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8:01:43

데미얀스크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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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얀스크 전투
Битва за Демиянск
Bataille von Demiyansk
Demyansk Offensive
파일:050505!.jpg
제2차 세계 대전독소전쟁의 일부
날짜 1942년 2월 8일 ~ 1943년 28일
장소 소련 러시아 SFSR 데미얀스크
교전국 [[틀:깃발|
파일:기.svg
기 명칭
]][[틀:깃발|
파일: 깃발.svg
깃발 명칭
]][[소련|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소련
]]
지휘관 북서전선군
세묜 티모셴코
파벨 쿠로치킨
게오르기 주코프

미하일 호진 특수군
미하일 호진
제16군
게오르크 폰 퀴힐러
에른스트 부슈

제2군단
발터 폰 브록도르프 알레펠트
쿠르트 위르겐 프라이허 폰 뤼초우(제12보병사단)
빌헬름 본스테트(제32보병사단)
에르빈 라우치(제123보병사단)

제10군단
크리스티안 한센
쿠르트 폰 티펠스키르히(제30보병사단)
테오도어 프라이허 폰 브레데(제290보병사단)
테오도어 아이케(SS 토텐코프 사단)
결과 나치 독일의 경이적인 방어전 승리.
전력 50만 명 10만 명
피해규모 30여만 명 사상 7만 5천여 명 사상

1. 개요2. 전투경과
2.1. 스탈린의 명령
2.1.1. 북서전선군의 진격2.1.2. 공수작전, 데미얀스크를 구원하다2.1.3. 독일군의 반격, 소련의 2차 공세 2.1.4. 방어전이 막을 내리다
3. 결과 및 영향

[clearfix]

1. 개요

1942년 1월부터 1943년 2월까지 데미얀스크 지역 일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방어전이다.

2. 전투경과

2.1. 스탈린의 명령

파일:b03111.jpg
T-34 1941년형과 함께 진격하는 소련군

1942년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소련군이 승리하자 스탈린은 크게 고무되어 계속적인 공세와 섬멸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당시 소련군은 1년 넘게 계속된 독일의 공세로 지친 상태 였다. 이에 전열을 가다듬고 재정비가 필요했으나 강철의 대원수는 그딴거 없었다. 스탈린은 총군부 사령관 주코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전진을 외쳤고 결국 북서전선군(Северо-Западный фронт), 칼리닌 전선군(Калининский фронт), 서부전선군(Западный фронт), 브랸스크 전선군(Брянский фронт)으로 구성된 200만의 군대는 모스크바 공방전 종료 그 다음날 다시 전투에 투입되어 공세를 개시하였다.

2.1.1. 북서전선군의 진격

파일:061111111111.png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소련군의 진격 흐름

데미얀스크 방면의 공격은 약 50만의 북서전선군이 담당하였다. 사령관 파벨 쿠로치킨은 데미얀스크를 지나 홀름을 휩쓸어 독일 북부집단군의 제16군을 밀어붙일 계획을 세웠다. 모스크바에서 패주한 독일군의 섬멸 뿐만 아니라 장기간동안 가해진 레닌그라드에 대한 압력을 약화시키기 위함 이었다. 1월 8일 북서전선군은 데미얀스크 초입의 발다이에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진격과정에서 진창과 습지대로 인해 그 속도가 현저히 저하되었고 그 상황속에서 독일 제16군, 특히 제2군단의 강한 반격으로 인해 돌파에 실패하면서 작전이 꼬이고 말았다.[1]

그런데, 남측의 칼리닌 전선군이 쓸데없이 눈부신 전공을 세우며 최대 100km를 돌파해 들어가면서 전선의 형태가 기묘해졌다. 동시에 돌파했어야 할 다른 군의 진격이 난항을 겪으면서 전선이 길게 늘어지고 칼리닌 전선군의 측면이 노출된 것이다. 그러자 스타프카는 북서전선군에 지원 명령을 내렸다. 이에 북서전선군은 데미얀스크의 남부와 북부를 동시 돌파하여 쇄도를 시도하였다. 제3충격군이 남측에서 출발해 홀름방향으로, 제11군과 제1충격군은 북측에서 출발해 스타라야루사를 뚫고 홀름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또한 속도를 올리기 위해 예비대인 제1, 2근위군단까지 투입해 전력을 강화하였다. 결국 홀름은 제3충격군에 의해 고립되었다. 이후 2월 8일 3개 군이 잘루츠예에서 조우하면서 독일 제2군단전체 제10군단 일부를 포함한 10만의 병력이 거대한 데미얀스크 포켓(Demyansk Pocket) 안에 고립되고 말았다.

그렇게 북서전선군의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2.1.2. 공수작전, 데미얀스크를 구원하다

파일:04 (1)11111111.jpg
데미얀스크 근교에 착륙한 Ju 52 수송기, 공수작전은 독일 육군 제2군단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데미얀스크에 10만의 거대한 전력이 고립되자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와 히틀러는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당장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던 것이 남부의 르제프에 제9군과 제4기갑군 50만이 150만의 칼리닌 전선군. 서부전선군과 대치하여 해당지역 지원에 총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만의 병력 또한 무의미하게 소모시킬 수도 없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공군을 통한 공수작전이었다. 방어진지가 충분한데다 기상악화로 인해 당장 소련군이 공세를 취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하여 공군원수 괴링과 총참모장 예쇼네크가 공수를 통한 물자조달을 제시하였고 히틀러가 이를 승인하면서 작전이 진행되었다.

