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7 11:08:06

파울 하우서

파일:슈츠슈타펠 문장.svg 친위대의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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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무장친위대 상급대장
파울 하우서
Paul Hausser
파일:Paul_Hausser.png
SS중장[1] 시절의 하우서
이름 Paul Hausser[2]
파울 하우서
출생 1880년 10월 7일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국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
사망 1972년 12월 21일 (92세)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연방공화국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루트비히스부르크
복무 독일 제국군 (1899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 (1918년 ~1932년)
친위대 (1934년 ~ 1945년)
최종계급 독일 국가방위군 중장
돌격대 대령 (연대지도자)
무장친위대 상급대장 (최상급집단지도자)
신장 178cm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주요 서훈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
1. 개요2. 육군 - 돌격대 시기3. 무장 친위대 조직4. 독소 전선5. 서부 전선6. 종전7. 평가
7.1. 긍정적 평가7.2. 부정적 평가
7.2.1. 전시 친위대 전쟁범죄와의 관련성7.2.2. 전후의 역사왜곡과 네오 나치 조직 설립
7.3. 결론
8. 주요 보직 내역9. 진급 내역10. 주요 서훈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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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파울 하우서.jpg
파울 하우서 (Paul Hausser)
파울 하우서는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 중장, 돌격대 대령, 제2차 세계 대전 중 친위대 상급대장 및 무장친위대 상급대장이라는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육군에서 퇴역한 후 무장친위대 창설에 지대한 공헌을 해 무장친위대의 아버지라 불린다. 이에 따라 "아버지"라는 뜻의 "파파(Papa)" 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그러나 하우서는 동시에 친위대의 전시 전쟁범죄를 묵인하여 수많은 유럽 시민들이 부하들에게 학살당하도록 내버려둔 인물이다. 전후에도 무장친위대 무오설을 유포하여 역사 왜곡을 저질렀다. 그는 독일의 과거 청산을 심각하게 방해하였으며, 그의 회고록들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일 네오 나치의 정신적 뿌리 중 하나로 기능한다.

2. 육군 - 돌격대 시기

하우서는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Brandenburg an der Havel)에서 프로이센 군인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쿠르트 하우서(Kurt Hausser)는 독일 제국 육군 소령이었다. 1892년 군에 입대해 1896년까지 쾨슬린(Köslin)에 있는 유년사관학교를 다녔으며, 1896년에는 베를린 리히터펠데(Berlin-Lichterfelde)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899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899년 4월 20일 소위로 임관해 포젠 시 오스트로보(Ostrowo)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제155 보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1903년 10월 1일 동연대 2대대 부관이 되었으며, 1908년 10월 1일까지 5년 동안 이 보직으로 재직했다. 1908년 베를린에 위치한 육군참모대학에 입학해 장군참모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1911년 7월 21일 졸업했다.[3][4]

1912년 이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다양한 부대의 장군참모 장교로 근무했으며, 전후 격감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독일 육군에 머물며 1927년에는 대령이 되었다. 1932년 1월 31일 중장 대우로 퇴역했다. 퇴역하면서 1차 세계대전 참전자들로 구성된 우익 준군사 조직 철모단(Stahlhelm)에 입단해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지부장이 되었다. 얼마 후 철모단은 에른스트 룀의 돌격대에 편입되었으며 장검의 밤 사건으로 인해 돌격대가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이후에는 친위대에 편입되었다. 전사학자들은 이때 하우서가 퇴역하지 않고 국가방위군(1935년부터 독일 국방군으로 개칭.)에 남았다면 다른 독일 국방군 육공군의 상급대장 및 대장들처럼 무난히 원수봉을 들 수 있었다는 것이 중론.[5][6]

3. 무장 친위대 조직

1934년에는 하인리히 힘러의 제안을 수락하고 SS의 본격적인 전투 부대이자 무장 친위대의 전신인 SS 전투부대의 육성을 책임지게 되었다.

1934년 11월 15일에는 정식으로 SS에 가입해 239,795.라는 군번을 받았고, 브라운슈바이크 SS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동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또한 브라운슈바이크 SS사관학교 및 자매 학교인 바트 퇼츠 SS사관학교의 교육과정을 제정했다. 하우서 대령은 의기만 높지 실상은 어중이떠중이 모임이나 다름 없던 무장 친위대를 강하게 훈련시키고 하우서의 육군 경력과 이후 무장 친위대 시절의 영향력은 SS 전투부대에 현대식 무기와 장비를 지급하는 데 인색했던 육군의 도움 없이 초기 무장 친위대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전문 규격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1935년 8월에는 SS사관학교 총감이 되었으며, 1936년 5월에는 SS 소장으로 승진했다. 6월 1일 SS 군사본부(SS-Hauptamt) 작전부장(Che des Führungsamt)에, 동년 10월에는 SS전투부대 총감에 임명되었다. 민족사회주의를 신봉하기는 했지만 나치당이 주장하는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던 하우서는 SS에 가입한 지 2년이 넘은 시기인 1937년 5월 1일에야 나치당에 가입, 당원 번호 4,138,779를 받았다.

