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스코프-오스트로프 공세 러시아어: Псковско-Островская операция 독일어: Pskow-Ostrower Operation 영어: Pskov-Ostrov Offensive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전선의 일부 | ||
▲ 가장 북쪽의 화살표를 따라 진격하는 제3 발트 전선군[1] | ||
▲ 공세 진행도[2] | ||
날짜 | ||
1944년 7월 11일 ~ 7월 31일 | ||
장소 | ||
프스코프와 오스트로프를 비롯한 러시아-라트비아 국경 | ||
교전국 | 소련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이반 마슬레니코프 (제3 발트전선군 사령관) | 요하네스 프리스너 (북부 집단군 사령관) 페르디난트 쇠르너 (북부 집단군 사령관)[3] |
결과 | ||
소련군이 라트비아에 진입 | ||
영향 | ||
발트 3국을 향한 공세의 시작 | ||
병력 | 병력 258,400명 | |
피해 규모 | 전사/실종 7,633명 부상 25,951명 | 전사 2,330명 실종/포로 2,998명 부상 9,483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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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스코프-오스트로프 공세는 바그라티온 작전과 함께 진행된 측면에서 발트 3국을 향한 5개 작전 중 두번째 작전이며 제3 발트전선군은 목표 달성에 성공하며 라트비아에 진입했다.2. 1944년 7월의 북부 전선
1944년 7월 현재 소련군은 중부집단군을 상대로 바그라티온 작전을 진행중이었다. 1단계 목표인 민스크 도달과 함께 전방 독일군 대부분을 포위한 소련군은 2단계 공세를 진행중이었다. 5일부터 제1 발트 전선군은 샤울라이 공세를 진행하며 리가 남쪽에 접근중이었고 제3 벨라루스 전선군은 빌뉴스 공세, 제2 벨라루스 전선군은 비아위스토크 공세를 진행하며 중부집단군을 남서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제1 벨라루스 전선군은 루블린-브레스트 작전을 준비중이었으며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도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이에 따라,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진행중인 부대들의 우익을 보호하며 북부집단군을 발트해로 몰아넣고 섬멸하기 위해 5개의 작전을 준비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리가를 점령하여 북부집단군의 16군, 18군, 나르바 분견군을 가두는 것이었다. 1단계 공세로 3개 전선군이 3개의 공세를 진행했다. 10일부터 제2 발트 전선군이 레제크네-드빈스크 공세를 진행하며 라트비아 남동부로 진입했고 이어서 제3 발트 전선군이 프스코프-오스트로프 공세를, 레닌그라드 전선군이 나르바 공세를 준비했다.
3. 전투 서열
3.1. 소련군[4]
- 제3 발트 전선군 ( 사령관 : 이반 마슬레니코프 상장[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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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독일군[7]
- 북부 집단군 ( 사령관 : 요하네스 프리스너 상급대장[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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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세 준비
제3 발트 전선군의 공세 목표는 남쪽으로는 제2 발트 전선군의 우익을 유지하고 북쪽으로는 나르바 분견군을 가두기 위해 타르투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6일에 스타브카는 제3 발트 전선군에게 공세 명령을 하달했으며 제2 발트 전선군으로부터 1충격군을 증원했고 소련군은 북쪽부터 42군, 67군, 1충격군, 54군을 배치했다. 공세의 1단계는 1충격군과 54군이 말루페-굴베네를 따라 라트비아 동부로 진군하는 것이었고 2단계는 42군과 67군이 각각 프스코프와 오스트로프를 점령하고 에스토니아 남동쪽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독일군 북부 집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이 시작된 이후 중부 집단군으로 8개 보병사단과 1개 기갑사단이 이동한 상태였으며 사령관 린데만 상급대장은 6월부터 16군과 18군을 즉시 퇴각시켜 리가와 카우나스 사이에 배치할 것을 주장했다. 자이츨러[10]를 필두로 육군최고사령부는 이를 통해 드비나 강으로 후퇴시켜 두 집단군의 전선을 절반으로 단축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확보한 예비대로 중부 전선에서 공격해 오는 적의 측면을 공격하여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르바 분견군은 지금 당장 후퇴해도 육로로 퇴각할 수 있을 지 장담할 수 없기에 해상 탈출을 계획중이었다.
그러나 7월 초가 되자 전략적 후퇴를 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고 전술적인 반격과 후퇴만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히틀러가 계속 후퇴를 거부할 만큼 프스코프-오스트로프 라인이 전략적 관점에서 중요하기는 했다. 나르바-프스코프-오스트로프-비텝스크 라인은 강을 따라 동부 방벽[11]의 얼마 남지 않은 부분이었고 특히 프스코프는 북쪽으로 나르바, 북동쪽으로 레닌그라드, 남쪽으로 비텝스크와 스몰렌스크, 동쪽으로 모스크바, 서쪽으로 리가와 이어지는 철도의 중심지로 북부 집단군의 보급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건 사령부에서 지도나 보고 있는 히틀러 입장이었고 전선이 무너져내리는 상황에서 독일군은 이미 철수를 시작하고 있었다. 제1 발트 전선군의 샤울라이 공세와 제2 발트 전선군의 레제크네-드빈스크 공세로 16군이 밀려나자 18군도 후퇴를 시작했다. 이에 스타브카는 즉시 공세를 시작할 것을 지시했고 제3 발트 전선군은 예상보다 빨리 공세를 시작했다.
