보낸 엄청난 수량의 차량으로 기동력과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소련군은 공세작전에 적합한 여름기간 동안 동부전선 전체에 걸쳐 반격에 나섰다.
당시에 소련군은 동부전선 최북단의 핀란드와 카렐리야를 우선 공격했고(카렐리야 공세, 6월 10일) 이후 독일 중부집단군이 담당한 벨로루시에 주공세를(바그라티온 작전 6월 22일), 이어서 발트3국에 배치된 독일 북부집단군에 보조 공격이 이어졌다.(레제크네-드빈스크 공세 7월 10일, 프스코프-오스트로프 공세 7월 11일) 그 후에 폴란드 남부의 북우크라이나 집단군(리보프-산도미에시 공세, 7월 13일)과 마지막으로 발칸반도의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을 공격했다.(제2차 야시-키시네프 공세 8월 20일) 이 중에서 가장 전력이 집중되어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곳이 주공이었던 벨로루시의 중앙집단군에 대한 바그라티온 공세였다.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 국방군은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주공 방향을 오판했다. 그 결과 소련군은 전략적 기습을 달성했고 독일군과 중부집단군의 허를 찌를 수 있었다. 여기에 히틀러가 중부집단군의 후퇴불가를 고집하면서 독일군은 단순한 패배를 넘어서는 대참사를 맞았다. 소련군은 벨로루시 돌출부의 정면을 돌파하여 벨로루시와 리투아니아 일대를 휩쓸며 취약한 중부집단군을 포위섬멸하였다.
당시 중부집단군을 구성한 4개 야전군 중에 정면을 담당한 3기갑군, 4군, 9군에 타격이 집중되었다. 3개 군 모두 전면적인 재건에 착수했으나 중부집단군의 잔해더미에 불과했다. 특히 민스크 일대에서 포위섬멸 당한 제4군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다. 독일군은 신임 중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모델 원수가 기동방어와 적절한 대처로 공세 시작 1달 반만인 8월 초순 경에 소련군의 진격을 바르샤바 근처에서 간신히 정지시켰으나 이미 중부집단군이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한편, 서부전선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뒤이은 프랑스에서의 전투도 이즈음에 연합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독일군은 동서 양쪽 전선에서 서방 연합군과 소련군의 역대 최대규모의 공세를 받아 완패했다. 그 결과 나치 독일은 수년간 지배했던 프랑스 및 동유럽의 점령지 대부분을 상실한 채 본토로 밀려났다.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연합군과 소련군이 다음으로 독일 본토의 심장부를 향해 밀고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써 히틀러와 제3제국의 운명은 패망까지 카운트 다운에 들어가게 되었다.
2. 배경
바그라티온 작전 전해인 1943년 여름에 소련군은 쿠르스크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지었다. 쿠르스크 전투가 아직 채 끝나기도 전에 소련군은 동부전선 곳곳에서 반격을 개시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인 1943년 하반기부터 이듬해 1944년 초까지 6개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소련군의 반격은 특히 전선 남부인 우크라이나에 집중되었다. 히틀러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탄광지대 상실을 우려하여 우물쭈물하는 동안 소련군은 드네프르강을 순식간에 돌파해버렸다. 남부집단군은 힘겨운 퇴각전투를 치르며 우크라이나에서 간신히 후퇴했다. 1944년 봄 무렵에 이르면 소련군은 동부전선의 남부에서 우크라이나 깊숙이 진격하여 북쪽으로는 벨로루시 남단, 서쪽으로는 폴란드 일대에, 남쪽으로는 루마니아 왕국 국경의 발칸반도 입구까지 밀고들어왔다. 한편 비슷한 시기 동부전선 북쪽 지역에서는 더이상 레닌그라드 포위를 유지할 수 없었던 북부집단군이 소련군의 압박으로 인해 포위를 풀고 서쪽으로 물러나며 기나긴 포위전이 마침내 끝났고 레닌그라드는 해방되었다. 중부집단군 역시 요충지인 스몰렌스크를 내어주고 벨로루시 방면으로 밀려났다.
독일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동부전선에서 해빙기로 인해 전투에 부적합한 계절이 찾아오면서 전선은
동부전선에서는 북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전선이 밀려나자 결과적으로 중부집단군의 담당지역인 벨로루시 일대가 소련군 방향으로 돌출되었다. 중부집단군이 버티고 있는 이 돌출부는 이른바 "벨로루시 발코니"라고 명명되었다.(위 지도에서 보라색으로 표시된 지역) 당시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이 벨로루시 발코니 바로 남쪽에 위치한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종전의 남부집단군)을 공격하는 상황을 가장 우려했다.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은 중부집단군의 벨로루시 돌출부 남쪽 측면의 연결지점인 폴란드 남부일대와 갈리치아[20]에 배치되어 있었다.
히틀러와 독일군의 관점에서 봤을 때 직전까지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해방에 집중했고 우크라이나 전선에 이미 막대한 소련군 병력들이 전개되어있었다. 따라서 소련군이 굳이 병력들을 재배치하기보다는 폴란드 남부에서 우크라이나 서부에 걸친 갈리치아 지역에서 하계 공세를 계속 이어가리라고 본 것이었다. 더욱이 독일군이 보기에 소련군이 동부전선 한복판인 갈리치아를 돌파했다가는 동부전선 자체가 남북으로 결딴이 날 판이었다. 일단 갈리치아가 돌파될 경우 그 북쪽의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 전체의 배후가 위협에 처하게 된다. 또한 남쪽으로는 이미 잇따른 패전과 전황 악화로 동요하고 있는 발칸의 추축국들이 이탈하여 연합군측으로 전향해버릴 위험이 컸다. 특히 루마니아 왕국의 경우는 당시 나치 독일에게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석유공급처였다. 루마니아를 잃는다는 것은 곧 나치 독일의 확실한 패망을 의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느 쪽이던 간에 독일군으로서는 갈리치아의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이 돌파되는 상황만큼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독일군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의 담당지역에 전력을 집중했고 히틀러와 독일군 지휘부의 관심도 온통 중부집단군의 정면 보다는 남쪽 측면에 쏠려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이미 동부전선 전체에서 반격을 실시할 수 있을만큼 전력상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고, 논의 끝에 벨로루시의 중부집단군 정면을 주공세지역으로 결정하였다.
3. 소련군의 작전 입안, 준비
쿠르스크 전투 직후 시작된 우크라이나 탈환이 마무리되고 있던 1944년 3월부터 소련군 지휘부는 다음 공세의 기회를 찾기 위해 동부전선 각 지역을 점검했다. 논의 끝에 소련군은 벨로루시에 버티고 있던 독일 중부집단군의 정면을 공격해 섬멸시키기로 결정했다.이런 결정이 나온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동부전선의 다른 방면으로 주공을 돌릴 경우 벨로루시에 있는 독일의 중부집단군이 소련군의 측면을 위협할 우려가 있었고 돌출부의 중부집단군을 견제할 만한 병력도 별도로 필요했다. 반대로 벨로루시에 대한 공세가 성공하면 중부집단군 자체를 분쇄해버릴 수 있었고, 북부집단군의 보급과 퇴로까지도 차단할 수 있었다. 벨로루시의 중부집단군을 격파하면 소련 영토를 완전히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었고 벨로루시를 넘어 폴란드에까지 소련군이 진격하여 독일본토와 베를린까지 위협해 볼 수도 있었다. 또한 압도적인 전력 우위에 선 소련군은 동부전선의 중부 뿐 아니라 동부전선 전체에 걸친 공세를 준비 중이었는데 벨로루시에서의 성공은 다른 전략적 공격 축선에서의 추가적인 공격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기도 했다.
소련군은 1944년 여름에 야심찬 4개의 대공세- 카렐리야 작전, 바그라티온 작전,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제2차 야시-키시네프 공세을 계획 중이었다. 소련군의 계획은 동부전선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역을 순차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공지역이 바로 벨로루시를 공격하는 바그라티온 작전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의 러시아 제국군 장군이었던 표트르 바그라티온의 이름을 따서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이름 붙여진 이 공세에는 중부집단군을 상대로 소련군 4개 전선군이 투입될 예정이었다. 공세 계획의 전모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총군부사령 게오르기 주코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부참모장 알렉세이 안토노프만 알고 있었다. 보급과 작전 단계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5개의 작전은 북에서 남으로 시차를 두고 진행될 것이었다.
마지막 전략 계획이 고안되기 전에 스타브카는 야전 조직과 그 사령관들을 교체했다. 규모가 큰 서부 전선군은 관리가 수월하도록 제2 벨로루시전선군과 제3 벨로루시전선군으로 나누어졌다. 다른 전선군들도 개칭되거나 담당 지역이 조금씩 바뀌었다. 공세가 개시될 프리퍄티 습지 북쪽에는 카렐레야전선군, 레닌그라드전선군, 제1, 2, 3 발트전선군, 제1, 2, 3 벨로루시전선군이 배치되었다. 프리퍄티 습지 남쪽에는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이 배치되어 추후 공세에 가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제1 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을 맡고 있던 주코프의 후임으로 이반 코네프가 임명되었다.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스타브카 대리로 전선에 파견되었다. 주코프는 제1벨로루시전선군과 제2벨로루시전선군의 통합지휘 및 조율을 맡고, 바실렙스키는 제1발트전선군과 제3벨로루시전선군의 통합지휘 및 조율을 맡았다.