1939년 9월에 벌어진 폴란드 침공전에서는 육군과 SS 연대 '게르마니아', '데어 퓌러', '도이칠란트'로 혼성 편성된 켐프 기갑 사단의 옵저버로 참전했다. 1939년 10월 SS 전투부대가 차량화 사단으로 개편되면서 동 부대 사단장이 되었다. 1940년에 벌어진 프랑스 침공 작전부터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까지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Das Reich, DR)로 개칭된 동 사단을 지휘했다.

4. 독소 전선

파일:LSSAH_Paul.jpg

1941년 동부전선으로 향하는 LSSAH 사단을 지켜보는 힘러히틀러와 하우서 장군.[7] 하우서 장군 옆은 아우구스트 하이스마이어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무장친위대질서경찰 대장이다. 우측 하단의 장교는 요아힘 파이퍼다.

1941년 8월에는 당시까지의 공적으로 기사철십자장을 수훈했다. 1941년 10월 '태풍 작전' 당시에는 부상을 입고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사단장 직을 SS소장 빌헬름 비트리히에게 인계하고 8개월 가까이 요양을 취하다가 익년인 1942년 5월 28일, 무장 친위대 초기 3개 기갑 사단인 'LSS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를 통합 지휘하는 SS 기갑 군단장으로 전선에 복귀했다.

1942년, '천왕성 작전'으로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이 포위되는 등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색이 짙어지며 이에 후속하는 소련군의 연속된 대공세로 하우서가 이끄는 SS 기갑 군단에도 비슷한 위기가 찾아왔다.

1943년 2월 하르코프에서 하우서는 소련군에게 포위 섬멸될 위기에 처한 휘하 군단을 구하기 위해 무조건 도시를 사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퇴각을 결행했다. 이로 인해 히틀러의 분노를 샀지만, 약 한 달 후인 3월 21일 하르코프를 탈환함으로써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마무리지으며 신뢰를 회복했다.[8] 당시 격분한 히틀러는 일단 하우서의 상급자인 육군산악대장 후베르트 란츠를 면직시켰고, 하우서에게도 따로 책임을 물으려고 했지만 하리코프를 탈환한 공적에 따라 훈장 서훈만이 취소되는 선에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9]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 당시 다스 라이히, LSSAH, 그리고 토텐코프를 지휘해 프로호롭프카에서 소련 제5 근위전차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성채 작전 취소 후에는 제9 SS 기갑 사단 '호엔슈타우펜과' 제10 SS 기갑 사단 '프룬츠베르크'로 재편성된 동 군단을 지휘해 동부 전선에서 계속해서 전투를 치렀고, 1944년 3월 25일에는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에서 야전군 전체가 포위되는 거대한 위험에 직면한 육군기갑대장 한스 발렌틴 후베 장군의 제1 기갑군을 구출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통칭 후베 포위망이라 불리는 카메네츠 포돌츠크 포위망의 한쪽을 무너뜨리고 4월 6일 프룬츠베르크 사단이 제6 기갑 사단과 부차치(Buchach)에서 조우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호엔슈타우펜과 프룬츠베르크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4월 말 재편성을 위해 제2 SS 기갑 군단은 후방으로 물러났다.

5. 서부 전선

1944년 6월 6일 서방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동부 전선에 있던 제2SS기갑 군단이 노르망디로 급파되었다. 하우서는 휘하 제2SS기갑 군단을 이끌고 영연방군을 상대로 전략 요충지 캉을 탈환하기 위한 역공세를 기도했다.

6월 28일 제7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돌만 상급대장이 르 망(Le Mans)에 위치한 자신의 사령부에서 급작스레 죽음을 맞이했고, 그 후임으로서 B집단군 사령관 에르빈 롬멜의 맹렬한 반대[10]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명령으로 하우서가 제7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최초의 무장 친위대 야전군 사령관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또한 제7군 사령관으로서 연합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한 공적으로 8월 1월에는 SS 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
파일:상급대장 하우서.jpg
무장친위대 상급대장 하우서

파일:Rommel und Hausser.jpg

차량으로 이동하는 에르빈 롬멜과 영 불쾌해 보이는 하우서 장군.

1944년 8월 15일부터 8월 17일까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자살한 귄터 폰 클루게 원수 대신 잠시 동안 B집단군 사령관을 겸임했다. 팔레즈 포위전 당시에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병력을 탈출시키기 위해 머리에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맹렬하게 전선 지휘를 했다. 팔레즈 포위망 북쪽에서 캐나다 육군 제2 군단을 사력을 다해 저지하고 있던 제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는 포탄 파편에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파울 하우서를 자신들의 보병 수송 장갑차에 태우고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했다. 당시 하우서를 구한 것은 제12SS포병연대 제5포대장 쿠르츠바인 SS 포병 중위였는데 의식을 찾은 하우서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자넬 군사재판에 회부해야겠군. 어떻게 허락도 없이 사령관을 전장에서 옮겨올 수 있나?"
이에 쿠르츠바인 중위는 부상이 심각했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기에 부득이 허락을 맡을 수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물론 하우서는 그를 군사재판에 회부하지 않았다. 부하들이 걱정할까봐 나름대로 유머를 날린 것. 당시의 상황을 하우서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적 전차들이 쿠드아르(Coudehard) 북쪽 1.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몽 오르멜(Mont Ormel) 구릉 북쪽 도로를 차단했다. 적들은 재빨리 차량으로 방어선을 구축했고, 그로 인해 도로는 완전히 막혀버렸다. 그와 동시에 특정할 수 없는 위치에서 강력한 적의 포격이 개시되었다. 우린 어둠이 깔리길 기다렸다. 소규모의 기갑 전투단을 구성했고, 손상된 차량들로부터 연료를 구해 야간에 이루어질 돌파를 준비했다. 그 와중에 난 박격포 파편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21시경 다시 부대가 집결했다. 비바람이 몰아쳤다. 당시의 탈출로가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쨌든 간에 8월 21일 새벽이 되기 전 제2 SS 기갑수색 대대와 조우했다. 제2 SS 기갑 군단 사령부를 경유해 르 자프(le Sap)에 위치한 제7군 전방 지휘소로 가기 위해 서둘렀다. 가보니 이미 참모장 SS소장 폰 게르스도르프가 집단군 사령부에 상황보고를 한 후였다."
8월 26일 제7군을 위기에서 구한 공적으로 하우서에게 곡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이 수여되었다. 두개골 우측 부위의 부상이 심각했기에 장기간 요양을 취한 후, 1945년 1월 23일 상 라인 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상 라인 집단군이 바익셀 집단군으로 개편되면서 SS 제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가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그에 따라 하우서는 1945년 1월 28일 라인란트의 G 집단군 사령관으로 전속되었다.

