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Richard Glücks 리하르트 글뤽스 |
출생 | 1889년 4월 22일, 독일 제국 메헨그라트바흐 |
사망 | 1945년 5월 10일, 독일 플렌스부르크 |
복무 | 친위대 (1932년 ~ 1945년) |
최종계급 | 친위대 무장친위대 중장 (집단지도자)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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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의 무장친위대 중장.2. 초기 행적
보험설계사의 아들로 메헨그라트바흐에서 태어난 글뤽스는 고등학교졸업 후 부친의 보험회사 일을 돕다가 1909년부터 1910년까지 베셀의 프로이센 육군포병연대에 입대했다. 1910년부터 1913년까지 다시 부친의 회사에서 일한 글뤽스는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의 지사에서 일한 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건너가 세일즈맨으로 일한 후 다시 영국으로 향했다.3.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영국과 적대관계가 되자 노르웨이 선박에서 스위스인 선원 행세를 하며 영국에서 탈출한 글뤽스는 독일로 귀국 후 1915년 1월에 다시 프로이센 육군의 포병연대에 입대했다. 베르됭 전투, 솜 전투 등에서 종군하여 1,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은 글뤽스는 소위계급으로 전역했다.4. 바이마르 공화국
종전 후 의용군에 참가하여 루르 지방에서 활동한 글뤽스는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으로 이동하여 1924년까지 연락장교로 일하며 1925년에 중위로 승진했다. 1926년 7월 31일에 군에서 물러난 글뤽스는 엽총가게를 열었다가 1927년에 철투구단에 가입했다.5. 나치당 입당과 슈츠슈타펠 입대
1930년 3월 1일에 나치당에 입당한 글뤽스는 1932년 11월 16일에 나치 친위대에 입대해 1934년까지 친위대 서부집단 참모장으로 일했다. 그 후 친위대 중령으로 승진해 1936년 3월말까지 제77연대 지휘관으로 일한 후 4월 1일에 친위대 대령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강제수용소의 감독부대인 친위대 해골부대에 배속되어 강제수용소 총감이던 테오도어 아이케의 참모가 되었다.6.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한 후인 1939년 11월 18일에 아이케와 많은 해골부대 요원들은 제3 SS 장갑사단으로 부임해 전장으로 떠나버렸다. 이에 강제수용소 총감으로 취임한 글뤽스는 1940년 8월 5일에 아우구스트 하이스마이어 친위대 대장에게 총감자리를 넘겼지만 그의 휘하에서 수용소 감독일을 계속하였다. 1941년 4월에 친위대 소장으로 진급한 글뤽스는 1942년 3월 17일에 오스발트 폴의 경제관리본부 D국으로 이동하여 국장이 되었다. 그 후 1943년 7월 23일엔 친위대 중장으로 승진했다.7. 종전과 최후
전쟁말기에 폐허로 변한 베를린에서 아내를 대동한 채 플렌스부르크로 달아난 글뤽스는 독일이 항복한 후인 1945년 5월 9일에 현지 해군기지에서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했다고 알려져있다.[1][1] 그러나 그의 자살을 입증할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일설에는 그가 독일을 탈출하여 생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