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무장친위대 기갑상급대장 요제프 디트리히 Josef Dietrich | |
이름 | Josef "Sepp" Dietrich 요제프 "제프" 디트리히 |
출생 | 1892년 5월 28일 |
독일국 바이에른 왕국 하방엔 | |
사망 | 1966년 4월 21일 (향년 73세) |
서독 루트비히스부르크 | |
복무 | 친위대 (1931년 ~ 1945년) |
최종계급 | 무장친위대 기갑상급대장 |
신체 | 166cm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주요 서훈 | 금강석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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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컬러사진 |
2. 행적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육군 병사로 입대하여 바이에른 4야포연대에 포병으로 배치됐다. 이후 전차 승무원으로 차출[1]됐고, 부상을 입어 군병원 입원 중 종전됐다. 여기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전투 도중에 불능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자폭하게 한 전차에서 디트리히를 위시한 전차병들이 빠져나와 도망갔는데 도망가던 디트리히는 전차에 놓고 온 술병이 생각나서 그걸 회수하려 적군의 총탄 속을 뚫고 불타는 전차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런 용기와 대담 덕분에 디트리히는 그 전차부대에서 유명인이었다고 한다. 이런 최전방에서의 활동으로 디트리히는 1급·2급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1차대전 때의 1급 철십자장은 사병 신분으로 받는 것이 거의 2차대전 때의 기사철십자장급으로 힘든 것을 감안하면 대단하다 할 수 있다.그 후 주로 예비군들이 모인 우익단체 자유군단에서 활동하다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당에 가입하면서 SS 내에서 특유의 난폭성과 아돌프 히틀러를 향한, 이성을 잃은 채 시비를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수용하여 신뢰하는 충성으로 말미암아 주목받게 된다. 나치당이 집권하던 시기에 돌격대의 에른스트 룀을 제거하는 작전의 책임자였으며, 이후 정치력을 가지고 성장할까 두려워한 하인리히 힘러에게 견제받았다고도 한다.[2][3]
세계대전 발발 직전 무장친위대의 창설을 승인한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제1SS기갑연대 '총통경호대 SS 아돌프 히틀러(LSSAH)'의 첫 연대장이 되며, 이후 LSSAH는 서부전선에서 다대한 공을 세워 규모와 장비의 확대와 함께 곧 여단, 사단으로 승격된다. 이후 인사 이동으로 영전하여 창설 시부터 함께했던 LSSAH를 떠나 대전 기간 대부분을 동부전선에서 보냈으며, 제6SS기갑군 사령관을 마지막으로 종전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무장친위대 기갑상급대장 디트리히 |
대전 말기에 이를 무렵, 디트리히는 원수 지휘봉을 탐냈던지 아돌프 히틀러에게 승진을 청원했다. 이를 받아들인 히틀러에 의해 아르덴 대공세가 성공하는 대로 민족원수(Volksmarschall)라는 계급을 받고 원수봉을 쥘 예정이었으나 공세가 참담히 실패하자 수포가 됐다. 진급 예정 시 받기로 하고 미리 만들어 둔 원수봉과 계급장은 베를린 공방전 이후 소 군정기때 분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돌프 히틀러에게 열심히 충성한 전력이 있는데다가 점령지 잔학 행위 대명사인 무장SS의 유일한 기갑상급대장으로서 최고급 지휘관이었으며 부하인 요아힘 파이퍼가 저지른 '말메디 포로 학살'을 묵인한 혐의로 전범 재판에 기소되었지만 사형을 면하고 금고 25년을 선고받았고 그마저도 1955년에 가석방됐다.
펠릭스 슈타이너, 파울 하우서, 빌헬름 비트리히, 쿠르트 마이어 등 SS 원로들과 함께 무장친위대 상조협회(HIAG)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남은 생애를 무장친위대의 전쟁 범죄 책임을 부정하는 자기 변호와 역사 왜곡에 쏟았다. 이후 1966년 사망했다.
3. 평가
세계 대전 기간 디트리히는 특유의 카리스마와 부하들의 활약으로 유명했는데, 군 경력은 하사관이 전부고 고등 군사교육을 수료한 적은 없기에 그 후에 알려진 부하들의 증언과 기록에 의하면 잘해야 대대장이나 연대장급 인재였다고 한다. 사단급을 지휘하기엔 무리였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사단장, 군단장에 나중에는 군사령관이었으므로 보좌관들은 고생이 꽤 심했다고 한다.한 예로, 한 육군 장교가 디트리히 앞에 작전 지도를 펼쳐놓고 1시간 설명했지만 디트리히의 반응은 "음...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결국 그 장교는 '저런 돌머리에게는 뭘 어떻게 설명해도 소용없다'고 좌절하고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다.
책 『히틀러의 장군들』을 쓴 저자는 그 책에 디트리히를 무능하면서 전후를 고려하지 않고 내닫거나 덤비기만 한 사령관으로 표현한다(동 책의 470페이지 참조).