이로써 하우서는 유일하게 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한 무장 친위대 장교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서부 전선의 방어 전략을 놓고 히틀러 총통과 격론을 벌인 후 G 집단군 사령관에서 해임되어 4월 3일 남서 전구 총사령부 참모장으로 좌천되었다. 3월 초 남서 전구 총사령관은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에서 대전 초기부터 하우서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하인리히 폰 비팅호프 셸(Heinrich von Vietinghoff-Scheel) 상급대장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하우서는 종전까지 이 한직에 머물렀다.

6. 종전

1945년 5월 9일 오스트리아의 첼 암 제(Zell am See)에서 미 육군에게 항복한 하우서는 서부 방면 무장 친위대 부대들의 무장 해제 임무를 맡았으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도 피고측 증인 및 참고인으로 입회했다. 이후 뉘른베르크 포로수용소 등 여러 포로수용소를 전전하다 1948년 여름에 풀려났다.그는 같이 수감되었던 생체실험에 환장한 두 인간 말종 카를 게브하르트·카를 브란트가 얼굴 제외 실컷 처맞고 울부짖는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는 뒷이야기와 함께, 같이 수감되어 있던 그의 주치의는 "저런 개새끼들…죽어서까지 남에게 민폐를 끼치냐?"고 평가했다.
파일:하우서 90세.jpg
90세 때의 사진

그 후 펠릭스 슈타이너, 요제프 디트리히, 빌헬름 비트리히, 쿠르트 마이어 등 SS 원로들과 함께 무장 친위대 퇴역군인 상조회(HIAG)를 설립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남은 생애를 부하들을 돌보는 데 쏟았다. 1972년 12월 21일 루트빅스부르크에서 향년 92세로 사망했다.
파일:말년의 하우서1.jpg
사망한 해인 1972년 92세 때의 사진

사망하기 전까지 무장 친위대 퇴역군인 상조회장으로서는 물론 전사가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한 하우서는 아래와 같은 무장 친위대 전사 관련 서적을 출간했다. 사후 출간된 《Wenn alle Brüder Schweigen》는 무장 친위대 군인들의 사진집으로 본서의 서문을 하우서 장군이 기고했다.

7. 평가

7.1. 긍정적 평가

육군에서의 경력과 무장 친위대 창설과 조직에서 세운 공으로, 무장 친위대 내에서는 대선배이자 사실상 친위대의 아버지로서 존경받았다. 히틀러의 총애를 받는 요제프 디트리히테오도어 아이케도 각 사단으로 들어갈 인력 수급에 대한 알력을 하우서와 벌였어도 그에게 버릇 없게 대하지 못했다. 디트리히의 경우 하우서 장군에게 눈치가 보여 상급대장 승진을 하우서가 승진한 이후로 미뤘을 정도였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하인리히 뮐러, 에른스트 칼텐브루너마저도 하우서에게는 깍듯이 대해야 했다.

군사적으로도 SS임에도 불구하고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히틀러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하르코프에서 SS 기갑 군단을 철수시킨 것 등으로 높게 평가 받는다.

7.2. 부정적 평가

앞서 서술된 호의적인 평가들, 그리고 부하와 농담따먹기한 자질구레한 일화까지 일일이 서술하는 방식에서 볼 수 있듯, 독일군과 무장친위대에 우호적인 시선을 가진 이들에게 있어 파울 하우서는 신화적인 존재다. 그들에게 하우서는 무장친위대의 아버지이자 양심이며, 전시는 물론이요 전후까지 부하들을 챙기는 덕장이다. 또한 무장친위대에 군사적 전문성을 부여하고 정예 부대로 키운 백전노장이자 히틀러에게까지 반대 의견을 개진할 정도로 올곧은 인물이며, 전후에는 전범 재판 또한 별 탈 없이 넘겼다. 아직까지도 일각에서는 그를 80년 전 무장친위대원들이 그랬듯이 '파파(Papa)'라는 애칭으로 부르거나, 참군인이었다며 띄워 주기 바쁘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그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들을 취사선택하여 범죄 조직에 적극 가담한 이에게 면죄부를 주는 행위이다. 법적 처벌은 면했을지언정 파울 하우서는 절대 무고한 이가 아니다. 그는 친위대 상급대장이자 원로로서 부하들의 전쟁범죄를 조장하고, 전후 역사 왜곡에 깊게 관여하면서 친위대원들의 범죄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정보를 유포했다.

