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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폰 퀴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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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 독일 국방군 육군 원수
게오르크 폰 퀴힐러
FM Georg von Küchler
파일:Bundesarchiv_Bild_183-R63872,_Georg_von_Küchler.jpg
이름 Georg Karl Friedrich Wilhelm von Küchler
게오르크 카를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퀴힐러[1]
출생 1881년 5월 30일
프로이센 왕국 하나우[2]
사망 1968년 5월 25일 (향년 86세)
서독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복무 프로이센 왕국군 (1910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 (1918년 ~ 1933년)
독일 국방군 (1933년 ~ 1944년)
최종 계급 원수 (Generalfeldmarschall)
주요 참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레닌그라드 공방전
주요 서훈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

파일:external/www.lexikon-der-wehrmacht.de/KuechlerGeorgv_Generaloberst_RK_gemalt_v_r.jpg
퀴힐러의 스케치
[clearfix]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 국방군육군 장성이다. 최종 계급은 원수.

독소전쟁 이전까지의 전쟁에선 나름 유능한 지휘관이었으나,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미움을 산 나머지 1944년부터 지휘권을 빼앗긴 인물이다. 쿠르스크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 독소전쟁의 메이저급 전투에는 발도 붙이지 못해 독소전에 관심이 많은 밀덕에게조차 인지도가 별로 없다.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잘 이끌었으나,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떨어지는 북부집단군 소속이었던 탓에 그 활약상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으나 건강 문제로 감형받고 석방 후 사망했다.

2. 생애

2.1.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1881년 5월 30일 프로이센 왕국 융커 가문에서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00년 독일 제국군 소위임관해 제25야전포병연대로 배속되었다. 1907년부터 2년 간 하노버기병 학교에서 추가 교육을 받았다. 1910년 중위로 진급하고, 1913년까지 프로이센 전쟁대학(Preußische Kriegsakademie)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1914년 베를린의 프로이센 참모본부로 배속되었다.

2.2.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퀴힐러는 포대장으로서 서부전선에 참전하여 베르됭 전투, 솜 전투 등의 굵직굵직한 전투에 참가하며 경험을 쌓아 나갔다. 전쟁 중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으며 대위로 진급했는데,[3] 첫 참전 경험부터 헬게이트를 오지게 겪은 게 도움이 되긴 했던 모양. 이후 제206보병사단, 제8예비사단에서 참모장교로 활동하며 종전을 맞이했다.

2.3. 전간기

종전 후인 1919년부터 퀴힐러는 자유군단에 가입해 폴란드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자유군단 자체가 1차 대전 이후 실업자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퇴역 군인들이 많이 가입했던 단체라는 걸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홍위병 같은 삶으로는 이 자체로는 발전이 없다고 느꼈는지 퀴힐러는 독일로 돌아왔고 바이마르 공화국군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제1군단의 참모장교로 배속되었고, 국방성 교육부 등 여러 보직을 거쳤으며, 1924년 소령 진급, 1929년 중령 진급, 1931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1차 대전의 베르됭-솜 전투 참전 용사라는 타이틀이 도움이 많이 되었던 모양이다. 다음해인 1932년 10월 동프로이센에 있는 제1보병사단의 부사단장이 되었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588cdbdf4159122cb6222f2de7ded605.jpg
1933년 나치당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음에 따라 바이마르 공화국은 멸망하고 나치 독일이 수립되었을 때도 퀴힐러는 군에 계속 남아, 1934년 4월 소장[4]으로 진급하였다. 1년 뒤 1935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1937년 4월 1일 포병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때 퀴힐러는 리투아니아의 메멜란트 지방을 나치 독일로 합병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식으로 히틀러에게 충성을 바치면서 그는 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고 국방군 내 입지도 높아졌다.

