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22:17:30

르 파라디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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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Le Paradis massacre
독일어: Massaker von Le Paradis
프랑스어: Massacre du Paradis
파일:massacre-long_orig.jpg
학살 당시 대위의 회상 그림
파일:paradismassacre1-280_orig.jpg
오른쪽 끝의 숲이 학살 현장

1. 개요2. 르 파라디 전투3. 학살4. 이후

1. 개요

르 파라디 학살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1940년 5월 27일 프리츠 크뇌힐라인이 지휘했던 SS 토텐코프 사단영국 육군 포로 97명을 학살한 전쟁범죄이다.

2. 르 파라디 전투

됭케르크 철수작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 르 파라디에서 영국 육군 왕립 노퍽 연대 소속의 소규모 영국군 중대는 독일군의 진격을 최대한 저지하기 위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때 르 파라디를 공격한 제2 SS보병여단에 맞서 5시간 넘게 저항했으나 탄약이 소진되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본부와의 연락도 두절된 채 후퇴를 거듭하던 도중 한 가정집에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포위당하고 사방에서 독일군이 접근하는 가운데 어떠한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영국군 생존장병들은 결국 항복을 결정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이 선보인 놀라운 은신 및 정밀사격 능력에 독일군의 사상자도 만만치 않았기에 항복 후 보복당할 것을 우려한 영국군 생존병들은 그들이 전투했던 동쪽의 제2 SS보병여단에 항복하는 대신 새롭게 서쪽에서 접근하고 있었던 프리츠 크뇌힐라인이 지휘하는 SS 부대에게 백기를 들고 항복하였고 결과적으로 이는 잘못된 선택이 되고 말았다.

3. 학살

진격하기 바쁜 마당에 포로를 받아줄 마음이 없었던 크뇌힐라인은 항복한 영국군 포로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뒤 인근 목초지로 압송한 후 그 곳에 있는 한 헛간 외부의 벽에 나란히 줄 세워서 근거리[1]에서 MG34 중기관총 2정으로 사격을 가해 학살했다. 수 초만에 백여명의 영국군 포로들은 전부 쓰러졌고 크뇌힐라인은 부하들에게 아직 숨이 붙어있는 포로들을 총검으로 찔러 죽이라고 직접 명령했다.

이 학살로 총 97명의 영국군 포로들이 살해되었는데, 기적적으로 앨버트 풀리 이병(Private Albert Pooley)과 윌리엄 오캘러한 이병(Private William O'Callaghan)이 살아남았다. 이 둘은 마을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숨어 지냈다. 하지만 그들을 돌봐주는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주민들은 영국 병사들의 동의 하에 자발적으로 독일군에 신고했다. 이들은 다행히 독일 육군 제251보병사단 소속 육군 병력에게 붙잡혀 야전병원에 보내져 비교적 편한 포로생활을 지냈다.

4. 이후

1943년 여름 본국으로 돌아온 풀리 이병은 영국군 지휘부에 독일군의 학살행위를 고발했으나 지휘부는 문명국이라는 독일이 영국군을 상대로 그러한 만행을 자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의 진술을 묵살했다. 그러나 전후 1945년 두 번째 생존자인 오캘러한이 영국에 돌아와 풀리의 진술을 뒷받침하고 언론에도 대서특필되자 영국 정부는 그제서야 학살에 대한 공식적인 조사를 시작했고 그 때까지도 살아있었던 크뇌힐라인을 긴급 체포해 1948년, 전범재판에 회부했다. 두 생존병이 증인으로 참석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프리츠 크뇌힐라인은 이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교수형을 언도받고 1949년 처형되었다. 다만 학살에 가담한 다른 SS 병사나 장교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살이 이루어진 르 파라디 근처에서 영국군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집단매장된 구덩이가 또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르 파라디 학살 외에도 다른 곳에서도 SS가 포로학살을 동시다발적으로 자행했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보인다.
1970년 학살이 이루어졌던 르 파르디의 헛간의 외벽에 추모패가 건립되었으며 2021년에는 노리치 대성당에 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폭풍 속의 씨앗의 저자인 헤르베르트 브루네거가 당시 토텐코프 사단 소속으로 이 현장에 있었다. 후에 학살에 대한 증언도 하였고 노리치 현지 언론인 이스턴 이브닝 뉴스[2] 1985년 3월 27일자 신문기사에서 보도되었다. 단 기사에서는 오류로 인해 당시 호텔 종업원이였다고 소개되어있다.


[1] 학살 이후 현장조사를 위해 현장을 방문한 SS 종군기자의 보고에 따르면, 다수의 시체들의 두개골이 부서진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근거리에서 발포가 이루어졌음이 확실하며 학살당한 포로들의 시체의 절반은 심각한 시신훼손으로 신원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였다.[2] 현재 노리치 이브닝 뉴스(Norwich evening news)로 사명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