7.2.1. 전시 친위대 전쟁범죄와의 관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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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에 촬영된 사진인데, 가장 오른쪽에 오버코트 입은 이가 파울 하우서다. 그리고 저 장소는 최소 12만 명, 최대 32만 명이 죽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노동 수용소인 마우트하우젠-구젠 강제수용소[11]죽음의 계단으로, 노동을 통한 절멸(Vernichtung durch Arbeit)이 수행되던 수용소들 중 가장 거대한 곳이었다. 수용소 재소자들은 채석장에서 캐낸 화강암 덩어리를 지고 130단이 넘는 이 높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12]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지쳐 넘어지면서 다치거나 심지어는 굴러떨어지는 화강암에 맞아 사망하기도 했다. 이런 시설을 시찰까지 다닌 고위 장성이 학살에 대해 몰랐을 리가 없다. 저 날 하우서와 같이 수용소를 시찰했던 이들은 친위대 총수 하인리히 힘러, 친위대 소장 오토 쿰, 친위대 대장 빌헬름 비트리히였다. 민간인 학살에 깊게 관련된 인물들이기도 했던 쿰과 비트리히는 훗날 하우서와 함께 무장친위대 상조협회(HIAG)를 수립하곤 열성적으로 활동한다.

하우서가 사단장으로 재직했던 시절 SS 제국사단은 두 차례의 학살 혐의를 받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시, 제국사단은 보이보디나 지역에서 세르비아인 200명 이상을 학살하고 시신을 유기했으며,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는 민스크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을 도와 유대인 900명 가량을 살해했다. 각종 증언과 사진 자료, 그리고 도청된 녹음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무장친위대와 국방군은 민간인 학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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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이것은 1941년 4월에 찍힌 사진으로, 하우서가 사단장이던 당시의 제국사단 병사들이 세르비아 유대인들을 둘러싸고 있다. 사진 속 유대인들은 독일에 점령된 베오그라드로 이송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이 모든 책임은 하우서가 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가 SS 기갑군단장으로 영전한 후에도 그의 군단 소속 세 개 친위대 사단은 소련 지역에서의 전쟁 범죄 혐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수용소 간수들로 구성되었던 SS 백골사단은 1941년 소련에서 벌인 포로 학살과 심각한 약탈 행위로 악명이 높았다. SS 제국사단은 상술한 대로 유고와 소련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거나 지원했으며, SS 아돌프 히틀러 근위사단은 이탈리아 파르티잔 토벌 작전에서 진압을 명목으로 숱한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그의 기갑군단은 1943년 발칸 반도로 파견되어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원수의 F집단군과 함께 9월 20일부터 11월 20일까지 2달간 크로아티아 이스트리아 반도의 파르티잔을 진압했다. 이로 인해 2000명의 민간인들이 살해당했으며, 400명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하우서가 지휘하던 B 집단군의 예하부대로서 하우서를 구해주기도 했던 SS 히틀러 유겐트 사단의 경우에도 2차례의 학살을 저질렀다. 그들은 아스크에서 89명의 프랑스인을, 아르덴 수도원에서는 캐나다군 포로 20명 이상을 살해했다. 당시 사단장 쿠르트 마이어의 직접적인 명령 때문이었고, 그는 이 때문에 훗날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된다.
HERR PELCKMANN: The Prosecution is particularly accusing the Verfügungstruppe for inciting racial hatred and for the persecution of the Jews as one of its special tasks. Was the troop trained for these purposes?
펠크만[13]: 기소장에서는 친위대 특무부대[14]의 특수 임무 중에 인종적 증오 조장과 유대인 박해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부대가 이러한 목적으로 훈련된 것이 맞습니까?
HAUSSER: [...] I can testify that race hatred and the extermination of Jewry or of the Eastern peoples was never taught and was never demanded.
하우서: 단언하건대, 인종적 증오와 유대인 또는 동유럽 사람들에 대한 절멸은 절대 교육된 바 없으며, 요구된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우서는 위와 같이 전후 재판장에서 친위대의 전시 범죄를 부정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7.2.2. 전후의 역사왜곡과 네오 나치 조직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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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HIAG 모임에서의 하우서. 오른쪽의 인물은 전직 무장친위대 소장 쿠르트 마이어다. 그는 캐나다군 포로 학살을 지시한 혐의로 복역하다 기민당 콘라트 아데나워 정권의 비호로 풀려났다.

전후에는 프란츠 할더등의 전직 국방군 장군들과 함께 미군 역사과에서 일했다. 서부전선에서 7군 및 B집단군 사령관이라는 중책을 수행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역사과에서 독일 국방군 출신 장군들은 본인들이 직접 국방군의 역사를 정립하며 나치와 국방군을 분리했는데, 이는 물론 냉전에서 1세계의 선봉 역할을 할 신생 독일 연방군의 포석을 깔고, 소련과의 전쟁 경험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로 인해 국방군과 무장친위대의 많은 범죄 사실들이 정사에서 도려져 나가면서 소련군에 대한 과도한 악의적 폄하가 그 자리를 채웠다.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왜곡은 냉전 하의 1세계의 입장에는 매우 입맛에 맞는 내용이었다. 이 작업은 매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국방군 무오설이 서구권의 2차세계대전에 대한 시각에 짙게 깔렸다.