2.4. 제2차 세계 대전

2.4.1. 폴란드 침공프랑스 침공

폴란드 침공 당시 퀴힐러는 페도어 폰 보크의 북부집단군 휘하 제3군의 사령관으로 참전하였으며, 퀴힐러의 부대는 단치히, 나레프를 점령하고 9월 17일부터 폴란드를 동쪽에서 침공한 소련군과 접선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공적으로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당시 독일군의 전투 지역에는 슈츠슈타펠 소속 무장친위대가 따라와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는 일이 잦았는데, 퀴힐러는 이를 불쾌하게 여겨 초기에는 잔혹 행위를 목격하면 바로 처벌하곤 했다. 그러나 퀴힐러가 군부 내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던 것은 바로 나치당에 충성을 바친 덕분이었으므로 무장친위대 대원들을 계속 처벌했다가는 자신의 입지도 줄어들 것을 염려한 퀴힐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민 학살을 묵인하고, 민간인 대상 범죄를 못마땅히 여기는 부하들이 나치당의 인종주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것조차 막았다. 이때 동프로이센 지방에서 인간 쓰레기짓을 하고 다니던 무장친위대 부대는 바로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휘하 부대였다.

파일:external/www.fpp.co.uk/Hitler_Brussels_010640.jpg
파리에서 승전 기념식에 참가한 퀴힐러와 아돌프 히틀러(左)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aa665c5720f8fa534ff5a2d77872edc1.jpg
1940년 파리 콩코드에서 열린 승전 기념 열병식 사진. 앞에 있는 장군들 중 2번째 인물이 퀴힐러이다. 맨 오른쪽에 있는 장군은 보크.

1940년에도 보크 원수의 B집단군 휘하 제18군 사령관으로 프랑스 침공에 참가하였다. 당시 제18군은 5개 보병사단, 1개 차량화사단, 1개 기갑사단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약체에 속하는 부대였으며, 그나마도 기갑사단의 전차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노획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제18군은 네덜란드를 빠르게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벨기에안트베르펜까지 진격했으며, 프랑스 진입 후 영불 연합군을 포위 섬멸하려 했으나 히틀러가 영국 해혐 도착 직전 부대 진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린 탓에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눈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건 퀴힐러는 프랑스 침공에서의 공로로 1940년 7월 19일 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

2.4.2. 독소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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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B08041,_Reval,_Besuch_General_Georg_v._K%C3%BCchler_in.jpg
▲ 1941년의 퀴힐러, 탈린 점령 이후 시찰에서
"칭기즈 칸 이래로 열등한 족속인 아시아의 패거리들이 우수 혈통인 우리 게르만족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땅에서 우리를 몰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쟁은 두 민족 간의 전쟁을 넘어선 그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두 개의 세계관, 바로 나치즘과 볼셰비즘의 전쟁이다." - 대 소련 공세를 개시하면서 휘하 장병들에게 했던 연설.
독소전쟁 이전부터 퀴힐러는 소련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휘하 장교들에게는 독일의 평화를 위해서는 소련을 몇백km 뒤로 후퇴시키는 정도가 아닌, 아예 절멸시켜야 한다고 할 정도. 소련군정치장교는 다 쏴 죽여야 한다고까지 했다.[5]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퀴힐러는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의 북부집단군 휘하 제18군 사령관으로 참전하였다. 소련군은 초기에 심한 피해를 입었고,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목표로 쾌속 진군했다. 여기에 겨울전쟁을 겪어 소련에 이를 갈고 있던 핀란드군도 참전했고 이로써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개시되었다.
2.4.2.1. 레닌그라드 공방전
파일:external/c1.staticflickr.com/8782493466_1e71fe38f8_b.jpg
▲ 1942년 소련 볼호프에서의 퀴힐러.

그러나 레닌그라드는 의외로 견고한 수비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여기에 레닌그라드 수비사령관으로 온 인물은 바로 할힌골 전투에서부터 이름을 날리던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였다.[6] 주코프는 혼신의 힘을 다해 무너져 가는 레닌그라드의 군기를 잡아 놓았고 덕분에 레닌그라드 점령은 계속 지연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히틀러가 모스크바 공방전을 위해 북부집단군 휘하 기갑 전력을 중부집단군으로 차출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더욱 차질이 빚어졌다.[7][8] 그런 주제에 레닌그라드 점령이 왜 이렇게 늦어지냐고 닦달했다.