5. 전개
전선군 좌익의 54군은 11일부터 공세를 시작했다. 프스코프에서 남쪽으로 약 150km정도 흘러가는 벨리카야 강(Velikaya river)을 따라 판터-보탄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었으나 이름뿐이었고 54군은 강 남쪽 끝 교두보에서 공세를 시작했다.[12] 12일에 프리스너는 후퇴를 요청했다. 불과 1주일 전에 똑같은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직위를 걸고 후퇴를 주장한 린데만을 해임시켰던 히틀러는 교체한 프리스너도 후퇴를 주장하자 분노하며 곧바로 거절했다. 16일까지 큰 교전은 없었고 제3 발트전선군의 본격적인 공세는 17일에 시작됐다. 공세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순차적으로 이어질 예정이었다.1충격군과 54군은 강을 건너 이틀만에 폭 70km, 깊이 40km의 돌파구를 형성했다. 이 지역은 38군단과 베게너 그룹의 연결지점이었으나 19일부터 독일군은 사실상 붕괴됐고 소련군은 각 야전군의 선도 사단에 전차여단[13]을 증원하여 추격을 시작했다. 1단계가 순조롭게 이어지자 전선군 중앙에서 1충격군이 알룩스네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21일 67군이 북쪽에서, 1충격군이 남쪽에서 진격하면서 오스트로프를 탈환했고 22일부터 42군이 프스코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42군은 도시 북쪽에 376소총사단, 동쪽에 128소총사단을, 67군은 남쪽에 326소총사단을 투입해 3면에서 공격을 시작했고 23일에 도시를 해방했다.
같은 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여파에서 간신히 벗어난 히틀러는 지휘관 교체를 단행하며 페르디난트 쇠르너 상급대장을 북부 집단군 사령관에 임명하고 프리스너를 남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에 임명하면서 둘의 위치를 바꿨다. 이후 소련군은 이즈보르스크를 거쳐 발가-타르투를 잇는 축선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으나 전력의 부족으로 거기까진 가지 못했고 남쪽에서 54군은 225소총사단이 27일에 굴베네를 탈환했다. 31일까지 소련군은 이즈보르스크-알룩스네-굴베네를 잇는 독일군의 "마리엔부르크[14] 방어선"에 도달했다.
6. 결과
공세 결과, 제3 발트 전선군은 타르투와 에스토니아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다. 남쪽에서는 제2 발트 전선군이 라트비아에 진입했고 북쪽에서는 나르바를 탈환한 레닌그라드 전선군이 타넨베르크 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제 발트 3국을 향한 공세는 2단계로 접어들었다. 제3 발트 전선군은 8월 10일에 타넨베르크 선 전투가 끝나자 곧바로 타르투 공세를 시작해 나르바 분견군 후방으로 진격했고 제2 발트 전선군은 마도나 공세를 시작해 리가 동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 5개의 작전을 통해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의 우측면을 보호하면서 북부 집단군을 몰아넣는데 성공했고 9월부터 시작된 발트해 공세에서 발트 3국을 탈환하고 쿠를란트에 북부집단군을 가두는 데 큰 공헌을 했다.[1] 3개의 전선은 각각 6월 22일, 7월 17일, 8월 29일의 전선 상황이다.[2] 우측 상단 진한 부분이 프스코프호이고 호수 바로 우측 하단의 ◎가 프스코프이다. 호수에서 전선따라 남동쪽으로 내려오면 조그만 호수가 있는데 거기가 알룩스네고 더 남쪽으로 내려오면 지도 남쪽 끝에 루반 호수가 있다. 지도 전체적으로 보면 잘 안보이는 빗금이 있는데 그게 국경이며 지도 오른쪽 절반은 현대 러시아, 왼쪽 중앙과 하단은 라트비아, 왼쪽 상단은 에스토니아다.[3] 23일부터[4] 7월 1일 기준[5] 7월 28일에 대장으로 진급[6] 7월 1일 시점에서는 제2발트전선군 소속이었으며 7일에 제3발트전선군에 배속됐다.[7] 7월 15일 기준[8] 7월 23일부터 페르디난트 쇠르너 상급대장[9] 7월 20일부터 50군단[10] 이 당시 자이츨러와 히틀러의 사이는 이미 끝장난 상태였으며 병가의 형태로 육군최고사령부 작전부장인 아돌프 호이징거 중장이 참모총장 대리를 맡고 있었다. 이 둘은 7월 20일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곧바로 해임된다.[11] 혹은 판터-보탄 라인[12] 이 교두보는 1944년 봄의 프스코프 공세에서 확보한 곳이었다.[13] 1충격군에 16전차여단, 54군에 122전차여단[14] 알룩스네의 독일 명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