1950년부터 그는 무장친위대 출신 인물들의 이익단체인 HIAG를 창설해서 역사를 왜곡하는 회고록들을 간행했다. 이 회고록들은 SS 백골사단이 강제수용소 위병 근무만 섰을 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 없었다던가, 무장친위대는 전방 전투부대였기에 후방에서의 잔학행위를 알 수 없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대신 전방에서 잔학행위를 했지 하지만 무장친위대는 수많은 학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는데다, 친위대 내 학살부대 및 수용소 경비대나 경찰부대와의 인적 교류, 인원 재배치도 숱하게 이루어졌다. 가령 라인하르트 작전을 운영하며 200만 명의 폴란드 유대인들을 절멸시켰던 오딜로 글로보츠닉과 그 휘하 수용소장들은 작전 종료 이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토벌전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당장 하우서 본인부터가 다른 나치 고관들과 함께 마우타우젠 수용소를 시찰하며 죽음의 계단을 오르내려 놓고서는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친 것.

또한, 그는 무장친위대는 다른 친위대와 다르며, 국방군과 함께 제4의 군종으로써 독일 국가를 위해 전투에만 힘쓴 정예 부대라고도 주장했다. 심지어는 전쟁 후반기 무장친위대 외인부대에서 다른 민족들을 받은 것을 두고, 그는 무장친위대가 NATO의 선구자로써 공산주의에 맞서는 범유럽적 조직이었다고 왜곡하였다. 인종주의의 화신과도 같던 나치당이 벌이던 독재와 침략 전쟁의 충실한 개였던 무장친위대가 사람이 없어서 피지배민들을 마구잡이로 동원한 것을, 자유 국가들이 자신들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결성한 방위 공동체인 나토와 동일 선상에 놓은 것이다. 둘 간의 공통점은 공산주의에 맞서는 것밖에 없었음에도 말이다. 이런 악의적인 왜곡을 통해, 하우서는 연합국 국민과 장병들 및 수천만에 달하는 나치의 피해자들의 명예를 더럽혔다.

무장친위대 신화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더 악질적인 하위 개념으로, 무장친위대를 친위대 내의 민간인 학살부대, 친위대 경찰부대, 수용소 경비대와 분리하여 학살의 책임을 희석한다. 하우서가 전후에도 부하들을 위해 쏟았다는 소위 '노력'의 실체는 바로 이런 무가치하고 유해한 역사 왜곡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왜곡된 역사는 냉전 시대를 거치며 서구권의 군사사계, 특히 민간 차원의 밀리터리 창작물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부터 서구권 서브컬쳐 문화에서 2차 세계대전 밀리터리 주제가 대대적으로 유행하여 수요가 폭증하면서, 현대 한국에서 속칭 '밀덕 독빠'로 칭하는 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그리고 나치 인사들이 왜곡한 공식 전사들, 생존한 이들이 할아버지가 되어 마치 옛날 이야기 들려주듯 말하는 전쟁 당시의 온갖 단편적인 이야기들은 이런 환상에 기름을 부어 버렸다. 냉전 체제였기에 적국인 소련 측 자료에 대한 접근이 제한적이었던 것 역시 진실에 대한 교차검증을 방해했다.

특히 하우서는 무장친위대 애호가들이 싸고 도는 중심 인물이었다. 여기에는 위에 서술된 하우서의 온화한 인품, 군사적 천재성 등에 대한 단편적 이야기들, 그리고 전방에서 싸운 다른 수많은 무장친위대원들의 회고록-작가 본인과 자신이 몸담은 부대의 잘못에 대해서는 왜곡하거나 말을 아끼는-이 신화화되어 이 말도 안 되는 주장에 근거를 부여했다. 심지어 이레나 센들러가 2500명의 유태인들을 구해준 것과 알베르트 괴링이 유태인과 포로를 석방하는 것을 하우서가 묵인해줬다는 주장마저 나도는데, 여기에는 어떠한 역사적 근거도 없다.

영미권 서브컬쳐에도 그 영향이 짙게 남았는데, 당대 만들어진 보드게임들, 영화 등을 보면 무장친위대는 독일의 에이스 부대로 등장하지 범죄집단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런 묘사들은 일반 대중에게 다시 영향을 끼쳐, 그들의 시각을 왜곡했다. 1990년대부터 점차 개선되고는 있으나, 하우서와 HIAG가 시작한 왜곡질은 그의 사후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일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한 때 서구권 및 일본의 군사사적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전반적으로 친독적 시각이 강했던 한국 밀리터리계도 예외가 아니다. 이로 인해 서독 정부는 하우서의 회고록들을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했다. 하우서가 HIAG를 통해 프로파간다하려 했던 무장친위대 무오설을, 현대 역사학자들은 당연하게도 비판을 넘어 아예 비웃음거리, 괘씸한 언어 도단으로 치부한다.