북부집단군 사령관 레프 원수는 히틀러의 '보헤미아의 상병' 닉값하는 전략적 식견의 부족과 소련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에 염증을 느껴 자신을 북부집단군 사령관에서 해임해 달라고 건의했다. 1942년 1월 16일 부로 레프는 해임되어 전쟁에서 손 떼게 되고, 다음날인 17일 퀴힐러는 북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동년 6월 30일 원수로 진급했다. 상술했듯 퀴힐러는 나치당의 인종주의 정책을 지지했고 히틀러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군사령관에서 바로 집단군사령관으로 임명될 수 있었던 것. 후임 제18군 사령관으로는 게오르크 린데만 상급대장이 임명되었다.

퀴힐러는 레프가 시궁창 같은 레닌그라드 포위에서 후퇴를 계속해서 요청했으나 씹힌 걸 알고 있었기에 포위를 지속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안드레이 블라소프 휘하 제2충격군이 무리하게 포위망 안으로 들어오자 바로 갈아 버려 제2충격군을 전멸시키고 블라소프를 포로로 잡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지만, 레닌그라드의 생존 의지는 너무나도 강인했고 도시 점령은 요원해 보였다. 독일군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도시 밖에서 진이나 치며 밍기적거리는 핀란드군 때문에 열받는 건 덤.

지지부진한 교착 상태가 계속되자 히틀러는 만슈타인 원수를 보내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조공하도록 했다. 더불어 병력을 지원해 줄 테니 42년 9월 중으로는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만슈타인은 제11군의 일부를 지휘하여 레닌그라드로 도착하였으나, 이미 1년 전부터 독일군의 맹포격과 포위를 견뎌내면서 강인해질 대로 강인해진 철벽 도시를 아무리 명장 만슈타인이 도우러 왔다 해도 단번에 점령하는 건 무리였다. 여기에 지휘 체계도 엉망이 되었는데, 엄연히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주역은 북부집단군 사령관인 퀴힐러였으나 만슈타인은 당시 촉망받는 독일군의 에이스. 퀴힐러라도 만슈타인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같은 원수 계급이기도 했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Bundesarchiv_Bild_183-R63872%2C_Georg_von_K%C3%BCchler.jpg
▲ 1943년의 퀴힐러

포위전의 실질적 이행을 담당했던 게오르크 린데만 제18군 사령관은 퀴힐러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 훌륭한 포위전을 보여 주었으나, 해가 넘어갈수록 이미 레닌그라드 점령은 불가능해졌다. 여기에 히틀러가 쿠르스크 전투의 성공에 정신이 팔려 버리면서 레닌그라드는 이미 아오안이 된 상태. 병력이 필요해도 북부집단군으로 충원될 가능성은 없었다. 더 줘도 모자랄 판국에 계속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으로 빼돌리는 바람에 북부집단군은 이름만 집단군이지, 1943년 말에는 보병사단 40개가 전부로, 기갑사단, 심지어 기갑여단조차 없는 말 그대로 알보병 덩어리였다. 설상가상으로 1944년부터 키릴 메레츠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이 대대적인 반격 공세를 가해 왔고, 린데만은 병력의 철수를 주장했으며, 퀴흘러도 그에 동의해 872일 만에 길고 길었던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소련군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았고 퀴힐러가 후퇴를 요청하자 바로 북부집단군 사령관에서 해임했다. 전략적 후퇴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히틀러로서는 3년 동안 지속된 공방전이 독일군의 후퇴로 끝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44년 1월 말, 후임 북부집단군 사령관으로는 발터 모델 상급대장이 임명되었다. 생애 처음으로 집단군사령관 자리에 정식 임명된 모델은 '방패와 검' 작전을 승인받아 북부집단군을 판터 라인까지 퇴각시켰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3월 31일에 원수로 진급하였다. 이후 레닌그라드 전선이 안정되자 모델은 곧바로 남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모델의 요청으로 함께 북부집단군으로 전임되었던 요하네스 프리스너 보병대장이 7월에 상급대장으로 진급하며 모델, 린데만 상급대장의 뒤를 이어 북부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한다. 이는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무너져 내리던 독일군 지휘를 안정화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야전에서 물러나 있던 중 히틀러 암살계획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으나 거절했다. 아직까지는 충성심이 남아 있었거나,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다고 생각했던 모양. 그리고 이 암살 계획이 장대하게 실패하며 목숨을 부지했다.