한편 전선군 사령관들은 배치된 77개 사단과 5개 전차군단, 총 100만명의 군대로 소련군이 독일 중부집단군에 대해 확실한 전력 우위를 점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련 전선군들에는 5개 야전군과 2개 전차군, 1개 폴란드 야전군, 11개 전차군단 등 총 40만 명이 증강되었다. 스탈린은 작전의 구체적 사안을 마련하기 위해 5월 22일에서 23일까지 독일 중부집단군과 대치중인 대부분의 지휘관들을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작전 회의에 불러들었다.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중부집단군의 대부분을 민스크 동쪽에서 포위 섬멸하고 이 작전과 함께 이반 바그라먄의 제1발트전선군과 이반 체르냐홉스키의 제3벨로루시전선군이 돌출부 북쪽 비텝스크의 독일군을 포위한다는 계획이 나왔다. 돌출부 남쪽에서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2개 전차 군단을 이끌고 프리퍄티 습지 바로 북쪽, 보브루이스크 주변에 배치된 독일군에 대해 이중의 포위 작전을 실시하겠다는 방안을 제출했다. 복잡한 기동 작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스탈린은 보브루이스크 작전에는 심하게 반대했지만 로코솝스키는 결국 뜻을 관철시켰다.
회의 끝에 마침내 바그라티온 작전의 최종적인 윤곽이 나왔다. 공세는 벨로루시 발코니의 독일군 진지의 남익과 북익에서 야전군 규모의 기동 집단이 각각 전술적 포위진을 형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1발트전선군과 제3벨로루시전선군이 협조, 스몰렌스크 북서쪽에 위치한 돌출부 북쪽의 비텝스크를 포위하고, 제1벨로루시전선군은 돌출부 남쪽의 보브루이스크를 포위한다. 동시에 북쪽에서 비텝스크 돌파가 성공하면 협조한 제5근위전차군과 1개 기병-기계화 집단이 제3벨로루시전선군과 협조하여 독일군의 후방인 민스크를 향해 종심 깊은 포위전을 실지한다. 제1발트전선군은 북익을 보호하기 위해 드비나강 서안을 따라 동프로이센을 향해 서쪽으로 진격한다. 제1벨로루시전선군 좌익에서는 추후, 프리퍄티 습지 남쪽에서 코벨 지역으로부터 비스와강을 향해 제2전차군이 공세를 시작한다. 공세 날짜는 잠정적으로 6월 15일에서 20일로 결정되었다.
스타브카는 바그라티온 작전의 기본 지침을 5월 31일에 하달하였다. 작전 계획에 따라 대군의 보급품을 옮기고 전선군을 따라 수많은 부대들이 기밀을 유지하며 전략적으로 이동했다. 남부 전선, 즉 독일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이 집결해 있는 갈리치아에서 주공이 있을 것처럼 보여야 했기 때무에 모든 일은 극도의 기밀 유지 하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이러다 보니 결국 원안대로 시간을 맞추는 건 어려워졌고 작전 날짜는 갈수록 연기되었다. 계속 작전이 연기되자 스탈린은 아예 공세 날짜를 바르바로사 작전이 6월 22일에 벌어진 것을 복수하는 의미로 6월 22일로 정했다.
4. 상황
소련군의 전력현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북쪽의 제3벨로루시전선군과 남쪽의 제1벨로루시전선군에 전력이 집중되어 있고 중앙의 제2벨로루시전선군에 상대적으로 약한 전력이 배정되었다. 특히 제3벨로루시전선군과 제1벨로루시전선군에 엄청난 전차가 집결되어 있었다. 즉 소련군은 공세 초기단계에서 한때 독일군의 장기였던 양익돌파와 포위섬멸을 기도하고 있었다. 제1발트전선군은 제3벨로루시전선군과 같이 비텝스크를 돌파하여 독일 제3기갑군을 포위'한 뒤 그대로 라트비아의 발트해까지 밀고나아가 북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의 연결을 차단하고 북측면을 엄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4.1. 독일군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독일군의 동부전선 병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병력은 서부전선의 적을 막기 위해 차출되었으며 특히 루프트바페는 연합군의 폭격에 대응하기 위해 서부전선으로 전력이 집중되었다. 독일 동부전선군 휘하의 전투기는 4,000여 대에 불과했던 반면 소련군은 7,000여 대의 전투기를 동원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즈음에는 루프트바페가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의 극심한 손실로 이미 붕괴직전에 내몰린 상태였다.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이전에도 몇차례의 포위전을 루프트바페의 지원에 힘입어 극복해왔으나 이제는 루프트바페의 엄호는 커녕 오히려 소련공군을 걱정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동부전선에서 제공권의 상실은 독일군에게 치명적이었다. 제공권을 상실하며 독일군은 소련군 진영에 제대로 항공정찰을 실시할 수가 없어서 완전히 장님 신세가 되었다. 광대한 동부 전선에서 열세한 병력으로 수비를 하기 위해서는 적의 주요 공격지점에 정확한 시점에 예비대를 보내야했다. 하지만 항공정찰이 거의 불가능해지면서 최전선 후방에서 소련군의 부대 이동이나 집결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워졌다.당시 동부전선 독일군의 지휘체계도 문제가 컸다. 아돌프 히틀러는 동부전선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원수를 경질시켰다. 클라이스트 원수가 경질되면서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은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개칭되었고 신임 사령관으로 히틀러의 신임이 두터운 페르디난트 쇠르너가 임명되었다. 쇠르너는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전임자인 클라이스트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더욱이 쇠르너는 동부전선의 심각한 위기상황에서도 히틀러에게 직언을 할만한 인물도 아니었다. 중부집단군 사령관은 에른스트 부슈 원수였다. 부슈 원수는 동부전선의 북부집단군 산하 제16군 사령관을 역임했는데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훨씬 우세한 소련군을 상대로 뛰어난 방어전을 지휘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 시점 즈음에 이르면 부슈 원수는 히틀러의 후퇴불가 방침만을 부하들에게 되풀이하는 의욕적이지 않은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결국 부슈는 바그라티온 작전 개시 1주일이 안되어 발터 모델 원수로 교체되었고 동부전선의 독일군 중 최악의 패배를 당한 장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독일군이 벨로루시 발코니에서 대비를 했다고는 하지만 독일군은 소련군의 하계 공세가 우크라이나에서 남부 폴란드와 발칸반도로 진격하여 다른 추축국들을 전쟁에서 떼어 놓는 것이라고 오판하고 있었다.[21] 이게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게, 동유럽 추축국들이 독일을 배신하고 떨어져 나가는 정치적 타격은 무시하더라도 독일의 생명줄인 루마니아의 플로에슈티 유전지대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군의 주력 기갑 장비들은 당시 격전이 예상되는 프랑스와 북우크라이나 일대에 주로 배치되어 중부집단군은 보병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22] 1944년 3월엔 기갑사단 2개를 포함해 중부집단군에 소속되어 있던 사단 9개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에 증원됐고[23][24] 중부집단군 전체에서 제20기갑사단만 유일한 기갑예비로 남게 됐다. 공세 개시 전 20기갑사단의 전력은 4호 전차 50량 정도의 불충분한 전력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중부집단군은 기갑전력의 대부분을 돌격포와 소수의 대전차자주포에 의존했다.
공세개시 시점에서 에른스트 부슈 원수가 이끄는 독일 중부집단군의 총전력은 4개 야전군에 후방 치안임무를 담당한 벨로루시 지구 사령부로 구성되었다. 중부집단군은 예하에 34개 보병사단, 2개의 공군 야전사단, 7개 보안사단, 2개 기갑척탄병 사단, 1개 기갑사단을 비롯한 총 47개 사단으로 구성되었고 펠트헤른할레 기갑척탄병 사단이 추가되었다. 소련군의 공세를 맞게될 정면의 3개 군(제4, 제9, 제3기갑)이 총 34개 사단이었다. 얼핏보면 중부집단군은 상당한 전력이었다. 그러나 그 실상은 히틀러가 소모된 부대들을 보충하는 것보다는 끝도 없이 신편부대를 편성하는 것을 선호했음으로 중부집단군의 예하 사단들은 심각할만큼 부실한 상태였다.
또한 중부집단군의 전력은 방어에 용이한 거점이 아닌 행정 중심지에 집중배치되어 있었다. 그 결과 각 보병사단간의 간격은 기준의 배인 24Km~30Km인 상태였다. 그리 밀집되지 못했던 독일군은 예비대도 없이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야 할 상황이었다. 중부집단군의 예비는 5개 사단이었는데 예비대의 핵심인 제20기갑사단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다. 또한 장비의 부족이 심각하여 제3기갑군은 이름만 '기갑'이지 편제상 기갑 부대는 하나도 없었다. 인접한 북부집단군도 기갑예비가 제12기갑사단[25] 하나뿐이었는데 즉, 북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의 담당지역인 동부전선의 절반에 해당하는 영역을 기갑사단 단 2개가 책임지고 있는 형편이었다.[26] 히틀러가 아무리 프랑스와 북우크라이나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라곤 해도 중부집단군이 담당한 벨로루시 지역은 위험천만하게 방치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들이 방어할 벨로루시 돌출부의 경우 남쪽의 대습지와 동쪽에 흐르는 몇 개의 강을 제외하면 전혀 방어할 지형이 없는 곳이었다. 여기에 있는 도시들도 지하실이 없고 목조 가옥이 많은 등 요새화하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다. 게다가 간신히 참호선을 마련한 제1선이 돌파되면 더 이상 제대로 된 방어선을 건립하기도 힘든 곳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족한 병력과 낡고 수량이 적은 장비만으로 전방거점과 전선을 고수할 것을 강요 받았으니 일단 돌파당한다면 포위섬멸당하기 딱 좋았다.