물론 친위대가 저지른 범죄 행위가 워낙 명백하고 끔찍했던데다, 독일의 과거사 청산의 '희생양'으로 쓰였[15]기에, 그의 주장은 학계에서는 규탄당했다. 하지만 하우서의 행동은 그가 의도한 대로 무장친위대에 대한 나쁜 시각을 어느 정도는 누그러뜨리는 데에 성공했다. 여기에는 독일 정치계의 비호도 한몫 했다. HIAG는 50년대, 그리고 60년대 서독 기민당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독일 사민당과도 연줄이 닿아 있었다. 기민당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국방군은 물론이거니와 무장친위대 또한 단순가담자일 뿐이라고 변호했고, 사민당의 쿠르트 슈마허 당수는 HIAG 인사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두 사람 다 나치 수용소에서 고초를 치렀던 인물임에도 말이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정치인들에게 있어 무장친위대 전역자들의 머릿수는 유의미한 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HIAG의 숫자는 25만에 불과했으나, 그들은 자신들이 200만명을 상회하는 무장친위대 전역자들을 대표한다고 과장했다. 그리고 하우서 등 친위대 원로들이 몸담고 있던 HIAG의 특성 상 그게 먹혔다. 그들의 로비 결과 기민당과 사민당은 무장친위대 출신자들에게도 국방군 전역자들과 마찬가지로 연금을 지급하겠다고 합의했다.

정계에도 영향을 뻗치게 된 HIAG와 무장친위대 전역자들의 행동은 가관이었다. 1953년에는 나치 시절을 기념하는 파티를 열었고, 많은 회원들은 이스라엘을 살려두면 다시 독일에 손을 뻗을 것이라는 반유대주의 사고관을 그대로 유지했다. 다만 당시의 HIAG가 나치 독일의 재건을 바라며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우선적인 목적은 국가에서 지급하는 연금이었고, 자신들의 삶을 가로막은 '범죄자'라는 꼬리표를 떼는, 아주 개인적이고 소시민적인 목표로 모인 집단이었다. HIAG가 만일 나치의 재건이라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졌다면 비호를 받기는커녕 바로 해산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소박한 바램은 필연적으로 독일의 과거 청산을 방해하고 자신들이 가담한 거대한 범죄를 부정하는 결과로 나아갔다.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치인들도 슬슬 이들과 손을 떼기 시작했다. 특히 1960년대 말부터 위르겐 하버마스프랑크푸르트 학파를 필두로 한 일련의 학자들이 나치 시절을 경험한 구세대와 전후복구 시절에 나치의 유산과 타협한 기성 정치인들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가했다. 독일인들도 68혁명의 영향을 받아 과거 청산에 목소리를 높였다. 사민당과 기민당도 1960년대부터는 갈수록 우경화되는 HIAG와 거리를 두었다. 그 중 사민당은 적어도 1981년부터는 HIAG와 연을 완전히 끊었다.

그러자 하우서의 유산인 HIAG는 신세대에 맞서 극우 성향을 서서히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네오 나치 집단으로 확실히 변모했다. 그들은 공공장소에서 나치 시절 군가를 부르며 집회를 연다거나 홀로코스트 허구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HIAG가 독일 민주주의의 위협이라 판단한 독일 연방헌법수호청은 그들을 곧 감시 대상 목록에 올렸고, 보다 못한 독일 정부는 결국 1992년에 HIAG를 공식적으로 해산시켜버렸다. 그러나 HIAG에서 갈라져 나온 네오나치 조직들은 통일 이후 혼란기를 거쳐 끈질기게 살아남아 지금에 이른다.

7.3. 결론

전쟁 범죄를 저지르거나 최소한 방조한 당사자의 말만을 믿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이다. 그러나 그의 군사적 전공과 회고록들에서 언급되는 개인적 일화들에 매료된 일부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정치적 계산이 짙게 깔리고 부실하기 짝이 없던 전범 재판에서 몇몇 사실만 보고 적당히 넘어가주었다는 이유만으로 하우서를 참군인, 그리고 무장친위대 신화의 상징으로 여전히 떠받들고 있다. 유타 대학교의 로널드 스멜서 교수와 에드워드 J. 데이비스 교수에 따르면,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무장친위대 팬보이들에게 파울 하우서란 '신화적인 존재'였다.

하우서가 홀로코스트의 일환으로 인종 말살을 직접적으로 명령한 적이 확인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부하들에게 있어, 그는 실제로 아버지같이 온화하면서도 노련한 군사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성품과 일화를 논하기에 앞서, 그의 지위를 보아야 한다. 그는 전시에 유럽에서 벌어졌던 숱한 전쟁범죄에 책임이 있는 무장친위대의 창설자이자 대선배, 야전 지휘관이자 고위 장성이며, 아이케나 토텐코프 사단 같은 그의 휘하 부대원들이 자체적으로 저지른 인종 말살과 전투과정에서의 범죄 행위를 묵인하고 방조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 도의적인 책임은 하우서 본인도 지는 것이 마땅하다.

