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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United States of America v. Karl Brandt, et al.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두 번째 재판으로 의사에 대한 재판. 1946년 12월 9일부터 1947년까지 일어난 계속 재판의 첫 번째 재판으로 나치 독일에 협조해 악명 높은 생체실험을 한 의사들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2. 재판 기준
1.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주로 2와 3에서 결정됨.2. 전쟁 범죄, 피실험자의 동의 없는 의학 실험, 안락사 계획 참여, 강제 수용소에서 포로 학살 관여
3. 인류에 대한 범죄.
4. 범죄 조직 참여.(SS 일원인 죄)
3. 재판의 정점
▲ 의사 재판에서 심문을 받고 있는 아돌프 히틀러의 주치의 카를 브란트
4. 재판 결과
앞에 나와 있는 재판 기준에 의거하여 판결이 이루어졌다.피고인 | 직위 | 1차 | 2차 | 3차 | 4차 | 판결 |
카를 브란트 | 친위대 중장[1] | 기소 | 유죄 | 유죄 | 유죄 | 사형 (교수형) |
카를 게브하르트 | 친위대 중장[2] 독일 적십자 사장 | 기소 | 유죄 | 유죄 | 유죄 | |
빅토어 브라크 | 친위대 상급대령 | 기소 | 유죄 | 유죄 | 유죄 | |
볼프람 지퍼스 | 친위대 상급대령 아넨엘베 사무장 | 기소 | 유죄 | 유죄 | 유죄 | |
요아힘 므루고프스키 | 친위대 상급 대령 무장 친위대 위생 협회 회장 | 기소 | 유죄 | 유죄 | 유죄 | |
루돌프 브란트 | 친위대 대령[3] | 기소 | 유죄 | 유죄 | 유죄 | |
발데마르 호펜 | 친위대 대위 | 기소 | 유죄 | 유죄 | 유죄 | |
헤르만 베커 | 독일 육군 군의관 | 기소 | 유죄 | 유죄 | (없음) | 징역 20년 (나중에 10년으로 감형) |
빌헬름 바이클뵈크 | 독일 육군 고문관 내과의사 | 기소 | 유죄 | 유죄 | (없음) | 징역 15년 (나중에 10년 으로 감형) |
프리츠 에른스트 피셔 | 친위대 소령[4] 제국 내과의사 | 기소 | 유죄 | 유죄 | 유죄 | 종신형 (1954년 석방) |
카를 겐츠켄 | 친위대 중장 | 기소 | 유죄 | 유죄 | 유죄 | |
지크프리트 한틀로저 | 육군 군의대장 국방군 위생본부 장관 | 기소 | 유죄 | 유죄 | (없음) | |
헤르타 오버호이저 |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 여의사 | 기소 | 유죄 | 유죄 | (없음) | 징역 20년 (1952년 석방) |
헬무트 포펜딕 | 친위대 상급대령 | 기소 | 기소 | 기소 | 유죄 | 징역 10년(1951년 석방) |
게르하르트 로제 | 육군 군의소장 열대 의학부문 위원장 로베르트 코흐 학회 교수 | 기소 | 유죄 | 유죄 | (없음) | 종신형 (1955년 석방) |
파울 로즈토크 | 베를린 외과 클리닉 의사 육군 외과상담 의학 과학 연구 매니저 | 기소 | 기소 | 기소 | (없음) | 석방 |
지크프리트 루프 | 독일 항공 실험학회 항공 의학부문 계수 | 기소 | 기소 | 기소 | (없음) | |
쿠르트 블로뫼 | 전국 보건 지도자 대리 | 기소 | 기소 | 기소 | (없음) | |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웨르츠 | 육군군의 중령 뮌헨 항공 의학 협회장 | 기소 | 기소 | 기소 | (없음) | |
콘라트 셰퍼 | 베를린 항공 의학 협회의 의사 | 기소 | 기소 | 기소 | 무죄 | |
아돌프 포코르니 | 내과의사 피부와 성병 전문가 | 기소 | 기소 | 기소 | (없음) | |
오스카르 슈뢰더 | 공군 군의대장 공군 의료팀 계수부장 공군 의료 책임자 | 기소 | 유죄 | 유죄 | (없음) | 종신형 (나중에 징역 15년으로 감형) |
5. 별개의 재판
지크문트 라셔 |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으로 체포 | 1945년 사형(총살형) |
베르너 하이데 | 1959년 검거 | 재판 전 1964년 자살 |
엘리자베트 마르샬 | 1945년 검거 | 1947년 별개의 재판으로 교수형 집행 |
카를 클라우베르크 | 1955년 검거 | 1957년 재판 중 심장마비로 사망 |
6. 재판받지 않은 자들
요제프 멩겔레 | 해외도피 |
호르스트 슈만 | 해외도피 |
이름프리트 에베를[5] | 기소 전 자살 |
아리베르트 하임 | 해외도피 |
에두아르트 비르트스 | 재판 전 자살 |
에른스트 로베르트 그라비츠 | 기소 전 자살 |
아우구스트 히르트 | 기소 전 자살 |
히틀러의 주치의로 유명한 테오도어 모렐은 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 모렐은 단순한 주치의일 뿐이었고, 반인도적 범죄에 참여한 혐의도 없었기 때문이다.
[1] 아돌프 히틀러 개인 주치의.[2] 하인리히 힘러의 주치의.[3] 하인리히 힘러 개인 비서.[4] 카를 게브하르트의 부관.[5]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초대소장. '의욕'하나는 넘쳐났지만 너무 많은 유대인을 받아버려 은폐에는 '무능'했다. 덕분에 트레블링카 수용소 주변은 시체의 산과 총살현장,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유대인들로 인해 아비규환이었으며, 덕분에 나치 입장에서 비밀을 유지해야 할 수용소에서의 일이 다 들통나 한 달만에 교체됐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 대한 증언을 SS하급분대지도자 프란츠 수호멜이 한 증언이 많이 남아 있는데, 수호멜은 트레블링카에 오자마자 기차에서 죽은 시체들이 문을 열자마자 떨어지는 이 끔찍한 광경에 울었으며, 이 일을 못하겠다고 간청했다 한다. 그러자 에베를은 "그냥 하기 싫다고 하게. 수호멜. 그럼 난 너를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내줄 테니까." 라고 했다. 당연히 동부전선에 나가는 것은 언제 죽을지만을 증명하는 곳이었으므로, 수호멜은 수용소 일(희생자의 물품 수집 및 여성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인도하는 역할)을 계속해야 했고, 나중에 7년형을 선고받는다.