2월 10일부터 본격적으로 공수작전이 시작된 이후 독일 제1항공군은 3개월간 14,500여 회에 이르는 공수를 실시해 65,000여 톤의 각종 물자와 30,000여 명의 증원 병력을 포켓에 고립된 제2군단에 쉴 새 없이 공급했다. 이는 독일 육군 제2군단의 항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2.1.3. 독일군의 반격, 소련의 2차 공세

파일:0974423.jpg

공수작전을 통해 물자가 조달되면서 제2군단의 전투력은 계속해서 유지되는 반면 소련군의 희생은 날로 늘어갔다. 스타프카또한 데미얀스크의 상황을 주시하면서 지속적으로 돌파지시를 내렸다. 조급해진 쿠로치킨은 특정 거점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꿨지만 결과는 이전과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르제프 일대의 주공을 담당한 칼리닌 전선군이 모델이 지휘한 독일 제9군에게 반격당하며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이는 북서전선군에 압력을 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전황이 바뀌자 제2군단은 방어에서 나아가 반격할 계획을 세운다. 제2군단이 로바트 강 서안의 라무셰포 가도를 통해 서북부로 진격하여 탈출하려하자 제16군은 이에 호응해 스타라야루사 방면에서 협공을 가했다. 결국 4월 22일 16군과 2군단 사이 연결선이 형성되면서 고립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후 전선은 급격히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여름 독일이 청색 작전으로 명명된 대공세를 펼치면서 전황을 다시 급박하게 돌아갔다. 소련은 독일이 청색 작전을 통해 이전에 달성하지 못한 모스크바 점령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모스크바에서 18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르제프와 그 북부의 데미얀스크의 돌출부제거를 위한 공세를 펼쳤다.

10월 쿠로치킨의 후임으로 티모셴코가 새로운 북서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티모셴코는 제11군으로 북부를, 제1충격군이 남부를 강타해 라무셰포 가도를 절단하고 제2군단을 전멸시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를 위해 550여대의 전차를 증강해 돌파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11월 28일 공격을 개시한 소련군은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에 초전부터 진격속도가 느려졌다. 독일군은 통로 확보를 위해 돌출부 전면에 배치된 병력을 돌려 통로 방어에 투입했다. 하지만 통로에 대한 소련군의 압박은 더욱 거세졌고 통로의 폭은 점점 좁아졌다. 이때 북부집단군 사령관 퀴힐러는 레닌그라드 공세에 동원된 병력중 3개 사단을 통로 방면으로 진격시켰다. 이들 부대는 가장 압박이 거센 통로 북측의 이반코보에 투입되었다. 결국 소련의 공세는 12월말에 한계에 다다랐고 그때까지 독일군은 여전히 통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북서전선군은 가도 동쪽의 로시노 방면으로 재차 공격을 했지만 역시 돌파에 실패했다. 결국 1월 12일 소련의 공세는 중단되었다.

대공세의 결과, 소련은 통로확보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1만여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전차 또한 400여 대가 파손되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독일군 또한 1만2천 여 병력손실이 발생했고 이들 대부분이 최정예병력으로 이뤄져 내상이 심각했다.

2.1.4. 방어전이 막을 내리다

파일:p0987654re3w.png

파일:b050876543222.jpg

경이로운 북부집단군, 특히 제2군단의 선전은 같은 시기 스탈린그라드의 참사에 침울해진 독일군부와 히틀러에 가뭄에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독일군부는 냉정하게 데미얀스크의 포기를 검토하였다. 스탈린그라드에서 30만의 병력이 그냥 개죽음산화한 상태에서 돌출부의 유지는 전력낭비를 심화시키는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진격을 통한 수복과 점령을 외친 히틀러 또한 군부의 지속적인 설득 끝에 후퇴를 승인하였다.

후퇴명령이 내려지자 제2군단은 신속, 은밀하게 후퇴를 준비하였다. 철저히 비밀속에 준비된 나머지 일선 병사들까지도 철군이 아닌 병력배치를 재조정하는 것으로 인식했을 정도다. 그리고 2월 중순 제2군단의 전병력은 철군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때 스타프카는 재차 티모셴코에게 데미얀스크에 대한 공세명령을 하달하였고 이에 티모셴코는 라무셰포 가도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제1충격군과 제11군이 남북에서 가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자 독일 제10군단이 방어에 나섰다. 티모셴코는 당황하여 예비대인 제34,35군까지 투입하여 완전섬멸을 시도했으나 계속된 독일의 지연전술로 인해 진격은 느려졌다. 결국 2월 27일 데미얀스크 일대의 독일군 전체가 로바트 강 서안으로 도하를 완료하면서 장장 1년간의 데미얀스크 전투는 막을 내렸다.

3. 결과 및 영향

공방전이 종료된 후 티모셴코는 작전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스타라야루사로 진격했지만 참패를 당했고, 결국 해임되었다.

데미얀스크에서의 방어전은 레닌그라드와 르제프에서의 분전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 데미얀스크가 계속 지켜짐으로써 남측의 르제프에 대한 압력을 완화시킬 수 있었고 레닌그라드를 공격하는 북부집단군의 측면을 지킬 수 있었다.

또한 대규모의 공수작전을 통한 지원은 새로운 전술을 등장시켰고 이후 전쟁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이때의 공수작전 성공은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라는 참극의 씨를 뿌리고 말았다.[2]

[1] 이 일로 나중에 스타프카는 북서전선군 사령관을 파벨 쿠로치킨에서 세묜 티모셴코로 교체했다.[2] 애초에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보급 작전은 작전의 규모를 생각하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다. 데미얀스크는 많아야 1개 군단이 고립되었지만, 스탈린그라드는 야전군 하나가 포위망에 갇혔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