법적 책임은 면했지만, 그의 지휘 하에 놓인 조직에 의해 수많은 학살이 벌어진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고위 관료로써 그가 져야 하는 책임에 면죄부를 주고 그를 양심적인 군인으로 포장할 수는 없다. 이는 단편적인 사실들만 가지고 그의 직위가 부여한 책임으로부터 그를 인위적으로 분리시키는 행위다. 또한, 전후 그가 벌였던 수정주의적 행보가 얼마나 심각하게 역사를 왜곡하고 잘못된 인식을 뿌리내리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하우서의 죄질은 결코 가볍지 않다. 슈피겔 지에서는 무장친위대 전역자들과 HIAG가 전후 독일의 민주주의를 우롱했다며 통렬하게 비판할 정도다.[16] '파파' 하우서가 비호했던 부하들과 유산은 독일 사회에 아직까지도 일부 어두운 영향을 끼치고 있다.

8. 주요 보직 내역

  • 1934.11.15 : 친위대 가입(대원 번호 239,795)
  • 1937. 5. 1 :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가입(당원 번호 4,138,779)
  • 1939. 7. 2 ~ 1939.10. 9 : 켐프 기갑사단 파견참모 겸 연락장교
  • 1939.10. 9 ~ 1941.10.14 : SS 차량화 사단장, 개칭 후 제2 SS 기갑사단장
  • 1941.10.14 ~ 1942. 5.28 : 입원 가료
  • 1942. 5.28 ~ 1942. 9.14 : SS 기갑군단 지휘관
  • 1942. 9.14 ~ 1944. 6.28 : 제2 SS 기갑군단장
  • 1944. 6.28 ~ 1944. 8.20 : 제7군 사령관
  • 1944. 8.16 ~ 1944. 8.17 : B집단군 사령관
  • 1944. 8.20 ~ 1945. 1.21 : 입원 가료
  • 1945. 1.23 ~ 1945. 1.28 : 상 라인 집단군 사령관
  • 1945. 1.28 ~ 1945. 4. 3 : G집단군 사령관
  • 1945. 4. 3 ~ 1945. 5. 8 : 남서 전구 총사령부 참모

9. 진급 내역

  • 1892. 3.15 : 견습 생도(Kadett)
  • 1899. 3.20 : 소위(Leutnant)
  • 1909. 8.19 : 중위(Oberleutnant)
  • 1914. 3.26 : 대위(Hauptmann)(가진급 일자 1913.10. 1)
  • 1918. 3.22 : 소령(Major)
  • 1923. 4. 1 : 중령(Oberstleutnant)(가진급 일자 1922.11.15)
  • 1927.11. 1 : 대령(Oberst)
  • 1931. 2. 1 : 소장(Generalmajor)
  • 1932. 1.31 : 중장 대우 예편(Charakter als Generalleutnant)
  • 1934. 3. 2 : SA 대령(SA-Standartenführer)
  • 1934.11.15 : SS 대령(SS-Standartenführer)
  • 1935. 7. 1 : SS 상급대령(SS-Oberführer)
  • 1936. 5.22 : SS 소장(SS-Brigadeführer)
  • 1939. 6. 1 : SS 중장(SS-Gruppenführer)
  • 1939.11.19 : 무장 SS 중장(Generalleutnant der Waffen-SS)
  • 1941.10. 1 : 무장 SS 대장(General der Waffen-SS)
  • 1944. 8. 1 : 무장 SS 상급대장((Generaloberst der Waffen-SS)[17]

10. 주요 서훈 내역

  • 1939. 9.18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40. 5.17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41. 8. 8 : 기사 철십자 훈장
  • 1942. 5. 9 : 1939년 제정 전상장 은장
  • 1943. 1.30 :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황금 기장
  • 1943. 7.28 : 곡엽 기사 철십자 훈장(261번째 서훈)
  • 1944. 8.26 :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90번째 서훈)