이렇듯 압도적인 소련군을 상대해야했던 중부집단군은 지나치게 늘어진 전선을 따라 부대가 흩어져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나마 합리적인 대책은 소련 영내에서 부대들을 뒤로 물려 전선을 축소하고 예비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점 즈음에 히틀러는 현실감각을 완전히 상실하여 점령지 포기를 강박적으로 거부했다. 히틀러는 점령지를 포기하고 물러난다면 다른 추축 동맹국들이 동요할 것이다는 정치적 이유를 들어 퇴각을 거부했다.[27] 하지만 취약한 지점에 독일군이 전진 배치되었다가 섬멸당한다면 동맹국과의 외교에서 더욱 불리해질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궤변이었다. 히틀러는 연합군이 프랑스 해안선에 상륙하자마자 병력을 집중하여 쓸어버리고서는 서부전선의 가용병력을 동부전선에 투입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고 심지어 다시 한번 우크라이나 등을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망상했다.[28] 독일군 수뇌부 상당수도 바르바로사의 재현까지는 무리지만 '영미군이 프랑스에 상륙하자마자 쓸어버린다면 아직 해볼만할지도?' 라는 생각을 소련군과 연합군의 가공할 화력과 물량을 맞닥뜨리기 전까지 하기도 했다.[29] 어쨌든, 히틀러는 서방연합군을 막아낸 후 다시 동부전선에서 반격을 하기 위해서라도 반격의 발판이 되어줄 벨로루시 돌출부를 비롯한 소련 내 점령지에서 후퇴를 금지했다. 히틀러와 독일군은 위험천만한 도박을 벌이고 있었다.
4.2. 소련군
독일군이 이렇게 빈약한 데 비해 소련군의 공세 준비는 어마어마했다. 바그라티온 작전에 참여하는 4개 전선군은 제1벨로루시전선군의 좌익을 제외하고 14개 제병협동군, 1개 전차군, 4개 항공군, 118개 소총병 사단과 2개 소총병여단, 2개 기병군단, 8개 기계화 또는 전차군단, 수십 개의 포병 제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병력은 125만 4,300명이었고 전차와 자주포 4,070대, 야포 2만 4,363문, 항공기 5,327대로 장비했을 뿐 아니라 추가로 항공기 1,007대가 더 있었다.제1벨로루시전선군의 좌익은 41만 6,000명의 병사와 1,748대의 전차와 자주포, 8,335문의 야포와 박격포, 1,456대의 항공기가 5개의 제병협동군, 1개 전차군, 1개 항공군, 36개 소총병사단, 2개 기병군단, 4개 전차 또는 기계화군단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소련 주둔 미 육군 항공단 소속의 B-17 폭격기의 폭격지원이 있었는데[30], 하필이면 미군 폭격기가 소련군 차량대열을 오폭해서 장교 1명과 그 참모진 서너명 정도가 죽고, 소련군 수십명이 부상당하는 바람에 스탈린의 직접명령으로 연합작전은 취소되었다.
5. 전투서열
5.1. 소련군 전투서열
- 제1발트전선군
- 제4충격군
- 제6근위군
- 제43군
- 제1전차군단
- 제3벨로루시전선군
- 제5군
- 제31군
- 제39군
- 제11근위군
- 제2근위전차군단
- 제5근위전차군
- 기병-기계화집단:
- 제3근위기병군단
- 제3근위기계화군단
- 제3근위전차군단
- 제2벨로루시전선군
- 제33군
- 제49군
- 제50군
- 전선군 기동집단
- 제1벨로루시전선군
- 제3군
- 제28군
- 제48군
- 제65군
- 제9전차군단
- 기병-기계화집단:
- 제1근위전차군단
- 제4근위기병군단
- 제1기계화군단
||<tablewidth=950> 전력[31] || 제1발트 || 제3벨로루시 || 제2벨로루시 || 제1벨로루시 || 총계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인원 | 227,000명 | 389,500명 | 202,900명 | 434,900명 | 1,254,300명 | |||||
기관총 | 8,432정 | 13,214정 | 5,750정 | 16,035정 | 43,431정 | ||||||
전차 | 561량 | 1,169량 | 102량 | 883량 | 2,715량 | ||||||
자주포 | 126문 | 641문 | 174문 | 414문 | 1,355문 | ||||||
대전차포[32] | 778문 | 1,175문 | 833문 | 1,444문 | 4,230문 | ||||||
야포[33] | 2,133문 | 2,893문 | 1,768문 | 3,769문 | 10,563문 | ||||||
박격포[34] | 2,213문 | 2,552문 | 1,957문 | 3,792문 | 11,514문 | ||||||
다연장 로켓 | 604문 | 689문 | 264문 | 749문 | 2,306문 | ||||||
방공포 | 420문 | 792문 | 329문 | 762문 | 2,303문 | ||||||
항공기 | 902대 | 1,864대 | 528대 | 2,303대 | 5,327대 | ||||||
트럭 | 19,537대 | 16,208대 | 7,727대 | 17,177대 | 60,649대 | }}}}}}}}} |
5.2. 독일군 전투서열
1944년 6월 22일 중부집단군 전투서열중부집단군: 사령관:원수 에른스트 부슈 / 참모장: 중장 한스 크렙스
- 중부집단군 및 육군총사령부 예비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14무장척탄병사단: 중장 플뢰르케
- 제20기갑사단: 중장 폰 케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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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90야전훈련사단: 중장 베르겐
- 제707보병사단: 소장 기르(POW)
}}} - 백러시아 군관구: 기병대장 백작 폰 트라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52보안사단: 소장 네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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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2보병사단: 중장 폰 베르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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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헝가리 제5예비보병사단
- 헝가리 제23예비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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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7보병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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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군단: 포병대장 남작 폰 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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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기병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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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11보병사단: 중장 에크하르트
- 헝가리 제12예비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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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개 과정
6.1. 기만 작전
"신께서 누군가를 멸하고 쓸어버리려 하실 때에는, 먼저 그 눈부터 멀게 하시는 법이지."
제39기갑군단장 포병대장 마르티네크, 공세 직전에 부하와 나눈 대화 중[38]
제39기갑군단장 포병대장 마르티네크, 공세 직전에 부하와 나눈 대화 중[38]
소련은 벨로루시 돌출부 공격이라는 본 목적을 감추기 위해 돌출부 남부나 북부를 공격하려는 대대적인 성동격서 작전을 펼쳤다.
레오니드 고보로프의 레닌그라드전선군과 키릴 메레츠코프의 카렐리야전선군은 핀란드를 공격하는 '카렐리야 작전'을 시작하여 하계 공세의 막을 열었다. 카렐리야 작전은 하계 공세의 첫 단계로 핀란드를 전열에서 이탈시키고 독일군이 중부집단군에 대한 소련군의 공세 준비를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핀란드의 이탈로 독일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겨울전쟁에서 교훈을 얻은 소련군은 별다른 고전 없이 핀란드를 잘 상대했고 그 공으로 메레츠코프와 고보로프는 원수로 승진했다.
남부에서는 가짜 사단을 편성해 남부로 공세를 펼친다는 내용의 거짓 무전을 계속 보내 독일군을 기만했다. 남부전선의 제2, 3 우크라이나전선군은 5월까지도 병력을 집중시킨 것처럼 위장하고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벌이는 듯한 모습을 연출시켜 독일은 공세가 정면으로 가해지지 않을 것이라 믿게 되었다. 게다가 작전 계획이 연기되면서 독일은 정확한 공세일도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수뇌부는 돌출부의 남쪽과 북쪽에서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될 것으로 오판했으며, 당분간 벨로루시 돌출부 자체에는 별 일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덕분에 독일 육군 총사령부는 중부집단군 소속의 제56기갑군단을 북우크라이나집단군에게 넘겨 버렸다.
6.2. 공세 개시
소련군은 6월 22일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6월 21일 밤부터 독일군 후방 지역에 소련 공군이 폭격을 시작했고 소련군의 특수부대들은 독일 전방 거점들 사이로 이동하여 방어진을 1겹씩 벗겨 내었다. 스페츠나츠의 성공으로 대부분 공격준비사격 없이 공세가 시작되었다.중부집단군 정면에 배치된 독일 제3기갑군, 4군, 9군은 북쪽에서부터 차례대로 1일간의 시차를 두고 공격을 받았다. 6월 22일에 제1발트전선군과 제3벨로루시전선군이 비텝스크 일대의 3장갑군을, 23일에 제2벨로루시전선군이 오르샤와 모길료프 일대의 독일 제4군을, 24일에는 제1벨로루시전선군이 보브루이스크 일대의 독일 제9군에 공격을 개시했다. 순차적인 공격으로 중부집단군과 독일 지휘부는 혼란에 빠졌고 얼마안되는 예비대를 어떻게 운용할지 갈팡질팡하다가 적시에 투입하지 못했다.
돌출부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5일까지 독일은 정면 공격이 양동 작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투가 진행되면서 독일군도 소련의 주공이 정면이라는 것을 알았다. 보브루이스크와 모길료프 같은 포위전이 거듭되었지만
그러나 소련군은 러시아 내전으로 수립된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의 종심작전 교리를 부활시켰고, 이 교리에 따라 소련군은 독일군의 요새를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우회해 포위해 버렸다. 아돌프 히틀러의 삽질로 병력이 집중되어 있지 않았던 중부집단군은 소련의 압도적인 포격에 의해 그대로 각개격파당하기 시작했다
6.2.1. 비텝스크 공세
독일 제3기갑군이 담당한 돌출부 북쪽의 비텝스크 지역에서는 6월 22일에 소련 제43군이 독일 D 분견 군단의 잔여 병력을 쓸어버린 다음 비텝스크 서쪽에서 드비나강을 건넜다. 다음날인 25일 정오 즈음에는 소련 제39군의 기갑 부대가 합류하여 독일 제53군단의 퇴로를 차단하여 비텝스크를 포위했다.
제3기갑군 사령관 라인하르트 상급대장은 53군단의 비텝스크 포위망 탈출허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동맹인 핀란드가 동요할 것이라는 이유로 탈출요청을 거부했다. 라인하르트 휘하의 3개 군단 중 하나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지어졌다. 비텝스크가 포위되며 제3기갑군 담당지역에는 폭 100km의 돌파구가 형성되었다. 소련군은 포위한 비텝스크를 뒤로한 채 계속해서 진격했다.