2.5. 전후

파일:external/www.ushmm.org/22441.jpg
재판에 회부된 퀴힐러.

1945년 나치 독일이 멸망하고 뉘른베르크 최고사령부 재판이 열리자 퀴힐러도 당연히 기소되었다. 죄목으로는 레닌그라드 포위 당시 소련 파르티잔에게 가해진 가혹 행위를 지시했다는 것이 꼽혔고, 1948년 10월 27일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48년에 이미 67세의 고령인 데다가 지병까지 앓고 있어서 8년형으로 감형되었고 그마저도 3년 더 줄어 1953년 석방되었다.

파일:external/ww2gravestone.com/kuchler.jpg
퀴힐러의 묘비.

이후 회고록을 집필하며 은거 생활을 하다가 1968년 사망했다.

3. 평가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실질적 주역. 레프 원수가 1942년 초에 해임되고 후임 북부집단군 사령관으로 퀴힐러가 되면서 2년에 이르는 포위전을 무리 없이 잘 이끌어 나갔다. 이 전투에서 입은 인명 손실은 소련군이 더 컸으며, 거의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남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에 상당수 기갑 병력을 차출당하면서도 포위망을 뚫리지 않고 잘 버티게 한 퀴힐러의 군사 지휘는 북부집단군 사령관으로서 나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퀴힐러는 단순 사령관이 아닌 육군 원수였고 육군 내 최고참이기도 했다. 그런 퀴힐러는 히틀러에게 후퇴를 주장하고도, 정작 대규모 집단군이 후퇴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오토 카리우스의 회고록 '진흙 속의 호랑이'를 보면 북부 집단군이 퇴각할 당시 목적지인 판터 라인은 이름만 방어선일 뿐 '오래 전에 파놓은 참호 몇 개'가 전부라고 기술되어 있을 정도인데, 오죽하면 발터 모델 상급대장이 북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자마자 직접 전선을 시찰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16군 예하의 공병부대를 전부 차출하여 판터 라인을 제대로 된 방어진지로 재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북부 집단군 후방 방어선 부재의 이유는 히틀러의 후퇴 불가, 후방 방어선 구축 불가 명령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상당수 독일군 장성들이 기갑부대가 주력이 된 기동전 교리가 정립되면서, 후방 진지를 구축한 방어 작전을 1차 대전 시대의 낡은 교리로 취급했던 것도 큰 이유였다. 동부전선 3개 집단군 중 가장 많은 기갑 병력이 집중되었던 남부 집단군 장성들이 특히 이런 성향이 강했으며, 남부 집단군에서 오랫동안 종군한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의 《Panzer Battles》을 보면 패전 후에도 이들의 주장은 변함 없음을 보여준다. 북부 집단군에서 퀴힐러 또한 그러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레닌그라드로의 진격-포위까진 성공적이었으나 점령이 실패로 끝나는 것이 확실한 시점에서도 어떤 대비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포위가 실패로 돌아갈 것을 알았으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퇴각 준비를 해야 했는데 육군 원수 지위에 오른 사람이, 자신이 지휘하는 집단군이 보병 위주의 전력이었음에도 거점이 될 방어 진지 하나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은 군 지휘관으로서 퀴힐러의 근시안적인 판단력을 보여준다.