[1] 나뭇잎 3개짜리 칼라장은 1942년 친위대 계급장이 개정되면서 본래 SS중장을 가리키던 것이 SS소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저건 1942년 이전에 사용하던 버전이라 사진상의 하우서 장군은 SS중장 계급을 달고 있었다고 봐야 맞다.[2] 파울 하우저라고 부르거나 번역하는 이들이 있는데 Hau/s(묵음)/ser가 아니라 Hau/ss(ㅅ와 ㅆ의 중간 발음)/er, 순으로 읽기 때문에 파울 하우서가 맞다.[3] 독일 육군의 참모 교육과정은 입학자의 75%가 3년 후의 졸업 때까지 탈락한다고 하는 매우 엄격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력은 하우서 장군이 대전 후반기에 친위대와 알력이 심했던 육군 부대들을 지휘하면서도 트러블이 나지 않았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4] 그리고 파울 하우서는 1차대전 때만 병사나 위관급으로 복무하다가 제대한 대부분의 1차대전 참전자 출신 무장친위대 장성과는 달리 전쟁이 터지기 한참 전부터 복무한 데다가 장군참모 교육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고 졸업한 엘리트였던데다가 전후에도 자기와 같은 엘리트인 후배 장교들과 함께 국가방위군에 남아서 장성까지 복무했다. 그리고 훗날 독일 국방군 육군 장성이 되는 이들 다수가 소위 임관 시기나 사관생도가 된 시기가 하우서보다 늦었고, 자연히 이들이 위관이나 영관을 달고 있던 국가방위군 시절에 이미 영관~장성이었던 그를 만나면 선배 혹은 상관으로 대우해야 했던 것. 이러한 이유로 인해 독일 국방군 육군 장성들은 하우서가 부대를 지휘해도 뭐라고 하지 못 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다른 이유는 하우서 본인의 명성과 전장에서 여러 차례 보여준 군사적 전공, 그리고 히틀러가 자신과 대립관계에 있던 국방군 장성들의 권한을 축소한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커진 무장친위대의 규모와 세력 등이 있다.)[5] 실제로 독일 국방군의 육군 원수들 중 하우서보다 임관일이 빠른 이들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75년생, 93년도 임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76년생 95년도 임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78년생, 97년도 임관), 페도어 폰 보크(80년생, 98년도 임관),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56년생. 75년도 임관, 단 뵘에르몰리는 1차대전 말기인 1918년에 62세의 나이로 오헝 제국 육군의 원수까지 올랐다가 오헝제국 멸망 종전 이후에는 강제 퇴역을 당한 채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살던 도중 1939년에 일어난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으로 인해 국적이 독일로 바뀐 채로 살다가 프랑스 침공 성공 직후인 1940년 10월 28일에 84세의 나이로 독일군 원수 직위를 얻은 케이스다. 즉,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독일 국방군 소속으로 받은 원수직은 그냥 명예직이었던 것.)[6] 비단 육군 뿐만이 아니라 국방군 해공군까지 범위를 확대해봐도 마찬가지인데 우선 해군에서는 에리히 레더만 하우서보다 빨리 임관했으며(76년생, 하우서보다 3개월 먼저 임관), 공군 원수들 중에서는 하우서보다 빨리 임관한 인물이 아예 없다. 그리고 나무위키에 개인 항목이 작성된 상급대장 이하 독일 국방군 장성들 중에서 하우서보다 빨리 임관한 사람은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78년생, 97년도 임관)뿐이다. 또한 파울 하우서의 최종 계급인 최상급집단지도자와 동급인 독일 국방군 상급대장까지 오른 59명의 장성들 중에서 그보다 짬이 높은 사람은 없다. 게다가 공군과 해군 상급대장들 중에서도 파울 하우서를 뛰어넘는 짬을 가진 이가 없다.[7] 히틀러의 기준으로 왼쪽에 서있다.[8] 집단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기갑부대를 시가전에 성급하게 몰아넣었다고 하우서를 비판했으나, 3월 10일 자로 하리코프 시내로 진격을 명령한 것은 폰 만슈타인이다.[9] 폭풍 속의 씨앗이라는 헤르베르트 브루네거의 회고록에도 언급되는데, 하르코프에서 퇴각 당시에 한 말이 간지난다. "늙은 나야 별로 상관없지만, 젊은 병사들이 더 걱정이다."[10] 에르빈 롬멜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국방군 장교들의 반발이 극심했다고 한다. 이유는 국방군은 친위대따위에게 지휘받지 않는다.[11] "계도 불가능한 정치범"들로 분류된 사람들이 끌려온 3등급 노동수용소이다. 1938년 빈과 린츠에 화강암 석재를 공급하고자 한 비너-그라벤 사의 요구로 세워졌다. 이 회사는 SS(나치 친위대) 소유의 DEST(독일 토목 및 석재 유한공사) 소속이었으며 대표인 오스발트 폴 또한 후에 무장친위대 대장까지 진급하는 열성 친위대원이었다. 이를 위해 다하우 수용소의 일부 인원이 재배치되어 건설하였다. 마우타우젠 수용소와 구젠 1, 2, 3 수용소를 중심으로 하여 오스트리아 전역의 101개의 보조수용소(Außenlager)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콤비나트를 형성하고 있었다. 절멸수용소들과 같은 가스실은 없었으나 노동을 통한 절멸(Vernichtung durch Arbeit)을 추구하던 곳인 만큼 수감자들은 이곳에 부속된 벽돌 공장, 군수공장에서 끔찍한 중노동과 학대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DEST 소속 회사들뿐만 아니라 바이엘, 마우저, 하인켈, 메서슈미트 등 독일 유수의 대기업들 및 수많은 오스트리아 향토 기업들은 이곳의 이러한 참상에도 아랑곳 않고 저렴한 노예 노동력을 착취했다. 그 과정에서 총 12~32만 명의 수감자들이 이곳에서 살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70년 박물관으로 재개장되었고, 현재까지도 끔찍한 나치 정권의 범죄를 증언하는 역사적 장으로서 남아 있다.[12] 화강암은 암석 중에서도 매우 단단하고 무거운 암석에 속한다.[13] 변호사다.[14] 아인자츠그루펜이 아닌, 하우서가 조직한 무장친위대의 전신을 말한다.[15] 여기서 서술한 희생양이라는 표현은 친위대가 아무 죄도 없음에도 희생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더해 독일 국방군과 민간 정부, 민간인과 경제계 등 나머지 독일 전체의 책임까지 전부 뒤집어썼음을 의미한다. 전후 독일은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그저 나치당과 친위대의 책임으로 돌렸고, 그들만을 처벌함으로써 자신들의 과거를 청산했다고 믿었다. 실상은 일부 저항자들을 제외한 독일 국민 전체가 직간접적으로 나치에 가담하여 침략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16] https://www.spiegel.de/international/germany/the-brown-bluff-how-waffen-ss-veterans-exploited-postwar-politics-a-792984.html[17] SS 내에서는 단 4명만 존재하며 무장 친위대에선 단 만 이 계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