제3기갑군의 전황은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었다. 제53군단은 비텝스크에서 포위되었고 제6군단은 너무 크게 밀려난 나머지 6월 25일 11시10분 부로 제4군에게 전환배속된다. 제3기갑군 사령관 라인하르트는 비텝스크에 포위된 53군단을 탈출시켜 전선에 배치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엄명을 받은 부슈 원수는 비텝스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 바실렙스키와 체르냐홉스키에게 투항하는 제53군단장 골비쳐.
골비쳐 보병대장 뒤에 앉아 있는 독일군 장성은 제206보병사단 사단장 알폰스 히터 중장.[39]
결국 6월 27일 제53군단은 야간에 절망적인 최후의 돌파를 시도했으나 저지당했다. 53군단은 약 2만명의 병력을 손실했고 남은 1만여명은 소련군에 투항했다. 비텝스크의 신속한 함락은 소련 공군의 공로가 컸다. 독일군은 이제껏 동부전선에서 루프트바페의 지원에 힘입어 여러차례 절망적인 포위전투를 극복했었으나, 이번에는 제공권을 장악한 소련공군의 끊임 없는 공습을 받고 포위망 탈출이 저지되었다. 이로써 제3기갑군은 전투개시로부터 불과 6일만에 11개 사단 중 5개 사단을 잃었다.
제1발트전선군 산하의 제6근위군은 제1전차군단의 지원을 받으며 방향을 돌려 퇴각하는 독일 제3기갑군의 잔존병력을 리투아니아 방면으로 계속 추격하며 밀어붙였다. 독일 제53군단은 비텝스크에서 포위 당하여 전멸하였고 제6군단은 지나치게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독일 제4군으로 배속되었다. 라인하르트 상급대장은 이제 제9군단 2개 사단만으로 제1발트 전선군 전체를 상대해야하는 답 없는 상황에 놓였다. 이런 상황임에도 라인하르트는 히틀러의 후퇴 거부명령으로 계속 방해를 받았고 격분한 나머지 중부집단군 사령관 에른스트 부슈 원수에게 사임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반려되었다.
제1발트전선군이 독일 제3기갑군을 몰아내며 측면을 암호하는 동안 제3벨로루시전선군은 중부집단군 후방인 민스크를 향해 돌진해나갔다. 제3기갑군 전선이 무너지며 3기갑군 남쪽에 배치된 독일 제4군의 측면과 후방이 위험해졌다.
6.2.2. 모길료프 공세
소련군은 작전의 다음 단계로 독일 제4군 담당지역인 오르샤와 모길료프를 공격했다. 소련 제49소총군은 6월 24일에 독일 제39기갑군단과 제12군단 사이로 소규모 돌파를 감행했다. 정면 뿐 아니라 전선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제3기갑군을 돌파하여 독일 제4군의 후방을 향해 진출하고 있었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드네프르 강가의 방어진지로의 후퇴는 여전히 거부되었다. 후퇴가 너무 늦어지면서 독일군보다도 소련군이 먼저 드네프르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6월 27일, 소련 제49소총군은 모길료프의 남과 북에서 강을 건넜다. 독일군은 민스크로의 퇴각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했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모길료프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다수의 독일군은 이 명령을 거부하고 서쪽으로 탈출했다.
오르샤에서는 501중전차대대[40]의 6호 전차들이 파도 같이 몰려드는 소련군 전차들에 맞서 분전을 하긴 했지만 압도적인 숫적 열세에 빠지고만다. 더욱이 소련군은 티거 전차와 실랑이를 벌이기보다는 우회하여 중부집단군의 후방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음으로 501중전차대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퇴각해야했다.
독일 제4군 정면의 제2벨로루시전선군은 작전에 참가한 다른 전선군보다는 약체였기 때문에 독일 제4군은 당장에는 중부집단군의 다른 군처럼 군단 단위로 포위당하는 것만은 모면할 수 있었다. 독일 제4군은 소련군에게 쫓기며 민스크 방면으로 후퇴하며 러시아 원정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비참한 운명의 장소가 된 것으로 유명한 베레지나강을 건너려 했다. 하지만 전선 남쪽과 북쪽을 돌파한 소련군이 독일 제4군보다도 더 빠르게 민스크를 향해 몰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6.2.3. 보브루이스크 공세
남쪽에서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24일에 돌격을 개시했다. 앞서 설명한대로 로코솝스키는 스탈린에게 자신의 공격계획을 관철해내어 치밀한 작전준비로 독일군이 예상치 못한 지역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그 결과 남쪽 지역에서는 소련군이 가장 성공적인 돌파와 포위를 달성해냈다.
공세 첫날 소련 제48군의 5~7개의 소총사단과 2개 전차여단은 독일 제35군단을 라하초우에서 몰아내고 북쪽에서 돌파에 성공했다. 남쪽에서는 더 큰 성공이 이어졌다. 로코솝스키는 공병들로 프티치강 동쪽을 따라 늪지에 나무 둑길을 만들어 전차부대를 몰래 늪지를 지나게 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이 예상못한 늪지에서 기습을 시작했고, 보브루이스크 남쪽 방면을 담당한 독일 제41기갑군단을 상대로 15개 소총사단과 3개 전차여단을 투입시켰다. 독일군 방어선이 무너지자 로코솝스키는 늪지 둑길 위로 기갑 부대를 투입시켜 독일군 방어선을 뚫고 후방으로 침입했다.
중부집단군은 독일 제9군 지역 근처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제20기갑사단을 투입했다. 하지만 제9군 전선 곳곳이 돌파되었기 때문에 위급한 지역이 너무 많았다. 20기갑사단은 보브루이스크 북쪽의 돌파구를 틀어막기위해 출동하다가 남쪽이 돌파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적을 눈앞에두고 남쪽으로 되돌려졌다. 보브루이스크 남쪽방면이 핵심적인 보급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실책이었다. 제20기갑사단이 제때에 투입되더라도 압도적인 소련군을 저지하기 어려웠을텐데 결과적으로 남쪽과 북쪽의 돌파구 어느 쪽에도 적시에 투입되는 것 조차 못 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중부집단군 유일의 기갑예비가 헛되이 사용되었다는 것에 격분하여 제9군 사령관 요르단 보병대장을 심하게 질책하였다. 하지만 이런 참사를 자초한 것은 히틀러 그 자신이었음으로 분명 대상이 잘못된 분풀이었을 뿐이었다. 요르단은 군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고 후임으로는 보어만 기갑대장이 임명되었다.
다음날인 6월 25일 정오에는 제1근위전차군단이 40킬로미터나 진격하여 보브루이스크 남쪽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사 플리예프[41]가 이끄는 기병-기계화 집단이 그 뒤를 이어 보브루이스크 남쪽 돌파구에 투입되었고 보브루이스크에서 서쪽 깊숙이 약 120km 거리에 위치한 요충지인 슬루츠크를 향하여 진격해 나가아갔다. 보브루이스크가 포위되기 직전에 몰리자 제9군은 중부집단군 사령부에 베레지나강 서쪽으로 철수허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부쉬 원수는 전선의 돌파여부에 상관치 말고 현 위치를 고수하라고 답했다. 이 때문에 베레지나강 동쪽에 있는 35군단 주력 전체가 위기에 빠졌다.
26일에 북쪽에 투입된 소련 제9전차군단은 로가체프 서쪽 독일군 방어진을 돌파하고 보브루이스크 바로 남쪽 베레지나강의 도하점을 점령하려고 했다. 강의 서안에서는 제1근위전차군단이 접근 중이었다. 27일에는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9군의 퇴각이 시작되었다. 중부집단군 전체에서 유일한 기갑사단인 제20기갑사단이 탈출 엄호를 명령받았다. 하지만 히틀러는 직접 돌파 허가를 취소하고 보브루이스크를 고수할 것 명령했다가 다시 이를 번복하면서 9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그동안 소련군 2개 전차군단이 탈출로를 봉쇄해버렸다. 소련 기갑 부대의 진격이 있은 뒤, 소련 제3군, 48군, 65군은 독일 제35군단과 제41기갑군단의 일부, 그리고 이들을 구원하기위해 투입되었던 제20기갑사단까지도 보브루이스크 남동쪽에서 포위하였다.
포위망이 완성되면서 제9군 주력 2개 군단 약 70,000여명이 갇히게 되었다. 제9군 병력 중 가장 남서쪽에 있던 55군단은 독일 제2군의 지휘를 받게되었다. 포위망은 베레지나강을 경계로 보브루이스크 시가지가 위치한 서편과 동편으로 분리되었다. 포위망 안에 갇힌 군단 중 더 서쪽에 있던 제41기갑군단은 그래도 상황이 조금 나았다. 41기갑군단은 베레지나강 서편에 배치되어 있었고 일부 병력은 포위망이 완전히 봉쇄되기 전에 더 서쪽으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베레지나강 동편에 위치한 35군단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제35군단 주력은 베레지나강 건너 서편에 위치한 보브루이스크 시가지로 후퇴하기 위해 이동했다. 베레지나강을 가로지르는 철교가 보브루이스크 시가지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퇴로였다. 교량을 지나기 위해서는 베레지나강 바로 동편에 보브루이스크 시가지를 마주하고 있는 티토프카(Титовка) 분기점을 거쳐야했다. 하지만 제9전차군단의 지원을 받는 소련 제108소총사단이 이미 티토프카의 분기점을 장악하여 보브루이스크로 진입하는 길목을 차단한 상태였다.
▲ 티토프카에서 소련 공군의 공습을 받아 파괴되고 버려진 독일군 차량들
35군단 주력은 필사적으로 티토프카의 교차로를 돌파하려 했다. 독일군은 6월 27일 하루 동안 15차례가 넘는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소련 제16항공군의 항공기 526대가 1시간도 넘는 맹렬한 폭격으로 교차로에 몰린 독일군을 난타했다. 그 결과 독일군의 도강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다음날까지 독일군 1만여명이 전사하고 6천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생존자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얼마 안되는 소수만이 강 건너 보브루이스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베레지나강 남동쪽의 포위망과 35군단은 실질적으로 붕괴되었다. 포로 중에는 서쪽으로의 도강이 저지된 이후 잔존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퇴각하려던 35군단장 뤼초프 중장도 있었다.