그런데도 LSSAH 소속 부하들에게는 세계 대전 기간 내내 '파파 제프'라 불리면서 애정이 담긴 존경을 받았으며 1966년 디트리히가 죽자 장례식장에는 옛 부하 7,000여 명이 모여들었다. 그런 걸 보면 나치즘의 광신자였지만 인격이나 지휘관으로서의 덕망은 상당한 수준이었던 듯하다.
구데리안, 에르빈 롬멜[4] 등의 당시 독일군 인사들이 디트리히를 대상으로 해 전우애가 대단하고 상당한 카리스마가 있는 인재라고 한 묘사를 보면 그 나름대로 지도력과 개성이 있었던 인재라고 간주할 수도 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정예 보병부대인 돌격대에서 복무한 것은 디트리히의 독특한 지도력을 설명할 수 있는 일면으로 간주되지만, 객관적으로 전쟁 중에 나타난 디트리히의 군사상 능력으로 보았을 때 아돌프 히틀러의 무조건 밀어주기[5]가 아니었다면 군의 고위직은 꿈꾸지도 못했으리라는 시각도 있다.
본인 자체의 군사적 역량은 부족하지만, 덕망과 카리스마가 있고 인간관계가 뛰어난 점을 봤을 때 참모들을 잘 조율하고 활용하는 데 재능이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독일군의 놀라운 성공 요인 중 하나로 항상 뛰어난 참모 체계가 거론될 정도로 독일군의 참모진은 우수했으니, 우수한 부하들을 잘 활용할 줄 알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사령관으로서 준수한 수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이 전략과 전술에 무지하더라도, "누구누구가 이쪽으론 유능하니 이때는 얘가 하자는 대로 하면 이길 수 있으니까 걍 걔가 시키는 대로 하자."고 정확히 판단하는 능력과 수용력이 있다면 자신의 무지는 꽤 보완할 수 있는 것이다.[6] 마치 역사상 최고의 군사 천재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한신이 '장수의 장수'인 유방의 아래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7]
4. 기타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의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는 탁월한 기갑 지휘관으로 묘사된다. HoI2 DA 시리즈에서는 기본 숙련도 4, 최대 숙련도 8에 기갑 지휘관 스킬을 깔고 들어간다. 실제로 확실히 명장이었고 1940년 프랑스 침공,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대활약했던 에리히 회프너가 기본 숙련도 4에 최대 숙련도가 7이며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장군 중 하나였던 헤르만 호트가 기본 숙련도가 3이다. 쉽게 말하면 이 게임상에서는 디트리히 > 회프너 > 호트라는 소리다. 해당 시리즈가 원래 미국, 소련은 엄청나게 너프하고 독일은 터무니 없이 강화해서 밸런스를 맞춘 물건이라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 Hearts of Iron IV에서 장군으로 등장한다. 명석한 전략가와 기갑장교 트레잇이 달려있으며 능력치가 출중하다.
- 위의 게임의 대체역사 모드인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 부르군트 SS 기사단국의 장군이자 내무장관으로 등장한다.
{{{#!folding [하이드리히 루트 스포일러]
독일내전에서 하이드리히가 승리하고 SS 군벌들이 난립하자 디트리히는 독일이 내전의 위기가 고조되어 환멸감을 느끼고 일부 바이에른 지역을 포함한 노이반슈타인 성을 장악하고 '바이에른 공작'이라고 선언하며 흑색군단이라는 군벌을 만들고 수장이된다.
[1]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차 A7V는 총 생산 대수가 21대에 불과했다. 7대 이상 투입된 전투가 없을 정도다. 여기에 뽑힐 정도였으면 최소한 위에서 시키는 것만 잘 하면 되는 사병 신분에서의 능력은 인정받았던 셈이다.[2] 그러나 힘러 본인도 돌격대 시절 룀을 건너뛰고 바로 히틀러에게 충성한다는 이유로 돌격대 상층부에게 미움받았던 걸 보면 도긴개긴이다.[3] 힘러는 SS 대원들이 SS의 장관인 자신에게 충성하기를 원했는데, 힘러를 거치지 않고 히틀러에게만 순수하게 충성하는 디트리히에게 불만을 가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힘러는 사사로운 기록에 디트리히가 자기가 원하는대로 하다가 뭔가가 필요할 때만 SS를 찾는다고 험담하기도 해서 나중에는 무장친위대로 밀어내서 정치권력에서 멀어지게 했다는 설이 있다. 나치당 내의 온갖 더러운 정치 파벌 투쟁을 생각해보면 이것도 꽤나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4] B집단군 사령관 재직 중 디트리히를 대상으로 해 "디트리히라면 믿을 수 있다"라고 평가한 적 있다.[5] 히틀러도 요제프 디트리히를 과감한 기병돌격으로 유명했던 자이틀리츠나 치텐에 버금간다고 말했지, 지성이 넘치던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대 몰트케와 버금간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히틀러도 디트리히의 군사방면 수준이 별로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던 셈이다.[6] 120년전의 어느 원수의 성향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볼 수있다. 기병-기갑이라는 공통점도 있고.[7] 물론 유방이 군사적으로 무능하다는 이야기 자체가 사실과 다름을 감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