또한 나치당에 과도하게 충성한 점, 그로 인해 폴란드 침공 당시 무장친위대에 의해 자행되던 민간인 학살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은 점도 오점으로 남는다. 비록 아인자츠그루펜이나 오스카 디를레방어 같은 A급 전범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으나 군인으로서 민간인 홀로코스트에 동조했다는 점에서 후대의 가혹한 평가는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한창 진행되던 1941년 10월 10일, 남부집단군 휘하 제6군 사령관 라이헤나우는 이른바 강조 명령(Severity Order)을 내렸다. 아래는 그 일부.
유대-볼셰비즘에 대항하는 이 전역에서 최고로 중요한 목표는 유대-볼셰비즘의 힘의 원천을 완전히 파괴하고 유럽 문명에서 아시아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동부전선에서 한 명의 장병은 전통적인 전쟁 방식에 따라 싸우는 사람뿐만이 아닌, 국가적 구상을 가혹할 정도로 대표할 만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로 우리 장병은 유대인이라는 하등 인종에게 가해져야 하는, 가혹하지만 정당한 심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The most important objective of this campaign against the Jewish-Bolshevik system is the complete destruction of its sources of power and the extermination of the Asiatic influence in European civilization. ... In this eastern theatre, the soldier is not only a man fighting in accordance with the rules of the art of war, but also the ruthless standard bearer of a national conception. ... For this reason the soldier must learn fully to appreciate the necessity for the severe but just retribution that must be meted out to the subhuman species of Jewry.)
즉 동부전선의 장병들은 유대인-볼셰비즘을 절멸시키는 전사로서 싸워야 한다는 것. 이 정신 나간 문서를 라이헤나우가 타 부대에 공람시켰을 때 퀴힐러의 직속 상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는 그에 격렬하게 반대했고, 중부집단군 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 원수 또한 "개소리하지 마라"는 반응으로 일축했다. 그리고 룬트슈테트는 그 명령을 충실히 따라 후대까지 욕 먹는다.

직속 상관인 레프 원수조차 이런 정신 나간 명령을 반대했지만, 퀴힐러는 히틀러의 미움을 사 자신의 입지가 약화될 것을 걱정해 슈츠슈타펠의 잔학 행위를 막지 않았고, 독소전쟁 직전에는 소련을 절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포로로 잡힌 소련 파르티잔에게 가혹 행위를 지시했고 이 때문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퀴힐러가 나치의 정신 나간 인종주의 정책에 동조했던 전범인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4. 진급 내역

  • 1901.08.18: 소위(Leutnant)
  • 1910.08.18: 중위(Oberleutnant)
  • 1914.10.08: 대위(Hauptmann)
  • 1923.04.01: 소령(Major)
  • 1929.01.01: 중령(Oberstleutnant)
  • 1931.05.01: 대령(Oberst)
  • 1934.04.01: 소장(Generalmajor)
  • 1935.12.01: 중장(Generalleutnant)
  • 1937.04.01: 포병대장(General der Artillerie)
  • 1940.07.19: 상급대장(Generaloberst)
  • 1942.06.30: 원수(Generalfeldmarchall)

5. 주요 서훈 내역

  • 1914.11.20 : 2급 철십자 훈장
  • 1915.01.08 : 1급 철십자 훈장
  • 1917.07.11 : 호엔촐레른 왕가 검 기사 십자 훈장
  • 1939.09.30 : 기사 철십자 훈장
  • 1943.08.21 :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

6. 대중매체에서

세계정복자 3과 4에서는 숨어시어러 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퀴힐러'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독일 헤센 주 하나우[3] 언제 진급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1차 대전 발발 초기에 진급했다고 설명하는 글도 있고 전쟁 도중 진급했다고 하는 글도 있다.[4] 독일군의 계급 체계에는 준장이 없어 소장이 장관급 장교의 첫 단계이다.[5] 물론 정치장교의 무차별 살해는 결과적으로 독일에게 독으로 돌아왔다. 죽을 위기에 처한 정치장교들이 전황이 불리해졌을 때조차 항복하지 않고 오히려 싸움을 독려하여 전투가 훨씬 더 길어지게 됐기 때문.[6] 재밌게도 퀴힐러와 주코프는 둘다 성인, 제오르지오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7] 사실 북부집단군 자체가 중부집단군, 남부집단군에 비해 전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중부집단군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목표로 한 탓에 강력한 전력을 배정받아 그 유명한 하인츠 구데리안, 헤르만 호트 휘하 기갑군이 주공을 맡았고, 남부집단군에는 루마니아군, 헝가리군, 이탈리아 왕국군, 슬로바키아 의용군 등이 편제되어 있는 데 반해, 북부집단군에는 제대로 된 기갑 전력이라곤 에리히 회프너의 제4기갑군밖에 편제되어 있지 않았다. 안 그래도 약체인데, 도시 점령을 위해 한 대의 전차가 귀한 상황에서 그런 명령을 내리면 당연히 점령이 더더욱 늦어질 수밖에 없다.[8] 북부집단군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이 블로그를 참조하기 바람. 북부집단군의 편제, 행적에 관해 17편의 글로 정리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