소련 공군은 티토프카에서 퇴각 중인 독일군을 분쇄해버리면서 막강한 위력을 과시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학살극은 히틀러의 간섭과 현지사수 명령 남발이 소련군의 공세 이상으로 독일군에게 재앙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티토프카는 보브루이스크 시가지에서 베레지나강을 사이에 두고 고작 2km 떨어져있을 따름이었다. 요르단 장군이 앞서 공세 다음날인 25일에 제안한대로 진작에 병력을 강 서편으로 철수시켰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고 최소한 피해를 줄일 수는 있었다.
제9군 주력이 포위되면서 9군이 담당하던 140km 너비의 전선이 소련군에게 개방되었다. 소련 지휘관들은 이제 휘하 부대에게 서쪽과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민스크와 중부집단군 후방 깊숙히 진격할 것을 독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베레지나강 서편에 포위된 9군 장병들에게는 미약하게나마 탈출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북부집단군에서부터 넘겨받은 제12기갑사단이 투입되었다.
6.2.3.1. 독일 제9군의 탈출
소련군 주력이 민스크로 몰려가는 동안 남쪽의 보브루이스크에서는 독일군 제9군의 2개 군단이 소련군 2개 전차군단의 포위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육군 총사령부는 이곳의 상황 타개를 위해 북부집단군에서 급하게 제12기갑사단을 빼내어 파견했다. 제12기갑사단은 6월 27일에 보브루이스크에서 50Km 떨어진 마리나 고르카까지 열차로 이동했다. 제9군 참모장은 제12기갑사단장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건냈다고 알려져 있다.
"반갑네. 그런데 제 9군은 없어졌어."
그렇게 발터 모델의 지휘하에 르제프 전투에서 살아남은 9군은 사라져갔고, 6월 30일 01시 30분에 새벽을 틈타 기습적으로 잔존 9군 병력의 포위망 돌파가 시작되었다. 포위망 안에 갇힌 제9군 병력 중 제20기갑사단이 선두에 서 길을 열었고 제383보병사단이 후위를, 나머지 부대들은 대열 측면을 엄호했다. 제 12기갑사단은 포위망에서 탈출한 제9군과 합류하여 1만 명을 구해냈다. 소련 공군은 포위망에서 벗어나려는 독일군의 행렬을 향해 가차없는 맹공을 퍼부었다. 이 공격에서 얼마 안 되는 독일군만이 보브루이스크 북서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나머지 병력은 소련의 집중적인 항공 공격을 받았고, 마침내 항복하였다. 제9군은 구원군인 12기갑사단과 연계하여 포위망에서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몰살은 면했다. 하지만 포위와 탈출 과정에서 대부분의 중장비를 유기하고 심각한 손실을 입어 더이상 전력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졌다.히틀러는 제9군의 탈출명령을 제때에 내리지 않은 것은 물론, 심지어 9군 병력 중 1개 사단은 보브루이스크 포위망에 남아서 방어할 것을 명령했다. 전선이 수 백km 이상 밀려나고 있는 시점에서 이는 자살하라는 명령이나 다름 없었으나 독일 제383보병사단이 포위망에 남게되었다. 포위망에서 생환한 9군 장병 및 전후 귀환한 포로들에 의하면 보브루이스크 성에 남겨졌던 부상병 5천명은 소련군에게 학살당하는 운명을 맞았다고 알려져 있다.
7월 1일, 보브루이스크에서 포위당한 독일 제9군이 필사적으로 탈출을 감행하는 동안 소련군이 이미 훨씬 후방인 민스크 코앞까지 밀고들어가면서 중부집단군의 전선에는 더 심각한 위기가 찾아왔다.
6.2.4. 전선 돌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기상황이다. 중부집단군 전면이 비어 있다!
아돌프 히틀러, 신임 중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와의 대화 중
아돌프 히틀러, 신임 중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와의 대화 중
바그라티온 작전 개시 1주일이 채 안되어 소련군은 중부집단군 전선 곳곳을 돌파했다. 6월 27일, 벨로루시 발코니 북쪽에는 독일 제3기갑군과 제4군 사이에, 남쪽에는 제4군과 타격을 입은 제9군 사이에 커다란 돌파구가 생겼다. 독일 제3기갑군과 제9군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고 이들의 전선이 돌파되면서 두 군 사이의 중앙에 위치한 독일 제4군 전체가 위기에 처해졌다. 북쪽의 비텝스크와 남쪽의 보브루이스크에서 포위망을 완성한 제3벨로루시전선군과 제1벨로루시전선군은 이제 독일군 후방 깊숙히 진격하여 중부집단군 사령부 소재지이자 독일 제4군의 후방인 민스크를 남북으로 협공하기 시작했다.
파벨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 소속 2개 전차군단과 제3독립근위기계화군단이 북쪽 돌파구를 파고들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독일 제4군의 퇴로인 베레지나강을 독일군보다 먼저 건너기 위해 휘하 여단들을 평행하게 진격시켜 베레지나강의 도하점을 찾도록 했다. 남쪽 돌파구에서는 플리예프의 기병-기계화 집단이 프티치강을 건너 서쪽인 슬루츠크로 진격하였고 6월 29일에는 슬루츠크를 점령했다.
이 작전 동안 3기갑군 예하 6군단[42]은 그대로 붕괴되었고 군단장인 게오르크 파이퍼도 모길료프에서 전사했다. 4군도 포위망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소련군의 전투기와 전차에 의해 3만 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고 힘겹게 추격을 뿌리치며 민스크쪽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보부루이스크에 있던 9군의 주력병력인 41기갑군단과 35군단도 완전히 파괴되어 7만 명 이상이 전사하고 2만 명이 포로로 붙잡히는 대패를 당했다.
독일 육군 총사령부(OKH)는 뒤늦게야 이러한 공격에 대응하여 몇몇 기계화 부대들을 철도와 도로로 이동시켰다.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에서부터 독일 제5기갑사단이 보리소프까지 열차로 이동하여 후방 부대들과 함께 벨로루시 발코니 북쪽의 틈을 메우려고 했다. 하지만 고작 기갑사단 하나로 북쪽 돌파구로 쏟아져 들어오는 소련 제5군과 제5근위전차군 두 개 군을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5기갑사단은 기껏해야 몇 번의 기습으로 소련군의 진격을 몇 시간 지연시키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더욱이 소련군은 독일 제5기갑사단과는 전투를 벌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소련 제5군과 제5근위전차군은 독일 기갑사단을 그대로 지나쳐 훨씬 후방인 몰로데치노와 민스크를 향해 진격해 나갔다. 오히려 포위될 위기에 처한 제5기갑사단은 후퇴했다.
한편 그때까지 정신 못 차리고 있던 히틀러는 6월 27일에 '작전 명령 제8호'를 배포하여, 이미 포위되어 버린 병력으로 전선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건 이미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통해 헛소리라는 것이 입증된 명령이었다. 당연하게도 독일군 지휘관들은 반격을 할 병력을 재편성하기 위해서라도 퇴각이나 기동을 허가해 달라고 줄기차게 요청했지만 매번 거부당했다.
6월 28일에 중부집단군 사령관인 부슈 원수가 해임되고 이웃한 북우크라이나집단군의 사령관이자 총통의 소방수로 명성이 높은 발터 모델 원수가 중부집단군 사령관직까지 겸임하였다. 동부전선 독일군의 거의 절반이상이 모델 한사람의 지휘하에 들어오게 된 것인데 2차 대전기간 동안 히틀러가 한 사람한테 이렇게 큰 권한을 쥐어준 전례가 없었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반증이었다. 이 시점에서 중부집단군 3개 야전군의 사단 대부분이 포위되거나 포위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소련군의 공세 개시로부터 불과 7일이 채 안되어 전선 곳곳이 돌파당한 중부집단군 전체가 섬멸당할 터무니없는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43]
북쪽의 제3기갑군은 히틀러의 후퇴불가 명령으로 53군단이 비텝스크에서 포위된 후 순식간에 전멸하면서 약화된 3개 사단으로 구성된 1개 군단만으로 강력한 소련군에 맞서는 형편이었다. 남쪽의 9군 역시 주력인 2개 군단이 보브루이스크에서 포위되었고 포위망을 돌파하여 서쪽으로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각각 남북에서 전선을 돌파한 소련군 2개 전선군이 독일군을 포위한 뒤 그대로 중부집단군 후방인 민스크로 향하면서 더 큰 위기가 찾아왔다. 민스크가 위태로워지면서 비교적 전력이 약한 제2벨로루시전선군에게 쫓기며 민스크쪽으로 퇴각 중이던 제4군 전체가 포위될 위험이 커졌다.
6.3. 민스크 해방: 포위망의 완성
제3벨로루시전선군과 제1벨로루시전선군은 전선 북쪽의 독일 제3기갑군과 남쪽의 독일 제9군을 순식간에 분쇄했다. 두 전선군은 이제 중부집단군의 후방이자 벨로루시의 심장부인 민스크를 향해 남북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말은 곧 민스크 동쪽에서 퇴각 중이던 독일 제4군 전체가 소련군의 거대한 포위망에 빠질 위기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6월 29일 제4군에게 민스크 쪽으로의 퇴각을 중지하고 현위치를 사수하라는 비상식적인 명령을 내렸다.
7월 2일, 돌출부의 중심부이자 교통의 요지인 민스크와 그 주변에는 약체의 독일군만이 남아 있었다. 독일군이 방어 준비를 채 갖추기도 전에[44] 소련군의 소규모 선견대가 민스크로 돌입해 버렸다. 민스크 북쪽에서는 제5근위전차군 소속 제29전차군단이 도시를 지나 서쪽으로 진출하여 스비슬로치강의 도하점을 점령했다. 7월 3일에 민스크 북서쪽 외곽에서 제3근위전차군단이 들어왔고 북동쪽에는 제4근위전차여단이 독일군을 소탕했다. 민스크는 독일군이 방어를 조직하기도 전에 점령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7월 3일 오후, 제 1근위전차군단의 선견대가 남쪽에 도착하여 민스크 함락을 완료했다. 뒤이어 남동쪽에서 제3군, 북동쪽에서 제31군의 소총병 부대가 이를 후속했다. 그리하여 우회한 소련군이 민스크를 점령한 그 순간, 민스크 동쪽에서 방어전을 펼치고 있던 독일 제4군에 대한 포위망이 완성되었고 제4군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포위망 안에는 제4군 예하 10여개 이상의 사단이 갇혀 있었다. 포위망을 완성한 소련군 주력은 전과확대를 위해 서쪽으로 계속 진격할 준비를 했다. 포위망 내 독일 제4군의 잔존병력을 소탕하는 임무는 제2벨로루시전선군이 맡게 되었다.
바그라티온 공세 개시일인 6월 22일부터 민스크가 함락되어 제4군이 섬멸당하는 7월 10일까지 바그라티온 공세 초기단계의 19일 남짓하는 기간동안 독일군은 부상, 전사, 실종자를 포함하여 무려 25만명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다. 이는 스탈린그라드 포위 당시의 피해를 뛰어넘는 엄청난 것이었다. 전선을 돌파하고 민스크를 함락시켜 중부집단군을 분쇄한 소련군은 더 서쪽을 향해 계속 진격하여 전과확대에 나섰다. 중부집단군의 위기상황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6.4. 전과 확대
민스크를 함락시킨 소련군은 이제 더 벨로루시 서쪽에 위치한 몰로데치노와 바라노비치를 향해 진격했다. 몰로데치노와 바라노비치는 교통의 요지로 몰로데치노는 빌뉴스와 흐로드나로 향하는 도로가 지났고 바라노비치는 브레스트와 비아위스토크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벨로루시를 휩쓴 소련군이 이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까지 진격하려는 것이었다. 소련군이 이 지역까지 진출하면 이미 만신창이가 된 중부집단군 잔존병력의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고 바르샤바와 독일 본토로까지 진격하는 길이 무방비 상태로 열리는 것이었다. 이를 막기위해 독일군은 남아있는 증원병력을 긁어모아 사활을 건 지연전에 나섰다. 하지만 히틀러는 여전히 현실성 없는 후퇴 불가 방침만 되풀이하며 독일군의 작전을 방해했다.7월 3일, 제 5근위전차군은 민스크 서쪽에서 재집결하였고 이 사이 오부호프의 기병-기계화 집단은 독일 제5기갑사단과 제39기갑군단의 패잔병들로 이루어진 독일군을 상대로 몰로데치노에서 전투를 개시했다. 남쪽에서는 이사 플리예프의 기병-기계화 집단이 바라노비치로 접근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북쪽에 제7기갑사단, 남쪽에 제4기갑사단을 추가로 투입하여 저항에 나섰다.
7월 5일, 제 5근위전차군이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로의 진격에 가세했고, 7월 8일에는 제3벨로루시전선군의 기병-기계화 집단, 제5소총군, 제11근위군이 빌뉴스를 포위하여 독일군을 밀어내고 구원 병력을 차단했을 뿐 아니라 네만강을 향해 진격을 속개했다. 빌뉴스에서의 전투는 7월 13일까지 계속되었고, 제 5근위전차군은 시가전에 휘말려 손해를 보았다. 한편, 비아위스토크에선 제2벨로루시전선군이 4군과 3기갑군의 잔존병력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를 개시했고 결국 3만 여명의 독일군이 전사했다.
이날 독일 본토에서 아직 재편 중이던 제6기갑사단이 급하게 도착했다. 독일 제 6기갑사단은 적진을 30Km나 뚫고 들어가 수비대의 일부를 구원해 내는 데 성공했지만, 같은 날 소련군은 네만강에 도달했다. 그사이 바그라먄의 제1발트전선군이 폴로츠크를 점령했고, 폴로츠크에서 3기갑군의 잔존병력이 완전히 붕괴되어 37,000여명의 전사자와 7,000여명의 포로가 발생하는 대피해를 입었다. 인접한 제2발트전선군과 함께 드비나강의 양안을 따라 북서쪽으로 진격해 나갔다.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에서 새로 이동해 온 제2근위군과 제51소총군이 바그라먄의 전열에 가세하면서 이미 쇠약해진 중부집단군의 북익을 쳤다. 이 축으로의 잔격은 리가를 지나 발트해 연안을 노린 것으로, 독일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의 연결을 끊어 놓기 위한 것이었다. 이어서 7월 31일에 소련군이 리가 서쪽에서 리가만에 도달하면서 북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의 연결이 끊어졌다.
빌뉴스의 점령과 동시에 독일은 남쪽의 교통 요충지인 리다와 바라노비치를 잃었다. 소련 제50소총군과 제49소총군은 민스크 포위전을 종료한 뒤 원래의 전선군으로 복귀했고, 제2/1 벨로루시전선군은 각각 독일군 후방 깊숙한 곳의 그로드노와 비아위스토크를 노렸다. 1주일 만에 벨로루시 남부에서의 진격은 폴란드 국경을 향한 훨씬 큰 규모의 전투로 확대되었고, 제1벨로루시전선군의 좌익도 코벨 서쪽에서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했다.
소련군의 진격은 선두 기갑 부대가 소모되어 돌파력이 무뎌지고 보급의 어려움으로 인해 7월 중순부터는 서서히 둔화되기 시작했다. 소련군의 전력은 여전히 독일군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3주 동안의 전투나 기계적 마모에 의한 전차의 소실 때문에 전차 부대들은 수리와 재정비가 필요했다. 또한 같은 기간동안 소련군은 무려 400km를 전진했다. 너무나 급속한 전진으로 인해 소련군의 보급추진 능력은 한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제5근위전차군의 손실이 가장 심각했다. 5근위전차군의 지휘관인 파벨 로트미스트로프는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능숙한 지휘력을 발휘했고 10일간 217km를 주파하며 민스크 함락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하지만 제5근위전차군은 7월 16일 무렵에는 보유전차량이 종전의 524대에서 50여대로 줄어든 상태였다. 손실에 둔감한 편인 소련군에게도 경악할만한 피해이다 보니 로트미스트로프는 이 손실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 기갑-기계화군 총감으로 승진하긴 했으나, 표면상의 승진이었다.
어찌됐든 동부전선 중부에서 소련군의 진격의 기세가 꺾이는 듯 보였지만 소련군은 이제 나머지 동부전선 전체에서 추가적인 공세에 나서기 시작했다. 위기는 중부집단군을 넘어 인접한 지역으로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소련군은 기세를 몰아 바르샤바까지 계속 진격함과 동시에 폴란드 남부에서 루마니아 왕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루블린-브레스트 작전, 이아시-키시너우 작전을 속행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대로 바르샤바로 진격하던 소련군 주력은 지나치게 빠른 진격으로 인해 보급 문제가 생기며 더이상의 진격에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모델 원수가 중부집단군의 잔존병력을 긁어 모아 재편하며 전열을 가다듬고 주요교량을 파괴하는 등 소련군의 진격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모델 원수는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력차이가 10배 이상 벌어지고 중부집단군 전선에 예비대가 전혀 없는 시점에서 무모한 정면대결이나 히틀러의 정적인 선형방어에 매달리는 대신 유연하게 대응했다. 독일군은 이미 상당히 소모된 채 진격을 이어가는 소련군 선봉의 측면을 노려 짧지만 단호한 기습으로 끊임없이 타격을 가하며 후퇴했다. 한편으로는 모델은 후방지역에서는 온갖 증원병력을 긁어모아 저지선을 연속적으로 배치했다. 그 결과 7월 말에는 폴란드로 향하는 소련군의 진격속도가 눈에 띄게 둔화되었다.
특히 8월 경에는 발터 모델이 국방군, 무장친위대 기갑 사단 및 헤르민 괴링 강하 기갑 사단 등의 기갑 전력들을 긁어모아 바르샤바 코앞까지 진격해 온 소련군의 선봉 기갑부대에 역습을 감행했다. 독일군은 5호 전차 전력들을 이용해 바르샤바 인근의 라드지민에서 알렉세이 라드집스키가 이끄는 소련군 제2근위전차군을 대패시키면서 기적적인 방어에 성공했다. 결국 소련군의 공세는 바르샤바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종결되었다.
중부집단군을 향한 공세가 바르샤바 코앞에서 멈춘 상태에서 양측은 북쪽으로 눈을 돌렸다. 독일군은 북부집단군과 다시 전선을 연결하고 구해내기 위해 8월 중순부터 리가 부근에서 대규모 반격을 시작했다. 독일군이 곧 전선을 연결하는데 성공하면서 바그라티온 작전은 끝났다. 그렇지만 9월 중순부터 시작된 발트해 공세로 인해 북부집단군은 리투아니아로 후퇴하게 된다.
이후 소규모의 추가 공세를 통해 소련군은 9월 6일, 나레프강의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고 파벨 바토프가 지휘하는 65군이 이를 사수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도하 없이 곧바로 바르샤바로 향할 수 있었던 길목이라 독일군 입장에선 기필코 제거해야만 했던 교두보였고 그래서 기갑사단들을 투입해 교두보를 제거하기 위해 10월까지 전투를 감행했지만 바토프의 치열한 방어에 결국 교두보를 제거하는 것을 포기하고 물러나야 했고 결국 전선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한편 모델 원수는 소련군의 공세가 일단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자 이번엔 영미군에게 패배하여 궤멸 직전인 서부전선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서둘러 떠났다.
7. 결과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문자 그대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렸다. 동부전선의 독일 집단군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중부집단군은 이 작전에 의해 25~30개의 사단이 전멸하여 전투서열에서 사라졌다. 섬멸된 사단만 중부집단군 전력의 2/3 이상이었다. 제3기갑군, 제4군, 제9군은 다시 재건되기는 했다. 하지만 이미 섬멸된 사단들을 배속시킬 순 없다보니 이전보다도 장비와 훈련이 턱없이 부족한 신편 사단들이 배속되었고 그냥 이전 야전군과는 명칭만 같은 새로운 부대, 또는 잘 쳐줘야 약화된 군단(분견군) 정도 전력인 서류상의 야전군에 불과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여파 또한 히틀러와 최고사령부의 비상식적이고 혼란스러운 지휘[45]를 부추겼기 때문에 독일군 고위 장교들의 피해도 극심했다. 공세 개시 시점에서 3기갑군, 4군, 9군은 각기 3개 군단으로 구성되어 9개 군단이 있었다.[46] 바그라티온 공세 결과 9개 군단의 군단장 중에서 무려 4명이 포로가 되고 3명은 전사했다.[47] 특히 제4군의 경우는 군 예하 사단장 전원이 전사하거나 실종, 또는 포로가 되었다.재앙은 중부집단군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중부집단군이 섬멸당하면서 동부전선 자체가 무너져 내렸다. 북부집단군은 중부집단군 전선이 지나치게 서쪽으로 밀려나면서 라트비아의 쿠를란트에 고립된다. 북부집단군은 쿠를란트 집단군으로 개명되었고 종전까지 쿠를란트에 갇혀있다가 소련군에 항복한다. 북우크라이나 집단군과 남우크라이나 집단군 역시 바그라티온 작전과 함께 수행된 소련군의 공세에 대타격을 입었다. 특히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은 소련군이 루마니아 몰도바를 공격한 이아시-키시너우 공세에 휘말려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그 직후 루마니아 왕국이 소련과 휴전을 맺고 추축국에서 이탈하여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또다시 큰 손실을 입었다.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제시했었던 소련군의 종심돌파이론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소련군은 불과 5주 만에 700km를 진격했으며[48] 앞서의 동부전선에서의 두 주요 전투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에 비해 사상자도 적게 나왔고 독소전쟁의 대규모 전투들 중 최초로 소련군의 사상자가 독일군과 비슷하게 나온 전투이다.[49] 전과를 보면 두 전투를 능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소련은 승리를 기념하며 독일군 포로 5만여 명을 모스크바에서 행진에 동원했는데[50], 이때 독일군이 소련 영토에서 청소당했다는 의미로 독일 포로들이 지나간 다음 청소차들이 뒤를 이어 독일군 포로들이 걸어간 도로를 물로 청소하며 행진했다.
독소전쟁 발발 직후인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과 소련군의 병력 전투손실 차이는 1:5로 독일군의 압승이었지만 기습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스탈린의 후퇴 금지로 3백만 명이 포위되어 섬멸되거나 항복해 전체 병력 손실비는 1:20으로 재앙적 수준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소련군의 회복력을 과소평가했고 소련군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물량뿐만 아니라 전략과 전술의 성공과 같은 많은 측면에서 독일군을 따라잡으면서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에는 오히려 일방적 공격으로 독일군을 포위섬멸하고 전투에서 십만 단위의 포로를 획득하며 회복 불가능한 병력 손실비에서 경합우세가 되었다.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에는 독일군이 전투 손실비에서는 경합~경합우세이더라도 포로까지 포함하면 회복할 수 없는 병력 손실비 기준으로는 확실히 열세해졌고 소련군은 결국 우세한 교환비로 베를린까지 점령하면서 독소전 양측의 총 병력 손실 비율을 1:2.2, 전투 손실비는 1:1.4 정도까지 줄여 버린다. 독일군과 무장 친위대가 점령지에서 벌인 학살로 민간인+포로 등의 소련의 비전투 사망자는 독일의 몇 배에 달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마무리된 서방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역시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서부전선에서도 독일군 B집단군과 G집단군은 50만에 달하는 엄청난 손실을 입었고 프랑스에서 쫓겨났다. 1944년 6월에서 8월 기간 동안 독일군은 동서 양 전선에서 100만이 훌쩍 넘는 완전손실을 입었다. 나치 독일은 엄청난 손실을 입은 채 본토로 쫓겨났다. 연합군과 소련군이 독일 본토로 밀고 들어오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으나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는 종전을 위한 방법을 검토하는 대신 국민척탄병을 편성하여 인력을 쥐어짜는 등 전쟁을 포기하지 않고 광기를 부렸다. 연합군과 소련군은 제3제국 본토의 목전까지 도달했으나 이미 수백 km를 돌파한 상태여서 보급문제나 휴식과 재편이 필요하여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독일군 역시 엄청난 손실을 입고나서 계속 밀려나고 있었지만 아직 독일군의 전선이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다. 물론 당장에 붕괴되지 않았다 뿐이지 연합군이 독일 본토로 밀고들어오는 것을 저지할 능력도 없었고 패망은 시간문제에 불과했지만. 한편 제3제국 본토의 문앞까지 도달한 스탈린은 이제 관심을 동유럽과 발칸반도로 돌렸다. 독일본토로 진격하는 대신 먼저 발칸반도를 점령하여 이 지역을 소련의 영향권 내로 두기 위함이었다.
8. 여파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1944년 하반기에는 주로 루마니아와 헝가리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이 격돌하였다.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독일에게 남은 마지막 석유 공급원이어서 독일군도 발칸반도에서의 전투에 사활을 걸었다. 부다페스트 공방전, 봄의 새싹 작전, 빈 공방전 등의 격전이 연이어 벌어졌다. 하지만 이미 앞선 바그라티온 작전 등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독일군은 반격은커녕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것조차도 어려웠다.소련군이 자국에까지 진격해오자 헝가리와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등 다른 추축 동맹국들은 중립을 선언하거나 연합군 측으로 돌아서려 했다. 독일은 동맹국 내 친독파를 지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이들의 탈퇴를 막으려 했다. 이는 헝가리 국민단결정부 같이 성공한 예시도 있긴 했지만, 저 시점에서는 이미 동맹국 군대들의 상당수가 도망가거나 편을 바꿔서 소련군과 같이 독일군에 맞서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아예 대놓고 소련군 편으로 바뀌어 싸웠던 루마니아. 결국 히틀러가 안 그래도 불안정한 동맹국들의 정권들을 건드려 놓아서 동맹국들 내부에서 파시스트 세력들과 우익 세력들이 서로를 죽이는 사이, 소련은 이미 동맹국에 투입할 공산주의자들과 좌익 세력 인사들을 선정해놨고, 이후 동맹국들을 점령한 소련이 공산 정권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줬다.
발칸반도의 추축국들 이외에도 9월 초순부터 유고슬라비아 대부분이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게 넘어갔다. 핀란드 역시 소련에게 항복한 후, 핀란드에 주둔한 독일군들을 독일로 내쫓았고 그 과정에서 라플란드 전쟁이 발발했다. 사실상 이 전투로 독일은 모든 동맹국들을 잃고 완전히 고립된 것이다. 어찌됐건 소련군과 독일군의 관심이 온통 발칸반도 쪽으로 쏠려 있는 동안 독일 본토방면과 폴란드는 한동안 상대적인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소련군이 독일 본토로 본격적인 공세를 재개한 것은 독일군의 아르덴 공세가 실패로 끝나가던 1945년 1월 경의 비스와-오데르 대공세에서였다. 이 마지막 공세에서 소련군은 독일본토를 휩쓸며 베를린을 함락 시키고 엘베강까지 도달하며 유럽에서의 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다.
폴란드에서는 폴란드인들이 자체적으로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켜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소련은 모종의 이유로 이 봉기를 지원해 주지 않았다. 이때 소련이 이 봉기를 지원할 수 있었느냐 능력이 딸려서 없었느냐에 대해선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다. 양쪽 의견 모두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어 현재로써는 단정이 어렵다. 의도적으로 바르샤바 봉기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견해에 따르면 스탈린은 전후에 폴란드에 공산정권 수립을 원했고 바르샤바의 봉기군은 소련에 별로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정권 수립에 방해된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는 소련군이 바르샤바의 민족주의 봉기 세력과 함께 바르샤바를 해방하기보다는 봉기세력이 나치에게 철저히 말살되고 난 이후 손쉽게 바르샤바를 차지하려했다는 의견이다.
다만 최근의 학설로는 소련군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상황이라 지원해 줄 능력이 부족했다는 쪽인 듯, 그런데 소련이 무너진 후 공개된 문서들에서 스탈린은 막바지에 이미 바르샤바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하달한 상태였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수백km를 달려온 소련군 앞에는 전열을 정비한 독일군 사단들이 버티고 있었고 이들의 필사적인 파쇄 공격으로 소련군 부대들이 잇달아 패퇴하여 수십 km를 다시 밀려난 연후에야 비로소 스탈린도 공세를 종결하는 데 동의했다. 바르샤바의 입구에서 대규모 전차전이 벌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바르샤바를 방기했다는 견해는 다소 의문의 여지가 많긴하다. 또한 당시 스탈린과 접선한 폴란드 망명정부 측도 폴란드 지하군 측의 바르샤바 봉기에 대해 기꺼워하기보다는 무모한 시도라고 우려하는 내용의 서신을 스탈린 측에게 전달하였다.
결국 봉기는 독일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이후 독일군이 퇴각함에 따라 폴란드는 소련에게 점령당하고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9. 대중매체
- 게임 Steel Division 2가 바그라티온 작전 전체를 다루고 있다.
- Hearts of Iron IV의 대형 모드 중 하나인 Total war 모드에서 소련으로 플레이 시 역사대로 1944년이 지나면 발동 시킬 수 있다.
[1]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2] 제1벨로루시전선군 사령관[3] 제2벨로루시전선군 사령관[4] 제3벨로루시전선군 사령관[5] 제1발트전선군 사령관[6] 6월 22일~28일까지. 28일 이후부터는 중부집단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발터 모델이 지휘를 맡았다.[7] 중부집단군 사령관. 6월 28일 전까지는 에른스트 부슈가 사령관을 맡았다.[8] 제2군 사령관[9] 제4군 사령관[10] 제9군 사령관. 6월 28일 전까지는 한스 요르단 장군이 사령관을 맡았다.[11] 제3기갑군 사령관[12] 전격전의 전설의 저자이다.[13] 폴란드 증원군 7만 9천여 명 포함.[14] 전투원은 486,493 명.[15] 벨로루시 작전[16] 벨로루시 공격 작전 "바그라티온"[17] 영어 발음은 ba·gray·shn (대강 바그레이션 정도)[18] 그나마도 발터 모델 장군의 분투가 없었다면 독일군은 더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발터 모델 장군이 없었다면 연합군은 1944년안에 독일을 완전히 점령시킬 수도 있었다는 관측까지 나올 정도이다.[19] 1944년 6월 6일[20] 현 서부 우크라이나 일대[21] 당시 육군 동부 정보국은 이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소련군의 우세는 너무 확고하여 중부,북,남우크라이나 집단군 어디로든 동시에 압도적인 공세가 가능했다. 정보국은 벨로루시에서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프리피야트 습지대와 카파르티아 산맥 사이의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이 훨씬 중요했기에 중부집단군에 전력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이 지역을 담당한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개전이래 최대 규모로 증강되었고 작전의 1단계에서 독일군 일부 예비전력이 벨로루시로 빠지자 2단계 공세를 개시했고 당일 전선을 간단히 돌파했다.[22] 1944년 6월 독일이 보유한 기갑사단 28개 중 9개가 서부 전선 15개가 우크라이나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그나마 정수의 절반이상이라도 채우고 있던 13개 사단은 서부에 9개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에 4개가 있었고 이 중에서도 핵심전력인 완편 기갑사단의 경우 서부에 4개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이 3개를 보유 중이었다.[23] 중부집단군에 소속되어 있던 돌격포 여단 2개와 중전차 대대 1개도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보내졌다.[24] 이 여파로 바그라티온 작전 개시 당시 독일군의 기갑 전력은 서부전구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에 몰빵되어 있었다. 당시 북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이었던 모델은 적의 규모가 어떻든 이정도 기갑전력이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25] 바그라티온 공세 개시 이후 중부집단군에 증원된다.[26] 당시 동부 육군을 총괄한 육군 최고사령부 OKH는 전략 예비대가 사실상 전무했다.[27] 실제로 이 시점에서 이탈리아는 진작에 추축국에서 이탈하였고 핀란드는 소련군의 공세를 받아 이탈 직전이었다. 나머지 중요한 동맹인 헝가리와 루마니아 역시 이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28] 이 때문에 43년 말부터 만슈타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서부에 우선권이 부여되었고 44년 봄에는 육군 전력의 불과 53%의 전력만이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동부전선을 담당하던 육군 최고 사령부는 참다못해 따졌지만 서방 연합군을 몰아내면 당장 동부로 지원해주겠다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소련군의 공세가 임박했는데 전략 예비대가 수천km 떨어진 프랑스 해안에 있는 상황이었다.[29] 이는 당시 동부 전선을 제외한 국방군 고위 장성들의 공통된 망상으로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하자 해군 참모부 비망록에는 '어쩌면 짧고 강렬한 전투로 전쟁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적었으며 히틀러의 부관 슈문트는 이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30] 영국 처칠의 "멈추지 않는 폭격작전"(Unstoppable Bombing)으로 연합국은 영국, 튀니지, 소련에 각각 공항을 지어 폭격대가 기지복귀를 위해 선회해서 되돌아가다가 공격당해 격추당하는 일이 없도록 영국에서 뜬 폭격기가 독일을 폭격하고 튀니지의 비행장으로 쭉 날아갔다가, 튀니지에서 보급받고 다시 독일을 폭격하며 소련으로, 소련에서 다시 독일을 지나가며 영국으로 주둔지를 계속 옮겨가며 공격해대었다. 1943년 허스키 작전의 성공으로 이탈리아에 연합국 주둔지가 생기자 튀니지 비행장은 사실상 폐쇄하고 이탈리아에 새로운 비행장을 건설하여 더욱더 촘촘한 "멈추지 않는 폭격작전"을 실행했는데, 바그라티온 실행전에 몇몇 폭격비행단이 소련에 있는 연합군 소속 비행장에 주둔해 있던것을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으로 공격에 동원한 것이다. 당시 독일공군 전투기 총감이었던 아돌프 갈란트의 수기, "처음과 끝"에서 언급됨[31] Colonel T.N. Dupuy & Paul Martell, Great Battles on the Eastern Front(New York: The Bobbs-Merril Company, inc., 1982; ISBN-13: 978-0672526749), pp157[32] 구경 45mm~57mm[33] 구경 76mm 이상[34] 구경 82mm ~ 120mm[35] 제56 및 제262 보병사단. 전력이 축소된 사단들을 통합지휘하는 부대편성.[36] 제2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에 부분적으로만 참가했다.[37] 제137, 251보병사단[38] 중부집단군의 일선부대들은 자체적으로 꾸린 정찰대로 상당히 정확하게 적정을 파악하고 있었고, 전면에 어마어마한 소련군이 집결 중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위사령부 전체가 소련군의 기만에 낚인 히틀러의 눈치를 보느라 최면에 걸린 것 마냥 눈 앞의 위험을 무시하고 있었다. 마르티네크를 비롯한 일선 장병들은 예고된 재앙을 괴로운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39] 히틀러는 뒤늦게서야 53군단의 탈출을 허가하면서도 1개 사단은 비텝스크를 계속 수비해야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히터 중장은 비텝스크에 남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무시하고 사단 장병들을 이끌고 최후의 탈출 시도에 가담했으나 저지되었고 포로가 되었다.[40] 작전 개시 전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에 소속된 509중전차대대에게 상당수의 6호 전차를 넘긴 바람에 보유 중인 전차가 편제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상태였다.[41] 이후 전후까지도 살아남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쿠바 주둔 소련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U-2기 격추 사건을 지시했다고 알려져 있다.[42] 앞서 비텝스크 공세 동안 독일 제6군단은 남쪽으로 너무 밀려나서 제3기갑군 남쪽에 위치한 제4군으로 배속되었다.[43] 모델 장군이 상황을 인계받았을 때 전황은 그야말로 암울하여 독일군은 베레지나강을 건너기 위해 전면 후퇴 중이었지만 대부분의 도하 지점은 소련군이 장악한 상황이었다. 당시 독일군에게 남아있는 교량은 모길료프-민스크를 잇는 고속도로와 다리 하나뿐이었고, 이 때문에 수천에 달하는 차량, 수레, 많은 독일군들이 다리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독일 병사는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는데, 다음과 같다. "다리로 향하는 길이 가장 무질서했다. 수레와 차량들이 서로를 길에서 밀어내려 했다. 모두가 먼저 다리에 올라서길 원했다. 싸움과 욕설이 난무했고 헌병은 어떤 힘도 없었다."[44] 민스크 북쪽과 남쪽 측면을 담당했어야하는 3장갑군과 9군이 이미 박살나서 밀려났기 때문에 소련군은 그야말로 민스크까지 무주공산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45] 포위망 돌파를 금지한 것은 물론, 이미 돌파한 부대들에게 포위망에 되돌아가서 계속 수비하라는 정신나간 명령까지도 남발했었다.[46] 라인하르트 휘하 제3기갑군 예하에 3개 군단에 추가로 후방 치안부대인 군단규모의 국방군 벨라루시 사령부가 배속되었다. 이것까지 합치면 총 10개[47] 군 전체가 섬멸당한 제4군 예하 제39기갑군단의 군단장인 로베르트 마르티네크 대장이 6월 28일에 전사했고 뒤이어 군단장 대리가 된 오토 쉬네만 중장은 바로 그 다음날 전사했다. 제3기갑군 예하 6군단의 게오르그 파이퍼 포병대장도 공세 와중에 전사했다.[48] 이는 독일군이 프랑스 침공에서 이뤄낸 성과보다 규모 면에서 큰 것이지만, 전선의 규모로 보았을 때 단위면적당 배치된 병력의 수는 프랑스 침공 시기가 압도적으로 앞선다. 프랑스 침공은 양측 도합 800만을 초월하는 대군이 사실상 벨기에-네덜란드-프랑스 북부 정도의 전선이 가장 길었을 때조차 1,000km를 넘지 못하는 지역에 배치되어 벌인 전쟁이었고,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에는 양측 도합 300만여 명이 3,000km 이상에 늘어선 상태였으므로 당연히 부대 밀도와 포병 배치 밀도가 훨씬 낮았다. 바그라티온 작전 쪽이 프랑스 침공보다 돌파와 기동하기에는 훨씬 용이했다고 봐야 한다.[49]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치른 대규모 전투 중 독일군과 사상자가 비슷하거나 적게 나온 전투는 바그라티온 작전,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봄의 새싹 작전, 그리고 베를린 전투 뿐이다. 소련군의 승리로 끝난 다른 많은 대규모 전투들(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레닌그라드 포위전 등등)은 모두 독일군이 패배했을지언정 사상자 수는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대부분 초반의 전투가 독일군의 교환비가 우세하나 전쟁 후기에는 독일 공군, 전차, 포병 등 중장비가 거의 궤멸상태에 달해 알보병 위주인 독일군이 방어중임에도 교환비가 높지 않다. 서부전선의 미군과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50] 이들 포로 행렬의 최선두엔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포로가 된 독일군 장성 20여 명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